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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韓國 書院과 中國 書院의 立地・空間構成과 遊息空間에 대한 比較硏究

        김덕현 한국서원학회 2022 한국서원학보 Vol.15 No.-

        本 硏究는 朝鮮時代 韓國의 書院과 中國의 書院을 立地와 空間構成, 그리고 遊息空間의 측면에서 比較 考察하였다. 書院制度는 中國에서 始源하였으나, 儒敎 國家 朝鮮에서 私學으로 繁盛하여 全國的으로 分布하고 最近 UNESCO世界遺産 에 登載되었다. 이에 중국 서원과 辨別되는 한국 서원의 固有性과 眞正性을 把握 하는 比較 硏究가 要請된다. 宗敎的 性格을 가진 敎育施設인 書院은 儒敎의 世界觀을 再現하는 立地・空間 構成・景觀을 創出한다. 立地 측면에서, 중국과 한국의 書院은 共通的으로 學問과 祭享에 適合한 幽閒한 景勝地와 風水思想의 影響으로 山水環抱하는 地形을 立地 의 基本으로 共有한다. 中國의 著名 書院은 道敎와 佛敎의 影響으로 名山 名勝에 立地했다. 한국의 書院은 祭享人物의 緣故地를 가장 重視하고 이차적으로 生氣 活潑한 風水 形局을 찾았다. 旣存 景勝地에 立地한 中國의 書院과 대조적으로, 한국의 書院은 祭享 人物이나 書院 自體의 名聲으로 後代에 景勝地로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의 書院은 展望景觀을 중시하는데, 展望景觀의 類型에 따라 溪景・江 景・野景으로 立地를 구분할 수 있다. 서원의 空間構成 측면에서 중국과 한국의 書院은 3가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다. 첫째, 空間 規模와 制度에서 중국 서원은 그 位相에 따라 差異가 크다. 한국 書院에서 位相의 差異는 祭享 人物에 주로 관련되고, 書院의 외형 規模와 관련이 적다. 둘째, 서원 내부 空間構成에서 한국 書院은 대체로 前低後高 地形 위에서 單一한 軸線에 건물을 位階的으로 配置하고 그 最高位는 祠堂이다. 중국 書院은 複數의 축선에 藏書樓-講堂의 축선과 祠堂群의 축선이 구분되고, 장서루[御書樓] 가 최고위에 해당한다. 셋째, 書院의 威儀와 卓越性 誇示 方式이 다르다. 중국 서원은 石造의 牌坊, 柵栏(照墻), 泮池와 石橋, 壯麗한 御書樓 등으로 位相을 誇示 하고 園林과 碑亭으로 品格을 더한다. 한국 書院은 前低後高의 軸線에 簡明하고 位階的인 左右對稱의 建築物 配置, 節制된 植栽와 虛靜의 中庭으로 整齊嚴肅의 禮空間을 具顯한다. 한국의 書院은 威儀와 卓越性에도 人爲的 建築과 造景보다 산과 하천 같은 自然에 依存한다. 한국과 중국 書院의 가장 의미 있는 차이는 遊息 공간에서 발견된다. 중국의 서원은 대체로 外部 自然景觀 展望이 없고, 境內 庭園이 유식 공간이 된다. ‘背山臨 流’ 입지의 한국 서원에서 展望景觀은 儒學者들의 궁극적 이상인 天人合一을 體 得하는 현장이다. 서원에서 천인합일의 느낌을 얻도록 한국 서원은 生氣活潑한 自 然에 展望을 開放하는 방식으로 유식 공간을 구성하는데, 門樓가 대표적 장소이 다. 문루의 堂號는 서원의 展望 景觀 이미지와 부합하는 經傳과 先賢의 말씀에서 가져왔다. 門樓의 堂號는 展望 景觀의 特性과 그 儒學的 含意, 祭享 人物의 精神 世界를 三位一體로 담은 記號로 볼 수 있다. 문루 당호로 기호화된 전망경관은 自 然과 融合하는 한국의 傳統建築 思想과 한국 서원의 理念인 性理學의 天人合一觀 이 결합된 독특한 事例이다.

      • KCI등재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제향 전승 구조와 현황 -9개 서원 홀기 비교・검토를 중심으로-

        한재훈 한국서원학회 2023 한국서원학보 Vol.17 No.-

        Sacrificial rite of Seo-won base on Seok-jeon(釋奠) was held in the government school such as Hyang-gyo and imitate it, but drew a sharp distinction about the subject, the scale and the ritual. Especially, it strongly reflected the sense of authenticity lineage(道統) when select the subject, but it adopted relatively small scale and simple ritual. These characteristics of sacrificial rite of Seo-won outstandingly appeared in the Joseon Dynasty: So-su-seo-won(紹修書院), Nam-gye-seo-won(灆溪書院), Ok-san-seo-won(玉山書院), Do-san-seo-won(陶山書院), Pil-Am-seo-won(筆巖書院), Do-dong-seo-won(道東書院), Byeong-san-seo-won(屛山書院), Mu-seong-seo-won(武城書院), Don-am-seo-won(遯巖書院). Toe-gye Yi-hwang laid the groundwork for sacrificial rite of Seo-won in the Joseon Dynasty by making extensive retouching the sacrificial rite of Baekwoondong-seo-won was established by Sin-jae Joo-seboong. Since then, acrificial Rite of Seo-won in the Joseon Dynasty has developed through inheritance and criticism about this Toe-gye’s work. Joseon Dynasty Seo-won was under tension and worry to set own stature in the middle of Hyang-gyo(鄕校) which is the government school and Hyang-sa(鄕祠) which is the town shrine. And it could form unique ritual style of sacrificial rite of Joseon Dynasty Seo-won through these tension and worry. This study is designed in order to identify empirically that sacrificial rite of Seo-won how to development in Joseon Dynasty by comparison the Nine representative Seo-won in Joseon Dynasty. Specific rituals are difference between the Nine Seo-won, if it includes the other Seo-wons, the difference is more. However the existence of this difference itself shows that various academic communities autonomously established through the process of distress and debate. Sacrificial rite of Seo-won in Joseon Dynasty maintained general similarity, but also maintained negligible differences, it represents diversity of Seo-won culture in in Joseon Dynasty. 한국 서원의 향사는 국학(國學) 즉,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 을 기준으로 삼아 모방하면서도, 그 대상과 규모 그리고 의식절차 등에서는 융쇄(隆殺)의 차등을 견지한다. 서원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퇴계 이황은 신재주세붕이 제정한 백운동서원의 향사례에 대폭 수정을 가함으로써 조선시대 서원향사례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특히 제품의 진설과 의절의 진행과 관련하여 중요한표준을 제시하였고, 제관의 구분과 수행조건 등에 대해서도 기준을 제공했다. 이후한국의 서원 향사례는 이러한 퇴계의 작업 결과물을 기준으로 삼아 계승과 비판그리고 조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갔다. 한국의 서원은 자신의 위상을 국학(國學)과 향사(鄕祠)의 중간에 설정하려는 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특히 서원의 향사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향교의 석전을 참고하면서도 융쇄의 차등을 견지하려고 긴장했다. 이러한 긴장과 고민의 과정을 통해 조선시대 서원들은 한국적 서원 향사례를 조성해나갔다. 현존하는 서원들 중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소수서원・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필암서원・도동서원・병산서원・무성서원・돈암서원)의 향사례를 ‘홀기(笏記)’의내용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비교·검토함으로써 한국의 서원향사례가 어떻게 진행되고 전승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구체적인 항목들의 경우 9개 서원들 간에도 차이가 있고, 이외의 서원들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서원의 향사례를 국가적 차원에서 규정하여 제공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공동체가 자율적으로 고민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 정립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서원 향사례가 대동(大同)을 유지하면서도 소이(小異) 또한 존속케 했던 것이 이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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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제향의례와 지속・발전을 위한 방안 제안

        이해준 한국서원학회 2023 한국서원학보 Vol.17 No.-

        We would like to explore and propose measures to foster the cultural heritage valu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of the 4,500-year-old Seowon memorial rites of “Seowon in Korea.” Although the private Confucian academy system (Seowon) originated in China, the Korean academy system maintains a unique tradition of “ancestral rites,” which differs from the Chinese academy system that is centered on “semi-style lectures.” A Korean Seowon was a space where a symbolic ancient sage, who was worshipped by each Seowon, was selected as a mentor and revered through ancestral rites. In addition to its role in ancestral rites, it was a space where some of the high class talented persons made contact and interacted with each other. In addition, Korea is the only place where the Seowon memorial rites are practiced unchanged, and the Korean Seowon memorial rites can be said to be the most completely reproduced Confucian-style memorial rites in the world. The memorial rites of the “Korean Seowons,” collectively designated as World Heritage Sites, have been practiced by descendants and local Confucian scholars in the nine Seowons, and have sufficient historical, academic, and artistic value to constitute intangible heritage. Therefore, we would like to designate the “Korean Seowon” memorial rites, protected under the World Heritage Convention, as a nationally designated intangible heritage by preserving their original form, redefining their value, and establishing a transmission system for them. ‘한국의 서원’이 지닌 4-500년 전통의 서원 제향의례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방안을 모색, 제안해 보고자 한다. 서원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중국 서원이 ‘강학(講學)’ 위주인데 반하여, 한국의 서원은 독특한 ‘제향(祭享)’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한국의서원은 서원별로 추앙하는 상징적인 선현을 선정하여 사상적 멘토를 삼고 그를 추숭하고 제향 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제향과 함께 고급 인재들이 수시로 출입하고접촉, 교류했던 거점 공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서원의 제향의례가 온전하게 남아 시행되는 경우는 한국뿐으로, 한국의 서원 제향의례는 세계에서 가장 완비된 형태로 재현되는 유교식 제향 의식이라 할수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의 제향의례는 9개 서원의 제향의례는후손, 지방 유림들에 의해 지속되어 왔고, 무형유산으로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9개 서원의 제향의례 원형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재정립, 전승체계를구축해 나감으로써 세계유산인 ‘한국의 서원’ 제향 의례를 국가지정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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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中서원의 院任 비교 연구-한국 소수서원과 중국 백록동서원을 중심으로

        채광수 한국서원학회 2022 한국서원학보 Vol.14 No.-

        This researcher examined the executives of seowon in Korea and China through cross validation on Sosu Seowon, Korea’s first seowon, and Bailudong Seowon in China which is one of the exemplary seowon in East Asia. The general difference in the executives is that Korean seowon appointed men of repute in the village voluntarily while the seowon was operated mostly with the system of a director-(jangui)-yusa. On the other hand, Chinese seowon were operated by dividing the executives for education and administration. Also, the director was appointed as one of the local officials or an invited great scholar, and it was influenced by the government largely. In addition, Chinese seowon had a more subdivided and larger organization about the executives than Korean ones. However, autonomy was guaranteed much more in Korean seowon than in Chinese ones which were influenced by the government strongly. The following is a comparison between Sosu Seowon and Bailudong Seowon. First of all, in Sosu Seowon that pursued the organization of a director-yusa, 657 directors served for five months on average from its foundation to 1900. They were mostly the enrollees of it, and the cases of those who served as the director twice or more reached up to 225, and they served as few as twice and as many as seven times. The bylaws stipulate the qualifications for being one of the executives among those who passed Mungwan (文官) and Sama (司馬), but more than half of them were Confucian scholars. Meanwhile, many of them were the figu res who lived in the villages near the seowon, and it was operated exclu sively by some Seonggwan (姓貫). From the mid- or late 18th century, prestigious men from outside or local officials in service were appointed as the director in order to adhere to governmental authority. About yusa, permanent yusa was there while temporary yusa were selected from time to time, too, to take charge of the duties. Concerning Bailudong Seowon, for Yeosan-gukhak in the Tang Dynasty, the master of Gugyeong (九經) in Gukjagam became Dongju in charge of teaching with a goal of edu cation to cu ltivate persons of ability then. In the Northern Sung Dynasty when the seowon was restored, it took on characteristics as a national school according to the prevailing trend of the time. The identity and characteristics of Bailudong Seowon were established by Chu-tzu in the Sou thern Sung Dynasty. He pu t himself in the position of the first Dongju and recruited students for teaching and also suggested the direction that the seowon should pursue, for instance, Dangjang (堂長), inviting noted scholars, or supervising the lectures. The most noteworthy part about the Ming Dynasty is that Dongju who had passed Gwageo formed up to 90%. This was a phenomenon in response to the trend of seowon becoming bureaucratic due to the government’s control over education. Since teaching in the seowon during the Qing Dynasty took ‘Gwageo Gongmyeong’ as its main principle, the court dispatched a person suitable for this condition as Dongju. 이 글은 韓・中서원의 院任을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과 동아시아 서원의 모범 중국 백록동서원을 교차 검증한 것이다. 원임의 일반적인 차이점은 먼저 한국서원은 향촌 내 명망가를 자율적으로 선임 하되, 주로 원장-(장의)-유사 체제로 서원을 운영했다. 반면 중국서원은 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원임으로 구분하여 운영했고, 원장은 지방 관료 또는 대학자 초빙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官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또 중국서원이 한국서원 보다 원임의 직제가 보다 세분되어 있으며, 조직 규모가 더 컸다. 다만 한국서원은 관의 영향력이 강한 중국서원에 비해 자율성이 크게 보장되었다. 다음은 소수서원과 백록동서원을 비교해 살펴보았다. 우선 원장-유사 직제를 지향한 소수서원은 창건부터 1900년까지 657명의 원장은 평균 5개월씩 재임했 다. 이들은 주로 입원생 출신들로 2회 이상 원장을 중임한 자가 무려 225회에 달했고, 적게는 2회 많게는 7회나 역임하였다. 규약에는 文官과 司馬 합격자 중에서 원임의 자격을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유학 신분의 비율이 절반이 넘었다. 한편 이들은 주로 서원 인근 고을에 거주한 인사들이 많은 가운데, 일부 姓貫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운영되었다. 18세 중・후반부터는 외부 명망가, 현직 지방관을 원장으로 삼아 官權과 밀착했다. 유사는 상시 유사를 두면서 서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유 사를 수시로 선발하여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백록동서원은 唐代 여산국학은 국자감 九經박사가 동주가 되어 교수를 관장하 며, 과거 인재 양성에 교육 목적을 두었다. 서원이 복원되는 북송 대에는 당대 보편적인 흐름에 따라 관학적 성격을 띠었다. 남송 대 주자에 의해 백록동서원의 정체성과 특징이 형성된다. 그는 스스로 초대 동주에 올라 원생을 모집해 강학한 것을 비롯해 堂長과 유명학자 초빙, 강학 업무 관장 등 서원의 지향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명대는 과거 출신 동주가 무려 90%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가장 주목 되는 부분이었다. 이는 조정의 교육 통제에 따른 서원의 관학화 흐름에 조응한 현상이었다. 청대 서원의 강학 성격은 ‘과거 공명’을 주요 기조로 삼았기 때문에 조정 에서는 이 조건에 적합한 인사를 동주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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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대 숭양서원 생원모집 및 교학활동

        궁숭도 ( Gong Songtao ) 한국서원학회 2017 한국서원학보 Vol.5 No.-

        嵩陽書院位于中國河南省登封市嵩山南麓, 創建于五代后唐淸泰元年(934), 距今已有1083年的歷史, 與湖南長沙的岳麓書院、江西廬山的白鹿洞書院、河南商丘的應天書院號稱“四大書院” , 文物瞻富, 名揚古今。現爲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 世界文化遺産。淸代初年著名學者耿介受聘出任嵩陽書院山長近20年, 開門辦學, 選拔優秀學子, 學而敎之, 培育成才。依据耿介所著『敬恕堂文集』記載, 僅其一人先后115次招收生徒共計123人在書院學習, 這些學生來分別來自中國河南、山西、河北、江蘇、山東、?西等地, 年齡最小的不到20歲, 年齡最大的整整60歲;學習時間最短的僅有半天和六天, 時間長的超過六年以上;耿介根据科擧取士的選拔標准, 對自己選拔出來的123名生徒進行傳道、授業、解惑, 生徒學業大有進步。經過初步査?相關資料知道, 這120多人中, 有百余人通過科擧, 取得功名, 特別是景日??居書院學習六年余, 成績比較優秀, 康熙二十六年(1687)丁卯科擧人第14名、康熙二十七年(1688)戊辰科進士第46名、康熙三十年(1691)辛未科殿試第36名, 官居一品, 是嵩陽書院生徒中的??者。嵩陽書院學規主要是針對學生制定的, 如康熙十三年(1674)『輔仁會約』、『爲學六則』和康熙十七年(1678)『敬恕堂學規』, 沒有涉及敎師的儀注內容, 這三則學規都是山長耿介根据當時實際情況親自制定幷督行的。當時關于嵩陽書院敎師講書的儀注沒有統一的范式, 儀注, 就是書院講書的禮儀和制度。耿介受聘任嵩陽書院山長后, 感覺到敎師講書儀注不規范, 書院的日常運行也就不規范, 要有一個統一的標准, 不能五花八門。耿介經過査閱歷史典籍記載, 結合當時比較常見的、大多數人都比較認可的講書儀注形式, 與當時同在書院講學的諸位名師碩儒如??祖、李來章、張沐、?克勤、焦欽寵、張壎等商討一致, 初定『嵩陽書院講書儀注』, 專門針對敎師講學時的服?、禮行、言語、講學內容等進行規范和約束, 施行數年, 又經過不斷的補充和完善, 大家感覺良好, 康熙二十一年(1682), 『嵩陽書院講書儀注』正式施行, 一時間, 中原地區大小書院盡皆倣效, 成爲講書儀注之標尺。嵩陽書院講學內容比較實用, 主要是爲諸位生徒參加科擧考試而進行的講學活動, 書院諸位學者根据所招收生徒的學業程度, 有針對性的進行輔導敎學, 提高生徒的文化修養程度, 依据目前有關史料知道, 淸代嵩陽書院生徒參加科擧入仕的比例是?高的, 這是嵩陽書院在淸代享有?高聲譽的最主要的原因之一。本文以耿介的10多篇講稿題目爲例, 可以看出, 嵩陽書院的敎學內容是以傳習理學爲主, 更重要的是時刻關注國計民生的發展, 反映出中國古代文人們强烈的憂國憂民意識和觀念, 時刻做好“出仕” 的准備, 報效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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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길재 제향 서원의 건립 추이와 성격

        임근실 한국서원학회 2022 한국서원학보 Vol.15 No.-

        吉再는 고려 말기 영남지역에서 은거하여 조선이 건국된 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후 후학 양성에 매진한 인물이었다. 길재는 그의 문인이었던 조선 초기 도학자들과 동방 理學의 祖인 정몽주를 잇는 가교로 위치하였다. 조선에서 서원의 설립이 진행되면서 길재를 제향하는 서원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1570년대 선산에선 金烏書院이 건립되었고, 1580년대 인동에선 吳山書院이 건립되었으며, 17세기에 들어서면 금산에서 星谷書院이 건립되었다. 금오서원과 오산서원은 16세기 분기하는 ‘道統論’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였 다. 금오서원은 松堂學派의 주도로 길재, 김종직, 정붕, 박영을 제향하였고, 이 계보를 ≷一善誌≸에 수록하였다. 오산서원은 퇴계학파의 주도로 길재를 제향하고, 김종직 이후 조광조와 이언적, 이황으로 이어지는 계보 의식을 ≷吳山志≸에 수록하였 다. 금산에 건립된 성곡서원은 지역의 鄕賢을 함께 모시기 위해 건립하는 의미가 강한 곳이었다. 성곡서원은 금산에서 최초의 서원으로 길재를 포함하여 모두 6인을 제향하였다. 하지만 성곡서원은 금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사액을 추진할 때 길재의 위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서원들은 조선시대 지식인에게 길재의 도학자적 성격을 추모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보완하여 길재의 충절자적 성격을 기리는 상징으로는 採薇亭, 砥柱中流碑, 不二祠가 기능하였 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금오서원과 채미정, 오산서원과 지주중류비, 성곡서원과 불이사가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가진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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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시우와 강절서원

        노소준 ( Lu Xiaojun ) 한국서원학회 2017 한국서원학보 Vol.5 No.-

        薛時雨在擔任地方官員期間, 就積極參與地方書院事務;后來主講杭州崇文、南京尊經、惜陰書院, 長達二十年之久。他在書院史上的貢獻, 一是將書院景觀與造士爲文相聯系, 賦予書院景觀以象征意義, 在文學地理的微觀理論方面獨樹一幟;二是有知人之鑒, 培育人才衆多, 尤其是選拔了不少寒士, 在晩淸東南士林中享有?高的威望;三是編刊書院課藝總集達十種之多, 這些總集保存了不少東南名士的書院習作, 在書院文獻方面具有重要价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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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世纪中国书院的学术转型与官学化

        진시룡 한국서원학회 2022 한국서원학보 Vol.15 No.-

        17-18세기 중국 서원은 명대 말기 비판, 폄훼를 받았던 국면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학술 교육의 중심지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겪는다. 이 변화 과정 배후에는 최고 통치자의 지지 및 이로부터 발생한 서원의 관학화 현상이 그 주요 동력으로 작용했다. 순치(順治) 연간, 처음으로 서원 배척 정책이 이루어졌다가 이후 그 압박이 느슨해졌고, 강희(康熙) 연간에 이르러서는 정통(正統) 이념의 구축으로 말미 암아 서원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후 옹정(雍正) 연간에는 성회(省會) 서원의 건립이 이루어졌고, 이에 서원은 점점 더 관방의 지원을 많이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 또한 점점 커져 사회에서 긍정적 인식을 얻게 되었다. 옹정, 건륭 연간에는 성회 서원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부(府), 주(州), 현(縣) 및산간벽지에서도 서원이 건립되어, 서원 수량이 청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정부 차원에서 선생과 학생을 직접 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도들의 진로 또한 보장해 주는 등의 정책 이 지속 시행되었기 때문에, 18세기의 서원은 안정적으로 각급 학술 교육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 200여 년 사이, 서원의 학술 풍조 또한 명대 말기의 공담무실(空談無實)한 강학 방식에서 쇄신을 이루어 정주이학(程朱理學)으로 변화하였고, 재차 고거학(考據學)으로 전환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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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남서원(道南書院)의 강회(講會)와 강학(講學)

        김정운 한국서원학회 2023 한국서원학보 Vol.16 No.-

        The Donam Seowon was founded by the Nakdong River under the patronage of the Sangjumoksa and Gyeongsanggamsa as Jeong Gyeong-se took the initiative and gathered opinions from the local nobility in 1605. This was the first Seowon of Sangju, which means that it is an important place to determine the study atmosphere of the Sangju area. Jeong Gyeong-se led the Donam Seowon project. Believing that there were greater effects when people studied together, he wanted to build a Seowon for study purposes. He also believed that a Seowon should be founded by the local nobility to discuss with local government officials in providing resource support. Built for this purpose, a Seowon would be a place of gathering and study by local people and government officials. This is how the Donam Seowon was established. However, since its foundation, the Donam Seowon made diverse changes according to the academic atmosphere of the times. In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100 years after its foundation, the Seowon underwent changes to its study direction and management style. Gwon Sang-il took the lead in these changes. He passed the state exam in 1710 and served in the government before becoming the director of the Donam Seowon in 1723. During his leadership, Seowon faced one of its biggest changes, which was the application of internal regulations of the Isan Seowon. According to the rules, a Seowon should have resident Confucian scholars whose main duties were to promote reading and give lessons about Ui-ri and were forbidden to prepare for the state exam on the job. Seowons even banned essay contests to prepare for the state exam. Gwon believed that Seowons should be a research institute to pursue academics, and criticized that the study atmosphere of Sangju was rather distant from his ideal in those days. The Donam Seowon regained its vitality thanks to the effects of the willing director, but it lost its vitality once again. One of the main reasons might have been the restriction of study for the state exam. The financial burden of keeping resident Confucian scholars would have been huge as well. It was Jeong Jong-ro that went back to this atmosphere, resumed study meetings, and created a mood for constant study at the Donam Seowon.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Jeong emphasized the pursuit of study at the Seowon and prepared a set of rules. He organized a Ganghoi at the Myeon level and made a list of questions for superior students so that they would discuss and contemplate for themselves. Such questions were sent to the Donam Seowon and used at discussions during Hoigang. Jeong Jong-ro believed that a Seowon should promote active pursuit of study to fulfill its original purpose, and it was in line with Jeong Gyeong-se's fundamental problematic consciousness at the time of the Seowon's foundation. 도남서원(道南書院)은 1605년 정경세(鄭經世)가 주도하여 지역 사대부들의 의견을 모으고, 상주목사와 경상감사의 지원을 받아서 낙동강 가에 설립되었다. 상주에 생긴 최초의 서원이고, 으뜸 서원이다. 그러므로 도남서원은 상주지역에서 학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다. 도남서원의 설립을 주도한 것은 정경세였다. 공부는 여럿이 모여 함께 할 때 효과가 크기 때문에 서원을 설립하여 공부하자고 하였다. 정경세는 서원은 지역 사대부가 논의를 일으키고, 지방관이 자원을 지원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만든 도남서원에서 상주 사대부들과 지방관은 함께 공부하였다. 이후 도남서원은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서원이 설립되고 100여 년이 지난 18세기 전반 변화를 주도한 것은 권상일(權相一)이었다. 권상일은 1710년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있다가, 1723년 도남서원 원장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원규(院規)를 도남서원에 적용하였다는 점이다. 서원은 거재유생(居齋儒生)을 유지하고, 거재유생은 강독하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을 주로 하며, 거재하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해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서원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백일장을 개설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대신 거재유생과 별도로 응강(應講)과 제술(製述)유생을 두어 원생의 역할을 세분화 하였다. 거재유생은 서원의 본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응강과 제술유생은 현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권상일은 서원이 순수학문 연구기관이 되기를 바랐다. 도남서원의 강학은 약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과거공부를 제한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또 거재유생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역시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돌려 다시 강회를 열고, 상시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정종로(鄭宗魯)이다. 19세기 전반 정종로는 서원에서 강학을 강조하였고, 규칙을 마련하였다. 각 면(面)을 단위로 강회(講會)를 조직하고, 우수한 학생을 중심으로 문목(問目)을 작성하여 스스로 논의하고 고민하도록 하였다. 이 문목은 도남서원으로 보내서 회강(會講)할 때 함께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종로는 강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서원을 세운 본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정경세가 서원을 설립할 때 가졌던 근본적인 지향과 닿아 있었다.

      • KCI등재

        조선후기 상주 玉洞書院 원임의 구성과 변화

        김순한 한국서원학회 2023 한국서원학보 Vol.16 No.-

        This article reviews the operation and characteristics of Okdong Seowon(玉洞書院) in Sangju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based on existing old documents. The predecessor of Okdong Seowon was Baekokdong Yeongdang(白玉洞影堂), where the portrait of Bangchon Hwang, Hui(厖村 黃喜) (1401-1456) was enshrined in the 16th century. In 1714 (the 4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t was promoted to a seowon after enshrining Saseo Jeon Shik(沙西 全湜) (1563-1642), and in 1786, Chukong Hwang, Hyo-heon(蓄翁 黃孝獻)(1491-1532) and Bangan Hwang, Yu(槃澗 黃紐)(1578-1626) were enshrined. Later, in 1789 (the 13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it was granted the name Okdong(‘玉洞’) by requesting the tablet given from King promoted by the local literati. The subjects who organized and operated Seowon are wonim(院任) and wonsaeng(院生). In the case of the composition of members, Okdong Seowon was promoted to a seowon in the early 18th century, and since then, according to the operation model of Donam Seowon, a representative Seowon of the Sangju Namin line, it has been operated as a ‘wonjang-jaeim’ system. The system continued until 1828 (the 28th year of King Sunjo's reign), began operating under the “wonjang-1 yusa-jaeim” system from 1868 (the 5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to 1879 (the 16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and operated under the original operating system of ‘wonjang-jaeim’ for about six years from 1880 to 1886. For the next six years, from 1887-1893, it operated under the system of ‘1 yusa-2 yusa-jaeim’ system, in 1889, it briefly operated under the system of ‘1 yusa – 2 yusa – jangui’, the following year, it operated under the system of ‘1 yusa – 2 yusa- jangui – jaeim’; and then, until 1900, it operated under the original system of ‘wonjang-jaeim’. Since Baekokdong Yeongdang was promoted to Okdongs Seowon in the early 18th century, wonjangs and jaeims were generally elected from the local literati in order to take charge of the operation of the seowon. The clans included Hwang of Jangsu, Lee of Heungyang, Cho of Pungyang, Yeo of Seongsan, Gang of Jinju, Gang of Jaryeong, Kim of Yeongsan, Kim of Uiseong, Gang of Shincheon, Kwon of Andong, Kim of Cheongdo, Rho of Gwangju, Son of Gyeongju, Song of Yeosan, Lee of Jeonju, Hong of Namyang, and Hong of Burim. However, by the late 18th century, the proportion of the wonjangs and jaeims elected from the clan Hwang of Jangsu Hwang began to increase. By the 19th century, the proportion of the clan Hwang of Jangsu as wonims was intensifying, and a small number of clans led the operation of Okdong Seowon along with the clan Hwang of Jangsu, such as the clans of Kang of Jinju, Chung of Jinju, and Song of Yeosan. 이 논문은 조선후기 상주 옥동서원의 원임 구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변화와 특징을 검토한 글이다. 옥동서원의 원임은 원장과 재임으로 구분하여 선출하였다. 원장직은 서원을 대표하여 모든 대소사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서원을 상징하는 존재이기에 학덕을 갖춘 인물을 선출하고자 노력하였고, 선출된 이후부터는 원장의 권위에 합당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옥동서원의 원임 구성과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임원록』과 『분향록』, 『집사분정』 등 서원의 고문서를 주 자료로 활용하였다. 18세기와 19세기로 구분하여 시기별 원임 구성과 변화를 분석하였다. 총 1,133명의 원임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원임 구성과 변화를 시기별로 밝힐 수 있었다. 첫째 옥동서원은 18세기 초반 서원으로 승격된 이후 상주 남인계 대표 서원인 도남서원의 운영을 모범으로 ‘원장-재임’ 체제로 운영하였다. 이 체제는 1828년까지 이어지다가 1868년부터 ‘원장-1유사-재임’ 체제로 변화되어 1879년까지 약 11년간 유지되다가 1880~1886년에 잠시 ‘원장-재임’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후 1887~1893년 동안은 ‘1유사-2유사-재임’ 체제로 바뀌었다가 1894~1900년에 다시 ‘원장-재임’ 체제로 변화되었다. 이처럼 원임 구성 체제가 여러 차례 바뀌는 등 혼란이 있었던 것은 대원군 집권기에 대대적인 서원 개혁 정책에 의해 미사액원사를 훼철하고 지방관이 사액서원의 원장을 맡도록 하면서였다. 둘째 원장의 인원수와 재임 기간 그리고 성씨별 분포에서도 몇 가지 변화와 특징을 알 수 있었다. 원장 인원수는 18세기 원장 인원수에 비해 19세기 원장 인원수가 2배 이상 급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18・19세기 원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각각 10.4개월과 5.8개월로 큰 차이를 보였다. 18세기 전반기는 원장 수는 총 30명으로 선출된 성씨는 17개였으며 한 문중의 성씨가 원장직을 독점하지 않고 대체로 상주 향내 인사들이 고루 선출되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기가 되면 전반기에 비해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원장 수가 68명인데 장수황씨가 19명, 풍양조씨가 14명으로 두 성씨의 원장 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서원의 추가배향과 청액 활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성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성공적으로 완수한 결과가 원장 선출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19세기 원장 수는 202명이었는데, 장수황씨가 57명을 차지하였으며 19세기에도 여전히 서원 운영의 주도권은 장수황씨가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 19세기에 선출된 원장의 성씨를 18세기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변화가 눈에 띈다. 먼저 풍양조씨가 16명에서 6명으로 급격히 줄었다는 것이다. 반면 18세기 원장 비중이 낮았던 성씨가 19세기에는 급격히 높아진 성씨도 있었다. 진주강씨인데 18세기에는 10명이던 것이 19세기에는 32명으로 급증한 변화도 보였다. 이외 서원 운영의 참여율이 높은 성씨로는 진양정씨, 여산송씨로 나타났다. 제향자 사서 전식의 후손 옥천전씨의 원장은 18・19세기 모두 1~2명 정도임을 참고하면 서원 운영에 미미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재임의 구성은 선출된 황씨의 명단을 검토해보면 대체로 장수황씨였다. 18・19세기 황씨의 재임은 356명으로 42%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성씨는 이씨, 김씨, 조씨, 정씨 등이었다. 조선후기 옥동서원의 원임록 분석에서 드러나는 것은 18세기 초반 향중 인사가 고루 선출되어 서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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