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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역할
허미정 강원대학교 일반대학원 2017 국내석사
본 논문은 19세기 미국 여성참정권운동(Woman Suffrage Movement)에서 가장 중추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 1815-1902)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하였다. 독립 이후 미국사회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영국 관습법 체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에서 여성의 지위는 가정과 남성이라는 사적 영역에 의해 종속되었다. 사회개혁 운동의 과정에서 노예제폐지 운동(Anti-Slavery Movement)과 함께 여성해방운동도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운동의 저변에는 17세기부터 유럽에 확산된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사상이 토대가 되었다. 19세기 초, 산업화와 도시화, 교육시설의 확산과 더불어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 등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를 계기로 여성들도 전통적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스탠턴은 당시 미국사회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생애의 절반 이상을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신장하는데 바쳤다. 그녀가 여성참정권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48년 ‘세네카 폴즈 대회(Seneca Falls Convention)’부터였는데, 세계 최초의 여권대회로 알려진 이 대회에서 남녀평등을 위한「소신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연방헌법 수정조항 제15조에 의해 여성이 배제되고 흑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지자 스탠턴은 보수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하여 인종주의를 여성참정권운동의 전략적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점차 여성참정권을 관철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다. 급진적 운동방식의 한계를 인식한 스탠턴은 연설문『자아의 고독(The Solitude of Self, 1892)』을 통하여 결국 인생의 선택에 있어 최종 결정권자는 타인이나 사회의 압력이 아닌 자신의 몫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경에서의 성 차별적 부분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해석한『여성의 성경(The Wiman’s Bible, 1895)』을 집필하였다. 이 저서는 스탠턴의 업적을 한순간에 뒤엎을 만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턴 생전 결실을 보지 못하였던 여성참정권 획득을 위한 노력은 그녀가 다져놓은 초석위에서 다음 세대 여권 운동가들에 의해 계속 진행되었고, 1920년 연방헌법 수정조항 제19조에 의해 그 빛을 발하였다. 스탠턴은 여성참정권 운동과정에서 약점인 인종주의는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탠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참정권을 포함하는 여권 운동의 진정한 선구자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role of Elizabeth Cady Stanton (1815-1902), who was the most pivotal leader in the 19th century woman suffrage movement, and to examine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in history. American society after independence did not escape the influence of the British customary system until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In this social context, the status of women was subordinated by the private domain of home and male. In the course of the social reform movement, the Anti-slavery movement as well as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began in earnest at the beginning of this period. On the basis of this movement was the foundation of liberalism based on enlightenment spreading from Europe in the 17th century. In the early 19th century, industrialization, urbanization, expanding educational facilities as well as social changes such as women's social participation took place. As a result, women began to awaken themselves from the traditional institutional framework. Stanton was born in a middle-class family of American society at the time and devoted more than her life to expanding women's equality and rights. She initiated the women's suffrage movement in earnest starting in 1848 at the Seneca Falls Convention, known as the world's first women's right convention, and presented a Declaration of Sentiments for gender equality. However, after the Civil War, as a result of the Amendment Article 15 of the Federal Constitution, women were excluded and only the black man was given the right to vote. Since then, Stanton turned to the conservative position and used racism as a strategic means of women's suffrage movement, and devoted herself only to carry out women's suffrage. Recognizing the limitations of the radical movement method, Stanton emphasized through her speech "The Solitude of Self (1892)" that the final decision-maker in the choice of life is one's own, not the pressure of others or society. She also wrote "The Woman's Bible (1895)", a reinterpretation of the sexual discrimination part of the Bible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 This book has been at the center of social controversy enough to overthrow Stanton's achievement. Nonetheless, based on her cornerstone, the struggle to win the women's suffrage continued by the next generation of feminist activists and was finally come into the spotlight at the 19th amendment to the 1920 Federal Constitution. Stanton cannot escape the historical criticism that she has not overcome her weakness, racism, in the women's suffrage movement. Despite the controversy, however, Stanton should be regarded as a true pioneer of the women's right movement, including suffrage, not only in the United States but also globally.
일제하 친일정치운동 연구 : 자치·참정권 청원운동을 중심으로
본 논문은 일제하 자치·참정권 청원운동을 통해 전개된 친일정치운동을 소재로 일제하 친일세력의 논리와 활동과정, 그리고 근대국민국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일제하 친일정치운동세력은 직접적으로는 일제하에 형성, 활동하였지만, 그 인적, 사상적 기원은 이미 한말에서 시작되었다. 근대화가 개화관료, 지식인 중심의 정권장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급진적 정치운동세력과 지배체제 전반에 도전했던 동학세력 일부가 그 뿌리였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을 정치적 재기와 정권장악의 호기로 생각하고 일제의 침략을 용인, 혹은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보호국체제하의 정권장악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군주와 인민 모두를 근대화과정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화세력 중심이 된 ‘민당’ 의 권력장악만이 근대화의 첩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일제의 침략, ‘보호통치’를 용인했던 세력들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분립하며 상호경쟁, 투쟁하였다. 대표적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지도부를 장악하고 보호통치 하의 정권장악운동을 전개했던 세력과 일본과 직접 결합하여 합방운동을 전개한 일진회세력이었다. 전자는 정권장악운동의 논리 하에 보호국체제하의 내각장악운동을 전개하였고, 후자는 합병에 의한 일제지배체체의 전면화를 추구하였다. 전자는 한국사회의 신주류집단인 신흥지주, 자산계층, 요컨대 유지, 신사층을 중심으로 일제지배와 일면 타협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반면 후자는 노골적 친일활동, 비주류세력으로서의 한계에 따라 정치, 사회적 고립화가 심화되자, 일본국민으로서 지배권력의 일원이 되는 합방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었다. 전자는 일제하 자치청원운동으로 후자는 참정권청원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일제하 친일정치운동이 본격화된 계기는 1919년 3·1운동이 계기가 된 지배정책의 변화였다. 3·1운동으로 조선통치의 한계를 절감한 일제가 ‘내선융화’의 첨병이 될 세력으로 친일정치운동세력을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친일정치운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유민회, 동광회 조선총지부의 자치청원운동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속령자치론이었다. 일제의 영속적 지배를 전제로 내정의 독자화를 추진하여 조선사회에서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민협회의 참정권청원운동이었다. 민족구분 없는 국민화를 통해 일본과 조선을 완전히 통합하고, 조선인이 일본제국의회에 진출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이었다. 두 운동은 일제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나 전자가 조선인 상층부의 결속을 통해 조선통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한 것이라면, 후자는 조선과 일본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여 새롭게 지배체제의 중심이 되려한 것이었다. 때문에 전자는 지주, 자본가계층의 실질적 이익확보, 내정독립, 조선인본위와 같은 문제를 중시하였고, 후자는 내지연장주의의 확대와 중의원 참정권 획득에 주력하였다.하지만 자치청원운동은 1920년대 초반 곧 쇠퇴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 하였지만, 내지연장주의의 확대 속에 정치적 규합의 근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20년대 전반 친일정치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한 것은 국민협회였다. 1920년 1월 창립된 국민협회는 한말정치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과 1910년대 총독부의 관리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였다. 특히 핵심인물인 민원식, 김환, 김명준 등은 일진회 참여자였다. 내지연장주의에 호응한 국민협회는 총독부의 지원 속에 지방지부를 건설하며 세를 불려갔다. 국민협회의 핵심논리는 병합의 의의가 조선과 일본의 국가적 통합에 의한 대국가로의 재탄생에 있으므로 신일본국민으로의 정체성 전환에 의해 병합이 완성된다는 신일본주의였다. 민족은 동화되기 힘든 자연적 조건이지만, 국가는 민족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인위적 결합체라는 것이었다. 참정권부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조건이었다.국민협회는 1923년 일본 내에서 보통선거실시가 예정되자,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활발한 참정권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협회 중심의 친일정치운동은 1924년 정우회내각이 헌정회내각으로 바뀌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본국내각의 입장을 반영한 정무총감들은 총독부의 예산을 축소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존 친일정치운동세력들에 대한 지원도 축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통치의 독자화를 위해 자치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친일정치운동세력들의 입지를 위축시키는 것이었다.그리고 이러한 입지위축에 대해 국민협회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국민협회는 총독부의 지배정책과 정책당국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참정권부여 없는 조선통치는 노예의 통치라고 주장하였다. 총독부는 이에 대해 친일정치운동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검열과 취체로 대응하였고 양자의 관계는 갈등관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제한적 참정권획득을 주장하는 갑자구락부가 참정권청원운동의 전면에 부각되었다.이상의 친일정치운동의 전개양상은 각 정치주체가 추구한 목표의 차이, 정치사회적 조건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조선총독부에게 친일정치운동의 존재이유는 조선사회 포섭도구였다. 때문에 1920년대 이래의 민족운동의 발흥, 그로 인한 지배체제의 동요는 친일정치운동의 효용가치를 재고하게 하였다. 또 정당내각의 경우 내지연장주의를 식민지통치체제 에 대한 영향력 강화논리로 활용하려 하였다. 따라서 내지연장주의를 정치적 권리의 동일화문제로 부각시키는 참정권청원운동은 부담이었다. 반면 참정권청원운동세력에게 조선인이 차별 없는 일본국민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논리는 정치활동의 근거였다. 따라서 참정권 부여에 대한 일제의 소극적 태도는 그런 정치적 전망을 허구화시키는 것이었다.한편 1929년 척식성관제개정을 둘러싼 논란은 참정권청원운동세력에게 더 큰 충격을 가하였다. 척식성 설치는 식민지 관할부서인 척식성이 조선 역시 관장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조선이 식민지임을 제도적으로 분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지연장주의를 조선인의 일본국민화, 권리의 동등화로 이해하고 선전하였던 참정권청원운동세력의 존재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갑자구락부, 국민협회 등 친일정치세력은 격렬히 저항하며 반발하였다. 그러나 척식성이 척무성으로 명칭만 바뀐 채 척무성에 의한 조선통치 개입이 가능하게 되자 참정권청원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결국 점차 약체화되던 친일정치운동은 1931년 제2차 지방제도개정을 계기로 활동이 쇠퇴하게 되었다. 지방자문기관의 의결기관화가 결정되자, 지지기반의 인물들이 실질적 이익확보를 위해 지방자치제 참여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또 운동단체의 간부들도 중추원 등에 자리를 확보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친일정치운동세력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추원등 지배체제 내 제도기구에 적극 편입하거나, 지배정책을 선전, 협조하는 선전기관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요컨대 친일정치운동은 세계적 생존경쟁 속에 대제국, 대국가의 일원이 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패권적 세계인식과 조선인민의 자립적 근대주체화는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착종되는 가운데 체제협력적 조선인이 지배체제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일본제국의 실현을 통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 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의 현실화 속에서 조선인 지배층의 조선통치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청원이란 운동방식에서 보이듯 그들 자신이 수동적 존재였다. 일제가 이들의 논리에 합당한 지배정책을 내놓지 않을 때, 독자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때문에 일제의 정책변화에 따라 부침이 심하였고, 운동 역시 실패하였다.하지만 이들이 주장했던 대제국국민화의 환상과 식민지배를 그 과정으로 보는 논리는 1930년대 이후 전향한 민족운동세력의 ‘내선일체론’에 이어졌다. 1937년 이후 전향자들이 주장한 ‘동아협동체’, ‘동아연맹’ 등은 ‘조선민족의 자립’은 불가능 하며, 일본이 주도하는 대연방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만이 세계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일진회까지 소급되는 친일정치운동세력의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민족에 대한 인식의 연속선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일진회 이래 친일정치운동세력이 조선인, 조선민족의 자립적 주체화를 의문시하고, 경쟁이 치열한 근대세계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존립을 제국국민으로의 편입으로 치환시킨 것과 기본발상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제의 강점을 대국가국민으로의 재탄생이라고 생각했던 친일정치운동세력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과 민족운동의 쇠퇴 속에 조선사회의 자립성을 회의하게 된 지식인들은 ‘민족의 국가적 자립’을 포기하고 일본제국으로의 편입하는 것을 조선인의 탈출구로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여성참정권운동에 대한 일연구 : 1897-1928
Women's Suffrage was the one of the most ardent issues in the 'First Wave' feminism of 'Women's rights movement'. Women's Suffrage movement in England started at 1860s and progressed through 1928 when the Equal Citizenship Act was passed. This thesis profoundly studied the years from 1897 when a nation-wide organization called NUWSS(National Union of Women's suffrage Societies) was formed, to 1928 when women finally got an equal right to vote. Suffragist's demand to their right was directly related to the unequal situation that women were experiencing. Under their suffragism, there was an intention to challenge the inequality between men and women which was spreaded throughout the society including one political right. Based on their suffragism, women's suffrage movement showed various class spectrum. Especially, NUWSS was involving women from labour to middle class. Lobbying and election campaign were their main strategies, and because of their moderate tactics, they were called 'constitutionalists'. NUWSS was the most influential organization in gaining women's suffrage.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was an organization that used radical tactics to pressure the Government to give the right to vote to women. Because of the radical, militant tactics they had used, they were called the 'militants'. Their violent tactics resulted them to maintain their voice in the middle of political disputes. They also destroyed the prejudice about women being fragile. Although their militant tactics did not 'directly' influence women's suffrage to be included in the legislation, the movement should not be underestimated. WFL(Women's Freedom League) and ELFS(East London Federation of Suffragettes) showed that the issues concerning 'women' and 'labors' could not be separated of confronted since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labour women while demanding for the women's suffrage. In 1914 World War I highly influenced the women's suffrage movement and it was an important factor for partial success. During the war, political obstacles of women's suffrage were removed and the antis were not able to oppose any more that women couldn't join with political sphere, as the antis saw women were not just fragile and delicate in war time. Although the war was an important factor in gaining suffrage, the contribution of women's suffrage organizations to gain suffrage couldn't be disregarded. The fact that women's suffrage proposal was core part of electoral reform in 1917 should be highly acknowledged as the campaign of women's suffrage movement organization, including NUWSS's lobbying since 1916, had succeeded. In 1918, women over age 30 finally gained the right to vote, and soon women's suffrage movement had lost their ardor. Organizations turned to other women's issues, but didn't abandon the suffrage issue. After all, they obtained "the Parliamentary Franchise for women on the same terms as it is or may be granted to men". Women's suffrage movement changed in women's position and consciousness. Suppressed 'sex discrimination' issue was discussed at public sphere like parliament, street, speech. In that process, it was disclosed that England society was moved by not only basis of class, but also basis of sex discrimination. Thus, women determinedly insisted on that society based on sex discrimination had to be changed. Although Women's suffrage movement had struggled for one political right, it gave a vision to women to other rights to women and it helped women to prospect new life.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은 서구의 제1물결 여성운동 혹은 여권운동에서 가장 큰 흐름 중의 하나였다. 여성참정권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어 보통선거법이 통과되는 1928년 시기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본 논문에서는 조직 면에서 전국 규모의 조직인 전국여성참정권단체연합(NUWSS)이 형성된 1897년부터 보통선거법이 통과되는 1928년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는 당시 여성들이 겪고 있던 여러 불평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 따라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의 사상 속에는 단순한 정치권을 넘어서 여러 분야에서의 성별간 불평등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불평등에 도전하려고 한 것이며 남성과 동등하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참정권운동은 다양한 계급적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전국적 조직이었던 NUWSS는 중간계급 여성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여성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정치, 계급적 스펙트럼을 지니는 조직이었다. 또한 NUWSS는 입법과(constitutionalists)라고 불릴만큼 온건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로비활동과 선거 캠페인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는데,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참정권 안이 통과될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조직이며 여성참정권획득에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발휘한 조직이었다. 여성사회정치연합 (WSPU)은 유리창깨기와 같은 강도 높은 범법행위에서부터 방화, 투신에 이르기까지 급진적 전략으로 운동을 하였던 조직이다. 엘리트계급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파괴적인 운동 방식 때문에 전투파(militants)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쟁 동안 소멸되기는 했으나, 그 이전까지 그들이 보여준 전투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멸되고 있던 캠페인을 부활시킬 수 있었으며, 참정권을 정치적 논쟁의 맨 앞에 유지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여성성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무너뜨렸다. 전투성은 비록 여성 참정권의 입법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운동 자체 내에서의 역할이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여성자유동맹(WFL)과 동부런던참정권연맹(ELFS)은 '여성'과 '노동자'가 대립하거나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조직이었다. NUWSS의 선거연대를 이끄는 참정권운동가들도 이에 동참했다. 그들의 여성문제가 계급과 부에 따른 차별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에 순차적으로 풀릴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급 여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여러분야에서 활동했음에도 '여성참정권'을 내세우는 전략을 고수할 수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참정권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운동의 제한적이지만 궁극적인 성공에도 중요한 요소이다. 전쟁으로 여성참정권의 정치적 장애물들이 제거되었고, 여성참정권 반대론자들은 더 이상 여성의 연약함을 배제의 이유로 들 수 없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여성참정권운동의 성공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다. 전쟁이 참정권운동의 성공에 중요하였다 할지라도, 여성참정권조직들의 기여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여성투표권이 선거법개혁 논쟁의 핵심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전쟁 전 캠페인으로부터 기인했다. 또한 NUWSS의 1916년부터의 압력활동도 크나큰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꾸준한 참정권운동은 전쟁 시기 내내 여성참정권을 정치적 안건 내에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운동이 없었다면, 아무리 정치적 사회적상황이 변하고 선거법 개혁이 긴박한 안건이 되었다할지라도 여성참정권은 지연되었을 수도 있다. 1918년 30세 이상이 여성참정권을 갖게 되자, 참정권운동은 더 이상 그 예전의 열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참정권 이외의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참정권이라는 대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1918년 이후 여성참정권 운동 조직들이 추구했던 "평등"이란 대의는 결국 10년 후 남성과 동일한 조건 하의 보통 선거권을 쟁취해내는데 성공하였다. 참정권 운동의 경험은 여성들의 지위와 인식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은폐되어 있었던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이 의회, 거리, 언론 등 공개적인 장에 들어와 논의되었고, 그 과정에서 영국 사회가 계급적인 토대뿐만 아니라 성적인 차별에 기반해서 움직여지고 있음이 공공연히 폭로되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성적 차별의 기반에서 움직이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목소리를 과감하게 내었다. 참정권 운동은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지만, 여성들에게 그것을 넘어서서 더 많은 권리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길러주었고,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삶을 전망할 수 있게 하였다.
해방 후 여성신문 연구 : 『부인신보』((1947-1950)를 중심으로
조영숙 韓國外國語大學校 國際地域大學院 2021 국내석사
This study examines the Korean women's movement and the political strategies of feminist leaders, in the years following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I analyze the women’s newspapers Buin shinbo, which was published from 1947 to 1950, and was one of the few newspapers at that time directed towards a female audience. As the articles and editorials in Buin shinbo make clear, feminist leaders viewed political participation as a sole and necessary strategy in the achievement of women’s rights. This focus on political participation outside of the domestic sphere put the women’s movement as reflected in Buin shinbo in stark contrast with the women’s enlightenment movement. The years following colonial Chosun’s liberation from Japan were dominated by both national and international conflicts, and the divisions during this unsettling period led to the Korean War. Hence, research on the women's movement during this period has been limited. Buin shinbo allows us to see the limitations placed on women during this critical liberation period and the value women leaders placed on political participation. During this period, Korean women faced social, legal, and political restrictions; the idea of women’s rights, or female suffrage, was nonexistent in Korea. Even more so, the turbulence of this period as regards the establishment of a government and the national unification surpassed the question of women’s rights and the goals of the women’s movement. Feminist leaders had to emphasize the role of women in the family while advocating for women's liberation. Emphasizing a women’s role at home had the potential to highlight the necessary and important role women played in society, thus accentuating the value women play in Korean society. In turn, such an esteemed valuation could be parlayed into an argument for women’s rights in the public sphere. However, as the female leaders of Buin shinbo express, the strategy of the women’s enlightenment campaign was not sufficient for securing women’s rights. The best way to obtain women’s rights was to participate in the National Assembly to enact laws for women. The political goals of the feminist leaders in the public sphere were the way of the women’s movement, not idealized versions of femini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