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마저 일제의 강요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는 민족적 위기를 만나면서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가장 어두운 터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이 기대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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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마저 일제의 강요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는 민족적 위기를 만나면서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가장 어두운 터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이 기대하고 있...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마저 일제의 강요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는 민족적 위기를 만나면서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가장 어두운 터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이 기대하고 있던 미국은 자신들이 바라는 필리핀 지배에 대해 일본이 눈감아 주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눈감아 주었다. 한국 주재 미국 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이 이와 같은 미국의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자, 미국은 아예 그를 본국으로 강제 소환했다. 또 고종의 특사로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려던 헐버트(Homer Hulbert)의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일본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있었다. 게다가 조선 정부는 부패의 늪에 허덕이고 있어서 어디를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기독교인들은 이 민족의 미래를 깊이 고민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을 가슴으로 끌어안은 것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이든 조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100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하자는 소위 '백만인 구령 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