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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에 나타난 한국적 사회복지 연구 : 애민?진황 편 중심으로
문은순 서울한영대학교 일반대학원 2021 국내박사
본 연구의 목적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애민(愛民) 편, 진황(賑荒) 편을 통한 18, 19세기 조선조의 사회복지정책이 21세기 한국사회복지정책에 어떠한 시사점이 있는지를 알아보는데 있다.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선행연구들의 문헌연구를 통해 이론적 배경을 고찰하고 목민심서 애민 편과 진황 편에 대한 문헌의 내용분석을 실시하였다. 연구의 분석틀은 클라우스 크리펜도르프(Klaus Krippendorff)의 내용분석 과정을 활용하였고 사회복지통합관리망 행복e음 영역인 한국사회복지지표 12영역을 기준으로 목민심서에 나타난 조선조 18, 19세기 복지내용을 유목화 하였다. 그리고 OECD 국가행복지수(NIW)를 토대로 경제적 요인, 사회적 요인, 환경요인으로 분류하여 분석비교에 활용하였다.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애민(愛民) 편, 진황(賑荒) 편에서 도출된 사회복지 내용은 총88문단 중 78문단(89%)이 한국사회복지지표 9개 지표의 영역과 유사하게 나타났다. 총88문단에서 도출된 한국사회복지지표는 사회통합 25문단 28.41%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소득․소비․자산 20문단 22.73%, 가구․가족 9문단 10.23%, 교육․훈련 7문단 7.95%, 범죄․안전 6문단 6.82%, 건강 5문단 5.68%, 생활환경 3문단 3.41%, 노동 2문단 2.27% 주거 1문단 1.14% 순이었다. 한국사회복지지표와 유사하게 도출된 78문단에 대한 OECD 국가행복지수(NIW)지표는 경제적 요인 25.64%, 사회적 요인 62.82%, 환경요인 11.54%로 나타났다. 목민심서 애민 편, 진황 편의 내용이 21세기 한국사회복지정책에 나타난 부분을 살펴보면 첫째, 전염병 및 각종 재해에 대한 예방대책을 포함한 재해구호 및 긴급지원정책. 둘째, 생활안정과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생계지원 우선 복지로 가구․가족의 기능회복을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 셋째, 목민심서 진황 2조 권분(勸分)의 법에 대한 복지정책으로 사회보장의 소득재분배. 넷째는 개인․사회 행위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복지 등이었다. 본 논문은 18, 19세기 조선조 사회복지정책은 공공부조의 성격을 띤 사회보장제도이고, 21세기 현대 한국사회복지정책과 유사성의 정도를 밝혔다는 것과 한국적 사회복지정책의 내용과 유형에 대한 자료와 데이터를 제공하였음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들을 기반으로 사회복지정책의 기본방향, 공공사회복지지출 확대, 사회복지전달체계 조직개편에 적용할 수 있는 제언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를 갖는다. 후속연구로 목민심서 12편 중 애민(愛民) 편, 진황(賑荒) 편 외 나머지 10편의 연구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목민심서 애민 편, 진황 편의 복지개혁 논의를 통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시․도지사, 각 기관, 개인 등의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을 볼 수 있었다. 21세기 한국 사회복지과제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복지의 전반적인 영역에 큰 변화로 다가올 것이다. 사회보장 사각지대 발굴 및 형평성 있는 지속적인 개혁과 사회체계, 직업구조, 계층별 교육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사회복지정책이 수립되어야 하겠다. This study aims to find out what implications the social welfare policies of the Joseon Dynasty in 18th and 19th century have for Korean social welfare policies in the 21st century through the two chapters of Mokminsimseo entitled Aemin and Qinhwang. In order to achieve the purpose of the study, the theoretical background was examined through the preceding researches and the contents analysis method of the literature were conducted on the two chapters of Amin and Qinhwang in Mokminsimseo. This study utilized Klaus Kripendorff's content analysis process analysis frame and classified the welfare contents of the Joseon Dynasty in 18th and 19th century based on the 12th area of the Korea Social Welfare Index of Haengbok e-Eum in the social welfare integration network. Based on the OECD National Happiness Index (NIW), it was classified as economic, social, and environmental factors and used for analysis comparison. To summarize the findings: The social welfare contents derived from Aemin and Qinhwang in Mokminsimseo were similar to the areas of 9 indicators of Korean social welfare indicators, 78 paragraphs (89%) of the 88 paragraphs). Korea's social welfare indicators were the highest at 28.41% in 25 paragraphs of social integration, 22.73% in 20 paragraphs of income․consumption․assets, 10.23% in 9 paragraphs of households․families, 7.95% in 7 paragraphs of education․training, 6.82% in 6 paragraphs of crime․safety, 5.68% in 5 paragraphs of health, 3.41% in 3 paragraphs of living environment, 2.27% in 2 paragraphs of labor, 1.14% in 1 paragraphs of residence. Compared to the OECD National Happiness Index (NIW) index, 25.64 percent of economic factors, 62.82 percent of social factors and 11.54 percent of environmental factors were related to 78 paragraphs. The contents of the social welfare policy in Amin and Qinhwang of Mokminsimseo found in 21st-century Korean social welfare policy were as follows: First, disaster relief and emergency support policies including preventive measures against infectious diseases and various disasters. Second, basic livelihood security system for restoring the functions of households and families with priority welfare support aimed at stabilizing living and improving quality of life. Third, redistribution of income of social security as a welfare policy for the Act of the sharing in Qinhwang of Mokminsimseo. Fourth, various educational welfare programs to promote changes in individual and social behavior. This study is meaningful in that the 18th and 19th century Joseon Dynasty social welfare policies were social security systems with the nature of public assistance, and that they revealed the degree of similarity to modern Korean social welfare policies in the 21st century. Based on these results, the research is meaningful in that it has presented proposals that can be applied to the basic direction of social welfare policies, expansion of public social welfare expenditure, and reorganization of social welfare delivery systems. As a follow-up study, out of 12 chapters in Mokminsimseo, 10 other chapters are needed to be studied in addition to the Aemin and Qinhwang. The importance of social solidarity among the government, local governments, city and provincial governors, institutions, and individuals could be seen through the discussion on welfare reform based on the content of Aemin and Qinhwang in Mokminsimseo. The 21st century Korean social welfare task will come as a major change in the overall welfare sector of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Social welfare policies should be established at various levels, including finding blind spots in social security and continuous reform, social system, job structure, and education by social stratum.
조선은 민본주의를 내세운 이상적인 유교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민본주의는 국민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기는 유가 정치사상의 핵심이다. 맹자는 민본주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 기준은 民이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는 것이다. 유가의 통치사상에서 본다면 民은 곧 하늘이자 나라의 근본이다. 이런 관점에서 군주는 民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愛民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정의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공자는 節用愛人을 말했다. 쓰는 것을 마음대로 하게 되면 재물을 낭비하게 되고 재물을 낭비하면 반드시 백성을 힘들게 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주자는 民의 어려운 삶을 보살펴 주는 것을 애민이라고 말하고 있다. 애민의 시작은 공자의 위정이덕 즉 덕치에서 시작된다. 애민사상은 군주의 입장에서 민을 중시하고 민을 경외하는 가운데 덕치를 통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잘 먹게 해주는 실천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에서 애민사상은 민본주의를 통해 건국과 함께 통치의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수용되었다. 정도전은 인정과 덕치를 펼 것을 주장했다. 또한 백성을 임금의 하늘이라고 했다. 이 사상은 조선 초기의 통치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며 세종은 이러한 인식을 애민사상으로 표출하게 된다. 세종은 철저한 유학자였다. 경서를 글귀로만 풀지 않고 마음의 공부를 했다. 백성을 귀하게 여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본다는 생각으로 백성을 대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의료, 농사, 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의 평가는 60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업적을 이룬 근간에는 유가 정치사상과 민본정치를 실천적으로 이뤄내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는 이상적인 목표를 내세운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백성들의 삶의 아픔을 깊숙한 곳에서부터 찾아내고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한 방법으로 애민사상을 실천하여 이뤄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다. 愛民爲政, 愛民之意, 愛民之主를 실천한 유학자이자 통치자였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은 백성들에게 편안한 삶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애민이다. 세종은 백성들의 먹고사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을 군주의 가장 큰 책무로 여겼다. 철저하게 백성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했다. 세종의 애민사상 발현의 핵심은 철저하게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있었다는 점이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겉모습 현상만을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문제에 내재된 근본 원인을 찾아 이를 제거하거나 대체할 대안을 만들어 낸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에서도 이러한 접근 방식이 있었다. 복지나 의료정책에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조선 건국 초기의 문제는 그대로 상존한다. 지도층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삶은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소득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정치인, 관료, 교수, 전문가, 기업으로 이어지는 기득권층의 형성은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다. 이러한 문제는 세계 각 나라가 대부분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국가는 일자리를 만들어 소득을 증대시켜 주어야 한다. 제대로 된 의료를 받지 못하는 계층에게 적절한 의료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 소득을 만들지 못하는 계층에게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어려운 가정의 자녀에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이른바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세종의 애민사상, 더 나아가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세종의 애민 실천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서구의 정치사상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자의 인치와 덕치를 기본으로 하는 위민 정치사상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갖는다. 또한 공자의 정치사상을 잇는 맹자의 민본주의와 이를 실천하는 세종의 애민사상 역시 시대를 초월한다. 세종의 애민사상과 그 실천하는 방식은 작금의 위정자들에게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이라는 점이다.
김정은 통치 리더십의 기원과 동학, 지속 가능성에 관한 연구 : 북한 '수령론'과 서구 리더십 이론의 교차적용 및 델파이 분석
This study analyzes the leadership of North Korea’s supreme leader Kim Jong Un during his 10 years in office, including the period of succession. Starting with the question, "What is the source of Kim Jong Un’s leadership and where does its legal and institutional legitimacy come from?” the study identifies the characteristics and dynamics of Kim Jong Un’s leadership and then answers the question of whether the Kim Jong Un regime can develop a sustainable leadership in the future. First, the study investigates the “Suryong theory” and the Successor theory” — both of which are theories on North Korea’s ruling system — as a framework in analyzing Kim Jong Un’s leadership. Second, Burns’(Burns, J. M.) “transformational leadership theory” is applied. In particular, the study focuses on the fact that Bass’(Bass, B. M.) "pseudo transformation leadership”, a more evolved theoretical framework with ethical and moral elements to the transformational leadership theory, has more suitable factors in analyzing the leadership of authoritarian or autocratic states. Kim Jong Un's leadership is analyzed in a multi-dimensional and a diverse manner through a new crosswise research method applying both Western leadership theory and a theoretical framework containing the logic of North Korea's Suryong dictatorship and hereditary succession. In addition, the Delphi analysis involving 30 expert panel members was conducted to make the research more empirical. Through this the study attempts to expand the methodological horizon on North Korean studies. The study analyzes that the legitimacy of Kim Jong Un’s leadership was built and inherited by blood ties(so called “Baekdu bloodline”) of the Kim Il Sung family, rather than his personal ability or qualities. This is also confirmed and verified from the Delphi survey. Based on an in-depth analysis of Kim Jong Un’s governance style and leadership behavior, the study proves that his leadership is the quintessence of a “pseudo transformational leadership”. Kim Jong Un's leadership can be defined as a “commiserative Suryong dictatorship”. Considering that commiseration has an antagonistic nature against dictatorship, the somewhat paradoxical combination of the two reflects an increasing tendency of appealing commiseration to its elites and residents due to the growing limitations of the Suryong dictatorship. The application of Western leadership theory on the Suryong dictatorship concludes that the characteristics which can be defined as “pseudo transformational leader” were observed in Kim Jong Un’s governance leadership. These naming — which reflect the characteristics of Kim Jong Un’s leadership — suggest a lack of “ethics and morality”, one of the virtues that a top leader must have in his governance activities. A “pseudo transformational leader” implies an exploitative and unilateral flaw in the “transformational element” characterized by Kim Jong Un's leadership. The Delphi analysis on the “sustainability of Kim Jong Un’s leadership” was carried out to determine the durability or future prospects of the North Korean regime. As a result, “politics for people” and “people's livelihood” were seen as positive factors of Kim Jong Un’s leadership, while most panel respondents answered “economic difficulties” and “fear politics” as the negative factors. A notable result of the Delphi investigation is that relatively many experts responded that a fourth hereditary succession is “possible” after the Kim Jong Un regime considering the North Korean power system. In particular, a “horizontal hereditary succession” (conceptualized as ‘3.5th hereditary succession’ in this paper), which will lead to the Kim Yo Jong regime, is suggested as a viable alternative given the young ages of Kim Jong Un’s children and the possibility of his health being affected 본 논문은 후계 기간을 포함해 집권 10년 동안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통치 리더십을 주제로 연구한다. ‘김정은 리더십의 원천은 무엇이며 그 법적, 제도적 정당성은 어디서 기인하는가’라는 연구 질문에서 출발해 그 특성과 동학(動學, dynamics)을 규명해보고 김정은 체제가 향후 지속가능한 리더십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한다. 김정은 리더십을 분석하는 틀로 첫째, 북한의 내적 통치 이론체계인 수령론과 후계자론을 연구했다. 둘째, 서구 리더십 이론 가운데 번즈(Burns, J. M.)의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을 적용했다. 특히 변혁 리더십 이론에 윤리·도덕적 요소가 가미된 보다 진화한 이론 틀인 바스(Bass, B. M.)의 ‘유사(pseudo) 변혁 리더십’ 이론이 권위주의 혹은 독재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분석에 적합한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북한의 수령 독재와 권력세습 논리를 담은 이론 틀과 서구 리더십 이론을 교차 적용하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통해 김정은 리더십을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도를 했다. 또 중견 전문가 패널 30명이 참여하는 델파이(Delphi) 분석을 병행함으로써 보다 실증적인 연구가 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북한 연구의 방법론적 지평을 넓혀 보려 시도했다. 집권 기간 김정은의 리더십의 양태나 변화를 들여다보기 위해 △후계자 시기 (후계 내정 및 추대~김정일 사망) △권력 과도기 (집권~2016. 5. 노동당 7차 대회 직전) △권력 공고화기 (당 7차 대회~현재까지)로 시기를 구분해 통치 활동의 특성을 분석했고, 리더십의 다이내믹스를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기 위해 별도로 하나의 장(章)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다. 후계자 기간 연구에 청소년기를 포함한 것은 김정은의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있어 10대 시절 수년 간의 스위스 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연구 결과 김정은의 통치 리더십은 자신의 실력이나 풍모·역량보다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라 불리는 김일성 일가의 혈연에 의해 구축되고 세습된 ‘정통성(legitimacy)’이 부여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본 연구가 문헌 조사 외에 보다 실증적인 결과 도출을 위해 시행한 델파이 조사에서도 확인, 검증된다. 또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이나 리더십 행태를 심층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그의 리더십이 ‘유사 변혁적 리더’의 전형임을 입증했다. 김정은 리더십은 후계논리에 따른 선대로부터의 권력 획득과 카리스마의 차용과 상징조작 같은 요소로 볼 때 전통과 기존 경로에 의존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한 수령’과 ‘잘못을 자인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등 이전 지도자와 차별화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김정일 선군정치의 기원을 과장·왜곡한 시도에 대해 과감히 시정을 지시하고, 선군절(8. 25)을 사실상 폐지토록 함으로써 ‘조작된 신화’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도 본 논문의 연구 과정에서 북한 내부 문헌을 통해 확인했다.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김정은의 리더십은 ‘애민(愛民)형 수령 독재’로 규정될 수 있다. ‘애민’은 본질적으로 수령 독재와 길항(拮抗, antagonism)적 성격을 띠는 데, ‘애민 독재’라는 다소 역설적 조합은 김정은 체제 들어 수령 독재의 한계 노출에 따라 엘리트와 주민에 소구(訴求)하며 애민의 외피를 두르려는 경향이 높아진 현실을 반영한다. 서구 리더십 이론을 적용한 김정은의 통치 리더십 분석의 경우 ‘유사 변혁 리더’로 규정될 수 있는 특성이 추출됐다. 김정은 리더십의 특질을 반영한 이들 네이밍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통치 활동에서 최고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인 ‘윤리·도덕’의 결핍이었다. 유사 변혁 리더로 김정은을 규정한 것은 그의 리더십에서 ‘변혁적’ 리더십 특성이 발견되고 있지만, 그것이 구성원(엘리트와 주민)과 리더의 공존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착취적인 양상을 띤다는 점 때문이다. 북한 체제의 내구성이나 미래 전망과 관련되는 ‘김정은 리더십의 지속 가능성’ 문제는 보다 실증적인 결과 도출을 위해 델파이 분석을 통해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김정은 리더십의 긍정적 요인으로는 ‘애민정치’와 ‘민생’이 꼽혔다. 리더십에서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건 ‘경제난’과 ‘공포정치(숙청)’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델파이 조사를 통해 흥미로운 결과도 도출됐는데, 김정은 이후 북한 권력체제와 관련해 4대 세습 가능성을 비교적 많은 전문가가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정은의 자녀가 나이가 어리고 김정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여동생 김여정으로의 ‘수평적 세습’(이를 본 논문에서는 3.5대 세습으로 개념화)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대안이란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이나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중대 변수로는 북한 비핵화와 미·중 패권경쟁 등에 의견이 수렴됐고, 정부가 대북 문제와 관련해 초당적 협력과 남남갈등 해소책 마련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정책 제언이 나왔다.
From the end of 19th century to mid-1910s when Chosen (朝鮮) was colonized, Horace G. Underwood(1859.7.19~1916.10.12, hereinafter “Underwood”) was a missionary Chosen. He was one of the earliest Protestant missionaries to Chosen and responded sensitively to the needs of the people and practiced ‘love for the people’ (Aemin in Korean), communicating the Gospel through the education of the colonized Chosen people by analyzing the environment and the changes connected to the world. In the beginning, Underwood did not intend to go to Chosen. When he was child, he heard stories about Indian missionaries and had dreams of being a missionary. Underwood was raised in the faith of his parents who were influenced by the Scottish Presbyterian Church, and after moving to the United States, he became a member of the Grove Reformed Church with its Calvinist theology. His pastor, William V. V. Mabon, taught Underwood godly faith and was also an academic guardian. After entering the 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 under his own initiative, Underwood decided to become a missionary. He considered India to be the mission destination until four months prior to his graduation. In the winter before graduating from the New Brunswick Seminary, when Underwood was informed “12 to 13 million people are living without knowing the Gospel,” he thought other missionaries would likely be more suitable for the place than he. However, at the end of October of the same year, after reading ‘Corea, the Hermit Nation’ (1882) while attending the Fourth Annual Convention of the American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and listening to the lecture, “Wait Until I Am Convinced of the Responsibilities of Choice and Callings,” Underwood began to have an internal conflict of choosing the location for his mission. Underwood’s conflict was resolved after reading Rijutei’s petition, “the Gospel for Corea.” Underwood was convinced that Rijutei’s petition was his calling to Chosen. In early February of 1884, he applied to his Reformed Church to be a Chosen missionary. Surprisingly, he was rejected due to financial issues. Then Underwood applied to the BFMPCUSA because he heard that Ellinwood, who learned about Kim Ok-Kyun’s petition, was promoting mission to Corea. On July 28, 1884, Underwood was appointed as a missionary to Chosen, and on December 31 of the same year he departed from San Francisco with the party of Japanese officers and arrived in Yokohama, Japan on January 25 of the following year. This fact was confirmed by comparing and analyzing the records of the members of the party of officers,『歐美巡廻日誌』, and Underwood’s personal letter. The party of Japanese officers, who visited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to make an inspection of their advanced military for about a year, were those responsible for leading the modernization of Japan and East Asia. Many of the officers were deeply related to Chosen including Miura Goro. However, the basis for mutual exchange between them has not been confirmed. Underwood arrived in Seoul on April 5, 1885, and began his career as a teacher at “Chejungwon,” the hospital of the king of Chosen. In the course of the transition to the treaty system, Chosen first signed a treaty with the United States. At that time, the perceptions and responses of the Chosen government towards the Western nations were largely divided into three parts: ① Self-strengthening-movement position based on the doctrines of Chu-tzu and accepting the New-Learning as a promotion of public welfare, ② the civilization-era viewpoint that accepts Western civilization as a whole, and ③ the modified reformist position, maintaining an eclectic position against the flourishing of Western civilization. This implies that various activities by Underwood were carried out during the changes in foreign policy and political events impacting Chosen and the views of Chosen intellectuals. In the early stages of his career, Underwood maintained a loyal position and aimed for personal safety and effective missionary work. Underwood began a Sunday school regularly for boys and established the “Underwood Orphanage” school for orphans who were not assisted by the government. Underwood Orphanage was established based on the model of a British orphanage. Its elementary school curriculum cultivated the intellectual ability to recognize the Gospel and the basic literacy that was essential to all citizens. Underwood pursued a modern education project to create a higher level of school, in which every young adult could receive education at an appropriate age. He established a grand plan for elementary, middle and high school education, and made the school the center of civil enlightenment, a mediator of civilization and a contact point for Christian missions.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1897, there was a change in worldview when Horace N. Allen became the diplomatic minister; Underwood actively pursued the civil enlightenment through church planting and publishing newspapers. He encouraged the establishment of schools in every church he found, and attracted the YMCA with the aim of preventing social confusion stemming from the outrage over Japanese attempts to dominate Chosen and to provide a place for the children of the Yangban class. Realizing that all citizens must be enlightened and that all men are equal before the gospel, apart from the mission’s policy, it was a project to secure an area for cultural activities where the children of the upper classes were able to accept the spirit of Christianity without negatively affecting their self-esteem. Meanwhile, Underwood was recognized as the man-behind-the-scenes of the ‘Event of 105 People’. His son, Won Han-Kyung (Horace H. Underwood), testified that Japan attempted to use this incident to deport Underwood. Underwood, who had witnessed the assassination of Empress Myeongseong and the Chun-Sen-Mun Event, trembled once again to see the cruelty and inhumanity of the Japanese through the ‘Event of 105 People’. After the incident, he further devoted himself to establish colleges in order to provide “better education” to Chosen citizens. While confronting with the Western civilization in the process of the transition to modern society, Chosen was colonized by Japan. In response to the changes in the order of East Asia, missionaries usually paid close attention to the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their mission environment. However, Underwood, as a “missionary to Chosen citizens”, did not ignore their suffering. In his sensitive response to the need of more than just converting Christians, Underwood, with his excellent insight and perspective, presented the best way and choice for the well-being of the Chosen people and for the independence of the community. Underwood was convinced that “if the citizens of Chosen had been educated better, they would endure better with the national hatred that they are facing”, and promoted the establishment of Chosen Christian College. Underwood sympathized more with the citizens of Chosen. Being aware of ‘man of Hwayuk (making all the goods in the natural way of heaven and earth)’, that is, ‘being a citizen of Chosen’ and ‘becoming a citizen of Chosen’, Underwood aimed for “‘Being’ a citizen of Chosen” in the present world and chose university education as the best method to lead and live as Chosen citizens. The purpose of the college was to infuse a will in the Chosen citizens, who have an inherent spiritual culture and heritage, to resist the forces that deny or negatively affect them. In addition, the purpose was “Aemin Education” to enlighten people, brighten their surroundings, resurrect Chosen, discuss with the king for a better world, and nurture king’s retainers who can expostulate the absurdity of power. The conflicts that arose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colleges were caused by the principles of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nd narrow-minded theology (doctrines) that ignored the Chosen citizens who were suffering and sacrificed because of racism, supremacy and expansionism of imperialism. Underwood responded to the groaning of the Chosen citizens who called out to him and accepted the Gospel subjectively and voluntarily, and stayed together with them. Underwood traveled back to the United States due to his deteriorating health and died on October 12, 1916 in Atlantic City. His death seemed like a failure to overcome Japan, having stopped the progress toward a desirable life in a world for the people. However, when considering the words of Underwood to his sister on his way to Chosen, “There are more in the car than those I see”, his life was not a failure but a project for the citizens of Chosen. Even today, Underwood is giving hope and declaring to the people “Chosen in the Heart of the Heart” to expose ‘what exists’ to those in power who try to disgrace Chosen. Underwood also encourages the Chosen citizens to love each other by instilling a will for the more appropriate and better life of tomorrow. This paper considers Underwood’s willingness to establish Chosen Christian College and attempts to extend the lessons for the churches of this generation and their theology, by discerning the best choices and efforts to overcome the reality that suppresses and destroys the will of ‘life’. Horace G. Underwood(元杜尤, 1859.7.19~1916.10.12., 이하 “언더우드”)는 19세기 말부터 식민지로 전락하는 1910년대 중반까지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이다. 그는 개신교 선교사 중 가장 초기에 입국하여 현장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장과 연결된 주변 요인 및 정세 변화의 흐름을 잘 분별하여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시민들에게 교육 사업을 통해 복음에 의한 인간사랑(愛民)을 실천한 인물이다. 언더우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화란개혁교회 메이번(Mabon) 목사의 경건한 신앙과 지성의 영향을 받았다. 어릴 때 인도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의 꿈을 가졌으며, 신학교 입학 후에 본인의 의지로 해외선교사를 지원하였다. 뉴브런즈윅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1,200~1,300만 명이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Corea, the Hermit Nation(1882)을 읽었다. 제4차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 집회에서 “선택의 책임과 부르심에 관한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라”는 강연을 듣고 선교지 문제로 갈등했는데, 이수정의 “미국 교회에서 조선에 복음을 전해달라.”는 청원을 조선이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확신하여 조선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언더우드는 1884년 7월 28일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아 같은 해 12월 31일 일본 군사시찰단과 같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이듬해 1월 25일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언더우드의 사신과 野津道貫,『歐美巡廻日誌』(1886)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 병제를 시찰하고 귀국하는 군사시찰단은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의 일원으로, 그중에는 미우라 고로를 비롯하여 조선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다수 있다. 하지만 이후 언더우드와 그들 사이의 상호 교류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서울에 당도하여 제중원의 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조약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서구 제국 중 미국과 제일 먼저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의 서양 문명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크게, ① 주자학을 근본으로 하고 신학(新學)을 이용후생 차원에서 수용한 양무개혁적인 입장, ② 서양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문명개화론적인 입장, ③ 문명개화론의 극성을 반대하여 절충적 입장을 견지한 변법개혁론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는 언더우드의 각종 활동이 조선의 대외정책 및 정치적 사건, 조선 지식인층의 동향 등 변동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초기의 언더우드는 근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신변 안전과 선교 사업을 도모하였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하였으며, 고아들을 위해 학당(“원두우고아학당”)을 설립하였다. 모든 청소년이 적령기에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더 높은 단계의 학교를 창출하는 근대 교육 사업을 추구하며 학교를 선교의 접촉점이자 문명 전달의 매개로, 동시에 시민 계몽의 장으로 삼았다. 알렌이 공사로 부임한 때(1897)부터는 교회 개척과 신문 발간 등을 통해 시민계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워지는 교회마다 학교 부설을 권장하였으며, YMCA를 유치했다. 시민 전체가 개명해야 한다는 생각과 모든 인간은 복음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언더우드를 ‘105인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였다. 원한경은 조선총독부가 언더우드를 추방하는데 이 사건을 이용하려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언더우드는 105인 사건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와 춘생문 사건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일본의 잔인함과 비인간성에 전율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한층 더 치밀하게 “더 나은 교육”을 조선 시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대학 설립에 몰두하였다. 조선은 서양 문명과 치열한 대립을 거쳐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질서 변화에 대하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 환경의 유불리(有不利)에 촉각(觸角)을 세웠지만 언더우드는 “조선 시민에게 온 선교사”로서 조선 시민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탁월한 식견과 안목으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 이상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조선 시민의 안녕과 공동체의 자주독립을 위해 가장 나은 길, 가장 적합한 선택을 제시하였다. 언더우드는 “조선 시민이 더 나은 교육을 받았더라면 지금 당하고 있는 민족적 치욕을 좀 더 잘 대처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Chosen Christian College 설립을 추진하였다. 조선 시민을 이전보다 더 너른 마음으로 공감하며, 화육(化育)의 인간, 곧 “조선 시민 임,” “조선 시민 됨”을 자각하여 현 세계 내에서 “조선 시민으로 ‘있음’”을 지향하는 가장 나은 길로써 대학교육을 선택한 것이다. 대학 설립의 목적은 고유한 정신문화와 유산을 간직한 조선 시민들이 그것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려는 세력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의지를 발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을 밝혀 주위를 밝아지게 하여 조선을 재건하며 나아가 왕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국정을 논하며, 권력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간언(諫言)하는 신하(臣下)를 육성하는, 즉 “애민교육(愛民敎育)”이다. 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은 인종주의와 우월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으로 고통 받고 희생당하는 조선 시민을 외면한 정교분리 원칙과 편협한 신학(교리)이 빚은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부른 조선 시민, 복음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조선 시민의 신음에 반응하며 함께했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건너가 정양 중 1916년 10월 12일 아틀란틱 시티에서 서거했다. 그의 죽음은 조선 시민의 친구로서 바람직한 인간의 삶, 살아보고 싶은 세상을 향한 걸음을 멈추게 하여 마치 ‘극일’에 실패한 모양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을 향해 오던 길에 여동생에게 건넨 “보이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말을 새겨볼 때, 조선 시민에게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는 숙제를 남겨준 것이다. 지금도 그는 인간 자체에 희망을 걸고 자신의 “마음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조선”을 향해 살이의 경계를 넘어와 조선을 욕보이려는 세력에 ‘있음을 드러내어 있음이게 하라’고 한다. 지금보다 더 적합하고 내일의 더 나은 살이를 향하여 의지를 세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문은 Chosen Christian College 설립에 기투된 언더우드의 의지를 숙고하여 ‘생(生)’의 의지를 억압하고 훼손하는 실체에 대하여 극복하는 가장 나은 선택과 노력을 분별함으로써 이 시대의 교회와 신학이 고집하며 나아갈 바의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최병근 수원대학교 행정대학원 2007 국내석사
본 연구는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께서 남기신 500여권의 저술 중에서 대표작 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에서 오늘날 우리 군에 적용 가능한 한국적 리더십을 배우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주제를 연구하게 된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에 도입된 리더십 이론의 대부분은 외국에서 도입된 이론(理論)을 정부기관, 기업체, 학교, 군대 등에서 대부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국민성과 정서, 문화가 상이한 우리나라 군 간부들에게 적용하여 훌륭한 리더십을 배양하기에는 그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한국적 특성에 부합된 리더십을 찾다가 「牧民心書에 나타난 공직자 리더십」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 논문의 연구범위와 방법은 먼저 다산 정약용 선생과 「목민심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산의 생애, 시대적 환경, 다산의 학문과 사상, 목민심서의 집필과 의의 및 목민심서 편차(編次)를 설명하였다. 다산의 생애(生涯)는 성장과 청년시절, 관직생활, 유배생활, 만년의 생활로 분류하여 설명하였고, 시대적 환경은 정치적 측면, 사회적 측면, 사상적 측면, 군사적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다산의 학문과 사상은 사상형성 배경과 학문적 성격 및 사상적 특징으로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목민심서에서 배우는 리더십은 책속에 나타난 내용들을 전반적으로 분석하여 공통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에서 세 가지로 분류하여 도출하였다. 첫째는 수기(修己)의 리더십으로, 한 조직을 지휘하는 공직자는 먼저 자신의 심신을 수양한 후에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민관은 바른 몸가짐과 청렴한 마음, 공사(公私)를 구분하고 청탁을 물리쳐야 하며, 집안을 잘 다스리고 정부의 재산을 절약하는 품성과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는 봉공(奉公)의 리더십으로, 공직자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자세로 국가와 국민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직책임을 명심해야 한다. 봉공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책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시행하여야 하며, 솔선수범하여 법을 지켜야 한다. 또한 예의(禮義)로써 모든 사람을 대하고, 규정에 입각한 공문서 작성 및 처리와 상부에서 파견이나 출장업무를 부여 시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완수하는 정신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는 애민(愛民)의 리더십으로, 이는 다산이 가장 중요시 하는 사항으로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공직윤리를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 애민의 리더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가져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중점과제는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보호하며 불쌍한 사람인 사궁(四窮 : 홀아비, 과부, 자식 없는 노인, 고아)과 병든 사람 및 상(喪)을 당한 사람을 잘 보살펴야 한다. 또한 홍수나 화재 등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과 흉년에 대비하여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수립하여 신속한 대응과 지원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작성한 「목민심서」의 군 리더십 적용분야는 부임(赴任)에서 해관(解官)까지 12편(編) 72조(條) 중에서 실제 오늘날 군부대 지휘관과 참모들에게 적용 가능한 내용만을 인용하였다. 필자가 지금까지 지휘관 및 참모생활을 통하여 얻은 경험을 후배장교들의 군 리더십에 적용하도록 사례위주로 제시하였으며, 흉년 시 빈민구제 등의 대책을 제시한 진황육조(賑荒六條) 등 오늘날 시대적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은 생략하였다. 논문의 주제인「牧民心書에 나타난 공직자 리더십」의 군부대 적용제대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당시의 도백(道伯)인 관찰사(觀察使) 이하 현감(縣監), 군수(郡守), 부사(府使), 목사(牧使) 등 오늘날의 기초자치단체장에 해당하는 지방수령을 청백리(淸白吏)로 교화시킬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따라서 참모조직을 둥 중간제대 지휘관인 대대장과 연대장 급 지휘관들에게 적용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현재 우리 군에 적용되고 있는 리더십의 현주소를 냉철히 분석하고 미비점을 보완하여 한국의 국민성, 문화, 정서에 부합된 리더십 이론체계가 정립되고 발전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또한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남기신 「목민심서」에 나타난 리더십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입장에서 오늘날에 되살려 국민에게 신뢰받는 지휘관상 확립과 선진강육성(先進强軍育成)을 위한 군(軍) 리더십 배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원한다.
다산의 민본사상에 나타난 공직윤리 연구 : 『牧民心書』를 중심으로
마영진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2 국내석사
21세기 한국 사회는 선진국의 궤도를 달리며 전 세계적으로 그 위상과 뛰어난 업적들을 과시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주목을 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사회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이 국가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의 주요한 정책에 의견을 제시하는 등의 부분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잘못된 행태들로 인해 실질적인 민주국가의 모습을 잘 실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공직사회는 내부적으로는 공직자에 대한 불신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외부적으로는 공직자의 청렴도가 매우 낮아 부정부패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고 있다. 이점에 착안하여 본고는 우리의 전통 사회 속에서 형성되었던 다산 정약용의 민본사상과 공직윤리 사상을 담고 있는 『牧民心書』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직윤리 위기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바람직한 공직윤리의 모습과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 해결 대안으로서 『牧民心書』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산이 제시한 淸廉·節用·愛民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 공직자의 기본 자세와 역할로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향에 입각해 시작한 본 논문은 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요약·정리하였다. 제Ⅱ장에서 다산이 살았던 조선후기 사회의 정치·경제·사상적으로 위기상태에 처해 있는 시대적·사회적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치 권력자들의 무능, 농업 경제의 한계, 신분사회 구조의 변화, 성리학의 학문적 한계 등의 문제들이 사회 전체에 중압을 가중시켰고, 이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변화 욕구가 증폭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원시유학을 근본 체계로 삼아 주자학을 비판하면서도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다산의 실학사상이 출현되었다. 그리고 다산의 오랜 공직 경험과 현실적 인식들이 인간관과 민본사상에 잘 드러나 있어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개혁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다산은 修身을 기초로 한 ‘治人의 道’를 실천함에 있어 지방 행정업무를 총괄했던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역할을 강조하였다. 또한 모든 인간은 자율적 존재로서 각기 평등한 입장에 놓여있다는 인간관을 바탕으로 ‘民’이 정치적 주체임을 강조하였으며, 목민관의 백성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이에 따른 역할을 제시하였다. 제Ⅲ장에서는 다산의 인간관과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는 근대지향적인 면모를 다루었다. 그의 저서 『牧民心書』에서는 이러한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공직윤리의 내용을 修己·奉公·治人의 윤리로 나누어 논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修己의 윤리’에서는 목민관이 스스로 행하는 修身을 강조하는 것으로, 목민관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행하는 덕목을 제시하였다. 둘째, ‘奉公의 윤리’에서는 修己의 윤리에서 강조되었던 修己와 齊家의 근본이 백성의 奉公으로 발전됨을 보여주고 있다. 奉公은 봉사라고 할 수 있으며, 공무를 수행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국법을 지키고 시책을 널리 알리는 일이며, 질서와 예의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목민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治人의 윤리’에서는 修己를 바탕으로 한 奉公의 자세가 백성들을 사랑하는 애민의 정신과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행정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공직윤리의 구체적인 내용들에서 목민관의 자세와 역할인 공직윤리는 물론이고, 현실 정치에 대한 독창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정치관과 사회개혁안도 살펴보았다. 마지막 제Ⅳ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 분위기나 공직사회에 만연해 있는 개인주의나 물질만능주의, 부정부패 및 공직자의 책임의식 부재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오늘날 공직자들의 역할은 국민의 뜻과 의지를 모으는 바람직한 민주주의 국가의 실현이며, 이것은 다산의 목민관과 일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민본정신과 공직윤리 자세가 오늘날 현대에 어떤 의의를 가지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고찰해 보았다. 첫째, 개인의 지나친 욕구와 욕망으로 인한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뇌물을 사회적 관행으로 여기는 부정부패의 문제는 우리 전통 윤리에서 강조되어 왔던 인간 욕망의 절제와 修身 등의 인격 수양을 통해 노력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실주의나 연고주의와 같은 인정의 문화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공동체 의식으로 전환하여, 개인의 인식 변화와 사회적 구조 및 분위기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학사상에 바탕을 둔 개인의 인격 수양을 시작으로 가정, 학교교육에 이르는 인륜과 도덕성 함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개인의 내면적 덕성 함양과 올바른 사회적 역할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에서 다산의 공직윤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철학적 안목은 물론이고, 그 내용의 보편성과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실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찰해 보았다. 또한 백성을 위한 애민·휼민정신의 실현, 솔선수범의 공직자세, 청렴하고 근검절약하는 원칙의 실천, 공직자 내면의 덕성 함양을 통한 대민 봉사 등 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직사회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명희 경성대학교 일반대학원 2014 국내박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힐링’이라는 말이다. 이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치유해야할 질병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앓는 병 가운데는 육체적인 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병도 있으며, 철학적인 병에 대한 치유는 철학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철학적 병은 우리의 전통사상 속에 가장 효과적인 치유 처방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철학적 병들이 성리학의 오도된 인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연구에 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선현들 가운데서 우리 사회의 황폐상과 각종 부조리의 근원들이 성리학의 그릇된 사고와 인습에 있음을 진단하고 그 치유를 위한 처방전을 제시한 최고의 사상가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다산의 사상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철학적 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도 효과적인 치유의 처방이 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는데 근본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사상들 가운데서 철학적 병의 치유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그의 인간관과 윤리관을 이론적 기초로 고찰하였다. 먼저 그의 인간관 고찰에서는 성기호설에 기초한 실천적 인성론과 애민시상, 신분철폐를 통한 만민 평등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하였으며, 윤리관의 문제는 실천 윤리로서의 그의 仁사상과 효제자 사상, 신독과 자주지권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목적에 따른 연구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다산의 실학사상은 수기지학인 경학과 치인지학의 경세론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목민관이 갖추어야할 실천적 자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자기수양을 위한 수기지학은 오늘날 물신사상에 의해 철학적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의미 있게 변화시키고,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하며 자기 스스로 성장해 갈 수 있도록 하는 철학적 치유과정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다산의 수기치인에 의한 도덕적 실천은 현대인들의 자기성찰과 윤리의식 함양은 물론 건전한 가치관의 정립을 위한 철학적 치유과정이라고 판단된다. 둘째, 다산이 강조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군자로서, 인격을 갖춘 군자가 목민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민관은 먼저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애민을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다산이 주장하는 목민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청렴한 선비로서 맡은 바 직분을 다하는 공직자이다. 이는 오늘날의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윤리와 도덕성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윤리 도덕적인 병의 해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철학적 치유의 과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다산의 교육론에 담겨 있는 그의 자녀교육과 교사로서의 자질, 교민 및 교화에 의한 것으로,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자녀교육에 힘썼다. 아들에게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가 하면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가난하게 살더라도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야 하고, 자신보다 더 가난한 주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또 강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는 그들의 수준과 특성에 맞는 이른바 눈높이 교육을 실천했으며, 항상 교사로서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였다. 다산의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 철학실천에 속하는 것으로 철학적 치유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다산은 자녀와 제자들에게 철학적 통찰력을 길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철학 상담자로서의 역할을 가르쳤던 것이다. 넷째, 다산은 과학사상에 있어서도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농업은 물론 공업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의술과 의학 분야에서도 해박했다. 다산은 당시에 만연하던 미신과 풍수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자연과학에 있어서도 철저한 실용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미신이나 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이사나 혼인을 앞두고 택일을 위해 점집을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최첨단 과학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들 까지도 쉽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비과학적 사고와 습속들을 과학의 여명기를 살았던 다산이 그 허구성을 통찰하고 비판했다는 사실은 현대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크게 반성하고 본받아야 할 과학정신이다. 이상의 결론을 토대로 우리 전통사상에서의 철학적 치유가능성 모색을 위한 후속연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본 연구는 다산의 방대한 저술 중 일부분의 영역에서만 현대의 철학적 병에 대한 치유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한계가 있으므로 후속 연구에서는 좀 더 다양하고 방대한 저술을 통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제언하고 싶다. 둘째, 우리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극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철학적 치유와 교육철학상담의 이론정립이 시급한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철학적 치유나 교육철학상담에 대한 개인별 연구도 중요하지만 학회차원의 연구가 더욱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최근에 설립된 ‘한국교육철학상담학회’는 철학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