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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원의 소설에 나타난 풍자성 연구 : 吳敬梓 소설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인루이 경희대학교 대학원 2016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논문은 한⋅중 양국의 풍자문학을 대표하는 박지원과 오경재의 소설에 대한 비교를 통하여 박지원 소설에 나타난 풍자대상과 풍자기법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박지원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는 '신분제도의 동요', '농촌경제의 변모', '상업경제의 발전', 중국을 통한 '새로운 문화와 사상의 유입' 등 격변의 시기였던 반면, 오경재가 살았던 청나라는 조정이 가장 견고하며 국력이 강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박지원과 오경재의 문학을 비교하면 유교사상에서 나온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압축될 수 있다. '화(和)'는 두 작가가 모두 한문소설을 썼다는 것과 생활한 시대가 비슷한 시기였다는 점을, '부동(不同)'은 살았던 나라가 달라서 사회제도와 작가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박지원의 작품은 주로 단편소설로, 단순하지만 내용이 풍부한 편이며 등장인물도 전통적인 양반뿐만 아니라 서민까지 다양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 오경재의 작품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유림외사󰡕는 여러 개의 작은 이야기를 합쳐서 작성한 장편소설로, 위로는 기득권층으로부터 아래로 서생, 하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박지원과 오경재의 작품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나 두 작가의 작품을 각각 연구한 논문이 대부분이고, 둘을 함께 비교분석한 논문은 많지 않다. 이에 본고는 박지원 소설과 오경재의 󰡔유림외사󰡕에 나온 풍자 대상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두 작가 소설에 나타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으로 작품 속에 있는 풍자 예술의 매력을 탐구하려고 한다. 아울러 박지원 소설에 나타나는 독창성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박지원은 18세기 조선시대 말기의 뛰어난 실학파 사상가이자 탁월한 문학가로서, 그의 소설에는 현실을 비판하는 뛰어난 감각이 숨어있다. 소설 속 풍자의 대상은 18세기 조선후기 사회의 각계각층의 세태라고 할 수 있는 바, 지배층의 부패와 부조리, 유학자의 위선과 추태, 봉건예교의 속박과 해독 등을 들 수 있다. 즉, 조선 말기에 나타난 인정세태에 대해 풍자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봉건예교에 대한 비판에 이른 것이다. 또한 박지원은 작품에서 다양한 풍자기법을 활용하였는데 백묘(白描), 아이러니, 대비(對比), 비유(譬喩), 서술 겸 논평 등이다. 이를 통하여 폭로와 규탄의 목적만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절묘한 풍자 효과로 읽는 재미를 함께 주었다고 할 수 있다.

    • 연암 박지원(1737-1805)의 건축관 연구

      김동현 명지대학교 대학원 2002 국내석사

      RANK : 247807

      이 논문은 박지원의 건축관에 관한 연구이다. 개별 건축가의 건축의도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 전통건축을 다양하고 구체적인 시점에서 조망하게 해 준다. 박지원은 조선후기에 '법고 창신'을 주장한 문장가, '이용후생'을 주장한 북학파(또는 실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먼저 박지원의 생애를 그의 건축 실천을 중심으로 시기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는 그의 건축관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이 된다. 박지원은 은둔을 목적으로 연암골에 원림(1778년, 1802년 증축)을 지었고, 선공감 감역을 지낼 때 창경궁 춘당대의 보조계단 설치(1786-1788)에 관여했다.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안의현 관아의 서쪽편에 하풍죽로당과 백척오동각을 중심으로 하는 원림(1793년)을 지었다. 이 원림에서는 박지원의 미의식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4장에서 다시 자세하게 다루었다. 1796년에 자신의 거처로 계산초당을 지었고, 면천군수를 지내면서 건곤일초정을 지었다. 이러한 사설을 토대로 3장과 4장에서는 그의 건축관을 기술적인 측면과 미학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박지원은 건축에서 기술의 문제를 중요한 논의로 끌어들였는데, 이용후생론은 그 이론적 기반이다. 박지원은 이용후생의 기반 위에서 정덕이 실현된다고 보아 조선전기의 사고와 차이를 드러낸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긍정하는 생활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라한 전망 아래에서 기술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올 수단으로 건축에서 부각되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용후생론의 구도 속에서 건축의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지원은 벽돌과 기계를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4장에서는 건축미학의 측면에서 박지원의 건축관을 살펴보았다. 먼저 박지원의 사고 체계를 살펴보았다. 박지원의 사유 방식은 먼저 상대성을 인정하는 기반에서 이루어진다. 박지원은 대상에 대한 인간 인식의 시·공간적 일면성과 선입견의 문제 때문에 대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대상 자체와 개념화에 의해 인식된 대상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대상의 총체성[道] 획득을 향해 '참[眞]'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가운데[中]'와 '저울질[權]'을 통해 총체성과 상대성 사이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한다. 여기에 인간의 인식으로 획득한 총체성에 대한 자기 반성과 극복의 측면이 있다. 박지원은 가요 무늬 돌쌓기와 영롱장을 의미 있는 상세로 생각하였는데, 그의 가요 무늬 돌쌓기는 이러한 반성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롱장은 건축에서 하찮은 것의 결코 하찮지 않은 가치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려 하였다. 박지원에게 위의 두 가지 상세는 조선 후기 북벌론자의 관념이 현실을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것임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비판적 성격을 지닌다. The research on Architectural Perspective of Park, Ji Won who is well known for writer as well as pragmatist insisting on the theory BUPKOCHANGSHIN and YIYONGWHOSANG during the latter period of CHOSUN Dynasty, is addressed and mainly done in this Thesis. The research on the design intentions of one individual architect such as him in history will help us to see the various specialties or distinctions of Korean Tradition in the milieu of Architecture. This Thesis is composed of Chronology of his practical works or endeavor, and the Research on his life is ensued out of the facts researched, which is supporting for us to understand his Architectural Perspectives or philosophy. He has several works such as WONRIM house purposed hermit life at YUNAMGOL (built in 1778, added in 1803), auxiliary stairs of CHUNDANG Bay in CHANGKYOUNG Palace when he was a officer (SUNKONGKAM) from 1786 to 1788, WONRIM which mainly made up of HAPUNGJUKRODANG and BAKCHUKODONGKAK westering from public agency buildingANYIKWAN when he was local minister (1793). In this WONRIM, his aesthetic view-points were well exposed to those houses. This WONRIM is going to be mentioned more precisely in chapter 4. Additionally, KESANCHODANG which was for his own residential space (housing), was built in 1796, and KUNGONLICHOJUNG also built when he was another local minister. On the basis of this fact, chapter 3 and chapter 4 are going to run his architectural perspective with technological and aesthetical point of view. He mentioned Technical matters as crucial proposition in the architecture, which is foundation of his theory YIYONGHUSANG (sort of pragmatism). He pointed that social virtue and ethics could be realized with this dogmatic theory. His way of thinking was truly different from before, in that materialistic prosperity is important aspect of daily lives that should be changed. From this prospection, technology was surging as means of inducing materialistic affluence. Precisely, he also emphasis on using bricks and machine in the milieu of architecture, based on his theory YIYONGHUSANGRON which was also mentioned in his diary YULHAILKI. In chapter 4. architectural aesthetic in his architecture and his way of thinking is studied. His view-point is based on deference to others from the beginning. He said that human beings biased and one-faced epistemology or way of thinking involved in time-space, interrupts scrutinizing objects thoroughly and completely. In between Object in itself and cognized object with conceptualization of its own nature, for narrowing the gap between them, he was using the concept JIN for embodiment of cognition of object. Eventually, this embodiment in epistemology was tried to be obtained by way of JUNG middle stage or in between and JEWULJIL measuring, scaling, and weighing. Here, introspecting oneself and overcoming oneself can be addressed with this embodiment of epistemology. He thought KAYOMUNIDOLSSATKI and YOUNGRONGJANG as meaningful detail because this KAYOMUNIDOLSSATKI the way of stacking or installing stones for making walls, has meaning of introspection. Furthermore, YOUNGRONGJANG is revealing the paradoxical meaning that nothing is not nothing. Those two details for him have the critical meaning that ideology or conception of BUKBULRON which is the group of people who tried to invade northern nation was just biased and narrow perspective toward reality.

    • 燕行錄 所載 筆談의 硏究 : 洪大容, 朴趾源 등을 중심으로

      박향란 인하대학교 2010 국내박사

      RANK : 247807

      筆談是使用不同語言的幾個國家的文人用文字進行勾通的方式。洪大容、朴趾源的筆談擺脫了以前單純記錄的性格,發展爲具有高度文學性的獨立體裁。燕行錄爲特定作家、特定作品的研究提供重要的參考價值,而直到80年代它才被認識爲體現旅行和各種體驗的文學文本而受到矚目。最近,隨著對燕行錄著述方式的探討、中國文人的交流與知識傳播的研究、比較文學角度的考察、燕行錄的總體流程和現象的研究的深入,對燕行錄中所載筆談的研究也有了新的認識。但是這些研究都只認識到了筆談的重要性,並沒有對其作爲文學文本的著述方式予以重視,也沒有人把一時期文人的筆談歸於一類,做整體性的研究。本論文是針對於此,以具有高度文學性的洪大容、朴趾源等人的筆談爲中心,把北學派文人的筆談作爲研究對象,分析其著述方式和創作動機、話題的討論情況及主題。 第二章考察了18世紀筆談流行的背景與性格,以及中國方面的參與者。爲了從曆史、祛會的角度分析筆談流行的背景,本論文把參與筆談的人分爲提議者與參與者,比較韓中兩國曆史背景和文人的立場,從中發現兩國文人的連帶感並分析了筆談得以成立的根本原因。考慮到筆談體裁歸屬的模糊性,本論文在擴大文學這一概念外延的基礎上,分析了筆談了文學性,初步闡明了其存在方式、創作手法、素材的特點等總體性格,再次確認了文學領域內的筆談研究的可能性。 第三章具體分析了作爲文學文本的燕行錄體裁筆談的創作情況與創作意圖。本論文把焦點集中到筆談文本形式上的特點,分別考察了不同人物筆談創作形式上的變化。洪大容是第一個把筆談作爲獨立文本來創作的文人,他在筆談的構成方式注入了極大的心血。《乾淨衕筆談》爲了確保日記體作品的統一性,適當地設定了插入筆談記錄和信箋的日期。《燕記》以交流人物的姓名作爲標題,它可謂是對傳統日記體使行文學形式的挑戰。此作品在關心對象的轉變這一點上也獲得了革新的意義。朴趾源的《熱河日記》跟以往的燕行錄比起來,在筆談存在的方式、勾通的方式、傳達的信息等方面發生了總體的變化。他預先在日記部分交待了與清朝文人認識的經過、會面的場所、時間以及筆談對象的信息,預示了筆談的展開。討論重要話題的筆談則另設一章,試圖創作純以筆談爲中心的文學作品。構成筆談時,也沒有像洪大容那樣重視個人的情感,而把重點放在了筆談的內容即主題。朴趾源筆談作品形式上最大的轉換在於詩與筆談的分離,即純粹的筆談文本的完成。燕岩的筆談文本具有擺脫時間約束的特點。柳得恭與朴齊家的燕行錄在完全擺脫一定約束的同時,把更多的注意力集中到了交流對象身上,而對筆談內容的重視卻相對減少了些。 第四章分析了筆談的内容,從而比較了韓中兩國文人的學問觀與認識論,分析了兩者主張的不同,考察了他們對現實的認識在筆談裏是怎麼體現並如何變化的。重點考察了兩國文人討論時最常提及的代表性話題,即華夷論與世界觀的問題、正學異端論、清朝的動向和民心的向背。並通過考察《熱河日記》筆談中作者對文人的視線,進一步分析了朴趾源提義進行筆談的意圖和目的。北學派文人對中華文明的肯定是克服傳統華夷論式世界觀的關鍵所在。他們通過燕行體驗,摒棄了對清朝的偏見,確立了對自身和世界的新的思維方式。北學派文人通過筆談這一方式,試圖克服傳統華夷論的缺點。其認識的變化從服裝制度、天文知識、與周邊國家的對話意志上表現得非常突出。他們認識到了華夷論的弊害,並且從多方面談論了華夷論的問題,但是在文化論的側面來看,並沒有徹底擺脫了傳統的華夷論。 關於正學的問題,是韓中兩國文人學術討論的核心主題之一。洪大容在進行筆談的初期一一反駁了中國知識分子對朱子的批判,但隨著筆談次數的增加,他的立場漸漸發生了變化,在筆談記錄的末尾則批判了朝鮮學者對朱子的盲目崇拜。這種立場在他回國後寫的《毉山問答》上繼續加以體現。對朴趾源來說,他對朱子的絕對肯定和贊揚,與其說是他要抬高朱子行爲,不如說是試探中國知識分子心態的一種有意識的策略。柳得恭則對清朝學術不重視程朱理學的現狀表現出了憂慮,痛惜中國學術界程朱理學的衰退。在對中國人的戒備方面,朴齊家的筆談内容則相當程度上表現出了退色。他們通過與中國人的論爭與交涉,進行了思想認識上的轉換,批判了以往絕對化的朱子學和朱子主義,瞳景更加自由的學術風尚。北學派文人最關心的現實問題是清朝朝政的危機,即長久性問題。體現最明顯的就是關於民心即內亂的話題。與現實問題有關的筆談話題是指向清王朝的危機的,具有某種政治傾向。而異民族的內亂則被認定爲導致這種危機的的原因。北學派文人認爲這種危機並不只是中國內部的問題,他們認爲這一問題與朝鮮的安危也有密切關聯。通過考察《熱河日記》筆談中的中國文人形象研究,進一步明確了朴趾源提義進行筆談的意圖和目的。朴趾源提出的問題很多都是關於清朝的政治纠葛問題。他描述了中國文人筆談時的所有細節,试图勾勒出清朝統治下,受盡折磨的中國文人形象。 本文把筆談的表現手法分爲誘導與迂回、比較與再確認、伏筆與暗示,對作品進行了詳細的分析。構成獨立筆談的洪大容、朴趾源的筆談爲了進入某種話題,使用了誘導、稱贊、伏筆、暗示等多種方法。這種方式已經不僅僅是單純的表現手法。可以說它是構成筆談這種獨立文本的核心設置。 본 연구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양상과 사상적 동향을 가장 극명적으로 보여준 문학적 성과물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였다. 필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필담을 주목하였다. 筆談은 언어가 다른 나라에서 상호소통을 염원하는 지식인들이 문자로 진행한 의사소통방식으로서, 洪大容과 朴趾源 등 문인들에 의하여 단순한 기록적 성격을 벗어나 고도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독립적 텍스트로 재창작된다. 특정 작가, 특정 작품을 중심으로 자료적 측면에서 주로 주목되었던 연행록이, 여행과 체험의 문학적 텍스트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최근 연행록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연행록에 소재한 필담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적 텍스트로서의 필담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 문학텍스트로서의 저술방식에 대해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동시기 문인들의 필담을 공동으로 묶어서 고찰하려는 작업도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고도의 문학성을 지닌 홍대용과 박지원의 필담을 중심으로, 동시기 연행에 오른 朴齊家와 柳得恭을 아우르는 북학파 필담에 주목하여 그 저술방식과 창작동기, 및 화제의 담론양상과 주제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하였다. Ⅱ장에서는 우선 18세기 한중문인의 필담이 성립할 수 있는 배경과 성격, 그리고 중국측 참여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필담이 성립할 수 있는 배경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보다 명확히 고찰하기 위하여 본고에서는 필담의 참석자를 提議者와 參與者로 나누어 한중 두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문인의 입장을 비교하고 그 연대감을 발견함으로써 필담이 성립할 수 있는 근본원인을 짚어 보았다. 필담의 성격연구에 있어서는 특정한 문체나 범주에 국한시키기 어려운 필담의 특성을 고려하여 문학개념의 외연을 확장하여 필담의 문학성을 조명해 보았고 그 존재방식, 창작기법, 소재의 특징과 같은 총체적 성격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문학으로서의 필담 연구의 가능성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Ⅲ장에서는 필담 텍스트의 형식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인물별로 그 형식적 변모를 추적해 보았다. 홍대용의 「乾淨衕筆談」은 일기체 작품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담 기록과 편지를 삽입하는 날짜를 아주 적합하게 설정하고 있었다. 또한 교유인물의 이름으로 표제를 설정한 「燕記」의 경우, 전통 일기체사행문학 형식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관심대상의 전변이라는 의미에서 아주 혁신적인 의의를 갖게 된다. 박지원의 󰡔熱河日記󰡕는 기존 연행록에 비해 필담이 존재하는 양식, 소통하는 방식 및 전달하려는 메시지 등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미리 일기 부분에서 청나라 지식인들과 만나는 인연, 장소, 시간, 그리고 상대의 인적사항을 모두 제시하고 중요한 화제를 담은 필담은 따로 독립적인 장을 설치하여 순수한 필담 중심의 문학을 창작하려고 시도하였다. 연암 필담의 가장 큰 형식적 전환은 詩와 필담의 분리 즉, 순수한 필담 텍스트의 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득공과 박제가의 연행록은 일정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난 동시에, 필담의 내용보다 교유대상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Ⅳ장에서는 한중 두 나라 문사들이 나눈 다양한 화제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담론, 즉 華夷論的 世界觀의 문제, 正學異端論, 청조현실의 동향과 민심의 향배를 중심으로 두 나라 지식인의 학문관, 인식론을 비교 검토해 보았다. 북학파 문인들은 필담이라는 방식으로 화이론적 세계관의 극복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인식의 변화는 의복제도, 천문학지식, 주변국과의 대화의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화이론의 폐해를 인식하고 필담을 통해 화이론적 문제에 대하여서도 다양하게 논의하고 있지만 결코 문화론적으로는 근본적인 화이관 극복에 이르지 못한다. 홍대용의 필담은 정학 이단론에 대한 견해의 변모과정을 살피기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홍대용은 필담초기에 이단을 비판하면서 중국지식인의 주자공박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었지만 필담차수가 늘면서 점차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필담을 마무리하면서 교조적인 주자학존숭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박지원에게 있어 주자에 대한 절대적인 고수와 극찬은 주자를 높이려는 목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중국지식인들의 본심을 떠보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득공은 정주학술을 뒷전으로 하는 청조학술의 현황을 아주 근심스럽게 생각하면서 정주학이 쇠퇴한 중국의 학술경향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박제가의 필담에는 중국인에 대한 경계가 상당히 약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중국지식인과의 논쟁과 교섭 중에서 점차 사상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으며 기존의 절대화된 주자학과 주자주의를 비판하고 더욱 자유로운 학문적 풍토를 선망하였다. 북학파문인들이 가장 주목을 하고 있는 현실문제는 청 조정의 위기, 즉 長久性에 있다고 보인다. 이 문제를 가장 극명적으로 보여준 필담의 화제는 바로 民心, 즉 내란의 문제였다. 현실인식에 관한 필담화제는 주로 청왕조의 위기를 겨냥한 정치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초래 원인으로 기타 이민족의 내란을 꼽고 있다. 연암의 시선에 포착된 청조 지식인의 형상으로부터 우리는 청조 지식인들에 대한 연암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연암이 청조 지식인들에게 제기하는 짓궂은 질문공세는 청나라가 안고 있던 갈등과 당시 정세에 관한 것이 많았고, 연암은 질문에 대한 중국지식인들의 대처방식을 빠짐없이 묘사함으로써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지식인의 형상을 생동하게 부각하였다. 다음으로 필담의 표현수법을 세 가지, 즉 유도와 우회, 비교와 재확인, 복선과 암시로 분류하여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독립적 문학텍스트를 구성한 홍대용과 박지원의 필담을 보면, 화제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誘導, 칭찬, 농담, 복선, 암시 등 수많은 장치를 도입하였다. 독립적 텍스트로서의 필담체에는 이러한 화제방식도 일종 표현수법을 넘어서서 작품의 구성을 이루는 핵심적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 朴趾源 記의 硏究

      증사제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47807

      朴趾源是生活在18世纪朝鲜后期伟大的文学家,他的作品生动反映了当时社会的面貌表现出作者深厚的思想内涵.上世纪80年代开始韩国学界对其实学思想进行了广泛的研究,并取得许多重要成果.另外,对其游览中国后创作的『热河日记』也有不少专门论著.比如对『热河日记』内包含的小说进行研究.同时学界也涉猎于朴趾源的散文.比如对尺牍和记文的研究. 然而, 通过对记文研究的整理可以发现, 大多数研究都是从单一作品出发,分析作品的结构和艺术性, 或者以记文为对象发掘朴趾源的思想, 没有从整体考察朴趾源记文的特点, 以及通过某种特点考察当时社会和作家的关系, 因此本文以『燕岩集』为研究对象, 通过对朴趾源的35篇记文的分类, 分析其文章特点. 众所周知,朴趾源被誉为朝鲜后期古文家. 其作品无论是思想还是内部特征无一例外表现出对传统古文的崇尚和继承.因此,本文首先分析其记文表现出对传统的继承.例如文章的首尾呼应, 行文的抑扬顿挫, 还有文学创作中普片使用的修辞和用事等, 都和传统古文的构造, 铺陈一脉相连. 然而朝鲜后期作为当时历史的重要转换期, 无论是社会还是思想都开始发生巨大的变化.当这种变化最后延续到文学创造时,大多数文人作家开始选择接受. 朴趾源也不例外, 因此他的记文还表现出对传统古文的脱离, 开始进行新式样的文学创作的特点.这种所谓新样式的文学创作和当时晚明盛行的小品文有相似之处.其原因, 一方面是朴趾源接受当时中国文人的思想熏陶,认为文章不能一陈不变的沿袭古文,而要有自我发展的创新意识. 因此, 他的记文又表现出对传统古文构造的背离, 例如在对某种事物进行叙述的时候, 抛弃传统的地理方位式结构描写, 以空间为中心, 以自我感情为基础, 创造了许多优秀的记文. 不仅如此, 文章中还出现了大量对话结构. 最后, 作家还以中国晚明小品文结构为基础, 在文学创作中大量采用时空交错的结构, 或者以作家视觉为主线, 将对话, 描写,叙述以及抒情融为一体的多重意象组合,这都是传统古文所不具有得特征. 然而,在正祖实行'文体反正'以后, 朴趾源停止了这种创新的文学活动.其原因一方面在于朝鲜社会仍然延续对儒家思想的继承, 因此在某一程度上束缚了国家的发展, 禁锢了个人的创作. 这是无法避免的历史的局限性, 而从他本人来说, 传统的士大夫家庭的身份使他不能从根本上抛弃家庭的制约, 忠君爱国, 教化百姓的责任和目标依然是他文学创作的主体之一. 因此, 他的记文一方面保留对古典的延续,另一方面以古典为基础创造于与时代相呼应的特点. 这种探索方式和其倡导的'法古创新'交相呼应. 另外, 朴趾源的文学创作和较为先进的思想为后世文学家提供了坚实的后盾,在文学史上有重要的意义. 이 논문은 연암 박지원의 산문문학 가운데 실린 기에 대한 분석으로 이를 통해 그의 문체적 특징과 그 의의를 규명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지원에 대한 연구를 정리해보면 우선, 초기 연구는 그의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熱河日記」를 대상으로 포함된 한문단편 소설이 큰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은 박지원의 산문에 대한 연구이다. 산문은 실용적인 용도가 있기도 하고 문예 미학적 특징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의 산문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문체인 古文體에서 일탈했는지, 산문 작품에서 지닌 문예미적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記와 관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는 연암의 記를 연구대상으로 하여 박영철본 󰡔燕巖集󰡕을 텍스트로 그 가운데 실린 35편 기 작품을 분석하였다. 박지원의 기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 이전에 우선 기의 일반적 개념부터 살펴보았다. 기의 광범위의 개념으로 문자적인 뜻은 ‘識記’인데 정통 산문의 영역에 속한다. 기의 문학적 분류를 淸 姚鼐로부터 시작되어 󰡔古文辭類纂󰡕에서 13가지로 나누웠는데 기를 雜記類에 분류시켰다. 曾國藩은 요내의 주장을 바탕으로 11가지로 나누고 3개 부문으로 묶었는데 雜記는 記載門에 포함되어 있다. 林纾는 이러한 분류를 토대로 雜記類 기문의 내용에 따라서 園亭樓台記, 書画器物記, 山水遊記, 人事雜記등 4가지로 구분하였다. 한문학의 경우는 중국 고전에 대한 수용하여 발전하는데 이와 관한 분류는 歷史記錄體, 傳狀體, 雜記體, 筆記體, 혹은 傳記體, 雜記體, 筆記體로 구분하였다. 그 기능에 대하여 樓亭記, 畵記, 山水遊記, 人物記事 등 하위 장르로 분류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가서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적 통치이념을 강화시키면서 그 교화적 載道적 기능은 문학의 영역까지 확산되었다. 기의 형태와 내용은 고문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해 왔지만 새로운 양상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발굴의 성과를 보여준 작가는 박지원이라 들 수 있다. 필자가 박지원의 기 작품에 대해 수록양상과 내용별로 분류한 과정을 통해 그 기는 전통고문의 틀을 계승이면서 시대와 맺은 문학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記文의 시작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Ⅲ장에서 구체적으로 이러한 양상을 분석하였다. Ⅲ장에는 박지원 기의 글 쓴 방식과 문체적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우선, 「澹然亭記」와 「不移堂記」의 구조를 통해서 전통고문 가운데 開阖對照적 구성방식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전통고문 구조적 배치는 논리와 맥락을 뚜렷하게 규범화하여 진행하고 문장 기본적인 논리에 따라서 보편적인 의미를 밝혔다. 그러나 18세기이란 역사적 큰 전환기로서 조선에 들어온 진보적인 사상을 토대로 고문에 보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더하여 새로운 글쓰기 과정을 전개하였다. 박지원의 중국 연행 때 형성된 진보적인 사상, 심지어 당시 유행해온 소품문의 경향을 받아서 전통고문보다 새롭고 실감이 있는 기 작품을 많이 창출하였다. 이에 그의 기 작품은 전통고문의 계승이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추구하는 정신도 찾을 수 있었다. 가령 「孔雀館記」과 「荷風竹露堂記」의 경우는 지리방위에 대한 서술방식보다 공간적 구성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사대부의 생활공간을 대상으로 전통고문의 나타난 物-人-理적 전형방식보다 사건을 대상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데다가 인간과 자연, 논리와 도덕의 관계를 함께 보여 준다. 게다가 「馬首虹飛記」, 「醉踏雲從橋記」, 「晩休堂記」등 작품을 통해 박지원은 시간과 공간을 전환하거나 다중 이미지를 복합적 사용하여 단순히 이야기 하지 않고 여러 모티프를 제시함으로써 문장의 주제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따라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통해 작가가 자유를 동경한 마음을 느끼게 하였다. 다음은 정서표출에 관한문제이다. 「咸陽郡學士樓記」와 「獨樂齋記」를 통해 先抑後揚적 정서표출을 분석하였고「馬首虹飛記」와「百尺梧桐閣記」를 통해 頓挫적 정서표출을 분석하였다. 先抑後揚적 정서표출은 작가의 정서를 먼저 억제하다가 끝부분에는 절정으로 올라간다. 頓挫적 정서표출이 문장 가운데 齊行과 散行의 안배, 또한 四言句를 활용하여 원래 짧은 구조의 어조부터 전환하다가 그 촉급함을 통해서 정서의 흠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형상화에 대한 검토이다. 박지원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게 위해서 형상화의 수단을 사용하였다. 「素玩亭記」와「觀齋記」에 나타난 1인칭대화와 3인칭 대화 방식은 독자들은 작가의 심리활동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거나 액자 중에 있는 대화를 보면서 작가의 입장에 따라서 생각하여 錦上添花화한 문예적 미감을 지니게 된다. 수사 화룡의 특징을 보면 우선「荷風竹露堂記」와「澹然亭記」에서 바람과 이슬로 백성에 비유하는 것과 연꽃과 대나무로 당정자에 비유하는 것이 백성과 함께 즐겨야 비로소 진정한 즐거움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도하와 청장은 명예와 권세를 추구한 자와 세속을 버리고 자유자제한 모습으로 지낸 자에 비함으로써 작가가 공명에 무심 하는 지조를 고조시켰다. 역설은 항상 작가의 태도에 따라서 풍자의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해학의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가령「念齋記」에는 박지원은 송욱이 발광하고 이상한 행동에 대해 역설하여 과거를 그만둔 정신을 긍정하였다. 「竹塢記」에서 양호맹이 귀찮게 기를 써달다고 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역시 해학의 표현으로써 독자에게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풍자의 수사기법은 항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전제하여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본질과 현상의 직접적인 통일과 대조를 통해서 표현된다. 예를 들면「荷風竹露堂記」에는 자주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외워야만 하는 선비들을 풍자하고「晩休堂記」에는 역시 권세와 명예를 추구한 사람을 풍자하였다. 용사의 경우는 깔끔한 언어로 이야기와 주제를 요약함으로써 그 뜻을 전달했다.「貂裘記」나「愛吾廬記」 등 작품에서 많이 인용했는데 독자로 하여금 단일한 화면부터 교묘한 감상에 이르게 까지 한다. 전적에 대한 수용은 󰡔서경󰡕, 󰡔시경󰡕, 󰡔주역󰡕, 󰡔춘추󰡕 등 경전을 수용을 통해 박지원 개인적 고문에 대한 높은 학습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사대부로서 오랜 세월을 통하여 굳어져 온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그의 문학창작 활동도 방해되었다. 그에 의하면 교화나 제도의 유학적 기능을 떨어진 문장은 常道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자신 마음대로 지향하는 문장은 결국 속류로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될 것이다. 창신은 일정한 규범성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은 박지원은 고문과 소품문의 융합, 고문과 소품문이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박지원의 기 작품을 보면 한편, 그는 학문적, 사상적 기반인 고문의 지향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에서 그의 기에 있어서 고문에 대한 깊은 수양을 사용함으로서 고전에 대한 수용과 계승하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지향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전환 속에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였다. 그는 동시대 일부 다른 문인보다 단순히 기존에 문학관을 계승이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수용하며, 실학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개성적이고 현실적인 문학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참신한 개성적인 문학관은 후세를 지향해 나가는 사회에 대해 큰 시사점을 주며 현대의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통해 조선후기 신진 문인지식층들이 자신의 재능과 포부를 더불어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서 본 한중문화교류 연구 : -문화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김동국 계명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박사

      RANK : 247807

      The purpose of this dissertation is to examine the structure, content and effect of Yeonam Bak Jiwon's Yeolha ilgi (Jehol diary) from the perspective of cultural communication theory and in this way elucidate how Bak Jiwon, who could not speak Chinese, was able to effectively engage in cultural communication with Chinese people. On this basis this dissertation will also examine the two-way cultural communication that was taking place between China and Korea at that time as well as proposing a plan for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se two countries today. Yeolha ilgi is an encyclopedic work in which Bak Jiwon (1737-1805) recorded in detail, using various literary forms and expressions the politics, the economy, culture and general society of 18th century Qing China. Yeolha ilgi is a voluminous travel diary containing diary entries, written conversations using Chinese characters (pildam), essays and so on written by Bak Jiwon during the period lasting from the 24th day of the 6th lunar month, ury , when he crossed the Yalu River into China, travelling via Zhamen, Shenyang and Beijing to Jehol, where he arrived on the 20th day of the 8th lunar month, until he returned to Beijing again approximately two months later. Yeolha ilgi is an encyclopedic work written from the perspective of Bak Jiwon, a foreigner in China, which vividly and objectively reflects Chinese society at that time. per this reason it is an object of interest and research not only for Korean but also Chinese scholars. But a review of seview on Yeolha ilgi that have been carried out to date shows that they have generally been from either a hiseorical or literary perspective. Although there are some seview from the perspective of Korean-Chinese cultural exchange, they all deal with the transmission of Chinese culture to Korea. There are no studies written from the perspective of cultural communication. The structural core of cultural communication is two-way cultural exchange. There is no doubt that at the time when Bak Jiwon was writing Yeolha ilgi China, as the cultural center of East Asia, played the leading role in Korean-Chinese cultural exchange. Nevertheless, it cannot be denied that Joseon dynasty culture at that time was also transmitted to China and exerted either a direct or indirect influence on that country. This is because cultural exchange is a two-way process. If this is the case, in what way was Joseon dynasty Korean culture transmitted to Qing dynasty China and what was its influence? As the age of culture, in the 21st century different cultures exist side by side. In this cultural era cultural conflicts frequently occur and even threaten world peace. In order to remove conflict from this era of culture and cultivate peace in the world, nothing is more important than cultural communication. For this reason the study of cultural communication is being considered more and more important. Around 230 years ago, therefore, how did Yeonam Bak Jiwon resolve the cultural conflicts that arose in his dealings with the foreign culture of Qing China and how did he communicate amicably with the Chinese people whom he met, and in this way promote Korean-Chinese cultural exchange? The author of this dissertation has focused on these three problems mentioned above and conducted his research on Bak Jiwon's Yeolha ilgi from the perspective of cultural communication.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are as follows. (1) This dissertation examines the following nine aspects of the direct and indirect transmission of Joseon culture to China and its influence on Qing culture: the introduction of Joseon poetry and prose (simun) and painting and calligraphy (seohwa) to China, the flourishing private trade in ginseng by members of the Joseon tribute mission, the introduction of red ginseng (hongsam) to China, the introduction of Joseon books to China (except for Joseon books no other foreign books were recorded in the Sikuquanshu [Complete Library in Four Branches of Literature]), the perception of Dongui bogam (Exemplar of Korean Medicine) in Lulichang, Korean proverbs and folk songs that appear in Yeolha ilgi, Josen envoy's records of Lulichang in Beijing, which have become source materials for research into Chinese history, "Piseorok" and "Piseosanjang" written by the Joseon envoy Bak Jiwon, written dialogues using Chinese characters (pildam) and the transmission of Joseon culture, and the strengthening of friendship between Bak Jiwon and Chinese literati. These nine areas should also provide fertile ground for future research into Korean-Chinese cultural exchange. (2) By examining Bak Jiwon's youth and early adulthood, this study demonstrates that from a young age he enjoyed reading and writing (demonstrating his knowledgeability), he easily made friends with the sons of Joseon yangban's secondary wives (seoeol) (demonstrating his ideology of equality), he boldly criticized the extravagance of yangban society and seeing the corruption of the civil examination system, he resolutely rejected it and instead became a person who confronted the practical issues of his day. During his twenties his ideology of friendship (bungu sasang) had already taken shape. This process of growing to maturity was the first reason why later when he travelled to China he was able to successfully engage in cultural communication with Chinese people. During his journey through China, Bak Jiwon always tried to understand Chinese culture from the standpoint of his Chinese counterparts and made effortnd malearn. Through his keen scrutiny of China, he was also able to gain an understanding of the wider world. Through his philosophy that "study must aim for the benefit and convenience of the lives of the people" (iyong husaeng), based on cross-culturalism he was able to free himself from stereotypes and prejudices about Chinese culture and oppose those literati in Joseon who advocated a military campaign against the Qing (bukbeol). This was the second reason that Bak Jiwon was able to successfully engage in culutural communication with Chinese people. Furthermore, in Yeolha ilgi Bak Jiwon also mentions his philosophical ideas on "relationships (sai)" and "taking things to heart (myeongsim)". Through this we can also see his view on cultural transformation, namely, when culture A meets culture B, it produces a new culture C. These research conclusions have been reached as a result of applying cultural communication theory in terms of content and effect to Bak Jiwon and his work Yeolha ilgi. (3) The various cultural conflicts that exist between Korea and China in the 21st century need to be resolved and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two countries needs to be raised to a higher dimension. But the image of Chinese in the minds of Koreans and the image of Koreans in the minds of Chinese are still distorted by outmoded stereotypes and prejudices, creating an invisible barrier between the two nations. In order to bring down this barrier, just like Bak Jiwon both contemporary Koreans and Chinese must understand each other's culture from the standpoint of their counterparts and must research each other's culture with a willing attitude while engaging in positive interchange with one another. In order to be as knowledgeable as kneach other's cultures as Bak Jiwon was, both Koreans and Chinese scholars need to conduct vigorous research intoneach other's cultures. Furthermore, like Bak Jiwon Koreans and Chinese always need to maintain relationships of sincere friendship and equality as well as caring and understanding about each others cultures on the basis of cross-culturalism. We also need to study Bak Jiwon's ideas on the transformation of culture and conduct research into areas of difference and commonality between our two cultures. On this foundation the two nations of Korea and China must create new cultural phenomena such as Hallyu (Korean Wave) in many different fields. It is hoped that this study will contribute to the future healthy development of Korean-Chinese cultural exchange.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를 문화커뮤니케이션의 구조, 내용, 효과 이론으로 고찰하여 중국어를 모르는 박지원이 중국 사람들과 문화커뮤니케이션을 잘 이룰 수 있는 원인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그 당시 한중문화교류를 쌍방향적으로 연구하여 오늘날 한중문화교류를 위해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다양한 문학체재와 표현수법을 사용하여 중국 18세기 청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당시 사회 전반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백과전서이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책문, 심양, 북경을 걸쳐 열하를 방문하고 8월 20일에 다시 북경에 도착하기까지의 약 2개월 동안 체험을 일기, 필담, 수필 등으로 엮은 방대한 분량의 여행기다. 『열하일기』는 외국인으로서의 박지원이 객관적 시각으로 본 당시 중국사회를 생동하게 반영한 백과전서이기에 한국학자뿐만 아니라 중국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많은 연구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논문들을 살펴보면 모두 역사나 문학 쪽으로 고찰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중문화교류에 대한 연구논문들도 있지만 모두가 중국문화가 한국에 전파와 영향에 대해서만 연구를 하였다. 문화커뮤니케이션으로 고찰한 논문은 아직 없다. 문화커뮤니케이션 구조의 핵심은 쌍방향적 문화교류에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처한 그 당시 중국은 세계의 문화중심국으로서 한중문화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조선 왕조의 문화가 중국에 전혀 교류되지 않았고 또 직접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교류는 쌍방향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 왕조의 문화가 중국 청 왕조에 전파된 상황과 그 영향은 어떠할까?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로서 서로 다른 문화가 늘 함께하는 시대이다. 문화시대에 문화갈등도 빈번히 발생하며 인류평화를 위협하기도 한다. 문화시대에 갈등을 없애고 인류평화를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 문화소통이 아주 필요할 때다. 그래서 요즘은 문화커뮤니케이션학이 더욱 중시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230여 년 전의 연암 박지원은 어떻게 그 당시 이문화(異文化)인 중국 청 왕조문화에 대한 문화갈등을 해소하고 중국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을 하여 한중문화교류를 추진시켰을까? 이는 오늘날 한중문화교류에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가? 본 논문에서는 위의 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문화커뮤니케이션으로 박지원과 그의 『열하일기』에 대해서 연구를 해 보았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1) 조선의 시문(詩文), 서화(書畵)가 중국에 유입된 상황, 팔포무역으로 책문의 번영과 홍삼문화가 중국에 진출, 조선서적이 중국에 유입된 상황(『사고전서』에도 조선 서적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서경덕의 『서화담집』은 『사고전서』에 편입된 유일한 외국인의 시문집 임), 북경 유리창(琉璃廠)에서 본 『동의보감』, 『열하일기』속에 나오는 한국 속담과 민요, 북경의 유리창에 대한 조선 연행사들의 기록과 중국역사 연구에 대한 공헌, 「피서록」과 조선사신이 쓴 「피서산장」, 필담교류와 조선 문화 전파, 박지원과 중국 문인사이의 우정강화 등 9개면으로 조선 왕조 문화가 청 왕조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전파와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 이는 앞으로 이 분야 연구에서 좋은 연구 자료로 될 것이다. (2) 박지원의 성장기를 통해 논자는 박지원이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고(박식함) 서얼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으며(평등사상) 허례허식하는 양반사회를 담대하게 비판하고 부패한 과거제도를 보고 결단성 있게 과거를 폐함으로써 실용주의자로 성장했음을 밝혔다. 그의 붕우(朋友)사상은 20대에 이미 형성 되었다. 이러한 그의 성장과정은 그가 나중에 중국여행에서 성공적으로 중국 사람들과 문화커뮤니케이션을 이룰 수 있게 한 첫 번째 원인으로 되게 하였다. 박지원은 중국 여행과정에서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며 예리한 시각으로 중국을 통해 천하대세를 전망하였다. 그의 이런 이용후생 사상은 상대 문화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당시 중국문화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빠져 북벌을 주장하는 조선의 다른 선비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는 박지원이 성공적으로 중국 사람들과 문화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두 번째 원인이다. 이밖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사이’와 ‘명심(冥心)’에 대해 철학적 관점을 언급하였는데 우리는 여기서 A와 B가 만나서 C라는 새로운 문화를 생성할 수 있다는 그의 문화변형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연구결론은 문화커뮤니케이션의 내용과 효과로 박지원과 그의 『열하일기』에 대한 고찰에서 얻은 결과이다. (3) 21세기 한중문화교류에서는 현존하는 여러 가지 문화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한층 높은 차원에서의 문화교류를 이루어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람 머릿속에 있는 중국 사람과 중국사람 머릿속에 있는 한국 사람의 모습에는 아직도 상대방 문화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과 편견의 장벽이 있다.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해 박지원처럼 항상 상대방의 시각으로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해야 하며 항상 배우려는 마음으로 상대방 문화를 연구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문화커뮤니케이션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박지원처럼 상대방문화에 대해 박식함을 가지기 위해 열심히 상대방문화를 연구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박지원처럼 중국 사람들과 항상 평등함과 진정한 붕우관계를 이어가야 하며 상대 문화주의 사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박지원의 문화변형 관점을 배워 상대방 문화와 자기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잘 연구해야 한다. 이 바탕 위에서 한중 두 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한류와 같은 새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이는 본 연구가 21세기 한중문화 교류발전에 주는 좋은 시사점이다.

    • 연암 박지원 작품을 활용한 논술 지도 방안

      강인혜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47806

      본 연구는 대학 입시 논술이 공교육에서 준비되기 어려운 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갖고, 연암 박지원의 작품을 활용하여 학교 수업 시간 중에 시도해 볼 수 있는 논술 지도 방안을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국어 수업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수많은 작가의 문학 작품 중 연암 박지원의 작품을 본 연구에서 선택한 것은 연암 박지원 작품이 가지는 여러 장점 때문이다. 우선 연암 박지원의 작품은 당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최고로 꼽힐 만큼 훌륭하다고 인정 받고 있어 논술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고서라도 이미 국어 수업 시간에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따로 수업 준비를 하거나 새롭게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연암 박지원의 작품에는 논술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비판적․창의적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 학생들의 사고력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고전 텍스트 중에서도 연암 박지원의 글은 주요 대학의 논술 제시문으로 기출 빈도가 매우 높은 편이기도 하다. 한편 본 연구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여러 작품 중에서 <허생전> 및 <일야구도하기>와 <능양시집서>를 논술 지도를 위한 주요 제재로 삼았다. 우선 <허생전>은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문제 의식의 폭이 넓고 깊기 때문에 학생들이 논술적 시각을 키워 나가기에 적절한 작품이다. 또한 <일야구도하기>와 <능양시집서> 두 작품은 주제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함께 언급하고자 하는데, 대학 입시 논술에서 자주 기출되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이라는 논제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관련 배경 지식을 심화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이에 좀더 자세히 <허생전> 및 <일야구도하기>와 <능양시집서>가 논술 제재로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실제 대입 논술 기출 문제를 분석하였다. 먼저 <허생전>은 조선 후기의 모순된 현실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느낀 연암 박지원의 비판 정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허생의 상행위를 통한 부 축적 과정, 허생이 축적한 부를 사용하여 사회 활동을 벌이는 과정, 허생의 시사삼책 제시로 세분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에는 매점매석 문제, 도적이 된 빈민의 구제와 같은 분배의 문제가 나타나며, 빈 섬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통해 이상 세계의 요건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 허생이 시사삼책을 제시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을 통해 당대의 문제적 실상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다음으로 <일야구도하기>와 <능양시집서>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야구도하기>는 연암이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면서 느낀 감회를 적었는데, 이를 통해 마음의 판단에 따라 동일한 사물이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인식이 지닌 주관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능양시집서> 역시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고정 관념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며 편견에서 벗어나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다각도로 살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작가의 견해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작품 분석을 참고하여 본 연구에서는 논술 지도 모형을 구안하였고, 실제 학교 현장에서 시행할 수 있는 교수․학습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가지고 실제로 지도한 사례 역시 아울러 보여주었다. 지도 대상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며, 논술 지도 모형의 학습 단계는 ‘작품의 이해 및 감상’, ‘배경 지식 활성화’, ‘주제별 토론’, ‘실전 논술 쓰기 및 논술문 평가’로 구성된다. ‘작품의 이해 및 감상’ 단계에서는 일반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수업에 준하여, 작품을 읽고 내용 파악을 하는 시간을 가졌고, ‘배경 지식 활성화’ 단계에서는 작품에 내재된 논술 주제와 관련하여 배경 지식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주제별 토론’ 단계에서는 앞선 시간에 다루었던 주제 중 1~2개를 골라 모둠별 토론 및 대표 토론을 함으로써 근거를 마련하고 입장을 정리하면서 논제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었다. ‘실전 쓰기 및 논술문 평가’ 단계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작품과 관련된 대학 논술 기출을 변형하여 논술 문제를 제공하여 학생들이 논술문을 작성하도록 하였고, 그에 대해 첨삭 및 평가를 진행함으로써 실전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대부분의 학교 현장에서 논술 교육의 기회는 특정한 몇몇 학생에게만 주어지고 있으며, 혹은 아예 학교가 아닌 사교육 기관을 통해 논술 지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논술 교육의 이런 현실에 대해 문제 의식을 느꼈기에 본 연구에서는 학교 국어 시간에 수업할 수 있는, 연암 박지원 작품을 활용한 논술 지도 방안을 구안했으며, 이를 실제로 시행해 봄으로써 수업 시간 중에 충분히 논술 교육을 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더욱 많은 학생에게 논술 교육의 혜택이 주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연암 박지원 작품만을 놓고 논술 지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미흡함이 있고, 수업 시수 및 여건의 부족으로 더욱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교수․학습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이는 관련 연구자들이 더욱 분발하여 다른 문학 작품을 통한 시도, 혹은 새로운 방법론을 통한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극복해 나갔으면 한다.

    • 冯梦龙、朴趾源、井原西鹤小说创作中的 “近代性”倾向研究

      장정 한서대학교 대학원 2025 국내박사

      RANK : 247790

      16 - 18世纪的东亚三国,共同秉持以儒家伦理为基础的价值观念与秩序体系;共同面临着“理学”“心学”“实学”的交锋与儒家思想体系的重置;共同经历了社会分工、人口流动、技术进步促成的商品经济发展;共同见证着主体意识觉醒、自由追求爱情婚姻、突破封建等级观念、重构传统四民观、实事求是、面向实际等新思潮的大行其道。中、韩、日三国此时也都于漫长的历史积累中,到达了一个新旧转换的临界点,开始步入近代化转型的历史时期。 晚明的冯梦龙、朝鲜王朝后期的朴趾源、日本江户时代的井原西鹤在东亚这一重大历史转型时期,如同时代的风向标。他们敏锐地捕捉到新旧交替时代文化紊流中的“近代性”风潮,将之熔铸于自己的文学创作中,以各自的理解探索“近代性”内核。他们都以脍炙人口的短篇小说集闻名于世,都以崭新的风格和崭新的内容开启了文学史的新阶段,都关注现实、贴近民众,都具有明确的启蒙意识。他们以自己“情教”、“实学”、町人价值观的不同思想路径去探索东亚近代黎明共同的曙光。本文尝试以冯梦龙、朴趾源、井原西鹤的小说创作为中心,来探讨16 - 18世纪东亚“近代性”倾向的思潮在文学中的表达。 所谓“近代性”,简而言之可以理解为近代社会的特性。原本是一个世界性的历史发展概念,然而现在通行的“近代性”主流观念依然是西方知识界于19世纪建立起来的“欧洲中心主义”的话语体系。以广泛史料为依据,对西方一系列重大历史节点被人为赋能、“西方”身份被人为塑造的过程进行披露和揭示,以及对近代西方文明的东方起源进行梳理和强调,有助于将“近代性”概念从西方中心重新校准回世界全景,使“近代性”原本的世界属性得以彰显。进而尝试归纳出东西方文明共通的“近代性”特征,即经济社会层面的新经济要素、新人口要素、新技术要素、阶层博弈、自生秩序的增长、担纲者阶层的流转,以及精神心理层面的主体、自由、平等、理性、民主、博爱。 16 - 18世纪东亚的冯梦龙、朴趾源、井原西鹤都在自己的短篇小说创作中以不同思想路径探索“近代性”内核。冯梦龙以“情”通“俗”教化民众。侧重的是个人精神层面“心即理”的主体觉醒与个性解放,社会价值层面的实事求是与世俗理性,社会伦理层面的“主体间”深情凝望所构建的相互平等、尊重、关爱的有情世界的博爱理想。朴趾源以“利用厚生”的“实学”引领知识阶层。侧重点表现在国家经济层面是“利用”;表现在民生福祉层面是“厚生”;表现在社会治理层面是讽刺腐儒虚伪仁义,否定两班等级特权,反对压抑实干人才,诘问节烈制度安排,绘制理想乌托邦;表现在“实学”思想层面是反思士人困局与使命担当,主张“北学”以富民兴邦,抨击贵族阶层的腐朽寄生,提倡自食其力的劳动尊严,注重“实学”现实实践。井原西鹤以町人价值观指导新兴町人阶层。试图通过引导町人如何致富、如何持家、如何看待金钱与地位、节俭与享乐、聪明与信义等问题来塑造新兴町人阶层这个最具活力的群体的世界观和价值取向,进而以不断强大和扩张的町人世界为基本盘去影响整个社会。侧重的是个人实现层面的白手起家和财富积累,个人才觉层面的商业头脑和创造创新,社会规则层面的商业伦理和经营理性。 三位作家的创作不约而同地涉及新经济要素、新人口要素、新技术要素、阶层博弈和自生秩序的增长等“近代性”在经济社会层面的特征。具体表现为商品经济发展、雇佣关系出现、市井消费繁荣,以及货币化、金融化等新经济要素;人口流动、身份浮沉等新人口要素;农业、丝织、造纸、印刷、造船技术进步等新技术要素;统治阶级压迫民众、士人阶层下沉、商人地位上升等阶层博弈;商业伦理构建、商业行会自律、民间权威感召等自生秩序的增长。 三位作家的创作也殊途同归地去探索精神心理层面的主体与自由、“主体间”与平等、民主、理性、博爱等“近代性”核心。具体表现为主体觉醒、自我坚守、自我实现的主体意识;个性解放、自由抉择、自由经营、自由追求爱情婚姻的自由意识;人与人之间的有情、相交、协商的“主体间”意识;突破身份等级、职业贵贱、男尊女卑的平等意识;回归民本、民生,重置士农工商四民序位的民主意识;实事求是、面向实际的世俗理性、实学理性、经营理性的理性意识;构建有情世界、社会道德、商业伦理、大同理想的博爱意识。 三位作家对于“近代性”倾向思潮的文学表达,其不同点在于探索“近代性”内核选择的路径不同。冯梦龙选择的思想路径是感化人心的“情”与“俗”,是个人内心的“情”,人与人之间的“情”,以及通俗易懂、回归常识、回归理性的“俗”。朴趾源选择的思想路径是胸怀天下的“利用厚生”与“实学”,最终的目标和归宿是富民兴邦。井原西鹤选择的思想路径是对接现实、润物无声的町人价值观塑造。 尽管探索“近代性”内核选择的思想路径不同,但三位作家都有明确的启蒙意识。他们的作品都曾遭到当局的封禁,从反面证明了这种启蒙意识在当时的冲击力。论文最后探讨冯梦龙、朴趾源、井原西鹤作品中的“启蒙性”。以“言说”为明线,以“话语权力”“秩序重塑”为暗线,在梳理冯梦龙、朴趾源、井原西鹤短篇小说集的言说者、受众、言说方式、言说价值的过程中,揭示这三位作家以“言说”创造“话语场域”、争取“话语权力”、尝试“秩序重塑”的时代创举。这正是其“近代性”文学书写的启蒙价值之所在,也是那个时代刚刚萌芽的“近代性”在文学领域的诗意表达。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치관과 질서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모두 ‘이학(理學)’, ‘심학(心學)’, ‘실학(實學)’의 충돌과 유교 사상 체계의 재편에 직면해 있었다. 아울러 세 국가는 모두 사회적 분업, 인구 이동, 기술 진보로 촉진된 상품 경제의 발전을 경험하고 있었고, 민중은 주체 의식의 각성,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의 추구, 봉건 위계질서의 타파, 전통 사농공상 개념의 재편과 실사구시(實事求是), 현실 직시 등 새로운 사조(思潮)의 부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한국, 일본 삼국은 모두 유구한 역사 이래, 신구(新舊) 교체라는 중요한 전환기에 처해 있었으며, 근대화라는 역사적 변혁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명나라 말기의 풍몽룡, 조선 말기의 박지원,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는 동아시아의 이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의 시대적 풍향계라 하겠다. 그들은 옛것에서 새것으로의 전환기라는 문화적 격동 속에서 ‘근대성’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이를 그들만의 문학 창작에 접목시켰으며, 그들만의 이해로 ‘근대성’의 핵심에 접근했다. 그들은 모두 인기 있는 단편 소설집으로 유명하며, 참신한 스타일과 내용으로 문학사에 새로운 장을 개척했으며, 모두 현실에 기반하여 대중에 다가갔고 계몽의식이 뚜렷했다. 그들은 ‘정교(情敎)’, ‘실학(實學)’ ‘조닌(町人)’ 가치관이라는 서로 다른 이념적 스펙트럼을 통해 근대 동아시아의 공통된 서광(曙光)을 탐색했다. 본 논문은 풍몽룡, 박지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의 소설을 중심으로 16~18세기 동아시아의 문학적 ‘근대성’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소위 ‘근대성’이란 간단히 말해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원래 ‘근대성’이란 역사적 발전에 대한 글로벌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근대성’의 주류 개념은 여전히 19세기 서구 지식인 사회가 확립한 ‘유럽 중심주의’ 담론 체계이다. 광범위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서구의 주요 역사적 사건을 통한 인위적 定義와 ‘서구적’ 정체성의 인위적 조성 과정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근대 서구 문명의 동양적 기원을 정리 강조하는 것은 ‘근대성’ 개념을 서구 중심에서 세계적 관점으로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근대성’의 세계적 속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 논문에서는 동서양 문명 공통의 ‘근대성’의 특성, 즉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의 신(新)경제 요소, 신(新)인구요소, 신(新)기술 요소, 계급 경쟁, 자생적 질서의 성장, 지도자 계급의 유전(流转), 그리고 정신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주체성, 자유, 평등, 이성, 민주, 박애 등을 귀납해 보았다. 16~18세기 동아시아의 풍몽룡, 박지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는 모두 각자의 단편소설에서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하에 ‘근대성’의 핵심 가치에 근접했다. 풍몽룡은 이른바 ‘情(감정)’과 ‘俗(속)’의 측면에서 민중을 교화했다. 개인의 정신적 차원에서 ‘心卽理(마음이 곧 理다)’라는 주관적 깨달음과 개성 해방, 사회적 가치 차원에서의 실사구시와 세속적 이성, 그리고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의 주체들 간의 애정적 관계하에 구축되는 상호 평등, 존중, 배려의 온유한 박애적 이상 세계에 중점을 두었다. 박지원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으로 지식인 계층을 선도했다. 그는 국가 경제 측면에서는 ‘이용(利用)’에 중점을 두었고, 사회 치세 면에서는 부패한 유생들의 위선적 인애(仁愛)를 풍자하고, 양반 계층의 특권을 부정하였으며, 유능한 인재에 대한 억압을 반대하고, 정절(貞節) 제도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으며,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그려냈다. ‘실학’의 사상적 측면에서는 선비적 딜레마와 사명의 부담을 반성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북학(北學)’을 제창하였으며, 귀족층의 부패 기생주의를 비판하고, 독립적 삶에서의 노동의 존엄성을 제창하였으며, ‘실학’의 현실적 실천을 중시했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는 󰡐조닌(町人) 가치관󰡑으로 󰡐조닌(町人)󰡑계층을 주도했다. 그는 󰡐조닌(町人)󰡑이 어떻게 치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가정을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돈과 지위, 검소함과 향락, 총명과 신뢰 등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지 등을 제시함으로써 가장 활기찬 신흥 󰡐조닌(町人)󰡑 계층 사람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조성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부단히 강대해지고 확장되어가는 󰡐조닌(町人)󰡑세계를 기반으로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시도했다. 개인적 실현 차원에서는 자수성가와 재산의 축적을, 개인적 재능 측면에서는 사업적 통찰력과 창의적 혁신을, 사회적 규칙 수준에서는 상업적 윤리와 경영 합리성을 각각 중요시했다. 세 작가의 작품은 우연히도 동일하게 신(新)경제 요소, 신(新)인구학적 요소, 신(新)기술 요소, 계급적 도박과 자생적 질서의 성장 등 경제 사회적 측면의 ‘근대성’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상품 경제의 발전, 고용 관계의 출현, 도농(都農) 소비의 번영 및 화폐화, 금융화 등 신(新)경제 요소를 표현하고 있으며, 인구의 이동, 신분의 부상과 침잠(沈潛) 등 신(新)인구 요소와 농업, 견직(絹織), 제지(製紙), 인쇄, 조선 분야의 기술적 발전 등을 나타내는 신기술 요소, 지배계급의 민중 억압, 사무라이(士人) 계급의 쇠퇴, 상인의 지위 상승 등의 계급적 도박, 그리고 상업 윤리의 구축, 상업 조합의 자율성, 민간 권위의 감화 등 자생적 질서의 성장 등을 담아내고 있다. 세 작가의 작품은 또한 공통적으로 개인과 자유, 개인 간의 평등, 민주, 이성, 박애 등 정신 심리학적 측면의 ‘근대적’ 핵심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우선 개인적 각성, 자아의 견지와 실현이라는 ‘주체 의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인격 해방,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경영, 자유로운 사랑과 결혼 등 ‘자유 의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로 간의 우정, 소통, 협상을 강조하는 ‘주체간(主體間) 의식’, 신분의 차이나 직업의 귀천, 남존여비 관념 등을 타파하고자 한 ‘평등 의식’은 물론, 민본(民本) 민생(民生)을 중심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 네 계급 질서를 재편하고자 하는 ‘민주 의식’,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현실에 부합하는 세속적 합리성, 실학적 이성을 중시하는 ‘이성(理性) 의식’, 온유하고 도덕적인 사회, 윤리적 상업, 이상적 대동(大同) 사회를 추구하는 ‘박애 의식’ 등이 골고루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세 작가의 ‘근대성’에 대한 문학적 표현의 차이는 그들이 ‘근대성’의 핵심에 접근하는 경로가 다른 데 있다. 풍몽룡이 선택한 사상적 경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情(감정)’과 ‘俗(풍속, 관습)’으로, 그것은 개인 내심의 ‘情(감정)’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情(감정)’이며, 통속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俗(풍속, 관습)’이다. 박지원이 택한 사상적 경로는 세상을 품어 안는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학(實學)’으로, 그 궁극적인 목표이자 종착점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이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가 선택한 사상적 경로는 현실과 연결되었으나 소리 없이 스며들어 부지불식간에 ‘조닌(町人)’ 가치관을 확장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비록 ‘근대성’의 핵심에 접근하기 위해 선택한 사상적 경로는 다르지만, 세 작가는 모두 뚜렷한 계몽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런 계몽의식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풍몽룡, 박지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의 소설들에 나타난 '계몽성'에 대해 토론하였다. 본 논문은 풍몽룡, 박지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의 단편집에서 화자(話者), 독자, 발화(發話) 방식, 발화의 가치를 정리하는 과정 중에서 ‘말(言說)’을 줄거리로 삼고, ‘담론의 권력’과 ‘질서의 재편’을 복선으로 삼아, 세 작가의 ‘언사(言說)’로써 ‘문구 영역(話語場域)’을 창조하고 ‘언어 권력’을 쟁취하고 ‘질서의 재편’을 시도한 시대적 거사를 밝히고자 했다. 이는 바로 그들의 ‘근대성’ 문학 작품이 지닌 계몽적 가치이자, 그 시대에 문학계에 막 싹트기 시작한 ‘근대성’ 문학 영역의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주제어:근대성, 동아, 풍몽룡, 情教, 박지원, 실학,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鹤), 조닌(町人)

    • 연암 박지원의 지(知)의 내면화 과정 연구 : 『열하일기』를 통해 살펴본 실학적 지(知)

      김혜미 부산대학교 대학원 2026 국내석사

      RANK : 247759

      Today, we live in a flood of information and face an educational reality in which despite the quantitative expansion of knowledge, it does not develop into true knowledge that leads to individual reflection and practice. This problem is similar to the limitation of the late Joseon Dynasty's pedagogical academic climate, which ignored reality by only focusing on character interpretation and memorization. This study aims to reveal how knowledge is formed as true 'knowledge' through the process of experience, reflection, and practice by analyzing the internalization process of knowing shown by real scholar Yeonam Park Ji-won (1737–1805)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the 『Yeolha diary』. 『Yeolha diary』 is not just an inquiry book, but a learning diary that records the process of growing knowledge through contact with the outside world and encompasses three stages: stimulation through experience, criticism through reflection, and concrete change through practice. This study reconstructed this journey of knowing Yeonam into a pedagogical concept called 'internalization of knowledge'. In terms of experience, encounters with external civilizations stimulated changes in perception, and in the stage of reflection, he objectified himself and Joseon and renewed his thinking. In the stage of practice, the study was embodied as a real reform through writing and activities as a view of the people. In other words, the study of Yeonam shows a process in which knowledge is not simply injected from the outside, but is internalized through individual experiences and social interactions, leading to practice. Therefore, the internalization of Yeonam Park Ji-won's knowledge goes beyond the simple ideological and historical meaning and suggests the direction in which education should go today. This suggests that it is the task of true education to cultivate a subjective human being who thinks, reflects, and practices knowing in life, not learners who stay as consumers of information. This study aims to re-examine the educational significance of practical knowledge and present the possibility of practical knowledge in modern educational philosophy by analyzing Park Ji-won's knowledge internalization process shown in 『Yeolha diary』.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며 지식의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개인의 성찰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앎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교육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 후기 훈고학적 학문 풍토가 문자 해석과 암기에만 매달려 현실을 외면했던 한계와도 유사하다. 본 연구는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열하일기』를 통해 보여준 앎의 내면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지식이 경험과 성찰, 실천의 과정을 거쳐 어떻게 진정한 ‘지(知)’로 형성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지(知)가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학습 일기로서, 경험을 통한 자극, 성찰을 통한 비판, 그리고 실천을 통한 구체적 변화라는 세 단계를 포괄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연암의 앎의 여정을 ‘지(知)의 내면화’라는 교육학적 개념으로 재구성하였다. 경험의 차원에서는 외부 문명과의 만남이 인식의 변화를 자극하였고, 성찰의 단계에서는 자신과 조선을 객관화하며 사유를 재구성하였다. 실천의 단계에서는 글쓰기와 목민관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학문을 현실 개혁으로 구체화하였다. 즉, 연암의 학문은 지식이 외부로부터 단순히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내면화되어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연암 박지원의 지(知)의 내면화는 단순한 사상사적 의미를 넘어, 오늘날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정보의 소비자에 머무는 학습자가 아니라, 경험 속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성찰하며 삶 속에서 앎을 실천하는 주체적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참된 교육의 과제임을 시사한다. 본 연구는 『열하일기』를 통해 나타난 박지원의 지(知)의 내면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실학적 지(知)의 교육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현대 교육철학에 실천적 앎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 燕巖 朴趾源 書藝美學의 實學的 考察

      신해식 성균관대학교 2008 국내석사

      RANK : 247727

      This study aims on examining the ideology of calligraphic aesthetics of Ji-Won Park who was practical scientist, aesthetician, the critic of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as well as critical writer in 18th century of Chosun Dynasty. For this, we searched the ideology of practical science and literary trend in late Chosun Dynasty and examined the ideology of calligraphic aesthetics based on the ideology of practical science of Ji-Won Park. First of all, Ji-Won Park was a Noron Party family, was belonged to Nakron of Giho Party in scholastic mantle, and had not systematic writings about the Basic Principles and the Atmospheric Force of Nature but generally determined his attitude of the theory of natural force. He succeeded the position of Nakron which insist the theory that ‘human nature and physical property are same as one’, and therefore he insisted that natural order of human and material is one and human nature and physical property are same as one. This theory became one of significant philosophical base which formed his Bukhak ideology. That is, he became to research the theoretical base of reformation within the essence of traditional Confucianism, and to insist Bukhak by broad accepting of various ideologies such as the philosophy of Wang Yangming and Western Learning. Reaching to 18th century, the commercial industry of Chosun Dynasty was developed more rapidly than former generation and the consumption of city increased highly. Therefore, huge changes were occurred over whole fields of society. These social changes impacted on various fields of culture, and therefore they organized complicated relations among each field and new trend. These trends had new philosophy and ideological research to be begun by happening doubt, review, and opposition to the existing Sung Confucianism(성리학) in the fields of philosophy and ideology, and this trial of new research was reflected the requirement and the development of practical science which every scholarship should be applied with concrete actual lives. These trends of change were connected to restoring activity of consciousness and sensibility to the identity of human. The changes in these philosophical and ideological aspects opened mental vision of new recognition about the world and the existence to the intellectuals of those times, and developed the theory of art which required and emphasized individualities in every field such as literature and calligraphy. Ji-Won Park consideratedthe balance of creative acceptance and self-acquirement in whole cultures based on reasonable attitude of ‘Seeking People’s Benefits’and the logic of ‘Good Changes’ which he faced the reality of his times and should learn even the culture of barbarians. Therefore, he took the lead of changes which broke down ‘doubt of old things’and imitation in whole fields of culture & art of those times and considered individuality and sincerity by the logic of ‘classical the book of change’ which ‘lives are modified and successes are changed’. Of course, he did not only consider the changes by ignoring the past and the classics. The changes of his insist were ‘good changes’, that is, ‘learning old things but applying them to the circumstances of present’. Therefore, creative acceptance and the spirit of self-acquirement were implementing process to creation of new things and knowing changes by advancing more from the position of continuous negotiation and reconcilement of following old things, creation of new things, Good in recognizing traditional laws, and knowing changes. That is, urging sincerity and truth which should be restored in the art as manifestationof creative forms matching with the reality of times and being required by times. He considered ‘the acquirement of truth’ and changes by opposing to ‘doubt of old things’ in whole fields of literature, and in calligraphic field, because the writings of former famous calligraphists are only the fashioned writings in the manners and ways of the age, he urged to create the truth of new living way by reading the spirit of books even though learning the writings. Painting field had aesthetical aim in realizing the truth through ‘different in expression and same with spirit(심사)’ and ‘painting spiritual things’ by avoiding traditional the recognition of subject and the beauty of formalism. Through the above study, the ideology of aesthetics of Ji-Won Park can be concluded as ‘aesthetics of painting spiritual things’ which considered creation of new things and knowing changes continuously. 본 연구는 18세기 당대 최고의 비판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대실학자이자 미학자이자 서화비평가인 박지원의 서예미학 사상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조선조 후기 실학사상과 문예사조를 알아보고 박지원의 實學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서예미학사상을 알아보았다. 박지원은 우선 老論 가문 출신으로, 학통상 기호학파의 洛論에 속하였고, 理氣問題에 대한 체계적인 글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主氣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人物性俱同을 주장하는 洛論의 입장을 계승하여 人과 物의 이치는 하나이며, 人性과 物性은 같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北學思想이 형성되는 중요한 철학적 근거의 하나가 된다. 즉 그는 전통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탐색하고, 여기에 陽明學과 西學 등 여러 사조를 폭넓게 수용·섭취하여 북학을 주장하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조의 상업이 전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도시의 소비가 크게 향상되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문화의 여러 방면에 대해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에 따라 각 방면간에 복잡한 관계와 새로운 풍조를 조성하여주게 된다. 새롭게 조성되는 이러한 풍조는 철학과 사상분야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성리학에 대한 회의·반성·반발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철학과 사상적 모색이 시작되고 , 이들 새로운 모색의 시도는 모든 학문이 구체적인 실제생활과 접목되어야 한다는 실학의 요구와 그 전개로 반영된다. 철학·사상적인 면에서의 이러한 변화풍조는 인간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감성의 회복활동으로 이어진다. 이들 철학·사상적인 면에서의 변화는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당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세계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심안을 열어주고, 각기 시문이나 서예 등 예술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개성을 요구하고 강조하는 예술론을 전개시킨다. 박지원은 자신이 처한 시대현실을 직시하고 오랑캐 문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利用厚生의 합리적 자세와 善變의 논리에 근거하여 문화전반에서 창조적 수용과 自得化의 균형을 강구한다. 그리하여 ‘生하면 化하고 成하면 變한다’는 고전적 變易의 논리를 통해 당시 문화예술 전반에서 擬古와 模倣을 타파하고, 개성과 진정을 강구하는 변화에 앞장선다. 물론 그가 과거와 고전을 무시한 채 변화만을 강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善變’으로, 곧 ‘옛 것을 배우되 현재의 상황에 맞도록 잘 응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창조적 수용과 自得化 정신은 法古와 創新, 能典과 知變의 끊임없는 절충과 화해의 입장에서 보다 진일보하여 創新과 知變으로의 이행과정이었다. 즉 시대현실에 맞는 시대가 요구하는 창작형식의 발현으로서 예술에서 회복해야 할 진정성과 참됨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문학 전반에서 擬古에 반대하여 得眞과 변화를 강구했으며, 서예방면에서도 과거 유명 서가들의 글씨 또한 時俗에 유행했던 글씨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배우더라도 書心을 읽어내어 새로운 생명형식의 참됨[眞]을 창출 할 것을 촉구하였다. 회화 또한 고정된 대상 인식과 형식미를 탈피하여 心似·寫意를 통해 참됨[眞]를 구현하는 데 그 미학적 지향이 있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박지원의 미학사상은 創新과 知變을 끊임없이 강구한 寫意美學으로 대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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