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동 시베리아 · 극동지역 TSR 및 BAM 주변의 자원 개발문제

        김용화 ( Ким Ён Хва ),김자영 ( Ким Чжа Ён )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08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2 No.2

        시베리아 철도와 바이칼-아무르 간선이 한반도 철도와 연결될 경우 남북한 및 러시아의 트라이앵글 무역지대의 경제적 효과가 클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시베리아 철도와 바이칼-아무르 간선이 지나가는 지역은 러시아의 동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이르쿠츠크와 치타, 아무르, 유태인 자치주 및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변강주, 부랴트 공화국과 사하 공화국(야쿠티야)이 들어간다. 이 지역은 인프라가 제대로 건설되어 있지 않거나 낙후되어 있지만 거대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곳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전 러시아 경제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러시아 중앙정부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르쿠츠크는 러시아 연방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많이 매장된 곳 중 하나다(1996년 자료): 석유 - 2억6천1백6십만 톤, 헬륨 - 1억6천만 톤, 천연가스 - 8억7천만 톤, 석탄 - 75억 톤, 철광석 - 20억톤, 니오브는 러시아 전체 매장량의 65%가 탄탈은 45%가 묻혀 있기도 하다. 부랴트 공화국은 텅스텐과 금, 석면, 석탄 등의 거대 산지이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이곳의 석탄산지는 매장량이 24억톤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치타 자치주는 우라늄과 각종 금속, 연료에너지 자원, 산림화학 자원, 건설자재 용 광석 등이 매장되어 있고 세계 최대 우라늄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야쿠티야 역시 다이아몬드와 금, 철광석, 천연가스 및 석유, 주석, 갈탄 등의 산지이다. 특히 이곳에는 유명한 다이아몬드 산지인 ‘우다치나야', ‘미르', ‘아이할'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다른 천연자원의 유명 산지가 위치하고 있다. 아무르 지방 역시 유용광물의 거대 산지이다. 광물퇴적 지층과 금, 은, 티타늄, 구리, 주석 등 희귀광물들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석유와 가스 역시 묻혀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태인 자치주에는 석탄(우슈문스크, 비르스크 산지)과 철, 주석, 금, 활석, 흑연의 거대산지가 있다. 이외에도 건설 및 인테리어용 내장재에 사용되는 각종 원자재들의 산지가 114개나 된다. 하바로프스크 지방은 점결탄과 갈탄, 주석, 은, 인듐, 비스무트, 구리 등으로 유명하다. 연해주 지방 역시 연료에너지 및 광물연료 자원이 풍부하게 묻혀있다. 석탄의 경우 24억 톤의 총량을 가진 산지가 약 100여개가 있다. 30여개의 유명 산지는 주석산지이다. 전 세계가 원하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지역은 소련시절의 문제점이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비합리적인 경제구조와 설비의 노후, 산업투자액의 부족, 느린 교통인프라의 발전속도, 지역의 노동인구 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 지역의 땅 속에 묻힌 자원은 겨우 30% 정도만이 사용되고 있을 뿐으로 석유·가스 등 에너지자원을 효율적으로 채굴하고 가공하여 상업화 할 수 있는 경제종합단지를 건설함으로써 전체적인 구조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지역경제 및 러시아 전체경제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현재 동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에 석유·가스 콤플렉스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콤플렉스가 건설된다면 이는 결국 시베리아 철도 및 바이칼-아무르 간선이 지나가는 지역이 되어 서로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석유·가스 콤플렉스를 건설하는 데는 거대한 투자와 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에 부족한 부분이다. 따라서 동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발전은 무엇보다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중에서 특히 한국과의 긴밀한 관계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은 세계 12위권 내에 드는 경제대국일 뿐만 아니라, 기계설비 관련 수출과 원자재의 수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입물량 중 원자재와 연료에너지의 비율은 이미 절반을 넘어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국가 10위권 안에 든다. 한국의 석유 수요량은 전세계 에너지 수요의 2.1%인 2억2천5백만 톤에 달한다. 국민 1인당 에너지 수요량은 4,651kg으로 이는 전 세계 1인당 에너지 수요량의 평균수치보다 2.9배가량 높은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에너지 수요를 충당하고 앞으로의 에너지 자원 안정을 주요목표로 삼아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으며, 현재도 거의 대부분의 에너지 자원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한국은 대부분의 에너지를 페르시아 만의 국가와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하고 있으나 중동과 한국간의 외교적 불안정 때문에 또 다른 공급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리적 인접성에 있어서도 동 시베리아와 극동은 한국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난 2005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나온 푸틴 전 대통령의 말처럼 한국-러시아-북한은 에너지와 교통 문제에 있어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경제적 협력관계는 점차 정치적, 외교적 안정을 불러올 것이고 이는 한반도에 대한 해외의 신임도를 높일 것이다. 얼마 전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남부 야쿠티야와 한국간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맺은 만큼 앞으로 양국 간의 빠른 관계발전을 기대해 볼만하다. Соединение Трансиба с БАМом даст положительное экономическое влияние Восточной Сибири и Дальнему Востоку - Иркутской, Читинской, Амурской, Еврейскойавтономнойобластям, Хабаровскому и Приморскому краям, Республикам Бурятии и Саха(Якутии). Не смотря на то, что эти регионы имеют огромную массу ресурсов, их экономическая ситуация плохая из-за неразумной структруры региональной экономики, недостаток трансинфраструктруры, трудовых русурсов и инвестиции и др.. Их экономическое развитие является очень важным не только для тех регионов, но и всей России. Если будет нефтегазовой комплекс в этой территориальной зоне, то это даст большой экономический эффект и Восточной Сиьири, Дальнему Востоку и всей России. Для этого требуются, в первую очередь, человеческая сила труда и инвесцития. А этого в России не хватает. В связи с этим России нужно многосторонное сотрудничесво с Востоной Азией, в том числе с РК. В Корее доля машностроения(материалоемкие, наукоемкие) увеличивается быстро. В структуре импорта основное место занимают промышленное обороудование, сырье и продовольственные товары. Значительная часть промышленных материалов и топлива - 41%. Удельный вес сырья и топлива превышает половину импорта. Это предопределяет высокую зависимость Кореи от колебаний цен на сырьевые товары. До сих пор Корея импортирует энергоресурсы в основном из Ближнего Востока и Юго-Восточной Азии. Для будущей стабильности спроса энергоресурсов надо увеличить сотрудничесво с Россией. По Путину, более близкое сотрудничество между странами Россия, РК и КНДР даст синергию эффект всем этим трем странам. Вследствие этого действительно будет расти доверие РК в мире.

      • KCI등재

        사할린 한인의 가족제도의 특징

        박승의 ( Пак Сын Ы )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12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6 No.2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이다. 혼인을 통해 가족이 구성되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가정은 성장한다. 가족은 경제 단위인 동시에 심리적 안정을 위한 안식처 역할을 한다. 모든 사회에서 가족이 존재하지만 그 의미나 성격은 사회마다 다르다. 또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가족의 의미는 재해석되고 재규정된다. 유교의 도덕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2가지 덕목이 군주와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가리킨다. 충과 효의 동일성은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와 집권적 정치체제 내에서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가 같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일상적인 가정생활 속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자세가 길러지면 자연히 관료가 되어서도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자세가 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가족이론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가족은 상당히 독특한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광복 이후에는 유교 전통과 급격히 단절 되면서 전통 유교적 가족제도가 일시에 붕괴됐다. 1970년대 이후에는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중심의 공동체적 가족문화가 도시 중심의 핵가족 문화로 급격하게 전환됐다. 현재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기러기 아빠로 대변되는 이산가족, 세계 최고를 기록하는 이혼율,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등은 더 분화된 핵가족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가족의 모습 속에 아직도 전통의 공동체적 모습이 잔존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빠른 근대화의 진척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아직도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직계가족 중심의 배타적 가족주의가 아직도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문화는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가 뒤섞여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가족의 형태는 근대 혼인가족을 벗어나 다양해지고 있다. 한 부모 가족, 재혼가족, 동거ㆍ사실혼가족, 동성커플, 다문화가족 등의 증가는 우리 사회에 이른바 ‘정상가족’의 범주 외에 다양한 가족이 존재함을 사회적으로 가시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가족 관련 법제는 '법률혼'과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을 기본 모델로 하고 있어, 정상가족의 범주 외에 존재하는 가족을 둘러싼 법적 문제를 다루는데 한계가 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의 출현과 증가는 우리에게 기존의 가족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개념을 재구성할 것인지, 국가와 가족의 관계 맺기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입체적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한인의 가족관계 한국의 가족생활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한국가족의 특징을 이해한다면 가족생활이 좀 수월할 수 있으며,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족문화는 각 가정마다 차이가 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한국가족문화는 유교문화권 국가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가족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가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 못지않게 가족 간의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족 내 위, 아래의 순위와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가정에서는 부모, 조부모, 친척 중 웃어른을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 부모-자녀 관계가 특별하다. 한국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편이다. 때로는 이러한 사랑이 지나쳐서 자녀를 의존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다. 효도란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노후에 편히 지내시도록 잘 모시는 것을 말한다. 부부간의 관계도 좋아야 하지만, 가족 내에서 자녀로서의 역할,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 집안 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자의 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자들도 집안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아내에게 애정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다. 특히 부모님이나 가족들 앞에서 아내에 대한 칭찬이나 애정표현은 못난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조심하는 편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의 경우 우선적으로 문화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중요하다. 한국의 가족생활 문화가 고국과 다른 부분이 있어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권한다. 서로의 가족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배우자나 배우자의 부모에게 가족 전통을 물어보기, 그 집안 문화를 존중하고 우선 따라 해보기, 가족생활에서 힘든 부분은 대화하여 해결하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기 등이다.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 구성은 기본적으로 직계가족이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기의 한인들은 가능하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만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점차 러시아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지금은 국제결혼이 일반화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친족관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친족관계가 양면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Если проследить жизненный путь корейца с самого рождения и до смерти, то можно заметить, что он живёт по законам конфуцианства. Взаимоотношения в семье, обществе и государстве основаны на конфуцианской ид еологии. Основополагающей идеей в морально-этических воззрениях этого учения является мысль о трёх началах и пяти нормах человеческих отношений - самган орюн. Конфуцианство считало важным сосредоточить внимание на образовании и воспитании, соблюдении правил пове дения и нравственности. Во все времена корейцы покло нялись чувству долга и самовоспитанию и самообразова нию и при возникновении опасности для родины проя вляли патриотизм и самопожертвование. В корейских се мьях всегда существовали родительская любовь и почти тельное отношение к родителям. Это давало возможность корейцу выбрать самый правильный путь в нравствен ном воспитании подрастающего поколения. Представляет ся, что самым главным критерием в этом деле являет ся личный пример самих родителей. Из поколения в поколение передавалась одна из главных национальных черт корейского народа - стремление дать детям обра зование при любых условиях, где бы они ни находились. Большое внимание уделялось трудовому воспитанию, под держанию строгой дисциплины. Первые корейцы попали на Северный Сахалин в го ды, когда остров был каторгой1) . Ежедневный труд их был борьбой за выживание. Корейские переселенцы были малограмотны, и им было особенно трудно на чужой зем ле. Дети наравне с взрослыми учились преодолевать труд ности. На Карафуто2) корейцы были насильно завезены в конце 30-х годов XX века преимущественно из южной части Кореи. Это были молодые крестьяне, у которых имелось начальное образование, да и то не у всех. У се бя на родине они трудились на клочке земли от зари до зари, чтобы, вырастив скудный урожай, отдать большую долю японцу - хозяину земли. Образование для них бы ло несбыточной мечтой. И их дети - 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 цы второго поколения с молоком матери впитали ту мора ль, по которой жили их предки: трудолюбие, взаимовы ручку и сыновнюю почтительность не только к своим родителям, но и ко всем старшим по возрасту. К сожалению, у нынешних детей - сахалинских корей цев третьего-четвертого поколений во многом тот корень, стержень, который передавался от предков к потомкам, начинает разрушаться. Не зная языка и культуру родит елей, воспитываясь в совершенно другом культурном прос транстве, становятся невосприимчивы к тем ценностям, которые проповедовали предки на исторической родине и на Сахалине. Но это не значит, что корейские дети на Сахалине совершенно лишены чувства сыновней почти тельности хё. Несмотря на то, что не у кого стало учить ся традиционным нормам поведения, они как бы бессоз нательно следуют тем принципам уважения к старшим людям, которые им передали предки вместе с кровью и генами.

      • KCI등재

        우랄 지역의 고려인 커뮤니티와 한국학 연구, 1991-2003

        송준서 ( Song Joon-seo )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04 한국시베리아연구 Vol.7 No.-

        소련방이 붕괴한 이후 우랄 지역 고려인 커뮤니티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커뮤니티 규모의 확대와 한국학의 발전이 그 주요 변화 이다. 우랄 지역 고려인 커뮤니티는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극동지방이 나 모스크바, 쌍뜨뻬쩨르부르그 등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 그 동안 우리의 관심이 적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중앙아시아로부터 보다 나은 경제 여건을 찾아 우랄 지방으로 들어오는 고려인 들이 급증해 기존의 이 지역 고려인 커뮤니티가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족의 이주도 증가하여 이 지역 한인 커뮤니티는 점차 다양성을 더해가고 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주한 고려 인들은 조선족들에 비해 러시아어도 능통하고 러시아화된 생활 습관 및 의식 등 기존의 고려인 커뮤니티와 공유점이 많아 융합이 잘 되고 있는 편이지만, 조선족들의 경우 언어, 생활 배경 등의 상이점으로 인해 고려인 커뮤니티와는 큰 교류가 없는 상황이다. 한국학의 태동 및 발전은 소련방 체제의 몰락이후 우랄 지역 고려인 커뮤니티가 겪고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이다. 러시아내 여타 지역의 주요 고려인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말 90년대 초반 당 시 소련내의 소수민족 독립운동과 한-러 외교관계 수립에 영향받은 우랄 지역 고려인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시기 동안 잊혀졌던 민족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1991-93년 사이 예까쩨린부르그, 첼야빈스크 등지에 고려인 협회들이 결성되어 한국 문화, 풍습을 함께 모여 기리기 시작했다. 또한 첼야빈스크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고려인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이 시작되고, 예까쩨린부르그에서는 2001년부터 우랄국립대학교에 서 한국어 강의가 시작되었으며, 2002년에는 우랄 지역 최초로 대학교 에 한국문화센터가 문을 열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고려인 커뮤니티 가 거의 형성되어있지 않은 마그니또고르스크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러시아인 교수에 의해 한국미술사와 한국문화 전반이 러시아 대학생들 에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쌍뜨뻬쩨르부르그, 중앙아시아 등 한국학 연구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인력을 지닌 지역에 비하면 우랄 지역의 한국학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에 있다 하겠다. 우랄 지역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 한국학 입문의 기본 요건인 한국어를 가르칠 교사가 없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문화, 역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 고려인 세대나 러시아 학생들의 호기심을 유인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자극할 수 있는 한국학 관련 자료가 극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은 우랄 지역 내에 서로 연관 없이 흩어져 있는 한국 학 연구 관련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학 연구의 성과에 대한 토론은 물론 자료, 정보, 그리고 인력을 교환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우랄 지역 고려인 커뮤니티에 대해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은 기존의 고려인 커뮤니티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주한 고려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문화, 언어, 생활환경의 차이로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 커뮤니티와 고려인 커뮤니티와의 관계 도 이 지역 고려인 커뮤니티의 성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수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changes that Korean communities in the Urals have experienced during the first decade after the Soviet Union collapsed. The most prominent changes in the communities were a demographic expansion caused by the migration of Russian-Koreans from Central Asia from the early and mid 1990s and the rise of Korean studies prompted by the awakening of ethnic identity among Russian-Koreans, especially the older generation. Unfortunately, such noticeable changes in Korean communities in the Urals have received little attention until now, because of their relatively small size, compared to those in Central Asia, Moscow, St. Petersburg, and the Far East. A lack of prominent Korean studies programs in the Ural region has also contributed to our negligence of Korean communities in this region. My research shows that Korean communities in the Urals have gradually changed during the last decade. The size of the communities has doubled and become more diverse and heterogeneous due to the increasing number of both Russian-Koreans from Central Asia and Chinese-Koreans from China, the former seeking a more stable life in the booming Russian economy and the latter drawn to Russia's businesses in market. Thus, the Korean communities in the region can now be categorized by three major groups: firstly, second and third generations of Russian-Koreans who were sent to the Urals as factory workers by the Stalin regime during World War II and those who moved onto receive a higher education mainly from Central Asia after the mid 1950s; secondly, "new" Russian-Koreans who migrated from Central Asia after the collapse of the Soviet system; and thirdly, the Chinese-Koreans, who recently migrated from China. My research indicates that Koreans from Central Asia who share the same Russified (and Sovietized) culture and language with the Russian-Koreans in the Urals have successfully integrated into the Ural Korean communities. In contrast, the Chinese-Koreans who do not speak Russian fluently and have heterogeneous, non-Russian culture have not developed strong relationships with Russian-Korean communities in the region. The separation--intentional or unintentional--of these Chinese-Koreans from Russian-Korean communities has resulted in their involvement in small religious meetings led by South Korean missionaries. The rise of Korean studies is another key change in the communities. Provoked both by nationalist movement of the non-Russian nationalities in the late 1980s and by the establishment of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Russian and South Korean governments in the early 1990s, some local Russian-Korean elites sought to reconstruct their own ethnic identities by creating Korean studies programs. In major cities in the Urals, like Ekaterinburg and Cheliabinsk, Korean Culture Centers were opened by the efforts of the local Korean elites in the late 1990s and early 2000s. Also, Ekaterinburg State University, a major university in the Urals, started Korean language courses in 2001. In addition to the local Russian-Korean elites, some Russian scholars and students have also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studies in the region. For example, in Magnitogorsk, Korean art history and culture have been taught in a university by a local Russian Koreanist. Yet, despite the recent rise of Korean studies, it is still in the beginning stage. No institutes in the Urals offer a comprehensive Korean studies program that includes language, literature, history, and politics and economy, etc. Further, a lack of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such as language teachers and published materials on Korean studies are key obstacles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studies in this region. My research suggests that given conditions, the most effective way to promote Korean studies in this region is to organize regular meetings among the regional Koreanists. Further studies on the relationship among three groups in Korean communities will provide us with more nuanced understandings of the complicated nature of Korean communities in the Urals.

      • KCI등재

        시베리아에 있어서 몽골·한국의 경제협력의 과제

        이효선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06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0 No.-

        1990년 이후 체제전환과 개혁·개방을 추진한 몽골경제는 제2기 체제전환국가 중 가장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몽골경제는 또한 광대한 영토에 비해 적은 규모의 인구와 경제력, 내륙국가라는 지정학적 위치, 세계 10대 자원 부국, 재정과 경상수지 등의 적자 지속, 대외의존형 경제, 수준 높은 인적자원 보유, 시장경제 경험 일천, 유목사회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역시 1990년 수교 이후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2006년 5월 7~10일 이루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국빈방문은 양국 관계를 한 단계 격상, 성공적인 에너지 및 자원 외교 차원에서 큰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전략광물 및 자원 확보와 플랜트산업의 해외동반진출, 상호 공동이익 추구 등의 면에서 다양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유, 가스를 비롯한 러시아 천연 광물자원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시베리아 지역에 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몽골은 한국을 전통적으로 ‘솔롱고스(무지개 또는 어머니)의 나라’로 인정해온 데다가 동북아 경제협력의 주요 파트너로 인식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경험 때문에 몽골 국민들의 일반정서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예속을 경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일본과 한국이 그 대안으로서 주요 파트너로 떠오르나 지리적 근접성과 친밀감 등을 이유로 한국을 더 선호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써 몽골은 체제전환과 대외개방 직후 최초로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몽골은 또 한국을 자국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아 한국과의 협력관계 확대를 중요한 외교목표로 설정하고 관계증진에 적극적이다. 게다가 몽골에는 한류 열풍(한국어 열기, 한국대학 유학 인기)이 지속되고 있고 또 몽골인에게 한국은 기회와 희망의 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대통령의 몽골 방문은 자원 및 에너지 외교의 강화와 한·몽 관계의 획기적 개선으로 요약할 수 있고 또 큰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계가 에너지와 전략광물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세계 10대 자원 부국인 몽골과의 관계 개선은 그만큼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번 몽골 방문을 통한 정상외교에서 더욱 값진 것은 ‘자원 확보와 플랜트 산업의 해외 동반진출’이라는 정부의 자원개발전략이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몽골 오유톨고이 구리광산 공동사업은 인도의 철광석·제철소(2005년 6월)와 나이지리아의 유전·가스 발전소(2006년 3월)에 이은 것이다. 경제성 있는 대형 유망광구 확보가 날로 어려운 여건에서 자원개발과 플랜트 사업의 동반진출을 추진함으로써 해외자원개발 촉진과 에너지·플랜트 해외 수출 양측의 이익과 시너지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의 풍부한 자원과 한국의 자본 기술이 결합하여 공동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는 점도 큰 의미를 가진다. 세계의 에너지 및 광물 자원개발 외교에 적극 동참하고 더 나아가 안정적인 원자재 확보를 위해서는 정상외교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시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EDCF 지원의 규모 확대 못지않게 공적개발원조(ODA)의 내실화도 중요하다. 지원하는 우리의 입장과 의도도 중요하지만 몽골과 같은 수원국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이 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몽골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의 개발경험 전수 역시 개도국에는 매력적인 수출상품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 개도국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개발경험 전수 프로그램’을 체계화하고 확대·운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세계 대륙의 10분의 1을 점유하고 있으며,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처녀지, 자원의 보고지역이며 과학의 기술 그리고 자연에 살아 숨 쉬는 시베리아·극동 지역의 잠재력은 21세기 들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90년 한. 러 수교이후 다소의 질곡도 있었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분야의 보다 많은 교류 협력이 기대된다. Mongolia has traditionally regarded Korea as rainbow country and furthermore established friendly relationships to be main Korean partner for economic cooperation in the northeastern Asia. In general the Mongolian has been on the alert about political and economic subordination to China and Russia owing to its geopolitical situation and historical experiences. Therefore Japan and Korea has been emerging as Mongolian main partner but the Mongolian prefer Korea to Japan because of its geographical vicinity and familarity. For example Mongolia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hips with Korea firstly since the transformation of political system and open economy. Mongolia also fixes Korea as the model of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expansion of cooperation with Korea is the most important diplomatic policy. Meanwhile there are 'Hanryu passion' - the Korean language passion and going to Korea for study. Korea was regarded the land of opportunity and dream to the Mongolian. In this kind of friendly ambience the president's visiting to Mongolia will reinforce resources and energy diplomacy and improve diplomatic relationships between Korea and Mongolia. As we know, all of the nations are infinitely competing for another to secure energy and other strategic mineral resources. And therefore the improvement of relationships with Mongolia which is the tenth resource reserving country in the world is very important. This summit diplomacy will be estimated more valuable in that it strengthen the Korean government resource development strategy, 'resource securement and branching out abroad of plant industry'. A joint enterprise of Oyutolgoui copper mine in Mongolia followed a iron ore and steel mill in India(2005. 6) and oil and gas power plant in Nigeria(2006. 3). In the midst of needy circumstances of securing large prospecting mine lots, the co-branching out abroad in resources development and joint plant enterprises area are expected to expedite foreign resources development and incur mutual gains and synergy effects in the energy and plant export. And it is very significant that two countries can seek to mutual gains by way of combining abundant resources of Mongolia and capital and technology of Korea. Some practical policies to back up summit diplomacy should be established in order to participate in energy and mineral resources development diplomacy and secure raw material stably. And it is very important to enlarge the EDCF support and enrich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ODA). Though our supporting situation and purpose is important, it is also very important to set up proper direction to help Mongolia. Also in Mongolia Korea's economic development experiences is attractive export commodity.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systematize and expand the transmission program of Korea's economic development experiences for the world developing countries. There can be no two opinions on this matter that the potential of Siberia and the far eastern area which occupy a tenth of world continent and last virgin land and resources treasury and high level of science, technology and nature will emit new light for the world in 21th century. Although there were some shackles since the treaty of amity between Korea and Russia in 1990, lots of mutual exchange and cooperation in all areas including political,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ones is expected.

      • KCI등재

        신라어 규칙 1 : 반도한국어 조어 -*t- > 신라어 -r- /_V, 그리고 고구려어 형태 및 알타이제어와의 연관성

        시미즈기요시 ( Kiyoshi Shimizu )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08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2 No.2

        이 연구에서 우리는 신라어에서 중간에 있는 -t- 가 -r-로 변하는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 법칙을 통해 볼 때, 많은 경우에 있어서 현대 한국어 -r- 은 현대 일본어 -t- 와 대응하고 있으며(A 집단), 현대 일본어는 그 직접적인 조상인 고구려어나 혹은 고조선어를 넘어서 한국어 조어(proto-Korean)인 -t- 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B 집단 경우의 약 1/3에 있어서 이 관계는 뒤바뀌게 되는데, 즉 한국어 -t- 가 일본어 -r- 과 대응하게 된다. 이것은 -r- 을 갖고 있는 신라어 형태 역시 문어체 형태로 열도 지역에 들어갔으며, 또한 한국어 조어 -*t- 가 구어체 형태로 유입된 고구려어 형태를 거쳐 -t- 로 보존돼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C 집단의 몇몇 경우에 있어서 -r- 과 -t- 양자는 한국어에서 표준어 형태 다음으로 우리는 한국어 어원사전 파일에서 발견된 62개 친족어의 어원을 찾기 위해 우리의 연구작업 리스트인 “알타이어 어근 500+”와 “고구려어 어근 100+”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거기에서 62개 어근 중 50개를 찾아내었고, 다음은 그것을 요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Table 2 에 있는 50개 어근은 두 개의 다른 집단으로 나뉘어 다뤄져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논문은 알타이 조어(proto-Altaic) 어원으로 두 번째 자음에 -*t/d- 를 갖고 있는 25개의 어근에 집중하고 있다. 원래 자음이 -*t- 혹은 -*d- 이므로, -r- 을 갖고 있는 형태들은 변화된 형태임에 틀림없으며, 그 법칙은 한국어 조어(proto-Korean) *t/d- ( > 반도 한국어 조어(proto Peninslar Korean) *t-) > 신라어 -r- 이어야 한다. 그렇게 변화의 방향은 결정되었고, 이제 문제는 변화가 일어난 시점이다. 통계학적 이유를 고려하면, 우리는 그 변화가 반도 한국인의 역사시대 초기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신라어에서 -r- 을 갖고 있는 변화된 형태들이 또한 나중에 열도 한국인에게로 넘어갔던 것이다. 알타이어 어원으로 C²(두번째 자음)에 -*t/d- 를 갖고 있는 한국어 어근의 실례들을 보면, 첫 번째 유성대응이 사라지고 이 -*t/d- 가 반도 한국어에서 단독적인 -*t- 가 되고 있다. In this study we present a rule that an inter-vocalic -tchanged to -r- in Silla language. Through this rule the Modern Korean -r- corresponds to the Modern Japanese -t- in many items (Group A), the latter having kept the proto-Korean -tover its direct ancestor the Koguryo language, or over Old Chosun language. But in about a third of the cases(Group B), this relation is reversed, that is Korean -t- corresponds to Japanese -r-, indicating that Silla language forms with -r- also entered the Insular Area as written forms and that Silla language has also retained proto-Korean -*t- as -t- through the inflow of the Koguryo forms in its spoken forms. In a few items (Group C) both -r- and -t- forms are found in Korean, both as standard forms or one in oral, dialectal forms. Next we searched our list of "Altaic roots 500+" and of "Over 100 Koguryo roots" for the possible origin of the 62 cognates found in the Korean etymological dictionary file. As a result 51 of the 62 roots have been found there, with the details as summarized below. As a result it became clear that we have to deal with the 51 roots in Table 2 in two different groups. This paper is devoted to those 25 roots with the second consonant of proto-Altaic -*t/d- origin. Since the original consonant is -*t- or -*d- the forms with -r- must be considered as changed forms, and the rule should be proto- Korean *t/d- ( > proto Peninslar Korean *t-) > Silla -r-. Thus the direction of change having been determined, it is now the time point at which this change took place. For statistical reason we consider that the change occurred early in the history of Peninsular Korean, that is in Silla language, from which the changed forms with -r- later went into Insular Korean, too. In the examples of Korean roots with the C² of Altaic -*t/d- origin, first the voice contrast is lost and this -*t/d- becomes one single -*t- in Peninsular Korean.

      • KCI등재후보

        러시아에서의 한국 문화 수용 현황 연구

        이지연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09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3 No.2

        This report investigates how Korean culture was embraced in Russia after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in the context of cultural differentiation of Post-Soviet Russia. Especially, this report analyzes what made possible the wide spread of Korean home appliance, automobile, and IT industry goods, which were the most influencing in the formation of national brand image of Korea in Russia, based on Russian people's propensity to consume and economic condition and furthermore, traces the following infiltration process of cultural products including Korean movies into the Russian popular culture. Korean culture accepted in Russia after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is dominated by economic factors rather than exchange of cultural products itself, so it was visible mainly in the field of life culture or pop culture rather than high culture. In this period the process of recognition of Korea by Russians was not other than the process of acceptance of Korean products such as home electronics goods, computer, cellular phone and automobile. Korean cultural products could take root in Russia in the result of enhancement of Korea's national image in the economic and industrial aspects. This report investigates such specificities in the acceptance of Korean culture by Russians, focusing on three cultural fields - electronic goods, "digital Korean wave" and Korean movies and also diagnoses the perspectives and strategies for promoting the acceptance of Korean culture in Russia in the cultural and psychological context of Russians. 이 논문에서는 수교 이후 러시아에서 한국문화가 수용되는 방식을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고찰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러시아에서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이미지 형성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분야라 할 수 있는 가전제품 및 자동차, IT산업의 상품 파급의 과정을 러시아인들의 소비성향과 경제 상황을 바탕으로 분석하며, 더 나아가 러시아 대중문화의 새로운 흐름 속에서 한국 영화를 비롯한 문화상품들이 문화 층위 속으로 침투해 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러시아의 경우 수교 이전 한국과의 문화교류는 전적으로 북한문화로 한정되어 있었다. 철의 장막을 통과할 정도의 남한 문화란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수교 이후 러시아에 수용된 한국문화는 문화 자체의 교류라기보다 경제적 교류의 결과 수반된 현상이 주를 이루며, 따라서 고급예술문화보다는 생활문화, 또는 일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보다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수교 이후 러시아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인식하는 과정은 한국의 상품이 인정받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로 TV나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 컴퓨터, 핸드폰, 자동차 관련 한국 제품이 러시아 시장에서 얻은 인기는 ‘경제ㆍ산업적 측면에서의 한류’로 비유될 만하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상품은 이러한 경제적 산업적 측면을 통한 한국의 국가 이미지 개선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러시아 내 한국문화 수용 과정의 특수성을 러시아에서의 전자제품, 자동차 및 디지털 한류,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러시아 내에서의 한국문화 수용 촉진을 위한 정책적 방향과 발전전략을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심리적 콘텍스트 속에서 진단한다.

      • KCI등재

        러시아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개별작품의 수용 사례 분석

        엄순천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06 한국시베리아연구 Vol.9 No.-

        본 논문에서는 러시아에 번역, 소개된 한국작가와 문학 작품 중 출판부수, 판매부수, 언론 보도의 내용 및 게재 횟수 등에서 두드러진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러시아에서 한국문학이 성공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러시아에서 출판부수가 가장 많은 작품은 고전문학인데 그 중「춘향전」이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 1950년을 전후하여 2000년까지 러시아 언론 매체에 보도된 한국문학 관련 기사는 모두 128편으로 이기영과 관련된 기사가 전체 기사의 12%에 해당하는 18편으로 제일 많다. 한국작가 중 이기영이 특히 러시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원인은 당시 러시아와 북한은 문학을 비롯하여 사회-정치, 경제적으로 긴밀한 연결 체계 속에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원칙을 표방하는 이기영이 당시 북한문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동양문학선 12호』(1958)에 김소월의 시가 번역 소개되었으며,『김소월 시집』(1962)이 번역, 출판되었다. 1970년대는 김소월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임과 동시에 러시아 한국문학의 전성기이다. 러시아에서 우리나라의 순수문학에 대한 번역과 연구가 금기시 되던 시기에도 김소월이 꾸준히 번역, 연구된 것은 김소월이 한국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로서 민족적, 민중적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러시아의 대형 온-라인 서점 망에서 한국문학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러시아 한국문학 수용이 보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형 출판사를 통한 조직적인 출판-홍보 체계의 구축, 러시아 언론을 통한 한국문학의 홍보, 기관이나 정부의 지속적인 번역 지원 정책의 입안, 그리고 ‘한국문학의 밤’이나 ‘한국 작가들과의 만남의 장’ 등 대중적인 관심을 촉발시킬 수 있는 다양한 문학 행사 등을 개최할 필요가 있다. The history of a translation Korean literature's in Russia already 110 years, there has been 139 individual volumes of translated Korean literature published in Russia, and the <Bibliography of Korean Literature in Russia Versions> had been completed for individual 3,245 works included in these individual volumes. When individual 139 books are classified into the time, classical literature has been translated the most, above all 「Chunhyang Jon」. Specialists mainly conducted research in the wok, because they thinked 「Chunhyang Jon」is typical work of the realism in Korean literature. It was the 1950s that the press report on Koran literature was most published. In 1950s, a total of 104 articles were published, which accounts for 80 percent of the total articles. But press reports were thoroughly based on North Korea, Lee Gi Young or literary circles of North Korea being mostly introduced. Also, Kim CoWol is steadily translated and researched in Russia. Half century has already passed since Russian translation on Korean literature developed systematically on academic grounds, but it is no more than 10 years that literature of South Korea began to attract public attention in Russia. Though the literature of South Korea have been translated and introduced theses related to the literature of South Korea published from the beginning of the 1990s, but they are not being conducted widely and actively.

      • KCI등재후보

        이르쿠츠크 고려인의 한민족 정체성과 한국에 대한 인식: 설문조사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이영형,김정훈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15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9 No.1

        This article is intended for conducting a research on the actual condition. In this article, I analyze the contents of survey which has been conducted on the 33 target Korean Russians who reside in Irkutsk and discover the actual condition and identity of Korean Russians. I also identify: life environment of Korean Russians who reside in Irkutsk; their awareness of the organizations of Korean Russians; their awareness of identity and traditional culture of Korean Russians; and type of relations with Korea and level of their expectation on Korea. Most of Koryosaram in Irkutsk consist of those from Sakhalin and Central Asia and are divided into two groups based on the their hometown of them. They show signs of regionalism and broke their coalition. Besides, second and third-generation Korean Russians move gradually farther away from the identity of Korean race. Notwithstanding, a number of Koryosaram in that area have positive thoughts on Korea (government). Koryosaram in Irkutsk show how much they adopt Korean language and culture and hope that Korean government and companies enter into that area. Also, they give their message about the policy on overseas Koreans of Korean government. They are requesting Korean government to carry out its policy on overseas Koreans in the direction that it continues to maintain its taking care of them. They also ask Korean government to develop and promote various support projects from the viewpoint of consumers. 본 글의 목적은 이르쿠츠크 거주 고려인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한민족 정체성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밝히는 것으로 한다. 이르쿠츠크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33인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와 현지 방문조사를 통해 고려인의 생활환경과 고려인 조직체에 대한 현지 고려인들의 한민족사회에 대한 인식, 고려인들의 한민족 정체성과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 유형과 한국에 대한 기대 수준 등을 밝힌다. 이르쿠츠크 고려인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 양분되고 있다. 이르쿠츠크 고려인 사회는 다수가 사할린과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고려인 사회 내에서 중앙아시아 출신과 사할린 출신으로 분열되는 지역주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 고려인 2-3세대가 한민족 정체성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고려인들의 다수가 한국(정부)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르쿠츠크 고려인들이 한국 언어 및 문화를 수용하고 있는 정도와 한국정부 및 기업체의 현지 진출을 희망하는 정도를 밝힌다. 이와 함께, 한국정부의 재외동포정책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지속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재외동포 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문하고 있으며, 한국의 재외동포재단이 실시하고 있는 각종 지원사업 등을 수요자 관점에서 개발 및 홍보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 KCI등재

        한류의 현주소와 한류 상품 수출 방안 연구: 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구소련의 독립국가연합) 국가에서 ‘MD’ 수출 중심으로

        양정훈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19 한국시베리아연구 Vol.23 No.2

        The Korean Wave (Hallyu) is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cultural phenomena that have occurred since the spread of the Internet around the world. The impact and speed of a new culture that arose simultaneously with the spread of smartphones were strong and high respectively, compared with the existing culture. This environment was created when the Korean Wave emerged popularly. War, the Olympics, the World Cup, etc. - each of all these things is an event planned or intended by someone, but the Korean Wave was not. The Korean Wave culture created amid the changing times has naturally won the hearts of people around the world. It has enhanced the likeability of Korea as perceived by global peopl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positive response rate indicating that Korea is an ‘economically advanced country’, an ‘IT powerhouse’, or a ‘likeable country’ has come to account for about 60% of the total responses. These phenomena are the results of the expansion of the influence of ‘K-Pop’ being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among the various kinds of contents representing Korea. The Korean Wave was already evaluated as successful enough to be classified as being in the ‘mature’ or ‘growing’ stage in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in 2011 although such evaluation may vary slightly according to the country. It is also very encouraging to see that Korean contents which may be somewhat unfamiliar to them due to their different religion, customs and values are being accepted without much disapproval. The effect of the spread of the Korean Wave has been found to be much higher than its usual effect thanks to its ripple effect on the national economic growth and Korean people’s social and cultural pride. Even its value-added synergy effects have been created due to the butterfly effect during its movement through different media channels and mass communications. The effect of the Korean Wave which began in movies and dramas has spread, thus resulting in the rapid growth of demand for other various kinds of contents, such as K-Pop, fashion, beauty, medical service, learning the Korean language, studying in Korea, and traveling to Korea. In order to continue this stream in such a way as secure greater competitiveness, it is necessary to induce the development of new Korean Wave contents. In other words, it is desired that the Korean Wave should be made to settle as a new breakthrough for economic growth through harmonious linkage of three elements – active participation and investment by the entertainment companies which have contributed to the emergence of the Korean Wave and the government-level diplomatic responses. In addition, it is hoped that the Korean Wave will enhance Korea’s political reliability with many other countries in the world, thereby enhancing the competitiveness of not only the Korean Wave contents but also all the other Korean-made products and serving as a great strength for the Korea’s future economy and industry as well. 한류는 인터넷이 전 세계에 보급된 이후 발생한 가장 대표적인 문화 현상 중 하나이며, 스마트폰 보급으로 동시에 진행 되는 새로운 문화로 파급력과 속도는 기존 문화에 비해 강하고 빨랐다. 한류가 확산될 때 이러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전쟁, 올림픽, 월드컵 등 이 모든 것은 누군가에 의해 기획되거나 의도된 사건이지만 한류는 그렇지가 않았다. 시대의 변화 속에 만들어진 한류 문화는 자연스럽게 세계인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국제사회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인식을 호감도로 높여 놓았다. 한국하면 ‘경제적으로 선진국’, ‘IT 강대국’, ‘호감이 가는 국가’라는 긍정적 응답률이 약 60%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러 콘텐츠 중 ‘K-Pop’의 영향력 확대가 가장 중요시됨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CIS국가에서도 한류에 대한 국가별 편차는 있지만 이미 2011년에 ‘성숙’, ‘성장’단계로 분류 될 정도로 성공적인 평가가 나왔다. 종교, 관습, 가치관 등의 차이로 인해 다소 생소 할 수 있는 한국의 콘텐츠가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매우 고무적이다. 한류 확산은 국가 경제성장과 국민들의 사회문화 자긍심에 미치는 파급 효과로 일상적인 효과보다 매우 높게 나타났다. 서로 다른 미디어 채널과 매스컴을 통해 이동하면서 나비효과에 의한 부가가치 상승효과(synergy effect)까지 창출되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시작된 효과가 K-Pop, 패션, 뷰티, 의료서비스, 한국어, 한국 유학, 한국 여행 등 여러 콘텐츠로 수요가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더 높은 경쟁력 확보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류의 새로운 콘텐츠 개발로 이끌어내야 한다. 다시말해 한류를 일으킨 엔터테이먼트사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자 그리고 정부차원의 외교적 대응 3박자가 조화롭게 연결 되어 경제성장의 새로운 돌파구로 정착 시켰으면 하는 것이다. 더불어 세계 여러 국가와의 정치적 신뢰를 높여 한류 콘텐츠뿐만 아니라 한국 전상품의 경쟁력으로 향상되고, 한국 미래경제산업에도 큰 힘이 되었으면 한다.

      • KCI등재후보

        한국 현대시 속의 북방, 슬라브, 시베리아 공간 및 역사인식 -백석의 낙원회복의 꿈과 고대사 공간인식을 중심으로-

        이길주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2011 한국시베리아연구 Vol.15 No.2

        시베리아에 러시아 문인들의 공간의식은 먼 우랄산맥너머 유럽러시아로부터 소외된, 흔히 추방과 유형, 별리의 폐쇄 공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곧 유럽러시아의 부패한 서구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이 처녀지에서 구원과 갱생, 해방과 자유, 그리고 상생의 유토피아적 공간으로까지 비약하는 구조 속에 놓여있다. 개발논리를 벗어난 광대한 대지가 남아있는, 역설적이지만 근현대 세계사 속에 중국의 북방지역과 함께 이 공간이 제3 세계적 성격을 지녀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시 제3 세계적 성격을 지녀왔던 한국문학 속의 북방 만주대륙과 러시아 시베리아에 대한 이미지와 인식 또한 구한말 이래의 이중적 공간인식과 시학적 무대 속에 만주와 시베리아 즉 두만강 건너 간도와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에서 바이칼 지역으로까지 이어져 있다. 이 공간은 사실 겨울의 그 혹독한 추위만큼이나 부정적 이미지와 인식으로 점철된 담론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백석을 비롯해 선구적 지식인과 시인들에 의해, 언젠가 찾아갈 북방고향과 샤먼적 축제와 신명이 되살려질 열린 공간, 또는 자유로운 광야의 이미지로 해서 부활과 갱생의 긍정적 인식으로 확장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곧 닫힌 공간 즉 디스토피아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공생공간으로서 유토피아로의 전이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한국문학 속의 북방 공간인식은 백석에 의하여 부정의 자리에서 긍정의 열린 공간의 상징성이 살아나기도 하였다. 특히 백석은 <국수>에서와 같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과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하는 풍요로운 어린 시절 고향마을의 이미지와 겹치며 북방공간에 대한 긍정의 시학을 열었다. 특히 백석은 <북방에서-정현웅에게>에서 시베리아 퉁구스계 종족 에벤키와 솔론 등 이웃 북방 종족과 한민족의 깊은 유대관계와 공생장면을 민족의 기억 속에 구상화하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시대적 특질인 모더니즘 미학의 자장 속에서 이국취향의 발현이기도 하겠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동반자로 슬라브-러시아계 이름의 여인 나타샤를 등장시키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백석 시학의 지향이 마치 다민족 공동체적, 아나키즘적 유토피아 공간을 표상하는 듯하다.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은 고래로 많은 민족이 부침하며 다양한 유라시아 문화를 형성하여 왔던 공간이다. 샤머니즘과 곰 신앙, 솟대와 성황당 같은 전통 토속신앙과 유럽과 아시아의 문명이 만나고 불교, 이슬람, 기독교 등 이문화공동체와의 교호작용이 일어났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폐쇄 공간 속에서 백석의 시적 자아에 의해 그러한 포괄적인 북방공간이 현실극복의 토대로, 유라시아 제 민족과 원시자연이 함께 공존 공생할 터전으로, 긍정적 유토피아의 이미지와 인식이 표명되었던 것이다. 임화나 이용악과 달리 백석은 민족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 대신 서사적 시 양식을 통해 담담하고도 자기인식적인 성찰로 현실의 근원을 드러내는데 치중하였다. 특히 백석은 북방 고향의 서정성의 재현에서 출발하여 시적 상상의 시공간을 넓히며 민족의 역사 담론과 진정한 공동체 구현을 위한 무정부주의적 시학에까지 나아간 것이다. 백석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민족의 정조와 운율을 살리며 한국적-동양적 자연관과 여운과 여백의 미를 관조적으로 보여주었다. 때로는 북방의 순수한 대자... Like the Siberian territory, the images and ideas of Siberian land in Russian literature appears to have no clear borders. There are so various Russian Siberian people in terms of their human biographical originalities that sometimes their images and views on Siberia extremely varied, sometimes between heaven and hell, or utopia and dystopia. The aim of the thesis is to study the perception and image of the Bukbang- 'Nothern land' in modern Korean literature during Japanese occupation period, mainly from Baek-Seok's poems. Image is considered as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modern poetic crafts, also as a vehicle for representation of ideas. Another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make clear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Baek-Seok's images and ideas on the Bukbang- 'Northern land'. In modern Korean literature the spatial images and conceptions of Manchuria and Siberia fluctuated from like of negative exile and ‘closed jail’ to wishful real free land, as like of Siberian ‘open steppe’ of Russian literature, developed towards a base for utopian vision of future Korea. In Russian and Korean literatures conceptions and images of Siberia, Eurasia are sometimes self conflictive, but in the deepened traditions of literary streams exists a system of developing conceptions from the hell to heaven through the rebirth, resurrection and utopian images, signifying Russian Eurasianism. So the most desired direction of Russian Eurasianism eventually might be searched in Eurasian and Siberian myths of coexistence spirit between Europe and Asia, between human beings and the nature. It could be comprising with the values and heritages from old Asian, of the northern sphere, myth and spiritual, religious relics, like Shamanism and the other Siberian, northern Korean myths. The theme of 'Northern land' in modern Korean literature, under the yoke of Japanese occupation, related with wholly negative images from painful experiences of exile and exodus outside of homeland Korean peninsular. Although the writer Lee Gwang-soo, as a leader of intellectual circle of modern Korean society, revealed rebirth, resurrection and utopian images of Siberia-Baikal, in terms of literary and symbolistic depiction in his "Yujeong", with the religious influence of Buddhism. Searching for asylum or another utopian free land, Korean intellectuals and literary circle, mainly Bukbang poets, made the views and images of Siberia-Baikal as the vast, pure and free land, mixed with the images of remote, cold and desert like 'Nothern land'. But Baek-Seok's images and ideas on the Bukbang contained some positive ideologies of ancient Korean blissful territory relating cultural, spiritual assets of Koguryo period. Comparing with other Korean modernists of that time, his metaphors were should be valued as a very fresh and outstanding image. Sometimes he used foreign objects as vehicles for metaphors, like of Slavic woman Natasha in the poem "Me, Natasha and white donkey", and with the story of northern neighbour people Solon, Tungus and Chinese of "From the land of Bukbang". His metaphorical message would pursue ecological coexistence queries among old Asian nationalities and between people and nature of Bukbang lands, comprising all the northern objects, plants, animals and many kind of traditional spiritual, cultural assets. In Baek-Seok's metaphor, the images and ideas toward the wishful real free land, like of the features of Russian-Siberian literature, developed towards historical utopian visions of past and future Korea within his unique narrative poetics.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