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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호국기념관 건립과 운영 활성화 방안 연구

          김현익 ( Kim Hyun Ik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1 역사학연구 Vol.81 No.-

          본 논고는 호남 최초 호국기념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의 건립의의와 과정, 그리고 운영활성화 방안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국가수호 현충시설 기념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이 건립됨으로써 지역적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호국 정신을 기억하는 기념의 공간을 호남지역에 조성하였다는 것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호남호국기념관을 건립할 당시, 국가보훈처는 사업운영방향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독립, 호국, 민주에 관한 내용을 상설전시에 구성하려 했으나 호남의 호국영웅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내용을 추가하면서 재차 수정되었다. 국가수호 기념관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6·25전쟁과 호국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전시는 현재 6·25전쟁의 과정, 호남의 호국영웅과 학도병, 의병의 활동, 그리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건립 진행 과정에서 자문회의는 “패널 위주의 전시 구성은 피로감을 줄 수 있다”는 자문을 제시하였고 전시주제와 관련한 문제들도 다방면 지적하였으나 아쉽게도 반영되지 않은 채 현재의 전시구성으로 확정되었다. 신생 기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이 호국보훈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호남호국기념관은 운영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전시를 기획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호국 관련 콘텐츠 제작과 기증운동 홍보작업을전개하고, 데이터베이스 조성을 위한 치밀한 아카이브 작업과 구술사연구를 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호남 권역의 박물관 협력망을 구축한다면, 호남의 호국정신을 조명하고 소속 기관과의 교류를 통해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탁운영이 종료된 이후 기념관의 안정화와 중장기적인 운영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2020년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기념관들이 휴관하면서 비대면 프로그램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학교 수업과 각종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현재, 호남호국기념관에서 시행할 수 있는 비대면 프로그램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앞장서 개척한다는 신념으로 운영 활성화 방안 등의 개발 과제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국난극복의 역사와 호국정신 계승 속에 건립된 호남호국기념관이 앞으로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고, 국론통합과 지역주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기관으로 성장할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This treatise focused on the significance and process of the construction of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the first Patriots Memorial Hall in Honam, and it was created focusing on the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a memorial hall for National Protection Memorial facilities, enabled regional balance to be achieved,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reation of a memorial space to remember the spirit of patriotism was created in the Honam region. At the time of the construction of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the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tried to organize a permanent exhibition on independence, patriots, and democracy in accordance with the purpose of the project operation direction, but it was revised again with the addition of Honam’s patriots heros and the MND Agency for KIA Recovery·Identification, In the basic framework of the National Protection Memorial Hall, the focus was on the Korean War and patriots, and now the exhibition consisted of the process of the Korean War, Honam’s patriots hero, school soldiers, the activities of Righteous army and MND Agency for KIA Recovery·Identification. During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advisory meeting offered advice that “a panel centered exhibition composition can cause fatigue” and pointed out various issues related to the exhibition theme, but unfortunately, it was confirmed as the current exhibition composition without being reflected.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what direction to proceed the new institution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should take in order to realize the value of patriots veterans. To this end,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should seek a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plan exhibitions and develop educational programs reflecting regional specificity. In addition, patriots related content production and donation campaign promotion work is carried out, and detailed archive work and oral history research are conducted to create a database so that many people should be made to use It without restriction of place and time. Also, if the museum cooperation network in the Honam region is established, specialized programs can be created through exchanges with the affiliated institutions and examine Honam’s spirit of patriotism. Finally, after the consignment operation is finished,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the stabilization of the memorial hall and plans to activate mid to long term operation. Many memorials are closed due to Covid-19 in 2020, further accelerating the development of non face to face programs. Now that school classes and various events are held online. the non face to face program that can be implemented at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is concerned with which direction to proceed, with the belief of pioneering in the information age of the 21st century, it will be necessary to complete development tasks such as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built in the history of overcoming the national crisis and the succession of the spirit of patriotism, aims to pay attention to whether it will grow as an institution contributing to the consolidation of national opinions and the cultivation of the spirit of love for the country of local resi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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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임란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하태규 ( Tae Gyu Ha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임진왜란기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송정현교수가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1980년대부터 조원래 교수가 주도하여 왔다. 최근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호남의 의병의 양상과 특성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렇지만 아직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여진다. 임란기 호남의병의 개념과 실체를 좀 분명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하여는 의병진을 형성하는 지도층의 계층 구조, 의병의 전투력의 근원이 되는 병력 구성원, 국가의 전란 대응책으로서 의병 장려정책과 통제책, 그에 따른 의병의 변질 문제 등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호남의병의 봉기의 계기와 성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임란 초기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은 호남근왕병의 출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도성함락과 임금의 파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근왕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호남 침공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지역을 지키기 위한 향보활동을 하였고, 호남지방이 지켜진 뒤에는 주로 경상도로 출동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대립적으로 파악했던 호남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이나 관군 장수들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며 결성되었고, 그들이 전투에 임할 때도 서로 협력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또한, 임란기 호남의 관군이 엄존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의병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호남의병의 전술·전략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사례 검토가 필요하다. 의병 관련 사료의 발굴과 함께, 현존하는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활용하였던 사료 중에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이 있다. 따라서 의병관련 사료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기왕의 연구성과도 비판적으로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In 1970s professor Song Jeong Hyu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study of the Honam righteous army during the Imjinwaeran and professor Jo Won Rae has led the study since. Recently quite a number of researchers has announced many products of their studies with a high profile about the Imjinwaeran. The facet and the featur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have been revealed in some degree through such studies. But it would seem that there are some assignment that should be reviewed in several ways. It is considered that there is necessity to stipulate more clearly the concept and the substanc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Imjinwaeran. For this, it is necessary to examine more closely about the hierarchy in the leadership class of the Honam righteous army, the members of army as the root of combat power, army incentive policy and control plan as the countermeasure of war, and as a result, the problem from transmutation of the righteous army etc. It is necessary to reexamine the start and character about the uprising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early Imjinwaeran the action of the righteous army in Honam started with Royal guards in Honam at nearly the same time and was founded for the loyalty to the king in national crisis of ‘being taken capital city and royal refuge from the palace’. However there was the crisis because of Japanese invasion of Honam in Korea. and the righteous army started to protect their region. After guarding Honam area, it mobilized to Gyungsang province and kept on protecting the nation. Moreover there is the necessity to study more about relation between the Honam righteous army and the government army that is regarded as adversarial one. The Honam righteous army had been organized with the local governors or the royal forces’ cooperation and support from the beginning and they attacked the enemy together in the battle. Also it is absurd to overemphasize only the role of the righteous army though there was the royal forces in Honam during the Imjinwaeran. Therefore it is definitely required to examine the concrete and empirical cases about the tactical and strategic role of Honam righteous army. It is needed to inspect authenticity of the present historical records with discovery of historical documents about the righteous army. There are many unclear ones among the previous historical records to be utilized by history researchers. So it is also necessary to review critically the foregone research achievement through the verification of the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with the righteou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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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 검토(1)

          김동수 ( Dong Soo Kim ) 호남사학회(구-전남사학회) 2011 역사학연구 Vol.44 No.-

          호남절의록?은 호남 의향론(義鄕論)의 핵심자료 중의 하나로 널리 이용되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이용하여 여러 국난(國難)시기에 호남지방의 모의(募義)활동의 양상이나 경향 등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내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의 기사 내용 중에는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내용이 꽤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호남절의록의 사료 가치를 검토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몇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현재의 여러 형편 등을 고려하여 우선 "?호남절의록?에서 다룬 이른바 5난사에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누락없이 수록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수행하였다. 방법으론 이른바 5난사중의 몇 사건에 관해 출판된 몇 자료들에 수록된 인물들과 ?호남절의록?의 해당 사건의 수록인물들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아울러 ?호남절의록?의 서지적 부분의 문제로서 저자·출판년·참고 자료 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 보았다. ?호남절의록?의 수록인물들과 여타 절의록?류에 수록된 인물들을 비교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① 임진왜란 당시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사적을 다룬 ?남문창의록? 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은 남문창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30% 정도 밖에 정리하지 않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이괄의 난 때의 거의 사적을 정리한 ?호남모의록?괴 비교하면 양서가 엇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양서 중에 서로 일치하는 인물은 100명에 지나지 않아 ?호남절의록?은 거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68%, ?호남모의록?은 61% 를 정리, 수록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1627년의 후금의 침입(정묘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정묘거의록?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는 정묘년 거의 사적이 있는 사람들 총 수의 약36%, ?정묘거의록?에는 약 76%의 비율로 입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호남절의록?과 ?정묘거의록? 모두 不完하지만, ?호남절의록?이 특히 누락된 인물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④ 1636년의 청나라의 침입(병자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자료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이흥발 등 5현의 의진(義陣)을 중심으로 정리한 ?병자창의록?과, 은봉 안방준의 의진을 중심으로 정리한 ?은봉창의록?이다. 이 두 자료의 수록 인물들과 ?호남절의록?과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 병자년의 거의 사적이 있는 인물로 입록된 인원은 병자거의 사적이 있는 총 인원의 30%정도에 불과한 수효가 된다. ?병자창의록?에는 총 인원의 62% 정도, ?은봉창의록?은 28% 정도가 정리되어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둘은 각기의 의진사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 때문에 이처럼 비교하여 수치를 제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검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에는 병자창의록과 ?은봉창의록?에 보이는 거의의 지휘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이처럼 지휘부의 많은 인물들이 누락된 까닭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이처럼 매우 단순하고 거칠게 ?호남절의록?과 5난사관련 일부 자료에의 수록 인물들의 수효를 비교해 보는 작업을 수행한 결과 자료에 따라 비율에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든 ?호남절의록?에 매우 많은 누락이 있음을 확인해 볼수 있었다. 인물들이 대거 누락되어 있는 것은 ?호남절의록?의 자료수집과 정리가 매우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호남절의록?이 나름대로의 편찬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인물들을 정선한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검토는 이 글에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수록인물에 많은 누락이 있다는 것은 곧 호남절의록 의사료가치에 큰 한계가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호남절의록?을 활용하여 호남지방의 의병 활동상을 정리하고자 할 때에는 이런 면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Honamjeoluirok is widely used as one of primary historical materials for Honam as Righteous Region. in Korean. For example, the book is used to academically examine the historical progresses of righteous activities of Honam people in national crises, and their tendencies. However, it is suspected that the book carries within itself factual errors. There could be various ways of evaluating the book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Granting this, I focus this research upon the recording of the figures involved in so-call Five National Crises. With this focus in mind, this research compares Honamjeoluirok with other materials in their recording of the people related in Five National Crises. Also,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the issues such as the authorship, the publication date, and the bibliographies. The comparison of the recorded peoples shows the followings. First, Honamjeoluirok recorded some 30 percentage of people contained in Nammunchang`uirok(南門倡義錄)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at Nammun of Jangseong(長城) region in Japan`s 1592 Invasion of Korea. Second, Honamjeoluirok contained the almost same number of the righteous people as Honammouirok(湖南募義錄) did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the time of Yi Kwal`s(李适) Revolt. In addition, while taking into account the fact that the people commonly recorded in the two books numbered 100, we can say that the former recorded 68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while the latter recorded 61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in the same Revolt. Third, more people were left off Honamjeoluirok than Jeongmyogeouirok(丁卯節義錄) in their accounts of Manchus`s 1627 Invasion of Korea in that the former contained 36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the Invasion while the latter contained 76 percentage of the total number. Forth, Honamjeoluirok recorded only some 30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Chinese Qing`s(淸) 1636 Invasion of Korea when it is compared, in terms of the number of the people included, with the two sources which recorded the history of righteous activities in the Invasion: the one, Byeongjachanguirok(丙子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the Righteous Camp(義陣) of Yi Heung-bal(李興?) and other leaders, recording 62 percentage of all the related people; the other, Eunbongchanguirok (隱峰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An Bang-jun`s Righteous Camp, recording 28 percentage of them. Additionally, this research raises the question: why Honamjeoluirok left out many people, almost all of whom seem to have taken commanding posts according to the other two books. Admitting that just the numerical comparison carries within itself some methodological limitations, what is briefed above confirms the fact that Honamjeoluirok omitted not a few people worthy of notice in their activities. This implys that Honamjeoluirok was lacking in its collection and compilation of related materials, and at the same time that it does not have a great value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Therefore, we need to take this implication into full account when we use Honamjeoluirok in the jobe of writing the history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H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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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홍영기 ( Hong Young-ki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6 역사학연구 Vol.64 No.-

          이 연구는 한말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 현황과 향후 과제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해방후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논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의 경향을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향후 과제를 제시하였다. 한말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약 7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박사학위논문도 2편이나 제출, 간행된바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독립운동사를 개관하는 과정에서 호남의병을 단편적으로 혹은 의병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그후 자료집이 발굴, 간행되면서 1세대 연구자들이 1980년대 중반까지 호남의병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 2세대 연구자들이 연구와 자료집의 간행을 주도하였고, 2000년대에는 한층 심화된 연구로 진전되고 있다. 향후 과제로는 첫째 앞으로 호남의병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연구자를 시급히 양성해야 한다. 둘째, 중·소 규모의 의진과 그것을 주도한 인물에 대한 연구로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호남의병이 후기의병을 주도한 직접적 배경이나 다양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넷째, 호남의병의 생활사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다섯째, 타 지역 의병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각 지역별 의병의 특징을 밝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다른 나라의 민족운동과도 비교함으로써 한말의병의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This study reviewed the status and future tasks of research for Honam Righteous Armies(HRA) in the Great Han Empire. For this, several prior studies which published since independence were examined and looked into especially in the 1970s which this subject started. In addition, future directions are discussed. A research on HRA of the Great Han Empire began in earnest in the 1980s. Since then, about 70 papers have been released so far, including two doctoral thesis. In the process of overview the histor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ties of the RA leaders were focused while HRA were described in small parts. After this, the biographies of RA were discovered and released, amounting to the first generation of researchers studying HRA in the mid 1980s. As a result, a second generation of research lead to the publication around the 1990s and deeper studies were broadened in the 2000s. Future tasks are as follows : first, new researchers urgently need to be trained for the developmental study on HRA in the future. Second, the study should intensify into small and medium sized groups for RA and their leaders. Third, direct background research on several factors of the third RA which took the main lead by HRA, needs to be found. Fourth, studying the life history of HRA is also necessary. Fifth, regional characteristics of RA should be found through comparative study with other regions. Futhermore, comparing RA of the Great Han Empire more with other countries` national movements will have a more meaning in a worlds historical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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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과 대책

          고석규 ( Seok Kyu Ko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이 글은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들을 점검해 보고, 부정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초래하는 문제의 소재를 살펴,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는 시론적 연구이다. ``전라도``라는 행정구역과는 달리 ``호남``이란 정서적 구역은 16세기경에 정립된다. 조선 초 절의를 지키기 위해 사림(士林)들은 변방인 이곳을 택해 왔고, 또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유배지로 활용되면서 변방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호남 사림의 형성으로부터는 절의·비판·실천정신 등 의향(義鄕)적 성향이 나타났고, 변방 이미지는 민중성과 겹치면서, 소외, 저항, 한 등의 정서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풍요로운 자연이 주는 삶의 질과 여유가 있어 예술적인 풍치를 보임으로써 예향(藝鄕)의 소재들을 남겼다. 한편,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을 통해 배우는 공식적인 역사에서 호남은 예향과 의향, 그리고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주역 등으로 나오고 있다. 호남인들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호남 역사 인식과 교과서로 대표되는 공식적인 역사 인식에서는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호남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초래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 문제의 소재들로는 첫째, 역사의 뿌리가 없다는 점, 둘째, 의타적 성향, 셋째, 배타적인 성향, 넷째, 한국사의 변방에 머물렀다는 점, 그리고 다섯째, 지역주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에서는 먼저 지역주의에 의한 차별 구도의 확산 배경에 정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정치판의 구도를 바꾸는 일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을 위한 지역간 공조가 중요함을 피력하였다. 또 나아가 호남의 장점을 계발하여 지역경쟁력을 키우는 일이 현재의 왜곡된 인식을 벗어나는 첩경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한 ``기초질서 지키기``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협력을 통해 이런 과제들을 해결하여야만 미래의 호남인들은 차별 없는 공정한 세상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ntends to review the contemporary understanding of history of ‘Honam’ and examines the ways to resolve problems associated with the distorted and negative recognition thereof. Different from the administrative district denominated as ‘Jeonrado 羅道)’*, the region of ‘Honam’ as an emotionally defined zone was established in the 16thcentury.SincetheearlyageofJoseon(朝鮮) dynasty, lots of Confucian scholars who kept the fidelity to respective principles have been chosen this area; and the image of remoteness of this area placed distant from central government far away has been consolidated the choice of this area as a place for exile. It has been understood that the inclination of people residing in area a hometown of justice represented as the images of fidelity, criticism, and activism was attributable to the background of building Honam Confucian scholars; and the other images of people associated with the remoteness of this place have been organized with emotions alienation, resistance, and discontent. And, due to the abundance of natural resources from wide flat fields, the place also called a place of art and inherited many subject matters traditional art ripened by the allowance and quality of life. In addition, the area of ‘Honam’ is also described in authorized official textbooks of Korean History for high school students as the hometown traditional art and justice; and as a leader of democratization contemporary histor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viewpoint positive recognition of the people residing in the area of ‘Honam’ seeing history and that of the descriptions of the history in such text books. However, the distorted image and recognition of the area of ‘Honam’ is diffused throughout the whole contemporary society. What could be the cause of such a distorted recognition? The lack of the historical origin, the dependent and exclusive inclination of people, the regional status that had been remaining in historical periphery and the regionalism can be pointed out as the causes brought about such a problem of distorted image and recognition. The ways to resolve such problems were explored in this study; and the domestic politics was pointed out as one of the background of the diffusion of the frame of discrimination that exploited the regionalism. Thus the transformation of this political frame is necessary and important; and for this purpose, the importance of the issue of regional cooperation was presented for the balanced national development of Korea. Besides, the cultivation of regional competitiveness through enlightening the strength of people in ‘Honam’ area was suggested as the shortcut to the society free from such a distorted recognition. And finally, the necessity to promote the Observance of Public Order was proposed to improve the local image. It would take the people long time and efforts to be free from such a distorted understanding of ‘Honam’ area. Nevertheless, the regional cooperation would be an imperative choice for the people in this area to be living in the future of ‘Honam’ area fair and from regional discri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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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구(舊)남부에서 주권론(州權論)과 남부내셔널리즘의 모순적 공존에 대한 역사적 해석

          허현 ( Hur Hyun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8 역사학연구 Vol.70 No.-

          미국의 대표적 분권적 정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론(州權論, states’ rights doctrine)은 건국 초기부터 연방정부의 강력한 권한 확대를 견제하면서 내셔널리즘에 맞서는 대표적 저항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아왔다. 따라서 주권론과 내셔널리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특히, 미국 역사에서는 이러한 주권론과 내셔널리즘 간의 적대적 대립관계가 미국 역사 최대의 비극이었던 내전(the Civil War)을 야기했던 주요 원인의 하나였다는 역사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주권론은 지역 자치권을 지켜내고자 했던 남부만의 고유한 정치철학이자 헌법이론으로서 남부 노예주들의 연방탈퇴와 남부연합의 건설은 결국 연방정부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체제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는 통념도 여전히 뿌리 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이나 평가들은 역사적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舊)남부에서는 주권론과 남부내셔널리즘(the Southern nationalism)이 공존하면서 남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켜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남부연합의 탄생을 가져왔던 혁명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구남부에서 이루어졌던 주권론과 남부내셔널리즘의 모순적 공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남부의 주권론이 고유의 실체적 내용을 갖춘 전통적인 주권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떤면에서 남부의 주권론은 노예제의 수호와 팽창은 물론, 인종주의의 지탱을 위해 이용되었던 일종의 정치적·이념적 도구 내지는 편의장치로서 성격이 강했다. 실제로 남부의 플랜터 지배계급은 노예제가 위협받거나 노예제의 확산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권론에 헌신적인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다. 남부는 내전 과정에서 진정한 주권론의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남부의 주권론은 변질된 주권론이자, 본질적으로는 내셔널리즘의 일종으로서 친노예제적 내셔널리즘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는 노예제에 관한 북부의 주권론 행사를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억누르고자 하였다. 세 번째로, 주권론과 내셔널리즘은 설령 대립적이고 모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남부’라는 새로운 노예제의 프런티어에서 서로 녹아들기에 어렵지 않았다. 연방법거부론자들이 연방탈퇴를 정당화하였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주권론이었던 절대적인 주우월주의가 ‘남부’라는 가상의 지역적·민족공동체적 공간 속에서 남부내셔널리즘으로 재탄생했던 것은 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이러한 남부내셔널리즘은 노예소유 주권을 주창하는 남부 노예공화국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백인지배계급 이데올로기였다. 남부의 주권론은 남부내셔널리즘과 경계가 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를 전국화하려는 시도 과정에서 핵심적인 정치철학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진정한 의미의 주권론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연방도망노예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면서 인신자유법의 제정을 정당한 주권 행사로서 주장하던 북부 자유주들의 주권론이 진정한 주권론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구남부에서는 친노예제 내셔널리즘인 남부내셔널리즘이 지배적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주권론은 수용되기 어려웠다는 역사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 즉 남부 주권론의 모순성을 논증해 보는 것이 본 연구의 기본 목적이며 이를 통해 내전 발발 이전 시기 남부의 주권론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해 본다. States’ rights doctrine, which was a major political philosophy and constitutional theory in the United States, had been established as a representative resistance ideology to nationalism, keeping the expansion of the power of federal government in check. In short, it is rightfully believed that states’ rights doctrine and nationalism could not be coexistent. Especially considering a history of the Old South, however, there is some doubt on such a general interpretation or assessment because states‘ rights doctrine and southern nationalism were coexistent and working together as revolutionary ideologies, generating the birth of the Confederacy and the outbreak of the Civil War. In some sense, it would be ahistorical approach in assuming that states’ rights doctrine has an essential or absolute meaning in history. At least, it can be reasoned that states’ rights doctrine, like nationalism, might have a variant challenging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it. Rather than being used as a tool for the decentralization of power, actually, states’ rights doctrine had been functioned as a sort of revolutionary ideology for the birth and growth of southern nationalism in the antebellum America. In other words, states’ rights doctrine, as a sort of proslavery nationalism, contributed the centralization and fortification of the Slave Power who attempted to nationalize slavery through the federal government, Congress, and the federal courts. In this respect, states’ rights doctrine of the Old South could not be a states’ rights doctrine in its real meaning. Indeed, the Confederacy could not pass the test of the real states’ rights doctrine during the Civil War. In the end, the Confederacy “died of [real] states’ right,” as one historian arg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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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전남·제주 지역의 콜레라 발병세와 지역적 질병 문화권

          임종명 ( Chong Myong Im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1 역사학연구 Vol.81 No.-

          5월 말부터 콜레라가 발병했던 전남에서는 목포 지역이 주요 발병 지역이었다. 즉 5월 말 콜레라가 발병했던 목포에서는 환자와 사망자가 계속해서 발생하면서 그 지역은 6월 중순 환자와 사망자 규모에서 경남 부산, 전북 부안 지역과 함께 남한 지역에서 3대 콜레라 발병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6월 초순 콜레라가 발병했던 여수 지역과 그달 중순 환자가 발생했던 순천 지역의 발병세는 8월 상반기에 ‘안정적’이었던 목포 지역 발병세를 추월하였다. 이는 발병 초기와는 달리 전남의 발병 중심지가 8월 중순경 전남 서남권 또는 목포 권역에서 전남 동부권, 또는 순천 권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6월 중순에 콜레라가 발병했던 광주 등 전남 북부 내륙의 광주 권역에서의 콜레라 발병세는 강하지 않았다. 이들 추세를 배경으로 하여, 전남은 콜레라 발생 초기였던 6월 중순까지 전북과 함께 두 번째나 세 번째로 큰 발병·사망자 규모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6월 말 홍수가 집중되었던 경북과 전북 지역에서 콜레라 발병이 폭증하면서, 6월 하반기부터 발병세가 완화되기 시작했던 전남 지역의 상대적 발병 규모는 앞의 지역들에 의해 추월되었다. 1946년 콜레라가 남한 지역에서 확산하던 초기 행정적으로 전남에 소속되어 있던 제주 지역에서는 6월 10일 처음으로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 계속 해서 콜레라가 발병했던 제주도는 6월 중순 콜레라 발생 규모에서 ‘선도적’이었던 부산, 목포, 또 전북 정읍 등과 함께 콜레라 발병의 선도적 지역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6월 하순의 장마를 겪으면서, 제주도는 제주도의 발병 규모가 목포의 그것을 능가하면서 그 지역은 6월 말 대구, 부산, 목포와 함께 최대 규모 콜레라 발생 지역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인구 규모 대비 제주도의 발병 규모는 경북 등 타 지역의 그것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것이었다. 또한, 도서 지역이었던 제주도의 대규모 콜레라 발병은 해방 직후 높은 인구 이동과 밀항, 밀무역 등 종전 직후 동아시아 정치·경제 상황과 제주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1946년 전남과 제주 지역의 콜레라 발병과 만연이 단지 세균학적이거나, 자연적 성격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종전/해방 직후 전라·제주의 지역적, 남한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을, 나아가 근대 동아시아권역의 역사적 맥락을 가진 사태였다. Mokp’o in which cholera epidemic had broke out since late May 1946 worked as the center of the epidemic in South Chŏlla province. In the mid June, the harbor city became one of the top three major centers of the cholera epidemic in South Korea. In the early August, however, the number of confirmed case and death of the city where the cholera outbreaks came to be stable were to be outnumbered by those of Yŏsu and Sunch’ŏn where the epidemic broke out in the early June and the mid of the same month respectively. This shows that the center of the epidemic in the province was shifted from the southwest area of the province, or Mop’o and its vicinities from the east area of the province, or Sunch’ŏn and its vicinities. Compared with these two major areas of the province, Kwangju, the provincial capital, and its vicinities located in the north inland area of the province continued to be comparatively minor in their cholera outbreaks. Based upon the overall development of the outbreaks, South Chŏlla province continued to be ranked the second or the third in South Korea in terms of the numbers of cholera case and death until the mid June characterized as the time of the initial development of the epidemic, and also until late of the month. From that time on, the case and death in South Chŏlla provinces were outnumbered by those in North Chŏlla province and North Kyŏngsang one because the situation with the epidemic began to abate in the former province while the pandemic situation got worse than ever in the latter two provinces severely damaged by contemporary great flood. Next, there broke out cholera epidemic in Cheju area in the early June when the area was contemporarilly under South Chŏlla province in the South Korean local administration system. From the mid June on, the area became one of the major centers of the epidemic in South Korea. Especially after the disastrous flood around the country, the area, continuing one of the major centers, surpassed Mokp’o in terms of the number of case and death of the area. At the same time, the cholera outbreak in the area reached the largest percentage of population in South Korea even though the case and death of North Kyŏng province and other province outnumbered those of Cheju. The worst situation with the pandemic in relation to population was due to not a few causes; post-colonial large-scale population movement, and highly activated illegal trade and passage to and from Japan Given this, we can conclude that the 1948 cholera epidemic in South Chŏlla and Cheju area was not only a natural, or bacteriological, occurrence, but also a post-War/post-colonial East-Asian and South Korean socio-historical inc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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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여순사건과 지역의 기억

          주철희 ( Cheol Hee Joo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4 역사학연구 Vol.56 No.-

          여순사건으로 국가는 반공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하였고,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억압 통제하면서 전남동부지역 사람에게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여순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인식에서 ‘반공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민감한 사건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체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사회 전반에 내재된 의식이나 분위기에 편승한 간접적인 기억도 적지 않다. 간접적인 기억에는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한 공권력을 악용한 측면과 언론ㆍ문화예술 등 통제하면서 편향적이고 왜곡되게 선전ㆍ홍보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기억하는 여순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전남동부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지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1960~80년 초반까지 편찬된 문헌은 대체로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없었다. 주목할 것은 1962년에 편찬한 여순사건으로 국가는 반공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하였고,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억압 통제하면서 전남동부지역 사람에게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여순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인식에서 ‘반공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민감한 사건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체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사회 전반에 내재된 의식이나 분위기에 편승한 간접적인 기억도 적지 않다. 간접적인 기억에는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한 공권력을 악용한 측면과 언론ㆍ문화예술 등 통제하면서 편향적이고 왜곡되게 선전ㆍ홍보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기억하는 여순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전남동부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지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1960~80년 초반까지 편찬된 문헌은 대체로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없었다. 주목할 것은 1962년에 편찬한 『여수향토사』였다. 『여수향토사』에 서술된 여순사건은 발발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중립적 시각에서 지역의 상황과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도 서술하는 형태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반공주의’를 답습한 형태로 서술했다. 이는 국군과 경찰의 비호아래 우익세력의 힘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들은 여순사건을 빨갱이며 공산주의자로 짓누르면서 지역의 유지ㆍ여론주도층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지역사회에서도 폭넓게 재현되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순사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주민의 반응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기억하고 있는 편향ㆍ왜곡된 인식을 올곧게 바꾸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가 여순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여순사건의 또 다른 진실규명이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여순사건으로 국가는 반공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하였고,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억압 통제하면서 전남동부지역 사람에게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여순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인식에서 ‘반공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민감한 사건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체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사회 전반에 내재된 의식이나 분위기에 편승한 간접적인 기억도 적지 않다. 간접적인 기억에는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한 공권력을 악용한 측면과 언론ㆍ문화예술 등 통제하면서 편향적이고 왜곡되게 선전ㆍ홍보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기억하는 여순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전남동부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지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1960~80년 초반까지 편찬된 문헌은 대체로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없었다. 주목할 것은 1962년에 편찬한 『여수향토사』였다. 『여수향토사』에 서술된 여순사건은 발발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중립적 시각에서 지역의 상황과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도 서술하는 형태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반공주의’를 답습한 형태로 서술했다. 이는 국군과 경찰의 비호아래 우익세력의 힘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들은 여순사건을 빨갱이며 공산주의자로 짓누르면서 지역의 유지ㆍ여론주도층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지역사회에서도 폭넓게 재현되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순사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주민의 반응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기억하고 있는 편향ㆍ왜곡된 인식을 올곧게 바꾸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가 여순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여순사건의 또 다른 진실규명이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여수향토사』였다. 『여수향토사』에 서술된 여순사건은 발발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중립적 시각에서 지역의 상황과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도 서술하는 형태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반공주의’를 답습한 형태로 서술했다. 이는 국군과 경찰의 비호아래 우익세력의 힘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들은 여순사건을 빨갱이며 공산주의자로 짓누르면서 지역의 유지ㆍ여론주도층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지역사회에서도 폭넓게 재현되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순사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주민의 반응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기억하고 있는 편향ㆍ왜곡된 인식을 올곧게 바꾸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가 여순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여순사건의 또 다른 진실규명이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As Yeosun Revolt, the country was building firmly an anti-communist system and national public authorities gave a big victim mentality to Jeonnam east area(전남동부지역)``s people while suppressing and controlling the people. Such victim mentality was to remember that Yeosun Revolt is the extremely negative results. That is, Jeonnam east area people(전남동부지역사람) had to live ``the anticommunist national`` on an awareness of ``anti-communism=patriot=ethnic group`` This event has been remembered as a very negative perception. It is also directly learned the happened situation at the time. But it is also less indirect memory jumped on the bandwagon by awareness and atmosphere of the inherent community at large. It is also the result of the abuse of public power with the government``s laws and regulations and the result of biased and distorted propaganda·public relations, while controlling the media·cultural art. I examined the Local-History(지방지) literature published by Jeonnam east area to analyze Yeosun Revolt within local``s remembrance. There was no difference generally between the government``s recognition and the compilation of literature from 1960 to early 1980s. ‘여수향토사’ should be noted that it was compiled in 1962. Yeosun Revolt described in ‘여수향토사’ can be a very high literature value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situation at the time of the outbreak. Since the late 1980s, ``여수향토사‘ was signs of change into a description about the status of the local and damage to civilian in neutral point of view. But some areas still described as a form of followed anti-communism. This threw a sidelight on that strength of right-wing under the protection of the armed forces and police exerted still in community. They thought that Yeosun Revolt is Bbalgangi(빨갱이) and communist and were dominated by maintenance·opinion leaders of this area for a long time. This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literature that violence by the state power has been reproduced widely in community. Yeosun Revolt is in a state of incomplete. The community is urged to enact a special law for Yeosun Revolt``s rehabilitation and clarification of truth. But the reaction of the local people at the scene still seems burdensome and sensitive. It is important legal and institutional devices for Yeosun Revolt``s clarification of truth. But it should take precedence over what changing correctly the biased·distorted perception within local people``s remembrance. In other words, that local residents remember correctly Yeosun Revolt was also another Yeosun Revolt``s clarification of truth and was able to confirm the firs step for historical reassess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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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조선시대 유배인의 현황과 문화자원의 활용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김경옥 ( Gyung Ok Kim ) 호남사학회(구-전남사학회) 2010 역사학연구 Vol.40 No.-

          이 글은 조선시대 전남지역 유배인의 시기별 추이, 현전하는 유배인 관련 문화자원의 현황, 그리고 유배문화자원에 대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전남지역 유배인의 현황을『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한 결과 총 534명이 검출되었다. 유배인의 時期別?郡縣別 추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기별 유배인의 수는 14세기(3명), 15세기(82명), 16세기(28명), 17세기(31명), 18세기(178명), 19세기(196명), 20세기 전반기(16명) 순으로 집계되었다. 즉 전남지역 유배인의 추이는 18-19세기에 무려 70%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서남해 도서지역의 인구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하다. 도서지역의 인구 증가는 지방행정편제를 변화시켰다. 즉 18세기 섬에 諸島面이 설치되었고, 19세기에는 3郡(돌산군·완도군·지도군)이 신설되었다. 둘째, 유배인의 配所는 25개 郡縣, 36處에서 확인되었다. 유배지 가운데 빈도수가 가장 높은 곳은 제주도·고금도·진도·흑산도·추자도·신지도 등 섬이었고, 그 다음으로 해남·강진·흥양·광양·장흥 등 바닷가 연안에 입지한 郡縣이었다. 즉 유배인의 배소는 絶島이거나, 혹은 이들 섬의 행정관할권을 갖고 있던 내륙지역의 郡邑이었다. 셋째 유배인의 配所와 水軍鎭과의 관련성이다. 조선전기 전남지역의 유배지는 珍島와 濟州島뿐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고금도·나로도·녹도·돌산도·발포·여도·임자도·신지도·지도·흑산도 등이 새로운 유배지로 추가된다. 이들 섬은 조선후기에 수군진이 증설되거나 신설된 곳이다. 즉 섬에 수군진이 설치된 결과 유배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현전하는 전남지역 유배 관련 문화자원으로는 ①유배인의 적거지, ②유배지에 개설된 서당, ③유배지에서 작성된 저술, ④유배인 관련 역사유적 등이다. 이 가운데 유배지에서 작성된 저술(문집·시집·일기·간찰·기행문)의 경우, 전남지역에 관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주목된다. This is made to find out the periodic development of exiles in Jeonam province, The current situation of existing cultural resources related to exiles, and the ways of making use of exile-cultural resources. A result of searching exiles` situation in Jeonam from the Annals of the Chosun Period is that the number of exiles is 534 in all. The periodic development and the development by the type of counties and prefectures in the exiles` situation are below. First, the periodic number of the exiles is estimated to three in the 14th century, eighty-two 15th, twenty-eight 16th, thirty-one 17th, one hundred seventy-eight 18th, one hundred ninety-six 19th, sixteen the first half of the 20th. In other words, the development of the 18th century to 19th has a 70% of the number of the exiles in Jeonam province. The population of the southwest islands had increased suddenly at that time. The increase in the population of those areas changed provincial administrative organization. In other words, myuns for groups of islands were established in the 18the century, and three counties like Dolsan county, Wando county, and Jido county were created in the 19th century. Second, the allocated places of the exiles have been confirmed in 25 counties and prefectures and 36 places. The places of the exile of the highest frequency among them were islands like Jejudo, Kogeumdo, Jindo, Heucksando, Chujado, Sinjido and so on, and the next places were counties and prefectures in inland area located on the coast like Haenam, Kangjin, Heungyang, Kwangyang, Jangheung, and so on. In other words, the allocated places of the exile were isolated islands or counties and towns in inland area which had administrative jurisdiction over the islands. Third, there were connections between the allocated places of the exiles and the camp of the naval forces. The allocated places of the exiles were only Jindo and Jejudo during the early days of Chosun Period . In the late of Chosun Period, however, new places of exile were added like Kogeumdo, Narodo, Dolsando, Balpo, Yudo, Limjado, Sinjido, Jido, Heucksando, and so on. The camp of the naval forces in those islands were established more or created in the late of Chosun Period. In other words, establishment of the camp of the naval forces resulted in making use of the islands as the places of exile. Fourth, existing cultural resources related to the exile in Jeonam province are the living places of exiles, seodang established in the places of exile, the books written in the places of exile, historic sites related to the exiles, and so on. In the books written in the places of exile like collections of works, poetical works, diaries, letters, traveler`s journals, the value of their materials have been noticed from the view of primary historic materials regarding Jeonam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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