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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1 島嶼文化 Vol.0 No.38
문화는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전남의 경우 서쪽으로는 영산강이, 동쪽으로는 섬진강,그 가운데 탐진강이 흘러 각각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전남의 서편인 영산강권은평야지대이며, 전남에서도 가장 넓은 농토를 지닌 곳으로 비교적 농요가 발달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영산강권(긴소리권)의 농요를 중심으로 그 전승양상과 음악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논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산강권의 논매는소리 주요 악곡은 ‘무삼삼장-마소리’의 두 악곡으로 보았다. 이가운데 영산강권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악곡은 마소리였으나, 마소리의 전체 분포권은 전북의 남부지역까지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무삼삼장은 무안, 함평, 나주에 집중되어 분포한다. 마소리의 분포권이 전북에 이르는 것은 영산강권의 북방한계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영산강권의 논매는소리는 시작할 때, 작업을 할 때, 마무리할 때의 시점에 따라 정해진 악곡과 가사를 노래하는 정형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상대적으로 전남의 다른 지역권인섬진강권이나 도서해안권에서는 이러한 정형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영산강권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레와 같은 조직에 의해 엄격한 규율과 질서 아래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영산강권의 문화권적 구도에 있어 핵심지역은 무안, 함평, 나주로 볼 수 있으며, 화순과 장성은 섬진강권인 산아지타령권과 접변하고 있고, 담양과 장성, 영광, 화순은 전북으로부터 이어지는 방아타령권과, 영암은 도서해안권인 절로소리권과 접변하고 있어 다양한 논매는소리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방아타령권에서는 다양한 사당패소리들이 전승되고 있어서 특별한 문화권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무삼삼장은 음악적으로도 시조와 가깝다. 또한 마소리는 매우 넓은 음역으로 노래하며 정해진 자리에 추임새를 넣고, 노래 가사로 사당패소리와 육자배기 등의 가사를 차용한다. 그리고 가창자들은 마소리를 부르며 ‘노래’라는 인식을 통해 격조있는 곡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무삼삼장과 마소리 등 이 지역의 논매는소리에서는 예술성을 추구하려는 가창자들의 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논매는소리의 존재양상을 통해 영산강권의 문화권적 실체와 특성을 살펴본 결과, 영산강권은 여러 문화권과의 접변을 하고 있으나 영산강권만의 독특한 지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넓은 농토를 바탕으로 형성된 두레문화와 그 규율과 엄정성을 반영하고 있는 음악적 틀과 격식, 그리고 시조와 예술음악을 지향하는 상층문화 지향성 등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11 島嶼文化 Vol.0 No.38
<P> 본고는 영산강의 생활문호를 논의의 기반으로 삼아 그 속에 형성되어 온 인문지리적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부침을 통해 형성되어 온 영산강은 현재 생태환경의 측면에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본고에서 고찰하는 인문지리적 키워드로 이를 극복하는 돌파구를 마련해볼 수 있을 것이다.</P><P> 영산강의 어로와 농경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 중에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들노래와 농경생활, 광주시 서장 만드리와 농경생활, 나주 동강면 옥정리의 어로생활,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의 옹기생활,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들소리와 농경생활,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 어로생활, 무안군 옥암리 초당산 반농반어생활, 염암군 나불도 어로생활, 목포시 하당 갓바위마을 어로생활, 영암군 용당마을 어로생활 등 현지조사를 통해 농경과 어로생활의 중첩을 살펴보았다. 또 이것이 영산강의 물류를 따라 장시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남도문화권역의 민속음악이 발전해가는 토대가 되었음을 살폈다.</P><P> 어로와 농경을 기반으로 한 영산강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첫째 ‘갱번’을 들었다. ‘갱번’은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바다를 호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반대로 영산강 중, 상류지역에서도 강을 바다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따라서 강과 바다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인식 즉, ‘갱번’이라는 호명방식을 통해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고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 번째는 매향비이다. 영산강 주변과 서남해 각 지역에 있는 매향비가 강과 바다의 결절지에 존재한다고 하는 점을 들어 ‘갱번’의 인식에 대한 논거를 보충하였다. 세 번째는 고려 이후 존속되었던 영암군 남해포의 위치다. 삼대 해신사의 하나인 남해포는 강원도의 양양, 황해도의 풍천과 더불어 각각 동서남쪽의 바다의 접경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남해포 이하 영산강은 바다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네 번째로 영산강 조수간만의 경계다.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영산강 상류까지 조수감조구간이 확장된다는 점을 논거하였다. 다섯 번째로 물길에 따라 구획되었던 전통적인 행정구역을 들어 ‘갱번’의 논리를 보강하였다.</P><P> 이를 통해 영산강 문화권역을 ‘갱번’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홍어삼합론’으로 이론화해보았다. 홍어가 연안다도해인 흑산도에서 출발하여 영산강을 거쳐 내륙인 나주 영산포에 이르는 길이 바로 남도문화의 삭힘의 길이라는 것이고 이를 홍어삼합론이라는 문화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질뢰즈의 영토화 개념 즉 리토르넬로를 인용하여 홍어 판매로가 영산강 뱃길의 물류기술이듯, 바다문화가 내륙문화로 이어지는 ‘길’에서 만들어진 문화기술이 ‘삭힘’의 기술이고 이것이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독특한 ‘시김새(삭히다의 명사형)’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바다와 강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 즉 ‘갱번’권역을 미학적 준거로 삼는 공간의 삼합(연안다도해 → 영산강 → 내륙)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적으로 매우 막중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영산강의 문제를 ‘갱번’의 공간인식으로 재구성하여 남도문화에 대한 재영토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다.</P>
영산강의 서사적 수용양상과 문학적 의미: 문순태 『타오르는 강』의 장소정체성 구축을 중심으로
박일우 인문사회 21 2019 인문사회 21 Vol.10 No.5
문순태의 장편소설 『타오르는 강』을 영산강의 장소정체성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두려움’과 ‘한의 대물림’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소설 타오르는 강에 접근하였다. 먼저 새끼내 사람들의 새끼내(장소)의 지속과 순환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포착해내고 이것이 공간에서 장소로 이행하는 과정의 원동력임을 확인하였다. 또 소설 타오르는 강이 민중들의 한(恨)의 발현과 해소(해한 解恨)를 중요한 요소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산강과 새끼내에 반영된 양상, 대물림되는 한을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소설 타오르는 강은 영산강변 새끼내라는 공간을 지속과 순환 불가능성의 두려움으로 쌓은 기억들과 그것을 원천으로 하여 발현되는 한의 대물림 양상으로 한(恨)의 강, 낮은 강, 위안의 강 같은 영산강의 장소정체성을 구축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It is the purpose of this study to read Moon Soon-tae’s novel, Blazing River, in sight of looking at the place-identity of the Youngsan river. For this, I approach ‘fear’ and ‘han’s daemullim’ in two ways. First to capture fear of saekkine people’s about sustainability and noncirculation. It was confirmed that this is the driving force of the process of transition from space to place. In addition, the novel Blazing River suggests the expression and resolution of the people as an important factor. The patterns reflected in the Youngsan river and saekkine, and the extent of the succession were examined. As a result, the novel Blazing River has a space called Youngsan river memories accumulated with fear of continuity and noncirculation and manifested as a source, it can be said that it is building the place-identity of the Yeongsan river such as Han’s River, Low River, and River of Comfort in the way of the Han’s bleeding.
한말 두만강 지역의 유학자들-김노규(金魯奎)와 김정규(金鼎奎)를 중심으로-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연구 Vol.0 No.32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전통적 유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던 함경도 북단의 유교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앙 학계에서 栗谷 李珥와 尤菴 宋時烈에 의해 정립된 서인-노론 학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제자 鶴巖 崔愼과 農巖 金昌協 등이 이 지역에서 강학을 시작한 이래 그 문하에서 함경도 출신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鶴陰 金魯奎와 龍淵 金鼎奎 역시 송시열이 제시한 조선중화주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수’인 서구의 침략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중국인들과 뒤섞여 거주하며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의 협소한 시야에 갇혀있었던 전통적 중화주의의 폐쇄성을 일정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태생적 혈통 내지 지역보다는 유교문화에 대한 분발 여부가 화이분별의 주된 기준이라는 문화적 화이론의 기반 위에서,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함경도 역시 문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화이의 可變性을 재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이가 시대에 따라 지역적으로 순환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자신들이 거주하던 두만강 유역을 중화문명 부흥의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그 곳에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요컨대, 김노규와 김정규 같은 한말 함경도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두만강은 청과 조선, 중화와 이적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두만강 너머의 공간 또한 불우한 유랑의 땅이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인식되지도 않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일원 및 연변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중화세계의 건설,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20세기 초반 적지 않은 유학자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연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만들었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19世紀末期, 越過豆滿江移居間島的衆多朝鮮人中也包括了相當一部分的傳統儒教知識分子。尤其是最早遷居的咸鏡道北端的儒學者們, 他們基本上繼承了中央學系中栗谷李珥和尤菴宋時烈代表的西人-老論學脈。宋時烈的弟子鶴巖崔愼和農巖金昌協等在咸鏡道講學之後, 其門下開始正式培養咸鏡道的儒學者。19世紀末到20世紀初期, 咸鏡道的著名儒學者――鶴陰金魯奎和龍淵金鼎奎繼承了宋時烈的朝鮮中華主義思想, 并以此來認識他們所處的豆滿江地區的生活世界。 在遭受“禽獸”西歐侵略的時代背景下, 再加上與當地混居的中國人共同抗日的歷史經歷, 使他們從一定程度上克服了局限于韓半島狹小視野下的傳統中華主義的封閉性。他們不按天生的血統和地區來區分華夷, 而是以儒教文化的發展程度爲標準, 即以文化的華夷論爲本, 提出朝鮮不是僅有的中華文明繼承者, 咸鏡道也可以蛻變成文明中心的可能性。他們不僅重新確認了華夷的可變性, 還提出華夷隨時代變化在地區間循環的主張, 並且將他們所在的豆滿江流域視爲中華文明復興的新空間, 爲建設豆滿江的儒教理想社會而努力。 總而言之, 對金魯奎和金鼎奎等韓末咸鏡道的儒學者來說, 豆滿江並非淸朝和朝鮮, 中華和夷狄的分界線。而且, 將這片地區視作顛沛流離之地, 或獨立運動根據地的認識還未能成形。他們的夢想是以豆滿江下流的慶源爲中心, 在現今咸鏡北道一帶和延邊地區上建設起新的中華世界。正是在這種思想背景下, 20世紀初期有不少的儒學者跨越豆滿江而遷居延邊。
라인강은 누구의 강인가? : 뤼시앵 페브르의 독불 접경지역을 바라보는 시선
박용희(Yonghee Park) 한국독일사학회 2021 독일연구 Vol.- No.48
라인강은 스위스 중부의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북해로 흘러드는 긴 강이다. 그 강을 따라 산재한 국가들이 역사 속에서 영토와 경계를 둘러싼 많은갈등을 겪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의 대결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1차 대전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강과 인근지역을 둘러싸고 분쟁의 와중에 있었다. 당시는 전례없는 상흔을 남긴 전쟁 직후였고 또 국경선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런 대결의 시기에 양국의 지식인들, 그중에서도 역사학자들이 보여준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 영토를 둘러싼 분쟁에 전문가로 역사학자들이 개입하는 것은 드문 일이아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세계 도처의 분쟁지를 둘러싸고 역사학자들이소유권 주장을 위한 역사적 근거 마련에 나서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이 글이 다루는 1차 대전 이후에는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라인지방을 역사적 자국 영토로 바라보고 이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한 뤼시앵페브르는 그들과 달리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었다. 우선 그는 역사학자들의 정치적 참여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라인강을 둘러싼 양국 역사학자들의 대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또 그들의 라인강 인식이 대체로 편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라인강을 그 누구의 강도 아니라 “중부유럽의 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는 『라인강. 역사와 경제의 문제』이란 책을 통해 라인강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공존의역사를 밝히고자 했다. 사실 이런 그의 시도가 학술적 의미를 넘어 분쟁지를 둘러싼 양국간의 화해와 공존을 위한 모색이었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했다. 물론 그의 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책은 발간 후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또 곧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양국역사학자들의 편협한 인식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 있을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주장도 한계를 가진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평화와 화해, 공존을 부르짖은 선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프랑스 애국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적 지식인이었으며, 따라서 화해와 공존의 대상이어야 할 독일에 대해서는 결코 관대하지만은 않았다. 공존과 화해의 문제는 계속되는 고민으로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The Rhine River is a long river that originates from central Switzerland and flows into the North Sea. It can be assumed that there have been many conflicts over territories and boundaries in history along the river. Among them, the match between France and Germany is best known. In particular, after World War I, France and Germany were in the midst of serious disputes. It was right after the war, and the conflict over the border continued. This article focuses on the historians of both countries over the Rhine River and the border area during this confrontation. Historians often intervene in disputes over territories. Even today, historians often seek to lay historical grounds for claiming ownership over disputed areas around the world. Even after World War I, many French and German historians were looking for historical grounds to claim the Rhine region as their territory. However, unlike them, French historian Lucien Febvre was looking for a way to truly resolve the disputes over the Rhine River and nearby regions. First of all, he was critical of the political participation of historians. And he saw that most historians understand the history of the Rhine River too narrowly from their own national perspective, and as a result, they are in extreme conflict. Criticizing this attitude, he was arguing that the Rhine River is not a river in France or Germany, but a river in Central Europe. In a study dealing with the history of the Rhine River in the early 1930s, he tried to reveal the long history of coexistence of two nations surrounding the Rhine River. It should be said that his efforts were not simply academic, but a search for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between the two countries. Of course, his book cannot be said to have been successful. Since its publication, the book has not received much public attention. However, it can be highly appreciated that he tried to overcome the narrow perception of historians from both countries. Of course, from today s point of view, it can be said that his argument has limitations. Because he was showing both sides at the same time. First of all, he showed a cry for peace,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in the era of confrontation between nations. At the same time, however, he was a French patriot and liberal intellectual. Therefore, he did not hide his negative perception of his opponent Germany. Co-existence and reconciliation will inevitably remain a constant concern about how it can be possible.
이윤선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1 島嶼文化 Vol.0 No.38
본고는 영산강의 생활문화를 논의의 기반으로 삼아 그 속에 형성되어 온 인문지리적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부침을 통해 형성되어 온 영산강은 현재 생태환경의 측면에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본고에서 고찰하는 인문지리적 키워드로 이를극복하는 돌파구를 마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산강의 어로와 농경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 중에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들노래와 농경생활, 광주시 서창 만드리와 농경생활, 나주 동강면 옥정리의 어로생활,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의 옹기생활,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들소리와 농경생활,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 어로생활, 무안군 옥암리 초당산 반농반어생활, 영암군 나불도 어로생활, 목포시 하당 갓바위마을 어로생활, 영암군 용당마을 어로생활 등 현지조사를 통해 농경과 어로생활의 중첩을 살펴보았다. 또 이것이 영산강의 물류를 따라 장시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남도문화권역의 민속음악이 발전해가는 토대가 되었음을 살폈다. 어로와 농경을 기반으로 한 영산강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첫째 ‘갱번’을 들었다. ‘갱번’은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바다를 호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반대로 영산강 중,상류지역에서도 강을 바다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따라서 강과 바다를 크게 구분하지않는 인식 즉, ‘갱번’이라는 호명방식을 통해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고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 번째는 매향비이다. 영산강 주변과 서남해 각 지역에 있는 매향비가 강과 바다의결절지에 존재한다고 하는 점을 들어 ‘갱번’의 인식에 대한 논거를 보충하였다. 세 번째는 고려 이후 존속되었던 영암군 남해포의 위치다. 삼대 해신사의 하나인 남해포는 강원도의 양양,황해도의 풍천과 더불어 각각 동서남쪽의 바다의 접경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남해포 이하 영산강은 바다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네 번째로 영산강 조수간만의 경계다. 여러 가지 자료를통해 영산강 상류까지 조수감조구간이 확장된다는 점을 논거하였다. 다섯 번째로 물길에 따라 구획되었던 전통적인 행정구역을 들어 ‘갱번’의 논리를 보강하였다. 이를 통해 영산강 문화권역을 ‘갱번’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홍어삼합론’으로 이론화해보았다. 홍어가 연안다도해인 흑산도에서 출발하여 영산강을 거쳐 내륙인나주 영산포에 이르는 길이 바로 남도문화의 삭힘의 길이라는 것이고 이를 홍어삼합론이라는문화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질뢰즈의 영토화 개념 즉 리토르넬로를인용하여 홍어 판매로가 영산강 뱃길의 물류기술이듯, 바다문화가 내륙문화로 이어지는 ‘길’에서 만들어진 문화기술이 ‘삭힘’의 기술이고 이것이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독특한 ‘시김새(삭히다의 명사형)’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바다와 강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 즉 ‘갱번’권역을 미학적 준거로 삼는 공간의 삼합(연안다도해 → 영산강 → 내륙)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적으로 매우 막중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영산강의 문제를 ‘갱번’의 공간인식으로 재구성하여 남도문화에 대한 재영토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주관응력효과를 고려한 고강도강 X형 원형강관접합부의 수치해석 연구
김선후,이철호 한국강구조학회 2018 한국강구조학회 논문집 Vol.30 No.2
Internationally representative steel design standards have forbidden or limited the application of high-strength steels to tubular joints, partly because of concerns about their unique material characteristics such as high yield ratio. Most of design standards stipulate that for steels whose yield strengths exceed 355 or 360 MPa, the strength equations cannot be utilized or strength reduction factor below 1.0 should be multiplied. However, the mechanical background behind these limitations is not clear. Experimental testing of high-strength steel CHS (circular hollow section) X-joints recently conducted by the authors also clearly indicated that the current limitations might be unduly conservative. As a continuing work, extensive, test-validated numerical analyses were made to investigate the behavior of high-strength steel CHS X-joint under axial compression. Three steel grades covering ordinary to very high strength steels were considered in the analysis. Again it was found that the high strength penalty to the joint strength in current standards is too severe and needs to be relaxed. The high-strength steel joints under the effects of chord stress generally showed higher strength than the ordinary steel joints and their strengths were conservatively predicted by current standards. It is also emphasized that current format of the CHS X-joint strength equation does not reflect observed behavior and needs to be recast. 고강도 강재의 높은 항복비와 같은 특이한 물성에 대한 우려 등의 이유로 국내외 대표적인 강구조 설계기준에서는 강관구조에 고강도강재를 적용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의 설계기준에서는 강관의 항복강도가 355 또는 360MPa을 초과하는 경우 제시된 설계강도식을 사용할 수 없거나 강도저감계수를 통해 설계강도를 낮추어야 한다. 반면 이러한 제한사항에 대한 역학적 근거는 명료하지 않다. 또한 최근 저자들에의해 수행된 X형 원형강관접합부에 대한 실험연구는 고강도강에 대한 규제가 과도하게 보수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본 연구에서는고강도강 X형 원형강관접합부의 지관 압축 하에서의 거동을 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실험에 이은 수치해석 변수연구를 수행하였다. 일반 강재부터매우 항복강도가 높은 고강도 강재까지 넓은 범위의 강종을 고려하였다. 본 수치해석 연구에서도 현행의 고강도강 페널티가 매우 보수적이며 완화될여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주관 축응력 하에서의 고강도강 접합부의 거동을 분석한 결과 현행 기준식이 고강도강 접합부의 주관 축응력에의한 강도 감소 효과를 보수적으로 예측함을 확인하였다. 일반적으로 주관 축응력이 작용할 때 고강도강 접합부는 일반강 접합부에 비해 접합부 강도를 더 잘 유지하였다. 더불어 현행 기준식의 형태가 실제 접합부 거동을 정확히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며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律解辯疑ㆍ律學解頤ㆍ大明律講解의 상호관계에 관한 실증적 연구
심희기(Sim, Hui Gi) 한국법사학회 2016 法史學硏究 Vol.53 No.-
일단의 연구자들은, 大明律講解(이하 ‘강해’혹은 ‘증보전 강해’로 약칭함)를, 적어도 世宗대 이후 구한국 시대까지 수백년에 걸쳐 조선의 재판실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된 ‘대명률 주석서’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재까지 강해의 최초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중국인․중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우세하였었다. 그런데 2015년에 다나카 도시미쓰(田中俊光)는‘강해의 편집자․편집지’는 ‘조선인․조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강해는 중국계 율령에 대한 조선최초의 독자적 주석서가 되는 셈이고 강해의 실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강해가 과연 (1) ‘ 주석서’를 지향한 문헌이었는지, (2) 주석서로서의 독자성을 인정할 만한지, (3) 과연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세밀한 검증을 하려고 한다. 14~15세기의 중국에서 출현한 후 조선에 유입되어 이용된 대명률관련 주석서로는 律學解頤(이하 ‘해이’로 약칭함), 律解辯疑(이하 ‘변의’로 약칭함), 律條疏議(이하 ‘소의’로 약칭함)의 3종이 중요하다. 따라서 해이, 변의, 소의의 주석단편(註釋斷片)과 강해의 주석단편의 연관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논증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선행하는 3종의 주석서와 강해의 비교연구에 필요한 몇 가지 형식적인 지표들을 검토(Ⅱ) 한 후, 강해에 추가된 주석단편들을 변의의 그것과 양적․질적으로 비교(Ⅲ, Ⅵ)한 다음 成宗 9年(1478)의 李繼孫․李封의 食物求請 사건의 擬斷 논쟁과 添入 기사의 계기를 상세히 살펴 본(Ⅴ) 다음 증보강해의 존재와 증보내용을 증보전의 그것과 비교분석(Ⅵ)한 후 결론에서 강해의 위상을 재검토(Ⅶ)한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증보전 강해에 부착된 주석단편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먼저 출현하였던 다른 3종의 문헌들(해이, 변의, 소의)의 그것 보다 대단히 疏略한 것이었다.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가 ‘중국인, 중국’이었든지 아니면 ‘조선인, 조선’이었든지와 상관 없이 증보전 강해에 주석서로서의 독자성이나 독창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증보강해의 주석서적 성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증보강해도 거의 전부 다른 선행하는 주석서의 주석단편을 기계적으로 轉載한 수준이므로 주석의 독자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증보전 강해가 조선말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활용된 이유는 그것이 주석서로서 유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명률을 온전히 담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증보전 강해’는 군데 군데 주석단편을 담고 있지만 그 주석단편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억제된 것이고 ‘증보전 강해’의 주안점은 오히려 대명률본문에 있었다. 따라서 증보전 강해는 대명률주석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널리 보급된‘보급판 대명률’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에 반하여 증보강해는 주석서로서의 기능이 더 강조된 문헌이지만 널리 이용된 것 같지 않다. 다음에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중국인․중국’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인․조선’이었을까? 첫째, 증보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조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증보강해의 출현은 성종실록의 첨입기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째,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조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조선초기의 사료들은 ‘조선인들조차도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를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조선인들에게는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가 ‘중국․중국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조선인이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Daemyeongryul-Ganghae(DaMing lü jiangjie, 大明律講解, hereinafter ‘KH’) had been most popularly studied, read and used official law code by Korean officials during the entire Choson Period(from late 14<SUP>th</SUP> century through late 19th century). However, when and by whom and how KH was written has been totally unknown. Until now mainstream Korean legal historiography has conjectured that KH probably must had been written by Ming Chinese in Ming China in about late 14<SUP>th</SUP> century or early 15<SUP>th</SUP> century, and considered it as a kind of commentary book of Great Ming Code (Daminglü, 大明律, hereinafter ‘GMC’). However, in the year of 2015, a young Japanese scholar offered a new perspective about KH. He conjectured that probably KH would have been written by Korean in early Choson Dynasty. In addition to that he also judged KH as a Korean version of ‘good’ commentary of GMC. In this essay I raised a question whether we can judge KH as a ‘good’ commentary of GMC, and if the answer is yes, what kind of commentary book it was. What I found in this essay are as follows. First, there were two kinds of KH. The one, which I call it as a ‘pre-enlarged early KH’, could be considered as a law code rather than a commentary book of GMC because of the low-quality of commentaries. On the other hand, the other, which I call it as a ‘later enlarged KH’, was a proper commentary book of GMC without any doubt. Second, the qualities of the commentaries of KH, whether it is ‘pre-enlarged early KH’or ‘later enlarged KH’, cannot be judged positively because of non-authenticity. All the commentaries of ‘early KH’and ‘later enlarged KH’were borrowed mechanically from other authentic imaginative commentary books of GMC such as Lüjie bianyi(律解辯疑) or Lǜxué jiě yí(律學解頤) or Lütiao shuyi(律條疏議) and etc.
이승호 백산학회 2023 白山學報 Vol.- No.127
본고에서는 만주 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松花江 수운에 주목하여, 부여와 고구려‧ 물길‧발해 등 고대 만주의 諸세력이 이러한 강의 ⽔路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검토하였다. 먼저북류 松花江 중류 유역에서 성립‧발전한 부여를 중심으로 해당 시기 松花江 수운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嫩江 유역에 위치한 ⽩⾦寶‧漢書 유적, 동류 松花江 유역의 望海屯 유적과 索離溝-慶華城 址 유적, 북류 松花江 유역의 楡樹 ⽼河深 유적 등 부여 문화와 관계된 주변의 ⽔邊 유적들을 검토하고, 이들 유적과 부여 문화의 관계가 松花江-嫩江 ⽔路를 통해 형성되고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古代의 만주 지역 수로교통 실례로서 『魏書』 勿吉傳에 전하는 ⼄⼒⽀의 사행길을 검토하였다. 당시 ⼄⼒⽀의 사행에 松花江-嫩江-洮兒河 수로가 활용되었던 사실에 주목하고, 당시 이러한 수로를 통해 대규모 물자 운반이 가능했음을 확인하였다. 松花江 수운은 고대 부여의 지배 영역을 이어 주던 교류망의 핵심이었으며, 고구려와 북방의 유목‧수렵 세력을 연결하였던 교통로였고, 勿吉이 국제 사회로 나아가는 창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이처럼 松花江을 중심으로 펼쳐진 북방 수운 교통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통합적으로 운용하였던최초의 국가는 발해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嫩江-松花江-⿊⿓江 수로는 만주 각 지역을 연결하는교통로이자 물자 유통의 혈맥이었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water transportation of the Songhua River(松花江), which flows across the Manchuria region, and analyzes how ancient Manchurian states such as Buyeo, Goguryeo, Wuji (勿吉), and Balhae(渤海) used the waterway of the Songhua River. First, the water transport traffic of the Songhua River during that period was examined, focusing on Buyeo, which was founded and developed in the middle basin of the Songhua River flowing to the north. Baijinbao(⽩⾦寶)‧Hanshu(漢書) ruins located in the Nunkjang(嫩江) basin. The wanghaitun (望海屯) ruins and the suoligou(索離溝)-Qinghua(慶華) ruins in the east-flowing Songhua River basin. Laoshu(楡樹) Laoheshen(⽼河深) ruins in the north-flowing Songhua River basin. The relationship between ruins related to the Buyeo culture and the river that flowed around them was analyzed. This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se ruins and the Buyeo culture were formed and connected through the Songhua River-Nunkjang waterway. And, as an example of water transportation in the ancient Manchurian region, the travel route of the Eulyeokji(⼄⼒⽀) reported in Wei Shu(魏書) Wuji Biography was reviewed. We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Songhua River-Nunkjang-Taoer River(洮兒河) waterway was used in the travel of Eulyeokji according to the records, and confirmed that large-scale transportation of goods was possible through this waterway. Songhua River water transportation was the core of the transportation network that connected the ancient Buyeo dominions. This was a transportation route that connected Goguryeo with the nomadic and hunting countries of the north, and was also a window through which Wuji advanced in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Balhae was the first country to organically connect and integrate northern water transport centered on the Songhua River. The ancient Songhua River-Nunkjang-Heilongjiang(⿊⿓江) waterway was a transportation route connecting each region of Manchuria and a blood vessel for material distribution.
강섬유로 보강된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뽑힘 실험에 의한 부착 거동에 대한 연구
최창식,배백일,김경주,최현기 한국방재학회 2014 한국방재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Vol.2014 No.-
최근의 콘크리트 공학의 발전은 콘크리트의 압축강도 상승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연구자들은 이를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지칭하고 있다. 초고강도 콘크리트로 제작된 부재는 일반적으로 얇고 긴 형태를 가지게 되며 프리캐스트 콘크리트의 형태로 시공된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들은 적합한 부착 강도 및 앵커에 의해 서로를 연결시켜 줄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제 성능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부착특성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얇은 초고강도 콘크리트 부재에서 나타날 수 있는 쪼개짐 파괴를 막기 위해 섬유로 보강되었으며 반응성 분체 콘크리트로 제작된 초고강도 콘크리트의 부착강도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단순 뽑힘 실험 방법을 통해 수행하였다. 실험에 사용된 콘크리트의 압축강도는 100~200MPa로 설정하였다. 콘크리트의 압축강도 뿐만 아니라 섬유의 보강효과, 피복 두께의 효과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구성하였다. 대부분의 실험체가 철근의 길이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발생한 균열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실험 결과 쪼개짐에 파괴시의 부착강도가 보통 또는 고강도 콘크리트에 비해 큰 부착강도를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착강도는 피복 두께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피복두께의 증가에 대한 부착강도의 상승폭은 콘크리트의 강도 증가와 함께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섬유는 부착강도를 크게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이 또한 콘크리트의 압축강도 증가와 함께 부착강도 증진율이 낮아지는 현상을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