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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도고(吉田東俉)의 조선 연구

        윤소영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5 일본사상 Vol.0 No.29

        요시다 도고(吉田東俉, 1864-1918)는 대표적인 일본근대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저술로는 『대일본지명사서』(1907, 총13권)와 『日韓古史斷』(1893), 『倒敍日本史』(14책), 『日本朝鮮比較史話』(1924) 등이 있다. 종래 요시다 도고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日韓古史斷』(1893)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한국사를 왜곡한 식민사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요시다 도고의 연구업적은 고대사 뿐 아니라 근대사와 한일비교사에 이르는 방대한 연구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고대사에 국한한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그동안 주목되지 않은 『倒敍日本史』, 『日本朝鮮比較史話』 등의 저술을 통하여 근대한일관계사를 중심으로 요시다 도고의 조선인식과 그가 조선인 유학생에게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식민사학에서는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했으며 일본은 본가, 한국은 분가로 지배-종속관계에 있었다고 파악한다. 또한 근대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었는데 한국의 동양평화를 교란시켰기 때문에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요시다 도고는 고대 한일관계는 한반도 남부의 인종과 일본 북서부의 인종이 한 민족이며 인위적인 장벽이 없이 서로 정치와 문화를 교류하던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중세와 근세 한일 문화의 차이를 ‘편문’과 ‘편무’ 문화로서 그 특징을 설명했다. 한편 근대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쓰면서 일본의 국익을 지키고자 했다고 밝히고 일본의 한국 식민화 정책에 대해 한국인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고대의 우호적인 한일관계에 비추어 향후 문화공동체로서의 한일의 우호적인 관계형성과 국세 발전을 희망하면서 자칫 일본인들이 신영토를 차지했다는 기세로 함부로 한국인과 갈등을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편 그는 와세다대학에 유학한 최남선, 현상윤, 이병도 등에게 역사연구를 위한 자료 연구법과 역사연구방법론, 한일문화론 등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주체적인 관점에서의 ‘조선’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각각 ‘조선학’분야의 대가로서 한국 근대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요시다 도고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긍정하면서도 우호적이었던 고대 한일관계를 거울삼아 한일 간에 역사적으로 거듭된 ‘애증’의 연쇄를 극복하고 문화공동체로 거듭나야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를 이상주의적 역사가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Yoshida Togo吉田東俉 is a modern Japanese representative geographer and is a historian. His representative writings include Japanese Place Name Dictionary 『大日本地名辞書』(1907)、Nikkan Koshidan (Ancient Histories of Japan and Korea) 『日韓古史斷』(1893),UpsidedownJapaneseHistory『倒敍日本史』,Historical Anecdote of Comparison between Japan and Korea 『日本朝鮮比較史話』. The Korean researcher analyzed a study of Yoshida's 『日韓古史斷』 mainly. When the book distorted Korean history, Korean researchers criticized it. This study examines Yoshda's Korean recognition mainly on the historical concerned on modern Korea day through the『倒敍日本史』and『日本朝鮮比較史話』which did not attract attention so far. In additoin, I consider the influence that he gave to Korean students. Generally, Japan rules Korea in the colonization historical study insist that Korea was a colony of Japan in the ancient times. In addition, though Japan helped with independence of Korea in the modern times. But she was disturbed Oriental peace, therefore Japan annexed Korea for the peace of East. However, in Yoshida, as for the relations, a race of the south side of the Korea Peninsula and a race of the northwestern part of Japan consider the relations to have been one race on ancient times. He insists that both interchanged culturally politically. He characterized Korean and Japanese culture as one is inclined to literature, and the other is inclined to millitary power each on Middle Ages and early modern day. He pointed that Japan of modern times protected Japanese national interest while lecturing on a good artifice and invaded Korea. He said that the Korean resisted aggression of Japan intensely. He recognized it was necessary to make Korea the colony on development of the Japanese state of the nation. But followed the friendly relationship in the ancient times of the two countries, he insisted that we should intend a culture community. And he warned Japanese people must not bring about a tangle with Korean people on the pretext of Japan gained a new territory. On the other hand, he had a big influence on Choi Nam-Sun崔南善、Hyun Sang-Yun玄相允、Lee Byong-Do李丙燾 which studied in Waseda University in posture and the study methodology of the history study, the point of view of the Korea Confucianism study. I think that Yoshida was an idealist who prayed for building the relations to be reconciled with each other across the chain of "love and hatred" that Korea and Japan continued histor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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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타 도코 『홍도관기술의』의 사상 연구 —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

        김지훈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1 일본사상 Vol.- No.41

        『홍도관기술의(弘道館記述義)』는 일본의 유학자 후지타 도코(1806-1855)가 미토 번(水戸藩)의 번교(藩校)인 고도칸(弘道館)이 세워졌을 당시, 번주(藩主)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의 명을 받고 그 교육 취지를 올린 글이다. 후지타 도코는 일본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후기 미토학(水戸学)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며, 그의 사상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 메이지 유신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어, 현대 일본의 정치사상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홍도관기술의』는 후지타 도코의 대표 저작으로,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홍도관기술의』의 저술 배경에는 신도와 유교의 합일, 문과 무의 병행이라는, 미토 번의 사상적 배경이 있다. 이것은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한 미토 번의 번교 교육 방침이기도 했다. 도코는 유교를 따르긴 하나, 중국에서 탈피한 일본 중심적인 구도를 강조한다. 도코는 일본 태양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천황 가(家)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존왕양이의 구도를 주장하며, 황실을 높이는 것을 문의 영역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을 무의 영역이라 하며 존왕양이가 바로 문무합일이 됨을 말했다. 도코는 아버지 후지타 유코쿠의 「정명론」에서 나타난 관점을 계승, 발전시켜 군신론을 주장했다. 아무리 권력이 강해도 일본의 왕은 천황가이며, 그것은 불변의 것으로, 천황은 천지신에 대한 제사로 위엄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러한 천황가는 일본의 국체로, 천황을 높이는 것이 바로 일본 고유의 것을 강조하는 신도와 임금에게 충성하는 충(忠)의 합일이 된다. 도코는 불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도코는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온 유교와 다른 태도인데, 아마도 세속적인 성격이 비교적 약하며, 부모와 군신을 비롯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는, 천황을 높이고 천황과 신하의 관계를 확실히 하며 일본 고유의 것을 강조하는 도코의 사상과 대치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후지타 도코의 사상은 유가의 정명론·주자학적 대의명분론이 일본에서 미토학을 거치며 절대적 군신관계가 강조되며, 국수주의·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해져 존왕양이 사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Kodokangijutsugi(弘道館記述義)> is an article written by Japanese Confucian scholar Fujita touko(藤田東湖), who received the order of Tokugawa nariaki(徳川斉昭), the monarch of Mito Domain(水戸藩), and posted the educational purpose of Kodokan(弘道館) when Mito Domain’s Clan school(藩校), Kodokan, was established. The writing background of <Kodokangijutsugi> is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Mito Domain: the unity of Shinto(神道) and Confucianism, and the parallelism of literature(文) and the policy of militarism(武). Fujita touko emphasizes the Japanese-centered structure that broke away from China. Fujita touko advocated the ideology of Sonnojoi(尊王攘夷) to elevate the family of the emperor, who inherited the legitimacy of Japan’s Solar deity(太陽神), and defeat external enemies, and said that raising the emperor is literature’s domain, and defeating barbarians is the policy of militarism’s domain. He said that the ideology of Sonnojoi becomes the parallelism of literature and the policy of militarism. Fujita touko inherited and developed the viewpoint that appeared in <Seimeiron(正名論)> of his father Fujita yukoku(藤田幽谷). No matter how strong the power, the king of Japan is the emperor, and that is unchanging. And the emperor shows his majesty by offering sacrifices to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Such an emperor’s family is Japan’s National polity(國體), and it is a union of Shinto, which emphasizes that raising the emperor is unique to Japan, and Loyalty(忠), a Confucian who is loyal to the king. Fujita touko showed an attitude that rejected Buddhism, because it was not unique to Japan. This is a different attitude from Confucianism from China. Perhaps it is because Buddhism, which has a weak secular nature, is opposed to the idea of Fujita touko, which emphasizes the uniqueness of Japan and establish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ing and the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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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국가 건설과 문화국가론의 전개— 패전후 일본, 해방후 한국 —

        이경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3 일본사상 Vol.- No.44

        이 글에서는 제국 일본의 형성기에 수용된 문화국가론을 염두에 두면서 패전후 일본과 해방후 한국에서 전개된 문화국가론을 비교․분석하였다. 메이지 시대 후기, ‘문화국가’는 국민의 복리 및 행복 증진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중시하는 국가개념으로 수용되었다. 일본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1910년대로 들어서면서 문화국가론은 군국주의의 정당화에 동원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법치국가의 한계를 극복한 국가개념으로서 전시체제를 지탱하는 논리를 강화해 갔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평화의 중요성에 눈뜬 대부분의 현대국가는 ‘문화국가’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군국주의를 정당화했던 제국의 문화국가론은 패전후 일본에서도 해방후 한국에서도 딱히 문제되지 않았다. 일본의 문화국가론은 군국주의와 국방국가에 공급해온 동력을 단번에 중단하였고, 문화국가는 이름표도 떼지 않은 채 민주국가와 평화국가의 엄호에 나섰다. 그 변신의 신속함 때문인지, 신국가 건설의 시급함 때문인지, 전전의 ‘문화국가’에 대한 망각을 의문시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거국적인 ‘문화국가’가 표방되지 않아서인지, 제국 일본에 대한 기억도 제국의 문화국가론에 대한 기억을 깨우지는 못했다. 한편, 일본과 한국의 ‘문화국가’론은 동시대성 속에서 각각의 사상적 시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1946년, 고야마 이와오가 <<문화국가의 이념>>을 발표하였다. 평범한 ‘문화국가’론과 선을 그은 그의 저서는 ‘문화국가 건설’의 이름으로 전시기 ‘근대의 초극’론을 반복하였다. 한국에서는 1947년에 김구의 <<백범일지>>가 출간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 그의 저서는 문화국가론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뒤늦게 재조명된 그의 ‘문화국가’론은 ‘국가’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사상적 단초를 제공하는 동시에, ‘민족주의’라는 사상적 시차도 함께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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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사상과 문화, 그리고 21세기 한국 문화도시 - 신명, 평화, 자연스러움 -

        정혜선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09 일본사상 Vol.0 No.16

        본 연구 목적은 ‘한국과 일본의 사상․문화비교’를 통해 한국도시정체성을 근원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기반으로 21세기 한국문화도시의 컬쳐노믹스로서 가능성을 문제제기 차원에서 고찰함에 있다. 현재 글로벌차원의 초경쟁적 환경이 도래하면서, 수준 높은 문화 없이는 어떤 도시도 경쟁우위를 창출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서울도 고유한 문화로 특별한 브랜드가치 있는 도시를 만들어 경제를 선도하겠다고 하면서 컬쳐노믹스를 내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서울의 시정을 살펴보아도 ‘서울의 매력’이 막연하게 주장되거나 ‘디자인도시’ ‘한강르네상스’라는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쾌적함이 강조되는 것이지, 도시를 하나로 묶어낼 통합적 이미지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로마,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 거점도시들은 고유문화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면서 컬쳐노믹스로 전환하고 있다. 파리하면 그 도시 고유의 자유스러움과 인간들이 금방 떠오른다. 파리는 그런 정체성을 바탕으로 예술의 도시를 만들었고, 관광의 도시가 되었다. 나아가 미래에 장소, 문화, 경제가 공생하는 파리의 브랜드를 더욱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제 도시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마음속의 ‘공간’이다. 도시 이미지가 주는 풍부한 상징은 경제와 공생하게 되며, 결국 장소, 문화, 경제가 복합된 개념이 브랜드로 표시되어 가장 신뢰도 높은 상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국도시는 컬쳐노믹스를 이룩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야 한다. 유명한 세계도시를 모방하거나 마치 문화재 관광사진을 찍어내는 것처럼 표피적으로 한국적 정체성에 접근해서는, 매혹적인 이미지를 창출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문화예술 공연을 늘리고, 한강르네상스 등의 프로젝트를 한다 할지라도,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 접근 없이는 탁월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외면적 쾌적함은 그저 세계 유명도시에서 접할 수 있는 하나에 불과하여, 인간의 감성을 깊이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의 투입이 기획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한국의 정체성문제는 도시관광학, 건축학 등 실용학문에서 단편적으로 논의되는데 그치고 있으며, 인문학계에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문화도시를 가로지르는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그 매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해 온 사상과 문화를 빼놓고는 말하기 어렵다. 사상과 문화에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생각, 미의식이 담겨있고, 이는 어떠한 인위적인 화려함보다도 그 자체로 강한 감동과 울림을 준다. 한국의 매력도 오랜 세월 형성되어 온 사상과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의 정체성 안에는 인류보편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고, 동양의 특징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적 세계가 생생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세월에 녹아져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온 것이기에, 모방 불가능하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쟁력을 지닌다. 더구나 한국문화 안에는 ‘기능과 분석’의 근대적인 것을 뛰어넘어 ‘영성과 자연’, 그리고 ‘평화’라는 21세기를 열 수 있는 자산이 풍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고유의 특징은 일견 알기 쉬운 듯이 보이지만, 핵심을 짚어내기가 무척 난해하다. 필자는 일본역사를 전공해오면서, 한국과 일본이 정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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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외부 ‘태동(泰東)’과 ‘아시아’의 내부 ‘일본제국’ 사이에서 - 오카쿠라 덴신과 오카와 슈메이의 ‘아시아론 -

        전성곤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4 일본사상 Vol.0 No.26

        오카쿠라 덴신이 주장한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논리 속에는, 인도 불교, 중국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성 속에서 구축한 ‘아시아론’이었다. 아시아의 정수를 수입하고 여러 주변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에게 박해를 받지 않으며 근대까지 그러한 아시아적인 것을 보존한 일본은 ‘아시아의 박물관’이며, 그 미술이나 사상은 아시아적 양식의 총합이라고 오카쿠라는 상정했던 것이다.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사상 논리를 지탱시킨 것은 결절점으로서의 일본이었다. 그리고 오카쿠라는 서구의 식민지정책아래 허덕이고 있는 조건에 의해 아시아를 하나의 전체로 제시하고, 서구의 문명에 의해 수탈되는 객체로서 아시아를 서구와는 별개로 그러나 포괄적인 원리를 내걸면서 하나의 통일체로 ‘구축’한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오카와 슈메이는 아시아의 정수와 일본정신을 연결시켰다. 아시아문화의 집합체로서의 일본을 설정할 수 있는 논리를 오카쿠라를 통해 학습하면서, 그것이 ‘일본정신’으로 재편성되는 논리를 ‘시대적 구분’과 ‘인도와 중국’의 식민지화를 중첩시키는 담론 속에 끼워 넣으면서, 아시아의 가능성을 일본에서 찾는 담론을 발견해 낸 것이다. 특히 서구의 식민지지배에 허덕이는 ‘아시아는 하나’인데, 그러한 아시아의 다문화를 새로운 ‘제국’으로 통합하고 융합하는 테제를 찾아간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아시아 문화의 정수를 총합한 일본이 그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정수는 역시 일본정신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부흥을 위해 필요한 사상성을 ‘일본의 전통’에 투영시키고 아시아의 혁신 에토스를 ‘일본정신’ 속에서 체현해 낸 것이다. 다시말해서 아시아 문화의 ‘정신적 유전자’인 국체(國體)가 일본에서 배양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일본정신의 본질이며, 이러한 일본정신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천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서 찾았고, 일본민족=일본문화를 통합해가며 일본정신의 세계성을 해석해냈다. 시대적 상황을 등에 업고 일본정신의 에토스는 성립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다문화 제국’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명목은, 간토대지진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오카와 슈메이의 ‘인위적인 의도’로 재현된 ‘정신=사상’논리였던 것이다. 오카와 슈메이는, 오카쿠라 덴신이 주장한 ‘아시아’ 개념을 ‘일본정신의 구조’ 속에서 찾았고, 그 아시아적 정수의 존립형태인 ‘국체’를 합성시키면서 일본정신이 곧 아시아정신이라는 논리를 재구성해냈던 것이다. 결국 ‘일본정신=아시아정신’으로 재구성되고, 동양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서구정신=개별정신’을 ‘일본정신=아시아정신=세계정신’으로 전복시켜 일본중심주의적 ‘권위’를 제시하는 ‘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특정한 일본정신에 귀착하는 일본적 구조 그 자체가 이러한 논리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아시아의 부흥에 아시아전통=일본전통을 강조하는, ‘일본인의 국민화’ 그리고 ‘일본인의 아시아화’로 시그널을 확대하면서, 오카쿠라 덴신과 오카와 슈메이는 아시아 본질론을 부각시킨 ‘다문화 제국주의=아시아 국민’ 논리를 생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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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교육사상에 관한 고찰

        이권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6 일본사상 Vol.0 No.31

        The 1880 Education Order of Japan had reinforced Confucianism focused on ‘loyalty and filial piety’ rather than the universal educational values like seeking the truth or empowering individuality. Additionally, The Imperial message on Eduction in 1890 provided a crucial factor to the educational tendency of that era in Japan. Mori’s nationalism and the actions he had taken during those days are therefore one of indispensable parts which have to be investigated on the history of educational systems and thoughts. This essay is aimed to consider the basis and the feature of what Mori Arinori had sought through his thought and action represented by nationalism. How his nationalism had been established shall be examined at first, and the spectific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his educational scheme will be secondly examined. His thought was presented as a gymnastic form called ‘military gymnastics at that time. So I will check how this practical curriculum had derived from his educational thought in order to investigate what he had sought. Through the consideration of this dissertation, a tiny clue which can help to reveal the origin of recent Japanese’ scheme in terms of Nation-Stat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cheme and the educational history will be provided. 메이지 초기, 일본 근대국가 형성기에 활약한 여러 인물 중에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존재는 특이하며 또한 걸출하다. 모리에게는 문명개화와 서구주의의 기수, 절대주의의 화신, 근대 합리주의자, 국가주의자, 뛰어난 선각자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혹자는 일본이 낳은 서양인이라 했고, 혹자는 국체(國體)의 존엄을 모독한 적자(賊子)라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넘나들며 정치·종교·학술·산업·관습 등의 다방면에 걸쳐 개명적이고도 혁신적 사상을 피로하며 외교관료·계몽가·교육가·사상가로서 활약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의 자리에 올라 근대교육 제도 및 사상적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 근대교육 형성기에 있어 그가 남긴 족적은 실로 크다. 1880년 개정교육령(改正敎育令) 시행 이후 일본의 교육은 진리 탐구나 개성의 신장이라는 근대교육의 보편적 가치 실천보다는 ‘인의충효(仁義忠孝)’ 사상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주의적 교육정책을 강화해 나간다. 그리고 1890년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공포는 이를 공고히 하고 절대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의 개별 학교령(學校令)과 국가주의 교육사상, 그리고 그 실천이 갖는 교육제도사 및 교육사상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할 수 있다. 본고는 모리 아리노리가 교육을 통해 지향하고자 했던 근대 국민국가의 내실과, 국가주의 교육이란 말로 대표되는 모리의 교육사상 형성의 연원과 특징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리 아리노리의 사상 형성의 궤적과, 그의 사상이 교육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고, 병식체조(兵式體操)로 대표되는 사상의 신체화(身體化) 과정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모리의 국가주의 교육사상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인의 국가와 세계를 인식하는 특정적 사유체계 형성과 교육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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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우익의 성립과 전개에 대한 시론 -한국의 일본 우익연구를 중심으로-

        최재목,장성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7 일본사상 Vol.0 No.33

        Japan has been so far understood in Korea by using concepts such as right wing, conservative swing, and conservative. However, these concepts, though mutually related, are not the same. They have been grasped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times. In Korea, nevertheless, they have been identified in a context similar to the concept of statism(Etatismus), nationalism and imperialism. Therefore, this paper will examine how the right wing of Japan has been perceived and how it has been developed according to the change of time, then examine the studies of the Japanese right wing in Korea. This attempt will focus on two points. First is that the Japanese right wing has been variously mentioned and referred to during the historical development process. Second is that in Korea the Japanese right wing has not been approached objectively. This is due to the lack of empirical studies using the primary data and the wrong direction of the studies biased by anti-Japanese sentiment in Korea. 우리는 일본을 ‘우익’, ‘우경화’, ‘보수’ 등의 개념을 주로 사용하여 이해해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들은 상호적인 연관 관계는 있지만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르게 파악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의 개념을 통해 유사한 맥락으로 파악해왔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 이유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개념의 변화에 대한 추적 연구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일본 우익이 시기 변화에 따라 어떻게 파악되고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 한국에서 진행된 일본 우익연구를 시론(試論)적으로 고찰해보았다. 이와 같은 시도는 두 가지에 주목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는 일본 우익은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났고 지칭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둘째는 한국에서 진행된 일본 우익연구가 아직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1차 자료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했고, 반일 감정에 의한 편향적 방향 속에서 파악된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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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의 연어축제 비교 연구 -관련 산업의 실태와 축제사례의 비교를 통하여-

        장한별,부백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7 일본사상 Vol.0 No.33

        Based on the salmon conservation project and the salmon industry in Korea and Japan, this study examined the possibility of improving Korea’s salmon festival. South Korea lacks national interest in salmon conservation projects, and the domestic salmon industry is being implemented mainly by imported salmon. On the other hand, Japan has invested heavily in salmon conservation projects around the world. As a result, the salmon industry through the natural salmon returning to the Japanese territorial waters has activated. There are no special differences in the programs comprising the salmon festival in Korea and Japan, but the Japanese salmon festivals have a variety of facilities such as museums and restaurants which can convey histories and traditions of the festival to visitors. Development of such amenities will be indispensable for sustainable management of the salmon festival. Japan’s case suggests that Korean salmon festival should be accompanied by the salmon’s historical considerations, salmon conservation projects, and the growth of the salmon industry through natural salmon catch. 본 연구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연어보존사업과 연어산업을 바탕으로 연어축제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한국의 연어축제의 발전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한국은 연어보존사업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부족하고, 수입 연어를 중심으로 국내 연어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일본은 세계적으로 연어보존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일본 해역으로 회귀하는 자연산 연어를 통한 연어산업이 활성화되어 있다. 연어축제를 구성하는 프로그램은 한국과 일본의 축제에서 특별한 차이는 없으나, 일본의 연어축제는 축제의 역사와 전통을 스토리텔링해 줄 수 있는 박물관, 식당 등의 부대시설들이 다양한 내용으로 구축되어 있다. 이러한 어메니티의 확충은 연어축제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 필수적이며, 일본의 사례는 한국의 연어축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연어의 역사적인 고찰, 연어보존사업, 자연산 연어를 통한 연어산업의 활성화가 동반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 KCI등재

        일본 태교론의 전통과 근대

        박이진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1 일본사상 Vol.- No.41

        본고에서는 일본에서 확산된 태교론을 역사적 관점에서 그 흐름과 경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일본 태교론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시모다 지로의 『태교(胎敎)』(1913년)의 내용을 분석하고, 이러한 태교론이 당시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을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최신 과학지식으로 유행하였던 위생학과 우생학이 결합하여 탄생한 근대일본의 태교론의 특징을 규명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전통적인 태교가 여성 중심의 금기록(수양서) 같은 성격을 가졌다면, 『태교』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모체를 아이를 낳기 위한 ‘빌린 배’로 인식했던 전통적 신체관을 부정하고 모자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근대적 위생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반면 당시 일본 사회에 확산된 유전학과 인종개량론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태교』 이후 20세기 전반에 출간된 태교 서적에는 ‘태교가 우생학’임을 명시하기에 이른다. 국민우생법(1940년)을 제정해 민족위생보호라는 명목으로 일본인을 계급화하고 선민사상을 고취했던 당시 위생학과 우생학이 결합하여 탄생한 태교론은 국민우생법에 명분을 제공하였다. ‘불결함’과 ‘장애’는 좋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 저변에 영향을 주는 ‘과학적 근거’로 기능한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flow and trend of the theory of prenatal care that has spread in Japan from a historical point of view. This is an analysis of the contents of Shimoda Jiro’s book Taikyō (1913), which is regarded as a epochal turning point in the theory of prenatal care in Japan. At the same time, the background to which this theory of prenatal care could appear at that time was examined. In the process, it was clarified that the theory of prenatal care in modern Japan was born by combining hygiene and eugenics, which were popular as the latest scientific knowledge at that time. If traditional prenatal care in Japan consisted of characteristics stemming from a female-centered “book for self-discipline”, Taikyō denied the traditional view of the body in terms of pregnancy and childbirth, which recognized the mother as a ‘borrowed belly’ for bearing children. And Taikyō explained with the modern concept of hygiene that the health of mothers and children is important. Books on prenatal care published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fter Taikyō stated that prenatal care is a form of eugenics. In Japan, the National Eugenic Act (1940) enacted under the pretext of protecting national hygiene inspired the classification of the Japanese as ​​a chosen people. At that time, the theory of prenatal care, which was created from the combination of public hygiene and eugenics, provided a justification for the National Eugenic Act, and this still serves as the basis for the Eugenics Protection Law and Motherhood Protection Act. It serves as a supposed “scientific basis” for the perception that “insanitariness” and “disability” are not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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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외래문화 수용의 두 자세 -‘화혼한재(和魂漢才)’와 ‘화혼양재(和魂洋才)’-

        한예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7 일본사상 Vol.0 No.33

        Japan has collected various kinds of information on foreign countries and cultures and formed Japan-like identity via adoption, selection, criticism and changes, which is called Yamato Tamasi by Japanese people. To succeed in and to be Japan-like, that is, 'Hwahon', the acceptance formulas of foreign cultures named 'Hwahonhanjae(和魂漢才)' and 'Hwahonyangjae (和魂洋才)' were established. 'Hwahonhanj' means that Japan understood Chinese studies based on its peculiar spirit while accepting Chinese studies. It was changed into an expression of 'Hwahonyangjae' when western cultures were introduced before and after the Meiji Reformation. That is, 'Hwahonhangjae' and 'Hawhonyangjae' were frames to accept foreign cultures including Chinese and western civilizations. They show Japan's psychological patterns toward foreign people. That is, when Japan accepted foreign civilizations for the first time, it imitated them with attitudes of worship, respect, love and longing, but as it applied them for Japanese tradition and criticized them, it turned out to oppose against it. Such acceptance frame did not appear in China or Korea. As China was culturally complete itself, it thought that culture was its own thing or that it was handed down from the past, not that it came from outside. Therefore, China respected for its tradition and looked down on foreign things, which was its acceptance frame of foreign cultures. Meanwhile, as Joseon was willing to accept Chinese culture which was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East Asia countries used commonly in the Chinese-speaking countries which were connected inland, it also accepted Chinese culture without specific self-awareness before Modern times. However, Japan behaved differently. It started studies on foreign countries and cultures from the perspective of "know-your-enemy and know-yourself." That is, through reconnoitering the enemy's movements, it formed and maintained Japan-like identity. In other words, to maintain and succeed in 'Hwahon', it had to be aware of changes in international situations. 'Hwahon' was achieved by scholars who tried to have two different cultures in both ways while acting on the border of culture acceptance. 일본은 다양한 외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취사·선택, 비판·변용을 거쳐 ‘일본다움’을 형성하여 왔고, 그것을 일본인들은 ‘야마토 다마시(和魂)’라고 하였다. 이 ‘일본다움’ 즉 ‘화혼’을 제작 계승 보존하기 위하여 ‘화혼한재(和魂漢才)와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외래문화 수용공식이 설정 되었다. ‘화혼한재’란 중국의 학문을 수용하지만, 그것을 일본 고유의 정신에 입각하여 소화한다는 입장이다. 그것이 다시 명치유신(明治維新) 전후에는 서양의 문화가 전격적으로 수입되면서 ‘화혼양재’라는 표현으로 전환되었다. 즉 ‘화혼한재’와 ‘화혼양재’는 일본이 중국과 서양 등 외래문화 수용의 프레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일본의 외래자에 대한 심리 패턴이 보인다. 즉 처음 외래문화를 수용할 때는 숭배, 흠모, 사모, 동경의 자세를 취하여 모방에 힘쓰지만, 차츰 일본 전통에 응용하면서 비판하고, 나아가 반발 대항하면서 ‘일본다움’을 형성 유지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러한 외래문화 수용의 프레임은 같은 동아시아권의 중국이나 조선에는 보이지 않았다. 중국은 문화적으로 자기 완결적(完結的)이었기 때문에, 문화란 국외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자생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따라서 전통을 존중하고 외래의 것을 낮추어 보는 존내비외(尊內卑外)가 근대 이전 중국의 외국문화 수용의 프레임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은 육지로 연결된 중화세계 안에 위치하여, 동아시아 공용한자로 씌어진 중국 문화를 거부감 없이 수용하여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대체적으로 특별한 자의식 없이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일본의 외국 연구의 출발점은 철저하게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즉 상대방의 상황을 살피는 ‘적정정찰(賊情偵察)’을 통하여 ‘일본다움’을 형성하였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화혼’을 유지 계승하기 위해서는 국제상황의 변화에 대한 주의가 필요했다. ‘화혼’은 결국 문화수용의 접경에서 활약하면서, 양쪽 문화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것에 능한 ‘양다리 걸치기’의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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