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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복음주의의 역사기술적 고찰

          박용규 ( Park Yong-kyu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8 역사신학 논총 Vol.33 No.-

          복음주의운동은 한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고 결실도 풍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충실한 연구가 부족했다. 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가운데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일어났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복음주의와 개혁주의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신앙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본 연구는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사료기술적 고찰을 통해 복음주의운동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고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는데 목적이 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와 깊은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청교도 칼빈주의 전통에서거나 웨슬리 전통에 선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때문에 자연히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이들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주의 교회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베빙톤의 해석을 빌린다면 성경의 절대권위를 신뢰했고,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을 강조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복음을 전파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전도에 열심을 다하면서도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행동주의자들이었다. 이런 복음주의 신앙의 맥은 한국교회사를 통해 지속해 왔다. 외국복음주의운동과 아시아복음주의운동의 영향과 국내에서 일어난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으로 복음주의운동에 대한 관심이 점증했고, 이것은 다시 1980년대 복음주의신학회와 복음주의협의회 결성으로 이어 졌다. 복음주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초교파선교단체, 복음주의 교회들복, 음주의출판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와 같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신학교들의 설립 등 복음주의운동은 하나의 신앙운동으로 발전했다. 게다가 1980년대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교회들이 등장했고, 놀라운 교회 성장은 자연스럽게 해외선교운동으로 이어져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이것은 진보주의가 외쳐온 ‘하나님의 선교가' 아닌 복음주의자들의 ‘교회의 선교가' 가져다 준 결실이었다.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과 복음주의운동 특히 1974년 로잔대회 이후 한국복음주의 선교, 신학, 교회는 세계복음주의운동과 아시아복음주의운동의 최대의 호혜자이자 동시에 그 운동을 저변확대시킨 최대 공헌자였다. 이런 시대적 환경이 복음주의 연구를 지속해온 중요한 배경을 형성했다. The evangelicalism has had a considerable impact on the Korean church and has been very fruitful. Despite this, academic research on this subject has not been conducted sufficiently. There is a strong criticism of evangelicalism among scholars and pastors in the absence of an accurate understanding of evangelicalism. Even some scholars argue that evangelicalism and Reformed theology are essentially unrelated faith movement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provide a more accurate understanding of the evangelicalism by examining the historiography on evangelicalism, discussed in the Korean church. This paper is a historical account of the study of evangelicalism, evangelical theology, and evangelicals in the last 30 years, since 1950, when the evangelicalism began to be discussed in Korean church history. The evangelicalism has been from the beginning of Korean Protestantism, but it has not been more than 30 years since the study began. The evangelicalism in Korea was more active than any other country in the world. The missionaries who were sent to Korea were missionaries with an evangelical identity standing in the Puritanic, Calvinistic tradition or in the Wesleyan tradition, beyond denominationalism. As a matter of fact, Korean churches were established from the beginning as evangelical churches by missionaries with evangelical identities. Evangelical missionaries sent to Korea had the four evangelical features, biblicism, activism, crucicentrism, and conversionism that David Bebbington pointed out. They relied on the absolute authority of the Bible, emphasized the conversion of the Holy Spirit, emphasized the conversion of the Holy Spirit, preached the gospel of the cross of Christ, traveled all over the country. This evangelical faith has continued through Korean church history. The influence of the Anglo-American Evangelicalism and the Asian Evangelicalism and the 1970s mass evangelism in Korea increased the interest in evangelicalism, which in turn led to the formation of the Korea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and the Korea Evangelical Fellowship in the 1981. Evangelism has evolved into a powerful Protestant faith movement through various para-church movements, evangelical churches, evangelical publishers, and the establishment of colleges with evangelical identity such as ACTS. In addition, churches with an evangelical identity emerged in the 1980s, and amazing church growth naturally led to overseas missions, sending numerous missionaries. This was the fruit of the “mission of the Church” of the evangelicals, not the "Missio Dei" that WCC ecumenism had cried out. Since the 1970s mass-evangelism and evangelicalism, especially the 1974 Lausanne Covenant, Korean churches have been the largest contributor to the world and Asian evangelicalism, and at the same time the greatest beneficiaries of that movement. This environment of the times has formed an important background that has continued evangelical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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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전통과 복음주의 운동

          이은선 ( Lee Eun-seon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8 역사신학 논총 Vol.33 No.-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을 통해 발견된 복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복음주의의 가4 지 특성은 회심주의, 십자가중심주의, 성경의 권위의 강조, 복음전파의 활동주의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 과정에서 재발견한 복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복음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만인제사장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은 경건주의의 회심의 강조를 통해 복음주의의 회심주의와 연결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믿음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복음주의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통한 믿음의 주관적 체험을 강조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표현되는 오직 그리스도는 복음주의의 십자가 중심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은 계몽주의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복음주의의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는데로 나아간다. 종교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의 원리는 경건주의를 거쳐 복음주의자들의 활동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강조로 발전한다. 물론 종교개혁과 복음주의 사이에는 중간에 여러 가지의 역사적인 변화를 거쳤지만 양자의 근본원리는 상호 연관되어 발전하였다. The evangelicalism is closely related to the Reformation in that it is based on the Gospel found through the Reformation. The four characteristics of evangelicalism are conversionism, crucifixion, the emphasis of the authority of the Bible, the activism of evangelism. These is based on the gospel which the reformers rediscovered in the process of the reformation. The gospel is consisted of sol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solus Christus,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sola fide and sola gratia of the Reformers are connected are connected with the conversionism of evangelicalism through the emphasis of conversion of pietism. While the Reformers emphasized the objectivity of faith in Christ's righteousness on the cross, evangelicals emphasized the subjective experience of faith through regeneration and conversion. Solus Christus expressed in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is directly connected to the crucifixion of evangelicalism. Sola Scriptura of the Reformers criticizes the liberal theology after the Enlightenment and goes on to emphasize the inerrancy of the Bible in Evangelicalism. Their principle of priesthood of all believers develops through pietism and emphasis on the activism and social responsibility of evangelicals. Of course, between the Reformation and evangelicalism, there have been various historical changes in the middle, but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both have developed in relation to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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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합 식별: 하나님의성회 총회, 기본진리와 복음주의”

          ( William T. Purinton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3 역사신학 논총 Vol.26 No.-

          일부는 `복음주의 오순절은 착각이다`라고 말할 때, 이 논문은 간단히 혼합된 정체성, 또는 하이픈 기간이라고 표현되는 역사적 기록과 신학적 고백으로 반론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그들의 기본 진리와 의문을 작성하고 초기 20세기의 오순절운동의 유일신 오순절의 도전에 응답하여 복음주의 정통을 긍정하는 투쟁에 사례연구로 제시됩니다. 이 논문의 또 다른 목적은 하나님의성회의 복음주의 오순절 정체성을 강조하여 카리스마와 cessationist 모두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 논문은 Evangelicalsm의 David Bebbington의 표준 정의로 시작하고, 복음주의 신학회를 보고 이동합니다. 그들은 믿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직면한 몇 가지 문제. 다음 오순절의 역사는 Topeka, Kansas(1901)에서의 출생에서 하나님의성회의 조직에, 20세기의 첫 번째 해를 통해 추적됩니다. Hot Springs, Arkansas(1914)에서의 유일신 오순절과의 논쟁과 기본진리(1916)를 통해 결론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의 어셈블리에서, 복음주의와 오순절 모두의 공유역사 노트가 제공됩니다. 1943년 창립멤버로 복음주의자의 국가협회는(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하나님성회의 목사들 NAE의 직책으로 두 사람을 통해: Thomas F. Zimmerman(1960-1961)과 Don Argue(1992-1993). “고백” 성경의 완전 무오성에 대한 믿음. 복음주의와 오순절 모두 초기 21세기 동안 직면과제를 긍정하는 그들의 Emergent Conversation과 Open-Theism 모두에서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순절은 Prosperity Gospel과 New Apostolic Reformation에서 오는 문제도 있습니다. 실제로 존재 고백은 모두 복음주의와 오순절주의로 전진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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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리 그래함의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에 관한 연구

          김용국 ( Kim Yong-gook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8 역사신학 논총 Vol.33 No.-

          빌리 그래함은 기독교 미래를 위한 최선의 대안으로 평가받는 현대 복음주의 운동을 발족하였고 대중전도를 통해 큰 부흥을 일으켰던 20세기의 대표적인 복음전도자였다. 1918년 11월에 태어나 2018년 2월까지 100년의 생애를 복음전도의 일념으로 살았던 그래함은 한국 교회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가 한국 교회에 남긴 공헌 및 유산은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침례교회의 성장에 도움을 준 것이다. 1952년과 1973년의 방한을 통해 군소교단인 침례교회가 한국 사회에 긍정적으로 알려지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115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군중이 참석한 1973년 서울 집회에 침례교 목사 김장환을 통역으로 발탁하여 한국침례교회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 한국 교회에 반공주의 사상을 깊이 심어놓았다. 그래함은 한국 교회에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기초한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셋째, 대중 전도집회를 통해 한국 교회에 부흥을 가져왔다. 그의 전도 집회는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었고, 그것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넷째, 한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영감을 주었으며,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의 설립에 큰 도움을 주는 등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활성화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래함은 이처럼 한국 교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음에도, 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 역시 존재하고 있다. 그가 한국 교회에 끼친 악영향으로는 상업주의와 정교유착 문화를 한국 교회에 이식하였다는 것과, 영혼 구원과 내세만을 강조한 협소한 복음을 한국 교회에 심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래함의 부정적인 영향은 비판받아야 되나, 전체적으로 그가 한국 교회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부정적인 영향을 훨씬 압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긍정적이고 소중한 것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investigate Billy Graham's Influence on Korean churches. Graham(November 7, 1918 - February 21, 2018) left about four contributions or legacies to Korean churches. First, he helped for the growth of Korean Baptist churches through Billy Graham Evangelistic Crusades. Especially his visit to Korea in 1952 and 1973 were greatly helpful for the revival of Korean Baptists. Second, Graham inculcated anti-communism in the mind of Korean christians. Regarding communism as anti-Christianity, Graham instilled the extensive anti-communist sentiment in Korean churches. Third, Graham greatly contributed on the rapid growth of Korean Christianity through Evangelistic Crusades. His Evangelistic campaign raised positive interest about Christianity among Korean people, and it led the revival of churches. Fourth, Graham inspired and helped to rise Evangelical movement in Korea. Although Graham gave great contributions to Korean churches, he has been criticized by some Koreans. They condemned he transplanted the commercialism and alliance of religion and politics in Korean churches. Also they insist that he introduced small gospel to Koreans through preaching only spiritual salvation and afterlife. However, generally speaking, Graham's contributions to Korean churches far surpassed to negative infl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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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리 그레이엄과 미국복음주의

          배덕만 ( Bae Dawk-mahn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8 역사신학 논총 Vol.33 No.-

          이 논문은 미국 복음주의와 빌리 그레이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려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특히, 빌리 그레이엄이 세상을 떠난 해에, 그리고 그의 영향력에 비해 한국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가 복음주의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시기적ㆍ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는 1940년대에 근본주의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복음주의협회 창설(풀1러942), 신학교 개교(1947),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출판(1947), 잡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창간(1956), 빌리 그레이엄의 뉴욕집회(1957) 등은 그런 구분의 상징적 사건들이며, 이 과정에서 찰스 풀러헤, 롤드 오켕가칼, 헨리, 그리고 빌리 그레이엄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이 운동은 자신을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로 명명했으나, 후에 단순하게 "복음주의"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자유주의뿐 아니라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흐름으로서 (신) 복음주의가 출현하고 확산ㆍ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그레이엄은 결정 적인 역할을 했다. 먼저, 그는 근본주의와 복음주의가 분리되는데 결정적인 원인과 동력을 제공했다. 둘째, 그레이엄은 복음주의가 미국 내에서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며 지위가 상승하는 데 기여했다. 셋째, 그레이엄은 복음주의를 세계로 확장하는데 공헌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에서 복음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즉, 그가 복음전도를 위해 진보적 목회자들과도 교류하자, 근본주의자들은 그와의 교제를 중단했다. 동시에, 그는 풀러신학교, 휘튼 대학교, 고든콘웰신학교를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지의 발행을 지원하면서 복음주의의 제도적 발전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특히 대규모 전도집회를 통해, '그리고 로잔대회'같은 국제행사를 통해 복음주의의 세계적 확산에 기여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전쟁때부터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복음주의에 기초한 신앙부흥, 교회성장, 신학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과제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대통령들과 과도하게 친밀했던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의 명성에도 부정적 흔적을 남겼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그에게 끈질기게 제기된 “반지성주의"의 굴레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다. 복음이 지성과 충돌할 이유는 없다. 셋째, 복음주의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보다 책임있게 반응해야 한다. 세상이 더욱 복잡해지면서, 보다 총체제이고 현실적인 해법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The primary goal of this essay is to delve into the relationship between Billy Graham and American evangelicalism. In particular, it seems to be a meaningful academic work to examine the impact that Graham made upon the development of evangelicalism in America this year, when he finished his journey on earth. In addition, given the fact that there are only a few of academic papers about Graham, it is quite necessary to pay a special attention to his life and ministry. The American evangelicalism began to appear in church history by distinguishing itself from fundamentalism in the early 1940s. The foundation of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ism(1942), the opening of Fuller Theological Seminary(1947), the publication of Uneasy Conscience of Fundamentalism(1947)and Christianity Today(1956), and Billy Grahsm's New York Crusade(1957) were only a few of the symbolic examples of such a distinction. And Charles Fuller, Herold J. Ockenga, Carl Henry, and Billy Graham played essential roles in this course. At first, though they called themselves "neo-evangelicals," they soon came to be known just simply as "evangelicals." Then, how should we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Graham and evangelicalism? Simply speaking, Graham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course of birth, growth, and maturity of (neo) evangelicalism as a new stream which was distinguished from both fundamentalism and liberalism. First of all, he privided a desicive cause and momentum for the separation between evangelicalism and fundamentalism. Secondly, Graham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o the expansion and promotion of the status of evangelicalism in America. Thirdly, he helped evangelicalism to spread out all over the world. Finally, he also made an important impact upon the development of evangelicalism in Korea. That is, when he tried to develop his cooperation with the progressive pastors for evangelism, his fundamentalist friends cut off their friendship with him without hesitation. Then, he did his best to assist the institutionalization of evangelicalism by not only supporting Fuller Theological Seminary, Wheaton College, and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financially, but also working together for the publication of Christianity Today. In addition, he also contribited to the worldwide expansion of evangelicalism in many ways including crusades and international conferences. Finally, he significantly influenced the revitalization of faith, church growth, and theological development on the basis of evangelicalism in Korea by a series of his huge crusades since the Korean War However, he also left behind not a few of legacies with which evangelicals have to struggle. First, his too close relationship with presidents made a negative mark on both his reputation and that of evangelicalism. Thus, evangelicals of this generation need to approach the relationship between church and state more carefully. Secondly, evangelicals should do their best to overcome the shackle of anti-intellectualism of which Graham was harshly accused. In fact, there is no reason that the Word of God clashes with a human intellect. Thirdly, evangelicals need to respond to the various social problems with more serious responsibility. The more the world is getting complicated, the more comprehensive and practical solution is asked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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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중복음을 찾기 : 역사신학 근원과 독서

          윌리암퓨린턴 ( William T. Purinton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6 역사신학 논총 Vol.29 No.-

          사중복음은 1888년에 심프슨(A. B. Simpson)의해 출판된 책에서 나왔다. 교회사와 역사신학의 대부분은 그날로 부터 역사의 시작으로 보았다. 하지만 사중복음의 역사는 단순히 1888년 그 앞서 시작하지 않았다. 심프슨은 그의 신학에서 네 가지 신학적 부분으로 이미 19세기 이전에 복음주의 내에 존재했다고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야로슬라프 펠리칸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통하는 것이다. 시간을 통하는 것은 전통(traditio)이고 공간을 통하는 것은 선교(missio)이다. 성경에는 “모든 세대”(traditio)와 “땅 끝까지”(missio) 용어를 사용한 많은 구절이 있다. 지난 30년 동안 지구남쪽의 교회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새롭고 역동적인 교회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독교(지리적, 문화적 다양성)의 확장에 중점은 신학이나 신앙고백의 전통에 배치되는 것을 덜 강조되었다. 5세기의 신학자 빈센트 레린스(Vincent Lerins)는 정통을 측정할 목적으로 교회에 그의 “범주”을 기여했다. Vincentian 범주를 통해 2000년의 역사신학을 살펴 보면, 우리는 심슨의 “사중복음”(구세주, 성화, 치료자, 오는 왕)과 존 칼빈의 삼중적 사역(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 사이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읽혀온 역사신학은 역사적 시대 구분과 교파적 범주에 제한되어 수정하는 것을 돕고 좀더 통합된 전체를 제공할 것이다. The Fourfold Gospel comes from a book published in 1888 by A. B. Simpson. Much of the work in church history and historical theology has followed the beginning of its history from that date, but the history of the Fourfold Gospel does not simply begin in 1888 and move forward. A. B. Simpson noted that the four parts of his theological work were present already within earlier nineteenth-century Evangelical writings. I propose that we use the methodology of Jaroslav Pelikan and make a longer reading, noting that “the Apostles Creed's communion of saints” is heralded in two directions: through time and through space. Through time it is tradition (traditio). Through space it is mission (missio). The Bible has many references using the terms: “to all generations” (traditio)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missio). Within the past thirty years, the church of the global south testified of new and vibrant churches in Africa and Asia. But the emphasis on the spread of Christianity (geographical and cultural diversity) has meant that less emphasis is placed on theological or confessional traditions. The fifth century theologian Vincent of Lerins contributed his “canon” to the church for the purpose of measuring orthodoxy. By looking at two thousand years of historical theology through the Vincentian canon, we can see a relationship between Simpson's “Fourfold Gospel” (savior, sanctifier, healer, and coming king) and John Calvin's threefold ministry of Christ (as priest, prophet, and king). A longer reading of historical theology will provide a more unified whole, helping to correct a view limited by historical periodization and denominational categ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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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이수정 관련 사료 발굴과 교회사적 의의

          박용규 ( Park Yong-kyu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8 역사신학 논총 Vol.32 No.-

          지금까지 이수정에 관한 사료들이 발굴되었다. 이 일에는 오윤태, 이광린 교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발굴되거나 밝혀진 사료를 통해서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 여10 년 동안에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수정 관련 사료들이 발굴되어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사역은 더 한층 상세하게 밝혀졌다. 그 대표적인 몇 가지 사실은 2008년 동아일보에 공개된 이수정이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은 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수정 기념사진, 2016년 4월 공개된 이수정의 주기도문, 이수정의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읽고 언더우드가 한국선교를 결심하고 자신이 속한 미국 RCA 교단에 한국선교를 청원하는 선교청원서 내용이 담긴 RCA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 RCA가 이를 받아주지 않자 포기하지 않고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자신을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줄 것을 요청하는 1884년 7월 10일 언더우드의 편지가 2017년 2월에 발굴되었다. 이들 사료들을 통해 살펴볼 때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단순히 성경번역에 국한되지 않고, 복음전도, 간증 집회, 한국선교 촉구하는 편지, 주기도문번역, 일본에서의 한국문화 소개, 언더우드가 요코하마에 들렸을 때 한국어 교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이수정이 비록 일본에서 4년도 채 되지 않는 활동기간이었지만 그만큼 한국선교를 위해 공헌한 인물을 찾기 힘들 것이다. 본 고에서는 최근에 발굴된 이수정의 주기도문,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이수정의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고 한국선교를 결심한 내용이 담긴 언더우드의 편지를 중심으로 사료 발굴의 교회사적 의의와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의 교회사적 의미를 추적하였다. Many important historical documents on Soojung Lee (Rijutei) have been discovered by Korean scholars. Among them Yoon-tae Oh and Kwang-in Lee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on this matter. The missional works of Lee Soo-jung in Japan began to be revealed through their efforts. Since then, the discovery of new historical documents on him during the last decade have provided new insights into Soojung Lee's ministry in Japan. Some of the representative discoveries are Soo-jung Lee's memorial photo after being baptized on April 29, 1883, which was printed in the Dong A Daily newspaper in 2008; Lee's translation of the Lord's prayer, which was opened to the public in April 2016; the annual report of the RCA Foreign Mission board, which contains Horace G. Underwood's petition to send him as a RCA missionary to Korea; and after his petition was denied by the RCA, Underwood's requesting letter (dated July 10th 1884) to the PCUSA foreign missions board to send him as a missionary to Korea, which was discovered in February, 2017. Through these historical discoveries, it has become clear that Lee's missional activity in Japan was not limited to Bible translation but was quite extensive. His works were broadly ranging from Bible translation, evangelism, testimony meetings, writings letters to American Christians urging missions to Korean, translation of the Lord's prayer, introducing Korean culture to Japan, and teaching Korean language to Underwood when he visited Yokohama. Although Lee was in Japan for less than four years, it would be difficult to find someone who contributed more to missions to Korea. In this paper, we examin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Soojung Lee's missional works in Japan centering on his translation of the Lord's Prayer which was recently discovered, and Underwood's letter which shows his determination to give himself to missions Korea after reading Lee'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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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교 합동·통합 분열에 대한 재고

          이영식 ( Lee Young-sik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7 역사신학 논총 Vol.31 No.-

          한국장로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중에 하나는 한 노회(1907), 한 총회(1912)를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가 광복 이후 분열을 맞이했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다룬 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성찰하여, 주님 안에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소망하며 꿈꾸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합동·? 통합의 분열에 대한 주요 요인은 무엇인가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한 측은 박형룡 박사의 소위 ‘3천만 환'이라는 재정적이고 행적적인 실수가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그러나 그 반대 측은 WCC문제가 분열의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러 사료를 근거로 한 연구를 통해서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 사건이 이 분열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한국장로교 분열의 주요원인은 다음과 같이 보았다. 첫째, 에큐메니칼운동인 WCC의 가입과 협력에 있다고 하겠다. 둘째, 경기노회의 총대의 문제이다. 정기노회에서 결정된 총대들과 임시노회에서 결정된 총대들 양측의 총회 참가가 분열을 가속화시켰다고 본다. 셋째,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소위 연동 측이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먼저 새로운 총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분열의 원인이었다. 세계 교회의 일치와 화합이라는 WCC의 목적을 위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사실상 장로교 분열 문제는 교단과 총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각 노회와 각 개교회의 고통스러운 분리와 찢겨짐의 역사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분열은 전국교회가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불행한 일이며 사회적으로도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한 부끄러운 일이다.따라서 어떠한 변명으로도 한국장로교회는 그 분열의 역사를 정당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과거 한국장로교회가 절망 가운데 있던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소망과 비전을 제시했던 그 권위와 역할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의 노력들을 진실하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One of the beautiful traditions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KPC) is that it organized one Presbytery(1907) and one General Assembly(1912). And KPC has been growing and giving glory to God. However, the KPC was separated after the liberation. Dealing with the history of schism of the KPC is attended with pain and anguish itself. Nevertheless, by introspection of the past, we can dream of healthy and beautiful church in the Lord. What is the main factor of the division of the KPC in 1959? The supporters of ecumenical movement say that the main cause of the separation of Hapdong and Tonghap is the problem of so-called Dr. Park Hyeong-Ryong and ‘30 million whan', a financial and administrative mistake. However, the opposite side says that the WCC problem was the principal cause of division. We can confirm that Dr. Park's “30 million whan” incident was not the main factor of that division through the study of historical documents. It is an excessive logical leap to highlight the ‘30 million whan' problem related to separation, and it only results in diluting major cause. The main cause of the division in 1959 is as follows. First, it is the problem of the joining and cooperation of the ecumenical movement WCC. Second, it is the problem of the delegation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Gyeong-Gi presbytery. The Participation of both the representatives of the general assembly decided by the regular presbytery and the delegates by the temporary meeting accelerated the division. Third, the most crucial factor is that the so-called Yeon-Dong side voluntarily established a new general assembly, ignoring the resolutions of the General Assembly. That was the very decisive factor of division. As a result, the WCC's purpose of unity and concord of the world churches resulted in division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fact, it is necessary to recognize that the problem of divi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s not only the problem of the religious order or the General Assembly, but also the matter of painful separation and tearing of each presbytery and each local church. Division is an unfortunate incident that the national church is caught in a whirlpool. And then socially it is that the church has abandoned the role of light and salt. Therefore with any excuse,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can not justify its division. Now we must restore the authority and role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that preached the gospel to its nation in despair and presented hope and vision in the past. And we should make sincerely efforts of union in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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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역사 재조명 운동의 필요성 고찰 - 광주광역시에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

          김호욱 ( Kim Ho-wook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17 역사신학 논총 Vol.31 No.-

          한국교회는 자국으로부터 한반도에 파송 받은 선교사가 입국한 이후부터 계산할 때 여130년의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2017년은 한국교회에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 알렌이 입국한 지 137년이 되는 해이다.알렌 이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파송받아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땅을 밞은 때가 1884년 9월 20일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 와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한 지 여130 년이 지나면서 한국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학계를 넘어 교회설립 역사가 오래된 개별교회와 지역사회 등으로 그 지평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개별교회는 자신들의 교회역사를 출판하면서 그 교회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학자들에게 연구를 의뢰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학자와 해당 교회가 의식적이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이든지 역사를 곡해하거나 왜곡시키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개별교회 역사의 곡해 또는 왜곡이 일어나는 부분은 설립자가 누구인가? 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위치는 정확하게 어디인가? 등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부분은 개별교회의 설립년도에 관한 내용이다.개별 교회 설립년도가 중요해 진 것은 교회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자신의 교회가 그 지역의 기독교복음전래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그 중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사료의 부족, 학자의 연구 부족, 그리고 학자의 편협적인 사료 활용 등에 있다. 필자는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특정교회의 설립 년도를 편협적인 사료활용으로 왜곡시켰던 사례와 사료의 부족 및 학자의 연구 부족으로 발생한 개별교회 설립역사의 곡해 사례를 살필 것이다.그런 다음, 교회역사학사와 각 교회가 교회역사의 곡해 또는 왜곡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할 것이다. It has already been more than 130 years since the Christian gospel through Protestantism began to spread to Korea by missionaries sent from the missionaries' own native denominations. More precisely, the year 2017 marks the 137th anniversary of the arrival of Allen, a medical missiona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United States in America(PCUSA), to Korea. This is because September 20, 1884, when Allen, who was sent to the Medical Missionary from PCUSA in Shanghai, China, arrived on the Korea peninsula. Over the past 130 years since the gospel has spread to the Korea peninsula, the interest in the histor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has been growing steadily over the past few decades. As the church publishes its history, there is an increasing number of cases in which scholars are commissioned to study what the church has in the community. In this process, church historians and churches, whether they wear conscious or unconscious, w ould have committed the mistake of producing distorted church history. The distortions in the history of each church can vary, such as who is the founder or exactly where the church was f irst established. But the greatest part is when the church was founded. The importance of when each church was founded is purpose to accurately record the history of each church, but it is often the case that the desire of one's own church to serve as a base for the history of christian gospel arrival in the region. Another important cause is the lack of historical data and research by church historians, and the application of narrow historical source of church historians. I am going to show the case of the year of the establishment of a particular church that is distorted by the intensive use of the historical source of the church historian and the histor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due to the lack of historical materials or research by church historians focusing on the church in Gwangju Metropolitan City. Finally, I will then propose ways to prevent that church historians and churches pervert each church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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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타자르 휩마이어의 구원론

          최정기 ( Choi¸ Jung Ki )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20 역사신학 논총 Vol.37 No.-

          16세기 재침례교도는 개혁자들로부터 행위구원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런 시각은 세20기 까지도 이어졌다. 재침례교 신학자 발타자르 휩마이어의 구원론 역시 펠라기우스주의 내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데이빗 스타인메츠(David C. Steinmetz)는 “Scholasticism and Radical Reform: No minalist Motifs in the Theology of Balthasar Hubmaier”(1971)라는 논문에서 휩마이어의 구원론에 가브리엘 비엘(의Gabriel Biel) 원리, 즉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거부하지 않으신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스 타인메츠에 따르면 휩마이어는 타락하지 않은 영의 의지로 구원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죄인은 자신 안에 있는 두 가지 자원, 곧 ‘타락하지 않은 영의 의지'와 ‘자연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복음을 듣지 않고도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휩마이어는 구원에 있어서 언제나 은혜의 선행성을 인정했다. 스타인메츠의 주장과는 달리 휩마이어는 말씀이 일차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영은 육에 갇혀 무력한 상태로 남아있다고 했다. 스타인메츠는 휩마이어의 구원론에서 말씀이 두 단계로 역사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하나님은 먼저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영을 해방시키고 혼을 치유하셔서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면 영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원을 위해 부르짖을 수 있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복음 선포자를 보내주셔서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즉 말씀은 먼저 보편적 선행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고, 다음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 거듭나게 하는 은혜로 임한다. 스타인메츠가 자연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의 증거로 제시한 「의지의 자유의」(1527) 이디오피아 내시와 고넬료의 예는 휩마이어의 다른 논문과 비교해 보면 이미 말씀을 듣고 구원을 갈망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이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휩마이어는 보편 속죄와 자유의지의 협력을 구원의 필수요소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The sixteenth century Anabaptists were criticized by reformers for teac hing ‘work-righteousness,' and such criticism has never died out since then. Anabaptist theologian Balthasar Hubmaier was not an exception but his soteriology has often been categorized as Pelagianism or Semi-Pelagia nism. Especially David C. Steinmetz argued in his article “Scholasticism and Radical Reform: Nominalist Motifs in the Theology of Balthasar Hub maier”(1971) that the Gabriel Biel's norm ‘God does not deny grace to those who do what is in them'(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 t gratiam) remains in Hubmaier's soteriology. According to him, Hubmai er admitted that man can initiate the process of salvation in natural state by the work of spirit, which has been preserved intact through the fall. That is, sinners can turn to God without hearing the gospel due to two resources in them: “the unfallen will of the spirit” and “God's revelation in nature.” However, Hubmaier consistently affirmed the prevenience of grace in salvation. Unlike Steinmetz's contention Hubmaier argued that the spirit is imprisoned in the flesh and remains impotent until the word of God release it. Steinmetz failed to see that the word in Hubmaier's theology operates in two stages. First, God sends his word Christ to all people so that he may liberate the spirit and heal the soul, and as a result free will is restored to man. Then the spirit in man can pray and cry to God for salvation, in answer to which God sends the preacher of the gospel in order to regenerate the believer. Thus, the word of God comes first to all humanity as prevenient grace, and then to those who respond in faith as regenerating grace. If we compare the Ethiopian eunuch and Corn elius in Freiheit (1527), whom Steinmetz presents as the examples of thos e who cry for God in natural state, with the same in the other treatises of Hubmaier, they ought to be those who long for salvation after hearing the word. Hubmaier antecipated Arminianism in the seventeenth century in that he acknowledged the universal offer of Christ's atonement and the cooperation of human fre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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