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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이야기체 설교방법에 관한 연구
강경인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설교의 전성기는 이제 지나갔는가?"라는 미국 워싱턴의 설교자대학에서 웨델(Theodore O. Wedel)이 수년전 설교의 위기를 논하면서 발표한 글의 제목이다. 설교의 위기를 맞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청중들을 설교라는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이 이야기체 설교이다. 설교는 교회의 예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전파에도 절대적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이야기는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복음 전달의 수단이었다. 더불어 설교갱신을 요구되는 현상황에서 이야기체 설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본고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이야기체 설교의 방법에 관한 연구이다. Ⅱ장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를 위하여, 커뮤니케이션의 정의와 유형,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요소와 과정, 커뮤니케이션의 원리와 역할, 커뮤니케이션과 설교와의 관계, 그리고 공중커뮤니케이션을 살펴보았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언어·몸짓이나 화상 등의 물질적 기호를 매개수단으로 하는 정신적·심리적인 전달 교류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자기완결적인 커뮤니케이션과 도구적인 커뮤니케이션, 퍼스널커뮤니케이션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요소는 송신자, 데시지, 채널, 수신자, 그리고 효과이다. 이런 구성요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지 전달단계, 접촉단계, 반응단계, 이해단계, 수용단계, 내면화단계, 그리고 행동단계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원리에는 수신자 중심의 원리, 반복의 원리, 관련성의 원리, 적절한 정보량의 원리, 슬리퍼 효과의 원리, 선택적 인지의 원리, 선정의의 원리, 그리고 구성의 원리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은 설교자가 메시지를 잘 준비하여 준비한 메시지를 잘 전달해야 한다. 설교할 때 설교자나 청중 그 어느 쪽이라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청취태도가 결여되어 있다면 효과적인 전달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의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고 청중들의 주의가 설교에 집중되었을 때 비로소 효과적인 설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공중커뮤니케이션은 그리스도교의 설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공중커뮤니케이션의 정의는 한 사람의 전달자가 대중이 아닌,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다수의 수용자에게 설득을 목적으로 메시지를 전랄하는 행위 또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공중커뮤니케이션의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하였다. 공중연설의 목적은 정보전달의 목적, 설득의 목적, 오락의 목적 등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공중연설의 주제는 TV에서나 지역단체, 학교 등 연설이 행해지는 상황과 환경에 관계없이 다양하며 제한이 없으나, 주제선정시 주의사항을 제시하였다. 공중연설의 유형은 연설의 목적에 따라 크게 정보적 연설과 설득적 연설로 나뉘며, 전달요령에 따라 즉흥 연설, 무원고 연설, 암기식 연설, 원고 연설 등으로 구분하였다. 커뮤니케이션과 설교와의 관계에서 설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의사소통과정의 신학적 차원과 인간적 차원 모두를 설명하였다. 커뮤니케이션 원리는 커뮤니케이션의 역동성에 관한 특정의 이론적 이해를 근거로 하여 그 과정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활용함으로써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들을 좀더 포괄적 입장에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Ⅲ장에서 전통적 설교이론에서 새로운 설교이론으로의 요청을 다루었다. 전통적 설교이론은 흔히 연역법적 논문 형식의 3가지 요점과 유머로 이루어진 설교가 전통적 설교이론을 대표하는 설교 형식이다. 이 이론에서 설교의 목적은 설교자의 마음과 머리에 있는 바를 청중의 머리와 마음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일방향적임을 의미한다. 이 설교이론의 설교 목적이나 내용은 언어에 대한 이해와 분리할 수 없다. 본문형식의 특징은 설교의 내용이나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한 문장이나 혹은 하나의 중심 아이디어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과 이야기체와 귀납법을 전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설교란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전하고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님의 말씀 신학의 설교이론은 말씀의 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설교이론으로 설교의 케리그마 이론이라고 한다. 케리그마의 전달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이 바로 설교의 목적이다. 케리그마 설교이론에 있어서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놓여 있는 틈은 점점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교 후나 전이나 혹은 설교 도중에 설교자와 청중이 대화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설교의 내용은 본질적인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에서 능동적으로 역사하여 설교를 역동적 사건으로 만들고 있다. 이 이론은 말씀의 역사를 통한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에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변형적 설교이론에 의하면 설교는 예배자에게 경험, 사건, 만남, 혹은 해프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가 사건이 되는데 있어서 케리그마 설교의 이론과는 다른 역할론을 펼친다. 설교자의 책임을 더 강조하며 조우의 초점이 인간적인 측면으로 이동된다. 설교의 목표는 예배자의 가치나 세계관 혹은 실재를 변화시키는 설교적 사건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 설교이론에서 말씀과 세계는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성서로부터 추출한 어떤 신학적 지식으로부터 특정한 성서 본문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한다. 변형적 설교학의 공통적인 점은 언어, 특별히 설교언어와 삶 사이의 연결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귀납적인 설교는 청중을 위해 설교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얻게 된 경험을 재창조한다. 그것은 설교의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그것과 함께 유회하고, 씨름하고, 명료화하도록 한 설교자의 경험을 재추적한다. 설교자 경험의 시각과 음성을 언어로 포착함에 의해 설교자가 들은 것을 청중이 들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귀납적 설교는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하나의 방법론이다. 새로운 설교이론인 이야기체 설교는 구성의 연속적인 요소를 따르는 설교 형식이다. 이야기체 설교 구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불안정과 해결을 향한 중간의 전환과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로우리는 해결을 경험이나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역전의 원리를 강조한다. 그것은 사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그는 이런 행위에서 복음은 급진적인 비연속성과 역전으로 경험된다는 말이다. Ⅳ장에서 이야기 신학은 미국 신학계에서 등장한 이야기 신학은 새로운 설교학운동의 발전과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4세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신학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 이유는 초기 교회가 이단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신학의 태동 배경은 계몽주의의 영향, 해석학의 영향, 객관적 탐구, 그리고 공동체적 탐구이다. 이야기와 신학과의 관계는 달리 구분될 수 있다. 신학은 논리적이며 논쟁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가진 형태이고 이야기는 경험과 줄거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신학에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은 신학을 이해하는데 풍부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이야기와 성서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인 성서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성서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을 통해서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야기와 계시와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계시는 결국 인간의 신앙으로서만 받아들여지고 인식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객관과 주관,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수 있으며 이때에 계시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계시의 사건의 증언되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형식중 하나이다. 계시의 의미는 이야기 신학의 신학으로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Ⅴ장에서 이야기체 설교의 정의는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불안정 상태(또는 충돌)에서 계속적인 갈등(혼란)이 지나고 극적 반전으로 그리고 대단원의 끝으로 이어가는 이동이다. 이야기체 설교의 가설들은 개인적 경험이 의미의 토대라는 것이다. 이 전제는 개인간의 의사소통이란 경험의 공유라는 토대 위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철학적 전제들은 진리의 상대성, 커뮤니케이션의 주관성, 그리고 경험의 지고성이다. 이야기체 설교의 특징은 사람은 논리보다 감정에 의해 삶을 이끌어간다. 설교자는 청중과 의사소통을 위해 이야기한다. 간접적인 표현으로 설교를 전달한다. 설교자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개방적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에 청중을 참여시키고 심취하게 한다. 성서의 본문의 특별한 문학형식과 그 본문을 오늘날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암시를 지니는 내용으로 취급해야 한다. 이야기체 설교의 방법에서 이야기는 산문이나 운문에서 사실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특징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가슴에 말한다. 시대를 초월한다. 청중을 사건 속으로 초청한다. 시대적 요청이다. 치유 능력이 있다. 행동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성서는 스토리를 가진다. 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싶어한다. 이야기의 구성 요소에는 개념적 요소와 기술적 요소가 있다. 개념적 요소는 사건, 등장인물, 배경, 줄거리이다. 기술적 요소에는 관점, 아이러니와 상징, 구조 형태, 한 본문을 다른 본문 안에 인용하는 본문의 상호 관련성, 이야기의 독특한 문체인 반복, 대조, 말놀이, 중심 낱말, 어구, 문장, 주제, 교차대구, 인용 등의 수사학적 장치들이 있다. 성서의 이야기 해석방법은 일반적 성서 해석방법과 이야기의 성서 해석방법이 있다. 일반적 성서 해석방법에서 모든 설교의 기본은 성서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작성에서 소홀하기 쉬운 것이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개관식 해석방법으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먼저 누가, 언제, 어디서라는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핸드릭스의 해석방법은 구약성서의 이야기의 해석방법이다. 먼저 구성에 대한 연구이고, 이야기 속에 어떤 움직임 또는 흐름은 실제적 움직임일 수도 있고 영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 중에 어떤 식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는 지이다. 스테인은 비유해석을 위한 네 가지 해석의 원리를 제안했다. 비유의 중요한 한가지 요점을 찾아라. 비유가 말해진 삶의 자리를 찾아라. 복음서 기자가 비유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찾아라. 하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찾아 보라. 이야기체 설교의 형태는 없으나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야기체 설교는 정해진 형태를 탈피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로 말해야 한다고 권하기도 한다. 로우리가 소개한 네 형태는 본문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기, 지연시키기, 중단시키기, 그리고 교체시키기이다. 이야기체 설교 구성 단계에 대하여 로우리의 방법과 로빈슨의 방법을 살피보았다. 로우리는 이야기체 설교 구성을 위한 기본적인 5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 웁스! 평형을 뒤집어라! 2단계: 우! 모순을 분석하라! 3단계: 아하!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4단계: 와! 복음을 경험하라! 5단계: 예! 결과를 기대하라! 로빈슨은 이야기체 설교의 구성을 위한 4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 쟁점을 발견하라. 2단계: 쟁점을 탐구하라. 3단계: 쟁점을 재구성하라. 4단계: 쟁점을 해결하라. 로빈슨의 방법을 그 쟁점을 발견하거나 혹은 상상함, 쟁점을 탐구하거나 혹은 돋보이게 함, 쟁점을 재구성함, 그리고 쟁점을 해결함이다. Ⅵ장에서 이야기체 설교의 실제는 이야기체 설교의 준비지침과 이야기체 설교의 실례를 제시하였다. 이야기체 설교의 준비지침은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라. 행간을 읽어라. 만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라.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를 도입하라. 행동에서 동기로 옮겨가라. 사실보다 그 이전의 역동성으로 나아가라. 감각을 총동원하라. 늘 해오던 동일화 작업을 전환하라. 능동태 어법을 사용하라. 1인칭이나 2인칭 단수 형태로 이야기를 몰고 가라.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옮겨가라. 단계를 정하라. 이야기체 설교의 실례로써 로우리의 설교문, 월리스의 설교문, 그리고 강경인의 설교문을 들었다.
김효신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6 국내석사
이상에서 본회퍼의 책임윤리와 한국교회의 책임적 과제를 살펴보았다. 이제 지금까지 논의 되었던 각 장의 내용을 정리하고 간략한 사견을 덧붙인 후 졸고(拙稿)를 맺으려 한다. 2장에서는 본회퍼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그의 생애를 신학적 형성과 응용, 결단의 시대로 구분하여 연구한 후, 주요 신학적 입장을 신학 방법론 및 신학 내용을 통해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본회퍼는 루터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칼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신학의 형태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회퍼의 신학 방법은 가능성에서 현실로, 방법에서 내용으로 움직이는 신학이다. 다시 말하면 질문, 상황, 인간학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학적·실존적 방법이 아니고, 실재(계시의 실재, What)에서 출발하는 가능성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케리그마적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의 저서들은 그 각각의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각각 구분하여 다른 신학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비록 구분되는 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일관하는 맥락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긍정하고 심판하고 구원하는 은혜의 사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로 일관된다. 3장에서는 본회퍼 윤리 사상의 형성을 다루었다. 그것은 초기 작품에서부터 나타나는 윤리적 항목들을 정리하는 작업이었고, 그로 인해 마무리되지 못한 그의 『윤리』 가 형식에 있어서는 미완성이지만 그의 신학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히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삶의 주제는 그 신학적 연구의 중심에서, 구체성, 즉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있다. 그것은 지금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 그의 활동, 그의 방법에 관계된다. 『윤리』에서 나타난,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오늘 여기에서 모습을 취하는가, 또는 어떻게 우리가 그의 모습과 같이 되는가?" 라는 질문은 그의 삶의 중심 주제를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윤리』는 우리 시대에 구체적인 윤리적 상황 안에서 인간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현재라는 질문과 더불어 시작되고 끝난다. 4장에서는 본회퍼의 윤리적 관점은 먼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데에 의미를 갖음을 말하며, 윤리학의 출발점으로서 그가 바라보는 현실은 악이 지배하는 현실과 선이 지배하는 현실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현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그에게 있어 윤리학의 원리라 할 수 있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의 관계 규명에 있어서 해결점이 되는 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임을 말했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대리적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하고, 그의 현실에 적합한 생활을 해야 함을 알게 하며, 타인의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함을 일깨운다. 매임 속에 자유함을 알게 한다. 결국 본회퍼에게 있어 책임적 생활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방법론이 됨을 알게 하신 이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5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정리를 바탕으로 본회퍼의 책임윤리라는 스펙트럼을 통하여 오늘의 교회의 책임적 과제를 제시하였다. 본회퍼의 그리스도 중심적 윤리는 자유주의라는 신학적 패러다임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상대화되고, 교회와 신학이 국가사회주의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오늘 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한다.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는 예수가 존재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중심에 있어야 할 그리스도는 단지 포장에 불과하고 그 내용들은 본회퍼가 비판한 종교로서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의 세계관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종교인으로서의 모습들이 되어 간다. 그의 윤리적 사고는 기독교인의 선의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부터 공동체의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선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문제가 된다. 아울러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함에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왜곡함으로 역사 속에서 많은 문제를 범하였다. 그러나 그의 윤리는 더 이상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삶과 무관한 신앙으로 안주시켜 무책임하게 살도록 방관하지 않는다. 그의 윤리에 있어 책임의 영역은 자신의 선과악의 문제를 넘어 섰으며 또한 자신이 행한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넘어선다. 오히려 그는 타자를 대리하여 행동하고 죄를 대신 짊어지는 책임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뜻을 묻고, 하나님의 현실이 이 세상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에 집중한다. 여기서 책임의 영역은 확장된다.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나 사회의 복지문제, 민주화 등 구체적인 삶의 현장의제 문제에서 본회퍼의 윤리사상은 교회의 역동성이 회복될 것이다. 타자를 위한 교회의 가능성도 여기에 열려있다. 이러한 본회퍼의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영역, 한계선을 구분하고 구체적인 삶의 방법으로서의 책임적 생활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부름의 영역 안에 존재하며, 그가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가운데 형성된다. 그것은 그의 부르심과 발 딛고 있는 지금의 세계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에 적합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삶이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 사는 삶이다. 그것이 책임적 삶이며 인간 존재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윤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책임윤리라 할 수 있다. 이제 오늘 우리는 본회퍼를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넘어서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윤리"를 제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웃을 위한 책임적인 삶으로 부르시는 은총의 부름에 응답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오늘에 있어 "타자를 위한 교회", 즉,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교회 그리고 정의의 편에서는 교회로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를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말하며 졸고(拙稿)를 맺는다.
최홍성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지금까지 바르트 신학의 사상과 변천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인식론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 사이에 존재론적 상호관계 내지는 연결성을 전제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인식을 주장하는 19세기 문화신학 및 자연신학을 향한 바르트의 변천하는 신학 가운데서 드러나는 입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간격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성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며 이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경외와 순종의 태도이여야 함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바르트에게 주는 의미는 정통주의의 무력한 합리화 경향을 극복케 해주었다.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를 강조하기 위해 구축한 태도로써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의 공장으로써의 이성,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을 강조한 정통주의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큰 업적이며 역사의 경험에 의한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특별히 바르트가 영향을 받은 것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성의 존중, 예술을 중심에 두게 되는 기동론적 영향, 역사 진보와 합리적 사고 등이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틀은 자유주의를 극복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 사회주의를 문화 신학의 지류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종교 사회주의는 문화 신학에로부터 로마서 강해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경험의 신학이었다. 그 영향은 지상에서 이룩되기를 원했던 하나님 나라 경신과 형제 공동체 정신 그리고 개혁정신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제 1차 대전의 충격과 어우려져서 하나님 나라와 형제 공동체의 파괴가 곧 개혁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해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개혁이 그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종교사회 주의자였던 바르트는 잘 드러내준다 " 로마서 강해" 제1판의 신학이 헤겔의 양적 변증법에 따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하였다면 제2판은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적을 정의하였다. 이것은 자유주의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의 표현으로써 신인식의 불가라는 사형선고를 집행한 것이었다. "위기의 신학" ,"역설의 신학"을 가지고 그는 비록 하나님을 "원역사"로 축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하나님의 신성의 재발견이라는 20세기 신학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이것은 후반부에 그의 신학이 정당화 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바르트이 인식론은 틸리히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유일한 사물들의 "존재의 깊이", "존재의 힘" 내지는 "존재의 증거"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되어" 있으며 거꾸로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유한한 사물들의 존재에 "참여되어" 있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 유비적 방법론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관계를 회복시키고 있다. 틸리히의 상호 관계를 통한 "궁극적 관심" 이 인간의 교만을 담고 있다면 바르트의 신인식은 하나님의 은총인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기동론 중심의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송천성(C. S. Song)의 아시아신학방법에 관한 연구
장민호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지금까지 송천성의 신학방법과 그가 신학에서의 고난을 어떻게 다루었으며 그가 신학을 찾아내고 전개하는 소재인 이야기와 민담, 시 등을 어떻게 전개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송천성의 신학을 잠시 요약해 보면 그의 신학 방법은 아시아는 아시아의 상황에 맞는 아시아의 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신학이 아시아의 상황, 문화 정치, 생활 등에서 나오는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러한 다양한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신학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서양식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남미신학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남미 식의 대답이 나올 것이며 흑인신학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흑인신학의 입장에서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은 아시아이다. 아시아는 서구 유럽이 아니며, 남미가 아니며 흑인이나 아프리카도 아니다. 그러기에 아시아는 아시아의 눈과 심성으로 신학을 해야만 다양한 물음에 아시아다운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천성은 전위의 신학을 말한다. 전위란 일정한 시간이나 장소로부터 다른 시간이나 장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며, 의사소통(통역)이다. 신학이 이스라엘에서 유럽으로 옮겨졌다. 또한 이 유럽으로 옮겨진 신학이 제3세계에 전달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신학의 주체도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신학의 주체였었다면 이것이 바울에 의하여 유럽으로 전위되었다. 이 유럽에 전위된 신학이 제3세계에 전위되어 제3세계가 신학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천성은 아시아로의 신학의 전위를 말한다. 그러면서 각 나라의 서로 다른 의사소통을 예로 들고 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상황의 신학이다. 인도에 맞는 상황에서 신학이 이루어져야 인도인들이 받아들여지는 복음이 되고, 중국에 맞는 상황 안에서 신학이 이루어져야 중국인들이 받아들이는 복음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상황은 중국의 상황도 아니고 인도의 상황도 아니다. 더욱이 서구의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신학은 한국의 상황에 맞는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송천성이 말하는 상황의 신학이다. 송천성은 신학의 방법을 풀이하는 방법과 아시아의 독특한 신학의 특성을 찾아내고 발견하는데 이야기나 시, 동양의 민담 등에서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낸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서양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타 종교에서도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보면서 이사야 11:6-9와 ≪리그베다≫(Rigveda)에 있는 비쉬뉴(Vishnu)를 비교한다. 더욱이 서구 유럽의 신학이 아시아에 들어오면서 몇 가지 부정적인 면을 드러냈다. (1) 서구 신학의 대량 유입이 아시아 기독교인들의 창조적 역량의 개발을 막는다. (2) 서구식으로 신학하는 방식이 주입된다. (3) 신학을 하는 목적을 효율적으로 이루기 어렵다.
박수욱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한국교회에 음악목사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안에 수요와 공급이 원활하게 균형을 이루어져야 한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 각 교단과 교회는 음악목사 필요성을 인식해야 하며, 음악목사로의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는 지원자들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이들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존재해야 한다. 물론 한국의 각 교단 산하 신학대학교에 교회음악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진로는 음악목회자로서 활동하기보다 단지 교회 안에서 피아노 반주자, 성악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할 뿐이며 이들을 부역자로 인정하는 교회는 극히 드문 실정이다. 첫째,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은 교회의 음악은 신학적 배경과 지식 그리고 음악을 전공한자에게 맡겨 팀 목회를 지향해야 한다. 전문화된 목회를 담임목회자 한 사람의 능력으로 교회의 모든 부분을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 한국교회는 교육을 담당하는 목회자, 심방을 담당하는 목회자, 행정을 담당하는 목회자를 두어서 그 전문 분야를 맡기고 있다. 하지만 음악 분야에 있어서는 일반음악 전문가에게, 유명한 교수나 성악가에게 교회음악의 일부분을 감당케 하고 있다. 신학적 지식과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보니 교회력과 맞지 않는 찬양곡이 선곡되기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하며 보여주기 식의 찬양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팀목회를 통해 담임목회자 혼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목회가 아니라 전문사역자들과 함께 사명을 가지고 분담한다면 효과적인 목회가 될 것이며 예배중 25-30%를 차지하는 예배음악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음악목사 제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 교회음악을 전담해야 할 음악목사 제도가 총회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각 교회는 음악목사 또는 전임 음악사역자를 두는데 필요한 모든 후원을 다할 때 팀 목회는 현실적인 목회 방향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며 한국교회에 제2의 부흥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둘째, 음악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그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의 영향과 침례교, 성결교단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교회들은 음악목회자를 원하고 있으며 실시하고 있는 교회들도 있다. 앞으로는 교회 자체적으로 음악목사를 원하는 교회들이 많아 질 것으로 볼 때, 그만한 자격을 갖춘 목회자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음악목사를 꿈꾸고 있는 자들은 교단에 음악목사제도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지 말고 그에 합당한 노력과 자질을 연마해야 한다. 음악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 중에는 음악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서론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목사는 세상의 직업을 갖지 않은 자이어야 자기에게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음악목사는 기능인이기 이전에 목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음악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와 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교인들과 교회 안의 음악인들을 리더 할 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교단적으로 음악목사를 배출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각 교회에 음악목사가 정착되지 못하고 이유 중 하나는 교육과정의 부적절한 운영에 있다고 본다. 교회음악과 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내용 즉, 예배학, 찬송가학 등의 기본적인 학과도 가르치지 않는 학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각 교단에서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 교역학 석사(M.Div) 과정을 이수해야 하며 또는 목회연구과정을 졸업해야 하듯이 음악목사가 되기 위해서도 일반학부에서 음악을 전공한 자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든지, 아니면 교회음악대학원 재학 중에 신학과정의 필수 과목을 이수하였다든지, 아니면 신대원 재학 중에 교회음악목사 제도에 필요한 필수 과목을 이수하였을 때 각자 교단의 음악목사로 사역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고 있는 대학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은 교회음악 지도자, 음악목사와 음악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교과과정에는 교회음악전공(MCM)과 목회음악전공(M.Div in CM) 과정을 두고 있다. 이 중 음악목사가 되기 원하는 자들은 목회음악을 전공해야 한다. 목회음악 전공자는 신학과목 26학점을 이수해야 하며 이 중에는 설교학, 전도학, 목회신학개론, 예배학, 침례교회사 등을 이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보듯이 이제 한국교회의 각 교단에 음악목사 제도를 위해 각 교단 산하의 대학 또는 대학원에 교회음악과 두어야 하며, 두고 있는 교단들은 신학적 지식과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교회가 음악목사를 두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다면 한국교회의 교회음악은 뒤쳐질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예배의 부흥은 기대할 수 없다. 음악목사를 두기 힘들다면 평신도 중에 선택된 교회음악을 담당하는 자 즉, 지휘자, 성가대장 등을 교회음악 세미나 또는 평신도를 위한 교회음악 수료과정을 수료하게 하여야 하며 교회 자체적으로 찬양학교를 개설하여 예배학, 찬송가학, 교회음악과 예배에 관한 부분들을 강의하여 그들의 질적, 양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넷째, 각 교단별로 각 교단의 헌법에 음악목사제도를 합법화 하여야 한다. 현재 교단헌법에 음악목사 제도를 두어 음악목사 안수를 주고 있는 교단은 침례교, 성결교(기성, 예성, 나사렛), 복음교단 단 5 교단뿐이다. 그 외 교단은 교회의 필요에 의하여 음악목사, 음악전도사를 두어 부목사나, 전임 전도사가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 교단별로 음악목사제도를 법적으로 확립한다면 교회음악의 질정향상은 물론 교회음악과 일반음악 사이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로인해 한국교회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세계 교회에 비춰질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지금 감성의 시대, 변화의 시대, 전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각 개인은 물론, 사회의 모든 조직은 변화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며, 이는 교회도 예외일 수 없고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 시대와 문화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해야 할 장이 바로 교회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혜선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본 논문에서는 성서를 토대로 고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구약성서는 고난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지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며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으며 구약성서의 여러 기록들은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한 도구로서 받아들인다. 또한 고난을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로써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윤리는 하나님 자신이 의롭고 공의로운 분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예수 자신은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선 예수의 행동에서 특이한 점은 그가 인간이 겪는 아픔에 대해서 그 원인이나 의미를 이론적으로 캔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일체 평가하지 않았다. 설혹 잘못에 의해서 아픔을 겪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책임을 일체 묻지 않았다. 역사의 예수는 아픔의 까닭이야 어디에 있던, 다만 자신이 몸소 겪어야 할 아픔을 겪으면서 아픔을 겪는 민중들을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직접 행동에 나서고, 그들이 현실적인 아픔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아픔을 가져오는 악의 세력과 직접 대결하였다. 반면 그는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 괴로원고 (요12:27) 고난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하였다(눅22:42). 이스라엘의 초기에는 단순히 하나님은 의롭고 공의로운 분이신데 확신을 가지고 만족하였다. 신명기 학파와 대부분의 고대 저술가들은 하나님이 사악한 자들은 육신의 법과 현세의 죽음으로 벌하시고, 착한 사람들은 현세에서의 장수와 행복한 생활로 상을 주신다는 응보설을 당면하게 여졌고, 이 현세적 응보설은 별다른 의문 없이 일반 민증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인간이 죽은 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한다고 믿고는 있있으나, 내세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에 거룩한 자나 죄인이나 죽은 후의 상태는 같은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상금이나 징벌은 현세에서 내려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고난은 반드시 죄악의 대가나 형벌만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때문에 단련을 시키고 고난을 준다는 사상이 있다. 서구 남성 중심적 정통주의 기독교에서는 고난의 의미를 '개인의 훈련차원에서의 고난'(개인의 연단을 위한 고난), '우리의 속죄를 위해 고난을 겪은 고난의 종 예수를 따라야 하는 기독교인의 자세로서의 고난·, 심지어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난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많은 신학적 가르침과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고, 서구의 남성 중심적 정통주의 기독교의 신학적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는 많은 한국 기독교회에서의 주된 '고난의 의미'해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을 인내를 통한 훈련, 또는 개인적인 연단으로 해석하는 서구의 남성 중심적 정통주의 기독교는 사람이 고난을 겪을 때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가르친다. 즉, 폭력의 피해자들이 폭력이 계속되는 위험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권고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고통을 견뎌내라고 가르친다.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것을 위해서 그 피해자에게 뭔가를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으로, 또는 그 사람의 신앙을 시험하고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성신학자들은 '고난의 의미'에 대한 이런 해석이 편안한 사람들은 계속 편안하게 해주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계속 고통을 주면서, 정의를 추구하고 삶의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거라고 비판한다. 즉, 이런 해석 속에는 부정의로 부터 오는 고난에 대해 도전하거나 질문을 던질 자리가 없고, 분노를 느낄 자리도,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할 자리가 없게 된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의 결과는 피해자가 무력하게 남아 있으면서 계속 피해 받고 그녀의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영적 생존이 위기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서구의 남성 중심적 정통주의 기독교에서 고난의 의미를 '개인적 훈련으로서의 고난', '죄에 대한 벌로서의 고난', '속죄를 위해 필요한 고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고난-함께 고난을 겪는 하나님'등으로 해석해온 반면, 여성신학자들은 그러한 고난해석이 특별히 가정폭력과 성적 폭력으로 인해 고난을 겪는 여성들에게는 부적당하고 오히려 억압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누군가의 '고난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자발적 고난'(Voluntary)과 '비자발적 고난'(Involuntary)사이의 차이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독교회는 절망, 부서짐, 공포에 의해 압도되어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통해 새 삶을 보여 주었듯이 그들에게토 새 삶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선포해야 하며, 피해자들이 고난을 전환 시킬 수 있도록 도우면서, 기독교회는 부정의에 도전하고 모든 종류의 폭력을 멈추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된 폭력의 주기를 깨야 한다. 악을 참는 것을 거부하고, 정의를 만들고 깨어짐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고난의 전환을 위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여성의 악, 타락, 고난에 대한 신학적 재고찰을 정리해보았다. 여성신학자들은 악의 범주로 문화적, 사회적 악을 주창한다. 문화적 악은 문화적 규범에 의해 수용되고 사회의 저변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편견이다. 이 악은 공동체에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에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고 그 사회 구성원들을 소외시킨다. 이는 그 사회의 비판적 평가를 금지하고 그 자체의 변혁을 두려워한다. 인종 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들은 이 문화적 악들의 범주에 포함된다. 여성의 고난과 관련된 악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는 위계 질서적으로 정해전 극단적 이원론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인간학의 뿌리이기도 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먼저 죄를 지었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는 여성에게서 시작되었고 여성은 악마가 들어온 문이라는 초대교부들의 여성 협오적 신학은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차별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 왜곡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또한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 논문은 말하고자 한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 현실로 고난을 경험하는 여성은 '나의 고난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하는 신학적 질문을 한다. 현실로 경험되는 악에 대해 비판적으로 신학적인 명명작업을 하는 것은 그 전체로서의 현실을 극복하고 변혁하는 것이다. 고난은 그 의미를 묻는 여성에게 계속적인 피해자로 남느냐 아니면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다. 이 현실로 경험되는 고난에서 현실을 변혁하는 변화된 고난은 독일 여성신학자 죌레의 고난의 신학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본 논문을 여성의 고난에 대한 마지막 논의를 죌레의 고난의 신학의 세 가지 측면을 정리하면서 마쳤다. 죌레는 언어와 고난의 관계성 속에서 고난당하는 이들이 고난에 대응하는 세 가지 단면을 논의하였다. 고난이 삼켜버린 언어를 되찾는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심연을 건너 의사소통의 두 번째 국면으로 이끈다. 이 의사소통이 집단적 의사소통로 되면 이는 곧 연대로 이어져 고난의 현실을 변혁하는 힘을 만들게 된다. 또한 죌레는 삶을 지속하는 본질적 힘을 파괴하는 무의미한 고난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녀는 고난은 하나님을 향한 긍정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핵심임을 설명하면서 고난은 오로지 고난의 현실에 대한 직면과 수용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죌레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일상에서 고난을 현실로 경험하는 여성의 고난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유의미한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역사 속에서 경험되었고 현실에서 경험되고 있는 여성들의 고난에 대해서 죌레는 신학자로서 세 가지 과제를 제안했다. 그것은 첫째, 현재의 학문적 언어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해석하는 일이며 둘째, 사랑에 대한 믿음과 모순되는 것을 제거하는 일이며 셋째, 내가 해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밀쳐 버릴 수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우직하게 반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주장한 과제를 또한 현재의 과제로 받아들인다.
이혜선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20세기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신앙적 활력소를 제공한 것 중의 하나는 오순절 성령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0년 찰스 파램(Cllarles F. Parham)이 성경학교의 문을 열면서 소위 방언파라는 이를으로 그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이미 국제적인 대 교단으로 급성장 하였고, 그 증가 추세는 아직도 둔화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사는 인류들에게 기독교는 인류의 정신적 회복을 가져오게 하는 종교임을 일종의 정신운동민 "성령운동"을 통하여 보여줌으로써 "가뭄 들에 불어오는 신선한 비바람"처럼 느껴져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본문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장별로 요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 부분으로서 연구 목적은 한국교인들이 바른 신학과 바른 성령운동을 통헤 바른 신앙 생활관을 정립하고자함이며, 연구의 방법은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제2장에서는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알게하고, 말씀을 듣고 깨닫게하고, 은혜를 보존케하고, 성장케하고, 부흥케하고 전진케한다. 제3장은 한국교회의 성령사역과 성령운동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국교회를 급 성장시켜온 반면에 샤머니즘으로 전략시키고 신비주의로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 제4장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강조점을 말하는데 그것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이다. 오순절 주의자들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는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누려야 할 축복이라고 가리켰다. 제5장은 성령운동의 문제점과 그 영향을 살펴본 즉 문제점에 있어서 성령세례, 방언과대평가, 특정은사, 기복신앙 신학의 빈곤이며, 이런 문제점들로 인한 한국교회의 영향은 급성장으로 인해 신앙의 질적으로 볼 때 너무 형편이 없다. 즉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방언과 신유 등 화려한 "성령의 불꽃놀이"는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기성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영적 빈곤과 은혜였음을 더욱 절감케 하고 오순절주의야말로 한국교회 신자들이 "20세기 한국교회의 성령부재의 광야"에서 바라보고 나가야할 "성령의 구름 기둥이요, 불기둥" 이라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6.25사변이 안겨준 고통의 쓴 잔을 마시면서 인내하고 살던 50년대 중반부터 이 운동이 사람들기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무서운 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지난 30년 등안 이러한 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심한 열병을 앓는 셈이 되었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의 초창기에는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심지어는 이단이라는 정죄를 서슴치 않코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운동의 신학적 정당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는 별로 개념치 않고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직. 간접적으로 이 운동의 동조자가 되어 있고, 신학적, 교리적 비판의 칼날도 많이 무디어져 버렸다. 지금은 성령운동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고 문제시하고 있는 내용도 거의가 예언, 악령추방 등 지엽적인 현상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아무도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익이라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가져다주었고 목회적으로는 기성교회가 크게 각성할 수 있는 자극제의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교회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교회에 끼친 해독 역시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째, 비오순절계 교회의 신자들에게 침투해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성령세례"와 그 증거들로서의 방언과 신유 등 "이적적 은사"들을 추구케 하는 오순절 교회, 성령집회 또는 은사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케 하므로 소위 "주일오후 3시 기독교"를 형성해가고 있는 "신오순절주의"자 오늘날 기독교의 제3세력으로 급속한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현대교회의 성령운동과 특히, "신오순절로 이어지고 현대 오순절 주의가 한국 기독교계와 일반사회까지 누리고 있는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험(그것이 신령한 체험이라고 할 지라도)이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서책인 성경보다 높이 평가하는 경험주의적 신앙은 인간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우월시 하는 사상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신앙과 신학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좋아하는 수복신앙과 성령운동 성령의 은사들을 더 열망하는 은사주의 등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무속신앙의 요소를 혼합시켜서 교인들의 영성을 흐려 놓았으며 성경말씀보다 체험을 우위에 후는 감각적인 신앙풍조를 조성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현실주의에 뿌리를 둔 기복신앙이 전통적인 경건주의 신앙을 크게 오염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성령세례, 방언의 은사, 신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전파하려는 그러한 뜨거움보다는 어떤 체험을 위해 몸부림치며, 어떤 은사나 방언을 해야만 참 신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함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은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하고, 그 사람들을 공격하며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아무도 가지지 못한다. 다만 바울처럼 긍정은 하지만 소극적인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바른 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 즉,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단과 신흥 성령운동의 신학 사조에 대한 바른 신학사조에 대판 바른 신학의 보급이 유기적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물질적 축복보다는 신령한 축복에 관심을 갖도록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일 것이다. 진정한 오순절 성령의 참된 역사는 "오직 성령과 더불어" "성경을 가지고"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박재현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이상으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살펴보며 로잔언약의 발전과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로잔 언약에 나타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소위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을 전제로 하며 발전하였다. 즉, 로잔 신학의 근거로서 성서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전제한다. 또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써만 얻어진다는 이신득의 교리를 확인했다. 결국,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확인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티의 영향을 받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혼합주의나 만인구원론의 위험을 배격한다고 로잔 언약은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로잔 운동은 기독인들도 기타 종교들이나 이념들을 바로 이해할 필요도 있고 타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대할 때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척도로 삼아 진리를 판별해야 한다고 입장을 갖는다. 다만 로잔의 입장은 타종교와의 대화도 인정하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해야 하며,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방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로잔에 나타난 복음주의의 선교신학은 복음전도, 또는 세계 복음화를 교회의 최고의 사명이라고 고백한다. 지금처럼 복음이 확장된 것이 전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복음전도의 내용은 반드시 성서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적어도 네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한다고 한다. 먼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중심이 되는 복음의 사건, 둘째는 복음의 증언 즉, 사도들에 의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선포, 세 번째는 복음의 약속, 네번째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복음의 요구 곧, 은혜에 대한 요구라는 요소들을 말한다. 이 복음 전도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바로 예수임을 밝히고 있다. 세 번째로 전 복음에 대한 이해인데, 복음은 통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잔 언약은 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 정치참여 이 두 가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말함으로써 전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견해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과 활동에 기초하는 선교신학을 전개한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삼위 일체적으로 이해함은 선교를 교회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신학적 접근은 선교를 교회의 일로 보던 입장에서 선교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선교의 모든 상황과 전망을 폭넓게 보게 해준다. 이렇게 폭 넓게 이해하는 선교개념은 에큐메니칼 운동권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학적 입장이나 선교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로잔 언약에 나타난 신학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혼도해서는 안된 다고 못 박고 있다. 전도의 우선성을 놓치지 않는 사랑의 봉사가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추구하는 사회참여의 모습이나 복음 주의자들은 봉사는 물론 사회제도나 구조의 개혁을 위해서도 꾸준히 일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로잔 언약에 나타난 복음주의 선교신학이다.
오무일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1964년에 즈음하여 주요 오순절 교단들은 흑인들의 인권 쟁취 추진을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그 해 클리블랜드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인내는 인종 차별과 혐오를 용납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는 "인권"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는 1966년 차별화되어 있던 "유색인들의 모임"을 철폐하고 교단에 속한 흑인 교회들을 교단의 본체로 흡수함으로써 완전한 통합을 이루었다. 감리교회는 아직도 전체가 흑인인 "중앙관할 구역"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에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고 이 일의 진행이 완료되었딘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 오순절주의자들은 실제로 보다 전통적인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의 업적을 능가하였다.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보다 짧은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므로 오순절 단체들이 20세기 인종문제에 관한 요구 사항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국 기독교에 있어서 단 하나의 유력한 인종혼합적 조합으로 시작한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압력에 고개를 숙여야 했고 피부색의 차이로 분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세기 동안 오순절주의자들이 다시 한번 교회의 인종 간 단결을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서 오순절의 성령운동이 성장하는 이유는 한국문화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고대 또는 원시 종교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변형시켰다. 기독교가 불교와 만났고 유교와 만났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흑인신학이 출발했던 조건들과 만난다. 그것은 민족 특유의 고유의 문화와 다른 문화가 만날 때 전적인 수용이 일어나지 않고 거부되거나 의심되어지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발전한다. 흑인신학이 백인들만의 예수를 거부하고 회의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인식해 갔던 것이다. 둘째로, 치열한 경쟁의 도시 사회 속에서 소외하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사회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 가지 문제점들도 야기되었다. 첫째로는 성령을 받은 자는 물질적인 축복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축복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측은히 여긴다. 이것은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에 비교하여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엇이든지 수치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의 경우에도 몇 명 정도 전도되었는지 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수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특정 성령운동 교회의 제도화와 그 교회 지도자의 카리스마화 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교를 기독교에 지나치게 수용함으로써 주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가난했던 한국사회의 이농자들의 안식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 가난과 소외의 조건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복음은 한없이 기복화 되고 세속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가져오는데 일조(一助)했을지 모르지만, 내적인 부분에 많은 부실을 가져왔다. 복음주의가 담고 있는 약점의 일환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는 수단이 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성숙한 기독교인이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상실케 했으며 나아가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다. 또한 기독교가 가지는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흑인신학 역시 복음주의와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런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흑인 특유의 풍부한 감성과 고단했던 그들의 역사는 자칫 현실을 잊고 피안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주의의 감각적 마취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흑인 교회가 극복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21세기 신학에서 '흑인' 은 누구인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 만인가? 오늘날의 세계는 여전히 흑인과 유색인종들과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슬람의 선량한 사람들은 백인 그리스도인들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의 선상에 놓여있다. 안타깝게도 이 권력 행사의 주체는 미국 기독교이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독선적이고 감성적인 그리스도인은 만들어 냈지만, 예수의 정신을 인지하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여전히 타문화와 타종교와 타 인종에 대해 둔감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여전한 그들의 멈추지 않는 성장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안한 미래를 사는 인간의 고독한 자화상과 기복적 개인주의다.
박문기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주님의 최후 명령, 곧 주님의 지상명령은 선교이다. 그리고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 주님의 최후의 명령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북한 선교일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사명이다.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는 짧은 시간에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선교 경험과 전략의 부족으로 부정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국 교회는 북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보여준 허점이나 실수를 거울삼고,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사랑의 선교활동을 기초 삼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힘찬 도약을 해야 한다. 통일선교는 한반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의 구현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선교는 통일의 과정과 방법이 정의롭고 평화적인 것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며 그 결과가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치유와 화해를 넘어 통일한국을 위해 감당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자기 스스로의 개혁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한국 교회는 자신의 치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개혁해야만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구조의 가톨릭처럼 효율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라도 힘을 모아 개별적인 교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아 교회의 일치운동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좀 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신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북한 선교의 환경은 매우 급박하게 변하고 있으며, 방향은 매우 다양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이제는 다양한 북한 선교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변화를 계속 모색해야 할 것이며, 특히 통일 신학의 정립을 통하여 모든 계층과 민족을 화해시키는 이념과 실천적 방안을 부단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의 희년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 사랑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분단의 현실에서 재해석 함으로써 민족의 통일적 신앙과 도덕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에 서서 고통받고 있는 북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보다 더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남한교회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북한에 '교회를 재건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는 둘 다 증요하고 필요한 일들이지만, 무엇보다도 당장 고통받고 있는 북한이 보다 행복한 상황을 맞을 수 있도록 남한교회가 기도하고 고통의 해결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즉,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보다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2002년 배급제를 폐지함으로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여, 이제 시민적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영역까지도 악화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북한주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선교를 보다 폭넓게 시행해야 한다. 교회 내의 물적 자원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북한주민들의 구호와 북한사회의 개발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선교 계획과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원대한 민족 복음화의 계획과 뜻에 동참하고 성취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제는 평화 통일과 북한 선교가 한국 교회의 최대 관심사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야 한다.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할 주체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교회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목표로 삼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회 안과 밖에서의 개혁과 갱신 그리고 부흥으로 나아가 복음의 역량을 확대시켜 민족의 숙원과제인 평화 통일과 교회의 선교과제인 북한 선교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