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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불교조각 연구

      이주민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5 국내박사

      RANK : 247807

      This study comprehensively examines Buddhist sculpture and sculpto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analyzing the development patterns and art historical significance of Buddhist sculpture formed at the intersection of tradition and modernity. The research aims to newly illuminate the unique position of this transitional period in Korean Buddhist art history.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arked a historical watershed in Korean Buddhism. The lifting of the ban on monks entering the capital(1895) and implementation of the Temple Ordinance(1911) brought institutional reorganization to the Buddhist community. The introduction of Western art education systems, the spread of exhibition culture, and the systematic influx of Japanese Buddhist art created fundamental changes in Buddhist sculpture production. This period witnessed the dual challenge of maintaining traditional practices while experimenting with modern artistic languages, resulting in new forms distinct from late Joseon stylistic traditions. The study employed comprehensive methodologies including analysis of votive inscriptions, sculptors' work journals—particularly Kwon Jeong-du's diary published here for the first time—temple property registers, and oral histories from sculptors' descendants. This multifaceted approach enabled both microscopic tracking of individual artists' creative processes and macroscopic understanding of institutional contexts. Research findings reveal that the explosive growth of propagation halls following the end of anti-Buddhist policies dramatically increased demand for Buddhist statues while promoting their miniaturization to suit new ritual spaces. The rapid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networks expanded sculptors' activity spheres nationally, facilitating stylistic exchange across regions. The transition from traditional patronage systems to commercial transactions accelerated the commodification of Buddhist sculpture, establishing foundations for modern art markets. The Buddhist sculpture world reorganized around two primary axes: traditional succession and modern experimentation. Traditional lineages differentiated by materials—wood/clay practitioners and Gyeongju zeolite (bulseok, a type of zeolitic tuff) specialists—each developed independent transmission systems. Notable figures include Bo-eung Munseong (1867-1954), who expanded from Buddhist painting into sculpture; Geum Yong-ilseop(1900-1975), who adapted traditional techniques to contemporary demands; Seokseong Hwagyeong(fl. 1930-1959), who established a distinctive style combining regional characteristics with personal creativity; and Wanho Nakhyeon(1869-1933), whose stone carving methods were transmitted through disciples Seokha Sichan(1893-1958) and Kwon Jeong-du(1913-1969). Modern pioneers like Kim Bok-jin(1901-1940) and Lee Seong-hwa(1911-?) explored new possibilities through Western art education and exhibition systems, maintaining religious functions while experimenting with modern artistic concepts. New trends emerged in both artistic production and professional practice. Experimental works departed from strict iconographic norms, mixing deity characteristics or creating entirely new forms. The introduction of materials like concrete and plaster, exemplified by Kim Bok-jin's Concrete Maitreya Buddha, demonstrated expanding conceptual boundaries. Professional changes included the shift from individual craftsmen to collaborative systems between sculptors and stonemasons, and the emergence of artist signatures reflecting modern artistic identity. This research fills a critical gap in Korean Buddhist art historiography by systematically examining the previously under-researched colonial period, restoring continuity between late Joseon and contemporary eras. By analyzing sociocultural contexts and changes in production systems beyond individual artists and works, the study presents new methodological approaches for understanding this period as one of dynamic diversification where traditional succession and modern experimentation productively coexisted. 본 연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불교조각과 이 시기에 활동한 조각가들을 대상으로 불교조각의 전개 양상과 미술사적 의의를 종합적으로 규명하였다.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형성된 불교조각의 복합적 성격과 변화 양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일제강점기가 차지하는 고유한 위치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는 조선왕조 500년의 전통이 근대적 변화와 조우하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고 1911년 사찰령이 시행되면서 불교계는 제도적 재편을 맞이하였다. 서구식 미술교육 체계의 도입과 전람회 제도의 확산은 미술계 전반에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였으며 일본 불교미술의 체계적 유입은 한국적 변용 과정을 거치며 독특한 양상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다층적 변화는 기존 불교조각의 제작 환경과 양식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불교조각은 전통적 제작 방식의 계승과 근대적 조형 언어의 실험이라는 이중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후기까지의 양식 전통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불교조각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본 연구는 문헌 사료와 실물 자료를 포괄하는 다각적 방법론을 통해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복장발원문과 명문 분석을 통해 조성 연대와 제작 배경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였으며 본 연구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권정두의 작업일지와 기존에 번역 출간된 금용일섭의 『연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조각가의 작업 과정과 창작 활동을 미시적으로 추적하였다. 사찰재산대장과 조선총독부 관련 행정 문서를 검토하여 제도적 맥락을 거시적으로 파악하였으며 불교 간행물과 신문기사 분석을 통해 사회적 수용 양상을 확인하였다. 불교조각가 후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구술 자료는 문헌 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종합적 접근을 통해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에 대한 포괄적 목록화와 심층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연구 결과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의 제작 배경에서는 억불정책 종식이라는 제도적 전환이 불교계 전반에 미친 구조적 변화가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포교당 설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불상 제작 수요가 양적으로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교당이라는 새로운 법당 공간의 규모에 맞춘 불상의 소형화가 촉진되었다. 일본 불교 종파들의 체계적 포교 전략과 영장(靈場) 석상의 조직적 도입은 한국 불교 도상 체계에 새로운 요소들을 유입시켰다. 밀교 도상의 경우 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철도망과 도로망의 급속한 발달은 조각가들의 활동 반경을 전국적 규모로 확장시켰으며 이는 지역별로 분화되어 있던 양식적 특성들이 상호 교류하고 융합하는 새로운 양상을 창출하였다. 전통적인 시주와 발원 중심의 제작 방식에서 상업적 주문과 판매를 통한 근대적 거래 체계로의 전환은 불교조각의 상품화 현상을 가속화하였으며 이는 근대적 미술 시장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불교조각계의 재편 과정에서는 전통 계승과 근대적 실험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한 복합적 구조가 형성되었음을 규명하였다. 조선후기 전통을 계승한 불교조각은 재료와 기법의 특성에 따라 목조·소조 활용 계열과 불석 활용 계열로 분화되어 각각 독자적인 전승 체계를 구축하였다. 목조·소조 계열에서는 보응문성(普應文成, 1867~1954)과 같은 불화승들이 조각 분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면서 장르 간 경계가 해체되고 표현 기법이 다변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금용일섭(金容日燮, 1900~1975)은 전통적 불상 제작 기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조형 감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석성화경(石城和鏡, ~1930~1959~)은 목조와 소조 기법을 병행하면서 지역적 특성과 개인적 창의성을 결합한 독창적 양식을 확립하였다. 불석 활용 계열에서는 완호낙현(玩虎洛現, 1869~1933)이 확립한 석조 불상 제작 기법이 석하시찬(石霞施讚, 1893~1958)과 권정두(權廷斗, 1913~1969)라는 두 제자에게 전승되면서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각 조각가는 스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유한 특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권정두의 작업일지 분석을 통해 확인된 20세기 전반 석조 불상 제작의 구체적 과정과 작업 환경은 전통 기법의 근대적 적응 양상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가 되었다. 김복진(金復鎭, 1901~1940)과 이성화(李聖華, 1911~?)로 대표되는 근대 불교조각의 개척 과정은 서구식 미술교육과 전람회 제도라는 새로운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불교조각의 종교적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예술 개념과 조형 언어를 적극적으로 실험하여 불교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김복진의 경우 불교조각가로서의 활동과 미술비평가 및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활동이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전통적 불교조각 개념의 확장과 사회적 기능의 재정의를 시도하였다. 이성화는 전통과 근대의 절충을 통해 한국적 근대 불교조각의 독자적 경로를 모색하였다.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의 새로운 경향은 작품 자체의 변화와 제작 주체의 변화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전개되었다. 작품 변화의 측면에서는 전통적 도상 체계의 엄격한 규범에서 벗어나 여러 존상의 특징을 혼용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창안하는 실험적 시도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일부 불상의 소형화와 표현의 간략화는 포교당 중심의 새로운 신앙 공간과 개인적 신앙 형태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었다. 불화 표현 기법의 조각적 수용은 장르 간 경계가 해체되는 근대적 현상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보응문성과 같은 불화승 출신 조각가들의 작품에서는 회화적 표현의 입체적 구현이라는 독특한 양상이 확인되었다. 콘크리트와 석고 등 신소재의 도입은 불교조각 제작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나 실제 작례는 제한적이었다. 김복진의 콘크리트미륵대불과 같은 사례는 전통적 불교조각 개념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제작 주체의 변화에서는 전통적인 조각가 중심의 작업 체계에서 조각가와 석장의 전문적 협업을 통한 분업 체계로의 전환이 가장 중요한 변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업 체계는 작품의 질적 향상과 제작 효율성 증대를 가져왔으며 조각가와 석장의 전문적 협업을 통한 새로운 제작 방식을 형성하였다. 작품에 작가명을 명기하는 시도는 전통적 익명성에서 벗어나 개별 작가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근대적 자의식의 발현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를 통해 도출된 학술적 성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기존 한국 불교조각사 서술에서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했던 일제강점기를 체계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조선후기와 현대를 연결하는 연속성을 복원하였다. 둘째로 개별 작가나 작품 중심의 기존 연구 접근법을 보완하여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의 전체적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셋째로 '조각가'라는 근대적 직업 개념의 확립 과정을 규명함으로써 한국 미술사에서 작가 의식의 형성과 전문직 정체성 확립이라는 근본적 변화의 출발점을 제시하였다. 넷째로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에 나타난 제작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한국 미술 제작 체계의 근대적 전환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일제강점기 불교조각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미진했던 학술적 공백을 보완하고자 하였으며 이 시기를 전통 계승과 근대적 실험이 공존하는 다양화의 시기로 새롭게 조명하였다. 한국 불교조각사의 연속성과 발전 과정에서 이 시기가 갖는 고유한 역사적 위치를 규명하였으며 개별 작가와 작품 중심의 기존 연구 방법을 넘어서 사회문화적 맥락과 제작 주체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새로운 연구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일제강점기 불교조각 연구의 방법론적 확장을 시도하였다.

    • 일제신도시 공간구조의 성장과 변화에 관한 연구 : 군산시의 사례를 중심으로

      박종현 국민대학교 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7807

      도시공간구조의 변화를 살펴보는 연구는 20세기 초 산업화(Industralization)라는 패러다임이 도시화(Urbanization)를 이끌어 나가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도시화라는 변화과정 속에서 도시의 근본적인 구조와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Burgess, Hoyt, Harris & Ullman 등의 학자들은 도시구조에 관하여 복잡한 도시의 단면을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방법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발전과 더불어 도시라는 공간 속에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도시의 규모나 기능, 성격 등 도시 내의 사회·경제·물리적 환경 또한 함께 바뀌어 왔다. 특히, 인구증가와 산업집중 등으로 인한 시가지의 면적확산(面積擴散)은 토지이용 변화와 시계(時界)의 물리적 팽창을 가속시키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일제 강점기시기 동안 일제에 의해 자행된 우리나라 식민지정책은 우리 전통도시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일제의 경제적 자국이익을 위한 신도시 건설은 자생적 전통도시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살펴보면, 일본은 1876년 이후 1910년 합병 시까지 조선의 15개 지역을 강제적으로 개항(開港) 또는 개시(開市)시키고, 이들 중 12개 지역을 1913년 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조치에 따라 부(府)-지금의 시(市)에 해당-로 승격시켰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식민지 도시성장의 외형적 틀은 마련되게 되는데, 일제의 개항 및 부제도(府制度) 채택의 숨은 의도는 분석적 차원에서 ① 군사적 목적, ② 통상·교통·행정 등 장래의 식민지 경영 및 관리의 목적, 그리고 ③ 배후지의 수탈 및 수탈된 자원의 본국 수송의 목적 등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본 연구에서 분석할 대상지인 군산의 개항과 부(府)로의 승격은 이 세 번째 의도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수탈한 쌀의 원활한 수송과 반출을 목적으로 대단위 토목공사(예를 들어, 호남·군산·장항선 철도 공사, 전주-군산 간 도로 포장 공사, 동진·만경강 수로(水路)공사, 군산항 수축(修築)공사는 인적, 물적 자원의 집적(식민지 도시집적)을 가중시켜 군산부(府)를 호남지역의 중추도시로 성장시켰다. 따라서 본 연구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일제신도시로서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군산시를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신도시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에 따르는 도시공간구조 분석을 하였고, 해방이후 도시의 사회·경제 및 기반 산업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결과와 그에 수반하는 도시·사회·경제의 변화, 그리고 전통적으로 일어난 우리나라 자생적 도시 의정부시와의 비교를 통한 일제신도시의 특징을 Space Syntax를 통하여 분석 값을 도출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연구의 흐름은 1단계로 군산시의 역사적 현황과 사건, 그리고 사회경제구조에 대한 기초조사를 거쳐 2단계로 각 시대별 공간구조의 특성을 정량적으로 분석, 마지막으로 이를 종합 고찰하여 정성적으로 비교 해석함으로서 군산의 도시적 특징과 군산시의 도시·사회·경제적 쇠퇴의 원인에 대해 진단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본 연구는 제 4장에서 군산시 지역경제의 흐름과 역사적 전개과정을 근간으로 ① 일제강점기 시기인 '개항과 수탈의 시기'와 ② 급격한 도시성장 단절과 지역경제에 대한 모색의 시기로서 해방 이후 1945년부터 현재까지를 '쇠퇴와 도약의 시기'로 나누었다. 이에 수반하여 두 시기의 도시 전반적인 역사적 배경과 경제의 흐름을 통한 물리적인 도시 분석과 동시에 Space Syntax를 통하여 보다 객관적인 도시공간구조의 정량적 분석 값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분석된 결과를 간략히 기술하면, 첫째, 군산의 도로체계는 「현 금동 군산 서 초등학교 앞 - KT 군산지사 앞 도로」와 「현 내항사거리 - 명산사거리」로 이루어진 십자(十字)축을 기준으로 격자형 형태를 기반으로 명확한 도시체계를 형성하였다. 둘째, 일제강점기 도시의 중심지였던 내항 일대(영화동, 월명동, 장미동대)는 쇠락하였고, 해방 이후 동부지역인 조촌동과 경암동 일대로 도시의 중심이 이동하였다. 셋째,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과거 거류지역의 도시성은 현재에 와서 크게 쇠락하였으나, 당시 일제에 의해 계획된 격자형의 도시체계는 현재 도시의 중심지인 조촌동과 경암동의 동부지역과 신흥 주거 및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나운동과 문화동 일대로 연장되어 동한 격자형 가로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넷째, 서해안 고속도로와 외곽 고속화도로의 신설로 인하여 도시 내의 교통량이 크게 분산되었다. 동시에 외곽고속화도로에 통합도 역시 크게 높아져 외부에서 시로 들어오는 접근성 또한 분산되었다. 위와 같은 분석 결과 군산시의 가로체계와 현 도시경제의 쇠퇴, 도시 중심지 이동에 대한 물리적 해석이 공간통사론에 의한 정량적 분석과 대부분 일치하였으나, 통사론적 분석에서 높은 통합도를 나타내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내항 일대의 쇠락화는 증명해내지 못했다. 이와 같이 통합도의 높은 예측율에도 불구하고 도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시대적 배경에 근거하여 도시사회적인 요인으로서 그 원인을 분류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군산시의 물리적 도시공간분석과 정량적 공간분석으로서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첫째, 도시공간의 활성화이다. 즉, 과거 군산은 통사론적 분석 결과 대체로 높고 고른 통합도 분포(int=0.9393)와 높은 명료도 값(R^2=0.4078)을 나타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가로축의 「현 금동 군산 서초등학교 앞 - KT 군산지사 앞 도로」(int=1.6088)와 세로축인 「현 내항사거리 - 명산사거리 」(int=1.5254)의 통합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 이 가로를 기본구조로 십자(十字)축을 이루었고, 이를 기준으로 격자형의 도시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어떠한 공간으로부터 시작하여도 공간간의 접근성이 용이하여 도시전체의 통행량과 인지도, 상권 등이 활성화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지속적인 도시성장에 실패이다. 해방 이후 동일지역의 도시공간구조는 해방 이전과 비교하여 현재에 이르러 통합도(int=4.71)는 크게 높아져, 물리적 또는 인지적 접근성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공간구조 명료도 (R^2=0.2133)에서는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격히 떨어져있어 공간인지도와 공간구조 및 공간이용패턴에 대한 예측률이 크게 떨어졌다. 분석 결과 이 지역은 도시 전체와의 유기적 결합을 이루지 못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도시 성장에 외면 받고 있는 낙후된 지역성장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에서 분석된 바에 따르면 일제 신도시 군산은 해방 전후기 도시성장의 극명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분히 군산은 일제에 의해 계획된 도시체계이고 이는 일본인의 자국이기주의로서 이뤄진 계획이었기 때문에 강점기 시기의 큰 도시경제적 성장으로서 근대화 도시로 도약하게 되었으나, 해방이후의 군산은 일본경제의 단절로 크게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지 못하고 도시발전은 급격히 후퇴하고 있는 모습이 통사론적 분석에서도 현격히 드러났다. 또한 최근 경주와 경합을 벌였던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 유치에도 실패하여 새로운 도시발전의 기대감마저 잃은 상태이다. 이는 자생적으로 발전된 우리나라 전통도시들의 성장세와 비교하여 생각한다면 일제개항도시로서의 상처는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정부차원에서 계획 및 실행하고 있는 「서해안지역개발사업계획」(1980)과 「군산자유무역지역지정」(2000), 군산 산업단지(1994),「새만금 사업」 과 비응 관광어항(2007) 등으로 군산을 미래 서해안의 또 다른 거점도시로서 작은 기대감은 주고는 있으나, 향후 군산시가 과거 최대 근대도시의 계보를 잇는 발전된 도시화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경제개발 사업과 현재 남아있는 일제 근대적 도시성과 도시성장에서 외면 받고 있는 일제의 흔적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과 도시적 계획이 필요하다 하겠다. The study on the changes to the urban spatial structure began with the industrialization happening along with urbanizat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At that time, there had been constant needs for research into the fundamental structure and mechanism of a city in the changing process called urbanization. Many scholars including Burgess, Hoyt, and Harris and Ullman suggested methodology to look at the complex aspects of the urban structure in a relatively simple and clear manner. Korea witnessed the urba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in the city along with the economic growth that began in the 1960s. Since then there have been social, economic, and physical changes to the environment in addition to the size, function and character of the city. In particular, the expanding of urban areas due to increasing population and industrial concentration caused the changes to the land uses and physical expansion of the field of vision. The colonial policies applied by the Japanese empire during its rule altered the traditional Korean cities completely. Especially they built new cities to promote their economic benefits and thus made huge impacts on the autogenous and traditional city structure. To elaborate, the Japanese empire force 15 areas of Korea to open the harbor or city from 1876 to 1910 of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Among them total 12 areas were elevated to the status of bu-corresponding to a city today- according to the reform policies of administrative districts by the Chosun Government General in 1913. With the reform, the exterior framework of growth of Korea's colonial cities was established. The Japanese rulers surely had hidden intentions behind the opening harbor and introduction of the bu system; they analysis results identified them as ①military purposes, ②future colonial management and supervision in commerce, transportation, and administration, and ③exploitation of the hinterland and transportation of the exploited resources to Japan. The opening of Gunsan harbor and the elevation of its status as bu had something to do with the third intention. In particular, the Japanese rulers carried out large-scale public works(for example, the construction of Honam, Gunsan, and Janghang Railroads, road pavements between Jeonju and Gunsan, construction of the waterways in River Dongjin and Mangyeong, and repair of the Gunsan Harbor) in order to make the transportation and transfer process smoother for the exploited rice. The public works in turn reinforced the human and physical concentration of the city(the urban concentration in the colony) and made Gunsan-bu grow as the core city in the Honam area. Thus this study set out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new towns made during the Japanese rule by investigating Gunsan City, which still had the traces of its being built and grown as one of those new cities since 1910 of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t also aimed to analyze the city's urban spatial structure, examine the impacts of the changes during the colonial days on the city in the social, economic, and infrastructure level, and compare the city with Uijeongbu, which was an autogenous city of Korea. The final goal was to produce the analysis values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new cities built by the Japanese rulers through the Space Syntax. The research procedures were as follows; the Stage 1 conducted the preliminary research in to the historical development, events, and social and economic structure of Gunsan City. In the Stage 2 a quantitative analysis was conducted of the characteristics of its spatial structure for each period. The final stage consisted of the overall consideration, comparison and interpretation of the results in a qualitative manner to understand the urban characteristics of Gunsan and the causes of its degeneration in the urban, social, and economic contexts. As a result, the new city built by the Japanese ruler, Gunsan, showed extreme contrasts in its growth before and after Korean took back its independence. Since it's the truth that Gunsan was a planned city for the sake of the purely egoistic schemes of the ruling Japanese, the foundation established during the Japanese rule helped it make a huge leap in the urban and economic field after the independence day. But there has been an ongoing downward stream for the city since then as the economic exchanges were cut completely with Japan. Even today it's hard to observe constant growth spurts in the city. The syntax analysis results show that its development as a city has actually made a huge move backwards. It also failed to win the competition for the radioactive wastes facilities against Gyeongju recently and its citizens have lost the expectations for the new leap into the future. Compared to the dramatic growth of the traditional cities that have developed in an autogenous way, it's very unfortunate that it still has the wounds as the harbor that was forced to open by the Japanese empire. The central government has laid out various plans to help it grow including the "Development Plans for the West Coastal Area,"(1980) "Appointment as a free trade zone,"(2000) "Gunsan Industrial Complex, "(1994) "Saemangeum Project," and "Bieung Tourist Port(2007)." They do make the citizens have a hope for their city growing as one of the strategic points in the future of West Coast. But there are many things to take care of in order for it to go through urbanization following its heritage as the biggest modern city of Korea; it should take an active approach to the economic development projects and take new interest in the Japanese traces that were left from the Japanese ruling and have been ignored in the growing process in making new urban plans.

    •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의 수난과 대응 : 일제에 의한 한국교회와 대한성공회 탄압을 중심으로

      조종필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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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겠다. Ⅱ장에서는 일제 기독교 정책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고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단체법의 추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1절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정책의 각 시대별 특징들을 고찰해 보았고, 더불어 각 시기별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의 변화도 살펴보았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한마디로 식민지 경영의 부속물로써 규정되었다. 선교초기 일제는 자국의 식민지 경영에 특별히 거슬리지 않는다면 종교문제에 개의치 않으려는 이른바 '정교분리' 노선을 폈으며, 선교사들 또한 마찬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후기로 가면서 대(對) 기독교 정책은 '종교보국'의 기치로 선교사와 교회를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편다. 2절에서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서술하였다. 신사참배는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일제의 '국체'사상에 기초한 황민화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써 강요되었다. 3절에서는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켜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고 기존의 교파적 교회체제를 일본적 교회체계로 대체시켜 철저히 천황제 중심의 종교보국으로써의 교회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서술하였다. Ⅲ장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각국 선교사들의 대응과 교회의 대응을 알아보고 신사참배 수용 이후의 교회의 변질과 종교단체법을 시발로 한 교회의 통합을 통해 일제 말 한국 교회가 격어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시기를 알아본다. 1절에서 우리는 기독교계 학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강요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보게 된다. 또 이에 따른 각국 선교부는 순응과 반발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입장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달리한다.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저들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행사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감리교를 비롯해서 1938년 장로교가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를 모든 교단이 형식적으로 수용하기 까지 많은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들의 저항은 개인적 저항을 비롯하여 선교부에 의한 학교의 폐쇄도 불사하였으며 한국의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감내하여야 했다.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는 일제에 의해 통합의 수순을 밟으며 변질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개인적인 저항은 계속되어 기독교 세력도 항일 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게 된다. 2절에서는 전시체제 식민지 병참기지화를 목표로 '종교보국'의 기치에 맞는 교회를 만들고자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일본교파와의 통합을 시작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결성까지 일제에 의해 강요된 부일협력과 교회 수난을 알아보았다. 일제는 종교를 국가의 통치하에 두고 종교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방해세력이었던 선교사를 1941년 전면 추방하였고, 교파적 특징인 '재림사상', '종말사상'등을 이유로 회유가 어렵다고 생각된 성결교, 동아기독교회(침례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을 일방적으로 해산해 버린다. 3절에서는 선교초기부터 사회사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대한성공회 선교사들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살펴보고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알아보았다 대한성공회는 일제 말기 영국선교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선교시기 내내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른 개신교등과 같은 부일협력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던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 보육원, 교회가 1941년 선교사 추방을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인 주교의 섭정으로 고난을 견뎌내야 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렇듯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냈다. 일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의 근간인 '천황중심의 사상'과 근본부터 상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관리의 대상이었고, 이후로 갈수록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집요하고 강압적인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교회 역시 기독교 순수 신앙이 왜곡되고 변절을 강요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식민지 초기 일제는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며 교회의 정치적 행동을 봉쇄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후 일제는 교회의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즉,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저편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는 상호 보완, 책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신사참배 강요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단체법을 통해 이미 국가에 종속되어있는 일본기독교로의 흡수와 교파 통합이었다. 이 둘은 한국의 기독교를 식민지 상황에 맞도록 국가에 복속시켜 '황국신민화'와 '식민지 병참기지화'에 합당하게 되도록 개량하고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일제의 근간사상에 종교를 유용하게 쓰기 위함이었다. 즉 일제는 기독교라는 자체는 인정하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국가 체제 내에 속해야하고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제기해 왔던 종교관으로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종교단체법도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정책에 한국의 교회를 꿰어 맞추는 성과를 얻는다. 즉,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친일을 하거나 부일협력을 했던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권교회와 기관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사참배와 종교통합을 신앙의 관점이 아닌 국가 체제로 받아 들였다 즉,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고 각 교단을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에 복속 시키는 것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주장대로 단지 국가체제에 대한 순응 내지는 제도화의 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친일을 하거나 부일 협력을 하였던 많은 제도권 교회는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류를 이루었던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 소위 '무명'의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투쟁하게 된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된 이가 대략 2천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게 된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억압받는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일제의 광폭한 탄압도 기독교 저항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대한성공회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선교부 선교사의 전원 추방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탄압은 일제가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이 파기되면서 가해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그 모태가 영국성공회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침략을 비난하는 영국과 영국성공회에 대한 간접 보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선교부가 퇴진한 것이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이 땅의 소외 받는 민중들을 찾아 복음의 터전을 넓힌 성공회였기에 교단의 성장보다는 병원, 고아원, 보육원, 학교등등의 사회복지 시설로 민족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러하기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드러나는 부일협력을 통한 매국행위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교회를 책임지던 선교사들이 모두 쫓겨나서 모든 시설들과 일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때에도 돈이 끊겨 굶어 죽을 지라도 교회를 지켜 내셨던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에도 이어나가고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세계성공회와의 제도적 연대로 성공회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계의 이러한 투쟁은 단순한 신앙수호에 국한된 투쟁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 아래로 봄을 알리는 물이 흐르듯이 교회는 겨울을 이겨냈으며 이것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던 식민지 조선의 거대한 항일 투쟁의 한 지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 제장,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민족말살정책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막을 내기게 되지만 해방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교회의 제도가 빠르게 복구되고 회복되었던 것은 이러한 교회의 정신이 온전히 이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종교정책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해방을 맞이한 지도 60년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 유치해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날로 좁아지는 양국의 관계에 비해 일본이 보이고 있는 전쟁 등에 대한 반성은 아시아 주면나라에 많은 실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일본 매스컴이 벌이고 있는 중국 난징 대학살에 대한 조작설 제기는 과연 일본이 과거 전쟁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한다. 또한 해마다 제기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와 침략국으로서의 반성을 외면한 일본 각료들의 계속되는 망언들을 봤을 때, 그 실망은 더욱 깊어져 간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일본이 아시아 속에서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방, 곧 이웃이란 옆에 살거나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때 진정한 이웃이자 우방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전후세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과거는 과거로써 묻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나침반으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양국 간에 넘지 못할 벽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1910년대 일본조합교회가 조선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기독교를 전파하려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한지 근 10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대한 성공회가 일본 성공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겠다. 신앙적 교류가 작은 줄기를 이루고, 그것이 나중에 큰 강물을 이룬다면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데 기독교가 교두보 역할을 했으면 한다.

    • 일제하 모성에 관한 연구 : 전시체제와 모성의 식민화를 중심으로

      안태윤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2001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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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일제 식민지하 한국 사회에 있어서의 모성의 성격과 의미를 고찰하기 위한 연구이다. 여기서 논의의 주제가 되는 모성이란 생물학적으로 모든 여성이 갖는 본질적인 특성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정치적 목적이나 사회내 각 세력들의 이해관심에 따라 구성되고 정의되는 것으로, 모성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역사적으로 변화함과 동시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형성되고 유포된다는 여성주의적 관점에 입각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식민 지배체제하에서 모성의 개념과 성격이 정치적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사회세력들에 의해 어떻게 다양하게 구성되고 정의되는가 하는 역사적·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모성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시기적으로 개항 이전의 전통사회로부터 개화기, 그리고 식민지시기로 이행됨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조건과 지배체제의 변화에 따라 모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상이하게 구성되는가를 밝히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사회세력에 있어서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식민지배세력으로 구분하여 각 사회세력 집단들이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구성해내는 모성에 관한 관념 및 담론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특히 식민지시기를 구분함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여성사연구에서 간과되어 왔던 일제 말기에 초점을 맞추어, 일제의 중일전쟁 개시를 계기로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조선 여성의 모성이 일제의 전쟁과 군국주위를 위해 이데올로기화되고 도구화되는 방식과 그러한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모성의 제도적 측면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현실적인 경험의 차원을 밝히기 위하여 일제 말기를 경험한 15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구술사면접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연구 목적에 따라 연구된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가부장제의 질서를 지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하여 유교이념은 여성들에게 어머니로서의 부단한 희생과 책임을 요구하였다. 특히 여훈서에서는 가부장제 가족제도의 안정을 위해 친자식보다는 계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이상적인 어머니의 규범으로 제시하였다. 개화기에는 서구 사회에서 근대국가의 성립기에 국가적 필요에 따라 모성이 강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권상실의 위기속에서 장래 국민이 될 아동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자녀교육자로서의 어머니역할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적합한 어머니역할의 수행을 위해 대두되었다. 이어서 한일병합이후 전시체제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식민지시기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식민지배세력이 각각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상이하고 다양한 모성담론을 구성해낸 기간이었다. 남성지식인들은 민족의 운명과 장래를 위해서라는 레토릭으로 여성의 모성성을 규정지었으며, 나아가 모성애를 예찬하였다. 남성들이 일관되게 여성의 모성성을 강조하고 예찬한 데 비해, 여성들은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모성의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대부분의 여성교육자들은 가정에서의 어머니로서의 교육적 역할을 중요시하였지만, 일부 진보적인 여성들은 가부장제하에서 모성이 갖는 억압성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여성노동자들의 모성보호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 편, 식민지배세력은 식민 초기부터 조선 여성의 교육이념을 현모양처주의에 두고 '미래의 충량한 일본 국민을 교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방침은 30년대말 전시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식민통치를 위해 더욱 모성을 도구화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로, 전쟁에서 소모되는 병사력의 충원을 위해 다산을 선전·장려하고 산아제한을 금지시켰으며, 보다 강건한 모체의 육성을 위해 신체단련을 강화하는 등 모성의 출산 기능을 식민지배의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였다. 둘째, 인적 자원에 대한 필요성에서 아동의 건강과 생존을 전적으로 어머니의 양육책임으로 전가하고, 모성의 양육역할이 국가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제국주의적 모성 관념을 주장하였다. 셋째, 황국신민화교육의 보조적 역할을 어머니들에게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어머니들을 조직화하고 동원하였으며, 식민체제의 유지를 위해 세부적인 역할규범을 주입하고 규율화함으로써 '식민지형 어머니'를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 넷째, 전쟁에 여성들을 협력시키기 위하여 군국주의적인 모성을 이데올로기로써 형성시키고 유포시켰다. 전사한 군인의 어머니를 애국적인 어머니로 칭송하고, 아들을 군인으로 지원하도록 어머니들을 설득하였으며, 병사를 위문하고 전쟁을 응원하는 활동에 어머니들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모성의 제도적이고 정책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대하여 실제로 여성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머니역할을 인식하고 수행해 나갔는가 하는 경험적인 측면을 밝히기 위하여 구술사면접을 실시하였으며, 면접을 통해 드러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연구대상자들은 가부장제의 다산관습에 강하게 구속받고 있었지만, 특히 빈곤층의 여성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부 교육받은 여성들은 전쟁을 위해 다산을 요구하는 식민정책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둘째, 일제는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필요성에서 어머니의 양육책임을 강조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양육지침의 준수를 요구하였지만, 이러한 '식민지적 모성의 재규정'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노동자·농민계충에서는 어머니의 생산노동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계층에서는 가사노동이 양육보다 우선시되었으며, 어머니가 양육의 전담자라기 보다는 양육은 다른 가족원이나 가사보조인과 공유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일제는 그들의 육아법을 근대적인 지식으로 우월화하고 조선의 전통적인 양육법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폄하하였지만, 대부분의 구술자들은 어머니세대의 양육지식을 수용하였다. 셋째, 일제는 황국식민화교육의 보조적 역할을 어머니의 역할규범의 하나로 제시하고 실제적으로 이를 위해 어머니들을 동원하였지만, 어머니들은 강압적인 식민체제하에서 자녀들의 안전과 보호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머니들은 '식민지형 어머니'를 만들어 내기 위한 강제적인 규율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함으로써 자녀들의 민족적 정체 성형성에 기여하였다, 넷째로, 여성들은 전쟁을 응원하는 역할에 동원되었지만, 일본의 전쟁을 위해 동원되는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회는 전통사회에서 개화기, 식민지시기라는 역사적·정치적 변화를 겪으면서 지배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또한 남성과 여성이 갖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모성에 대한 관념과 의미가 각기 상이하게 구성되고 규정되어 왔음이 밝혀겼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침략을 위해 조선 여성의 모성이 도구화되고, 일제의 제국주의적 모성 관념이 주입되어 모성이 하나의 제도로서 식민화되었음이 드러났다. 또한 구술사 연구를 통해서 일제말기 어머니 역할을 경험했던 여성들이 식민권력에 의해 제시되는 식민지적 모성관념에 대해서는 저항적이었지만, 가부장적 모성관념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수용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의 한계점으로는 일제 말기 모성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유포되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인 남성 및 여성지식인들이 군국주의적 모성이데올로기에 동조하게 되는 기제를 분석하지 못한 점과, 구술사 연구에 있어서 학부모 경험자의 수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점이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지배체제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모성이 도구화되는 기제를 밝힘으로써, 해방 이후 또는 현대사회의 국가체제와 모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시사점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This dissertation examines the meaning and the characteristics of motherhoo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Methodologically, this study will be grounded in the feminist perspective on motherhood. Hence, rather than viewing motherhood as a biological given endowed to all women, the goal of this study is to re-examine the category of motherhood as a construct, defined accordingly to the political purposes of the state as well as the interests of other social groups. It also views motherhood as a changing socio-historical category whose terms are disseminated through ideology. Based on this theoretical framework, this study will regard the meaning of motherhood as a changing socio-historical category whose terms are constructed differently by various social groups and influenced by the changing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conditions during the colonial period. By looking at the different time periods (i.e. the transition from a traditional society to the enlightenment period and then to annexation), this study will analyze the debates as well as the processes of change in the conceptualization and organization of the category of motherhood. It will specifically look at three different groups men, women, and the colonial state which sought to redefine motherhood, based on their own positionalities in society. In particular, the main task of this dissertation is to examine the ideological and political aspects of motherhood, as well as the mobilization of Korean mothers during the late colonial period (1937-1945) which is still a major lacunae in modern Korean women's historiography. It also seeks to understand how various competing ideologies sought to interpellate Korean women to serve as "mothers" of the nation. By focusing on fifteen oral interviews of mothers during the late colonial period, this study also examines the "lived experiences" of wartime mothers.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Confucian ideology on motherhood required women's continuous devotion and responsibility in order to support and maintain the patriarchal order during the Chosun period(1392-1879). In particular, I argue that Confucian ideals of motherhood looked down on maternal love towards one's biological children as self-centered. Rather, it prioritized love and devotion towards one's step children and the offspring of concubines in order to retain the status quo and the stability of the patriarchal family system where men were legally allowed to have concubines. During the Enlightenment period (1880-1909), the discourse on the mother's role of educating her children became an important ideological tool to solve national crisis. Male nationalists and reformers began to acknowledge the need to improve the quality of education for children. The education of children would play a central role in preparing the nation for modernization and progress, especially during political turbulence. In other words, the important roles of women in educating and rearing their children were directly linked to the progress and future of the nation. From 1910 to the mid-1930s, three different groups-men, women, and the colonial government sought to define motherhood through various discourses. By deploying the rhetoric of spirituality of "minjok" (yolk), male intellectuals praised the maternal love of women and deemed it as the essence of "womanhood." In contrast to the ideological underpinnings of motherhood as a spiritual signifier of yolk by male intellectuals, women sought to bring to light the realistic problems. While conservative female intellectuals like teachers in girl's schools asserted the importance of the mother's educative role in the domestic sphere, some liberal feminists began to realize the oppressive nature of the current motherhood ideologies. Critical of the male dominated patriarchal society, these women argued that women's education only produced "wise mothers and good wives." Through their literary works, women writers were able to write about the various problems of mothering women were facing and the sufferings brought about them by these male-centered ideologies.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also sought to discipline Korean women to become "wise mothers and good wives" and make them conform to various colonial policies starting from the annexation period. Moreover, starting with the Sino-Japanese War (1937) until the end of the Pacific War (1945), the colonial government deployed a militaristic and imperialist ideology of motherhood to mobilize Korean women for its war efforts. There were four ways the regime sought to enforce their policies: First, by outlawing birth control, the colonial government stressed the productive role of mothers, demanding more babies from Korean mothers in order to ensure a large population for military recruitment and forced labor. Second, it attributed the high infant mortality rate to maternal ignorance and called for mothers to be more responsible, often intervening in local practices by introducing new nurturing methods. Third, it sought to organize and discipline mothers to comply with the colonial education policies by specifically assigning women the task of educating their children to become obedient colonial subjects. Finally, it demanded women to espouse patriotic motherhood and endorse military conscription of their sons. The colonial government often praised mothers as "patriots," if their sons died in battle. Based on the oral interviews I conducted, Korean mothers, despite the various colonial ideological interpellations as well as the pressures of state mobilization, were able to carry out the task of mothering through resistance and negotiation. Although most of the women interviewed stated that they could not fully resist certain aspects of colonial oppression and racism, they were still able to maintain traditional values and familial relationships. In spite of the dominant colonial education, which attempted to discipline children to become submissive colonial subjects, it was through this kind of resistance that mothers were able to instill their children with national pride. In conclusion, this dissertation will be significant in several aspects. First, this study offers a new socio-historical perspective on Korean women's history during the late colonial period. Second, this study explores the complex relationship between Japanese militarism and motherhood and provides a fresh perspective on the politics of motherhood in colonial historiography. Finally, while many studies on the colonial period have depended on literary studies, this dissertation reassesses the dynamics of mothering through oral history. There are, however, some shortcomings with this dissertation. First, this study does not fully examine the mechanisms of Korean intellectuals and their complicity with the colonial motherhood ideology. Second, because of the insufficient number of living survivors of this period, this study could not fully access the experience of mothering of school children. Finally, further studies need to be conducted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in order to examine the politics of colonialism, the ideology of motherhood and new definitions of women's roles in imperial Japan which were then imported from the metropole to its colony.

    • 일제강점기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한 조선 영화인 연구

      징잉잉 청주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RANK : 247807

      본 논문은 역사학, 문화학, 미디어학 등 다양한 학문이 교차하는 연구 시각과 영화사, 영화문화, 영화비판, 영화이론을 아우르는 틀 안에서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한반도 영화인 연구를 통해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조선 영화인의 상하이 영화실천 활동을 탐구하고자 한다. 우선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중국과 한반도 두 지역의 초기 영화예술의 발전상과 문화교류로 형성된 접촉공간을 전제로 하여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사회적 환경과 영화발전상, 그리고 조선 영화인의 상하이로 출발을 앞두고 한반도에서 이뤄진 영화 실천 활동을 종합하여 조선 영화인의 떠난 원인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당시 국제사회의 발전상, 특수한 사회․문화 공간인 상하이, 그리고 1930년대 전후 상하이의 영화문화․산업․정책 등을 종합하여 조선 영화인이 중국 상하이에서 합류하게 된 심층 계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조선 영화인의 창작 스타일에 따라 그들의 영화실천 과정을 초입․융합․성숙의 3단계로 구분한다. 상하이의 영화생태를 종합하여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조선 영화인이 가진 독특한 문화적 신분과 제 3 공간에서 자신의 스타일과 창작에 대한 끊임없는 조절하여 당시 상하이 영화시장, 영화공업과의 만남과 융합을 모색하는 영화 실천 활동을 수평적 차원에서 탐구한다.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조선 영화인의 풍부하고 입체적인 영화 실천 활동 현상을 다각도로 구축하고자 한다. 첫째, 피난민이라는 독특한 신분은 조선 영화인이 정신적 모국, 기거한 나라, 떠돌아다니는 민족 이미지를 자신의 영화 창작에 녹여내려고 시도하게 만들었고, 상하이의 특수한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부랑자들이 고국에 대한 사념, 신분에 대한 불안, 시대 경질 배경 아래 다원적 정체성에 대한 곤혹 등을 토로하였다. 당시 동방 할리우드로 불리던 상하이는 특수한 맥락에서의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도시인 상하이와 영화인 상하이는 일종의 공간적 상호작용으로 영화인과 시대를 겹친 영상이자 창작자와 관객이 함께 참여하는 문화적 사상이며, 조선 영화인이 구축한 영화공간에서 정치․경제․문화적 욕구를 표현하는 독특한 표상이 되었다. 둘째,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조선 영화인들의 예술적 성취와 가치, 그리고 상하이에서 갈라진 복잡한 원인과 다원적 행방을 정리하고 1937년 이후 전창근(全昌根)을 비롯한 조선 영화인들의 한반도 복귀 이후의 영화 실천 활동과 초기 상하이 영화 창작의 내재적 연관성을 탐구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영화인들이 지역의 경계를 허물고 상하이에 적극적으로 녹아들어 영화창작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통시적 고증을 하여 한․중간 영화교류에 역사적 참고가 되고자 한다. This paper attempts to place the study of Korean peninsula filmmakers in Shanghai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t occupation in the context of a multidisciplinary intersection of history, culture and communication studies, and to explore the film practice activities of Korean filmmakers in Shanghai in a special historical context within a framework consisting of film history, film culture, film criticism and film theory. Firstly, this study focuses on the Korean peninsula filmmakers who in Shanghai between 1926 and 1937. Taking the development of film art in China and the Korean peninsula in the early days and the contact space created by the cultural exchanges between the two places as a premise, the study examines the reasons for the departure of Korean filmmakers from the Korean peninsula, taking into account the social environment, the development of film, and the film practice of Korean filmmakers in the Korean peninsula before they left for Shanghai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t occupation.Summarising the international developments of the time, the social context of Shanghai's existence as a special social and cultural space, and the specific developments in Shanghai's film culture, industry and policies around the 1930s, the deeper reasons why Korean peninsula filmmakers chose to converge in Shanghai, China. Secondly, the process of Korean peninsula filmmakers' film practice is divided into three different stages: initial entry, integration and maturation based on the different turns of their creative styles. In the context of the film ecology of Shanghai, the film practice of Korean peninsula filmmakers exiled to Shanghai, whose unique cultural and identity attributes constantly collided and merged with the film market and film industry of the time, continues to adapt their own creative styles and film genres in a heterogeneous space. The aim is to construct a rich, three-dimensional landscape of the film practices of Korean filmmakers in Shanghai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t occupation from multiple perspectives and sides. Thirdly, the unique identity of the exile group led the Korean filmmakers to try to incorporate their spiritual motherland, their country of residence, and their national imagination of wandering and dislocation into their own cinematic creations, using the special urban space of Shanghai as a backdrop to express the wanderers' thoughts about their homeland, their uneasiness about their wandering identity, and their confusion about their diverse identities under the changing times. Shanghai, then known as the 'Hollywood of the East', became a unique presence in a special context. As a kind of spatial interaction, Shanghai of the city and Shanghai of cinema are images superimposed on the filmmakers and the times, a cultural imagination in which the creators and the audience participate, and a unique imagery to express political, economic and cultural demands in the film space constructed by the Korean filmmakers. Fourthly, the artistic achievements and values of Korean filmmakers who were in Shanghai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t occupation as well as the complex reasons for their diversion in Shanghai and their multiple destinations are examined, and the intrinsic correlation between the film practice of Korean filmmakers represented by Jeon Chang-geun who returned to the Korean peninsula after 1937 and early Shanghai film production is explored. The aim is to examine the historical evidence of Korean filmmakers who broke the geographical boundaries and actively integrated into the special cultural space of Shanghai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t occupation and achieved remarkable achievements in film production, and to provide historical references and lessons for the current film exchanges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 일제말기 친일문학의 내적논리와 회고의 전략 :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을 중심으로

      박수빈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247807

      본 논문에서는 일제말기(1937년~1945년) 친일문학과 해방기 회고의 전략적 성격을 문인들의 ‘자기규정’과 ‘식민지적 정체성’을 통해 살펴보았다. 일제말기 친일문인들은 대중적 지도자나 사상가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제국일본과 조선 사이의 ‘번역자’로 살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외부적 압력과 문인의 내부적 혼란이 극대화된 시점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해방은 이들을 순식간에 민족의 죄인이자 평범한 인민의 한 사람으로 끌어내렸다. 해방공간에서 친일문인들은 일제말기 제국일본의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조선(인)에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자기변호의 텍스트를 생산해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친일문인들의 해방기 ‘회고’는 문인의 내적 욕망과 외부적 압력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는 점,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사회적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일제말기의 ‘친일문학’과 매우 닮아있다. 본 논문의 기본적인 시각은 제국주의와 주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탈식민주의적 담론의 자장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선행연구와 차별을 두기 위해 일제말기 친일문학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보다는 문인 개개인의 사상적 배경과 문학론, 그들의 식민지적 주체형성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친일문학이 그저 외압에 의한 몰개성한 선전문학이 아님을 규명하려 했다. 이를 위해 각기 다른 사상적 배경과 문학론, 식민지적 주체성을 형성하면서 일제하에서나 해방공간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 세 명의 문인을 통해 친일문학이 일제의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문인 각자의 맥락에서 내면화한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취하는 서술전략과 서술방식의 차이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친일의 범위와 의미를 일제강점기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를 해방 후 회고와 연결시킴으로써 친일의 시작과 완결을 철저히 작가 본인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서론에서는 친일문학에 대한 기존 연구사가 갖고 있던 견고한 민족주의적 시각에 대해 정리하고, 이를 돌파하려는 최근 연구 성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구사 검토를 통해 최근 친일문학 연구에서 주목하는 ‘식민지적 주체’의 문제를 본 논문의 문제의식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또한 친일문학(연구)의 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연구자들이 경직된 태도와 시각을 갖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친일문학 연구의 난점과 방법론의 문제를 정리하였다. Ⅱ장에서는 일제말기 조선문단의 상황과 문인협회의 존재의의를 바탕으로, 세 문인의 ‘친일논리’가 구축되는 과정을 그들의 비평(적)텍스트를 통해 살펴보았다. 일제말기 조선의 문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아시아’ 개념 속에서 근대와 동양을 초극하고 서구에 대항할 가능성을 찾았다. 문인협회는 문인들의 친일행위를 집단화・조직화하고, 일본으로부터 ‘국민문학론’을 수용하는 등 새로운 문학의 방향을 모색했지만 문학론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식민지적 주체의 사상적 균열과 분열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근간인 ‘민족주의’가 친일로 흐르게 되는 양상은 일견 아이러니로 보이지만, 이광수를 통해 보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결코 상반된 개념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의 민족주의는 ‘자강론’, ‘실력양성론’ 등과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동화주의(assimilation)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김동인의 친일논리는 그의 민족의식의 부재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일본이 내세우는 식민지배이데올로기에 현혹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내면화하거나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김동인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조선문단의 대표적 친일문인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일제하에서 문인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일찍이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철저한 옹호자였던 김동인은 문학이 가장 중요한 ‘도구’일 수 있다는 자가당착적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일제말기 김동인에게는 주체성이 결여된 식민지 지식인의 수동적인 모습과 식민지배 체제 내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하는 피식민자의 욕망이 동시에 발견된다. 반면 무력한 니힐리스트이자 체제순응자인 채만식의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일제하 신체제로 빨려 들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채만식의 친일논리는 이광수에 대한 모방으로, 친일소설의 구상은 히노 아시헤이의 영향 하에서 그 기반을 마련하지만, 이광수와 달리 채만식은 조선(인)을 초극하여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조선과 조선문학,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자신을 모두 미달된 존재로 규정했던 채만식은 현실적 제조건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시대에 순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길을 정한다. Ⅲ장에서는 일제말기 문인에게 내면화된 식민지배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인 소설텍스트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이 장에서는 해방 후 삭제된 서사를 복원하고, 지금까지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친일소설텍스트들을 새롭게 의미화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세 문인의 ‘개성’은 문학작품의 제재(題材)와 장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광수의 친일소설은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제재를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조선인에게는 충(忠)을, 일본인에게는 성(誠)의 정신을 주입시키려 함으로써 계몽의 이중적 의도를 보인다. 완전한 내선일체의 완성은 한쪽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광수 특유의 도식적인 인물구도는 ‘내지인-조선인’ 사이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되어 ‘정신적 내선일체’를 완성하고, 원술을 동원한 군인정신의 강조는 징병제 실시를 통한 ‘실질적 내선일체’의 기획을 뒷받침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미완으로 남은 일군의 소설들에서 이광수는 내선일체론과 국민문학론의 허상을 스스로 폭로하고, 불완전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김동인의 친일소설은 모두 백제, 일본,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김동인의 친일역사소설은 텍스트 자체만으로 볼 때에는 친일적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컨텍스트와 함께 읽으면 그 안에 숨겨진 식민사관과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도의 전략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서구를 통해 동양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일본중심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뒷받침한다. 아편전쟁을 제재로 삼은 두 편의 역사소설에서 김동인은 중국의 치욕적인 역사를 통해 反서구의 정서를 정당화하고, 친중적인 서술태도로 제국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뒷받침한다. 일본정신을 반영한 예술가소설에서는 국책문학 창작에 대한 일본인 문사의 고민을 담았지만, 그 함의는 조선 문인의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읽는 것이 옳다. 일제의 고대사복원 계획과 발맞춘 친일역사소설에서는 일본역사관을 바탕으로 백제와 일본의 역사적 친연성을 강조하고, 과거 백제가 일본의 도움으로 당군을 물리친 것처럼 조선이 일본을 도와 중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채만식의 친일소설은 르포문학의 형태를 띤 전쟁소설과 후방의 역할을 강조하는 총후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용맹한 일본군, 후방에서 이를 적극 지원하는 이상적 ‘총후부인’과 ‘군국의 어머니’를 통해 채만식의 소설은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를 선전한다. 일제말기 채만식의 소설 가운데 장편 『아름다운 새벽』은 해방 후 단행본으로 엮이는 과정에서 친일적 요소가 의도적으로 삭제되면서 해석상의 혼란을 야기했다. 본고에서는 삭제된 서사를 복원하고, 채만식 친일논리와 해방기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의미화 하였다. Ⅳ장에서는 해방공간에서 쓰인 세 문인의 회고를 대상으로 친일문인들의 ‘자기규정’과 반성의 ‘전략’적 측면을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특히 복잡한 수사와 정치적 맥락 사이에 숨겨진 텍스트의 ‘진의’를 찾고자 했다. 이광수는 인생의 모든 기간을 대상으로 하는 ‘자서전’이 아님에도 친일협력의 기간을 ‘일제말기’에 한정하고, 그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해 자서전 형식의 회고를 썼다. 자의적으로 서술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민족주의자’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반면 김동인은 이광수를 ‘민족주의를 내세워 자발적으로 친일한 민족적 지도자’로, 자신을 ‘일생 조선문 소설쓰기에만 몰두한 순수하고 무력한 소설가’로 규정함으로써 친일의 그림자를 이광수에게 덧씌우고 자신은 그 비판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문학적 공로를 과장되게 제시하고, 일제하와 미군정의 ‘지배/점령’을 동일하게 의미화 함으로써 자신을 철저한 피해자에 위치시킨다. 채만식은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으로 규정하지만, 그의 회고에는 죄의식과 억울함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의 회고에서는 반복적으로 죄에 대한 인정과 동기에 대한 부정이 중첩되어 서술된다. 자신의 친일을 인정하면서도, 본심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하는 채만식의 회고는 본심과 양심 사이의 팽팽한 힘겨루기를 보여준다. 해방기 채만식의 인식은 ‘조선인 대부분이 민족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자기풍자와 자기폭로를 통해 죄의식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그런 면에서 채만식의 회고는 친일에 대한 반성적 텍스트가 아닌 자기변호의 텍스트임이 분명해진다. 문인들의 친일의 동기와 경로, 해방 후 보여준 자기비판과 반성까지 검토한 후 드러나는 것은 식민지적 주체의 모순과 분열의 복잡한 양상이다. 친일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텍스트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학’이란 한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자, 그 자신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친일문학은 국책을 위한 전략적 글쓰기인 동시에 한 작가의 문학적 지향과 식민지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대상이다. 친일문인은 식민주의 내부의 구조적인 불균등성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정작 자신들의 존재가 이 체제를 상징한다는 것, 나아가 체제를 더 공고히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 논문은 세 문인의 일제말기와 해방기의 텍스트를 통해 식민지적 주체의 형성과 분열, 일제식민지배이데올로기의 환상과 모순, 친일문학에 내재된 피식민자의 욕망과 주체의 한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해방 후에도 여전히 세계의 비주체적 존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서 ‘식민지 근대성’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日帝下 濟州島 初等敎育機關의 形成에 關한 硏究

      문창규 濟州大學校 敎育大學院 1998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연구는 일제하 제주도내 초등교육기관의 형성에 관한 연구로서 당시의 島內 초등학교의 설립과정과 초등육법제의 개정에 따른 초등교육기관 및 교육내용의 변화·발전과정을 제도적 측면에서 분석·고찰한 것으로서, (1) 일제하 제주도 改良書堂에 대한 조사를 통해 제주도 근대초등교육의 근원을 확인하고, (2) 일제하 사립초등학교와 공립초등학교의 설립과 (3) 朝鮮敎育令을 중심으로한 일제의 각종 법규와 이에 따른 교육내용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일본제국주의가 전개한 식민지주의교육과 濟州島의 사정에 대해 개괄적인 면을 살폈고, 둘째 근대초등교육기관을 개량서당, 사립학교, 공립학교 등 유형별로 그 설립 과정을 탐색했으며, 셋째로 일제의 한국침략 기간을 6 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당시 제정·공포된 초등교육에 관한 법제와 그 미친 영향을 고찰한 후, 마지막으로 초등교육기관들이 가지는 교육사적 의의를 찾아 보았는데,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의 근대교육의 여명은 개화파 인사들이 이곳으로 유배와서 벌었던 교학활동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전통적인 漢學 중심의 교학과는 다른 내용의 전개 구조를 갖게 되었으며, 이로써 제주도에서도 근대교육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동시에 근대학교들이 개교를 보게 되었다. 일제하 제주도의 초등교육기관들은 대부분이 서당에서 비롯하여 사립학교, 공립학교 또는 간이학교로 전환되었는데 당시 존재했던 재량서당들이 과도기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서 보면 本島의 근대초등교육기관의 탄생은 정부 주도의 공교육제도에 의했다기 보다는 개화파 인사들의 노력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교육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세워진 이 사립학교들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문맹퇴치를 중심으로 국민보통교육을 실시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동화주의 정책으로 인해 지속적인 교학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일부 사립학교들은 마을공동부담에 의해 설립되어 民立學校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도 폐교를 맞든지 일제의 교육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공립학교로의 전환을 맞게 되었다. 당시 초등교육의 내용면에 있어서는 修身과 국어(일본어), 그리고 산술이 주요 교과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여 지도되었는데, 일부 개량서당에 있어서는 폐쇄될 때까지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아 민족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지주의 교육정책은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와 한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제도적인 면에서부터 차별을 두었는데 심상소학교의 4년과정이나 간이학교 2년 과정의 완성교육은 이를 잘 나타내는 사실이다. 일제하 근대초등교육기관들이 일제의 지배와 간섭 속에서 태동되고 발전해 왔지만 구한말 설립된 제주보통학교는 국민교육을 위한 근대공교육제도로서 제주도 초등학교의 효시가 되었다는 사실에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s on the formation of elementary education organizations. Also, this analyzes how erected elementary schools, how changed or developed educational contents and elementary educational organizations according to the revisions of elementary education laws at that time. So, this study is (1) to find the root of modern elementary education of Cheju through a broad research about village schools on Cheju island under governing of Japan (2) the establishment of private schools and public schools (3) to investigate several laws of Japan, especially Chosun educational laws(朝鮮敎育令), and educational contents. The process is as follows: First of all, I introduced the colonial education of Japan and situations of Cheju in those days. Second, I found how established the modern elementary schools, like village schools(改良書堂), private schools, public schools. Third, I divided the period of Japan's invasion of Korea into 6 steps. Then, I analyze elementary educational law s and their effect Finally, I examined the educational meanings which elementary education organizations have. The summary of the result is as follows: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such great enlightened exiles showed the dawn of modern education in Cheju. That was different from traditional education taught Chinese letters and books, and then, the modern educational thought was introduced. Modern schools were established at that point, also. Derived from traditional village schools, most of the elementary education organizations were transformed into private schools, public schools or simplified schools(簡易學校). In the middle, there were village schools between traditional village schools and later organizations. That is, modern elementary schools came from private schools established by enlightened people, not public educational system by government-centered. These private schools were erected when new educational movement was developed actively. They tried to heightened national consciousness and teach most of people, especially the unlettered. But they failed to teach continuously because of Japan's assimilation policy. Although some private schools were established by pools of people seemed to national school, they were closed or must change to be public schools which had to follow the education of Japan. Only ethics, Japanese and arithmetic were usually taught in elementary schools, but there were some village schools that didn't allow to teaching Japanese until were closed because of national pride. In the colonial education policy of Japan, there was discrimination against Korean children's schools in respect of laws. It appeared at Shimsang 4 years courses or simplified schools 2 years complete education courses. Even though modern elementary education system have developed under the domination and control of Japan, Cheju common schools at the end of Chosen dynasty are the first elementary schools as modem public education system for people. That makes a big difference on 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

    • 일제하 사회주의 잡지의 현실인식에 관한 연구 : 1925년부터 1936년까지를 중심으로

      김문종 고려대학교 2006 국내박사

      RANK : 247807

      This study aims to review the 10 socialist news magazines between 1925 and 1936 under the Japanese regime, then to analyze how they recognized domestic and foreign affairs. The publishers and representative writers of these selected news magazines were closely associated with social movements. The news magazines were also considered as a conduit for socialists. The main finding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socialist magazines appeared legally and officially right after the 3․1 movement when the ownership and publishing of newspapers and news magazines was partially allowed. However, there were many obstacles because the permission by the Japanese regime was a result of deceptive cultural policy. The Japanese government more sensitively responded to the socialists'' related news stories rather than other types of publications. Due to over-censorship and financial difficulty, the life time of most socialists'' news magazines was very short. However, these news magazines did play an important role to disseminate socialism. In doing so, because the news magazines were a part of social movements, the delivery network was also maintained based on social movements. Second, a content analysis with a total of 2,768 news stories and 11,178 pages revealed that about 60% of news stories were editorials. According to the analysis of editorials, the majority shifted from socialism itself during the late 1920s, then to analytic editorials to current domestic or foreign affairs. Another analysis about authorship indicated that most writers were affiliated with socialist groups and Chosun Communist Party(조선공산당), the range of editorial topics they covered was broad across many different issues. Third, their perspective on the international order controlled by the world capitalist super powers was pessimistic during the time period examined. Especially, they considered the international system as a contradictory conflict between capitalism versus socialism during the early 1930s. Then they predicted that the capitalism might be falling down because of their inevitable systematic drawbacks. While their responses about Russia were consistently favorable, and suggested to protect Russia from capitalists'' attacks. As a same line with Russia, they pointed that the movements maintained by the labor/farmer class or communist parties were only way to achieve their original goals. Particulary, during the 1930s, they criticized strongly the groups which were associated with Fascism or capitalistic imperialism, with naming them as a Reformist. Fourth, regarding domestic affairs, the selected news magazines posited that the class and national issues should be discussed together interactively under then the Japanese regime. Therefore, they supported the launch of Shin-Gan Hoi(신간회) which was the largest united line, also tried to solve class and national problems. However, regarding national problems, they consistently emphasized the proletarian hegemony, especially during the early 1930s, which resulted in a much more critical stance to nationalist'' groups. Similarly, regarding class issues, they supported labor/farmer revolution and finally fundamental social revolution, rather than improvements of their rights. Overall, according to above major findings, the socialist news magazines were knowledge base for socialism, and played a key role to lead social movements. Notwithstanding, the clear limits were that they heavily stood up with the classical Marxism in responding domestic and foreign issues, and they were so exclusive to other approaches and types of movements. Additionally, although the news magazines expressed so much interests and favor to the proletarian class, the news stories were too hard for the proletariat to read and understand. In other words, the socialist news magazines during the selected time period were the channel for intellectuals, not for labor/farmer class. These limits were obstacles along with the keen censorship by the Japanese government prevent then socialist news magazine to play as a public medium among people. 본 연구는 일제하 1925년부터 1936년까지 발행된 사회주의 잡지 10종을 대상으로 이들 잡지의 발행 상황을 알아보고, 이들 잡지가 국내외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대상으로 삼은 잡지는 발행진과 대표적 필진이 모두 사회주의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당시 사회주의자들로부터도 사회주의 진영의 잡지라고 인정받은 잡지이다. 또한 잡지가 게재한 내용에 있어서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사회주의 잡지가 합법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 이후 일제가 신문과 잡지의 소유와 발행을 제한적이나마 허용한 시대적 환경 하에서였다. 그러나 그 창간이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기만적인 지배방식의 산물이었기에 발행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난관은 일제의 검열문제였다. 일제는 사회주의 잡지 이외의 다른 언론매체에 대해서도 동일한 검열태도를 취하였으나 사회주의 관련 기사에 특히 더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로 인해 잡지는 빈번한 발행금지와 원고압수를 당했으며, 그 발행기간이 몇 개의 잡지를 제외하고는 매우 짧았다. 그리고 이들 잡지가 영리가 아닌 사회주의의 선전이라는 목적으로 발행되었기에 재정적 어려움도 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이들 잡지는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였다. 또한 잡지는 사회주의 운동을 수행하는 하나의 운동체였기에 잡지의 배포망인 지방의 지국 및 분국도 사회주의 운동에 기반해 운영하였다. 둘째로 총 2,768개의 기사와 11,178쪽의 지면에 대한 양적 분석을 통해 사회주의 잡지가 기사의 약 60% 가량을 논설에 치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논설만을 대상으로 하여 다시 양적 분석을 한 결과 1920년대 후반기에는 사회주의의 이론에 관한 논설이 많았으나 1930년대 전반기에는 국내외적인 상황 변화에 대응하여 현실 문제를 다룬 정세분석적인 논설이 대폭 증가하였다. 잡지에 가장 많은 기사를 게재한 필자를 중심으로 살펴본 분석에서는 이들 필자가 대부분 사회주의 사상단체나 조선공산당에 관여하고 있었고, 그들이 다룬 논설의 주제도 정세분석을 비롯하여 이론, 평론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었다. 셋째로 국제문제에 관한 인식은 연구대상 시기에 세계자본주의 제국에 의한 세계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며,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체제의 주요한 모순을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체제로 보고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러시아에 관한 인식은 시종 호의적이었으며, 자본주의 열강의 위협으로부터 보위해야할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세계혁명운동과 식민지 문제도 러시아를 바라보는 관점의 연장선상에 위치하여 노동자 농민계급 또는 각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운동만이 올바른 것이고 이들에 의하여 그 목적이 달성될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는 파시즘체제와 결탁하거나 제국주의와 협력한 부류를 반동적 또는 개량주의적이라고 일컫고 이들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넷째로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당시 식민지라는 조선의 상황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 결과로 일제하 최대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창립을 지지하였고, 이를 통해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는데,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여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매우 강하게 드러냈다. 계급문제에 있어서도 노동자 농민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강조하여 일상적인 권리획득문제보다 원칙적인 사회주의혁명에 더 치중하였다. 이상과 같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당시 사회주의 잡지는 일제하 사회주의 사상의 지식원이었고 운동을 이끈 견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잡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고민하였고 이를 반영한 것이 논설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하 이러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잡지가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현실을 인식하고, 그 이외의 사상과 운동방식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였다. 특히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1930년대 들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영도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진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강하였고, 이에 따라 민족운동의 범위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잡지가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하여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했지만, 반면에 잡지가 게재한 논설은 이들 무산계급이 읽고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그들은 잡지 편집진에 대해 ‘쉽게 쓰라’고 요구하였지만 거의 모든 잡지는 국한문체를 고수하였다. 노동자 농민의 잡지가 아닌 지식계급의 지식계급을 위한 잡지로서의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검열로 인한 발행의 어려움과 함께 당시 사회주의 잡지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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