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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태의 한국사교육론

          김수태(KIM, Soo-Tae) 한국사학사학회 2015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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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해방 직후 손진태가 크게 주목한 한국사교육론이 그의 신민족주의사관과, 한국교과서 및 한국사개설서의 저술과 매우 밀접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음을 검토한 것이다. 해방과 함께 현실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손진태는 한국사연구에서 한국사교육으로 그 방향을 전환시켰다. 그는 자신의 한국사연구와 관련해서 새롭게 제시하였던 신민족주의사관을 한국사교육을 통해서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봉건적이거나, 계급주의적이거나, 국수주의적인 한국사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농민이냐, 노동자이냐 학생이냐, 지식인이냐 등 그 대상에 맞추어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손진태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사관이 반영된 제대로 된 교과서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사실의 나열 및 그에 대한 암기가 아니라, 독자적인 시대구분론과 함께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국사의 사실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비판이 없는 한국사 교육은 가치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손진태는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한국사 교과서 저술을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국사대요(1949)는 그의 첫 한국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한국사 교과서를 저술하는 한편, 검정 한국사 교과서도 저술하였다. 그것이 중학교 사회생활과 역사부분 : 우리나라 생활(대한민족사)(1950)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을 추진하였던 손진태는 이에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에 시행된 검정 한국사교과서의 방침으로는 그가 지향하는 한국사 교과서가 제대로 서술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국사대요를 보다 발전시켜 국사강화(1950)를 새롭게 저술하였는데,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한국사 교과서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한국사 교과서의 교사용 참고서 저술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적당한 교사용 참고서가 없다면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한국사교육에 있어서 역사교사의 역할과 참여가 얼마나 중요함을 일깨워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 그와 같은 용도로 만들고자 한 교사용 참고서는 이후 대학생과 일반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사개설서로까지 발전되었다. 그 결과 현재 널리 알려져 있는 한국사 개설서인 조선민족사개론(1948)이 나오게 되었다. This paper reviews the Son Jintae's theory of Korean history education right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II and discusses the close relation between his neo-nationalistic view of history and his writings of Korean history textbooks and a general history of Korea. As he had a deep interest in the contemporary politics after the end of the war, he switched his focus from the research of Korean history to the education of Korean history. Son tried to implement his neo-nationalistic view of history in the eduction of Korean history, and preached against a feudalistic, classist, or nationalistic education of Korean history. He insisted the history eduction to be tailered to the subjects, whether they be farmers, workers, students, or intellectuals. Son Jintae was deeply interested in writing of a textbook on Korean history and made various attempts to write one for the secondary school. His Guksa Daeyo (A Summary of Korean History, 1949) was his first textbook on Korean history. Another book of his, Life of Our Nation, History of Daehan Minjok, 1950) became an authorized textbook for the middle school. As he was not pleased with the textbook screening system of the time, he improved his earlier book of Guksa Daeyo and wrote Guksa Ganghwa (Lecture of Korean History, 1950), presenting his own ideal type of a textbook on Korean history. Son Jintae also made efforts to write a reference book for the textbook of Korean history, as he felt that, without a proper reference book, teachers would have many problems in teaching students Korean history. This shows his strong emphasis of the role and participation of history teachers in the education of Korean history. His reference book later developed into a general history of Korea for college students and the general public. The end result was the publication of Joseon Minjok Sa : A General History of Korean Nation, 1948), which is now a well-known book on a general history of Korea.

        • KCI등재

          식민사관의 차질(蹉跌)

          정준영(JUNG, Joon-Young) 한국사학사학회 2016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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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1923년에 조직되어 대략 193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조선사학회라는 일본인 단체에 주목하면서, 191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식민사학이 어떤 딜레마적 상황에 처해있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20년대 들어 어떻게 식민지 관변사학의 제도화를 모색했는지를 검토했다. 1923년 설립되어 1924년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던 조선사학회는 식민사학의 제도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보았듯이 여러모로 전환기적 성격이 강했다. 조선사학회가 설립되었던 것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의욕적으로 출범시켰던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중단된 이후 1922년 조선사편집위원회가 설치되어 관변 역사편찬의 새로운 전환을 모색했을 무렵이었다. 이런 전환의 시점에서 조선사학회는 1910년대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이 가졌던 식민지 통사의 문제의식, 즉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통시대적으로 서술한다는 지향을 계승하면서도, 관변통사 자체가 가지는 자기모순, 즉 역사연찬과 역사보급 사이의 딜레마를 ‘지상강의(紙上講座)'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취해서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조선역사의 보급이 과연 실효를 거두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있는 듯이 보인다. 실제 서술에서 조선사강좌가 과연 누구를 독자로 겨냥하고 있었는지가 불분명할 뿐 아니라, 과연 이런 통속강좌로 조선인들에게 의도했던바 의식의 개선이 당시에 이루어 졌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Chosensigakkai, or The Chosun History Society was established by Oda Shogo(小田省吾), the high-ranking officer of the Chosen Governor-General and the Japanese historians who served for government in Colonial Korea, and was officially accredited as a “academic society in 1923. This association held many academic lectures for a year since its foundation, and published and distributed lecture note, The Lecture of Chosen History(朝鮮史講座) every month. Especially, the publication of this lecture note was closely related to the Chosenhantosi(朝鮮半島史) compilation project that the colonial state had promoted enthusiastically in the 1910s promoted enthusiastically. The purpose of this project was to compile a unique Korean history in perfection from the viewpoint of Japan. But, this project failed and the colonial state changed its direction. In this sense, the activities of Chosensigakkai in the 1920s can be located i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colonial historiography. This study aims to inquire into and reveal meanings of the institutionalization of colonial historiography through analyzing the activities of Chosensigakkai in the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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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에서의 歷史主義 受容

          盧鏞弼(Noh, Yongpil) 한국사학사학회 2011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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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은 한국사 연구를 진행해 나가면서, 베른하임ㆍ크로체의 사학사 및 헤겔ㆍ랑케ㆍ마이네케 등의 역사이론서들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저서들을 이기백이 일본유학 시절에 흥미롭게 읽은 이후 내내 소장하고 있으면서 틈틈이 참고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 논문에서 직접 인용하기도 하였음은 물론, 특히 베른하임의 국역본 『역사학입문』의 경우에는 역사학도들에게 읽기를 즐겨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를 적극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초석으로 삼음으로써 한국사학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역사학자의 하나로서 이기백을 최우선으로 꼽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기백은 어떠한 역사이론일지라도 적극 수용하여 그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러한 그의 지론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에 공부하기 시작하여 지니게 된 역사주의를 위시한 여러 역사이론에 대한 지식과, 그 자신이 간단없이 역사를 연구하면서 지속적으로 해온 깊은 통찰의 산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결과 헤켈과 마이네케의 역사 해석을 종합하여, 그는 역사 자체가 발전하는 것이며, 그 발전과정의 사실들을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그의 한국사 발전 사관에는 헤겔의 역사철학에 나타난 발전 사관과 마이네케의 상대적 평가 사관의 영향이 융합되어 깃들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는 역사주의의 이론을 수용해서 극력 연구함으로써 한국사학을 발전시켰으되, 학자들에 의해 가지각색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사용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경청하여 학술용어로서는 ‘역사주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 역시 참으로 이기백, 과연 그다운 역사연구 및 서술방식의 일단이었다고 하겠다. Conducting a study of Korean history, Ki-beak Lee read Bernheim and Croce's books of history of historical studies and Hegel, Ranke and Meinecke's books of historical theories etc. and was affected by them. Ki-beak Lee not only referred to their books from time to time owning them all the time after reading them interestingly while studying in Japan, but also cited them directly in some of his articles. And in particular, in the case of Bernheim's Introduction to historical studies translated in Korean he also recommended students studying history to read it. Therefore, in my view it is so natural to regard Ki-beak Lee as one of the typical historians who developed Korean history by laying the foundation stone of historicism as well as accepting it actively. He thought that the foundation had to be laid by accepting it aggressively whatever historical theory it is. It needs hardly to be said that this philosophy of his is a product of his knowledge of a variety of historical theories including historicism which he came to know starting to study it while learning in Waseda University, Japan, and of deep insights which he could obtain keeping studying history for himself. As a result, putting together Hegel and Meinecke's interpretation of history, he thought that history in itself develops, and facts in the process of development should be evaluated relatively in situations of the times. Ultimately, it is unquestionable that in his view of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the influences of a view of developing history reflected in Hegel's historical philosophy and Meinecke's view of history of relative evaluation are mixed. However, he developed Korean history by intensively studying theories of historicism accepting them but he never employed ‘historicism' for a scientific term listening to an opinion that it would be better to avoid using it as it was used by scholars in diverse way. It can be said that this is also Ki-beak Lee's own unique way of historical research and narrative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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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基白의 『한국사 시민강좌』 간행과 民族의 理想 실현 지향

          노용필(Noh, Yong-Pil) 한국사학사학회 2014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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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1924-2004)이 1987년 『한국사 시민강좌』를 간행하기 시작한 이후 자신이 직접 집필한 게재문과 「독자에게 드리는 글」 등을 통해 누누이 강조한 바는, 2가지 점이었다고 가늠된다. 첫째, 한국사 자체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지향하며 전개되어 왔고, 둘째, 한국민족의 이상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사회의 건설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자신 스스로 분신(分身)과도 같다고 하였던 『한국사신론』의 1990년 신수판에서부터 이 내용을 이미 반영하였다. 『국사신론』(1961)에서건 『한국사신론』 초판(1976)부터 한글판(1999)까지에서건 일관되게 4월혁명에 관해 최종적으로 서술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4월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논함에 따라 『국사신론』에서는 '자유'가 꼽아졌고, 『한국사신론』 초판(1967)에서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자연스레 거론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던 것이 『한국사신론』 개정판(1976)에서부터 '민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의 '대세'가 언급되더니, 신수판(1990)에서부터는 이에 덧붙여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로 이어질 것이 기대되고 있다"는 대목이 기술되었다. 이는 결국 이기백이 자신의 지론인 2가지 사실 즉 첫째, 한국사 자체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지향하며 전개되어 왔고, 둘째, 한국민족의 이상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사회의 건설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지론을 이기백이 일반 시민을 독자로 하는 1987년 『한국사 시민강좌』의 창간을 즈음하여 표방한 후, 1990년 『한국사신론』 신수판에 이미 반영하였으며, 이후 1999년의 『한국사신론』 한글판에서도 그대로 존속시켰음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Since his publication of The Citizens' Forum on Korean History(『韓國史 市民講座』) in 1987, there seems to be two points Lee Kibaik(李基白,1924-2004) continued to emphasize through his own writing and "Letter to Readers". First point is that Korean history itself evolved towards society for freedom and equality, and second is the fact that ideal of the Korean people was to build a democratic society in pursuit of freedom and equality. He already reflected such point of view from the new edition of Han'guksa Sillon (『韓國史新論』,A New History of Korea) in 1990, which he deemed as another self. We can see that he significantly and consistently dealt with the April Revolution throughout Kuksa Sillon (『國史新論』,A New History of Our Nation,1961) and the first edition (1976) and Korean version (1999) of Han'guksa Sillon. And it is obvious that in the course of discussing the historic meanings of this April Revolution, he emphasized freedom' in Kuksa Sillon and naturally argued in favor of 'development of democracy' in the first edition of Han'guksa Sillon (1967). And then he mentioned the 'mainstream of people's direct political participation' from the revised version of Han'guksa Sillon (1976) and one step further In Its new edition (1990), he said "I expect this trend will be connected to building of a democracy country In which social justice Is secured based on freedom and equality." This tells us two facts on which he placed his firm conviction: First Is that Korean history I tself evolved towards society for freedom and equality, and second Is the fact that I deal of the Korean people was to build a democratic societyIn pursuit of freedom and equality. At the time of his publication of The Citizens' Forum on Korean History In 1987 for ordinary readers, he started to advocate his conviction as such and reflected It In the new edition of Han'guksa Sillon and then sustained such conviction In Its Korean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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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戰後日本에서의 韓國史 時代區分과 韓國學界에의 影響 : 社會構成體論을 中心으로

          趙誠乙(Cho, Sung-eul) 한국사학사학회 2004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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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ontents of this paper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in post.war Japan, they have tried to understand East Asian History from the standpoint of Japanese History. This attitude distorted the understanding of Korean and Chinese History. Secondly, Japanese historians have maintained that the Japanese society of the 7th and 8the century was general slavery society. This argument also has led to the misunderstanding of Korean and Chinese History. Thirdly, Japanese historians generally have argued that the medieval age in Japan began in Kamakura Bakufu of the 11th century. This understanding have caused the misunderstanding of the beginnings of medieval period in Korean and Chinese History.Fourth, Japanese historians generally have maintained that Tokugawa Bakufu was modern period, but they have thought that the period belongs to feudal society from the standpoint of social formation theory. Fifth, Some Scholars in Japan have argued that the ancient slavery system ended late in the 17th century and medieval period began after that. This argument also caused the misunderstanding that the ancient period in Korea and China continued until the late 17th century. Asabove.mentioned, the misunderstandings of Their own Japanese History from the standpoint of social formation theory and the mechanical misuses to Korean and Chines History have inhibited the correct understanding of Korean and Japanese History. Some Korean scholars from the standpoint of social formation theory, have been deeply influence by Japanese social formation theory historiography and the Korean scholars have caused misunderstandings of the periodizations of Korean History. But in some aspects, the imports of the post.war Japanese historiography have contributed to the theoretical developments in Korean historiography continuously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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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평요람』의 한국사에 대한 접근

          김가람(KIM Ka Ram) 한국사학사학회 2015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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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국 직후부터 역사서 편찬에 관심을 가진 朝鮮은 1445년(세종 27) 世宗의 명에 따라 鄭麟趾와 集賢殿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 역사를 정리한 『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이때 세종이 우리나라의 역사도 포함할 것을 지시하면서, 『치평요람』은 중국 역대 왕조의 제목 아래 해당 시기의 한국 역사를 서술하는 체제로 편찬되었다. 그 결과 한국사는 약 1,200건의 기사와 15건의 사론이 있으며, 이는 『치평요람』의 전체 분량 가운데 기사는 약 9.8%, 사론은 약 0.8%의 비율이다. 『치평요람』이 18개의 중국 국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한국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것만은 아니다. 이 가운데 古朝鮮부터 삼국시대까지의 기사는 228건이고, 나머지 약 1,080건은 고려의 기사이다. 기사의 상당수는 전쟁과 반란, 향락, 재해 등의 국가적 혼란 및 중국과의 외교와 관련이 있다. 제도 개편을 비롯하여 학문 및 종교, 왕실, 풍속, 충절, 인륜, 구휼 등의 기사도 등장하지만, 이들도 대부분 평탄한 시기보다는 국가적 혼란 및 변화의 시기와 연관되어 등장한다. 이것은 『치평요람』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치평요람』은 다른 사서로부터 기사를 발췌하여 편찬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내용을 부각시키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치평요람』에 실린 한국 기사들은 조선 초기에 주목을 받았던 사건과 그 사건을 바라보는 편찬자들의 시각이 담겨 있다. 즉 『치평요람』에서 서술한 한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조선 초기 『치평요람』 편찬자들의 한국사 인식에 접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건을 부각하고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치평요람』 편찬자들의 편찬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치평요람』은 전쟁이나 정권 교체와 같은 혼란 혹은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특히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과 고려 및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은 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우선 삼국시대의 경우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對중국 전쟁 패배 및 倭에 세자를 보내는 등의 미성숙한 국가 체제, 淵蓋蘇文의 국정 장악 등을 서술하며 영토 확장과 같은 업적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다양한 충절 기사를 제시하면서 삼국 통일 전쟁 당시 신라인의 간절함을 부각시켰다. 이를 통해 민심에 감동한 천명이 신라로 옮겨 갔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고려의 건국 또한 비슷하다. 王建이 등장할 무렵 후삼국 사회의 혼란과 이를 평정하는 왕건의 활약에 대하여 상당한 분량의 기사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천명이 옮겨 가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조선의 건국 또한 고려 후기의 혼란과 천명을 받은 李成桂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이쯤부터는 중국의 기사보다 고려 기사의 수가 더 많다. 다만 신라의 삼국 통일과 고려 및 조선의 건국은 천명을 받은 영웅의 유무에서 차이가 난다. 신라의 경우 신라인들의 충절을 강조하지만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고려와 조선은 천명을 받은 왕건과 이성계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기본적으로 『치평요람』은 임금의 정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인데, 신라의 경우 임금이 아닌 신라인들의 활약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와의 외교 활동을 통해 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진 임금이 여왕이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치평요람』은 여성의 대외적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여왕과 천명을 연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인들의 충절에 감동받은 천명이 움직인 것으로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고려와 조선은 결격 사유가 없는 왕건과 이성계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러므로 『치평요람』은 기존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천명을 받은 영웅으로 이들을 부각시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치평요람』은 혼란을 딛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삼국 통일 때의 신라와 고려 건국, 조선 건국을 모두 같은 체제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성계의 출현은 혼란스러운 사회를 수습하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천명이 움직인 여러 역사를 통해서도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치평요람』은 조선 건국에 대해 쿠데타가 아닌 천명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Joseon dynasty(조선) had been interested in compile the history books since open, King Sejong directed Jeong Inji and Jiphyeonjeon's scholars to compile the Chipyungyoram(치평요람) which describes Chinese history. Then, King Sejong ordered to narrate include Korea history, Chipyungyoram wrote Korean history at that time under the name of Chinese successive dynasties. As a result, there are 1,200 articles and 15 history essaies on Korean history at Chipyungyoram, each of these has 9.8% and 0.8% of whole articles, it is no small ratio. The important sbject of these articles is Dynasty's confusion like wars, revolts, king's pleasure, and disasters. Chipyungyoram could give prominence to special historical event, because it compiles articles from other history books. Therefore Korean history articles of the Chipyungyoram showed history events that attracted at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editors' values. For this reason, catching the meaning of Chipyungyoram helps to check its compilation intention. Korean history of Chipyungyoram focuses on Silla(신라)'s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and establishment of Koryo dynasty(고려) and Joseon dynasty. First of all,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Chipyungyoram's articles of Koguryo(고구려) and Baekje(백제) just describe their defeat of wars with china, unorganized state system, and continuous revolts and don't range over various achievements like territorial expansion and successful wars. In contrast, the history of Silla writes about loyalty of various classes, it gives prominence to Silla people's earnest desire about unification. As a result, these articles make the readers think that Heaven's will was deeply impressed by Silla people's loyalty moved to Silla. The articles of Koryo dynasty's open is similar to that. There are many articles about the confusion of later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the activity of Wang Geon, King Taejo in Koryo dynasry, to clear it in Chipyungyoram. And this process is described as the moving of Heaven's will. The open of Joseon dynasty is narrated the confusion of late Koryo and the activities of Lee sunggye, King Taejo in Joseon dynasty, to clear it like Koryo cynasty's case. Further Koryo dynasty's articles focused on Lee Sunggye's activities of this time is many more than China's. By the way, there is a difference in being of a hero between Silla and Koryo dynasty, Joseon dynasty. The articles of Silla emphasize Silla people's loyalty, but it wasn't a hero. In contrast, the articles of Koryo dynasty and Joseon dynasty focused on the activity of a hero got Heaven's will like Wang Geon and Lee Sunggye. This difference was caused the being of queen.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having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Silla's Queens laid the foundation of unification. However Chipyungyoram based on a patriarchal ideology didn't admit Queens' achievement, it had no choice but to focus on loyalty of various classes. As mentioned above, the plot of Chipyungyoram is what a someone like a hero got Heaven's will clears social confuse and opens new period. And It means that the appearance of Lee sunggye was an inevitable consequence like many history's exa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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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의 한국사 시대구분론

          김수태(KIM Soo Tae) 한국사학사학회 2015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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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의 한국사학에서 시대구분 문제는 학문적 생애 내내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때문에 생전이나 사후 그의 한국사학을 이해할 때에 우선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시대구분론이었다. 이에 연구자들의 관심은 그의 개설서인 『한국사신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갔다. 그러나 이기백의 한국사학에서 시대구분론이 반영된 부분은 그와 같은 개설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도 시대구분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사상사, 정치사, 사회사, 병제사, 문화사, 사학사 등의 개별 분류사를 통해서 또 다른 시대구분론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는 『한국사신론』과는 전혀 다른 개설서인 『우리 역사의 여러 모습』(1996)을 통해서 분류사 전체를 망라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설서까지를 서술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기백의 한국사 시대구분론은 그의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 보다 전체적으로, 올바르게 파악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오늘의 한국사연구자들에게 시대구분론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Issues of the periodization in Korean historiography were an important topic throughout the academic career of Lee Ki-Baik. Thus, his theory of periodization has drawn interests of scholars when they try to understand his scholarship in Korean history before or after his death. Their interests naturally lead to his introductory book, "A New History of Korea." His theory of periodization, however, was not limited to his famous introductory book. He was consistent in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periodization in his research of the categorized histories. His theory of periodization was displayed in his discussion of the each categorized history of thoughts, politics, society, military systems, culture, or historiography. In addition to his book, "A New History of Korea," he tried to write a completely new type of an introductory book, "Various Faces of Our History (1996)", that covered whole areas of categorized histories. Therefore, his theory of the periodization of Korean history may be understood totally and correctly through the study of his research of categorized histories. It also reminds the contemporary researchers of the importance of the attention to the theory of periodization in Korean history.

        • KCI등재

          인간의 길을 향한 100년의 진통

          趙東杰 한국사학사학회 2000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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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교수요목기(1945~1955) 사회생활과 설치와 한국사 교육론 -사공환과 손진태를 중심으로-

          조성운 한국사학사학회 2019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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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신을 앙양해야 하는 과제가 부과되었으나 미군정은 냉전체제에 따라 사회주의의 전파를 억제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것이 우선적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목적에 달성하기 위하여 미군정은 학교 교육에서 미군정의 목적과 한국민의 요구를 수용한 교과목으로서 지리, 공민과 함께 역사과를 묶은 사회생활과를 도입하였다. 사회생활과의 도입에 앞장 선 인물은 오천석, 사공환 등이었으며, 사공환은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국사교과는 흥국적 사명을 가진 것으로서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모두에서 민족의 생활·문화 창조와 국민의 사상 선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족 聖祖로서의 단군, 혈통 중심의 민족 개념과 사상통일, 민주주의의 원리로서의 ‘홍익인간'과 ‘화백제도', 개인보다는 전체를 강조하였던 안호상 문교부장관의 민주주의 민족교육(민주적 민족교육)론은 대한민국의 교육론으로 자리잡았으며, 손진태와 사공환 등 국사교육 담당자들은 이에 적극 협력하였다. 문교부 편수국장과 차관을 역임한 손진태는 신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영미적 민주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를 배척하는 한편 양자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 우리 민족에 적절하고 유리한 민주주의적 민족주의, 즉 신민족주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안호상의 민주주의 민족교육론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안호상의 민주주의 민족교육론은 국가주의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그의 주장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이에 그와 안호상 문교부 장관 사이에는 의견의 충돌이 생겼으며, 이에 그는 문교부 차관직을 사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보면 교수요목기 한국사 교육은 미군정이 도입한 사회생활과의 틀에서 이루어졌으며, 정부 수립 이후 신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사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던 손진태 등의 노력은 무산되고, 안호상의 민주주의 민족교육론에 입각한 국가주의적 성격의 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국사과목이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후 한국사 교육이 정치권에 의해 그 교육 내용과 성격이 좌우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Korea sought to clean up the remnants of Japanese colonial rule and promote national spirit, but the U.S. military government prioritized curbing the spread of socialism and transplanting American-style democracy under the Cold War regime. Accordingly,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troduced a social study course that combines history with geography and the publicadministration as a subject that accommodates the purpose of the U.S. military administration and the needs of the Korean people in school education. Those who spearheaded the introduction of social study course were Oh Cheon-seok and Sa Kong-hwan, who are believed to have been in charge of actual affairs. According to him, it was meaningful that the history should contribute to the creation of the people's life and culture, both mentally and materially, and to the direction of the people's thoughts. Education Minister Ahn Ho-sang's argument for democratic national education has become an educational theory of the Republic of Korea. “Democratic national education”(Democratic Education for the ethnic group) emphasized the Dangun as the ancestor of the people, the concept of a bloodline-oriented people and the unification of ideas, the "Hongik man" and the "HwabaekJedo" as the principle of democracy, and the whole rather than the individual. Son Jin-tae and Sa Kong-hwan, who are in charge of national history education, actively cooperated withAhn's view. Son Jin-tae, who served as the head of the ministry of a bureau and vice minister, advocated neo-nationalism while rejecting Anglo-American democracy and Soviet socialism, and taking advantage of both and abandoning shortcomings to adopt democratic nationalism that is appropriate and advantageous to our people. He thought his argument was in line with Ahn Ho-sang's theory of democratic national education, but Ahn's theory of democratic national education differed in that it had a nationalistic character. This led to a clash of opinions between him and Ahn, which is why Son Jin-tae resigned as vice minister of education. In conclusion, the education of Korean history during the Syllabus Period was conducted in the framework of the social study course introduced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efforts of SohnJin-tae and others to provide education on Korean history based on neo-nationalism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were thwarted, and the education of nationalistic character based on the theory of democratic national educationofAhn could be understood to mean that the subject of national history was used for the political purposes of Lee Syng-man's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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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시대 한국 역사학의 해체와 재구성

          김기봉(KIM, Gi-Bong) 한국사학사학회 2015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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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역사학은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3 분과 체제로 구성된다. 이 같은 3 분과 체제를 이식시킨 것은 일제 식민지배 권력이다. 따라서 식민사관으로부터 진정으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이 3 분과 체제를 해체하는 역사지식의 고고학을 통해 한국 역사학 체계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원류는 유럽중심주의다. 근대 역사학 자체가 유럽중심주의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는 ‘근대의 기호'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유럽중심주의 바깥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수 있는가? 이 같은 딜레마를 극복할 목적으로 차크라바르티는 ‘유럽의 지방화'의 방법론을 제시했다. ‘유럽의 지방화'란 유럽이라는 장소성을 부각시켜서 유럽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전략이다. 유럽중심주의가 근대라는 거대담론으로 비유럽이 가진‘공간의 차이'를 말살했다면, ‘유럽의 지방화'는 공간의 차이를 복원하는 ‘공간적 전회'를 시도한다. 문명의 소통과 교류는 공간적 차이를 전제로 한 번역으로 이뤄진다. 르고프는 “문명은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했다. 21세기 한국의 역사학은 글로벌 시대라는 시간과 다문화사회라는 공간을 다스릴 수 있는 문명의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이 난류와 한류처럼 만나는 한반도는 더 이상 세계사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문명의 어장으로 부상할 수 있는 문명사적 장소에 위치해 있다. 한반도 통일은 단절된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반도 통일 시대를 맞이하여 오늘의 한국 역사학은 대륙과 해양 문명의 허브로서 한반도의 ‘공간정신'을 구현하는 한국사의 ‘공간적 전회'를 해야 한다. 이 같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선 한국 역사학은 먼저 식민사관 유산인 역사학 3 분과 체제부터 해체한 연후에, 문명의 교류와 융합을 주제로 해서 자국사와 세계사를 통합하여 재구성하는 황단적 역사 (traversal history)로서 ‘글로벌 한국사'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History as an academic discipline in Korea is based upon the three-compartment system: National History, Oriental History and Western History. Such a classification of the historical studies in Korea was done on the foundation of Japanese colonialist legacy. In order to move on from Japanese colonialism, the historical studies in Korea should deconstruct the existing three-compartment system and reconstruct the historical studies corresponding to the global age. The Japanese colonialist view originated from Euro-centrism. With this relation in mind, we can ask the question: “how would it be possible to study history without Euro-centrism, if modern history presents itself as the 'symbol of modernity' signified by Euro-centrism?” As a way to overcome this dilemma, Dipesh Chakrabarty has presented “Provincializing Europe”, which is a method to go beyond Euro-centrism. "Provincializing Europe" is a strategy for deconstructing Euro-centrism by emphasizing Europe's locality. If Euro-centrism has exterminated “the difference of space” through the Modern as a grand narrative, “Provincializing Europe” attempts a "spatial turn” to restore “the difference of space”. Communication and exchange between civilizations has been achieved by cultural translation based upon spatial difference. Le Goff said, “civilization is defined, above all, by how man governs time and space. In the 21st century, Koreans are facing the task of creating a new grammar of civilization that can govern the global age as well as the multi-cultural society. The Korean peninsula where continental civilization and maritime civilization intersect like warm currents and cold currents is no longer at the edge of civilization, but is located in the ideal historical place to become a fishery of world civilization. The reunification of Korea implies the integration of the divided continental civilization and maritime civilization. In the days of the upcoming reunification, Korean history should make a spatial turn that realizes the spatial spirit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is located at the hub of the continental civilization and maritime civilization. In order to accomplish this task, Korean historiography must, first of all, deconstruct the three-compartment system of history as a legacy of Japanese colonialism. Then, it must develop a 'Korean global history' model that traverses national history and world history in terms of the history of civilizational ex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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