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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工員名票』을 통해 본 戰時體制期 舊日本陸軍造兵廠의 조선인 군속동원 = A Study of the Mobilization of Chosenese Civilian Workers in Military to Japanese Army Arsenal in the Wartime Mobilization : An Analysis of the List of the Factory-Hand C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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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으로 진행되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을 통해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전역의 확대는 일제의 전쟁 수행능력을 초과하는 것이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중일전쟁 시기부터 진행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을 보다 확대ㆍ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연인원 약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노무자, 군인ㆍ군속, 위안부 등의 형태로 일제의 전쟁 수행에 투입되었다. 식민통치 말기 자행된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만적인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과, 피해당사자의 삶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삶을 굴절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본고에서는 일제의 강제동원에 대한 실태 파악의 일환으로써 1990년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인계한 명부들 중 일부(『工員名票』)에 대한 분석을 실시하였다. 현재 약 48만 명 분에 해당되는 명부 자료들이 존재하고, 이 자료들은 동원 주체가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강제동원의 전반적인 실태 및 현황을 파악하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 자료에 대한 분석은 전무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들 자료 중 『工員名票』 내의 「工員名票」와 「工員名簿」의 분석을 통하여 구일본육군조병창의 조선인 군속工員 동원의 현황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육군조병창은 일본 육군에서 사용되는 각종 병기를 생산하는 기관으로서, 이 자료들에 수록된 일본육군조병창은 사가미相模육군조병창과 나고야名古屋육군조병창 및 그 산하의 다카기鷹來제조소 등이다. 사가미육군조병창 명표는 약 552명의 조선인을 등재하고 있으며, 1944년 11월 18일과 1945년 3월 6일에 각각 충북과 경북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동원하는 양상이 파악된다. 한편으로 여성노무동원(조선여자근로정신대)이 군속동원으로 전환되는 양상도 파악된다.
      나고야육군조병창의 경우 ‘명부’의 형태로 다카기제조소는 ‘명표’의 형태로 등재되어 있다. 나고야육군조병창 명부의 경우 125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원본이 아닌 가공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들 역시 1945년 3월 15일 경기도 김포군과 안성군에서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총 79명이 등재된 다카기 제조소의 경우도 1945년 3월 11일 경기도 수원군에서 집단적으로 동원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사가미육군조병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성노무동원의 군속동원 전환 양상도 확인된다.
      이들은 육군조병창 내에서 仕上工, 工手, 鍛工, 鑄工, 旋工, 運搬工, 筆生, 縫工, 壓伸工, 雜種工 등의 다양한 직종에 투입되었다. 현재 이들이 투입된 부서의 성격은 자료상의 한계로 인하여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한편 이 「工員名票」와 「工員名簿」에 등재된 인원이 각각의 조병창 및 제조소로 동원된 조선인 전체를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일본측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조선인 수가 이 자료들에 수록된 조선인 수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제공한 자료들이 불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추가적인 자료의 확보가 요구되어진다.
      본고에서 수행한 분석은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제공한 자료에 수록된 전체 48만명 분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이 자료들에 대한 DB는 국가기록원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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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으로 진행되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을 통해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전역의 확대는 일제의 전쟁 수행능력...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으로 진행되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을 통해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전역의 확대는 일제의 전쟁 수행능력을 초과하는 것이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중일전쟁 시기부터 진행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을 보다 확대ㆍ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연인원 약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노무자, 군인ㆍ군속, 위안부 등의 형태로 일제의 전쟁 수행에 투입되었다. 식민통치 말기 자행된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만적인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과, 피해당사자의 삶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삶을 굴절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본고에서는 일제의 강제동원에 대한 실태 파악의 일환으로써 1990년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인계한 명부들 중 일부(『工員名票』)에 대한 분석을 실시하였다. 현재 약 48만 명 분에 해당되는 명부 자료들이 존재하고, 이 자료들은 동원 주체가 작성하였다는 점에서 강제동원의 전반적인 실태 및 현황을 파악하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 자료에 대한 분석은 전무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들 자료 중 『工員名票』 내의 「工員名票」와 「工員名簿」의 분석을 통하여 구일본육군조병창의 조선인 군속工員 동원의 현황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육군조병창은 일본 육군에서 사용되는 각종 병기를 생산하는 기관으로서, 이 자료들에 수록된 일본육군조병창은 사가미相模육군조병창과 나고야名古屋육군조병창 및 그 산하의 다카기鷹來제조소 등이다. 사가미육군조병창 명표는 약 552명의 조선인을 등재하고 있으며, 1944년 11월 18일과 1945년 3월 6일에 각각 충북과 경북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동원하는 양상이 파악된다. 한편으로 여성노무동원(조선여자근로정신대)이 군속동원으로 전환되는 양상도 파악된다.
      나고야육군조병창의 경우 ‘명부’의 형태로 다카기제조소는 ‘명표’의 형태로 등재되어 있다. 나고야육군조병창 명부의 경우 125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원본이 아닌 가공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들 역시 1945년 3월 15일 경기도 김포군과 안성군에서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총 79명이 등재된 다카기 제조소의 경우도 1945년 3월 11일 경기도 수원군에서 집단적으로 동원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사가미육군조병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성노무동원의 군속동원 전환 양상도 확인된다.
      이들은 육군조병창 내에서 仕上工, 工手, 鍛工, 鑄工, 旋工, 運搬工, 筆生, 縫工, 壓伸工, 雜種工 등의 다양한 직종에 투입되었다. 현재 이들이 투입된 부서의 성격은 자료상의 한계로 인하여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는다.
      한편 이 「工員名票」와 「工員名簿」에 등재된 인원이 각각의 조병창 및 제조소로 동원된 조선인 전체를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일본측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조선인 수가 이 자료들에 수록된 조선인 수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제공한 자료들이 불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추가적인 자료의 확보가 요구되어진다.
      본고에서 수행한 분석은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제공한 자료에 수록된 전체 48만명 분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이 자료들에 대한 DB는 국가기록원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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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ollowing aggressive wars, such as the Manchurian Incident(1931) and the Sino-Japanese War(1937), the Empire of Japan’s invasion has been expanded on the Asian and Pacific area the through the Attack on Pearl Harbor in 1941. The expansion of warfare went over the Japan’s capacity to do battle, so they reinforced and enlarged the Mobilization on the Chosense which has been going from the Sino-Japanese War. About 2million Chosenese people went into the Japanese imperial wars, as soldiers, laborers, civilian workers in military(軍屬) and comfort women(慰安婦). The Japanese mobilization on the Chosenese people destroyed the life of victims and their family, and left the Korean society indelible wounds. It is also important that it shows us the deceitfulness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1990’s, the Japanese government handed over the documents which contain the 480 thousands person’s list as a copy. It is very important to analyze these documents to survey the Japanese Mobilization, because it made by Japanese themselves. However, there are few studies on this subject.
      As a part of actual condition survey of Imperial Japan’s forced mobilization, this article analyzes the List of Factory-hand Card(『工員名票』). Especially, it investigates the aspects of the Mobilization of Chosenese Civilian Workers in Military(軍屬) in the Japanese Army Arsenal. Japanese Army Arsenal(日本陸軍造兵廠) was a place where various arms and ammunition were made for the Japanese Army and made up of several arsenals(造兵廠) and factories(製造所). Among them, Sagami Army Arsenal(相模陸軍造兵廠) and the Nagoya Army Arsenal(名古屋陸軍造兵廠) which conatained the Takaki Factory(鷹來製造所) have recorded mobilized Chosenese in the List of Factory-hand Card(『工員名票』).
      In the Card of Sagami Arsenal(相模造兵廠名票), 552 Chosenese are registered. They were mobilized colletively at the Chungcheongbuk-do(忠淸北道) on 18th of November in 1944 and the Gyeongsangbuk-do(慶尙北道) on 6th of May in 1945. It was typical mobilize a mass of people at the certain region and the certain time on the Japanese Mobilization. Also it shows that the some famale laborers have been switched to Civilian Workers in Military(軍屬). There are 125 registered Chosenese in the List of Nagoya Arsenal(名古屋造兵廠名簿). They were mobilized colletively at the Gyeonggi-do(京畿道 安城郡, 金浦郡) on 15th of May in 1945. The List of Nagoya Arsenal looks manipulated, so there is a possibility of existence of the original documents. These kinds of aspects were also shown up in the card of Takaki Factory(鷹來製造所名票).
      Meanwhile, it is believed that there are more mobilized Chosenese than those in the List of the Factory-Hand Card(『工員名票』), because there are other documents which were made by Japanese Army Arsenal, showing that more Chosenese people were mobilized on that facilities. It means that the materials which were given by the Japanese government were incomplete.
      This article analyzes only 700s people who were mobilized to the Japanese Army Arsenal. It is only a tip of the iceberg. For the survey a big picture of Japanese Mobilization, it is required to enter the whole data of 480 thousands Chosenese people which were given by the Japanese government in 19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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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llowing aggressive wars, such as the Manchurian Incident(1931) and the Sino-Japanese War(1937), the Empire of Japan’s invasion has been expanded on the Asian and Pacific area the through the Attack on Pearl Harbor in 1941. The expansion of warfare...

      Following aggressive wars, such as the Manchurian Incident(1931) and the Sino-Japanese War(1937), the Empire of Japan’s invasion has been expanded on the Asian and Pacific area the through the Attack on Pearl Harbor in 1941. The expansion of warfare went over the Japan’s capacity to do battle, so they reinforced and enlarged the Mobilization on the Chosense which has been going from the Sino-Japanese War. About 2million Chosenese people went into the Japanese imperial wars, as soldiers, laborers, civilian workers in military(軍屬) and comfort women(慰安婦). The Japanese mobilization on the Chosenese people destroyed the life of victims and their family, and left the Korean society indelible wounds. It is also important that it shows us the deceitfulness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1990’s, the Japanese government handed over the documents which contain the 480 thousands person’s list as a copy. It is very important to analyze these documents to survey the Japanese Mobilization, because it made by Japanese themselves. However, there are few studies on this subject.
      As a part of actual condition survey of Imperial Japan’s forced mobilization, this article analyzes the List of Factory-hand Card(『工員名票』). Especially, it investigates the aspects of the Mobilization of Chosenese Civilian Workers in Military(軍屬) in the Japanese Army Arsenal. Japanese Army Arsenal(日本陸軍造兵廠) was a place where various arms and ammunition were made for the Japanese Army and made up of several arsenals(造兵廠) and factories(製造所). Among them, Sagami Army Arsenal(相模陸軍造兵廠) and the Nagoya Army Arsenal(名古屋陸軍造兵廠) which conatained the Takaki Factory(鷹來製造所) have recorded mobilized Chosenese in the List of Factory-hand Card(『工員名票』).
      In the Card of Sagami Arsenal(相模造兵廠名票), 552 Chosenese are registered. They were mobilized colletively at the Chungcheongbuk-do(忠淸北道) on 18th of November in 1944 and the Gyeongsangbuk-do(慶尙北道) on 6th of May in 1945. It was typical mobilize a mass of people at the certain region and the certain time on the Japanese Mobilization. Also it shows that the some famale laborers have been switched to Civilian Workers in Military(軍屬). There are 125 registered Chosenese in the List of Nagoya Arsenal(名古屋造兵廠名簿). They were mobilized colletively at the Gyeonggi-do(京畿道 安城郡, 金浦郡) on 15th of May in 1945. The List of Nagoya Arsenal looks manipulated, so there is a possibility of existence of the original documents. These kinds of aspects were also shown up in the card of Takaki Factory(鷹來製造所名票).
      Meanwhile, it is believed that there are more mobilized Chosenese than those in the List of the Factory-Hand Card(『工員名票』), because there are other documents which were made by Japanese Army Arsenal, showing that more Chosenese people were mobilized on that facilities. It means that the materials which were given by the Japanese government were incomplete.
      This article analyzes only 700s people who were mobilized to the Japanese Army Arsenal. It is only a tip of the iceberg. For the survey a big picture of Japanese Mobilization, it is required to enter the whole data of 480 thousands Chosenese people which were given by the Japanese government in 19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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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山崎志郞, "陸軍造兵廠と軍需工業動員" 62 (62): 1994

      2 심재욱, "전시체제기 조선인 해군군속동원 실태-「舊海軍軍屬身上調査表」의 동원지 사례 분석을 중심으로" 2010

      3 노영종, "일제하 강제연행자 현황에 대한 검토 : 정부기록보존소 소장 강제연행자명부를 중심으로" 정부기록보존소 (16) : 2003

      4 鄭惠瓊, "일제 말기 조선인 군노무자의 실태 및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 : 3-92, 2003

      5 정혜경, "국민징용령과 조선인 인력동원의 성격 : 노무자와 군속의 틀을 넘어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6) : 189-238, 2008

      6 q山崎志郞, "軍需工業における勞務動員の實施過程" 62 (62): 1993

      7 座間美都治, "相模原の歴史" 1974

      8 표영수, "朝鮮人 軍人·軍屬 關聯 ‘供託書’·‘供託明細書’ 基礎分析" 한일민족문제학회 (14) : 293-330, 2008

      9 太平洋戰爭硏究會, "日本陸軍がよくわかる事典-その組織, 機關から兵器, 生活まで" PHP硏究所 2002

      10 原剛, "日本陸海軍事典 上 コンパクト版" 2003

      1 山崎志郞, "陸軍造兵廠と軍需工業動員" 62 (62): 1994

      2 심재욱, "전시체제기 조선인 해군군속동원 실태-「舊海軍軍屬身上調査表」의 동원지 사례 분석을 중심으로" 2010

      3 노영종, "일제하 강제연행자 현황에 대한 검토 : 정부기록보존소 소장 강제연행자명부를 중심으로" 정부기록보존소 (16) : 2003

      4 鄭惠瓊, "일제 말기 조선인 군노무자의 실태 및 귀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 : 3-92, 2003

      5 정혜경, "국민징용령과 조선인 인력동원의 성격 : 노무자와 군속의 틀을 넘어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6) : 189-238, 2008

      6 q山崎志郞, "軍需工業における勞務動員の實施過程" 62 (62): 1993

      7 座間美都治, "相模原の歴史" 1974

      8 표영수, "朝鮮人 軍人·軍屬 關聯 ‘供託書’·‘供託明細書’ 基礎分析" 한일민족문제학회 (14) : 293-330, 2008

      9 太平洋戰爭硏究會, "日本陸軍がよくわかる事典-その組織, 機關から兵器, 生活まで" PHP硏究所 2002

      10 原剛, "日本陸海軍事典 上 コンパクト版" 2003

      11 防衛廳防衛硏修所 戰史編纂室, "戰史叢書"

      12 "工員名票"

      13 鈴木光男, "學徒勤勞動員の日々" 2010

      14 정혜경, "國內 所藏 戰時體制期 朝鮮人 人的動員 關連 名簿資料의 實態 및 活用方案" 한일민족문제학회 (16) : 81-126, 2009

      15 名古屋陸軍造兵廠史編纂委員會, "名古屋陸軍造兵廠史ㆍ陸軍航空工廠史" 1986

      16 Kit C. Carter, "U.S.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Combat Chronology 1941~1945"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1

      1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직권조사보고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2008

      18 大濱徹也, "(改訂版)帝國陸海軍事典" 同成社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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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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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1 0.81 0.7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6 1.616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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