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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한국인 설립 사립학교 연구 : 설립주체와 재정을 중심으로
본고는 20세기 초 한국인이 설립한 사립학교에 대하여 설립주체와 재정을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이다. 사립학교는 관립학교와 공립학교에 대비되는 학교로 20세기 초 일본에 의해 병합되기 전까지 가장 설립이 활발하였던 교육기관이다. 사립학교는 어떠한 계기로 세워졌고, 누구에 의해 어떤 재정기반을 가지고 설립·유지되었는지에 대하여, 또 20세기 초반 격변의 한국 정세가 사립학교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서구의 교육 제도에 대한 정보는 개항 이후부터 한국에 유입되었다. 서구의 교육제도가 서구 여러 나라의 부국강병의 기초가 되었다는 내용이 주요한 골자였다. 국왕과 일부 개화파 인사들은 한국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서구식의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식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1894년부터 한국에서는 서구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교육 제도와 학교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으로 학부가 설립되었고 교육 관련 법령이 제정되었다. 관공립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및 기술학교와 전문학교가 세워졌다. 그런데 1904년 전까지 교육 제도는 크게 확산되지 못하였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부 정책에 있었다. 정부는 교육의 확대보다는 군사력 증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부는 전체 예산 절반을 군대 예산으로 사용하였다. 교육 예산은 전체 예산의 2∼3%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부족한 예산으로는 학교 설립은 생각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기존에 세워진 학교의 운영도 쉽지 않았다. 절반의 예산을 들여 군사력을 키웠으나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지휘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4년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 한국의 언론과 주요 인사들은 정부에 학교 교육의 확대와 의무교육 제도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한국이 위기에 봉착하였으니 교육을 통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수의 인사들이 부국강병의 기초인 학교를 세우고 의무교육을 실시하자고 요구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미 일본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은 정부가 할 수 없는 상태이니 국민이 스스로 학교를 짓고 교육을 확대시키자고 대중에게 제안하였다. 사립학교는 정부의 소극적 교육 정책과 사회 여론의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교육진흥책을 펴지 않았고, 언론은 그러한 정부를 대신하여 국민 스스로 학교를 설립하자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많은 수의 사립학교가 전국에서 설립되었다. 사립학교 설립의 주체는 개인, 문중, 지방관과 지역민, 지역공동체 일반으로 나뉜다. 개인은 정부의 전현직 고위 관료나 지방의 명망가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학교를 세웠다. 문중은 향촌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 학교를 세웠다. 지방관은 부임지의 지역민과 함께 학교를 세웠다. 또 서울이나 지방의 동리 사람들 다수가 발의하여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서울 지역에는 주로 개인 설립 학교와 지역민 주도 학교가 설립되었다. 지방에서는 문중 주도 학교와 군수와 지역민 학교가 세워졌다. 사립학교의 설립 주체는 다양하지만, 학교의 재정은 유형이 대부분 비슷하였다. 학교는 대부분 옛 관공서의 터와 건물, 지방 향교에 섰다. 설립자가 토지를 구매하고 건물을 신설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운영 경비의 출처도 대체로 비등하였다. 설립자가 경비를 전담한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개인이나 단체의 연조금을 받거나 지역의 공공 재산의 이자를 경비로 사용하였다. 또 정부의 보조금을 받기도 하였다. ‘사립’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나 유지하는 방식에서는 사립이 아니라 공립에 가까웠다. 사립학교의 설립자들은 설립 당시 설립취지서를 반포하였다. 취지서의 내용에 따르면 사립학교의 설립 목표는 대체로 문명개화와 국권의 회복이었다. 한국인들은 교육을 통해 문명개화하면 국권이 회복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이 발기하여 설립된 사립학교이지만, 주변의 연조와 도움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의 설립 목표 때문이었다. 사립학교의 설립 취지에 동의한 사람들이 연조금을 납부하고 공공재산의 활용을 용인한 것이다. 그런데 설립된 사립학교는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사립학교가 가진 특징과 한계 때문이었다. 사립학교는 재정에 대한 외부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외부의 지원이 끊기게 되면 폐교하게 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재정을 위해서 사립학교의 일부는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지방 유력자가 가진 이권을 빼앗거나 세금의 형식으로 금전을 거두어가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에 지역민의 반감을 샀다. 또 서당과 비교해 보면 사립학교는 교과 과정이나 교사 수준이 괄목할 만큼 높지 않았고 서당만큼 방방골골에 설치되어 있지도 않아 호응이 높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전반적 특징과 그에 연원한 문제로 인하여 설립된 후 문을 닫은 학교의 수는 적지 않았다. 한편 1905년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한국의 교육 제도를 개편하기 시작하였다. 통감부는 교육 관련 법령을 개편하여 학교의 수업 연한을 단축하고 실업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 통감부는 인력이나 자금을 투여하기보다는 기존의 교육기관을 활용하여 학교 교육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통감부는 당시 가장 많이 설립된 교육기관인 사립학교를 통감부 체제 안으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포섭의 첫 번째 단계로 통감부는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고 있었던 사립학교를 관리·감독하기 위하여 〈사립학교령〉을 반포하였다. 법령을 통해 학교의 인가를 강제하고 관리하고자 하였다. 언론에서는 사립학교령이 학교 탄압의 수단일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사립학교가 사립학교령에 따라 정부의 인가를 받고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인가 신청을 한 학교는 거의 대부분이 인가를 받았다. 인가를 받은 학교는 통감부의 교육 체제 안으로 포섭되어 갔다. 통감부 체제 안으로 포섭되었다고 해서 사립학교가 전과 달리 쉽게 폐교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수의 학교가 문을 닫았다. 재정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통감부는 사립학교가 기부금을 징수하거나 공공재산을 활용하는 것을 법률로 막았기 때문에 재정문제는 더 심각해 졌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부 사립학교는 학교 부지와 건물을 갖추고, 일정한 재정을 확보하여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대개 그런 학교는 각 군에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였다. 통감부는 일정한 규모와 재정을 갖춘 사립학교를 지정학교로 만들어서 일본인 교사 1인과 한국인 교사 1인을 파견하였다. 통감부는 사립학교에 교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립학교를 보조하고 동시에 감시·감독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후, 보조지정학교와 공립학교 수준의 재정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사립학교의 다수는 공립학교가 되었다. 문명개화와 국권수호를 위하여 설립되고 유지되었던 사립학교는 결국 식민지 된 나라에서 사권 행사의 권리를 빼앗기고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공립화 된 학교는 식민지 교육 정책에 순응하는 식민지의 학교로 유지되었다. 주요어 : 사립학교, 학교 재정, 의무교육, 교육정책, 부국강병, 문명개화, 국권회복, 인재양성 A Study of the Private Schools Founded by Korean Individuals in the Early 20th Century with a Particular Focus on the Agency of Their Founding and Financing Jeong Jinsuk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The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thesis investigates the characteristics, limits and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private schools founded by Koreans in the early 20th century, focusing on the agency of their founding and funding. Private schools, as opposed to government schools and public schools, were the early 20th century's most enthusiastically founded educational institutions until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This thesis examines who founded Korean private schools, in what circumstances, how these schools were financed and how they were influenced by the rapidly changing political situation of early 20th century Korea. Following the opening of Korea's ports, information about western educational institutions became available to Koreans. The core of that information was that western education was the foundation of the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of the west. Accordingly, the king Gojong and those who advocated a Korean enlightenment believed that founding schools on the model of the western educational system and cultivating talent in them would ensure Korea's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It was from the year 1904 that a school-founding movement arose in Korea, resulting in the establishment of a large number of schools. It started with a demand by a small number of Koreans that the government found schools and implement a system of mandatory education for children of school age. The demand for mandatory education aimed at promoting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strength and defending national sovereignty, the loss of which to Japan was an impending crisis at the time. The government of the Korean Empire, since it was already under Japanese control, could not accommodate this demand. Many Koreans turned to their own resources to implement mandatory education despite their government's inaction, which led to a school-founding movement. The agency of those who founded private schools from 1904 on can be more precisely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i.e. an individual benefactor such as a serving or retired high-ranking official or a local leader; a local lineage group; a magistrate and some of the residents of a county; a group of like-minded villagers. Even when their founding agencies were different, the methods used to finance private schools were generally the same: old sites and buildings of local public offices or local Confucian schools (hyanggyo) were used as school buildings, while contributions from individuals or groups, or the profits derived from the interest on public properties, were used to maintain schools. Even though these schools were founded as 'private', the way they were maintained was essentially 'public'. The level of financial self-sufficiency of these private schools was fairly low, so their survival depended upon external support. The reason why so many people made contributions to these private schools and allowed them to use public properties was because of the purpose behind their foundation, i.e. to civilize and enlighten Korea and restore Korean national sovereignty. Following the installation of a Resident-General in Korea in 1905, Japan began reforming the education system of Korea. In order to reap the maximum profit at minimum expense, the Resident-General reduced the length of the educational period while reinforcing vocational training programs, and planned to use some of the private schools with relatively solid financial bases and well-managed curricula as the basis for implementation of colonial education in Korea. This targeting of the better maintained private schools among the numerous unlicensed ones at that time was the Resident-General's purpose in legislating for and issuing the <Private School Ordinance>. The Private School Ordinance was a law which forced unlicensed private schools to obtain a license, while restricting their right to collect contributions and use public properties. By the provisions of the ordinance, however, even after obtaining the required license, private schools with financial difficulties would be closed just as easily as before, since their financial difficulties were bound to get worse after it came into effect. There remained one or two better managed private schools in each county, which possessed their own school sites and buildings as well as other stable assets, and performed the role of educational institutions. After Japan's annexation of Korea in 1910, the Resident-General converted them into public schools and reorganized them so that each county had only one school. As the country turned into a colony, private schools lost their right to remain private and became public institutions responsible for colonial education in the service of the colonial government. Key words: private school, school financing, mandatory education, education policy,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富國强兵), 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文明開化), restoration of national sovereignty(國權回復)
본 논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려 했던 대한제국 지식인들의 노력과 그들의 ‘국민’ 개념 및 인식, 그리고 ‘국민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서구의 ‘네이션’ 개념 및 용어가 일본을 통해 한국지식인들에게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갑오개혁이 실시되기 이전부터 서구의 ‘네이션’ 개념을 수용하기 시작했던 지식인들은 갑오개혁 시기 본격적으로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고자 했다. 이들은 국가구성원들을 ‘인민’, ‘신민’, ‘민’, ‘백성’, ‘국인’, ‘민인’ 등으로 다양하게 호칭했으며, ‘국민’과 ‘민족’이라는 용어 역시 등장했다. 비록 서구 ‘네이션’에 대응하는 용어로 ‘국민’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국가구성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계몽운동기에 들어서였다.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국민상’ 역시 시기별로 변화해 갔다. ‘국민’은 국가구성원이라는 기본적 인식과 함께 이들이 담당해야 할 사회적 역할과 책임은 조선, 대한제국이 처했던 역사적 현실에 따라 변화해 갔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전 시기부터 박영효와 유길준은 ‘국민’을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평등한 존재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대적하기 위해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추진할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비롯한 개혁세력은 갑오개혁을 추진하여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근대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고자 했다. 갑오개혁세력이 교육을 통해 추구했던 ‘국민상’은 군주의 은혜와 보호를 받으며 군주에게 충성하고 국가에 애국해야 하는 ‘신민’으로서 국민’이었다. 독립협회는 갑오정권이 몰락하여 개혁이 중단되고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다시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이루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독립협회는 ‘국민’으로부터 자신들이 추진하던 개혁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개혁을 함께 추진하여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시대적 과제를 함께 수행할 ‘협력자’로 만들고자 했다. 교육과 ‘인민’의 권리를 법률로 보장해 주어 조선인민들을 충군애국심과 같은 국가의식을 지니고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주장했던 ‘인민’의 권리 역시 생명권, 재산권과 같은 천부인권에 국한되었을 뿐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민중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배제된 것이기는 했지만 ‘국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개혁과 입법을 통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주장했던 독립협회가 고종황제로부터 탄압을 받고 해체된 후 한동안 ‘인권’, 또는 ‘민권’에 대한 논의나 활동은 위축되었다. 광무정권은 전제적 황제권을 강화하며 황제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충성하는 ‘신민’을 추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민권운동은 물론 ‘국민’의 권리나 자유에 대한 논의조차 한동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00년 초 청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사건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서 열강의 각축이 심화되고 대한제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도 계속되면서 한국 내에서도 위기의식이 팽배해 갔다. 이 위기를 타개할 주체로서 ‘국민’과 그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세를 굳힌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국민’의 역할과 책임론은 더욱 강조되었다. 국권 침탈이 가속화하자 지식인들은 국가위기의 책임을 ‘국민’에게 묻는 동시에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민’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했다. ‘국민’의 책임과 역할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국가, 정부, 국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서 정부는 주권을 실행하는 기관으로서는 ‘국민’보다 우위에 있지만 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국민’에게는 그 잘못을 바로잡을 권한이 있다고 보았다. 정부보다는 ‘국민’의 책임과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현실적인 이유는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던 한국에서 더 이상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국가, 정부, ‘국민’의 관계에서 국가와 정부의 관계보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는 사회계약론, 또는 국가계약론이었다. 사회계약론을 기반으로 국가는 군주 일인의 사유물이 아닌 ‘국민’ 전체의 공동체라는 논리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일체화하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의한 통감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의 현상이 식민지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언론과 계몽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져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전제적 황제권이 약화되어 감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긴 권력 공백 속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또한 일본이 내세웠던 한국의 ‘문명화’는 한국지식인들 역시 추구하던 목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통감부와 한국지식인들은 모두 교육을 통해 ‘국민’을 형성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국민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으로 부임한 직후 교과서 편찬과 소학교육을 위주로 한 교육, 그리고 실업교육을 통해 한국민을 ‘문명국’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피력했다. 이토가 이러한 교육정책을 통해 형성하고자 한 보호국의 ‘국민상’은 납세와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근대적 가치관과 도덕심을 갖춘 ‘문명국민’이었다. 덧붙여 실업교육을 위주로 한 교육을 통해 식산흥업을 추진할 수 있는 인적자원으로 한국민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통감부는 보호국의 ‘국민’이었던 한국민이 충군애국심, 국가의식을 갖게 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 통감부는 충군애국과 같은 국가사상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추진하던 ‘문명화’에 부응할 수 있는 근대적 인간형을 ‘국민상’으로 추구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국민’은 문명개화한 근대적 인간형일 뿐 아니라 충군애국심과 같은 국가사상을 지니고 국가와 일체감을 형성하며, 국가의 내외주권을 회복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통감부의 ‘국민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한국지식인들은 국가구성원들이 ‘국민’으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와 함께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와 자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법률에 의해 권리와 자유를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국권 상실의 위기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사적이익보다는 국익을 중시하고, 국익과 사적이익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국익이 보장될 때에야 사적이익 역시 보호받을 수 있다고 인식했고, 국민’을 국가보다 하위에 두고 ‘민권’보다 ‘국권’을 우선시하는 국가주의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국가주의적 인식 속에서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국민’의 권리는 주로 기본권, 자연권과 같은 개인권에 한정되었으며, 국민권, 즉 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국민’ 참정권 문제는 우선 국가권력의 소재, 즉 주권 문제에서부터 논쟁이 제기되었다. 1905년 ‘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대외적 주권을 상실하고, 1906년 통감부 설치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로 군주통치권으로 대표되었던 대내적 주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주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주권 소재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인민주권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군주주권을 인정하거나 더 나아가 강력한 군주권을 구심점으로 ‘국민’을 통합하려 했다. 이와 같이 군주국체를 주장하는 가운데 ‘국민’은 통치권의 객체 또는 주권의 관할을 받는 자로 통치권과 주권에 복종하고 협력하여 국가를 문명화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존재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권 논쟁과 별개로 1907년 이후 국가주권이 거의 상실된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향후 군주와 황실, 정부, ‘국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또 주권을 대신하여 국가구성원들을 통합해 낼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지식인들은 ‘국민’을 통합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애국심’, ‘애국성’, ‘애국사상’을 강조했고, 입헌정체를 실시하여 법으로 군주의 전횡을 막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위로는 군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국민들까지 모두 일체감을 느끼게 하여 애국사상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국민’의 애국심을 형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헌을 실시할 수도,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도 못하는 ‘보호국’의 현실 상황에서 ‘국민’에게 국가의식과 애국심을 형성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강조했던 것은 자연적 애국심이었다. 즉 애국심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자신이 사는 터전과 가족, 친지들에게 가지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애정 역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자연적 애국심과 國事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때에야 ‘국민’이 국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정치적 애국심 가운데 전자의 애국심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 애국심론은 가족국가론과 함께 혈연공동체로서 ‘국민’과 국가의 관계를 강조하여 ‘국민’ 통합을 도모했다. 한말지식인들은 ‘국민’ 성립의 조건 또는 요소로 공통의 혈연과 공통의 역사, 언어, 습관, 종교 등을 제시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근대국가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국민’을 형성하는 요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근대 종족공동체 또는 혈연공동체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했다. ‘국민’은 이러한 혈연공동체 또는 종족공동체를 이루는 요소들에 덧붙여 정치체 또는 정치공동체의식을 필요로 했다. 종래의 종족공동체 또는 혈연공동체는 근대국가의 ‘국민’을 이루는 근간이 될 수 있었지만 반드시 ‘국민’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말지식인들 역시 ‘국민’과 혈연공동체 또는 종족공동체와의 차이를 ‘국민’과 ‘민족’, 또는 ‘국민’과 ‘족민’으로 구별하여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념상으로는 ‘민족’과 ‘국민’을 구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실제로는 이 두 용어를 혼용했다. 그 이유는 대한제국이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며, 따라서 ‘민족’이 곧 ‘국민’을 이루어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은 일가의 가족구성원과 같이 동일한 조상을 가진 혈연공동체로 인식되었고, 공통의 혈연뿐만 아니라 공통의 역사, 관습, 언어를 매개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존속될 수 있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 역시 가족국가론을 통해 혈연공동체로 설명되었다. 가족국가론은 가족을 최소단위로 하고 그 가족들의 결합체 내지 확대체, 즉 혈연단체의 최상위에 있는 것이 국가라고 정의했다. 가족국가론은 국가구성원들로 하여금 공통의 혈연의식을 바탕으로 강한 일체감과 소속감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점과 사적 영역인 가족과 일가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을 공적 영역인 국가에 대한 애정과 의무감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복종과 의무 이행 역시 이러한 논리를 통해 정당화 되었다. 반면 국가의 기원을 그 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계약에서 찾고 있는 국가계약설의 경우 권력의 원천을 ‘국민’에게서 찾고 있을 뿐 아리나 국가의 역할 역시 그 구성원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국가계약설 역시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국민’의 권리와 자유보다는 국가와 군주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복종, 의무를 우선시 했던 당시의 정황에서 국가계약설은 자칫 ‘국민’의 방종과 무질서를 야기하여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이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국가의 성립을 ‘인민’의 의지와 계약으로 성립했다고 보는 계약설보다는 국가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공동체의 확장 또는 집합체로 인식시켜 국가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족국가론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족국가론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과 같은 혈연공동체로 규정했지만 적어도 정치적 공동체인 대한제국이라는 국가가 유효한 가운데 국가구성원인 ‘국민’이 국가와 황제에 대해 충성하고 복종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1907년 이후 대한제국이라는 현실 국가가 거의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특히 친일내각으로 구성된 정부가 국권을 회복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으며, 군주와 황실 역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에 이용당하여 국권 상실의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가족국가를 구성하던 군주와 황실, 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국가가 와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국민’뿐이었다. 또 혈연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로 인식되었던 ‘국민’은 정치공동체로서 의미가 퇴색되고 혈연공동체이자 정신적 공동체로서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그 호칭 역시 ‘국민’이 아닌 ‘민족’으로 불리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민족’은 공통의 혈연과 역사를 매개로 한 혈연공동체이자 정신공동체로서 단군 이래 한반도에 성립했던 여러 왕조국가의 부침과 무관하게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해 온 실체로 여겨지며,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국가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독립주권국가를 건설하여 그 국가의 ‘신국민’으로 거듭나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지식인들은 당시의 세계를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의 시대로, 또 ‘민족주의’가 극대화하여 타민족의 문화와 생존을 위협하는 “민족적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 시대로 인식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이해하고, 실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민족’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던 한국지식인들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이념적으로 분리하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데올로기로써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민족주의’ 시대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이전까지 국가주권을 대신하여 ‘민족’을 지탱하고 통합할 구심점이자 원동력은 ‘국혼’, ‘국수’, ‘국성’ 등이었다. ‘국민’을 형성, 통합하여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던 지식인들의 노력과 시도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며 일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지식인들의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계속되었다.
우성윤 대구한의대학교 일반대학원 2022 국내박사
Guan Zhong (725 BC to 645 BC) was a politician who led the national prosperity and defense of Qi dynasty during the Chinese Chun Qiu Period. Until now, the understanding of the character of Guan Zhong has remained as the main character of the idiom, Gwanpojigyo, as a pronoun of friendship. Beyond the interest in Guan Zhong as the protagonist of such generous expressions, the writer tried to analyze thoroughly the political ideology of Guan Zhong, a statesman who was real in history. The political action of Guan Zhong is a result of exquisite fusion and compromise of the various viewpoints of the Jejabaekga ideology, which was popular at the time. Therefore, the political action of Guan Zhong needs to be interpreted on the basis of the Jejabaekga ideology that was popular in ancient China at the time. Therefore, the policies and ideas expressed in the document 『Gwanja』, which reveals the actions and thoughts of Guan Zhong, were used as the main research material for this thesis. Traditionally, research on the philosophy of discipleship has been focused on four scholars of Confucianism, Taoism, Mohism and the School of Law. Among them, the attention on Guan Zhong who fused with various Jejabaekga ideologies, was inevitably lowered as Confucianism and Taoism became the central subjects of the study. However, a pragmatic politician of the Chun Qiu period Guan Zhong attracted a new attention as China embraced the capitalist market economy and developed a scholarly culture that emphasized utility and practicality. It is true that there have been rare attempts to find out the political ideology of Guan Zhong through Jejabaekga ideologies and the policy of Guan Zhong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studies on the character of Guan Zhong in recent years. In particular, attempts to study the political ideology of Guan Zhong within the overall framework of the Jejabaekga ideology encountered many difficulties due to lack of background knowledge and related materials. The basic text that enables studying the political ideology of Guan Zhong is 『Gwanja』, which records the actions and thoughts of the character Guan Zhong. However, the discrepancy between the time of the person's life and the period of writing the document caused the reliability of the character Guan Zhong's claim to be questioned. And although it was an attempt to find out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through Guan Zhong's thoughts and policies, there was a point where it was difficult to clearly distinguish whether it was the point of view of the character Guan Zhong or the point of view of the document called 『Gwanja』. In the end,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can also be derived from the document 『Gwanja』, so the discussion started after defining it as the political thoughts of 『Gwanja』. However, since a political thought is an idea derived from the political actions of politicians, it is not unreasonable to define it as the political thought of Guan Zhong. The greatest characteristics of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lies in the fusion and synthesis of the various ideas of the Jejabaekga. In detail, the political ideology of the spectators was fused and synthesized by combining the ideology of Gunbon emphasized in the School of Law and the ideology of Minbon emphasized in Confucianism. And the fact that the absolute rulership of the monarch is regarded the most important, but that the public opinion is emphasized no less than that shows that he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 is one of middle-road, middle path and pragmatic. And his political measures were reflected in the policy by selecting the core of the Jejabaekga ideologies that was popular in Chun Qiu Period and the age of the warring states. Therefore, it can be said to be middle-road, synthetic, negotiative, and transitional political thought in the sense that it does not depend on any specific individual thought. It was a great opportunity and rewarding to be able to study the politician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under the foundation of the three major pillars of Confucianism, Taoism and the School of Law. The politician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are concentrated with the goals of establishing legal order and achieving the national prosperity and defense. In order to achieve such a goal, Guan Zhong valued utility and practicality, and extracted the strengths of various Jejabaekga ideologies before applying them to real politics by fusing and mixing them. Behind the Guan Zhong's political measures, both the strict realism of the school of law and the warm idealism of Confucianism and Taoism are melted. Policies were implemented under various ideological backgrounds and men of ability were appointed rather than sticking to a specific ideology. The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which emphasized the economic stability of the people, national defense and diplomacy, and emphasized practicality and reality rather than ideals and causes, are the theoretical foundation that explains the Chinese temperament, the rapid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growth of national power in China recently. It is supposed that these inclusive, pragmatic, and realistic aspects of Guan Zhong, while not disregarding the traditions and morals of the past are the qualities that today's political leaders and corporate CEOs must possess. Problems such as extreme rich-poor conflict, left-right conflict, generational conflict, and gender conflict are issues that are occurring simultaneously in current Republic of Korea and are increasing in severity as time goes by. Especially, the seriousness of these problems is becoming more prominent with the big elections ahead. Conflicts due to differences in political orientation, religion, gender, and generation will always exist, but it is supposed that it is political leaders' role to confront and minimize those conflicts, and pursue the development of the state. Efforts to exclude extremes and embrace people with different opinions and go together are the most necessary qualities for a national leader. A good example of such a case is the person Guan Zhong in Chun Qiu Period. The Guan Zhong's political thoughts can help to equip the leaders and the whole people with the qualities of pragmatism, inclusiveness, and moderation, and in that respect, his political thoughts has a sufficient modern significance. 관중(기원전 725 ∼ 기원전 645)이라는 인물은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끈 정치가이다. 지금까지 관중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는 우정의 대명사로서 관포지교라는 사자성어의 주인공에 머물러 있었다. 논자는 그러한 관용적 표현의 주인공으로서의 관중에 대한 관심을 넘어 역사에 실재했던 경세가 관중의 정치사상에 대해서 밀도있게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관중의 정치적 조치는 당시 유행했던 제자백가사상의 다양한 관점들을 절묘하게 융합하고 절충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관중의 정치적 조치는 당시 고대 중국에서 유행했던 제자백가사상의 기반하애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관중의 행적과 사상이 드러나있는 『관자』라는 문헌에 나타난 정책과 사상들을 본 논문의 주연구자료로 삼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제자철학에 대한 연구는 유가 · 도가 · 묵가 · 법가의 사가에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가와 도가가 연구의 중심주제가 됨으로써 다양한 제자백가사상을 융섭한 관중이라는 인물의 주목도는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실리와 실용을 강조하는 학풍이 조성됨에 따라 춘추시대의 실용적 정치가였던 관중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많은 관중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많아지기는 했으나 제자백가사상과 관중의 정책을 통해 관중의 정치사상을 구명해보려는 시도는 드문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제자백가사상의 전체적 틀안에서 관중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려는 시도는 배경지식의 부족과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관중의 정치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본적 텍스트는 관중이라는 인물의 행적과 사상을 기록한 『관자』이다. 그러나 인물의 생존시기와 문헌의 작성시기가 불일치하여 항상 관중이라는 인물의 주장의 신뢰성이 의문시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관중의 사상과 정책을 통해 관중의 정치사상을 구명하려는 시도이지만 관중이라는 인물의 시점이냐, 또는 『관자』라는 문헌의 시점이냐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지점이 존재하였다. 결국 관중의 정치사상도 결국 『관자』라는 문헌에서 근거를 도출할 수 있으므로 『관자』의 정치사상이라고 규정하고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치사상이라는 것은 결국 정치가의 정치적 조치에서 도출되는 사상이므로 관중의 정치사상이라해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관중의 정치사상은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을 융합하고 종합한 데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관중의 정치사상은 법가에서 강조하는 군본의 이념과 유가에서 강조하는 민본의 이념을 융합하고 종합하였다. 그리고 군주의 절대 통치권을 가장 중시하지만 백성의 민심을 그에 못지 않게 강조하였다는 것은 관중의 정치사상이 중도 · 중용 · 실용의 정치사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조치들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유행하던 제자백가사상들의 핵심을 뽑아 정책에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개별 사상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도적 · 종합적 · 절충적 · 과도기적 정치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자백가사상의 큰 세 축인 유가 · 도가 · 법가사상의 토대아래 정치가 관중의 정치사상을 부족하나마 연구해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기회이자 보람이었다. 관중이라는 정치가의 정치사상은 법질서의 확립과 부국강병의 달성이라는 목표로 집약된다. 관중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실리와 실용을 중시하고 다양한 제자백가사상들의 장점을 뽑아내어 융합하고 통섭하여 현실정치에 적용하였다. 관중의 정치적 조치들의 이면에는 법가의 엄격한 현실주의와 유가 · 도가의 따듯한 이상주의가 모두 녹아있다. 특정한 사상에 경도되지 않고 다양한 사상적 배경아래 정책을 집행하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백성의 경제적 안정과 국방과 외교를 중시하며 이상과 명분보다는 실리와 현실을 중시한 관중의 정치사상은 중국인의 기질과 최근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 국력신장을 설명해주는 이론적 토대이다. 관중이라는 인물이 가졌던 이러한 포용적 · 실용적 · 현실 중시적 면모, 그러면서도 과거의 전통과 도덕을 경시하지 않는 특징은 오늘날의 정치지도자들이나 기업의 경영자들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자질이라고 생각된다. 극단적인 빈부 갈등, 좌우 갈등, 세대 갈등, 성별 갈등과 같은 문제들은 현 대한민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문제들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큰 선거를 앞두고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은 더더욱 대두되고 있다. 정치적 지향, 종교, 성별, 세대간의 차이에 따른 갈등들은 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똑바로 직시하고 갈등을 최소화하며 국가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을 배제하고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함께 가려는 노력은 국가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다. 그러한 사례의 좋은 본보기가 바로 춘추시대의 관중이라는 인물이다. 지도자와 전체 국민 모두가 실용과 포용, 중용의 자질을 갖추는 데 관중의 정치사상은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관중의 정치사상은 충분한 현대적 의의를 가진다.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미가 6:16)에 관한 연구
The present dissertation aims to investigate the socioeconomic implications of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as mentioned in Micah 6:16. The 8th century BC prophet of Judah Micah attributes the destruction of both Judah and Israel to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This study argues that the statutes and the works of the Omri-Ahab dynasty refer to “iniquitous decrees” of the Omri-Ahab house(Isa 10:1, 2) and its anti-Yahwistic policies or legal innovations that entail the distortion of the national identity of Israel as a vassal kingdom covenanted to Yahweh. The central thesis of this study is that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refer to religious, diplomatic and legal reformations adopted by the Omri-Ahab dynasty so that it may transform the national identity. In order to demonstrate this thesis, this study tries to reconstruct the socioeconomic status of the Omri-Ahab dynasty based on an exegetical inquiry into several passages of the book of Kings (1 Kgs 16–22). It also retraces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Northern kingdom collapsed a century earlier than Micah, through an exploration of Micah’s imputation of the downfall of Judah to the statutes of the Omri-Ahab dynasty and its all practice. Since the author of the book of Kings uses religious terms to describe misdeeds and flaws of the two kings Omri and Ahab, the readers may get the impression that the works of the house of Omri refer to either idolatry or religious syncretism (1 Kgs 16:26, 30-33). However, if we look deeper into the texts of the book of Kings and investigate the socio-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literature 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situations lying beyond the text, we can come to reach the conclusion that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denote not only religious misdeeds, but also some nation-wide socioeconomic reformations. The abve mentioned reformation includes both transformation of national constitution that was undertaken to enhance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and modification of traditional land property system. The prophet Micah criticized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since the Israelite people ended up being deprived of their landed property given by God because of the policies adopted by the Omri-Ahab dynasty. In this light, this study presents three arguments to support the central thesis. First, the meaning of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can be identified with the legacy of the Omri-Ahab dynasty in the 9th century BC as described in the book of Kings. Several texts and passages in the book of Kings suggest that the Omri-Ahab dynasty promoted a series of policies that led to the destruction of the Israelite tradition. Both the Omri-Ahab narrative and the Elijah-Elisha cycle show that these two kings endeavored to restructure the whole nation into a new kingdom fit for coping with international affairs and the advance of the northern powers such as Aram and Assyria. For instance, Ahab adopted Baalism as a state religion and used it as the governing ideology. In other words, both Omri and Ahab changed the fundamentals of national administration into the ‘Baal religion.’ We can also identify the meaning of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by undertaking thorough research on 1 Kings 16-22. They refer to (1) a new land policy that allows for the initiation of permanent private ownership of land; (2) a policy that enables the ruling classes to enhance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via international trade; and (3) a policy that extends a legal favor and privilege to the ruling classes by allowing them to plunder other people’s land legally by adopting a Canaanite legal system (chapter 3). Secondly, we can also rely on extra-biblical resources to more clearly grasp what the words of the prophet Micah(6:16) meant, such as archaeological evidence in the 9-8th century BC. Especially, the archaeological findings that dated from the Iron Age II (10-6th century BC) of ancient Israel and their related socioeconomic circumstances are of great use for our research. According to the previous studies, the monarchy established during the Iron Age II was forced to face a dramatic change in overall politics societal and economical. As a result of the policy change promoted by Omri and Ahab to reform Israel from an agricultural nation into an international trade nation by making an alliance with Phoenicia,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underwent a huge transformation ‘from subsistence economy to a market economy with international trade.’ As the subordination of agriculture to trade and market economy was expanded, the agricultural system of Israel changed from traditional ‘mixed farming’ to intensification of ‘intensive agriculture.’ Moreover, the Omride dynasty allowed only a small number of the ruling power elites to accumulate such a large size of land(Isa 5:8-10) and thus enhance efficiency in use of land and to maximize agricultural productivity, In short, the regnal time of both Omri and Ahab was an important transition period for Israel (chapters 4-5). Thirdly, the present dissertation argues that the meaning of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can be inferred from the words of the prophet Micah. The book of Micah diagnosed that the downfall of the kingdom of Judah was occasioned because it followed the precedent of Northern Israel, and criticized that it caused the rural area of Judah to be exposed directly to the invasion of Assyria without any protection. The prophet Micah alluded that the policy for enhancing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introduced by King Hezekiah was to enforce the statutes of King Omri and Ahab in Judah, which included joining a military alliance with Egypt, importing weapons and luxury goods in exchange of farm surplus, and seeking to increase military power by allying with Babylon. In this sense,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paved the way for the ruling classes of Judah to commit a series of socioeconomic injustice and inequality as reported in Mic 1:1-6:15. Micah repeatedly complains about socioeconomic problems, ultimately the ones related with landed property (especially 2:1-5; 3:1-4; 6:10-15). The implication of Micah’s critique is that “the statutes of Omri and all the works of the house of Ahab” played an important role in justifying extortion of land by the ruling people(chapter 6). In conclusion this study argues that even though the misdeeds and flaws of King Omri and Ahab were enshrined in religious language, their overriding wrongdoing was the destruction of the covenant community of the free farmers of ancient Israel who was covenanted to God. 본 연구의 목적은 미가 6:16에 나오는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에 담긴 사회경제적 함의(socioeconomic implications)를 규명하는 것이다. 미가서는 이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을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의 멸망 원인으로 지목한다. 본 연구는 미가서가 말하는 오므리-아합 왕조의 율례와 예법은 이사야가 말하는 “불의한 법령”(사 10:1, 2)에 해당하며, 반야웨주의적 사회경제 정책이나 제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이 의미하는 바를 규명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열왕기(왕상 16장-22장)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통해 오므리-아합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주전 8세기 예언자 미가의 히스기야 왕실 비판을 참고하여 한 세기 전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공동체 해체 상황을 역추적한다. 열왕기 기자가 지적하는 오므리와 아합의 악행과 허물은 주로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오므리 왕실의 주된 허물이 우상숭배 혹은 종교혼합주의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왕상 16:26, 30-33). 그러나 본문을 깊이 연구해 보고 본문 너머에 실재했던 정치경제적 움직임들을 보여주는 사회사적, 고고학적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이 단지 종교적인 영역의 악행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국가적 차원의 토지소유 관련법 개악(改惡) 시도였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의 중심 논지는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이 오므리-아합 왕조가 국가정체성 변경을 수행하기 위해 채택한 종교적, 외교적, 법적 개혁조치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국체 변경을 포함하는 부국강병 정책’ 및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전통적 토지 사상의 변개와 훼손’이라는 것이다. 예언자 미가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을 비난한 이유는 이들의 정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논거는 열왕기가 제시하는 오므리와 아합 왕실이 시도한 전통파괴적인 국가경영 시도에 대한 다채로운 증언들이다.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에 담긴 의미는 열왕기 본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주전 9세기 오므리-아합의 치적과 행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오므리 왕조 이야기와 엘리야-엘리사 싸이클에 따르면 오므리-아합은 총체적인 국가 재편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아합은 ‘바알주의’를 채택하여 ‘국가종교’(state religion)로 삼고 자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 즉 오므리와 아합은 국가 운영의 근간을 ‘바알주의’로 변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열왕기상 16-22장의 심층적 연구를 통해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을 규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첫째, 토지의 영구적 사유화를 허용하는 새로운 토지정책, 둘째, 상업과 국제적 교역을 통한 국부의 비약적 증대를 겨냥한 부국강병 정책, 셋째, 지배계급이 소작농의 세습토지를 합법적으로 수탈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사법제도이다(3장). 두 번째 논거는 고대경제에 관한 사회과학적 연구와 주전 9-8세기 고고학 자료들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성서 외적 증거이다. 특히 철기시대 II(주전 10-6세기)의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사회경제사적 연구와 그것이 남긴 고고학 유물 연구는 우리의 성서 본문 연구를 보완해준다. 학자들의 연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철기 Ⅱ시대에 확립된 왕정 체제가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오므리-아합은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통해 전통적 농업국가인 이스라엘을 국제적인 교역국가로 변화시키려고 했는데,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핵심은 ‘생존경제에서 국제무역을 수반한 시장경제로의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농업이 교역에 종속되고 경제 전반이 시장화됨에 따라 이스라엘의 농업방식은 전통적인 ‘혼합영농’에서 국가의 명령에 의해 환금성 작물에 더욱 집중토록 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토지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집약농업이 고도화되고 소수에 의한 토지겸병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주전 10세기 다윗, 솔로몬 체제와의 차이를 보이는 동시에 주전 8세기와도 차별성을 보여준다. 오므리-아합의 시대는 여러 면에서 시대의 분기점이 될 만큼 중요한 전환기였던 것이다(4-5장). 세 번째 논거는 주전 8세기 예언자 미가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북왕국의 전례를 따르다가 멸망해가는 남유다의 쇠락을 분석하는 미가는 앗수르 침략 앞에 남유다의 농촌이 국가의 보호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먼저 희생되는 과정을 개탄한다. 미가는 북왕국 멸망 이후 히스기야가 취한 부국강병책이 오므리-아합의 율례를 따른 것이라고 비판했다(애굽과의 군사동맹 시도, 잉여농산물 수출에 의한 무기와 사치품 수입, 바벨론과의 동맹을 통한 군사주의 구축 등). 오므리-아합의 율례와 예법이 가리키는 바는 미가서에서 반복적으로 비판되고 있는 주제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즉 미가 6:16에서 망국의 원인으로 비판되는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은 그 앞의 문맥인 미가 1장-6장 15절에서 고발되고 있는 일련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불의를 총칭한다. 이처럼 미가서 본문이 반복적으로 고발하는 문제는 무엇보다 사회경제적인 불의와 압제 상황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토지와 관련된다(특히 2:1-5; 3:1-4; 6:10-15). 미가서는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권력자들의 토지 강탈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동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6장). 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적 용어로 포장된 오므리-아합 왕가의 악행과 허물의 실체가 이스라엘 자유농민과 하나님 사이에 땅을 매개로 형성된 언약공동체 파괴에 있음을 확증할 수 있다.
국가 통치 : 경제와 국방을 중심으로 한 부국강병책의 옹호
나은기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2007 국내석사
통치자의 자질의 기준은 어디인가? 우리에게 통치자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특히 대통령제를 시행하는 국가에서는 그 영향력과 파장이 얼마나 큰지를 가히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아직 인식도 못한 가운데서 누군가의 통치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통치자의 바르고 현명한 통치 아래 자신도 모르게 따스함과 포근함, 활기찬 생활, 풍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통치자 아래에 있게 된다면 현실과 미래가 다같이 어두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사회의 안정기반에 조금씩 금이 가는 누수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런 현상은 공무원들이나 교육기관, 군사체(군대)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게 서서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과연 한 국가의 통치자가 되는 사람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관용과 협력을 중요시 하고, 미래 지향적인 통치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하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국회와 국민을 설득시킬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요, 자신의 영욕에 근거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경제와 외교 더 나아가 국방에 심오한 지식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국민, 그들을 어떻게 하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게 하겠는가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통치자도 사람이기에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뒤흔드는 망령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실험’이라는 단서도 붙여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과 같은 우리의 생존이 달린 문제인 것이다. 국민은 통치자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의 됨됨이도 알고 있다. 언어에 있어 달변이 아니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언사(言事)를 삼가야 한다. 같은 말이라도 정중하고 신중하며, 도리를 따져서 말해야 한다. 그것은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자신을 밀어주고 뽑아준 국가의 주인인 백성들 앞에서 신정잡배(市井雜輩)들이나 쓰는 속된 언어를 사용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겸손해야 한다. 그가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알 수 있다. 겸손하여서 솔선수범하여 검약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발전을 통한 사회의 약자들을 동정하고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한 제스처가 아닌 비밀스럽고, 따듯한 어루만짐이 만인의 입에 회자되어야 하는 것이다. 통치자의 발걸음은 국민들의 마음에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맺히게도 하며, 분노를 삭이게도 한다. 자신을 위해 국고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좀 허름해지더라도 백성들이 편안하고, 생활이 점점 나아지고, 국가의 군사력이 강력해질 때 통치자는 그늘에서 존경받고, 위대해지는 것이다. 외교에 있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무시를 당하더라도 국가가 번영하는 쪽으로 간다면, 백성들의 형편이 나아지는 결과를 얻게 된다면 통치자는 개인의 위신을 고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쉬운 말로 말하자면 ‘눈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지하고 경솔하여 상대를 누르고, 자신의 위신이 높아졌을지는 몰라도 그의 백성들은 배를 곯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혹 전쟁의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국부의 성장엔진을 달아주는, 어느 국가 어느 통치자도 넘볼 수 없는 강한 방위력과 응징력을 갖춘 강군(强軍)을 만들 수 있는 우리의 형과 같고, 아버지와 같은 그러한 통치자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이제 교회와 성도는 우선 자신의 권리를 사용함에 있어 기도와 신중함으로 통치자를 선별하여 선택해야 하는 커다란 책임이 있다. 이것을 망각하고서는 우리는 또다시 고난과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치자로 선택된 사람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그의 통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건전한 비판과 질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파괴적이고 무질서는 용인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지상세계는 불완전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실제 세력을 쓰는 곳이다. 허나 성도와 교회의 깨어있음과 분별력은 자유세계에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안녕, 질서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의 도일 유학 정책에 대한 연구 : 중국의 도일 유학 정책과 비교를 통하여
옌전이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20 국내석사
19세기 말 한중 양국 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청년 학생들에게 留學을 장려하거나 지원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청년 학생들이 구국의 방법을 찾기 위해 해외 유학의 길에 올랐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도들이 가장 많이 유학한 나라는 가까운 일본이었다.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으로 많은 유학생을 보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① 가까워서 여비를 아낄 수 있으니 많은 학생을 파견할 수 있다. ② 일본어는 중국어나 한국어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③ 서양 서적은 복잡한데 이를 이미 일본인들이 간략하게 요약하고 참작하여 고쳐놓았다. ④ 한ㆍ중ㆍ일 삼국의 생활습관이 유사하여 도일 유학생들은 쉽게 현제 생활에 적응할 수 있어서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아직 현대 교육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던 19세기 말부터 중국과 한국에서는 渡日 留學을 통해 근대적 인재를 양성하고 향후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도일 유학생 파견 및 유학 정책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한국과 중국의 일본 유학생 파견에 대해서도 비교적 충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국사적 시야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과 중국의 도일 유학생 파견이나 그와 관련된 정책이 가지는 특징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교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중 양국의 도일 유학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관비유학생 파견의 지속성 및 도일 유학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정도이다. 한국의 근대 도일 유학은 친일 세력의 강약에 따라 크게 변화하였다. 한국의 도일 유학생 파견은 국내외적 정세 변화에 따른 굴곡이 극심하였으며, 한국 정부의 재정난까지 더해지면서 유학생 파견정책이 불안정하고 취약한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갑오개혁 시기에는 신분제도 및 과거제도의 폐지가 선포되었지만, 전통적 지식인이나 민중들의 반일정서가 오래전부터 강하였기 때문에 일본 및 친일적 관료들의 영향 아래 실시된 갑오개혁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도 매우 높았다. 이후 일본의 침략행위가 노골화하면서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발심도 더욱 커졌고, 관비 유학생 파견이나 자발적으로 일본에 유학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지기도 했다. 반면, 중국에서는 도일 유학생의 파견이 지속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경우 한국과 달리 중앙 정부만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 각 성의 주도로 유학생의 파견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경우 개항 이후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舊來의 중앙집권적인 정치문화가 지속된 반면, 중국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 국내외적 위기가 고조되면서 反滿 분위기가 심화되었고, 紳士 등에 의한 지방자치적 경향이 점증하고 있었다. 더구나 청 왕조를 반대하는 혁명파는 국내의 여러 제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의 일본은 중국 혁명의 기지로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국의 경우는 1905~1910년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적지 않은 사비유학생이 도일 유학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구국양책(救國良策)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처럼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혁명세력을 집결하여 자기나라의 정부를 공격하는 상황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는 이때 중국의 경우 직면한 과제가 주로 내부적, 사회·민족적 모순이었던 반면, 한국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외세로부터의 침입 및 식민의 위기였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구에서는 한중 양국의 도일 유학을 19세기 말(1880년대 초반)부터 20세기 초반(1910년)으로 국한하여 살피고자 한다. 1880년대 초반은 한국에서 도일 유학생을 처음으로 파견한 시기라는 점, 그리고 1910년은 한국이 일본의 병합을 당한 해라는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 도일 유학생을 파견한 시점은 한국에 비해 늦었지만, 초기 유학 정책을 살피기 위해서는 양국 가운데 최초의 도일 유학생이 파견되는 1880년대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또 1910년은 중국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해가 아니지만, 중국에서도 이 시기가 되면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학생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따라서 1910년이 한일 병합이 일어났다는 점을 중시하여 1910년까지로 시기를 한정하였다.
조옥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20 국내석사
This paper examined King Gojong’s countermeasures of the Peasant War of 1894, perceptions toward the subjects, and views of the state that were manifested through this process. King Gojong, facing a limitation whereby Confucian civilization alone could not respond to the system of international law that was incorporated in a heteronomous manner, established a balance of power theory with all nations and promoted an autonomous modernization grounded in the civilizational viewpoint of “based in the old, adapting from the new.”The Peasant War of 1894 broke out during this process, and China and Japan exploited it to intervene. King Gojong’s countermeasures in response to crisis both home and abroad were manifested in two ways. Internally, they encompassed measures toward the peasant army, while externally, they involved plans regarding independence. The idea of “enlighterning the public and the nation” as it appears in King Gojong’s royal messages, demonstrates attempts to overcome the internal and external crisis awareness through strengthening the royal authority.This clearly demonstrates the crisis awareness of the ordinary public and the nation immediately prior to the proclamation of the Korean Empire. 본고는 고종의 1894년 농민전쟁 대책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민에 대한 인식과 국가관을 살펴보았다. 타율적으로 편입된 만국공법질서체제에서 유교문명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한계적 상황에 직면한 고종은 만국과 세력균형론을 구축하고 구본신참적 문명관에 입각한 자율적인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4년 농민전쟁이 발발되었고 이를 이용해서 청일이 개입하였다. 고종의 대내외 위기에 대한 대응방안은 두 계통으로 나타났다. 대내적으로 농민군에 대책과 대외적으로 국가적 자주에 대한 방안이었다. 고종 「윤음」에 나타난 유민유국론은 이 같은 대내외적 위기의식을 군주권 강화를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직전의 민과 국가에 대한 위기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