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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 - 재산환수승소판결문을 중심으로 -

          최종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9 禪文化硏究 Vol.26 No.-

          만해 용운선사(이하 만해)는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항일운동과 함께 불교계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는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자비를 실천하고 다른 이의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만해의 행적과 희생적인 노력은 민족불교의 중요한 초석이었으며 왜색불교를 타파하기 위한 임제종 운동, 그리고 선학원과 항일 운동이라는 새로운 연구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선학원은 임제종을 시원(始原)으로 삼아 시작되었다. 선학원 설립의 시초부터, 만해는 견고한 이념적 토대를 실질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만해의 독립운동은 선학원 설립의 정신적 이념이 되었으며 선학원은 설립 이후, 만해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기여하였다. 일찍이 그는 조선불교청년회 창설, 그리고 조선불교임제종 창립 즉 보종운동(保宗運動)과 같은 다양한 불교계의 항일운동 내지 그 흐름을 주도하였다. 만해는 임제종의 관장[대표]을 맡았던 일이 있었고, 임제종의 전통을 전승한 선학원을 활동거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래서 오늘날 만해는 선학원을 설립한 여러 선사들과 더불어 선학원 조사 가운데 한 분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만해는 3·1만세운동의 배후자로 일제에 의해 검거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선학원 창설 직후인 1921년 12월, 출옥하면서 선학원으로 운신하였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검토해보면, 만해는 선학원의 정기 총회에 꾸준히 참여했고, 이 곳에서 1931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그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과 독립운동으로 동분서주하였다. 선학원의 만해는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신간회의 경성지회 대표를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한문 불적을 유려한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하였고, 끊임없는 대중 강연으로 교육활동을 병행하였다.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망령의 상징이라 할 일본경찰에 의해 만해는 6·10 만세운동의 주요 배후 인물로 지목 받아 선학원의 입구에서 긴급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의 독립, 그리고 한국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찬동 연설을 강행했으며, 조선학생을 위한 대학인 민립대학을 설립하고자 시도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만해가 선학원에 머물며 활동했던 상기의 제반활동을 시기적으로 재검토하는 한편,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재산환수소송 판결문을 통해 선학원 설립의 시대적 상황과 설립에 끼친 만해의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련의 사실을 통해 선학원의 만해가 전개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 불교 보종운동인 임제종 운동 및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선학원 설립에 대해 만해가 끼친 영향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본 연구는 선학원이 덕성학원과 재산환수의 건으로 소송을 진행했던 판결문을 객관적인 자료로서, 그리고 중요 1차 사료로 채택하였다. 3·1 만세운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만해 용운 선사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 선학원을 활동 중심지로 삼고 일본제국주의에 효율적으로 대항하는 한편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한국역사에 깊이 스며든 불교전통의 보존을 위한 ... Seonhakwon was established upon the foundation of the Yimje Order. When Seonhakwon was first founded, Manhae Yongun Seonsa(Ven.) provided practical suggestions regarding the establishment of a robust ideological foundation. Due to this contribution,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any founders of Seonhakwon, along with many monks who were involved with the sect from the beginning. This is because Ven. Manhae had served as the executive chief of the Joseon Buddhist Yimje Order, and considered Seonhakwon - the historical successor of the Yimje Order - as the hub of his spiritual activities. In addition to dedicating his lif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Manhae Yongun Seonsa(Ven.) led a life of service for the Korean people. He practiced mercy while making an effort for other people to reach this enlightenment. Such an effort by Ven. Manhae derived from traditional teachings of Buddhism. His efforts were self - sacrificial and noble, and opened the way for the future of Korean Buddhism. Manhae Yongun Seonsa(Ven.) of Seonhakwon took active participation in the Singanhoe, an alliance created from the balance between the political left and right. He served as the chairman of the Seoul branch of the organization. Also, in an attempt to propagate the traditional teachings of Korean Buddhism, he made the Korean translation of the Buddhist books originally translated from Sanskrit to Chinese. Ven. Manhae also consistently gave lectures for the enlightenment of the Korean people. In the process, the Japanese Police - the symbol of Japanese imperialism and colonialism - began suspecting him as the leader of the June 10 Independence Movement, so Ven. Manhae was arrested at the entrance to Seonhakwon. Manhae Yongun Seonsa(Ven.) made a constant effort for Korean independence, as well as peace and prosperity for the Korean people. He supported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Movement, and attempted to establish a university funded and founded by the Korean people. The objective of the current study is to review the history and identity of Seonhakwon, to elucidat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Manhae Yongun Seonsa(Ven.) and Seonhakwon. Once, Seonhakwon stood in the court as a plaintiff in a civil lawsuit regarding a property issue. The judgment from the trial in that lawsuit reveals the impact of Ven. Manhae on the foundation of Seonhakwon. The current study adopted the written judgment from the lawsuit as a crucial and objective material that can clarify the impact of Ven. Manhae on the foundation of Seonhakwon. In addition, facts disclosed in various data indicate that Manhae Yongun Seonsa(Ven.) regularly attended the ordinary general meetings of Seonhakwon. When he was released after serving a prison time due to his involvement i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Ven. Manhae relocated his center of activity to Seonhakwon to engage in a dynamic anti - Japanese movement. In addition, to efficiently resisting the Japanese imperialism from Seonhakwon, he also fought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ism. Furthermore, he did not spare his effort to preserve the Buddhist traditions deeply penetrating the histor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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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공간미군정(解放空間美軍政)의 불교정책연구(佛敎政策硏究) -정책실패요인(政策失敗要因)을 중심으로-

          김범준 ( Bum Jun Kim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07 禪文化硏究 Vol.3 No.-

          본 연구(硏究)의 초점(焦點)은 미군정기(美軍政期)의 종교정책(宗敎政策)추진 과정상에서 정책실패(政策失敗)를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을 분석하여, 정책학습(政策學習)을 통한 시행착오를 줄여 향후 종교정책(宗敎政策)의 효율성(效率性)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여기서 정교분리원칙(政敎分離原則)이란 국가(國家)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자신의 신앙(信仰)을 지키고 종교(宗敎)에 혜택을 주는 것이다. 종교에 대해서 우리 헌법상(憲法上)제20조에는 종교의 자유 및 정교분리 조항이 있다. 여기서 정교분리 원칙에는 기준이 있다. 국가에 의한 종교의 차별(差別)의 금지(禁止)가 최우선 되어야만 한다. 이때 국가는 다른 종교의 신앙을 제한(制限)하는 행위를 방지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호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美軍政)과 이승만(李承晩)은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교분리 의식이 미약하였고, 그들의 종교적 性向에 따라 기독교식정치(基督敎式政治)를 지향(指向)함으로써 정교유착(政敎癒着)의 심화(深化)와 특정 종교에만 각종 지원과 혜택을 주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적산처(敵産處) 리문제(理問題) 사찰령(寺刹令) 방송선교(放送宣敎) 형목제도 편향적인사정책(偏向的人事政策)등은 정교분리(政敎分離)원칙의 위반 시비를 불러온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불교교단(佛敎敎團)의 소극적인 태도와 교단내(敎團內)의 내부적인 갈등(葛藤)도 중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불교교단(佛敎敎團)의 사찰령폐지(寺刹令廢止)에 대한 자구적인 노력은 비록 미군정(美軍政)의 군정청장관(軍政廳長官)의 인준거부(認准拒否)로 법률(法律)이 성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불교교단(佛敎敎團)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찰령에 대한 입법적조치(立法的措置)나 논의(論議)가 이루어지지 않았었던 점은 당연히 비판 받아야 마땅하며 미군정(美軍政)에 대한 종교정책(宗敎政策)에서 불교교단의 부참여(不參與)는 정책실패의 중요 원인(原因)일 것이다. 2년 11개월 동안의 미군정기(美軍政期)와 이승만(한민당) 정권은 한국전쟁 전 후의 시대상으로서 좌파 우파의 투쟁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군정은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 선언 이후 한국불교교단(韓國佛敎敎團)을 일방적으로 좌파 단체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종교문제(宗敎問題)를 냉전논리(冷戰論理)에 입각하여 한국의 기독교(基督敎)에 지원과 혜택을 제공하여 종교편파적(宗敎偏頗的)인 성향의 정책결정(政策決定)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독교(基督敎)는 한국전쟁 전 후의 풍부한 원조물자(援助物資)와 미군정(美軍政)의 무분별하고 편파적인 적산불하(敵産拂下)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면에 한국불교(韓國佛敎)는 일제 식민지 불교의 좌절에 이어 또 다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맞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주도세력이었던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은 정치적 의도와 냉전논리 에 입각하여 종교적 편향성을 나타냈으며 이는 더 나아가서 장면정부시기(張勉政府時期)를 거쳐 지금 현재까지의 종교(宗敎)의 정책학습(政策學習)을 통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미군정(美軍政)의 정부개입(政府介入)의 유형(類型)을 통해서 한국불교(韓國佛敎)는 향후 정부의 종교정책(宗敎政策)에 대비하기 위한 대응방안(對應方案)을 모색(摸索)해 보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The policy on the Buddhism(佛敎政策) in period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美軍政) could be said that it was a clear example of the failure of a policy. Firstly, The policy on the Buddhism(佛敎政策) in period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美軍政) wasn`t obeyed a fundamental rule of guaranteeing the freedom of the religion and also a fundamental rule of separation between policy and religion. After the liberation, the policy on the Buddhism, which was progressed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had been shown partial and preferential intervention with out accordance with it`s aim of guaranteeing the freedom of the religion. They maintained the system of the low, which oppressed and discriminated to Buddhism and Confucianism, which was esta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Based on the political intention and logics on the system of the cold war by the High- ranked official, they used public management broadcast for the broadcast of the Protestantism, and also discriminated distribute had been done, and designation of the Christmas as a holy-day, For the price of these partial and preferential intervention, the High- ranked official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d Protestant constructed intimating cooperation system, Secondly, the U.S. Military government didn`t even looking at policy on religion as a religious but they looking it as a problem of ideological. Thirdly, in case of supreme commanders assuming leadership of the policy on religion could be involving associations, which is occurred from supreme commander` spersonally political and religious propensity. In this case, it could be said that it was policy of the pro-Christianity which is brought by the supreme commander Douglas Mac Arthur`s persnal propensity. Finally, the Christianity occupied almost responsible position and they had participated in decision on the policy about the religion. Such partiality brings upun-cooperation of the Buddhist clique in long term. Therefore, we need to make improvements by having minute observation on the problems of the policy on the Buddhism in period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alysis these stuff again, firstly, the process in the policy formulation, as we could see, in chance of the founding and decision about policy of the religion, participation of the Buddhist clique had to be done. And also shown in the area of the separation of the politic and religion or clearing off of the Japanese ruling period, practical and feasible objects were had to be established. Then the plentyof time and rationality of the procedures were needed in area of making the policy of the religion. Secondly, the process in the policy implementation, frames for vitality of policy settlements had to be prepared and the section of religion, of which sense of discrimination and conception in long term is needed, were not being in hastily propulsion. And needed concreted and practical implementation planning that includes the methods of the mobilization of the resources and the methods of the making connection between an objective and a device. Finally, process in the policy evaluation, an objectivity of the valuation of the policy on the Buddhism in period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had to be ensure, but the policy on the Buddhism in period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ere notin forms of justice or objective, and also we could pointing out that there was an un-clearness of the responsibility in the policy valuation l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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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과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을 중심으로-

          오경후 ( Oh Kyeong-Hwo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20 禪文化硏究 Vol.29 No.-

          선학원의 1934년 재단법인 인가와 1935년 조선불교선종 선포는 한국 근대불교계의 변화였다. 선학원은 1921년 설립 직후 조선총독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우리만의 수행도량을 만들어보자는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이 목적은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계승하고 면면히 유지하자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일제의 폭압과 간섭, 대처풍조는 청정비구승의 수행을 좌절시켰고, 선학원의 침체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수호와 선불교를 중흥시키는데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1931년 김적음을 비롯한 설립조사들의 선학원 중흥을 위한 노력은 10여 년 만에 재단법인 인가와 조선불교 선종 선포로 귀결되었다. 재정은 안정되었고, 선원과 안거대중 수는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구참노덕(舊參老德)의 수행을 위한 양로선원의 신설은 수행 여건의 뚜렷한 향상이었다. 칭명염불(稱名念佛)이 불교의 전부로만 믿었던 청신사·청신녀 역시 선불교와 수행에 대한 적극적 인식으로 남녀선우회를 결성하고 부인선원까지 마련하여 안거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조선불교 선종 선포 역시 재단법인의 기초 하에 그 체계를 확고히 하여 선불교의 근본적인 독립발전을 모색할 수 있었다. 더욱이 종명(宗名)은 당시 불교계의 ‘조선불교선교양종’과는 달리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임제종운동의 이념을 계승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불교 선종’은 유구한 한국불교 수행전통의 산물이었고, 왜색화되어 갔던 당시 불교계와는 다른 한국불교의 정통성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리참구원의 양로선원 신설과 재가신자의 선불교 인식과 본격적인 수행은 일제하 불교계의 변화로 지적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수행여건 향상과 선불교의 대중화는 대처승 일색의 당시 불교계풍조에서는 확실히 이채로운 것이었다. 선학원 연구는 단순히 선학원 차원에서 머무를 수 없는 근대불교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설립이념과 참여했던 인물들은 시세를 거슬렀고 동시대에도 주목받지 못했었다. 때문에 선학원 연구는 일제하 불교사의 다양성을 살피고 그 위상과 가치를 평가하는데 중요하다. 한국근대불교사 연구차원의 선학원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Seonhakwon was established with the aim of creating our own training place that is not subject to the interference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This purpose contained the important meaning of succeeding and maintaining the identity of Korean Buddhism. After overcoming the recession, the efforts of the founding investigators including Kim Jeok - eum in 1931 to revitalize the Seonhakwon resulted in the approval of the foundation and the declaration of the the chosun Buddist Zen Order after 10 years. The finances were stabilized, and the number of the Chanyuan (禪院) and attendants began to increase significantly. Moreover, the establishment of a space for the old practitioner was a marked improvement in the training conditions. The believers, who believed that chanting Buddha was only the whole of Buddhism, also formed and participated in meditation groups with an active awareness of Zen Buddhism and meditation. The proclamation of the chosun Buddist Zen Order was also able to seek a fundamental independent development of Zen Buddhism by solidifying the system under the foundation of the foundation. Moreover, the name of the order was not only the identity and identity of Korean Buddhism, but also inherited the ideology of the former Imjejong Movement, unlike the “Chosun Buddhism Seongyoyangjong” of the Buddhist world at the time. For this reason, “the chosun Buddist Zen Order” was a product of the long tradition of practicing Korean Buddhism, and meant the succession of the authenticity of Korean Buddhism,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Buddhist world when it was Japaneseized. It can be pointed out that the establishment of a space for the old practitioner by Chosun Zen Buddhist Research and Action Center and the recognition and full-fledged practice of Zen Buddhism by inhabitants are a change in the Buddhist world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It was also an effort to maintain the prestige of Korean Buddhism, but the improvement of the practice conditions and the popularization of Zen Buddhism were certainly remarkable in the Buddhist trend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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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템플스테이의 운영실태(運營實態)와 향상화방안(向上化方案)

          여태동 ( Tae Dong Yeo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07 禪文化硏究 Vol.3 No.-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를 기점으로 한국에서 시작된 템플스테이가 해를 거듭 할수록 한국문화(韓國文化)를 알리는 중요한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템플스테 이는 단순하게 월드컵 대회에서 부족한 숙박 난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렇지만 템플스테이 내용에는 1700여년의 한국문화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이 숨 쉬고 있어 외국인들에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템플스테이는 대한불교 조계종과 정부의 긴밀한 협조 하에 매년 시행하는 사찰이 늘어났고, 조계종 사찰뿐만 아니라 여러 불교종단이 참여해 전통사찰은 물론 한국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는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템플스테이의 활성화는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문화사절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2007년 10월 현재 74개소에 달하는 전국의 사찰이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다양한 형태의 한국문화의 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들에게도 불교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문화의 원형질을 발견하게 하고있다. 템플스테이 활성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로 된 안내책자를 제작해 배포해 한국문화를 알리는 으뜸상품으로서의 템플스테이를 외국인들에게 알려야 하고 내국인들에게도 홍보해야 한다. 또한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마다 특색 있는 브랜드를 개발해야 하고 참가자들이 편안하게 체험할 수 있는 시설확충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2만 불 시대를 넘어서고 있는 우리나라는 세계에 내놓을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템플스테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숙박체험을 넘어 한국문화의 원형이 숨 쉬는 템플스테이의 활성화는 우리 국민들에게는 자기정체성을 찾는 심성개 발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외국인들에게는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느끼게 해주는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Temple-Stay has played a great significant role in advertising Korean culture since 2002 Korea-Japan World Cup. At the beginning, Temple Stay was introduced to sort out lack of lodging at Word Cup. However, Temple-stay that contain Korean Buddhism tradition has been popular among foreigners. It started May 12th 2002 at Gikgisa at Kimcheon where most of foreign ambassadors and their family participated. They responded to it with great honor. Overseas mass media also call it excellent cultural good. Afterward Temple-Stay has spread out among temple over the country in cooperation of government. Not only Jogye Order but also other buddhist orders participated, and showed Korean culture. Popularity of Temple-Stay showed not only Korean Buddhism but also Korea culture abroad. Oct 2007 74 temples engage in managing Temple-Stay programme where a variety of Korea culture is experienced. A native as well as a foreigner have a good knowledge of essence of Korean culture in it. Therefore Temple-Stay is missionary work and traditional cultural experience programme for Protestant and Catholic followers as well as Buddhist. Temple-Stay should be advertised as the best tourist attraction by making leaflet among a native as well as a foreigner. Also temples managing Temple-Stay should invent typical brand, set up facilities where participant experience with easy. In addition, buddhist circle should invent buddhist social welfare programme for popularity of temple stay. Korea need make use of temple stay as typical cultural good abroad. In addition to lodging experience, the popularity of Temple-Stay should be the mind development programme so that a nation find national identity, should be the cultural good where a foreigner feel superiority of korea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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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 한용운의 시대인식 변화에 대한 연구

          김경집 ( Kim Kyung - Jib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8 禪文化硏究 Vol.24 No.-

          만해 한용운(1879~1944)은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이후 승려의 입장에서 불교 개혁을,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에 항거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사회사상가로서 한국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만해의 글 가운데 불교활동과 독립 및 사회활동 그리고 종교 및 문화에 해당하는 72편의 글을 모아 ‘<표 1> - 만해 한용운이 저술한 시론(時論)의 분류’로 정리하였다. 그 글속에는 일제하에서 야기된 한국사회와 불교의 문제점, 그리고 그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와 실천방향 등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을 시대적 추이에 따라 분석하면 그가 치열하게 살았던 1910년대와 20년대 그리고 30년대의 시대인식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런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만해의 시대인식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 만해의 현실인식은 불교 개혁과 독립운동이었다. 불교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승려취처를 제안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을 발간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역할과 서적을 통해 불교계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사회에 대한 인식은 독립의식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식민지 체제가 되자 세상을 주유하며 문명의 발전을 살펴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민족의식으로 한국의 주권상실과 대중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불교사상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으로 한국인의 자주권을 강변하였다. 1920년대 만해의 현실인식은 불교와 사회에 대한 가치의 확대였다. 불교에 있어서 문화적 가치에 눈을 떠 역사적인 자료의 수집과 전승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고유한 한국불교 문화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 불교의 발전임을 인식하였다. 사회적 활동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하여 독립을 지향하는 활동으로 나타났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선출된 후 여성의 권위와 역할에 대한 조언과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청년들의 의식과 자세를 당부하였다. 그리고 이런 청년운동이 불교계에도 확대될 수 있도록 이끌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정립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단체로 발전시켰다. 1930년대 만해의 인식은 불교와 사회는 둘이 아니라는 심화된 의식이었다. 상의상관 속에 있기 때문에 불교를 개혁할 때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을 혁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불교 개혁의 시작은 불교와 정치의 분리, 한국불교통일기관의 설치, 그리고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불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활동은 더욱 심화되어 불교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1920년대 문제의식을 넘어 농민문제, 재만 동포의 문제, 한글장려, 그리고 교육문제 등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 전반에 걸쳐 비판하였다. 이런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자기 일은 자기가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과, 모든 산업에 있어 새 길을 개척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Han Yong - woon (1879~1944) published an article that longed for changes in Buddhism and Korean societ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refore, analyzing the contents according to the trend of the times reveals the recognition of the era of 1910s, 20s, and 30s, when he lived fiercely. Recognition of reality in the 1910s was Buddhist reform and independence movement. As for the Buddhist system, the Buddhist system was changed through the roles and books that fit the new era. The perception of society was independent. When it became a colonial system, I paid attention to the development of civilization. Looking at the suffering of the masses, I participated in the 3.1 movement without hesitation. He spoke about the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with freedom and equality, the core of Buddhist thought. Recognition of reality in the 1920s was an extension of values to Buddhism and society. The awareness of Buddhist culture has increased, and efforts have been made to collect and pass on historical data. It was the development of Buddhism that informed the public of such a unique Korean Buddhist culture. His social activity was to establish our identity and independence from Japan. He was very interested in women and youth activities. And he tried to expand the youth movement to the Buddhist world. He allowed the Buddhist youth to protest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perception of the 1930s was a deepening awareness that Buddhism and society were not two. He thought that when he reformed Buddhism, he could revolutionize the spirit and life of our nation. His idea of Buddhist reform was to separate Buddhism and politics, establish a Korean Buddhist unification agency, and create Buddhism that the public could understand. He criticized all the problems of Korean society including Buddhism. And as a solution, his work presented a strong willpower and a new way of paving the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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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불교 영웅 둣타가마니 왕의 무용담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 -테라와다 불교에서 성전은 용인되는가?-

          김한상 ( Han Sang Kim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5 禪文化硏究 Vol.19 No.-

          본 논문은 서기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쓰인 『마하왐사(Mahavamsa)』에 나오는 둣타가마니(Dutthagamani) 왕의 무용담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을 통하여 테라와다 불교에서 성전(聖戰, dharma - yuddha)의 용인 여부를 탐구한다. 둣타가마니는 남인도에서 침략해온 타밀의 장군인 엘라라(Elara)를 무찔렀기 때문에 오늘날 스리랑카에서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둣타가마니는 왕국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의 보호를 위해서 싸웠다고 전한다. 비구들은 환속하고서 『마하왐사』가 성전처럼 묘사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그래서 오늘날 싱할라 불교민족주의자들은 불교의 수호를 위해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아 왔다. 하지만 당시에 싱할라와 타밀은 모두 압도적으로 불교도였기 때문에 둣타가마니의 무용담은 불교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라한들이 둣타가마니를 방문한 이야기는 『마하왐사』에서 악명 높은 에피소드이다. 승리한 둣타가마니는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오직 한 명과 반 명의 사람만을 죽였을 뿐이라는 여덟 아라한들의 말에 위안을 받는다. 이러한 특수한 언설은 붓다의 이름으로 살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립 서비스(lip service)나 선교방편(善巧方便, upaya - kausalya)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빨리 성전에 십자군 전쟁과 성전이란 개념은 없다. 불교는 전쟁과 충돌은 불선(papa)이며, 충돌, 논쟁, 말다툼, 전쟁에 휘말리려는 보편적 성향을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근현대의 민족 간 충돌에서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초기 역사에서 둣타가마니가 선포한 전쟁 모토만이 부각되고 정의로운 군주 즉 담미까 담마라자(dhammika - dhammaraja)의 진정한 의미가 간과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둣타가마니 왕의 무용담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오늘의 사회와 과거의 사회 간의 긴밀한 대화가 시작되는데 이바지하고 한때 신앙에서 형제였던 싱할라와 타밀 간의 관계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럴 때에만 비로소 처음부터 불교 문화와 문명에서 가장 소중한 이상들 가운데 하나였던 관용과 이해의 정신이 복원될것이며 싱할라 불교민족주의는 세계동포주의로 승화될 것이다. The present paper investigates whether the crusade justified in Theravada Buddhism through a philological approach to the saga of Dutthagamani in the Mahavamsa, one of the traditional Sinhalese chronicles dating to the fifth or sixth century A.D. King Dutthagamani is regarded as a national hero in Sri Lanka for defeating the Tamil general Elara who had invaded the island from South India. He is said to have fought not for the joy of sovereignty, but for the protection of Buddhism. Monks disrobed and joined the army to fight in what the Mahavamsa depicts as a holy war. Therefore, Sinhala Buddhist nationalists in modern times do not have seen any contradiction in advocating war for the purpose of safeguarding Buddhism. However, the sage of Dutthagamani is of no significance for Buddhism because both Sinhalese and Tamils were overwhelmingly Buddhists. The story of the arhats’ visit to Dutthagamani is the infamous episode in the Mahavamsa in which the victorious Dutthagamani is filled with remorse at the number of people he has killed in the war, but is reassured by arhats that he in fact only killed one and a half people. This unusual statement should not interpreted as a justification for killing in the name of the Buddha but as a kind of lip - service or an instance of skill - in - means(upaya - kausalya). There is no such concept as crusade and holy war in Pali canon. Buddhism considers war and conflict as evil(papa) and teaches how an individual could transcend the universal tendency to engage in conflicts, debates, disputes and wars. It is unfortunate that Dutthagamani’s war moto alone has been highlighted and the true meaning of dhammika dhammaraja has been overlooked in the early period of Sri Lankan history as well as in the ongoing ethnic conflicts. An objective understanding of the sage of King Dutthagamani would initiate a closer dialogue between the society of today and that of yesterday and restore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Sinhalese and Tamils who were once brothers in the faith. Only by doing so, the spirit of tolerance and understanding which has been from the outset one of the most cherished ideals of Buddhist culture and civilization will be restored, and Sinhalese Buddhist nationalism can be transformed into Universal brother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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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 인환(顥菴印幻)의 수행과 포교

          오경후 ( Oh Kyeong-Hwo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20 禪文化硏究 Vol.28 No.-

          호암 인환은 21세기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인물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부산 선암사에서 원허 효선과 석암 혜수를 스승으로 출가하였다. 수행력과 덕화가 높았던 스승과의 인연은 인환이 평생을 수행자로 살아가는데 이정표 역할을 했다. 그는 출가 이후 통도사와 해인사에서 교학을 공부했고, 운허 용하와 함께 한국 최초의 불교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수행할 때는 참선과 기도 등을 통해 자신의 수행력을 재발견하고 향상시키기도 하였다. 일본고마자와 대학과 동경대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는 한국불교학의 현실과 발전을 위해 고민하기도 했다. 인환은 캐나다를 비롯한 미국 등에서 한국교포를 대상으로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국제포교를 통해 한국불교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선수행과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한 그의 포교활동은 교포들에게 자긍심과 함께 불교가 지닌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귀국 후 인환은 동국대학교 교수와 정각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퇴임 후 인환은 전국을 다니면서 일반대중을 상대로 참선수행과 교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인환은 평생을 수행자로 살다가 수행자로 갔다. Hoam inhwan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figures of Korean modern Buddhism in the 21st century. He became a monk as a disciple of Wonheo Hyo-sun and Seok-am Hye-su at Sunam Temple in Busan. The relationship with the teacher, who had high performance and virtue, served as a milestone for Inhwan's life as a monk. He studied teaching at Tongdo Temple and Haein Temple after monk, and also compiled the first Buddhist dictionary in Korea with Unhe Yong-ha. When performing in the Odaesan Destruction Palace(五臺山 寂滅寶宮), he also improved his performance through meditation and prayer. After studying at Komazawa University and Tokyo University in Japan and receiving a Ph.D., he also worried about the reality and development of Korean Buddhism. Inhwan has actively engaged in missionary work with Koreans in Canada and the United States. His missionary work, centered on the true martial arts and the Buddhist scriptures, provided a chance for Koreans to reflect on Buddhism's meaning. After returning to Korea, Inhwan served as professor of Dongguk University and Jeong Kak-won. After his retirement, Inhwan traveled all over the country to teach the true martial arts and the Buddhist scriptures. Inhwan lived as a monk for the rest of his life, then went as a mo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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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학(萬海學) 연구(硏究)의 성과(成果)와 과제(課題) - 불교사상과 개혁론을 중심으로 -

          오경후 ( Oh Kyeong - Hwo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8 禪文化硏究 Vol.24 No.-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상과 개혁론은 한국 근대불교사를 이해하는 근간이다. 만해의 불교저술에 대한 연구는 초기 서지적 연구에서 벗어나 동시대 서구와 일본에서 간행한 불교성전류를 비교하였다. 『십현담주해』 역시 원저자와 김시습, 그리고 만해의 인식을 각각 분석하여 차별성을 규명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비교분석은 동시대 국내외 사상가들과 만해 개혁론이 지닌 특성과 가치를 규명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연구태도 역시 한용운의 사상만을 강조했던 이전의 연구경향에서 확실히 진전된 것이다. 만해의 불교개혁론과 결부된 사상은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다는 입장이다. 만해의 평등과 구세는 그의 민족·평화·정치·사회참여 사상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만해의 사상은 서양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가 더욱 심오하고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가다. 만해의 불교사상과 개혁론 연구는 시와 문학연구와 비교했을 때 수적으로 부진하지만, 만해학과 한국근대불교사 연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Manhae Han Yong - un's ideas of Buddhism and reform are fundamental to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Buddhism. The study of the works of Buddhism in Manhae was a comparison of the Buddhist holy books published in the West and Japan at the same time, away from earlier surge studies. Annotation to The Ten Profound Verses(十玄談註解) also analyzed the perceptions of the original winner, Kim Si - seup, and Manhae to identify the differences. Such a comparative analysis led to the tendency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and values of contemporary thinkers and reform in Korea and abroad. The attitude of research is also a clear improvement from previous research trends that emphasized only Han's ideas. The idea associated with Manhae's reform of Buddhism is based on equality and conservatism. Manhae's equality and save the world are also the foundation of his ideas of the nation, peace, politics and Social participation. It is true that Manhae's ideas were influenced by Western philosophy. However, it is said that Buddhism was perceived as more profound and superior. Manhae's study of Buddhist thought and reform will help objectively understand the study of the history of Buddhism and modern Korean Buddhism, although it is numerically poor compared to poetry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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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환경으로 본 미얀마 불교조직에 대한 고찰

          조준호 ( Jo Jun - Ho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7 禪文化硏究 Vol.22 No.-

          본고는 출가환경에 따른 미얀마 불교조직에 대한 지역학 차원의 연구이다. 미얀마는 상좌불교 즉 테라바다(Theravada) 불교권 가운데 한 국가이다. 그러한 점에서 미얀마 불교문화는 대승불교권인 한국불교와 다른 성격의 이문화(異文化)에 해당 한다. 한국불교연구 기관에서 미얀마 불교를 포함한 상좌불교의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불교학자에 의한 기초적인 연구조사조차 결여되어 있고 대부분 오래된 외국의 연구결과물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최신 미얀마 불교상황과 관련한 기초연구에 해당한다. 미얀마의 불교인구는 거의 90%에 달하고 사람들의 삶속에 불교가 내면화되어 있다. 미얀마를 비롯한 상좌불교는 계율과 전통의 계승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상좌 불교권은 같은 불교권이라는 인식아래 국가 간에 교류를 해 온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다. 또한 세계불교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배경과 저력에는 관습적인 출가문화가 있다. 특히 미얀마의 경우 출가는 유구한 역사 속에 보편적인 생활문화로 정착되어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쀼 등과 같은 단기출가 등을 경험하며 완전한 출가로 이어지는 출가 환경이 조성된다. 이렇게 전 국민의 출가환경은 미얀마에서 불교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불가분의 관계로 발전하게 한다. 본고는 이러한 출가환경에 따른 미얀마 불교의 조직을 고찰하였다. 특히 미얀마 종교성은 국가기관인데 이러한 종교성의 조직과 역할의 중요성도 살펴보았다. 국가는 출가자가 중심이 된 불교조직을 관리하며 지원하는 것으로 사회통합을 해 왔으며 동시에 견제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미얀마에서 출가라는 보편적인 문화현상은 사회 통합의 구심적 역할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출가환경과 승단의 영향력에 대한 이해는 바로 미얀마 사회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특히 일반 사회에서 불교교육을 중시하는 미얀마 불교는 출가자의 감소문제로 고민하는 한국 불교의 출가환경에도 시사점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This paper is the regional studies on environment of Buddhist renunciation in Myanmar. Buddhist path is often considered an act of renunciation and it is the ideal of religious life. It is most often used to describe the act of a monk or nun going forth into a homeless life to be liberated from lust. Myanmar is one of the important countries of Theravada Buddhism. In this regard, Buddhist culture in Myanmar is cross - culture at Korean Buddhism. According to official statistics, almost 90 percent of the population practice Buddhism. Buddhism is internalized in people`s lives. Theravada Buddhism, including Myanmar, emphasizes the succession of discipline and tradition. Therefore, the countries of Theravada Buddhism have been exchanging the same in identity that they are same tradition of Buddhism with one another. It has a long history and tradition. It has also played a leading role in world Buddhism. The background and strength to do this are the customary culture of renunciation. Especially in Myanmar, renunciation is a universally living culture. Nearly everyone experiences the short-term renunciation, such as novitiation ceremony(Shin Pyu). The samanera ordination of short-term renunciation has an environment that leads to the full ordination(upasampada). Thus, the renunciation experience of almost all people in Myanmar makes Buddhism in an inseparable relationship between every sides such as politics, economy and society and all that sort of thing. This paper analyzed Buddhist organization regarding on environment of renunciation in Myanmar. There is also Ministry of Religious Affairs as a national institution, and the paper also examined the organization and role of the Ministry of Religious Affairs. The state administers and supports Buddhist organizations centered on renunciant monk. This leads to social integration, and the Buddhist organization of sangha is also subject to government checks. In this way, the universality of renunciation culture in Myanmar serves as a central role in social integration. Therefore,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influence of the renunciation environment and the Buddhist community are needed. This can be said a crucial point of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Myanmar society and culture. Myanmar Buddhism emphasized Buddhist education in the general society. By this cultural background, there are many renuncers who are still living culture. Especially in the era of low birthrate and graying, there will be implications for the Korean Buddhist community in low-late of renun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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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평양불교청년회의 설립과 활동

          김경집 ( Kim¸ Kyung-Jib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20 禪文化硏究 Vol.29 No.-

          1911년 6월 사찰령을 제정한 일제는 한국불교를 30본산 체제로 재편하며 식민지 통치에 유리하도록 통제하였다. 일제의 지원을 받은 일본불교의 종파들은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이중고 속에서 한국불교는 포교당을 세우고 근대적 활동을 모색하였다. 일제강점기 북한지역 제일의 도시는 평양이었다. 그곳의 본산은 영명사였다. 경제력이 약해 포교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유점사는 평양불교의 발전을 위해 1914년 포교당을 세웠다. 포교당 책임자와 젊은 불자들이 1918년 평양불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청년회는 평양 불자들의 신행을 바꿔나갔다. 화복을 비는 신앙에서 민중행복과 사회 안녕을 인도하는 사회적 불교를 추구하였다. 1920년 6월 20일 서울에 조선불교청년회가 설립되자 조선불교청년회 평양지회로 가입하였다. 평양지회는 중앙의 노선을 따라 청년 불자들의 계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평양지회 역시 조선불교청년회의 항일적인 의식을 계승한 탓에 활동 가운데 항일적인 내용이 많았다. 당연히 일제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평양지회는 1923년 2월 말 다시 평양불교청년회로 회귀하였다. 개편 직후 평양의 모든 청년 불자와 포교당 대중들을 포용하기 위한 신행증진의 불사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불자들의 호응은 물론 포교당 내 여러 신행단체가 설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나아가 이교도가 불교로 개종하는 성과를 올렸다. 평양불교청년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직업이나 위치에서 행한 활동과 청년회이름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먼저 개인적인 활동으로는 자신들의 직업이나 위치에서 전개한 노동운동과 1920년 말에서 30년대에 진행된 공공기관 설립에 참여한 예를 들 수 있다. 다음 청년회 이름으로 참여한 사회활동은 다른 청년단체 및 타종교 청년회와 연계한 사회참여였다. 이와 같은 평양불교청년회의 사회활동은 불자를 포함한 일반시민들에게 불교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불교신도가 증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In June 1911, Japanese colonial rule enacted laws governing Korean Buddhism. Korean Buddhism became the 30 headquarters system. The Japanese Empire used Korean Buddhism for colonial rule. Japanese Buddhism showed outstanding activity in Korea. The Korean Buddhist denomination has made plans to build a temple for missionary purposes. Pyongyang was the largest city in North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n 1914, Yujeomsa built a temple for missionary work in Pyongyang. Pyongyang Buddhist Youth Association was organized there in 1918. In June 1920, joined the Pyongyang Branch of the Chosun Buddhist Youth Association. The Pyongyang branch carried out activities for the enlightenment of young Buddhists along the central line. The Pyongyang branch inherited the anti-Japanese spirit of the Korea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t was the subject of Japanese colonial surveillance. The Pyongyang branch became the Pyongyang Buddhist Youth Association again in February 1923. Immediately after the reorganization, the immortality of new progress was promoted to embrace all young Buddhists and the public in Pyongyang. As a result of such activities, several new organizations were established within the temple. Some people of other religions practiced Buddhism. Pyongyang Buddhist youth members participated in social activities at their positions. First of all, personal activities include labor movements in their professions or positions, and participation in the establishment of public institutions in the late 1920s and 30s. The next social activity in the name of the Pyongyang Buddhist Youth Association was social participation in connection with other youth groups and youth associations of other religions. Such social activities of the Pyongyang Buddhist Youth Association became an opportunity to raise awareness of Buddhism among ordinary citizens, including Buddhists, and as a result, the number of Buddhists increa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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