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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초기 진사시 성립 과정 연구

        김우영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47708

        이 연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진사시 시행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에서 진사시가 시행된 이유를 알아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본고에서는 진사시의 시행이 당시 학교제도를 활성화시키고 더불어 학교와 과거의 연계성을 강화하려 한 조선 교육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을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 말기 국자감시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 조선 초기 진사시 시행에 관한 논의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고려 국자감시(國子監試)는 덕종 즉위년(1016)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목적은 입격자들에게 국자감에 입학할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고시과목은 시부(詩賦)와 10운시(十韻詩)가 중심이었다. 국자감시는 고려 말기에 들어오면서 폐지와 복설을 거듭한다. 이는 단순히 국자감시에만 국한되는 변화가 아니었고 국자감의 위상 및 교육과정의 변화, 그리고 과거제도와 학교제도의 연계 강화와 관련되어 있다.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변하면서 좀 더 유학교육에 치중된 성격을 가진 학교로 변화했고 이는 국자감시의 고시과목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승보시(陞補試)의 위상 변화도 국자감시에 영향을 주었다. 승보시는 본래 국자감시를 통해 선발한 국자감의 학생 수에 결원이 있을 때, 보충해서 선발하는 시험의 성격이 강했다. 고시과목은 경서의 의(義)가 중심이었는데, 공민왕 대부터 의의(疑義)를 시험했고, 입격자 수를 크게 늘리게 된다. 이때부터 승보시는 기존 국자감시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험으로 위상이 올라가게 되었다. 우왕 대 국자감시가 다시 부활했지만 국자감시는 최고학부의 입학자격시험으로서의 그 위상이 점점 약화되었다. 국자감시는 조선이 건국하면서 폐지되었는데, 다시 시행하자는 논의가 제기된 때는 세종 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세종 10년에(1428) 성균사성 정곤과 13년(1431) 중부교수관 정종본은 생원시 입격자 수가 응시자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진사시를 다시 시행하자고 건의한다. 세종 17년(1435), 집현전 대제학 이맹균은 당시까지 진행된 논의를 반영하여 「시학흥학조건(詩學興學條件)」을 올린다. 이맹균은 진사시의 시행과 동시에 문과 중장의 고시과목에 논(論) 대신 시(詩)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진사시의 응시 연령을 25세까지로 한정하였다. 이는 진사시가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라기보다는 장학에 목적을 둔 시험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진사시의 시행은 향교 교관을 보충하기 위한 성격도 가지고 있다. 향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향교교관의 수급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소과 입격자에게 교도(敎導)의 자격을 주어 향교 교관을 충원하려 했다. 따라서 소과 입격자 수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진사시를 시행하는 안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사시는 세종 26년에 다시 폐지된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폐지사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세종 25년에 제정된 「문과강경정식(文科講經程式)」이다. 「문과강경정식」을 통해 문과 초장이 강경(講經)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문과의 시험기간이 길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따라서 한 해에 진사시, 생원시, 문과를 모두 치르면 시험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이 지적되어 응시자들에게 큰 불편을 주게 된다고 지적되었다. 다음으로는 세종 26년에 생원시 고사장에서 대리응시사건이 발각되었다. 당시 논의를 보면, 진사시 고사장에서도 25세를 넘긴 사람이 진사시 시험장에 나이를 속이고 응시하는 경우를 제대로 적발해 내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진사시는 단종 대 다시 시행되었다. 그러나 진사시 시행규정은 이전 문종 대「진사시취조건(進士試取條件)」으로 확립되었는데, 「진사시취조건」은 이전 세종 대 「시학흥학조건」과 비교하면 몇 가지 변화한 점이 보인다. 먼저, 응시자들이 옛 작품들을 베껴 쓰는 것을 막기 위해 10운시(十韻詩) 대신 고부 한 편, 고시와 율시 중에서 한 편씩 짓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진사시의 난이도를 종전보다 어렵게 해서 시험의 위상을 높이려 한 조치로 보인다. 또한, 25세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게 한 연한법을 없애고, 모든 응시자들에게 생원시와 마찬가지로 「학례강(學禮講)」을 치르도록 하였다. 이는 진사시의 지위를 생원시와 동등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진사시 응시자라 할지라도 가장 기본적인 경서의 이해도를 필수적으로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진사시취조건」은 진사시를 세종 대와는 달리 생원시와 같은 지위를 가진 시험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소과가 생원시와 진사시로 정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진사시 성립 과정의 의의를 정리하면, 진사시의 시행은 당시 조선의 학교교육을 활성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했다는 점이다. 진사시는 문과의 예비고사보다는 오히려 향교와 성균관 사이에서 학교제도를 활성화시키려는 학교진흥책에 더 가까운 시험이었다. 그리고 진사시의 고시과목이 시와 부라고 해서 응시자들에게 문예(文藝)적 능력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진사시에서 시험한 고부와 고시는 엄격한 격식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였지만, 경서의 이해에 기초한 용사(用事)의 적절한 구사가 더 중요하였다. 즉, 조선의 진사시는 응시자의 문예적 능력과 경서에 대한 이해와 활용 능력을 동시에 알아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중국의 청소년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 연구

        조단단 배재대학교 일반대학원 2023 국내박사

        RANK : 247677

        야외캠프 교육이 중국에 도입된 지는 여러 해가 되었다. 2016년에는 교 육부 등 11개 부처와 위원회가 공동으로 초․중․고등학생의 체험학습 연 구 및 여행을 전면 시행하기 위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중국 정부는 청소년의 질적 발전에 중점을 두고 스포츠, 관광, 교육을 심도 있게 통합 하고 체계적인 청소년 야외캠프 교육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약 20,000개의 캠프가 승인되고 건설되었다. 중국 제19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서(2017)는 중국의 새로운 역사적 방향 을 제시하고 있다. 즉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 교 육 강국 건설을 통한 중국의 부흥을 위한 기본 항목으로 명확히 규정하였 다. 나아가 새로운 시대에 교육 발전을 우선시할 뿐만이 아니라 양질의 교육을 확고히 시행한다는 것을 담고 있다. 특히,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청소년 야외교육이 포함된다. 종합적인 자질 개발을 목표로 하는 청소년 야외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관련 연구로 인하여 중국 청소년 야외운영의 혼란과 활성화의 어려움, 특히 청소년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 구축이 더욱 사람 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따라서 서구 국가의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를 참고하여 중국 청소년의 건전한 심신발달 요구에 적합한 중국만의 특색 적인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를 최적화하는 것이 절실하다. 본 연구는 문헌 조사, 설문 조사 및 전문가 인터뷰와 같은 다양한 연 구 방법을 통해 중국 내․외 청소년 야외캠프 교육의 이론적 연구 및 개 발 현황을 파악하였다. 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중국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의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첫째, 야외캠프에 대한 인식 및 철학적 사고가 미흡하며, 중국의 전통 교육 사상이 부족하고 대부분 서구 사상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과정 목표가 명확하지 않았다. 둘째, 과정 내용과 목 표가 일치하지 않으며, 단일 체험식 과정을 채택하고 있고 건전한 과정 평가 메커니즘이 부족하였다. 또한 대부분이 주관적인 평가를 채택하고 학생들이 야외캠프 활동 참여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였다. 따라서 이 연구는 청소년의 건강한 생리적, 심리적, 정신적 성장을 위한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를 구축하고 교육과정 사상, 교육과정 목표, 방법 체계, 교육과정 내용, 과정 구현 및 발달 평가 측면에서 중국 특색의 야외 캠프 교육과정 체계를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 첫째, 모든 생명과 건강한 성장을 기본으로 하는 생원(生元) 교육은 야 외캠프 교육과정 체계의 교육 사상이다. 둘째, 청소년의 체격(体格), 품격(品格), 성격(性格)의 3격 교육은 야외캠 프 교육과정 체계의 교육 목표다. 셋째, 신체성(身體性) 체험 학습, 지식성(知識性) 체험 학습, 기능성(技 能性) 체험 학습, 태도성(態度性) 체험 학습, 습관성(習慣性) 체험 학습의 오성 학습은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의 방법 체계이다. 넷째, 생활(生活) 교육과정, 생존(生存) 교육과정, 생태(生態) 교육과정, 생산(生產) 교육과정, 영재(生才) 교육과정, 생애(生涯) 교육과정, 생기(生 機) 교육과정, 생명(生命) 교육과정, 성장(生長) 교육과정의 구생 과정은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의 주요 내용이다. 다섯째, 발달 평가는 야외캠프 교육과정 체계의 효과성을 보장한다. 교육과정 주제를 통해 실천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야외캠핑 교육의 실효 성을 확인한다. 사회 전체가 새로운 교육 매개체인 야외캠프 교육을 중요 시하고, 국가, 지방 또는 학교 기반 교육과정 체계에 통합하여 사회, 학교, 가정이 삼위일체적인 야외캠프 교육 체계를 형성해야 한다. 야외캠프 교 육을 학교 교육, 가정교육과 양립하는 사회교육의 주요 방식으로 간주하 여 학교와 가정교육의 부족을 보완하고 청소년의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을 촉진하도록 한다. 야외캠프 교육은 만능이 아니며 도덕, 지적, 체육적, 미 적, 노동의 5대 육성과 병행의 질적 교육에 통합되어야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으며 이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 문화유산 활용 3D 콘텐츠 제작을 위한 고증연구 :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소장 《평양감사향연도(平壤監司饗宴圖)》를 중심으로

        김영선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일반대학원 2024 국내박사

        RANK : 247547

        문화유산 활용 3D 콘텐츠 제작을 위한 고증연구 -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Peabody Essex Museum) 소장 《평양감사향연도》을 중심으로 - 김 영 선 문화유산융합학과 무형유산전공 한국전통문화대학원 일반대학원 문화유산(文化遺産)이란 과거에서 현재까지 축적된 인류의 정신적 물질 적 자산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유산은 우리 역사와 전통의 산물로서 문 화의 고유성(固有性), 겨레의 정체성(正體性) 및 국민 생활의 변화를 나타 내는 유형의 문화적 유산을 말한다. 디지털 문화유산 활용 연구는 문화유 산의 가치를 높이고 민족의 위상과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며 향후 미래세 대의 문화자산으로서 계승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대중에게 어렵게 여겨 졌던 문화유산의 접근 방법을 확대하면서 역사성을 지닌 자료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기록화를 대상으로 연구한 사례는 많으나 3D 콘텐 츠를 제작하기 위한 구체적 고증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조 선시대 기록화를 소재로 대상을 선정한 뒤에 3D 콘텐츠를 제작하는 순서 와 고증이 필요한 제작 단계별 위치를 살펴보았다. 또한, 3D 콘텐츠를 제 작할 때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고증 자료 방법을 제시하고 3D 애셋을 제 작할 때 필요한 고증 자료 제시 방법을 포함하였다. 본 연구는 18세기 후반 그림의 추정되는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이 하 ‘PEM’으로 줄임) 소장 《평양감사향연도(平壤監司饗宴圖)》 8폭 병 풍을 대상으로 3D 콘텐츠를 제작하는 용도의 자료로 행사의 성격과 시대 를 추정하여 행사의 내용도 고증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의견이 분분한 PEM 《평양감사향연도》의 행사의 성격과 제작 시기를 규명하였다. 그림 에 표현된 주인공과 행사 주관자·의례·제작 시기·그림의 순서 등을 분 석 연구하여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역사적 오류의 범위를 줄이고자 구체적 자료를 제시함으로 3D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근거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를 제시한 점에 의의를 찾고자 한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PEM 《평양감사향연도》는 8폭 병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림 에 표현된 주인공의 복식을 통해 생원·진사 합격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인 생원·진사 합격자 복식은 18세기 후반에는 난삼(襴衫)과 공복 (公服)에 영대(領帶)를 모두 같이 착용한 점이 특징이다. 관모는 연건(軟 巾)과 연라건(軟羅巾), 유건(儒巾), 복건(幅巾) 착용하였고 행사에 따라 복 식을 달리 착용한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입성 경로에서 도문연과 영친연의 의례를 볼 수 있어 이들은 평 양 거주 합격자로 평양 감영의 축하 행사를 받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동 경로로 확인된 사항은 주인공 2인의 합격자는 한성에서 치른 생원·진 사시 복시 합격자로 추정된다. 이것은 이동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정조가 1782년(정조 6)의 기록에서 관서의 전경과 지도를 그리라 는 기록을 시작으로 1834년(순조 34) 순조 연간까지 평양지역 생원·진사 합격자 통계와 그림에 표현된 평양지역 건축물 비교를 통해 1804년 이전 평양 거주 생원·진사시에 2인이 합격한 사례가 1783년과 1790년·1795년 으로 정리되었다. PEM 《평양감사향연도》는 1795년 이전의 그림으로 평 양을 배경으로 하는 행사도 그림에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으 로 추정된다. 그리고 평안도 관찰사가 생원·진사시의 합격자를 위해 주 관한 대규모 행사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넷째, PEM 《평양감사향연도》는 평양지역의 출신자의 생원·진사시 합격을 축하하는 잔치를 3일에 걸쳐 주야로 잔치를 진행한 모습을 시각화 하였다는 것은 행사가 진행된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추정하였다. 아직 생원·진사 합격자 행사에 대한 그림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도 가치성을 가진다. 다섯째, 그림에 표현된 중요 인물과 기물을 고증하여 3D 모델링을 위한 시방서 형태로 제시하였다. 18세기 후반 복식과 기물의 형태를 유물과 문 헌자료를 통해 고증함으로써 구체적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의 의가 있다. 정조 연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PEM 《평양감사향연도》 8폭 병 풍은 대규모 지역행사를 통해 평양의 풍습을 시각화한 현존하는 가장 이 른 시기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 지역의 출신 생원·진사를 위한 행사 하는 데서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이 향후 역사 기반의 콘텐 츠에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3D 콘텐츠, 3D 모델링, 평안도 관찰사, 생원, 진사, 전통 복식

      • <조생원전>의 가족형태와 인물연구

        구경하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2001 국내석사

        RANK : 247535

        본고에서는 <조생원전>에 나타난 가족형태와 인물형을 통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가치를 밝히고자 한다. <조생원전>이 활자화될 당시의 시대상황은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식이 있는가하면 신질서로 나아가려는 의식 또한 팽배해 있을 때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작품에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의 시대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조생원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가족형태가 가장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조생원전>을 분석하였다. 첫째, 가족형태는 가족내에서 의사결정권의 여부에 따라 민주적 가부장 형태의 조생원 가족, 내주장 가족형태의 정숙도·유부마 가족, 망부모 소녀 가장 가족형태의 김소저 가족으로 나눌 수 있다. 세 가족 모두 여성의 지위가 강화된 형태로 여성이 가정생활에서 자신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조생원전>에 나타난 가족형태는 조선후기 변화하는 여성의 지위와 상관 관계를 보여주며, 민주적 가장형이라는 이상적 가족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 <조생원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피보면 다른 고소설의 인물들과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여성인물들은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일 뿐 아니라 남성들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여성인물들은 한결같이 자기주관을 뚜렷이 드러내고 때로는 나약한 남편을 몰아세우는 적극적인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성인물들은 약화된 모습으로 등장하여 여성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이상적 남성형을 연출하고 있다. <조생원전>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은 자아실현형 인물의 김소저, 갈등조정형 인물의 조혜경, 애정지향형 인물의 후주 등과 그 외에 부수적 인물들이 있다. 여성인물들이 두드러진 현상은 후기사회의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며 여성의식의 각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생원전>에 등장하는 남성인물은 주체적 인물의 조생원과 의존적 인물의 조혜성을 들 수 있다. 주체적 인물인 조생원은 가족들의 의견을 들을 줄 아는 인물이며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아는 인물로 가장 바람직한 가장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의존적 인물인 조혜성은 나약하며 자신을 주장하지 못할 뿐더러 타인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아량도 없다. 혜성의 독단적 판단은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남성모습은 결국 여성들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남성의 모습을 통해서 여성인물의 변화상이 돋보인다. <조생원전>의 문학사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구질서와 신질서가 거세게 갈등하는 당대에 김소저와 조생원은 이 두 질서를 아무런 갈등 없이 수용함으로써 어떻게 이러한 시대에 가문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는 <조생원전>의 작가가 격변기였던 조선후기에 봉건적 질서와 근대적 질서의 조화와 융합을 추구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이 아닌 평화와 공존을 희구한 작가 의식의 소산이라 하겠다. After is original, wish to clear value that correspond in family form that show to <Josaengwon-jo˘n> and age that change through person style. This printing then age that is done situation consciousness also which go forward at new order consciousness to keep old order is chum. Problem that atmosphere is embodied how in work enemy these age is not unrelated with way of age of novel. <Josaengwon-jo˘n> Distinctive thing is that family form is painted most notedly because gouging. Aim and analyzed <Josaengwon-jo˘n> in these point. First, family form in family according to availability of doctor decisive power, Josaengwon family of democratic patriarch form, Jung, suk-do * Yu royal son-in-law of dogmatic wife insistence type family form, Gimsojeo Family of net parents little mother family form divide can. In form that woman's position is solidified both three families, woman is vocalizing by oneself in domesticity. Family form that show to <Josaengwon-jo˘n> shows interrelation with woman's position which change Choson Dynasty latter term, and is presenting ideal family form called democratic head of a family style. Second, can hear point that is different from other Gososeo's persons if examine persons who appear to <Josaengwon-jo˘n>. Specially, as well as woman persons are persons who make all own voices, persons are much more active than men. Woman persons look to active image that show own management clearly constantly and berate sometimes weak husband. Man persons are doing and produce ideal man style that know to respect woman's opinion if voice is dwindled than woman person relatively. If analyze the woman person group whichappear to <Josaengwon-jo˘n>, self establishment person type of Gimsojeo, discord intervention person type of Johyekyoung, affection intention person of Huju and so on. These are person who make own voice constantly. In this way, notable phenomenon of woman person can grasp in deffierent surnames of woman's mode being reflection of situation society's age enemy latter term. By next time, can list dependence person style of Johyeseong, main person style of Josaengwon and if analyze man person elder brother who appear to <Josaengwon-jo˘n>.Is materializing the most desirable patriarch of a family by person who know to judge thing which Josaengwon that is main volume person is correct being person who know to listen to families' opinion. Dependence person of Johyeseong can be weak and collect another person's opinion do not insist own. Dogmatic judgment of comet is bringing result that commit mistake. Though these man state says as romantic device that look strong will of women finally, woman person's change through these man's image looks better.

      • 난삼(襴衫)의 조형(造形)과 변천에 관한 연구

        전보령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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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중국에서 기원된 난삼이 우리나라로의 유래를 통해 정착되면서 변화되어지는 복식의 형태와 용도를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고 중국과 국내의 문헌 자료, 회화자료 등을 중심으로 면밀히 살펴보았다. 난삼은 국말까지 남아 유생복(儒生服)으로 입혀졌고 과거시험과 관련된 복식으로 생원, 진사 과거입격자의 예복으로 난삼과 앵삼이 입혀져 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난삼에 관한 연구는 상황별 복식을 주제로 하거나 혹은 착용 신분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본 연구에서는 형태에서 비롯된 명칭인 난삼과 섹에서 비롯된 명칭인 앵삼의 두 가지 복식으로 보고 연관성을 기원 및 전래를 통해 풀어보았다.또 난삼의 한 유형으로 본 앵삼의 유물을 실측하여 재현해봄으로서 본 고의 자료들이 추후 다른 유물조사나 제작방법을 고찰하는데 기초자료로 활용하는데 의의가 있다. 연구 전개는 다음과 같다. 난삼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어떻게 전래·답습되어 변화되었는지 고찰한다. 둘째, 과거급제자 복식으로 알려진 난삼이 관례와 제례, 유생복에도 입혀졌는데 착용례를 살펴보고 변화와 특성을 살펴본다. 셋째, 앵삼의 변천과 조형적 특성을 분석하여, 난삼과의 연관성을 살펴본다. 중국 고대 복식에서 시작된 난삼은 역사적 자료로는 첫번째로 “북주우문호설”이다. 북주 시대의 우문호가 포 밑에 란을 추가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둘째 가장 많이 전해진 “당마주설”이다. 예제에 따라 포 밑에 란을 더하라는 건의를 했다고 한다. 셋째 호복설이다. 원령포의 “호”라는 외래적 유래 성질을 강조하여 란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으로 본다. 당(唐)이전∼당(唐)대는 원령 깃으로 심의에 난과 거를 붙인 형태로 나타나며 송대로 오면서 난이 아주 넓어지면서 백색의에 청(靑),흑(黑) 으로 횡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명대로 오면서 난의 넓이는 좁아지고 옥색 견포에 흑색의 조선을 댄 난삼과 옥색에 청색, 람색에 흑색선을 댄 난삼이 있었는데 명대의 복식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중국에서의 난삼의 착용은 국자감생(國子監生), 유생(儒生), 문인(文人), 노비들에게 까지 입혀져 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유생복,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放榜禮服), 관례복(冠禮服), 등으로 영조 23년(1747)이후에는 생원, 진사의 방방례에 착용되면서 국말에 고종때 이 난삼이 다시 유생복으로 착용이 되었다. 순조 25년(1825)의 『벽계영유록碧溪영유록』속 기록에서는 앵삼이 생원, 진사 입격자들의 방방례 복식으로 준비되어진 기록이 있어 난삼의 한 유형으로 난삼과 같은 용도로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는 아직 난삼의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앵삼의 유물이 남아있어 유물을 바탕으로 직접 유물 실측과 제작을 하였다. 전체적인 형태는 단령과 아주 유사하나 단령과 달리 앵삼은 무가 앞에만 달린다는 것과 앵삼은 선단이 바깥으로 달려있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난삼이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삼국시대부터 국말까지 긴 시간 동안 입혀진 복식이며 문헌 기록에도 많이 나타났지만 우리나라 회화자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앵삼만이 남아있는데 난삼이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국속화 되면서 색은 앵색(鶯色)으로 바뀌어지며 현재까지 유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is to contemplate each stage indicating how China-originated Nansam came to Korea and got settled down and changed in its costume style and usage, and this was conducted by close contemplation mainly on Chinese and Korean literature and painting materials. Nansam was lasted until the end of the dynasty and used for confucianist apprentices' uniform and it was related to royal minister examination and it seemed that formal costume for those who passed the exam for Saengwon and Jinsa used to be Nansam and Angsam. Until present, the study on Nansam has been conducted commonly by taking occasional costume choices as its subject or wearer's class, while in this study, style-originated Nansam and color-originated Angsam, these two kinds of costume were contemplated and analyzed focusing on their correlation based on their origin and each stage of their introduction. In addition, the trace of Angsam considered as a type of Nansam was subject to survey and reproduction, suggesting that these ancient costume should be used as basic materials to conduct survey on other traces or remains and contemplate how these were produced. The study was conducted in following ways. First, contemplation is to be made on how Nansam was introduced from China to Korea and settled down. Secondly, Nansam was also known as the costume for those who passed the royal minister examination, while it was still used for confucianist apprentices' uniform for the occasion of royal court events and commemoration ceremonies, therefore, further contemplation is to be made on examples on occasions which it was worn for, and also on how it has changed with what kinds of characteristics. Third, analysis is to be made on transformation and stylistic characteristics in Angsam in order to take a close look at its correlation with Nansam. Nansam which was originated from Chinese ancient costume has its first historical ground introduced in "North Ju's Woo Munho theory".It has been said that North Ju era's Woo Munho ordered to add orchid beneath the bloom. Secondly well-known theory is "Dangmaju theory". It was said that suggestion was made to add orchid beneath the bloom. Third one is "Hobok theory". According to this theory, emphasis was made on the fact that "Ho" originated from Wonryeongpo meant that it was originated from foreign country, leaving us an assumption that it doesn't go under the concept of orchid. The era of Pre-Dang Dynasty to Dang Dynasty is represented with the style which took Wonryeongpo collar in the silhouette of Shimeui attached with orchid and small drop, and going along the transition period to Song Dynasty, the orchid became very wider and white garment which was decorated with blue and black wide orchid coexisted the one without this. Coming along to Myeong Dynasty, the width of orchid became narrower and there were Nansam with black Joseon(seam) backed on jade green shoulder holder(Gyeonpo), and the one with blue on jade green, and black on dark blue and this costume of Myeong Dynasty was introduced to our country. In China, Nansam was worn by Gukjagam apprentices, confucianist apprentices, literator and even slaves, and in our country, it was used as confucianist apprentices' uniform, completion ceremony costume and royal court event costume for Saengwon and Jinsa and other, and since Youngjo 23 year(1747), it was used as completion ceremony costume for Saengwon and Jinsa, and at the end of the Dynasty, during Gojong era, this Nansam was used again as confucianist apprentices' uniform. The record found in 『Byeokgae Rest & Stay Diary』Sunjo 25 year(1825) shows that Angsam was prepared as the completion ceremony costume for those who passed the examination for Saengwon and Jinsa, leaving us an assumption that it should be a type of Nansam and used as the same purpose as Nansam's. Until present, in Korean, there hasn't been any remains of Nansam found yet, however, there was the remains of Angsam, so based upon this, measurement and survey was made on this remain, which was followed by actual reproduction. Overall style is extremely similar to Danryeong, however, the biggest difference can be pointed out in the way that unlike Danryeong, Angsam has its Mu(head strip) on its front only, whileas Angsam has its front strip on its outer sides. Nansam was introduced to our country and it had been long worn from Three States Era to the end of Chosun Dynasty and it has appeared in so many literary materials, however, it is so difficult to find it among Korean historical painting materials. Assumption can be made that now, Angsam is the only one that is left, however, Nansam was introduced to our country and became part of our costume and its color changed to nightingale color, still preserved as our re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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