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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53년 한국 소설의 젠더적 현실 인식 연구
이 논문은 1945-1953년 소설을 대상으로 ‘해방’의 테제를 수행하려는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젠더적 현실 인식에 의해 출현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해방 후 문학의 지형을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민족국가의 이념과 가치를 재사유하게 한 동시에 젠더에 관한 인식 체계에도 극명한 변화를 가져온다. 해방 후 부녀자 인신매매 금지, 부녀국 설치, 여성 참정권 획득, 공창제폐지령 등의 법률적 시행은 여성해방의 혁명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도적 시행이 곧 실질적인 여성해방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젠더 인식의 변화를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이 논문은 해방 후 문학에서의 현실 인식을 당대 젠더를 둘러싼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면 과연 어떤 가능성과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였다. Ⅱ장에서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까지의 작품을 대상으로 내셔널리즘의 재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젠더행위의 의미효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후 남녀평등, 여성 참정권 등의 법제화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호명되면서 여성은 새로운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직후 여성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호명한 것은 남성작가다. 김남천, 염상섭, 정인택, 정비석 등의 남성작가의 소설에서 여성 주인공은 공적 대의를 실천하는 민족주체로 등장한다. 남성작가는 타자로서의 젠더 정체성을 통해 조국건설의 욕망을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재현 대상은 그것이 묘사하거나 재현하려는 바에 완전히 동의하는 안정된 기표가 아니라 경합의 장소이자 불안의 원인이 되는 문제적 대상이다. 공적 대의에 참여함으로써 행위하는 주체로 변모한 여성인물은 해방 후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이는 혁명에 위기를 가져옴으로써 남성주체의 공적 대의를 훼손한다. 그 결과 남성작가는 여성인물을 남성의 공적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역사바깥의 인물, 가정부인, 또는 남성주체의 재건을 욕망하는 인물 등으로 재현한다. 이로 인하여 여성인물은 남성주체의 정치적 욕망의 대리인으로서 그 행위가 제약된다. 한편, 해방 후 여성작가가 문단에 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1946년 중후반이다. 가장 먼저 문단에 작품을 발표한 것은 이선희와 지하련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해방 후 정치적 열망을 재현하는 인물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이선희와 지하련은 남성주체의 불안과 회의를 통해 해방의 열정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국가재건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요청한다. 그러나 국가건설의 전망에 대한 여성작가의 정치적 사유는 오래가지 못한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여성작가는 ‘생활’의 문제를 마주한다. Ⅲ장에서는 1947년 중후반부터 1950년 전쟁이전까지의 작품을 대상으로 사적 경험의 공론화를 통해 생활이 구축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947년 중후반은 이념대립이 극에 달한 동시에 3.8선의 분할이 지속되면서 조선 경제구조의 파탄이 극심해진 시기다. 경제구조의 파탄이 생활의 위기로 이어진 상황에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한 임옥인, 장덕조, 최정희, 김말봉 등은 정치적 이념과 그 실현의 가능성이 아니라 생활의 문제에 천착한다. 임옥인의 소설은 해방을 기점으로 가정 내의 문제에서 벗어나 외부세계와 조우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작가의 월남경험이 가로놓인다. 임옥인의 월남경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장면은 불구가 된 오빠의 모습이다. 오빠의 불구성은 오빠의 부재로 이어지는데, 이는 해방 후 여성이 자기 존재로서 존립할 근거가 된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주인공은 집과 가족이라는 사적 경험 내에서의 생활을 벗어나 주체로서의 새로운 자기를 정립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장덕조와 최정희의 소설은 외부세계로 나간 여성지식인이 민족주체로 포섭되지 않는 여성 하위주체의 삶을 마주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빈곤이라는 사태는 재화의 결여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이다. 공적 대의가 최우선시 되었던 해방 후의 상황에서 가족과 가정이라는 사적 경험 내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여성 하위주체는 국가재건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들이다. 장덕조와 최정희는 하위주체에 대한 공감과 관찰을 통해 그들의 가난한 삶과 기구한 운명에 관한 침묵된 ‘목소리-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여성 하위주체의 사적 경험을 공론화한다. 한편, 배제된 여성 하위주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방 후에는 여성 하위주체의 생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역시 긴요한 문제다. 이에 대한 단서는 공창제폐지 관련 사건을 다룬 김말봉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김말봉은 공창제폐지의 정당성과 주변화된 여성의 안정적인 생활의 정착을 상상적으로 재현한다. 공창제폐지의 성공은 기독교의 순결주의를 통해 여성‘들’의 범주를 구성하고 오염되고 타락한 남성성을 거부함으로써 이뤄진다. 나아가 공창제폐지운동과 희망원의 설립은 사적 경험 내에서 논의되던 섹슈얼리티를 공적인 문제로 가지고 오는 한편으로, 여성연대의 가능성을 꿈꾼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러나 여성연대의 가능성은 전쟁을 겪으면서 전화한다. Ⅳ장에서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전쟁기 작품을 대상으로 국가이념의 권력화 과정 속에서 나타난 젠더 위계질서의 공고화와 그 불안정성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쟁서사는 가부장제 사회질서의 성역할을 강화한다. 이로 인하여 국가적 법적질서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보이지 않던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던 여성의 행위는 전쟁기를 거치면서 사회참여의 제한을 받거나 또는 내면으로 후퇴한다. 장덕조의 전쟁소설 속 인물은 후방의 여성을 넘어서 전장의 여성을 재현한다. 이러한 전장의 여성 재현에는 남성과의 평등을 요구함으로써 민족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차지하려는 작가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장덕조의 소설에서 전쟁 참여의식은 죽음에 대한 애도와 연결된다. 그는 전쟁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의 고통과 죽음을 민족과 국가를 위한 대의로 승화한다. 한무숙의 전생소설에서 주인공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며, 이때 남성은 여성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장의 남성이 지닌 여성이미지는 남성히스테리의 증상이다. 호전적이고 용맹스러운 남성동지애를 상징하는 전장의 남성이 여성이미지로 전유됨으로써 전쟁에 대한 반감과 공포를 드러낸다. 또한 그의 소설에서 여성의 응시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대의에 복무하고 있다는 남성의 환상에 균열을 낸다. 손소희의 전쟁소설은 반공이념을 내세우는 국가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허구성의 메커니즘을 고발하거나 여성의 우울한 내적심리를 통해 전쟁기 일상성의 불안을 드러낸다. 이러한 여성인물의 내적심리는 전쟁의 대의를 수행해야 할 남성인물에게 영향을 미친다. 여성의 우울증을 내면화하는 남성은 폭력적인 남성적 질서로부터 이탈한다. 손소희는 여성의 우울한 내적심리와 이를 내면화하는 남성을 통해 전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념의 환상과 허상을 고발함으로써 전쟁의 대의에 균열을 일으킨다. 1945-1953년의 문학은 민족국가건설의 대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남성/여성작가가 재현한 젠더는 고정된 성적정체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며 국가적 법적질서에 참여한다. 해방 후 소설에서 젠더는 그의 이야기history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her story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욕망하게 하는 기제로 기입된다. 해방 후 소설의 젠더적 현실인식의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방 후 개신교의 건국이념 연구 : 1945~1948년 김재준과 한경직의 건국이념을 중심으로
함신주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5 국내석사
본 논문은 해방 후 개신교 건국운동이 어떤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져왔는지 건국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김재준과 한경직 두 개신교 지도자의 건국이념을 비교하여 개신교내에서 건국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통해 한국 개신교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해방 후 건국운동은 갑작스런 해방정국으로 인해 혼란스러움 속에 시작되었다. 해방이 한반도내에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지, 좌우익간의 신탁통치 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부터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면서, 미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상회의에 의해 신탁통치 제안을 하게 된다. 이에 우익과 좌익은 반탁으로 일치된 의견을 보이다가 점차 좌익계에서 찬탁을 지지하면서 좌. 우익간 갈등이 심화된다. 결국 좌우합작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게 되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남한은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이, 북한은 김일성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또한 본 연구는 해방 후 개신교의 건국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였다. 정치적 성향분석을 통해서 당시 개신교의 건국운동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았다. 당시 해방 후 개신교는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재건 운동이 이루어졌다. 출옥성도들은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이들로서 북한지역 교회재건에 앞장을 섰다. 북한지역의 교회는 교회재건 운동에 힘쓰는 반면 남한교회는 내부적 요인의 신학적인 갈등이 주된 문제로 드러났다. 남한교회는 1945년에 열린 기독교남부대회 등을 통해 기독교이념에 의한 국가재건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기독교남부대회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기독교적 건국론을 다양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해방 후 개신교의 주요 정치적 성향은 반탁을 중심으로 한 우익계 노선을 취하였고, 이들은 대다수가 유학파 출신으로서 미군정의 인재로 등용되어 건국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이승만의 건국운동을 지지하였다. 본 논문은 김재준의 건국이념이 철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바탕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밝힌다. 김재준의 『기독교의 건국이념』은 1945년 8월 선린형제단 집회에서의 강연의 내용이다. 특히 김재준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를 참고하였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하나님 주권에 기초한 건국이념을 소개한다. 더 나아가 정부의 권위의 소재, 국토경영, 민정의 실재 등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나라 사상과 연결되어 김재준의 건국론은 영역주권과 같은 화란계통의 칼빈주의 계열에 있다. 정부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생긴 것이며 정부는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상호경의를 강제하도록 교회와 관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상호경의를 강제하는 것이 김재준이 말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이며 정교분리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준의 정교분리원칙은 국가와 교회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러나 교회는 건국에 필요한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할 임무를 지닌다고 보았다. 즉 인물양성론을 제시한다. 김재준은 공산주의를 탈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한다. 건국이념에서는 공산주의도 교회와 제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는 1950년 이후 6.25를 겪으면서 그 태도가 반공적으로 바뀐다. 김재준은 죄악으로 자유를 상실한 인간이 해방되기 위한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그래서 그는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유신과 군사정부시절 인권운동과 반(反)독재정권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본 논문은 김재준이 『기독교의 건국이념』에서 친일자에 대한 문제를 아주 소극적으로 다루었음을 발견하였다. 이는 해방 공간을 공동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해방공간에서 친일자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소극적으로 친일 문제를 다룬 것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보다는 해방 후 민족 공동체적 입장에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경직의 『건국과 기독교』를 다룸으로서 당시 월남 피남민들의 개신교 건국운동의 특성과 그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한경직은 1945년 1월 1일 공산주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창립하였는데, 교회이름을 ‘베다니전도교회’라 하였다. 그 이듬해 11월 당시 ‘영락정’이라는 당시의 지명에 따라 ‘영락교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47년 3월 ‘영락보린원’을 설립하여 운영한다. 그리고 1949년 보린원에서 『건국과 기독교』가 초판발행하게 되었다. 당시 월남 피난민들의 공동체였던 영락교회는 강한 반공의 중심지가 된다. 한편 한경직의 건국이념의 배경은 먼저 애국계몽주의와 인물양성론으로 건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서북학회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서북학회의 회원이었던 남강 이승훈에 의해 기독교적 애국이념은 한경직의 건국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미국 유학시기 동안에 미국 민주주의 사회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화란계통의 칼빈주의로부터 하나님주권 사상에 입각하여 정교분리입장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유신정권에 정교분리원칙을 중심으로 국가조찬기도회, 친정부적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관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경직의 건국이념을 연구하면서 그의 강한 반공사상과 민주주의론을 연구하였는데, 그의 강한 반공주의는 서북지역에서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한경직은 공산주의자들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또한 공산주의를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겨,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표현하였다. 반면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평등을 위한 제도라고 하였다. 한경직은 기독교는 민주주의사상의 교육자이며,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자유, 평등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와 복음만이 민주주의 실행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경직은 반공주의를 대항하여 민족 복음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나라가 되기를 위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썼다. 이는 결국 사회책임의식을 더욱 약화시켰으며, 복음화 운동에 치중하여 개신교는 보다 더 보수화 되었다.
解放後 林和詩 硏究 : 詩集 『讚歌』제1부와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中心으로
전재은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국내석사
임화는 시인, 비평가, 문학 운동가, 문학사가로서 일제하, 해방직후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주도한다. 본고는 해방후의 임화시에 대해 문학 이론적 측면보다는 내용이 갖는 시세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II장에서는 임화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학적 형상화가 시대상황과 비교적 철저하게 조응한다고 인식하고, 예비적인 시대적 배경과 생애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시와의 연계를 위한 해방 전 임화시의 변모 양상에 대해 언급하였다. 4기로 나누어 제1기를 1927년 전까지의 습작 수준의 서정시와 다다이즘 경향의 시로 보았다. 제2기는 1929년 부터 이른바 '단편서사시'로 잘 알려진 일련의 이야기시를 창작한 시기로 임화의 카프활동 시기에 대응되는 시로써 우리 시사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제3기는 시집 『현해탄』의 세계로 1934년 부터 1937년까지 쓰여진 시이다. 이 시기의 시는 카프 해산을 전후한 임화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해서, 대단히 짧은 시행으로 '밤'이나 '운명' 등의 제재로 일제 식민지 말기의 심경을 투영했다. III장에서는 해방 후 시집 『찬가』 1부와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나타난 시세계를 살펴 보았다. 시집 『찬가』 1부의 시들은 인민성에 기초한 민족문학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해방 후 각종 파업 및 추모대회, 폭동 현장에서의 선전, 격려를 위한 행사시, 정치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시의 구조가 단순해지고 내용이 개설화된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나타난 시세계는 한마디로 해방과 귀향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임화에게 있어 전쟁은 남조선 인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형식이기 때문에 해방자의 노래이며, 이 시집에 실린 8편의 시中 7편의 시에 '고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귀향자의 노래로 보여진다. 임화의 시는 현실 상황에 대한 모색과 대응 행위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Wha Rhim, who was a poet, critic, man of literary movement and literary historian, led the progressive literary movement under the Japanese rule and after the Liberation. This thesis is intended to study Wha Rhim's poetry after the Liberation, focusing on his poetic view of the world rather than the literary theory. In chapter II, his personal history and the contemporary backgrounds were introduced in order to offer preknowledge, assuming that his literary formation which was penetration all the works almost exactly conformed to the phases of the times. And the change of his poetic mood before the Liberation was referred to, which was made to relate to the poetry after the Liberation. Wha Rhim's peotry can be divided into four periods. The first period is regarded as the time of earlier lyric poetry until 1927 and of Dada style works. The second period, in which he set to write a series of narrative poems called "Short-Epic" in 1929 and had activities as a member of KAPF, have great importance in our poetic history. The third is the period of Hyunhaetan, a book of collective poems written from 1934 to 1937. During the period he showed his mind going through KAPF's breakup and by means of short lines reflected his mental state at the last days of Colonial Period by using some material such as 'night' or 'fortune'. In chapter III, the poetic view of the world shown in the first part of Songs and Where are You? after the Liberation was studied. Under the slogan of the construction of national literature based on 'the people', poems in 「Songs」 took on political mood which was for many strikes, funeral ceremonies, and propaganda or encouragement at the uprising place. These poems became simple in structure and general in meaning. His political view of the world shown in Where are You? was expressed with the song of liberation and going-home. They were the songs of an emancipator because to him war was a form of struggle to set tree the people in the South Korea. They were also the songs of man going home in that seven out of eight poems in the book had the word 'hometown'. After all, Wha Rhim's poetry can be thought of search for and reation to the reality.
이상일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20 국내석사
This study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birth, establishment and educational contents of the Folk high schools from the Korean liberation to the early 1950s. Since the liberation in 1945, Korean society has not been able to expand regular school facilities and restructure its education system in the political and economic turmoil, but educational enthusiasm from below has steadily increased. As a way to assist in regular school education, Folk high school was established to provide middle school education and it was able to meet some of the demand for education. Folk high schools provided middle school education for those who did not go to middle school with in various circumstances, but it w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that did not gain recognition for giving middle school education. However, Folk high schools provided learning opportunities for those who missed out on learning experience. Also, Folk high schools were able to give their students to be exempted from taking some subjects of the high school entrance examination. Focusing on the 1960s, previous studies pointed out that Folk high schools provided opportunities for secondary education to the socially disadvantaged and contributed to the supply of industrial manpower. However, the previous studies did not deal in depth with the background of the Folk high school. The Folk high school, now translated as ‘Higher Civic School’ was born in January 1948 under the name of the ‘Folk High School’ during the U.S. military rule. ‘Folk High School’ is based on ‘Folkehøjskole’, a Danish free school. Folk high school modelled its operation after Folkehøjskole. It w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to raise ‘civilians’, which could be achieved to be through education. In this thesi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school, the form, the finance and the operational process were examined through checking the application form document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Folk high school. Through the oral speech of those who attended the Folk high school, the educational experience was examined in detail.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full text of the Folk high school regulations, announced on January 13, 1948, was discovered and analyzed for the first time. Before this study, the assumption and analysis on Folk high school was possible only with the Folk school regulations announced in May 1946 and the Education Act enacted in December 1949. Through this, it was possible to analyze the appearance of the first Folk high school in detail and to confirm the flexibility of the Folk high school regulations. Second, the early Folk high schools provided the equal level of the regular middle school education to those who missed out on their learning opportunities. At that time, the Folk high school students did not differ much from the regular middle school students in the curriculum, and they paid the same amount of academic tuitions. Those who graduated from Folk high schools were approved to be able to have the qualification for regular middle school graduation or have opportunities to go to advanced schools, while, after mid-1950s, it was not permitted. Third, the Folk high school was the places which public power engaged in. Administrative authorities were directly or indirectly involved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schools, which tended to be strengthen over time. Early Folk high schools could be operated similarly to regular middle schools, but after the Korean War, the Administrative authorities tightened its control over Folk high schools, which came to be second-rate school. 본 연구는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고등공민학교 탄생의 배경과 설립, 교육 내용을 살펴보았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정치적·경제적 혼란 속에서 정규 학교시설을 확충하고 교육체계를 정비할 여력이 없었으나, 아래로부터의 교육열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에 정규학교 교육을 보조하는 방편으로 중학교 교육을 실시하는 고등공민학교가 생겨났고, 넘치는 교육 수요를 일정부분 감당할 수 있었다. 고등공민학교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중학교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중학교 학력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등공민학교는 고등학교입학검정고시에서 일부 과목이 면제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며, 배움의 때를 놓친 이들에게 학습 기회를 제공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주로 1960년대를 중심으로 하여 고등공민학교가 사회적 약자에게 중등교육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산업 인력 배출에 기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고등공민학교가 처음 생겨난 배경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였다. 현재 ‘Higher Civic School’로 번역되는 고등공민학교는, 미군정 시기인 1948년 1월 ‘Folk High School’의 명칭을 달고 탄생하였다. ‘Folk High School’은 덴마크의 자유학교인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고등공민학교는 학교 형태로서 폴케호이스콜레를 차용하였으며, 교육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공민’을 기르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신청서 서류를 통해 학교 설립절차와 형태, 재정과 운영과정을 알아보았으며,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던 이들의 구술을 통해 교육경험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얻게 된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48년 1월 13일 발표된 고등공민학교 규정 전문을 최초로 발굴하여 분석하였다. 고등공민학교에 대해 1946년 5월 발표된 공민학교 규정을 통해 추측하거나, 1949년 12월 제정된 교육법에 드러난 고등공민학교 내용만을 분석하던 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고등공민학교가 처음 생겨난 당시의 모습을 보다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었으며, 고등공민학교 규정이 지닌 유연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초기의 고등공민학교는 배움의 때를 놓친 이들에게 정규중학교와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였다. 당시 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은 정규중학교 학생들과 교과목과 수업시간에서 큰 차이가 없었으며, 그들과 동일한 수준의 학업 비용을 부담했다. 중학교 졸업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1950년대 중반 이후와는 달리, 그들은 중학교 졸업자격을 지니거나 상급학교 진학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셋째, 고등공민학교는 공권력이 개입하는 공간이었다. 학교 설립과 운영 과정에 행정 당국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초기의 고등공민학교는 정규중학교와 유사하게 운영될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고등공민학교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는 고등공민학교가 2류 학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