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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동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국내석사
본회퍼의 교회론 연구 김 현 동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김 영 선 교수 지도 현대인들은 자연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실용화로 물질적 퐁요를 향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물질만능주의의 만연 속에서 감각적 본능과 욕구 충족만을 좇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고에 깊숙이 스며들어 복음화보다는 대형화된 교회의 건물이나, 신자들의 숫자에 치중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신자들 안에서 복음의 참뜻이 흐려지고 공동체성도 잃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한국 사회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또한 사회의 부패를 막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 또한 그 길을 올바로 걸어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교회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또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본고는 교회와 세상의 문제에 자신의 삶을 투신하면서 교회의 참된 본질과 새로운 방식의 신앙을 추구하였던 본회퍼의 사상을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과제와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본고는 본회퍼의 신학사상을 3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둘째 세상과 성별된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이다. 이러한 큰 흐름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논의를 전개하였다. 제Ⅱ장에서는 본회퍼의 삶과 그의 신학사상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제Ⅲ장에서는 본회퍼의 신학적 이론 확립 시대인 신학사상 1시기에 저술된 『성도의 교제』와 『행동의 존재』를 바탕으로 그의 교회 이해의 출발점이었던 그리스도교의 인격 개념과 관계유비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구조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Ⅳ장에서는 본회퍼의 교회투쟁 시대인 신학사상 2시기에 저술된 『나를 따르라』와 『공동생활』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별(성별)된 교회와 예수추종(제자됨)과 영적훈련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Ⅴ장에서는 본회퍼의 정치투쟁 시대인 신학사상 3시기에 저술된 『윤리』와 『옥중서간』을 바탕으로 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성숙한 세상에서 교회의 위치와 그리스도의 길(타인을 위한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한진경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로즈메리 류터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자유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 가운데에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며 살도록 격려받았다. 또한 그녀는 유대인 숙부를 통하여,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통하여, 유대인과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관심의 눈을 떳다. 그후 학부시절 그녀의 비판적, 지적, 실천적 사고 속에서의 교회 역사의 연구는 그녀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으며 지적 사고의 전환 시기를 맞이했다.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페미니즘의 부활이 태동한 시기인 1960년대부터 그녀는 시민 운동가로 활약했다. 1965년부터 워싱턴의 하워드 대학교 신학교인 흑인 신학교의 경험을 통하여 그녀는 또한 신학적 사고와 사회적 실천과의 상호적인 관계를 접합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의 신학적 관심은 반유대주의, 성차별, 계급주의, 생태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나타나지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기의 개혁은 그다지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급진적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강압된 종교개혁의 교회들과 구별되면서 독특한 교회론과 인간론을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타락한 역사적 본성에서가 아니라 본래의 창조된 본성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세속적 사회에 대립한 새로운 몸의 모임으로서 세속적 도시를 떠나 실존의 대립된 원칙에 의해서 사는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개방되어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인수할 교두보로서 현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전통의 내적인 흐름은 재세례파가 재구성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자와의 본질적 유사성을 지니게 창조하였다. 인간이 비록 죄 가운데로 타락하였을지라도 그이 진정한 본성으로 남아있는 하느님과의 유사성은 상실치 않고 보존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자유한 인간의 영혼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며 이 땅에서의 순례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에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의 죄인들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은 창조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였다. 르네상스에서 18세기 후기와 19세기에 있었던 자유주의 혁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민주적, 세속적, 과학적 기반으로 그리스도교가 대체되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자연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보여졌다. 하느님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주의 원형인 최고의 존재로서 질서와 합리성의 관계에서만 증명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합리주의 사상에 기초해 18세기에 점진적으로 출현했던 것들은 천년 왕국의 새로운 세속적 표현으로 그 천년 왕국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은총 또한 모든 인간과 모든 실체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역사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신칸트주의 신학에서는 지상의 도덕적 왕국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해석하는 것이 새로운 자유주의적 정통주의 가운데 세워졌다. 로즈메리 류터는 19세기대륙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제안자로 로베르트 라멘나를 언급하고 있다. 라멘나는 개량된 사회를 창조론과 하느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애의 기초 위에서 발견하였으며, 그러한 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교 사회이론은 호레이스 부쉬넬과 월터 라우센부쉬 등에 의해서 미국의 부흥주의 그리스도가 사회윤리에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옛 구분을 지우고, 성령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인간을 위한 투쟁 가운데서 역사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역사를 최종적 목적에로 인도하시는 내재적인 성령으로 이해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위기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 등으로 알려진 바르트가 꼽힌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계시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이르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신정통주의는 1920년대 후반기에 미국의 사상계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있어서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인홀드 니버를 들 수 있다. 그는 복음의 자율성을 옹호하면 서 또한 정치의 자율성도 생각하면서, 신정통주의가 정치적 행동주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서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삶에로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이러한 은총의 근거는 역사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자에게 있다. 인간이 하느님만을 믿고 신앙 안에서 살 수 있을때, 인간이 진정한 역사적 존재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한 영원한 개방성에로 구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후 사람들은 폭탄과 집단살해로 전체적인 삶과 가치가 파괴되는 대파국을 초래했던 현실에 대하여 비판할 만한 어떤 가치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류터는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의 다양한 광기의 형태를 직접 바라보려고 하였던 알베르 까뮈를 언급한다. 까뮈는 초월적인 신과 거룩한 미래의 희망에 대한 신앙의 도약과 함께 자살 역시도 우리가 지닌 모순의 딜레마의 실체를 회피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결합에 대한 인간의 요구와 현실이 부적당성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본성 안에 내재하는 가치를 확인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기 긍정을 통한 모순에 대한 반항적 인간에 관한 연구 속에서 모든 생명의 가치를 포함하는 차원에서 개인의 삶의 가치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억압에 대항하는 개인의 반항운동에 들어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모든 인간의 공동의 인간성을 구상한다. 이런 인간 공동체에 의해서 반항자가 자신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인간이 서 있는 공동의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인간 사이의 침묵을 파괴시킨다. 즉, 까뮈의 판단은 하늘에 대한 반항은 정의와 질서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우주를 만들어낸 창조자를 거부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하느님에 대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모독자이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창조자를 비난하고, 악과 파국과 무분별한 학살을 행하는 우주의 창조자를 심판한다. 까뮈는 인간의 선과 아름다움이 초월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희망은 신의 부재에 대한 견고한 신앙 위에, 그리고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적 세계와 신성에 대한 야망에 있다. 은총은 인간의 업적을 상대화시키고 인간의 가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절대자는 인간 한계의 보장자로서 작용한다. 구원받은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어떤 절대자와도 일치시키지 않으면서 피조된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 속의 하느님은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묵시사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부여하시며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의 죄인들을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을 타파하며 심판자로 오실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에서 자유주의 혁명에 이르는 기간에서는 민주적, 세속적, 과학적 기반 속에서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자기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어진다. 하느님은 우주의 원형인 최고의 존재인 것이다. 합리주의사상에 기초해 천년 왕국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은총 또한 역사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역시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본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역시 역사하는 분이 되신다. 하느님은 역사를 최종적 목적에로 인도하시는 내재적인 성령으로 이해된다. 1차 세계 대전 후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은 비판을 받고 하느님은 역사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자로 이해되어진다. 2차 세계대전후 하느님은 절대적 초월자로 이해되어지지만 거기에서의 절대자는 인간 한계의 보장자로 작용한다. 결국 절대자는 인간의 신이 되려는 욕망을 파괴하고 인간을 그의 유한성에로 되돌려 보낸다. 서구 기독교의 문화들이 남성적이고 유일신론적인 하느님의 개념과 하느님을 우주의 창조자로 해석하는 방법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사회적 그리고 상징적 지구에 대한 지배에 중요한 연결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런 지배는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남성을 하늘, 지성 그리고 초월적 영과 연결시키고, 여성은 지구, 물질 그리고 자연과 연결 시키는 경향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로즈메리 류터는 이것에 있어서 신화 속에 나타난 하느님(절대자)의 이해를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우주와 신들의 근원인 최초의 어머니로 시작하는 수메르 세계의 초기 이야기들에 기초해 있는 바빌로니아 창조 이야기는 처음에 우주의 몸에서 최초의 모체인 하늘과 땅이 나타나며, 그 다음 최초의 우주적 힘인 물, 공기, 식물 그리고 도시 국가의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인격화된 신과 여신들이 나타난다. 고대의 어머니 여신 티아맷과 마르둑의 이야기에서 티아맷은 마르둑에게 폐한다. 결국 마르둑의 아버지인 에아의 발생 안에서, 종속적인 남성 배우자들을 지닌 여성 지배적인 세계는 종속적인 여성 배우자들을 거느린 남성 지배적 권력 세계로 대체되었다. 마르둑은 유한한 인간 피조물을 강제로 노예화 시키는 반면에, 신들을 자유롭게 쉬게한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게 만들어서, 이로 인하여 편하게된 신들은 성전과 궁전에 거하는 한가한 귀족 사회의 불멸의 구성원들이 되어, 들판과 작업장에서 땀 흘리는 농노들의 노동 생산물을 몰수한다. 몰수된 노동에 기초해 있는 여가는 농노와 노예들의 하층 계급으로부터 귀족 계급을 분리시켜서 신과 동일시했다. 헤브루 창조 이야기 안에서 창조자는 우주의 최초의 물질과 공존하면서 그 과정을 조용히 관리한다. 창조자와 최초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제거되고, 대신에 어머니는 형상은 없지만 창조자의 명령에 즉시 반응하는 유순한 물질이 되었다. 헤브루 창조 이야기에서 창조자는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궁창, 식물, 별, 달, 물고기와 새, 동물과 인간 등 우주를 형성시킨다. 또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고기, 새 그리고 육지 동물을 포함하는 지구에 사는 모든 동물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진다. 이야기의 본문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성과 여성의 평등의 여지를 열어 놓지만, 하느님과 아담을 지칭하는 대명사의 남성적 호칭은 남성이 이런 하나님을 집단적으로 적절하게 대표하며, 여성은 이런 집단적인 인간 주권의 혜택을 함께 나누지만 동시에 남성 가장(家長)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창조이야기인 티마이오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사고의 영역과 보이는 유형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 두 영역 사이에 창조자는 우주의 장인이었다. 이 이야기의 데미우르고스 역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making) 창조한다. 그는 공간을 근원적 요소들인 불, 공기, 물 그리고 흙으로 형성하고 이것들로 우주와 더불어 세상의 영역, 세계 영혼을 만든다. 그런 후에 데미우르고스는 약간 희석된 형태의 요소들로써 인간 영혼을 만든다. 인간의 영혼들은 영원한 본질 안에서 하늘의 교육을 받게 되고, 그들이 하늘의 진리를 받으면 남성의 몸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몸과 그 감각에 대한 통제에 실패 하면, 그 영혼은 다시 육체의 모습을 갖고 다시 태어나 여자가 된다. 여기서 플라톤은 실재를 마음과 몸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마음은 근원적이고 영원하고 선하며, 몸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며 악의 근원으로 정신(마음)에 의해 지배되어진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이런 계층구조(hierarchy)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인간의 동물에 대한 그리고 지배자의 노동자에 대한 계급 계층 구조 안에서 되풀이된다. 서구 기독교는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형성시킨 창세기 1장의 설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고대근동, 헤브루, 그리스와 기독교의 개념들을 종합하였다.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이 최초의 물질로 우주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최초의 물질을 창조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또한 기독교 견해에 있어서 하느님은 완전히 별개의 스스로 있는 영원한 존재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신과 우주의 연결 고리로서 창조를 하느님의 존재로부터 발생하여 그 존재가 실존 안에 거하는 것으로 본다. 기독교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관점은 남성을 합리적 영혼으로, 여성을 몸과 열정으로 보고 있지만 각 영혼에 있어서 신성함과 구원에 대한 동일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하느님에 의해 독특하게 창조된 것으로 본다. 신화 속에서 이해된 하느님은 모권사회에서 부권사회로의 이동, 지배와 종속 관계에 있어서의 지배자로 이해된다. 또한 그 속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지배구조에 대한 정당함을 뒷받침하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 이스라엘의 회개와 순종은 하느님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도록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 백성들의 재난은 그들의 배반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이 남은 자들을 근본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고 정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단절을 초래했던 것은 바로 파기적인 계약원칙으로서의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양시킨 것이었다.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의 이 입장은, 유대교의 가정된 정체성이었던 하느님의 현존으로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마지못해 하나의 지속적인 이스라엘의 계약 안에 두려고 했던 기독교의 입장을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베드로 교회는 첫 번째 미드라쉬가 하느님은 이방인들 속에서 한 백성을 스스로 조성해 내고 있었다는 개념을 포괄하기 위하여 부연되었다. 바울 역시 한 비밀(롬11:25)을 발견했다고 선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그러한 종교적 의미와 또한 자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속적인 관심을 시인할 수 있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있다. 이 비밀에 의하면 유대 종교 공동체는 완악해졌고, 이방인들은 그 결과로써 구원받게 되었다. 이것은 뚜렷이 은혜로운 하느님의 행위다. 교부들은 유대인의 외면성을 완전히 자유스럽게 묘사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 금욕주의와 대조적으로 마치 실제로 육체의 악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모세부터 예수 시대까지 항상 성령을 훼방했던 백성이다. 그들은 한사코 하느님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계약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마침내 하느님, 예언자들 그리고 메시아를 받아들였던 저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의 승리와 메시아적인 회집에 대한 좌파적 사고는 유대인은 배척당하고 추방당했으며, 반유대인 전승에서 자명한 것은 유대인이 받을 형벌은 영원하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은 그들이 배척당한 표시로 하느님에 의하여 폐기되었지만, 그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법을 준수하려고 한다. 율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의 주장에는 모세의 율법은 폐기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그것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이미 영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참 이스라엘로서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이었다. 하느님은 그들의 순종과 회개의 요구 속에서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교부들의 관점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하느님의 계약은 파기되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하느님에 의해 유기된 유대인들은 그러한 관점 하에 역사 속에서도 유기되어 질 수 밖에 없음을 로즈메리 류터는 나타내고 있다. 로즈메리 류터의 하느님 이해를 정리하면서, 류터의 폭넓은 시각과 관점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개인과 관계된 나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구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신화, 문화와 삶 속에 존재하시며, 그 하느님이 바로 나 개인의 삶과 연계되어지는 하느님임을 본다. 그와 관련하여 류터는 하느님이 우리의 관계 속에 거하시며, 그 관계 속에서 치유를 낳는다고 한다. 그 관계는 단순히 인간들의 관계가 아닌 역사와 인류, 자연과의 전지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서의 하느님 이해를 통해서 우리 삶의 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본 논문은 기존의 로즈메리 류터의 여성생태 신학을 중심으로한 관점과는 달리 하느님 이해라는 시각으로 보았다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를 도우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본 논문에 있어서 폭넓고 광범위한 자료 조사에의 미흡함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느님은 역사와 사회, 문화와 온 삶 속에서 관여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하느님이며 나의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홍웅기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국내석사
제 1 장 서 론 1. 문제의 제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급성장했다가 너무나도 쉽게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해외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나라로서의 자부심도 있는 선교강국의 위치도 있지만 기독교적 문화의 영향력으로 사회를 선도하고 있지 못함도 사실이다. 21세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식수준은 높아졌으나 영적 기갈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한국개신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선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사명이다. 교회일치 선교 개념은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선교’란? 개인 구원을 위한 전도개념이나 교세확장을 목표로 하는 것을 넘어서 삼위일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인류의 구원역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정치, 교육, 문화, 종교, 국가, 여성, 인권,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등도 포함된다. 우리는 한국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이 자국의 군함과 문화를 등에 없고 들어와 문화적 제국주의와 종교적 제국주의 형태의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정황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개신교 일부교단은 근본주의적인 보수주의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토착화 신학자요,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탁사 최병헌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일치운동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 대형교회들의 세습 문제와 목회자와 장로들의 싸움과 분쟁, 진보와 보수의 갈등, 교회의 분열 이단시비들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로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여기에 탁사 최병헌의 나라사랑, 민족사랑, 성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성적으로 설파하여 당시의 수많은 지성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한 업적은 오늘날 교회일치 운동의 선구자라 부르기에 적합하다. 최병헌은 자신의 유교적 학문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하여 출판과 신문, 대학교수로서의 교육, 시민운동, 심지어는 공무원으로 참여하여 민족을 계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대한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고 여전히 이 땅의 유교, 불교, 도교, 샤머니즘은 교회가 부흥되었어도 존재한다. 정치상황도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너무 거대한 재벌들과 빈곤층의 격차는 커지고 있다. 자연환경은 계속 오염되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변화, 강대국들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배처럼 흔들리고 있다. 아직도 남과 북은 핵위협과 체제의 문제로 통일조국의 앞날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선교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필자는 탁사 최병헌을 통해 그 희망을 찾고자 한다. 2. 연구목적의 범위, 방법 1) 연구의 목적 21C는 지구촌(Global age)시대이다. 역사신학을 전공하는 신학도로서 한국교회사를 공부했다.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계몽시켜 서구 열강들과 일본의 침략을 대항하고자 자신의 유교적 학문과 문화와 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재해석하여 이원론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교회일치적 선교를 펼쳤던 탁사 최병헌의 상황과 생애, 사상을 통해 선교 초기의 서구선교사들이 피선교지 국민을 미개한 종족이라 여기고 야만적 문화를 가진 족속이라 무시한 배타주의적 선교 방향을 한국에서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이 답습하지 않게 하여 선교지에서의 교회일치적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앞당기게 하며 국내에서도 이제는 한국적 신학의 주체성으로 세계를 구원시키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로 제2의 한국교회 성장을 도모하고자 기대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을 통한 교회일치적 선교를 연구하여 현대선교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2) 연구범위와 방법 본 연구의 범위는 역사 신학적 입장에서 탁사 최병헌의 역사적 상황과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면서 정리해보고 교회일치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탁사 최병헌의 연구는 많은 편이다. 유동식의 “최병헌과 종교신학”, “한국신학의 광맥”, 송길섭의 “한국 신학 형성의 선구자 탁사 최병헌과 그의 시대”, 변선환의 “탁사 최병헌과 동양사상”, 심일섭의 “한국신학 형성의 선구-최초 ‘호교론’과 ‘변증론’을 중심으로” 한숭홍의 “최병헌의 신학사상”, 신광철의 “탁사 최병헌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 변증론: 「성산명경」을 중심으로”, 박명길의 “최병헌 목사의 삶” 이덕주의 “토착화신학의 선구자 최병헌”“최병헌의 신학사상”, 이창식의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문학” 등등이 있고, 「아펜젤러. 최병헌 목사의 생애와 신학」이 정동삼문출판사에서 출간 된 것이 있다. 서영석 교수님의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인물과 사상” 속에서 “구한말 개신교 인식과 수용에 있어서 탁사 최병헌의 영향력”이라는 둘째 마당이 있다. 석사 논문으로는 유승한의 “탁사 최병헌이 생애와 사상연구”(감리교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1985), 임재식의 “탁사 최병헌의 사
이정용의 역(易)의 신학의 관점에서 본 악에 대한 이해
김동윤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시대에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예전엔 공동체를 위해 행복하지 않아도 충분히 희생을 치렀지만 지금의 시대는 좀 다르다.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행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끝없는 방황과 좌절을 반복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담이 되고 행복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연락을 끊고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 대해 많은 이들은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행복을 추구하는 그 나름대로의 행동 패턴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 않음 때문에 100만원짜리 속옷을 사 입으며 사치를 통해 행복해지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해서 행복할까? 본 논문은 행복을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어지는 악이 극복되어지지 않는 한 행복의 소유란 멀고도 먼 길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악의 극복에 대해서 헬라스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유를 넘어서는 이것도 저것도의 사유로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지 논하는 논문이다.
조항윤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20 국내석사
이 연구는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인즈 코헛은 그의 저서에서 단 한 번도 자기 개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또한 그 특성들도 책 여러 곳에 산재하여있다. 그렇기에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는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 연구를 위해서 하인즈 코헛의 시대적 자리를 먼저 연구할 것이다. 여기서는 당시 유럽의 상황과 그의 가정환경, 그리고 그의 생애가 포함된다. 곧, 하인즈 코헛이 유럽에서부터 경험한 반유대주의와 전쟁, 그의 부모 가정에서 경험한 홀로코스트, 그리고 그의 삶에서 경험한 세 번의 박탈 경험인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경험,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야 했던 경험과 그가 회장을 맡았던 미국정신분석학회에서의 퇴출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코헛의 삶은 마치 미성숙한 자기가 성숙한 자기를 향해 회복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갑작스럽게 생성된 개념이 아니다. 그렇기에 필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에서 시작하여 안나 프로이트, 하인즈 하트만, 멜라니 클라인, 로널드 페어베언, 도날드 위니캇의 자아 혹은 자기 개념의 발전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하인즈 코헛이 각 이론가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살펴볼 것이다.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기대상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가 주장했던 자기대상들인 이상화된 부모 원상, 과대자기, 쌍둥이 자기대상을 살펴봄으로 자기와 자기대상이 갖는 관계성과 결핍에 따른 병리적 영향 등을 살펴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이중 축으로 이해되어온 자기대상들에 대한 이해에서 자기대상을 삼중 축으로 이해함으로 보다 발전적인 자기대상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자기의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이 가지는 특징과 함께 신학적, 목회상담학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코헛의 자기 개념이 응집된 자기와 파편화된 자기 중 부모의 공감적 반응에 따라 어느 한 곳으로 향할 때 가지는 시공간적 특징과 경험의 주체로서 가지는 의미를 서술할 것이다. 또한 신학적, 목회상담학적 적용을 위해 존 웨슬리의 신학과의 비교 및 현재까지 이루어진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과 목회상담학의 간(間)학문적 연구를 살펴볼 것이다.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발전적 개념으로 그 중심에 자기 성숙에 대한 추구가 있다. 둘째,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경험의 주체이자 시공간의 연속성과 응집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의 신학적, 목회상담학적 적용은 인간에 대한 보다 풍성한 신학적-심리학적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Given that Kohut’s concept of self is such a basic assumption of psychology and psychiatry, it may be surprising to learn not only that he never made it clear in his articles and books, but also that instead of offering one succinct definition, his writings about the self’s characteristics are scattered throughout his articles and books, making it difficult to articulate his self-concept easily and accurately. Kohut's life shows that the immature self is restored to the mature self. This dissertation describes Kohut’s concept of self from the context of his historical situation, including the state of Europe at the time, the environment of his family, and his life. Specifically, I focus on the antisemitism and violence of World War I, how his parents’ families experienced the Holocaust, the absence of his father during World War I, his family’s experience of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to flee the Nazis, and his withdrawal from the American Psychoanalytic Association, of which he had been the chairman. Kohut did not form his concept of self suddenly or out of the blue. Because he built on the ideas of other scholars, I begin by describing Sigmund Freud's concept of ego and then consider the ideas of Anna Freud, Heinz Hartmann, Melanie Klein, Ronald Fairbairn, and Donald Winnicott and how they each influenced Kohut. Kohut's concept of self exists not in isolation but in relationship to what he calls selfobjects, the idealized parent imago, the grandiose self, and the twinship self. I examine relationship between self and selfobject and identify the pathological effect of the deficiency in their relationship. In addition, I examine the understanding of the selfobjects not as a bipolar self but as more of an advanced tripolar self, suggesting that the selfobjects influence the self. Finally, I suggest the possibilities of applying Kohut’s concept of self in theological and pastoral counseling. I describe the meaning of Kohut's concept of self as the subject of experience, and its characteristics of time and space when it is directed to one place, either the cohesive self or the fragmented self, depending on the empathetic reaction of parents. In addition, for the application of theological and pastoral counseling, I compare John Wesley's theology with Heinz Kohut's theory, and examine the interdisciplinary studies of Heinz Kohut's self psychology and pastoral counseling. The conclusion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is a developmental concept and at the center of it is the pursuit of self-maturity. Second,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is characterized by continuity between time and space and cohesion as the subject of experience. Third, the theological and pastoral counseling application of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can foster the more abundant theological-psych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존 캅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비평적 고찰과 종교간의 대화 가능성 모색
김성래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6 국내석사
본 논문은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비평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한국적 상황에서 '대화'의 가능성을 고찰해 보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용어정의를 통해 오늘날 '종교 다원적 상황'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제국주의적이고 오만한 태도로 다른 종교 전통들을 대할 수 없게 되었고 대화를 위한 새로운 틀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에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예수에 대한 이해"로서의 그리스도론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는 궁극적 실재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종교전통들을 유의미한 길로 인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의 장에서 핵심적인 주제인 존 캅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았다. 존 캅은 역사적 예수로부터 그리스도론을 전개해나가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고백되고 있는 고-그리스도론 즉,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에 기초해서 해석해 나감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그리스도론을 전개해 나갔다. 캅의 그리스도론은 현재(로고스 혹은 창조적 변형으로서의 그리스도)에서 과거(예수로서의 그리스도)로, 다시 미래(희망으로서의 그리스도)로 진행된다. 캅의 그리스도론의 주목할만한 특징은 캅은 그리스도에게 충실한 것은 곧 세계로 열려짐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캅에 따르면 그리스도만 따르려는 신앙적 열심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종교 전통들 혹은 인류의 위대한 길(Ways)들에 열려지길 요구한다. 캅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을 바탕으로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로 대표되는 '공통 기반'에 기초한 종교다원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들을 극복했다고 평가된다. 존 캅의 종교다원주의가 기존의 '다원주의'를 넘어선 의미는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로 아직 남아있었던 제국주의적인 대화 태도를 극복했고, 둘째 각 종교전통의 독특성을 제거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각 자의 종교에 독특한 요소에 충실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셋째, 종교간의 대화의 목표를 상호변혁에 둠으로써 '과정 중에 있는 기독교'가 앞에서 이끄시는 하나님의 유혹(lure)을 따라 성장해 나간다는 신념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존 캅은 화이트헤드 철학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잃어버렸다는 비판(판넨베르크)과, 불교와의 대화에 있어서 설득의 선을 넘어 간섭에 이르렀다는 비판(한인철)을 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그러나 존 캅의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중심 적 종교다원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다원적 상황과 신앙을 고수하려는 신실한 열정이 상호 모순되지 않고 조화할 수 있는 틀로서 '적용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존 캅은 이야기기독론을 통해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의심해 보길 권한다. 오늘날 예수는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 믿길 원하는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징벌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따뜻한 만남과 설득을 통해 위대한 '도(way)'를 가르치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의 그리스도'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사마리아 여인의 삶의 총체적 변화를 유도했듯이 우리의 '비그리스도인'과의 만남은 변화를 추구하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화 상대자의 변화 혹은 개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는 상호변혁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안다고 자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이 우리의 생각과 신조로부터도 온전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이며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내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존 힉은 자신의 신학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하였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이 다원적 상황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존 캅은 다시 그리스도를 고수하고자 한다. 비유신론적 종교와의 대화에 있어서 공통기반을 중심으로 한 종교다원주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에는 어떤 '중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대화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관심과 사랑이다. 더불어 사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 신학은 다원적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리스도처럼 사는 법'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역사적 예수를 삶의 모델로 삼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야기 그리스도론 방법론을 통해 예수는 어떻게 '대화'하셨는가를 연구하고 그 모델을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 역사서의 신학사상 비교 연구 : 법궤운반과 성전건축 전승을 중심으로
정다운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2 국내석사
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n Theology between the Deuteronomistic History and the Chronicler’s History: with priority given to the transport of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emple construction Jeong, Da Woon Dept. of Theology Graduate School Hyupsung University There are largely two different flows in the Old Testament. One is the Deuteronomistic history, and the other is the Chronicler’s history. The huge amount of materials of the two are records of Israel history made by Israelites themselves. The two history books are overlapped in large part, but they described the same incidents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and in a different literary style. It indicates that the writers of the two history books described the history from their own unique viewpoint and from a different theological standpoint. It’s required to look into the contemporary circumstances of the times when the two history books were written in order to have a profound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books. A method of historical criticism was employed in this study. Chapter 2 dealt with the theological thought of the historians, involving the age of their activities, contemporary background, goal of recording and theological themes. Chapter 3 covered the transportation of the ark of the covenant. The meaning and background of the ark of the covenant were discussed, and the book of Samuel and the book of Chronicles were compared in terms of that. Chapter 4 looked into the construction of the temple. The meaning of temple construction was briefly described, and the book of Samuel and the book of Chronicles were compared as well in terms of that by focusing on David and Solomon. Chapter 5 reached a conclusion.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temple are symbols of God’s presence, and they were especially important for David. Therefore, it’s very important to transport the ark of the covenant to get it back, and building the temple was very important as well. When the texts of the books were compared, it’s found that the historian who wrote the book of Chronicles described David as a devout and ideal king and proved how much he was God-centered.
김은경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지금까지 슐라이어마허가 가지는 종교 즉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와 설교, 성서와 설교, 교회와 설교, 그리고 설교자와 설교에 대하여 고찰해보았다. 이상으로 살펴본 슐라이어마허의 설교 이해는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설교에 대한 완전한 이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전반적으로 슐라이어마허의 방대한 사상 전체를 다루지 않았고, 그가 가진 여러 관점들 중에서 설교와 관련된 일부만 소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소개한 기본적인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적 관점들을 토대로 해서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며 또한 설교가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말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인간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신학을 주장하였다. 그의 신학은 바르트와는 다른 입장에서 시작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체계로서의 신학으로 출발하지만, 그는 종교적 경험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바를 개념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을 중심으로 출발하는 신학이다. 그것은 인간이 절대자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순수한 내면의 체험적 신학이다. 인간 내면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것이 슐라이어마허 설교의 기본 원리이다. 역사적인 예수의 신의식은 모든 설교자의 모델이며 지금도 인간에게 자신의 영향을 발휘하는 예수의 신의식을 전제로 설교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리 내면에서의 하나님의 참여를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한 신학적 개념과 원리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이것을 뛰어넘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신적인 능력의 체험을 전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은 '현재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설교자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현재성을 멀리한 내세만의 강조는 신앙인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현재성을 기초로 한 설교자의 설교는 단순히 이상적으로만 그칠 수 있는 설교의 위험성을 경계할 수 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나 규칙으로 설명 가능한 물리적인 영역에서의 해석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드러내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설교를 위한 방법으로서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반성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슐라이어마허 설교신학의 기본 적인 의미를 고찰해 볼 때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순수한 수동적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 중의 하나가 자신만의 시각에서 해석한 말씀을 기독교의 보편적인 원리라고 내세워 그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인 양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은 절대의존감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신적인 말씀과 계시만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다른 것에 관심할 수 없다. 슐라이어마허는 설교자가 진정으로 관심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양적 성장과 세력 팽창을 목표로 삼아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교회에 대하여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은 현재의 순간에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도록 원칙을 제공해 준다. 교회가 참으로 관심해야 할 것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은 또한 관계적이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며, 그것을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나눔으로 교제한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내적인 깊은 교제 가운데 설 때에 회중들과의 바람직한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그들을 이끌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설교자의 종교적인 의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설교자는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며 이를 예언자적인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을 때에 회중들과의 영적인 교제가 가능할 수 있게 된다. 설교자의 이러한 영성은 설교자를 회중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서로간의 경건한 교제를 위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 간에도 이러한 영적인 나눔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자신의 존재 가운데 깊이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성직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직자가 평신도에게 주기만 하고 평신도는 그것을 받기만 하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이며 평등적인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회중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교훈이라고 본다. 이렇게 설교자의 직관과 감정을 통해 신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해 주고 구원자 예수의 신의식의 영향력을 지속시켜 주는 것, 또한 성도들 간의 신의식의 공통적인 통일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설교자는 성령의 활동하심 속에 참여하게 되며, 성령을 통하여 설교가 설교다워질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과 설교자를, 설교자와 회중을, 회중과 회중을 하나로 됐어주며 활기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교제는 하나님과 신앙인 사이의, 그리고 신앙인과 신앙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으나, 신의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른바 비 신앙인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형성되어 오면서 교회가 세워진 근본 이유 종 하나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대한 명령이지만, 슐라이어마허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내적 교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이러한 역할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의 원리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게 하는 것은 설교자들의 현재적 삶 가운데 신 의식을 기초로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과 살아 있는 관계성 속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리고 회중들과 올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형성된다면, 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현실의 교회의 모습과 관련하여 볼 때 교회가 순수한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그 근본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성서에 대한 권위가 어느 정도 축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표현된 신앙 표현의 산물이다. 설교자는 성서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우선하지만, 그 경험은 성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성서를 바탕으로 하되 그것의 문자적이고 표면적인 의미에 매여서는 안 된다. 성서적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설교자의 현재적 삶의 정황 속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드러내심을 서술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역사적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 현재적 계시에 대한 통찰력 있는 목소리여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또한 이러한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언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종교적 감정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혼자만 고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직관과 감정을 통하여 무한자에 대한 인상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경건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가능한 한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언어적 능력이 있는 자라야 한다. 이는 단순히 갖가지 언어적 기교와 멋으로 치장한, 단순히 흥미를 유발시키거나 인간적 감성을 자극하는 감각적 설교와는 다르다. 설교자는 회중들의 내면을 일깨울 수 있는 살아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언어적 표현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이 아니다. 회중들의 자각을 동반하는 힘 있고 설득력 있는 언어이다. 최신한 교수는 슐라이어마허 신학에 대하여 새로움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진정한 모습의 종교가 지향하는 근원은 개별화를 통해 소실되어 버리는 근원이 아니라 개별화의 과정 속에서 늘 새롭게 생기게 하는 근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이 새로운 구성을 전제로 하는, 이성적 중심과 기준을 분화하고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근원적인 사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은 새로움을 창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설교자가 아니라 신적인 교제를 통해 삶의 매 순간에 발전을 더해가며 회중들에게 생생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경험을 전달하는 일일 것이다. 위에 나오는 모든 요인들을 만족시키려면 설교자는 태만하거나 게으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 내적 경건의 상태를 유지하여야 할 것이며 언어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설교자 자신이 경험하는 하나님을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슐라이어마허 설교신학의 기본적 틀을 설교자가 올바로 수행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통한 나눔과 상호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참 진리가 선포되어지고, 이 땅에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 때 그것의 의미를 바로 전달해 주는 신학이 아닌가 싶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아닌, 하나님을 경험한 말씀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신학의 중심을 이주는 원리는 설교자의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성 안에서의 신적 계시의 받아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면에서 바라보자면,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이상(理想)에 그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 실존적 측면에서 바라본 하나님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그의 신학은 설교에 대한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계속해서 구체적인 실천의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본회퍼의 ‘되어감’의 윤리에 대한 연구 : 책임 개념을 중심으로
최종은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국내석사
본 논문은, “본회퍼의 ‘되어감’의 윤리에 대한 연구”를 ‘책임’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진다. 본회퍼의 ‘책임’ 개념에 비추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되어감’의 윤리를 통한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과제에 대하여 논하였다. 본회퍼의 이러한 윤리적 해석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환경, 정치적 상황, 시대적 상황들이 드러나는 생애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본회퍼 윤리의 형성에 있어서의 신학적 배경에 대하여서도 살펴보았다. 책임의 개념과 구조, 장소, 영역을 연구하며, 그러한 책임적 삶으로의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처럼 ‘되어감’임을 그의 윤리적 견해 속에서 전개하였으며, 다루었다. 그러한 본회퍼의 ‘되어감’의 윤리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형상화’의 과정을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회복되어지고 갱신되어져야 할 윤리적 과제로 이해하며, 바른 신앙의 과제, 정의 실현의 과제, 평화에 대한 과제들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논문을 연구, 작성하였다. This thesis will be proceeded in the concept of 'Responsibility' as major theme on "A study on ethics of 'becoming' of Bonnhoeffer". Ethical assignment of Christians and church in this generation through ethics of 'becoming' as 'the image of Jesus Christ' in the definition of 'Responsibility' of Bonnhoeffer have been discussed. To have understanding of these ethical interpretation of Bonnhoeffer, we've take a look his life through his background, political situation and periodical situation, and surveyed theological background in the concept of ethical image of Bonnhoeffer. By studying conception and structure of Responsibility, its place and territory, we proceeded in his ethical viewpoint that life patterns as such responsible living is the 'becoming' as 'the image of Jesus christ'. With understanding the process of 'configuration' of life through Christ who appeared in the ethics of 'becoming' of Bonnhoeffer as ethical duty which should be recovered and reformed by churches and Christians in this generation, this thesis has been made by emphasizing the necessity of assignment for right forms of faith, assignment for achieving justice and assignment for peace.
이은미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국내석사
루돌프 불트만은 20세기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 중의 한사람으로 현대신학을 접함에 있어서 불트만의 신학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신학체계가 다양한 현대신학의 길목에 거목으로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불트만의 신학이 현대신학에 끼친 공헌은 인간 자신의 실존이 문제 되지 않는 기독교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을 인간의 실존과 관련하여 파악하려는 의미 있는 진술을 시도한 점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신학적 질문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해석 방법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으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성서의 메시지를 오늘의 나와 연결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신학과 교회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괴리감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신학의 중심주제인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의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의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과 연관시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트만은 자신의 신학적 작업에 있어서 종교개혁주의, 자유주의, 실존주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통찰을 동시에 포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작업은 많은 논의들을 표출시켰다. 그것은 불트만이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고수하며, 역사를 객관적인 인식의 대상으로 삼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 실증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실존주의 역사의 통찰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불트만 신학의 핵심사상은 신약성서의 케리그마 해석에 대한 것으로, 이를 통해 기독교적 선포의 진정성을 알리고 이를 조직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해석학적 이론으로 실존론적 해석방법론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단순히 신약성서 해석학이 아닌 성서해석학으로서의 신학 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그의 이러한 해석학적 입장은 쉴라이에르마허, 딜타이 그리고 하이데거의 철학적 해석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케리그마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를 인간화 시키고 역사적 예수로 환원시킴으로서 그분을 객관화 시켰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해석학에서의 중점은 실존론적 토대가 되는 비신화화에 있다. 비신화화란 성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화적인 껍질을 벗겨내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성서의 신화론적 표현들 뒤에 담겨있는 더 깊은 의미를 묻기 위한 방법이다. 이것은 18세기 이전까지 취해오던 고전적 성서해석의 방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며,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내재성의 강조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학계와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토론과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비신화화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짐과 함께 많은 비판이 가해졌다. 그것은 불트만이 제시하는 성서연구 방법이 너무나 높은 수준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가 신학을 재건하고자 했던 실존론적 기초는 계몽주의와 19세기 신학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못한 채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 상황에서도 재현되어 풀어지지 않는 과제를 안고 있다. 불트만의 해석학을 통해 제기되는 중요한 비판에 있어서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가운데서도 불트만이 이룩해 놓은 공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비록 불트만의 사상을 오늘날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가 성서의 재해석을 주장했다는 것은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야 한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트만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되어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