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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 뽑힌 자들의 放浪地!’ : 조선인에게 비쳐진 滿洲國 社會像 = Nomad’s Land: Koreans’ Perceived Social Image of Manchuk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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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73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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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modern Korean history, Manchukuo really occupied any position and role in the colonial Manchukuo? The domestic academic has estimated that Manchukuo mitigated economic contradictions of the Chosun by the immigration policy in the 1930s. Therefore, the Manchurian immigration of Koreans has been evaluated positively. But the vast majority of Koreans did not settle in the Manchukuo. They were suffering from poverty, disease, discrimination. They were living as like the wanderers. Although Manchukuo has absorbed Korea’s surplus population, but she did not solve their lives. Manchukuo also did not relieve the contradiction of the colonial Chosun. However, after the fall of the Manchukuo,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ominated Manchuria and carried out land reform. In the wake of it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could be a stable living.
      Rather, Manchukuo intensified the ethnic conflict of Domestic as well as of between Manchukuo and Chosun. As a result, immigrant Koreans suffered the confusion of identity as well as poverty. Their painful immigrant experience in Manchukuo had a major impact in the class conflict and division of the peninsula. Manchukuo was not the rich hinterland for the colonial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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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modern Korean history, Manchukuo really occupied any position and role in the colonial Manchukuo? The domestic academic has estimated that Manchukuo mitigated economic contradictions of the Chosun by the immigration policy in the 1930s. Therefore, ...

      In modern Korean history, Manchukuo really occupied any position and role in the colonial Manchukuo? The domestic academic has estimated that Manchukuo mitigated economic contradictions of the Chosun by the immigration policy in the 1930s. Therefore, the Manchurian immigration of Koreans has been evaluated positively. But the vast majority of Koreans did not settle in the Manchukuo. They were suffering from poverty, disease, discrimination. They were living as like the wanderers. Although Manchukuo has absorbed Korea’s surplus population, but she did not solve their lives. Manchukuo also did not relieve the contradiction of the colonial Chosun. However, after the fall of the Manchukuo,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ominated Manchuria and carried out land reform. In the wake of it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could be a stable living.
      Rather, Manchukuo intensified the ethnic conflict of Domestic as well as of between Manchukuo and Chosun. As a result, immigrant Koreans suffered the confusion of identity as well as poverty. Their painful immigrant experience in Manchukuo had a major impact in the class conflict and division of the peninsula. Manchukuo was not the rich hinterland for the colonial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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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과연 만주국은 한국 근대사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해왔는가?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에서 한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이와 관련해서 국내학계에서는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의 모순, 특히 경제적 모순을 완화시켜준 배후지로 평가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1930년대 일본 식민당국이 추진한 조선인의 만주이민정책(집단이민, 집합이민, 분산이민 등)은 식민지 조선 및 일본 본국의 경제적 모순을 완화시켜준 대표적인 사례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만주국으로 이민한 조선인들은 벼농사 재배를 중심으로 만주국에서 생활터전을 잡았다고 하여, 조선인의 만주이민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 조선인들은 만주국에 안착하지 못하고 가난과 추위,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밥벌이를 찾아 농촌과 광산, 도시 등을 떠돌면서 일정한 직업 없이 소작농ㆍ머슴ㆍ날품팔이ㆍ노동자ㆍ잡일 등을 하면서 유랑자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록 만주국이 조선의 과잉인구를 흡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난을 해결해주거나 안정적인 삶을 마련해주지도 못했다. 만주국은 조선의 모순을 완화시켜준 ‘풍요로운 배후지’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인 이민자들을 안착시키고 삶의 안정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계기는 해방 후 중국 공산당의 만주 지배와 그에 수반된 토지개혁이었다.
      만주국은 조선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소시켜준 돌파구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만주국 구성원 상호간의 민족모순뿐만 아니라 조선과 만주 사이의 지정학적 모순들도 중첩시키고 증폭시켜 결과적으로 조선인 이민자들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킨 ‘荊棘의 땅’이었다. 만주국에서의 조선인 이민자들이 겪은 아픈 기억과 고통스러운 이민체험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사회적 정서로 자리 잡으면서 한반도에서의 계급대립과 분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다수 조선인 이민자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만주국은, 식민지 조선의 모순을 떠안은 ‘은혜로운 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만주국은 한반도의 ‘계급대립과 민족분단을 가속화시킨 촉매제의 源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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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만주국은 한국 근대사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해왔는가?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에서 한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이와 관련해서 국내학계에서는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의 모순, 특히 경제...

      과연 만주국은 한국 근대사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해왔는가?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에서 한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이와 관련해서 국내학계에서는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의 모순, 특히 경제적 모순을 완화시켜준 배후지로 평가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1930년대 일본 식민당국이 추진한 조선인의 만주이민정책(집단이민, 집합이민, 분산이민 등)은 식민지 조선 및 일본 본국의 경제적 모순을 완화시켜준 대표적인 사례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만주국으로 이민한 조선인들은 벼농사 재배를 중심으로 만주국에서 생활터전을 잡았다고 하여, 조선인의 만주이민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 조선인들은 만주국에 안착하지 못하고 가난과 추위,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밥벌이를 찾아 농촌과 광산, 도시 등을 떠돌면서 일정한 직업 없이 소작농ㆍ머슴ㆍ날품팔이ㆍ노동자ㆍ잡일 등을 하면서 유랑자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록 만주국이 조선의 과잉인구를 흡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난을 해결해주거나 안정적인 삶을 마련해주지도 못했다. 만주국은 조선의 모순을 완화시켜준 ‘풍요로운 배후지’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인 이민자들을 안착시키고 삶의 안정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계기는 해방 후 중국 공산당의 만주 지배와 그에 수반된 토지개혁이었다.
      만주국은 조선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소시켜준 돌파구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만주국 구성원 상호간의 민족모순뿐만 아니라 조선과 만주 사이의 지정학적 모순들도 중첩시키고 증폭시켜 결과적으로 조선인 이민자들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킨 ‘荊棘의 땅’이었다. 만주국에서의 조선인 이민자들이 겪은 아픈 기억과 고통스러운 이민체험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사회적 정서로 자리 잡으면서 한반도에서의 계급대립과 분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다수 조선인 이민자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만주국은, 식민지 조선의 모순을 떠안은 ‘은혜로운 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만주국은 한반도의 ‘계급대립과 민족분단을 가속화시킨 촉매제의 源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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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윤휘탁, "「만주국」 상업사회의 내적 구조와 민족적 특징" 동양사학회 (106) : 291-324, 2009

      2 "兩地의 移民會社 一元化가 極必要"

      3 "不正業者 九十戶 錦縣農場에 移送"

      4 중국조선족청년학회, "중국조선족 이민실록" 연변인민출판사 1992

      5 김영, "중국 요녕성의 벼농사와 조선인 이민사회, 1875∼1931" 한국학연구소 (21) : 71-98, 2009

      6 박창욱, "조선족 중국이주사 연구" (겨울) : 1991

      7 "조선일보 1933년 12월 20일"

      8 김기훈, "일제하 ‘滿洲國’의 移民 政策 硏究 試論" 18 : 2002

      9 金基勳, "일제의 조선인 만주이주정책 논쟁: 1932~1934" 20 : 1998

      10 이해영, "일제시기 간도(間島) 이주와 그 형상화의 두 양상-안수길의『북간도』와 리근전의『고난의 년대』-" 한국학연구소 (21) : 7-32, 2009

      1 윤휘탁, "「만주국」 상업사회의 내적 구조와 민족적 특징" 동양사학회 (106) : 291-324, 2009

      2 "兩地의 移民會社 一元化가 極必要"

      3 "不正業者 九十戶 錦縣農場에 移送"

      4 중국조선족청년학회, "중국조선족 이민실록" 연변인민출판사 1992

      5 김영, "중국 요녕성의 벼농사와 조선인 이민사회, 1875∼1931" 한국학연구소 (21) : 71-98, 2009

      6 박창욱, "조선족 중국이주사 연구" (겨울) : 1991

      7 "조선일보 1933년 12월 20일"

      8 김기훈, "일제하 ‘滿洲國’의 移民 政策 硏究 試論" 18 : 2002

      9 金基勳, "일제의 조선인 만주이주정책 논쟁: 1932~1934" 20 : 1998

      10 이해영, "일제시기 간도(間島) 이주와 그 형상화의 두 양상-안수길의『북간도』와 리근전의『고난의 년대』-" 한국학연구소 (21) : 7-32, 2009

      11 이훈구, "연재물 제32회"

      12 홍종필, "만주(중국동북지방) 조선인이민의 전개과정 소고" 5 (5): 1993

      13 고승제, "만주 농업이민의 사회사적 분석" 10 : 1970

      14 윤휘탁, "근대 조선인의 만주농촌체험과 민족인식 -조선족의 이민체험 구술사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64) : 277-326, 2010

      15 고승제, "간도이민사의 사회경제사적 분석" 5 : 1968

      16 高見成, "鮮滿拓植株式會社, 滿鮮拓植株式會社 五年史" 1941

      17 "集團移民政策과 竝行해 自由分散移民을 獎勵"

      18 김기훈, "關東軍의 入滿 朝鮮人 ‘放任’政策 형성과정, 1932~1933" 46 : 1994

      19 "間島僻地尙不安 萬餘名避難民收容"

      20 "間島,東邊道一帶에 明年度에 四萬名 移民"

      21 "開拓部落醫療問題(社說)"

      22 "開拓民斡旋에萬全을……"

      23 "通化省가는 移民 六百戶, 三千名輸送"

      24 金穎, "近代 滿洲 벼농사 발달과 移住 朝鮮人" 국학자료원 2004

      25 "被檢된 不正業者 四千餘名에 正業斡旋"

      26 "自由,集團移民을 滿洲서 八千戶 募集"

      27 "耕地購入이 極難코 旅費周旋難이 原因"

      28 "羅子溝 移民先發隊 二百戶 輸送을 開始"

      29 國務院總務廳統計處, "第二次臨時人口調査報告書 總括編(後半), In 外地國勢調査報告 第二輯: 滿洲國國務院 國勢調査報告 第五冊"

      30 滿洲國國務院總務廳統計處, "第一次臨時人口調査報告書(都邑編)(第二卷 哈爾濱特別市, 外地國勢調査報告 第二輯: 滿洲國國務院 國勢調査報告 第二冊)" 1938

      31 滿洲國國務院總務廳統計處, "第一次臨時人口調査報告書(都邑編)(第三卷 奉天市)" 1938

      32 滿洲國國務院總務廳統計處, "第一次臨時人口調査報告書(都邑編)(第一卷 新京特別市)" 1937

      33 "移民機關 斡旋으로 明年 五千戶 移住"

      34 鎌田澤一郞, "移民問題の重大性" 81-, 1935

      35 "移住證업는 農民 渡滿을 絶對不許"

      36 姜愛林, "略論解放戰爭時期我黨的土地政策" 2 (2): 2001

      37 "災餘의 四千戶農民 今年作農이 漠然"

      38 "滿鮮日報 1940년 1월 11일"

      39 滿洲勞工協會, "滿洲勞動年鑑(康德七年版)" 嚴松堂書店 1941

      40 李勳求, "滿洲와 朝鮮人" 平壤崇實專門學校經濟學硏究室 1932

      41 金炯元, "滿洲가는 길에(오)--鴨綠江! 내사랑 密輸로 버티는 東西의 兩都市"

      42 "滿洲行移民列車"

      43 "滿洲自由移民에 對해 條件緩和를 講究"

      44 滿蒙資料協會, "滿洲紳士錄(제3판)" 1940

      45 "滿洲移住朝鮮農民 每年一萬戶計劃"

      46 홍종필, "滿洲朝鮮人農業移民의 經濟狀況에 對하여" 11 : 1994

      47 滿洲農學會, "滿洲手稻作の硏究" 1943

      48 滿洲國通信社, "滿洲年鑑" 1940

      49 滿洲帝國民政部, "滿洲帝國民政部統計年報" 同民政部 1936

      50 滿洲國國務院總務廳, "滿洲國官吏錄" 同總務廳 1936

      51 滿洲國史編纂刊行會, "滿洲國史(各論)" 滿蒙同胞援護會 1971

      52 "滿洲人警官自警團 移住農民을 逐出"

      53 滿洲帝國民政部, "滿洲人口統計(民族別)"

      54 "滿洲事變에 避難한 歸國者들로부터 移民"

      55 朝鮮總督府, "滿洲と朝鮮" 1931

      56 洪鍾佖, "滿洲(中國東北地方) 朝鮮人移民의 展開過程 小考" (5) : 1993

      57 依田憙家, "滿州にあける朝鮮人の移民, In 日本帝國主義下の滿州移民" 龍溪書舍 1970

      58 東亞勸業株式會社, "河東,營口, 鐵嶺, 綏化 安全農村建設の經過竝に現狀" 1934

      59 "歸還同胞十五萬中 七八割은 再次渡滿"

      60 "歸還同胞十五萬中 七八割은 再次渡滿"

      61 "武裝團出沒甚하야 間島同胞避難歸國"

      62 開拓總局招墾處, "朝鮮開拓入植統計" 1944

      63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施政年報" 1941

      64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施政三十年史" 1940

      65 鎌田澤一郞, "朝鮮人移民問題の重大性" 1935

      66 "朝鮮人 不正業者 正業에로 轉換"

      67 朝鮮總督府, "朝鮮の經濟事情" 1933

      68 "明年에 萬戶移民"

      69 "日本人은 朝鮮移民 朝鮮人은 滿洲移民"

      70 김윤미, "日帝의 ‘滿洲開拓’ 政策과 朝鮮人 動員" 한일민족문제학회 (17) : 5-50, 2009

      71 김윤미, "日帝의 ‘滿洲開拓’ 政策과 朝鮮人 動員" 한일민족문제학회 (17) : 5-50, 2009

      72 尹輝鐸, "日帝下 ‘滿洲國’ 硏究--抗日武裝鬪爭과 治安肅正工作-" 一潮閣 1996

      73 趙興元, "日僞統治與朝民向中國東北的遷徙" 5 (5): 2004

      74 "故土를 등진 流離民의 哀歡秘帖"

      75 "故土를 등진 流離民의 哀歡秘帖"

      76 김윤미, "戰時體制期 朝鮮人 ‘滿洲開拓靑年義勇隊’에 관한 硏究" 한일민족문제학회 (18) : 147-195, 2010

      77 "慶南三百六十戶 北滿洲移民輸送完了"

      78 "慶北의 貧窮者 間島에 大量移民"

      79 金春善, "延邊地區朝鮮族社會的形成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001

      80 "安東縣市內에만 不正業者 二百二十戶--朝鮮人民會서 正業斡旋"

      81 "在滿六千不正業者 農業, 勞働者로 轉業"

      82 關東軍司令部, "在滿朝鮮人指導要綱(修正)竝鮮農取扱要綱ニ關スル件(1938.7. 29)"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 1938

      83 民政部, "在滿朝鮮人事情" 新京 1933

      84 洪鍾仁, "在滿,北中 朝鮮人問題--生活安定과 治安工作"

      85 洪鍾仁, "在滿,北中 朝鮮人問題--問題되는 그 印象은"

      86 洪鍾仁, "在滿, 北中 朝鮮人問題--責任이 큰 鮮滿拓殖"

      87 洪鍾仁, "在滿, 北中 朝鮮人問題--經濟的施設의 必要"

      88 洪鍾仁, "在滿, 北中 朝鮮人問題--國策遂行上 觀點은"

      89 "周家部落民四十戶 食糧難으로 當局에 陳情"

      90 "同胞의 善處를 要望 信用樹立이 先務"

      91 "南朝鮮各地서 移民部隊出發"

      92 "北滿의 新天地로 千餘移民出發"

      93 "北安省開拓民先遣隊活動"

      94 윤휘탁, "侵略과 抵抗의 사이에서:日·中 갈등의 틈바귀에 낀 在滿朝鮮人" 고려사학회 (19) : 299-326, 2005

      95 宮川善造, "人口統計より見たる滿洲國の緣族複合狀態" 滿洲事情案內所 1941

      96 "不毛濕地로 顯露된 積雪期 鑑定農地"

      97 孫春日, "‘滿洲國’에서 日帝의 對朝鮮人 新規入植政策과 朝鮮人開拓民의 入植實態--中日戰爭 時期를 중심으로-" 21 : 1999

      98 Kim Ki-hoon, "Japanese Policy For Korean Rural Immigration To Manchukuo" 하와이대학 1932

      99 김기훈, "1930년대 일제의 조선인 만주 이주 정책" 6 : 1998

      100 劉願淑, "1930년대 日帝의 조선인 만주 이민정책 연구" 19 : 1995

      101 劉願淑, "1930년대 日帝의 조선인 만주 이민정책 연구" 19 : 1995

      102 박인철, "1930~1940年代における朝鮮人の「満州」への移住に関する研究* - 全羅北道地域を事例として -" 한일민족문제학회 17 (17): 51-83, 2009

      103 김재훈, "'제도’로 본 한국인의 만주지역 정착" 6 : 2003

      104 윤휘탁, "'滿洲國’의 2等國(公)民, 그 實像과 虛像" 169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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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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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1 0.81 0.7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6 1.616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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