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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台俊과 郭沫若 : 한 고전학자의 인식론적 전환의 계기
이 글은 초기 한국문학 연구 개척자 金台俊의 인식론적 변화에 介在된 中國發 학술의 영향을 추적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구성되었다. 그의 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실증주의 대 유물사관의 구도로 수렴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것들이 충분히 金台俊의 학술 및 형성과정을 窮究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자신의 인식론적 변화의 가장 큰 계기로 郭沫若의 『中國古代社會硏究』를 꼽고 있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변화하는 金台俊의 像을 상정할 경우 이분법적 구도의 극복과 더불어 그의 학술에 대한 총체적인 재인식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金台俊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1930년대 조선의 학술장은 ‘朝鮮學’, 곧 20세기 초 ‘國學’의 연속이라고 할만한 ‘조선의 것’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申南澈, 白南雲등 ‘과학적’연구자 계열에 배치하고 소위 御用的, 비과학적 논자들을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한다. 1930년 郭沫若이 발표한 『中國古代社會硏究』는 1920년대 ‘국고정리’ 운동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1930년대 ‘중국사회성질논쟁’의 무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새로운 중국 고대사 해석은 非 맑스주의 진영학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초기 金台俊의 문학사 서술에서는 명확한 역사인식이 잘 관찰되지 않는다. 1931년 이전까지 작성된 두 편의 산문에 대한 문학사는 단순한 작품의 나열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후 학적 관심사를 운문장르로 확장해나가면서 점차 역사에 대한 고민이 관측되기 시작한다. 당시는 근대학문으로서 조선문학 연구의 초기단계였기 때문에 그는 운문연구를 위해 동시대 일본과 중국의 연구서들을 다수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金台俊이 활용했던 중국의 참고문헌들은 주로 詩經의 재해석을 다루고 있었다. 그들은 1920년대 ‘국고정리’운동 및 신문화운동의 영향력 하에 생산된 것으로 反儒敎·反傳統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중 郭沫若의 『卷耳集』과 『中國古代社會硏究』가 있었다. 金台俊이 보여주고 있는 당대 중국 학술장에 대한 이해는 깊이와 동시대성 모두를 갖춘 것으로, 그가 郭沫若을 인용한 것은 우연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다. 郭沫若은 1923년 『卷耳集』을 통해 전통적 경전해석의 관점에 도전하였고, 1924년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사회조직과 사회혁명』을 번역하며 본격적으로 유물사관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1930년 『中國古代社會硏究』에서는 전통적 경전해석을 뒤엎는 유물사관에 기반한 새로운 중국고대사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당시까지도 주자학에 기반한 경전해석이 주류였던 조선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金台俊은 전혀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에 의해 상당한 수준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1934년에 이르러 金台俊의 글에서는 유물사관에 기반한 용어와 세계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金台俊의 유물사관 학습과 관련하여는 다양한 경로들이 있지만 그 중 특히 『中國古代社會硏究』의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1935년부터 金台俊은 학적 영역을 사학으로까지 넓혀 유물사관에 기반한 조선의 고대사와 관련된 다수의 글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조선 학술장의 화두였던 檀君해석을 주제로 삼은 「檀君神話硏究」에서 그는 郭沫若의 고증 방법론을 자기화하여,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주장을 확장·심화하는 데 응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를 통해 金台俊의 학술형성, 특히 유물사관 도입에 개재된 중국발 학술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金台俊의 학술은 이 글에서 입증된 것 이외에도 전통학술, 京城帝大, 일본 동양학, 맑시즘 등 자세히 다루지 못한 중요한 학적 문제들의 한·중·일을 넘나드는 중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複雜多岐한 맥락들을 두서있게 정리해 나가는 것이 추후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