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은숙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2008 국내석사
본 연구자가 학교 현장에서 다년간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경험에 비추어보면 학생들은 우리나라가 반도에 위치하여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경향에 의하여서도 학생들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 ‘중국은 우리나라를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침략했으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적게 받은 나라’ 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외침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 여진족이 세운 금, 몽고족이 세운 원으로부터 고려가 위협을 받거나 침략을 받은 사건을 고려한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이 왕조들은 초원지대에 위치한 유목 정권이지 중원을 지배한 중국이 아니다. 당시 중원은 송나라가 지배하고 있었으니 중국이라면 당연히 송나라를 가리킨다. 그 송나라도 이들 유목 민족들로부터 계속해서 침략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 · 고 교과서와 대안 교과서인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거란의 1차 침입을 송과의 관계단절로써만 설명하고, 거란의 끊임없는 오대와 송에 대한 침입사실은 서술하고 있지 못하다. 본 연구는 고려시대 대외관계사, 특히 거란과의 전쟁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교과서가 송과의 관계단절에만 치중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정세가 생략되어 중국이 우리보다 훨씬 외침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만 수없이 외침을 받은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문제점을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Ⅱ장에서는 10세기 초 거란의 건국부터 12세기 초 거란의 멸망까지를 중원대륙이 오대와 송을 거치면서 거란의 끊임없는 주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거란의 침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 시기 동아시아 세계 안에서 고려가 갖는 위상을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국사와 세계사가 단절되어 나타나는 문제를 거란의 세 차례에 걸친 침입을 중심으로 교과서 분석을 통해 검토해 보았다. 거란 침입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에서는 세 교과서가 거란의 1차 침입을 송과의 관계를 끊기를 원했을 뿐으로만 서술하여 거란의 오대와 송에 대한 끊임없는 침략은 생략되고 있다. 이리하여 고려만이 외침을 자주 받은 것으로만 인식되어지는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짚어보았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한 당당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주변국과의 공조를 강화하며 주변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前漢中期 刺史의 설치와 운용 : 皇帝權力과의 相關性을 중심으로
前漢 武帝는 元封 5년(前 106년) 지방을 13개 州部로 나누고 각각 刺史를 두어 지방 감찰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刺史의 설치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방에 대한 감찰 활동을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刺史의 활동 모습을 살펴보면 단순한 감찰 활동 이상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은 결국 皇帝에 대한 위협 요소의 제거나 皇帝 統治權 강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대외관계사 인식 실태 및 개선 방안 연구
한송이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국내석사
세계는 세계화와 더불어 지역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지만, 한,중,일 삼국은 서로 상반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어 협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만 관심을 갖고 대응했을 뿐, 우리의 역사인식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외관계사와 관련하여 어떠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지 연구해 보았다. 그리고 만약 대외관계사와 관련하여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면, 원인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역사교육을 중심으로 제시해보았다. Ⅱ장에서는 설문조사와 개별면담을 통해 학생들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 ‘중국은 다른 나라의 침략을 적게 받고 우리나라를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침략한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공세보다는 수세에 몰린 적이 많았던 중국역사의 과정과 북방유목민족의 역사를 중국사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Ⅲ장에서는 학생들의 대외관계사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교과서, 대중매체, 학부모, 역사관련 서적을 제시하였고, 이를 분석해 보았다. Ⅳ장에서는 왜곡된 대외관계사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보았다. 첫째, 세계사 교육과 국사교육을 통합해야 한다. 둘째, 국가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지역사 위주의 역사서술로 변화해야 한다. 셋째, 역사지도를 활용한 역사교육의 강화이다. 주변국과의 경쟁과 협력이 중요시되는 이때 교육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주변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尙書》는 원래 상고의 왕이나 정치가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 문서였으므로, 漢의 통치자나 정치가들은 정책을 시행하거나 정치적 주장을 할 때 두루 활용했다. 예컨대,《史記》와《漢書》의 기록을 살펴보면 詔書에《尙書》의 문장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이 많고,《尙書》의 기록방식을 모방하여 ‘誥’體의 문장을 직접 만든 사례도 있다. 그 외에도 황족과 외척 등 황실이나 고위 통치자들의 교육에《尙書》가 중요한 교재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前漢시기는 유가 경전이 다시 복원되고 국가의 지배적 사상으로 확립되는 시기이므로 경전에 대한 이해는 前漢의 사회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특히《春秋》나《詩》와 마찬가지로 당시 정치가들은《尙書》를 이용하여 다양한 정치대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전인숙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 국내석사
오랜 시일에 걸쳐 각 시대의 역사 속에 살면서도 그 주도적 전개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가부장적 지배체제하에서 종속적 지위로 살아온 중국의 여성들의 모습은 근대에 이르러 이전의 시기와 달리 여성의 지위와 의식, 사회활동 등등 전반에 걸쳐 의미 있는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중국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의 문제는 가시화되어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점차로 여성의 자각을 불러 일으켜서 이들이 사회세력으로 대두하는 데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역사의 주체로서 거듭났다. 그 과정에서 태평천국운동은 과감히 남녀평등을 주창하였고, 무술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변법파 지식인들은 사회문제의 일환으로 여성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여 전족폐지와 여학 진흥을 사회개혁 방안의 하나로 제기하였다. 신해혁명 시기에 이르러 여성운동은 가시적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전족 금지의 공식화와 여학의 발전 그리고 여성지식인의 본격적인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본고의 목적은 이러한 중국여성에 관한 모습들이 교과서에 체계적으로 담겨졌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여성관련 내용을 분석해 본 결과, 각 교과서는 전체적으로 태평천국을 매우 근대적인 이상국가로 서술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아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점은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과서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여성근대화에 끼친 영향들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비록 선교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족반대와 교회학교의 설립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하여도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무술변법 시기는 중국 근대화 과정과 연계되어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여학의 진흥문제와 전족 폐지 운동이 본격적으로 논의 되어 여성근대화의 서막이 올려 진 시기이다. 그러나 각 교과서는 서술자체를 하지 않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조차도 다소 부적절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신해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는 중국여성운동에 있어 분수령과 같다. 이제까지의 전족폐지와 여학의 문제가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났고 여성지식인이 또한 본격적인 출현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각 교과서들은 대부분 이러한 신해혁명의 과정 속에서 여성문제를 다루지 않거나 다룬다 하여도 정치적 사건중심으로 여성의 문제를 서술하다보니 내용선정에 있어 다소 부적절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교과서속의 근대 중국여성에 관한 서술 분량은 매우 적었고 여전히 정치사중심,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성을 서술하고 있다. 여성을 억압당하는 피동적인 존재로서 보는 시각을 벗어나 역사 속에서 일정 정도 능동적으로 살아간 역사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서술하려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기원전 221년 秦의 始皇帝는 六國을 모두 멸망시켜 戰國時代의 분열 상태를 종식시키고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다. 秦의 통일은 단순히 六國에 대한 군사적 승리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戰國時代 동안 형성되었던 통일론을 실현시킨 것이기도 했다. 戰國時代의 각국인들은 분열의 시대동안 거듭되었던 전쟁이 종식되고 항구적 평화가 찾아오기를 고대했다. 또한 각국의 관세 징수, 국가 간 도량형・화폐의 차이로부터 발생한 불편은 원활한 유통과 교역을 저해했으므로 이것을 해결해야한다는 요구도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戰國時代동안 諸夏, 中國, 九州, 天下와 같은 중국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생성되어 각국인들 사이에는 점차 동류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렇듯 백성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 경제적 문제의 해결, 동류의식의 형성은 모두 통일론이 생성되는데 영향을 끼쳤고 통일론은 점차 戰國時代의 시대적 요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성규, 「戰國時代 統一論의 形成과 그 背景」, 『東洋史學會』 Vol 8・9, 1975 따라서 秦의 통일은 六國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시대적 요구를 실현시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戰國時代 동안 이웃나라와 경쟁하면서 자립을 유지했던 六國人들에게 秦의 통일은 정복에 불과했다. 특히 六國의 지배층들은 秦의 통일이 이루어져 자신들의 정치 체제가 해체된다면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박탈당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통일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지배층뿐만 아니라 六國의 피지배층도 秦의 통일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秦과의 전쟁에서 가장 희생이 컸던 이들은 六國의 피지배층이었다. 秦의 장군 白起가 長平大戰의 승리 직후 조나라의 투항병 40여만을 갱살한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史記』, 卷73, 白起王翦列傳, 中華書局, 1959, 2335쪽(이하에서 『史記』를 인용했을 경우 모두 中華書局, 1959, 표점교감본을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括軍敗, 卒四十萬人降武安君. 武安君計曰‘前秦已拔上黨, 上黨民不樂爲秦而歸趙. 趙卒反覆. 盡殺之, 恐爲亂.’ 乃挾詐而盡阬殺之, 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趙人大震.” 戰國時代의 유세객인 蘇代도 “秦이 죽인 三晋의 백성이 수백만 명에 달하며 지금 살아있는 이들은 모두 秦이 죽인 이들의 고아다.”라고 秦의 잔혹한 전쟁 수행을 지적했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2276쪽 “秦之所殺三晉之民數百萬, 今其生者皆死秦之孤也.” 蘇代의 말에는 과장이 섞여 있을 수 있더라도 상황 그 자체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秦의 공격 아래에 놓인 六國의 피지배층들의 秦에 대한 적개심이 통일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戰國時代 동안 각국은 지리적 환경・정치적 배경・경제적 생활 조건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 李學勤은 春秋戰國時代의 지역 문화를 陝甘 지역의 秦文化, 黃河 중류의 中原文化, 黃河 하류의 齊魯文化, 長江 중류의 楚文化, 長江 하류의 吳越文化, 西南의 巴蜀滇文化, 中原 이북의 北方文化로 나누고 있다. (李學勤, 『東周與秦代文明』, 上海人民出版社, 2007.)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고 문화의 일원화를 도모하는 세력이 출현한다면 그것을 시도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듯 통일, 혹은 일원화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여 정치적 자립을 추구했던 경향을 본고에서는 ‘분립 경향’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本?文的目的在于通?掌握秦?博士官的性格?了解????史的潮流。?代博士和皇帝?持着密切的?系,?以儒家理??基??有深度地??了?治理念的?立。于是,通?本?文可?大?中?古代??和政治?系的理解。 博士可以?‘士’??其?源。士在春秋???代是知?人??。士的理想是侍奉君主,抑制?族?力,??富?强兵。??族的?制和以王??中心的富?强兵就是君主重用士的重要的理由。需要人才的君主等有力者?直接后援了士,其代表性的事例就是?的稷下??。稷下???秦?成立博士制度方面形成了影?。 春秋???期士??以???工具和政治相?合,于是?生了‘博士’。但,春秋???期的博士只不?是‘博?的士’,??有落??制度。博士作?官制得到落?的是秦初期。博士[博通士]?化?博士官的?程中有一?重要的?史事件,那就是秦的全??一。公元前221年,文?上?有有?博士的??,博士是在秦王?一全?后第一次出?,通??一点可以得知秦博士官的?置?期是公?前221年前后。 秦?博士官后,?然?充了定?,但?有重用。欲??中央集?的强力?治的始皇帝和丞相李斯??了?春秋???期?始?承的士的政治????。因此,要?帝?的建?助上一臂之力的博士的理想也只能是受到了挫折。秦?了70名博士,但他??能克服理想和??之?的差距,在焚?坑儒事件之后,接二?三地??了秦的朝廷,到了二世皇帝?,只有不足30名的博士在守?着朝廷。 叔?通??秦,在?成功后,??的儒者?得知了一?道理,那就是?了??或思想能被??政治理念,只能是适?于?代的?化,如果不能适?,理想再???秀也不能??。儒家的??????非常正?,儒家?理想主?走向了?用主?,?使是不同于自己的思想的其他??,也按照???修?和?用,而且???象不再是入?的?端。在???程中,先秦的儒??向??的儒?,?也是?初期?家?制 整??程中儒生的影?力得到提高的理由。 文帝、景帝?期也和秦一??了70名博士。??,致力于儒家?典的?原,?始?原了《?》、《?》、《春秋》等各???。??是皇帝?始?心??事?后,逐??展成了?家事?,??了事?的完成而?了博士。因此,?儒家?典比??博的?者任命?博士,???是?文帝?始。文帝、景帝?期的博士是通??究?典?任命?博士的?,武帝的五?博士是?典先任命??官后安排?博士的方式。 武帝?五?博士、博士弟子?的目的是?立以博士?中心的?官?制,向中央以及地方?播以儒家思想?基?的?治理念,?定?治?系。因博士弟子?和太?的?置,博士官的性格也?生了?化。文、景帝的博士官是太常所?,禮官的性格比?强,起着?皇帝的下??行??的諮?官的作用。但?太?以后是?官的性格比?强。武帝之后,博士?要熟悉儒?后?任官?的人??是一?落脚点。博士?加朝?,?是在皇帝的身?,因此能保?升官的机?,就是所?的‘淸要官’。于是,朝廷在?拔博士?要求?高的??和才能,元帝、成帝?期的博士大部分被提拔?高?官吏。???向持?到了博士制度衰退的后?中后期?止。 光武帝以前?的五?博士制度?基??大了??博士。宣帝?的5?12家博士增加?5?14家博士,古文?《左氏春秋》也??立在了?官。博士、博士弟子的?模得到?大后,?始?立了?拔和任用博士的基准。后?不同于前?,存在着系?化和完善的??方式。因?有了系?化的?拔方式,儒生??了通????典?成?官吏的?人的理想,?家可以向官僚?系?充了新的人才。 前??期成?博士弟子入?太?的方法大?上有??。第一,就是正式弟子?的?拔,是由太常直接?拔,是需要通??格的考?。武帝?期定?是50名,其定?此后持?增加。第二,是定?外的?拔,由地方?令、相、?丞推?,郡太守?拔后送往太常的人?。?些定??有?定,可以在太?和正式弟子?一同授?,但是待遇却不同。博士弟子?免除?役,但定?外弟子无法享受???惠。 前??期太???族官僚的子弟???非是所?心的?象。但前中期以后,因?朝廷鼓?入?,而且太?的入?成?了高位官僚的捷?之路,于是?族子弟?也只能??了??路,到了平帝?期,太??出?了?了?族子弟的特例入?制度。因此,前?末期以后,博士弟子是?族官僚的子弟主要成?了?拔?象,成?了平民?以再入?的机?。 博士官的?大?程中古文??得到了?展。如果前?今文??的?盛成?了武帝立五?博士的契机的?,古文??的?展是?歆的古文?籍整理和王莽立的博士成?了其契机。?歆和王莽?前??期以私人的?好水平上得到?究的古文??的??水平提高到了官?水平。此后,因??旣得???,今文和古文 ?派形成了?立,但因?前??期?始?持的一同?究今文和古文的??的博士,古文??和今文??的?士隔?逐??少了。 后??期光武帝?,除了《春秋左?》??立在?官以外,?有古文??立在?官。但,得到皇帝相?的支持,?始了?今文???等的??,?以此?契机?固了其??地位和影?力。今文、古文?派之?的?立?系最?是促?了??相互之?的吸收。今文、古文的?立和??主要是??着博士展。因此,可以?今、古文??的融合???博士制度有着密切的?系。
규군에 대한 기록은 사서에 어느 정도 등장하지만 정작 정의해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많은 논의들이 이어져오고 있다. 본고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새롭게 규명해보았다. 첫째, 요대의 규집단은 특정 종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心腹이라는 역할을 위해 모인 황제의 私有民 集團이다. 둘째, 요대의 규집단 중 각부족규군은 부족민의 관리를 위해 각부족 내에 비부족민인 규집단을 편제한 집단이다. 셋째, 금대의 규집단 중 서남북로의 10규군은 요대의 각부족규군이 금대에 변형되어 잔존한 집단이기 때문에 규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금대에는 요대처럼 황제의 심복으로 부족민을 관리하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금대의 규군은 요대와 달리 부족에서 독립하였고, 거란인의 반란사건으로 거란인이 전부 동북로로 사민되면서 서북변 유목부족으로 구성된 규군만이 서남북로에 남게 되었다. 넷째, 금대의 규집단 중 동북로의 부족규군은 각 부족 내에 비부족민인 거란인이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요대의 각부족규군과 형태적 유사성을 보여 규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즉 요대의 규집단과 금대의 서남북로 및 동북로의 규군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지만 각집단이 가지는 유사성 때문에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그래서 금 후기 규군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金朝에서는 몽골과 종족적으로 近緣한 서남북로의 규군은 쉽게 포기하였지만 거란족으로 구성된 동북로의 부족규군에 대해서는 끝까지 懷柔策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唐의 西域經營에 관한 一考察 : 西州의 설치와 운영을 중심으로
The Tang (唐) Dynasty is famous in Chinese history for ushering in the golden age of the Silk Road by conquering an immense swath of territory towards the west. The Tang army led by brave foreign generals known for their organizational skills conquered territory reaching even beyond the boundaries of present‑day China. As a result, people and goods from diverse regions were drawn into Tang China, further enriching the culture. From its defeat of Eastern Turks in 630 until the outbreak of a large‑scale civil war known as the An Shi Rebellion in 755, the Tang Dynasty maintained to occupy a dominant position in what was then known as the Western Regions (西域). The Tang government adopted new systems to rule this area, including the “bridled and haltered prefectures” (羈縻府州, jimi fuzhou) where the Chinese administrative system was applied to pastoral peoples. The Tang Dynasty also created a zhengzhou (正州, directly ruled prefecture) in some of the areas within the present‑day Xinjiang Uygur Autonomous Region. These prefectures were established in what is now Turfan or Turpan (吐魯番), Hami (哈密), Jimsar (吉木薩爾), Xizhou (西州), Yizhou (伊州), and Tingzhou (庭州). This paper intends to shed light on the Tang‑era management of its directly ruled prefectures in the Western Regions by examining the case of Xizhou. Starting in the third century, immigrants fleeing wars in China began to settle in the Turfan region. In the late fifth century, these Chinese immigrants displaced the local residents and founded the independent kingdom of Gaochang (高昌). In 640, Tang Dynasty forces attacked and destroyed the Gaochang Kingdom. China justified its invasion on the grounds of Gaochang’s military provocations and diplomatic discourtesies, asserting the right to intervene in the complex internal affairs of the kingdom. In essence, however, the invasion was simply a product of Emperor Taizing’s desire to extend his territory. The surrender of Turkic generals and Sogdian merchants helped justify the invasion. Tang China absorbed the independent kingdom of Gaochang as a directly ruled domain. In order to eliminate the existing ruling class and establish a new order, the king and leading officials of the Gaochang Kingdom were transported to the Tang capital and poor farmers and prisoners from Tang China were sent in return. As lingering fears in the wake of the war and mass migrations caused social disturbances in Gaochang, the Tang government sought to create social stability by granting Gaochang residents the right to gain social status as an official, administrative assistant, or regular army soldier. The frontier region of Xizhou required considerable numbers of people to manage its defense, traffic, and communications. The residents who had been displaced within the Gaochang Kingdom during the rule of Qu Clan regarded these measures as an opportunity to sustain or improve their social standing. Accordingly, a majority of residents in Xizhou participated in the military administration system imposed by Tang China. Tang China actively utilized manpower from Xizhou to govern the Western Regions. However, in the late seventh century the Tibetan Empire (吐蕃) advanced north into the Tarim Basin and the struggle intensified over the four garrison stations of Anxi, leading to considerable loss of life in Xizhou. Moreover, as the Eastern Turks enjoyed a resurgence in the early eighth century, the Tang Dynasty relocated its local strategic center to Tingzhou to the north of Xizhou. The regional military governor of Beiting (北庭節度使) was stationed at Tingzhou, and Xizhou came to be under the authority of Beiting. As Beiting with its low population became a strategic center, Xizhou lost its previous status and its capacity to superintend the Western Regions. The draining of regional population resulting from the Tang government’s management of Xizhou can be demonstrated by epitaph tablets (誌石), which are considered an indicator of the composition of local residence groups in Xizhou. An analysis of 379 epitaph tablets excavated in Turfan ranging from the Gaochang Kingdom era through the Tang Dynasty indicates that in the late seventh century powerful Chinese families that had been designated as traditional local residence groups began to decline and new groups failed to replace them. This disappearance of local residence groups meant a reduction in the resources that the Tang Dynasty government could utilize in Xizhou. Even after the An Shi Rebellion (安史之亂), a turning point during which the Tang Dynasty lost its influence over the Western Regions, Xizhou continued on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This was not an indication that the ruling systems of Tang China were particularly stable, but a result of Xizhou’s withholding of soldiers for the suppression of the rebellion and thus maintaining of its military strength. Moreover, Xizhou became a major strategic target for the Tibetan Empire only relatively late. When the Tibetan Empire turned toward Xizhou after conquering Hexi (河西; present‑day Gansu), Beiting was captured in 790. In 792, Xizhou also collapsed. Accordingly, China lost all of its directly ruled prefectures in the Western Regions. In the late tenth century, an envoy of the Song (宋) Dynasty visited this region occupied by the Uygur (回紇). During his visit, he observed the legacy left by Tang Dynasty, including Buddhist temples and calligraphy by Tang emperors, but could not find any Chinese residents. The Tang Dynasty had utilized manpower from Xizhou as a resource for ruling the Western Regions by incorporating it into its military administration system. It shifted a strategic point from Xizhou to Tingzhou in response to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In consequence, Tang Dynasty China was able to achieve several accomplishments in the management of the Western Regions. On the other hand, it ended up destroying the longstanding Chinese society that had resided in the area. 중국 역사에서 唐은 서쪽 방면으로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여 실크로드의 황금기를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다. 당은 용맹한 외국인 장군과 조직력 있는 군대를 바탕으로 현대 중국의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로 유입된 유라시아 각지의 사람과 물자는 당의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630년 동돌궐 격파 이후 755년의 ‘安史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은 ‘西域’에서 수월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당은 서역을 새로운 방식으로 지배했다. 유목사회에 중국 행정제도를 적용한 羈縻府州 제도는 당대 서역경영의 대표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여기에 더해 당은 오늘날 신장위구르자치구 일부에 正州를 설치했다. 吐魯番(Turpan), 哈密(Hami), 吉木薩爾(Jimsar)에 각각 西州, 伊州, 庭州를 설치했다. 본고는 서주를 중심으로 당의 서역 직할령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당의 서역경영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했다. 투루판 지역은 3세기부터 중국의 전란을 피해 온 중국인 이민자들이 정착했고 5세기 후반에는 토착 주민을 통합하여 독립국가인 高昌國을 건설했다. 고창국은 640년 당의 침입을 받고 멸망했다. 당은 원정의 동기로 군사적 도발, 외교적 결례, 가혹한 내정 등을 꼽았지만 실은 太宗의 강력한 영토 확장 의지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阿史那社爾 등의 蕃將과 소그드 상인[商胡] 등의 지지가 있었다. 당은 독립국이었던 고창국을 직할령으로 개조했다. 당은 기존 지배층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고창국의 왕과 관료를 중앙으로 불러들이는 대신 貧農과 죄수를 보냈다. 대규모 이주는 전쟁 전후의 공포와 맞물려 지역에 불안을 조성했다. 당은 주민들에게 勳官, 職役, 衛士 등의 신분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회 안정을 꾀했다. 특히 교통의 요지이자 邊州인 서주에는 행정 관사 및 關防 시설이 촘촘하게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다.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 상승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면서 서주 주민 다수가 당의 軍政體制에 복무했다. 당은 서주의 인력을 서역경영에 투입했다. 서주 출신 병사들은 사진진수에 복무했고, 전쟁 발생 시 원정에도 참여했다. 7세기 후반 吐蕃이 타림분지로 북상하면서 安西四鎭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고 이에 따라 많은 사상자가 발생면서 서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더하여 8세기 전반 東突厥이 재기하자 당은 전략 중심을 天山北麓의 庭州로 옮겼다. 庭州는 北庭都護府로 개편되고 이어 北庭節度使의 駐箚地가 되면서 서주는 북정의 지휘를 받았다. 주민이 많지 않던 북정이 중심이 되자 서주 인력은 북정의 운영에도 투입되었다. 서주는 서역 3주의 중심이었던 기존의 지위를 상실하고 역량도 분산되었다. 당의 서주 운영이 지역의 역량을 고갈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서주 재지세력의 지표라 할 수 있는 墓塼에서도 볼 수 있다. 투루판에서 발견된 고창국시대부터 당대까지 379건의 묘전을 분석한 결과, 서주에서는 7세기 후반 전통적 재지세력이었던 高昌 大姓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의 등장도 볼 수 없었다. 재지세력의 소멸은 당이 이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이 서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는 분기점인 安史의 난 이후에도 서주는 반세기 더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당의 지배체제가 우수했다기보다는 반란 진압에 많은 군대를 보내지 않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다 비교적 늦게서야 토번의 주요 전략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河西 점령 이후 토번의 전략 목표가 되면서 790년 군정 중심인 북정이 함락되고 792년 서주마저 몰락하면서 당은 서역에 설치했던 직할령을 모두 상실했다. 10세기 후반 투루판 지역은 위구르 왕국(高昌回鶻)의 치하에 있었다. 이때 이곳을 방문했던 宋의 사신은 당 황제의 필적, 불교사원 등 당이 남긴 유산을 보았으나 중국인 주민은 만날 수 없었다. 당은 서주의 백성을 군정 체제에 대거 편입하여 서역경영의 자원으로 활용하여 서역경영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는 지역 역량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던 중국인 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唐代 灌漑 水利 硏究 : 地理的 特性과 地方의 開發 樣相을 中心으로
관개 수리 시설은 크게 보아 수로형 수리 시설과 畜水․排水형 수리 시설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관개 수리 시설의 축조는 여러 요건들이 부합되어야 가능하였다. 우선 水源이 확보되어야 했으며, 동시에 적절한 표고차와 경사면이 필요하였고, 토양의 투습도와 비옥도 및 재배 작물의 종류도 고려되어야 했다. 사료를 통해 이러한 지리적 요건들의 필요성은 唐代 사람들도 이미 인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정 정도의 인구와 재정, 그리고 기술력도 확보되어야 했다. 이상의 여러 조건들의 제약으로 인해 당대에 관개 수리 사업이 주로 진행된 곳은 일부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의 지리적 조건은 각기 상이하여, 관개 수리 시설의 유형은 분명한 지역적 특색을 드러내었다. 황하 유역은 거대한 引水渠道를 설치하여 관개에 이용하였으며, 서북 지역은 건조한 기후로 인해 융설수를 이용한 소규모 渠를 중심으로 수리 시설이 만들어졌다. 장강 유역은 하천과 湖沼가 밀집하여 수로와 제방이 이곳의 전형적인 수리 시설이 되었다. 동남 연해 지역은 海潮의 침범을 받기 쉬워, 염분을 막고 담수를 보존하는 시설이 주류가 되었다. 남방의 구릉지대는 평원과 달라, 蓄水와 引水를 위한 陂塘과 堰, 水門의 축조가 농업 생산력 제고를 위한 과제가 되었다. 淮水 및 漢水 유역은 남과 북의 중간에 위치하여 渠와 塘을 병행하여 건설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본 결과, 대규모의 수리 사업을 통해 동양적 전제주의가 성립한다는 비트포겔의 견해는 전혀 온당치 않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唐代 關內道의 관개 수리는 前代에 건설된 대규모 시설을 개보수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이 당 후기에 시행되었다. 河南道는 황하 이남, 회수 이북을 중심으로 과거의 수리 시설을 수복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수리 사업의 반수 이상이 당 전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河東道는 전체적으로 당 전기의 사업이 후기에 비해 월등히 많았고, 지역적 요건에 따라 汾水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河北道는 安史亂과 蕃鎭 할거의 영향으로 당 후기에는 수리 개발이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고, 太行山 山麓과 漳河 일대에 대부분의 수리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山南道는 장강과 漢水를 경내에 두고 있음에도 관개 수리 사업이 활발하지 못했는데, 이는 낮은 인구로 인해 인력과 재원의 확보가 쉽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다. 淮南道는 경내에 관개 시설이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漕運用 수리 시설을 관개에 이용하기도 했다. 江南道는 당대에 가장 많은 관개 수리 사업이 시행된 곳으로, 당 전체 수리 사업의 4분의 1이 강남도에서 시행되었고, 시기적으로는 전체 수리 사업의 80%가 당 후기에 편중되어 있다. 장강 하류 델타 지역에서 관개 시설이 집중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대규모의 수리 시설도 많았다. 이에 반해 江西․福建 일대는 저조한 인구와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관개 수리 개발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劍南道의 관개 수리 개발은 주로 成都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都江堰의 보수와 그를 보조하는 부수적 시설의 축조가 주를 이루었으며, 涪江 유역에도 일부 관개 시설이 개착되었다. 隴右道의 경우 사료에 기록된 바는 적으나 출토 자료를 통해서 소규모의 관개 시설이 다수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嶺南道의 경우 靈渠의 보완, 수리를 중심으로 적게나마 수리 사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당대 관개 수리 개발은 안사란과 그로 인한 경제 중심의 南移 현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데, 인구의 대이동으로 인한 노동력의 증가로 인해 강남의 관개 수리 개발이 폭증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당대의 지방관이 관개 수리 시설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산출하여 이를 중앙 조정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를 어기고 무단으로 工役을 시작하거나, 혹은 계상한 인력이나 물자가 실제와 달랐다면 해당 지방관과 담당자는 법 규정에 따라 처벌받았다. 또한 지방관들이 시행하는 기존의 관개 수리 시설에 대한 상시적인 보수 및 관리 역시 법적 규정에 따라 제한된 기간 내에서만 가능하였다. 아울러 상급 지방관과 감찰 담당 관료는 이러한 법적 절차 위반을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한편 당대 지방관들의 고과 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구와 조세의 증가 여부였으며, 관개 수리 시설을 개발한 지방관 가운데 일부는 포상을 받거나 승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개 수리 개발이 곧 지방관의 포상을 좌우하지는 않았으며, 이들의 포상과 승진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은 관개 수리 자체가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인구와 조세 수입의 증가였다. 또 많은 경우 수리 시설의 개발은 대규모의 인력과 재원이 요구되어 縣 단위의 지방 관서에서 주도적으로 이를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수리 시설의 보수와 개발이 중앙의 稅收 증가로 이어지지 않고 도리어 중앙으로 납입될 세액의 결손을 야기한다면 이는 지방관 자신이 처벌되는 상황으로 직결될 수 있었기에, 대개의 지방관들은 관할 경내에서 수리 시설의 축조를 주저하였을 것이며, 이를 굳이 진행하고자 한다면 지방의 자체적인 재원을 조달하여 중앙으로 보내지는 세수가 결손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결국 중하급 지방관들은 현실적인 권한과 재정의 문제로, 고급 지방관들은 조정의 시각과 실패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설령 지리적으로 관개 사업이 가능한 곳이라도 쉽사리 관개 수리를 시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사료에 기록된 일부 소규모의 수리 시설 외에 대부분의 경우는 州 단위 이상의 지방관들이 주체가 되어 관개 수리 시설을 개발하였을 것이며, 그 역시 대개는 그다지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시행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현실적인 여러 제한들로 인해, 지방관들이 시행할 수 있었던 관개 수리 관련 업무는 수리 시설에 대한 일상적인 점검과 관리, 혹은 약간의 보수 정도에 그쳤을 것이며, 그와 더불어 수리 시설의 用水 분쟁에 대한 판결이 일부를 차지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한다면, 당대의 관개 수리 사업은 비교적 빈번한 횟수로 시행되었으나 그것이 곧 당조가 수리 사업을 중시하였다는 논지로 연결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울러 수리 개발에 필요한 엄격한 법적 절차는 수리 사업에만 특별히 적용된 것이 아니라 당대 행정 전반에 걸쳐 구축된 정치한 제도적 규범의 일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수리 개발을 국가 권력의 개입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없다. 국가가 지방의 수리 공사를 제한한 것은 인민의 수월한 통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수의 결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Irrigation facilities can be largely classified into ‘waterway-type’ facilities and ‘water storage/drainage-type’ facilities. The construction of such irrigation facilities was possible only when several conditions were satisfied. For starters, a source of water had to be secured, and at the same time an appropriate difference in elevation was needed. In addition, soil with a certain level of fertility was needed, and the type of crops to be grown on the irrigated land needed to be considered. Furthermore, land with proper water permeability and slope needed to be ensured. Through historical records it can be verified that by the time of the Tang Dynasty people were already aware of these geographic requirements. Additionally in order to construct such irrigation facilities a certain level of population, finances, and technology had to be secured. Due to the constraints of the above conditions, it was inevitable that irrigation projects during the Tang Dynasty were limited to specific regions. However, the geographic conditions of these regions differed, and the types of irrigation facilities reveal clear regional characteristics. Overall, the Yellow River Basin was used for irrigation by installing huge irrigation channels, and due to its dry climate, water use facilities in the Northwest region were made focusing on small-scale qú(渠) using snowmelt waters. Streams and lake marshes are concentrated in the Yangtze River Basin, so waterways and levees became the typical water use facilities in this region. The Southeastern coastal region is vulnerable to tidal encroachment, thus facilities that block salt water and preserve fresh water became mainstream there. The hill-country in the southern region differs from the plains, and in those areas the construction of bēitáng(陂塘), yàn(堰), and shuǐmén(水門) for water impoundment and diversion was undertaken to improve agricultural productivity. The Huaihe River and Han River basins are located centrally between the North and South and can be said to be characterized by the concurrent construction of qú(渠) and táng(塘). As a result of examining these varying geographic conditions, it can be reaffirmed that Wittfogel’s theory that “Oriental Despotism” was established through the construction of large-scale irrigation works is not a fair assessment at all. The Tang Dynasty’s Guānnèi Circuit(關內道) was carried out by renovating large-scale water use facilities built in the previous era and was largely implemented in the later days of the Tang Dynasty. The Hénán Circuit(河南道), centered in the region south of the Yellow River and north of the Huaihe River, had a strong tendency towards restoring previous water use facilities and more than half of the water use projects were concentrated in the early Tang Dynasty. As for the Hédōng Circuit(河東道), the number of projects in the early period of the Tang Dynasty was significantly higher than those in the late period, and in following regional requirements the majority of water use projects were concentrated in the Fun River(汾水) basin. For the Héběi Circuit(河北道), due to the influence of the An Lushan Rebellion and Fánzhèn(藩鎭) occupation, water use projects were largely unable to be undertaken in the late Tang period, and the majority of water use facilities were concentrated in the foothills of the Taihang Mountain Range and throughout the Zhanghe River(漳河) region. Despite having the Yangtze and Han rivers within its territory, irrigation projects for the Shānnán Circuit(山南道) were limited by the area’s low population density making it difficult to secure manpower and resources. Irrigation facilities were evenly distributed throughout the area of the Huáinán Circuit(淮南道) and canal use emplacements also found use as irrigation facilities. As the region where the largest number of Tang Dynasty irrigation projects were carried out, the Jiāngnán Circuit(江南道) accounted for a quarter of all irrigation works during that era, and 80% of the regions water use projects were concentrated in the late Tang era. Irrigation facilities were extensively developed in the Yangtze River Delta and there were also many large-scale water use projects in this region. However, due to their low population and poor geographic conditions, irrigation projects were not very active in the Jiāngxī(江西) and Fújiàn(福建) regions. The irrigation development of the Jiànnán Circuit(劍南道) which mainly centered on the Chengdu Plain, focused on the restoration and construction of ancillary facilities to protect Dujiangyan and also included the excavation of some irrigation facilities in the Fujiang River(涪江) basin. In the case of the Lǒngyòu Circuit(隴右道) there is a lack of data in historical records, but from unearthed data it can be confirmed that there were many small-scale irrigation facilities. As for the Lǐngnán Circuit(嶺南道), though limited, water use projects were carried out with a focus on the supplementation and repair of the Língqú(靈渠) canal. Viewed holistically, the Tang Dynasty development of irrigation facilities is in line with the An Lushan Rebellion and its resulting economic southern shift phenomenon, and the explosion of irrigation projects in the Jiangnan region was the natural result of a growing labor pool due to mass migration of the population. In order for Tang era regional officials to undertake irrigation facility construction, they had to calculate the necessary manpower and resources and report this to the central (Royal) Court for approval. In violation of this, if construction works were started without leave, or manpower or resources were found to differ from what had been reported, the regional official and person in charge of the work were punished according to legal provisions. In addition, regular maintenance and management of existing irrigation facilities carried out by regional governors was only possible during limited period as prescribed by legal regulations. Furthermore, senior regional officials and officials charged with inspection duties carried an obligation to report violation of these legal procedures. While the most important factor in the judging the performance evaluations of Tang era regional officials was the increase (or lack thereof) of households and tax yields, some regional officials who developed irrigation facilities received promotions or official awards. However, irrigation development did not steer the rewarding of regional officials, and the deciding factor that brought about the award or promotion of officials was not irrigation works themselves, but rather the accompanying increase in population and tax revenue. Additionally, in many cases, the development of water use facilities required mass mobilization of manpower and resources, making it difficult for regional offices at the xiàn(縣) level to take charge of their implementation. Moreover, if water use facility conservation and development did not lead to an increase in the central authority’s tax revenue or worse brought about a deficit in tax funds to be paid to central authorities, regional officials could find themselves directly facing punishment. This led many regional officials to be hesitant to undertake water use facility construction within their jurisdiction and caused those officials who did intend to undertake these works to do so by scraping together the region’s own resources so as to not risk the loss of the tax revenue to be sent to central authorities. As a result, due to problems of limited actionable authority and finances of middle and lower-level officials, and the gaze of the royal court and burden of failure felt by higher level officials, the implementation of irrigation works easily became complicated even in places where irrigation works were geographically possible. Therefore, apart from some small-scale water use facilities listed in historical records, regional officials at the zhōu(州) level and above became the principle agents in developing irrigation facilities, and it is difficult to think that such works were typically implemented particularly actively or enthusiastically. Due to these various practical limitations, the irrigation related duties that regional officials could implement would have been limited to the level of routine inspections and management or perhaps slight repairs, along with taking charge of some judgements regarding irrigation facility water utilization disputes. To summarize the above content, irrigation projects during the Tang era were implemented with relatively high frequency, but that does not lead credence to the argument that the Tang Dynasty placed great emphasis on water use projects. In addition, the strict legal procedures necessary for water use development were not specifically applied only to water use projects, but rather should be interpreted as a part of political institutional norms established throughout the Tang era administration. Furthermore, water use development cannot be interpreted from the perspective of State authority intervention. This is because the State’s restriction of regional water use projects was not aimed at ease of control over the people, but rather the prevention of tax revenue defic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