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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종교의 상관관계에서 본 팬데믹 시대 한국교회 위기 연구 : 폴 틸리히 신학을 중심으로
최요셉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24 국내석사
중세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문화를 형성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틀(frame)이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종교를 위협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과학과 철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계시의 객관성이 의심받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칸트는 종교를 도덕의 영역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감 정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틸리히는 그러한 영역들에 종교를 위치시키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보았고, 종교란 “인간 정신생활의 모든 기능에 있는 깊이의 측면”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이로써 종교의 영역은 넓게 확장되었고, 종교와 문화 사이의 커다란 간격이 좁혀지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한국교회는 국가와 세속 문화에 크게 대립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보이곤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교회는 그토록 갈등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었을까? 본 연구에서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는 능력이 부재했던 교회의 모습 속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코로나19를 통해서 교회는 교회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멀찍이 떨어져 이원화되어 있었음을 확인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급격한 속도로 기술과 지식이 발전하고 다원화되고 있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세상과 교류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이 필요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던 중요한 이론가들의 주장을 살펴보고, 팬데믹 시대에 한국교회가 겪었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제시한다. 리처드 니버와 본회퍼는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문화 이해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러한 문화 이해 방식이 과연 기독교 중심의 유럽 국가들이 아닌 다원화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할지 의문이 든다. 그들의 이론에서는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하면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데, 그리스도가 낯설거나, 혹은 종교 자체가 낯선 이들에게는 그러한 문화 이해가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서의 종교를 근간으로 문화 이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어떨까? 트뢸치는 과감하게 기독교를 상대화함으로써 그러한 시도를 해나갔다. 그는 여러 종교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역사적 상대주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종교의 절대성에 부당함과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서는 분명히 기독교의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존재했다. 트뢸치가 기독교의 교의적인 내용을 대부분 포기함으로써 기독교 고유의 정체성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트뢸치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베버는 종교의 본질적 내용보다 윤리적 요소에 더 관심을 가졌고,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신학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 그렇게 종교와 문화의 적절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틸리히의 이론이다. 그의 독특한 신학 방법론인 상관관계의 방법을 통해 신학은 문화 모든 영역과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실존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이라는 관계 속에서 신학이 다양한 삶의 영역들과 맞닿게 되고 하나님을 요청하게 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삶과 신앙이 더 이상 멀찍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회가 바이러스라는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때로는 세상의 기술과 지식을 빌리고, 심지어는 세상의 요구대로 따라야했던 상황도 발생했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이 한 번 만 왔다 가리라는 법은 없기에, 교회는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여 세상과 긴밀히 교류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길러 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회가 갖고 있던, 세상과의 교류를 단절하도록 하는 요소들을 버려야 할 것이다. 종교와 문화를 단절시키는 요소들 은 사이비 종교 안에서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반면교사 삼고 새롭게 다가올 미래를 잘 준비함으로써 교회가 다시금 생명력을 되찾기를 바란다.
윤영란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2004 국내석사
현대사회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다원주의 역사 즉 발생하게 된 배경 및 발전과정과 종교 신학자들의 주장하는 신학전개를 살펴보았고 다원화 시대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하기위해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종교다원주의 현상은 단일적인 이유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이 얽혀져서 기독교가 오랜 역사적 발전의 과정을 거쳐 대두된 사상으로 시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결과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 종교 상황에 처했던 것은 오늘날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어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온 혼합주의적 종교운동이었다. 그 이후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1960년대 중반부터 철학과 종교 신학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적 견해에서 포용주의를 거쳐 다원주의에로 발전의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신관은 전통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중심이라는 견해로부터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가 있으며 모든 주요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다양한 반응이라는 다원론적인 변천이다. 고 주장한다. 다원주의는 특별히 기독교를 절대화시키는 것을 반대하여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신적 실재에게로 독립적으로 나아 갈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하며 데니스Z 옥콜롬, 티모스R 필립스 편저, 이승구 역, 『다원주의 논쟁』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 22. 모든 종교는 구원에 있어서 상대적이며 전도는 기독교 제국주의의 확장에 불과하며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구원을 반대하여 신중심의 신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신은 결코 인격적인 신이 아님을 시인하여 기독교의 신관을 반영하기보다는 힌두교의 절대적 존재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 사람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관심, 즉 선(善)자체, 진리(眞理)자체, 무한자(無限子), 하나님 등으로 대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힉은 코체르니쿠스 혁명으로 설명하면서 절대적이게 하는 주체를 교회나 그리스도가 아닌 신중심주의를 주장하여 범신론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으며 각자의 종교는 구원에 이룰 수 있는 다른 길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만인 구원론” 입장이다. 이들은 모든 종교의 평등을 주장하며 만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며 모든 사람이 모든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이룩될 것으로 설명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성경이 계시의 산물이며 신앙과 모든 인생 삶을 절대 규범임을 부인한다. 이들은 신화적으로 해석하고 타종교의 경전과 동일하게 성경을 상대화하였다. 신 중심적 종교다원주의는 종교적 헌신의 역동성을 가져오는 원천이 되는 기독교의 신비적 측면 삼위일체론, 육화론, 성사 론과 같은 계시적 진리를 약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매우 위험한 이단 사상이다. 종교다원주의는 교회중심, 그리스도중심에서 신중심주의를 강조하지만 그 신은 구원을 계획하고 이루어 가시는 인격적인 신이 아닌 힌두교의 절대적 존재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신이라 영적 능력이 결여되고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유일한 성육신의 종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이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타종교 신앙인들 에게도 일반 은총은 주어져 있다. 그러나 특별은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의 문제는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한 것임을 깊이 알아야 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의 말씀은 당시의 여러 이방 종교의 배경 하에서 주신 말씀이었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파괴하고 철저하게 세속화시켜 버리며 혼합 주의로 흐르게 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 신앙과 종교적인 독선 혹은 배타성이라는 말은 구별해야 한다. 구원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기 떄문에 우리만 독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전도 대상을 삼는 다는 점에서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근거한 유일한 구원의 종교이다. 이 계시는 역사에서 단 한번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으며 그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이외에 종교들은 인간의 명상 내지는 윤리 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참 종교가 될 수 없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교회가 모든 종교에 다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선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하는 주된 목표도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서 구원받게 하는 구원사역에 있지 않고 정의와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되, 기독교인이 보다 나은 기독교인이 되게, 불교도가 보다 나은 불교도가 되게 선교하라는 것이며, 이러한 상호 성장을 통하여 신국의 건설은 진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구원관은 영혼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키고 있으며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진 자를 그 종교에 더욱 충실한 자로 도와준다는 식의 선교관의 오류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범신론적 보편주의와 다원주의적인 신학에 의한 선교관은 성경적인 선교관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원주의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므로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의 회개는 요청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가 다원화된 시대에는 걸 맞는 종교 신학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이 신학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종교를 시장 논리에 적용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써 문화권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며, 교회의 충실한 교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대화라는 토론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는 선교전략을 중시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 하는 일을 중지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되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자는 ’구원은 오직 예수로만’을 외쳐 그들로 하여금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의 은혜에 들어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같은 회개와 변화는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 축복을 받게 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순수성은 먼저 성경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내용의 정확성과 무오성을 믿으며 크리스챤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최선의 기준과 척도가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흘 만에 다시 몸으로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것을 믿어야 하며, 그로 인하여 인류에게는 구원의 길이 마련되었고 이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그를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는 “복된 소식”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문화나 상황에서도 수정되거나 부인 할 수 없는 메시지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영적인 원리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요, 또 인간으로 유일하며 성육신 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그를 떠나서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예수가 세상의 구주라 하는 것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의 인격적인 결단으로 예수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전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세계로 ‘초대된 인간’이요,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복음의 빛’아래 선 타종교인들이다. 복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이기 때문에 대화를 필요로 하지만 그 기본 구조는 ‘부름’에 있다.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토대로 선포되는 기독교의 복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떠한 상황,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동일하고 불변하다.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의 거센 도전 앞에서 교회가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하나의 유행처럼 흘러가는 신학 사조로 여기는 일은 교회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가 힘을 얻어 가는 이 시대에 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주의적 대안들을 제시하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부족의 신이 아니며 열방의 신이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와 구주되심을 은혜로 알고 선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선물과 은혜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를 나누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단 될 수 없는 과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로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선교적 실천 방안을 제시해 보면, 첫째 온전한 말씀 선포에 있다. 우리가 종교 다원주의 신학에 맞서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선교적 사명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길은 성경에 있다. 성경은 기독교를 낳았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며 기독교의 기초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응수하였고 바울이나 사도들도 역시 성경에 기초하였다. 둘째는 타종교와의 관계 정립이다.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배타성이지 사람이나 상대에 대한 배타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하되 타종교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종교를 인격적인 차원에서 또 일부 일반 진리가 존재한다는 면에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물론 기독교는 타종교 안에 반 하나님을 사탄적 세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기 타종교를 비판하고 정죄하되 타종교 안에 나타나는 인간적 문화적 요소는 참 종교에 이르는 준비적 역할을 할 수 있음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비판적인 자세와 아울러 열린 마음을 가지고 타종교에 임하여야 한다. 셋째는 기독교인의 인격과 삶의 변화이다. 종교 다원주의 의 선교는 거리낌이 없는 담대성과 함께 ‘철저한 겸손’을 겸비해야 한다. 선교가 우리자신이 만들었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에 전달자는 겸허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말과 행위와 능력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름을 날리며 당당하게 정복해 나간 분이라기보다 오히려 그의 연약성과 고난을 통해서만 나타내는 힘을 가지신 분이었다. 또한 한 초대교회성도들은 이방종교의 영향아래서 극단적인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도리어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성장하여 갔다는 사실은 그들 속에 내재된 복음의 능력이 세상의 종교와 차별됨을 분명히 이방인들에게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상적으로 평범한 모든 생활에 관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의 구체적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삶의 변화가 얼마나 필수적인 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종교와의 대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대화의 전제도 중요하다. 다원주의적 종교 대화란 기독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혼합주의 운동이다. 기독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대화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라고 볼 수 없다. 혹 종교 간의 대화가 있다면 그것은 선교적 차원에서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신학적인 소극성과 현실 도피주의, 반 지식주의, 교조적 외식주의를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그것들에게 비롯된 종교 다원주의를 비롯한 기독교 사신신학의 현대적 변형들에 대해 신학적 실력으로 맞서고 신앙적 사랑으로 올바른 길을 지시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외면하고 세속과 타협하는 온갖 이단사설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피 흘려 이어온 정통신학에 통하고 오늘에 살아 역사 하는 보수신학에 합하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빛 가운데에로 더욱 더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포용력을 가져야 함은 마땅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원을 양보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종합을 탐구하기 위해서 거기 동참하거나 다른 종교들과 합류하여 그 본질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만일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증언적 입장에 서지 못할 경우 결국 기독교 존재는 무의미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흑암의 세력의 미혹의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 거짓 예언자들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종교적인 혼합 주의로 발전시켜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를 부정하는 그들과는 거론할 가치도 없으며 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유일신론을 주장하며 이교적 혼합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맞서서 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