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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사 연구』 회고와 전망 - 20년史, 프랑스사 연구의 용광로 -

          신동규(Dong-Kyu SHIN) 한국프랑스사학회 2019 프랑스사연구 Vol.- No.41

          『프랑스사 연구』가 발간된 지 20년이 지났다. 한국프랑스사학회와 함께 시작된 『프랑스사 연구』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사 연구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앙시앙레짐과 프랑스 혁명,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로 요약되는 초기 프랑스사 연구가 『프랑스사 연구』를 통해 기업사, 도시사, 여성사, 영화사, 이주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였으며, 비시 정부, 68 운동 등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는 한편 중세사 연구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또한 식민주의, 인종주의 등 다양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새로운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이 프랑스사 연구의 지리적 범위가 확대되었다. Twenty years ago, Korean Review of French History(KRFH) was born with the creation of the Korean Association of French History. The history of the KRFH shows the itinerary of research development on French history in South Korea. The research on French history that began with the first topics around the old regime and the French Revolution, the labor movement and socialism. develop through RCHF in various fields of research: business history, urban history, feminist history, history of cinema, history of migration etc. By including the period of the Vichy government and movement 68 as the new subject, and with the development of research on medieval history, its dimension is expanding and the new generation of researchers interested in colonialism and racism gives attention to new territories such as Africa and Indo-China with geographical expansion.

        • KCI등재후보

          Charles-Paul Landon의 「박물관 연보와 오늘날의 화파」와 ‘과거 프랑스 화파'의 미술사적 의의

          김한결(KIM Hangyul) 프랑스학회 2019 프랑스학연구 Vol.0 No.89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의 과거 미술에 대한 서술은 이전과 달리 이탈리아, 홀란드 등 외국 미술의 헤게모니에 맞서 자국의 화파를 재조명하고 가치롭게 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는 미술관이라는 지식과 문화유산의 공유를 위한 새로운 공공의 장소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소장품 도록을 통해 뚜렷이 관찰되는데, 더욱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분류와 목록화의 필요성에서 주로 연유한다. 본 논문에서 분석한 Landon의 「박물관 연보와 오늘날의 화파」는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역설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 시대의 미술을 격려하는 한편 과거 프랑스 화파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예술 전통의 계보를 정립하여 이를 국가와 민족의 우수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Landon은 프랑스 미술사에서 부재하다시피 했던 18세기 이전의 미술 전통을 대변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로서 ‘과거 프랑스 화파'École française ancienne을 정의하고 이를 작품 설명과 비평을 통해 설파하였다. 이 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분석하여 19세기 초 프랑스의 과거 미술 서술의 특징을 정리하고 과거 자국 미술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은 정황을 파악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Au premier XIXe siècle en France, les idéaux révolutionnaires et d'un nationalisme s'immiscèrent en matières d'art et de critique artistique. À part l'exposition inédite des oeuvres d'art anciennes grâce à l'espace nouvellement créé sous le nom de “musée”, les catalogues s'opèrent comme un support visuel supplémentaire s'adressant à distance à un public plus large. Parmi les publications contemporaines, les Annales du musée et de l'école moderne des beaux-arts de Charles-Paul Landon sont remarquables pour leur accessibilité et l'analyse riche des oeuvres qui contribue à la mise en valeur de l'École française ancienne. Dans les volumes nommés l'“École française ancienne”, à côté de l'encouragement sans réserve de l'“école moderne des beaux-arts” dont dépendra l'avenir de la jeune France, se trouve l'éloge des maîtres anciens français. En reconnaissant chez ces derniers un mérite artistique sûr et une tradition continue, le catalogue de Landon ouvrit un spectre de goût plus divers quant à l'esthétique de l'art ancien. Aussi observons-nous ici une nouvelle définition du terme d'“école”: plus qu'un rassemblement d'artistes appartenant à une même nation, à un même atelier, ou pratiquant un style similaire, celui-ci incarne désormais l'image d'une généalogie, filialité sanguine de père à fils. Cette idée de parenté renforce un discours national dans l'histoire de l'art, qui privilègie la continuité et l'entité culturels et participe à la fabrique d'une identité nationale. À travers l'expérience visuelle et intelligente de l'art ancien offerte par Landon et ses contemporains, l'École française est interprétée, non sans difficultés et paradoxes, comme emblème de l'excellence universelle de la France.

        • KCI등재

          유럽 통합과 프랑스 식민주의의 제문제

          박지현(Ji Hyun PARK) 한국프랑스사학회 2015 프랑스사연구 Vol.- No.32

          본 연구의 목적은 2005년 2월 23일자 법령 제정을 계기로 불거져 나온 북부 아프리카의 식민화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태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는 데 있다. 하나는 북부 아프리카의 식민화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되짚어 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통합 과정에서 북부 아프리카 식민지인과 이곳에서 귀환한 프랑스인이나 그 지역출신의 이민자에게 과거의 식민주의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분석해 보는 일이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가 이민자 정착의 문제에 대해 닫힌 입장을 취하는 궁극적 이유가 과거의 식민주의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후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 그리고 제4공화국의 프랑스연합 창설, 그리고 유럽통합의 전개를 통해 프랑스 식민주의의 대상이 과거 북부 아프리카 식민지인이 아니라 프랑스 본토의 북부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 이민자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유럽 통합의 시대에 프랑스이민법과 유럽이민법을 겪으면서 프랑스 식민주의가 훨씬 명확해지고 강력해졌음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과거의 프랑스 식민주의는 오늘 현재에도 살아 숨 쉬고 있으며, 훨씬 강력한 힘으로 같은 공간에 사는 이들을 오히려 인종적으로 구별하는 새로운 식민주의를 낳고 있는 것이다. Our study is aimed at examining the historical position of France on the North African colonization caused by the law of 23 February 2005. For this it is necessary to notice clearly differences of French colonialism between World War II and European integration. Under the Vichy regime, the subject of French colonialism was French settlers from North Africa. After the Allied landings in North Africa, it was replaced by the indigenous who supported the Frenc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 Especially, natives of Algeria coped with De Gaulle for independence. Immediately after World War II, France founded the French Union and tried to organize it into European community to maintain the position of the French colonial empire. But the war in Algeria gave the start to the collapse of the French Union. The colonial regime of France was dismantled. France was occupied by nationals and immigrants who came from North Africa. To resolve this situation, France has focused on European integration and at the same time it has established the powerful immigration law to keep out of North African immigrants in France. More European integration evolves over immigration law is strengthened for North African immigration. At this point, the subject of French colonialism in current is the colonized not in North Africa, but in France. Among their children, there are French and European citizens who have been educated in the same French culture, but do not fit into the French and European community. This trend shows that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reproduction of French colon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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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노동자

          이재원(Jae-Won LEE) 한국프랑스사학회 2014 프랑스사연구 Vol.- No.30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노동자 관련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주제였다. 2차대전기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반면, 프랑스에 끌려간 인도차이나 징용노동자들의 운명은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39년부터 1940년 6월 독일에 패배하기 전까지 9천여 명의 인도차이나인들이 보병으로 프랑스 군대에 징집되었으며, 2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들이 자발적 혹은 강제로 프랑스에 노동자로 오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해방 후에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지만, 14,000명 이상의 인도차이나인들은 전쟁기간 동안 비시(Vichy) 정부와 독일인을 위해 혹은 프랑스 민간기업을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며 프랑스에 머물러야만 했다. 엄격한 군대규율의 통제하에 지내며, 수용소에 감금되어 부족한 식사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가운데, 인도차이나 노동자들은 종종 폭력과 감금의 희생자가 되었고, 다수가 폐결핵을 앓았으며, 1천여 명이 넘는 이들은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만 했다. 역사가 망스롱(Gilles Manceron)이 언급했듯이 이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드러내는 것은 ‘참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The history concerning the Indochina workers in France has been a dismissed subject for a long time. While the problem of Korean and Chinese workers forced by Japanese government during World War II had repercussions all over the world, the destiny of Indochina draftees did not draw attention of contemporaries. From 1939 until June 1940, when France was defeated by German, more than 9 thousand Indochinese were drafted to the infantry and more than 20 thousand Vietnamese came to France as laborer voluntarily or by force. Some of them could returned to their country after liberation, but more than 14 thousand Indochinese had to stay in France, forced to work for Vichy, or for French private enterprises. Under the strict military discipline, held in camps with poor nutrition and overwork, Indochinese laborers often became victims of violence, imprisonment, and tuberculosis, more than thousand of whom died before the French liberation. As the historian Gilles Manceron referred, revealing this unknown event is not about the ‘repentance' but about the recognition of historic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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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 마티에와 러시아 혁명

          박윤덕 한국프랑스사학회 2018 프랑스사연구 Vol.- No.38

          This article explores the life and scholarship of the prominent historian of the French Revolution, Albert Mathiez, and investigates how this critical thinker viewed World War I and the Russian Revolution. In doing so, it particularly examines the extent to which Mathiez's observation of these two important events influenced his own research and interpretation of the French Revolution. As the student of Aulard and director of the Historical Institut of the French Revolution at the Sorbonne, Mathiez first started to study the French Revolution through the lens of the history of religion. Yet the troubles that he had with his advisor later led him to establish the Society of Robespierre Studies and the journal Revolutionary Annales, and to expand his research agenda to the political, socio-economic, and military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The intellectual journey of Mathiez was significantly influenced by World War I and the Russian Revolution. He focused on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French Revolutionary War and World War I, as well as the convergences between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Russian Revolution. In fact, Mathiez tried to draw relevant lessons from the French Revolutionary War in a way that would shed light on the unfolding of World War I. This made him very critical of the policies of the French government of the time. In his view, the Russian Revolution was inspired by the French Revolution and learned from it, but fallen into a dictatorial regime that suppressed democracy and freedom with the rise of Stalin. Mathiez ultimately remained an independent historian as he rejected the dogmatic approaches of marxist historical methodology. 이 논문은 저명한 프랑스 혁명사가인 알베르 마티에의 삶과 학문을 살펴보고,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목도한 전쟁과 혁명이 그의 프랑스 혁명사 연구와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마티에는 소르본의 프랑스 혁명사 강좌주임인 올라르의 제자로서 혁명의 종교사 연구로 프랑스 혁명사 연구에 입문하였지만, 스승과 불화를 겪으면서 로베스피에르 학회를 설립하고 학술지 『혁명 연보』를 창간하고, 혁명의 정치사, 사회사, 경제사, 군사사로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마티에의 학문적 여정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대사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혁명전쟁과 1차 대전, 1789년의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유사성에 주목하였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역사에서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교훈을 찾고자 하였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가 보기에, 러시아 혁명은 프랑스 혁명에서 교훈을 얻고 영감을 받았지만, 스탈린 체제의 등장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로 전락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방법론의 교조적 변형을 거부하면서 독립적인 역사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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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프랑스 공동체의 문화 정체성 연구: 서래마을과 한불음악축제 사례를 중심으로

          이일열 ( Lee Il-yul ) 한국프랑스학회 2021 한국프랑스학논집 Vol.113 No.-

          본 논문은 서래마을과 한불 음악축제 사례를 분석하여 한국 사회속 프랑스 공동체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파악하고 향후 관련 연구의 올바른 방향설정을 모색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서래마을 프랑스 공동체는 단순히 프랑스인들만의 거주 공동체가 아닌 한국인에게는 유럽의 분위기가 융합된 다문화 공간이자 럭셔리한 이미지를 내는 문화 소비 공간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프랑스인들 에게는 프랑스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활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사회 속 프랑스 공동체는 자신만의 문화 정체성만을 고집하지 않고 한국사회와 소통하고 교류하고자 하는 문화변동(acculturation)의 모습이 발견되고 있다. 이 현상은 <문화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대한 프랑스 특유의 관용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 된다. 한국인과 교류는 제한적이지만, 한류와 대중문화는 프랑스인들에게 친숙한 매개체이다. 프랑스에서 유래된 한불음악축제는 프랑스적인 축제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인의 축제이기도 하며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문화적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문화 연대의식과 문화민주주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지역민과 함께 문화적으로 교류하고자 노력하는 공간이 “한불 음악축제”라 정의 할 수 있다. Cet article a pour but d'analyser la signification socioculturelle de la communauté française en Corée en analysant les cas du Village de Seorae et de la fête de la musique Corée-France. En outre, cet article vise à poursuivre une direction appropriée pour les recherches futures. Le village de Seorae est un quartier résidentiel pour les Français, mais pour les Coréens, c'est un espace multiculturel intégrant une atmosphère européenne et un espace de consommation culturelle qui donne une image luxueuse. En revanche, pour les Français, on voit que c'est un espace vécu autour d'une école française. En particulier, la communauté française dans la société coréenne découvre une forme d'acculturation qui cherche à communiquer et à échanger avec la société coréenne sans insister sur sa propre identité culturelle. Les échanges personnels entre Français et Coréens sont assez limités, mais la culture populaire coréenne joue un rôle essentiel, en particulier pour les jeunes Français. Cette acculturation se manifeste notamment dans le cadre de la vie culturelle urbaine. Dans cette perspective, il faut prêter attention à la fête de la musique Corée-France. Ce festival n'est pas réservé uniquement au Français, il est également devenu un espace culturel très important pour les Coréens. Grâce à nos enquêtes, nous avons constaté que ce festival sert de pont entre la Corée et la France. En effet, la réflexion sur les activités culturelles peut constituer un des éléments importants pour mieux comprendre l'originalité ethnique d'une communauté. Autant de question majeures sur la réflexion commune, déjà engagé, même d'être poursuivie et approfon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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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학과 프랑스 번역학,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향,윤성우 프랑스학회 2013 프랑스학연구 Vol.66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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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s le domaine de la traductologie, on parle rarement de la traductologie 'française', parce que la traductologie est censée expliquer les aspects généraux de l'acte traduisant quelles que soient les langues ou les cultures impliquées. Pourtant, aucune traduction, aucun discours théorique sur la traduction ne pouvant être examiné correctement en dehors de son horizon linguistique ou socio-culturel, il est tout à fait justifié de parler de la traductologie dans le cadre des études françaises au sens large du terme. Si en Corée la traductologie est largement dominée par les théories et réflexions anglophones, il serait erroné de dire que la traductologie française n'y a jamais existé. De nombreux articles sur la traduction ont été publiés dans les revues consacrées à la linguistique, à la littérature et aux études françaises. Dans les deux revues coréennes représentatives des études françaises en Corée, à savoir la Revue d'Études Françaises et la Revue d'études franco-coréennes, une quarantaine d'articles sur la traduction a été publiée dans chacune de ces revues depuis les années 1990. Pourtant, à y regarder de plus près, on constate qu'une grande partie des ces études est de nature littéraire ou linguistique. TI est certain que les aspects littéraire et linguistique de la traduction constituent un objet d'étude incontoumable pour la traductologie. Cependant, il existe bien d'autres axes de recherche qui ont été peu explorés jusqu'à présent ; pratiquement aucune étude de nature diachronique ou synchronique sur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n'a été réalisée dans le cadre des études françaises en Corée. Nous considérons que la traductologie française peut être abordée dans le cadre des Etudes françaises, en vue de détecter les éléments qui caractérisent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En guise d'étude préliminaire à cet ambitieux projet, nous avons relevé trois éléments qui caractériseraient les discours sur la traduction en France ; tradition cibliste, intérêt pour J'aspect éthique de la traduction, et discours epistemologiques sur la traductologie, Mais ces hypothèses doivent être vérifiées par une étude plus approfondie portant sur un corpus élargi, ce qui nous a conduits à fixer les principaux axes ci-dessous pour nos prochaines recherches. Dans un premier temps, nous allons procéder à des études diachronique et synchronique sur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nous allons examiner tous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depuis la Renaissance jusqu'à nos jours pour vérifier nos trois hypothèses, et nous allons ensuite comparer les ciblistes français d'aujourd'hui pour déceler les nuances qui existent entre ces auteurs. Après ces études diachronique et synchronique, nous pourrons ensuite effectuer une étude comparative entre la France et J'Allemagne, et avec d'autres pays européens, voire avec la Corée. Au terme de cette étude comparative nous serons enfin à même de dégager les éléments typiquement français dans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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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France et la premiere etape de sa politique de securite europeenne : De la fin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au debut de la cinquieme Republique

          이승근 한국프랑스학회 2004 한국프랑스학논집 Vol.46 No.-

          프랑스는 2차 대전 직후 자국의 안보유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구사하게 되는데 그 기저에는 국가 안보의 유지 및 유럽에서 프랑스의 헤게모니 유지와 세계강국으로의 발돋움에 있다. 이를 위해 독일의 부흥방지, 소련의 위협회피, 이 둘을 위한 유럽에서의 공동방위체제 구축, 유럽통합의 추진, 유럽통합군의 창설 등의 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지배 하에 놓였고 유럽도 이러한 미․소 양대 축을 중심으로 동․서로 분할된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을 중심으로 서유럽이 유럽의 공동방위체제로서 NATO를 축으로 방위동맹을 형성한 뒤 프랑스가 이에 편입되고, 독일은 NATO에 편입된 가운데 주권회복과 재무장을 하게 된다. 자연히 프랑스가 추진한 유럽통합군 건설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점은 프랑스로서는 치욕적인 것이고, 1958년 드골대통령의 복귀는 이러한 환경에 기인한다. 드골은 집권 이후 프랑스의 위대성과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는 한편, 강력한 군사력의 유지 등 3개 노선을 중심으로 유럽안보 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드골이 집권한 당시 유럽 패권국으로서 강력한 프랑스의 재건을 꿈꾸며 자신의 정치․외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이는 오늘날 현 프랑스 정부의 외교․안보상 정책적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골리즘'(gaullisme)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사변 (思辨)의 핵은 ‘국가'(nation)와 ‘힘'(puissance)으로 함축된다. 이의 구체적 표출은 프랑스의 과거 ‘위대성' (grandeur)의 회복과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독립'(indépendance) 확보, 자국의 ‘국력'(puissance) 유지로 나타나고 이를 바탕으로 드골은 프랑스를 세계 강대국의 하나로 다시 만들고, 미국과 소련 등 세계 초강대국들로부터 정치․외교적 독립을 유지토록 노력하게 된다. 특히 드골은 유럽 방위에 있어서 유럽인이 중심이 되는 기구설립,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유럽 데땅뜨 정책 및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의 거대 유럽의 탄생을 꿈꾸게 된다. 한편으로, 대 미 종속을 탈피하기 위해 반대서양 통합 전략을 외교적으로 구사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실시의 구체적인 결과로 드골은 66년 NATO 군사기구로 부터의 탈퇴를 결행하여 나토기구 내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에 반대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서유럽동맹(WEU)이 유럽 안보 기구화 될 수 있도록 하였고 유럽공동체(EC)의 강화 정책을 펴서 서유럽의 결속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결국, 프랑스의 초기 정책들은 이후 5공화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변형이 되기도 하였지만 지속적으로 반영이 되어 오늘날 유럽의 분단극복과 유럽에서의 ‘유럽인에 의한 유럽' 건설, ‘유럽통합'에 실질적으로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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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1990년대 프랑스의 국제입양 양상과 한인여성입양

          문지영 한국프랑스사학회 2019 프랑스사연구 Vol.- No.40

          International adoption has a ‘transnational' nature in that it is a universal phenomenon at the global level. In terms of transnational migration, international adoption shows a very unique pattern of migration that adoptees cross the border regardless of their own will or choice, unlike general migration such as labor migration or marriage migration, and that can be defined as ‘involuntary migration by contract' between the parties concerned. In fact, Korea was the world's largest adoption-out country where many Korean adoptees were sent to France after the United States from the 1970s to the mid-1990s. Nevertheless, the history of Korean international adoption has long been forgotten, sometimes even concealed and not subject to research under the stigma of a national figure of ‘baby exporting country'. S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position and meaning of international adoption in the history of transnational migration by revealing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realities of Korean international adoption. To this end, I will focus on two aspects, the interracial adoption policy of France, and the pattern of adopting Korean females in France and the issue of their identity, basing on the cases of France from the 1960s to the 1990s. 국제입양은 전 지구적 차원의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트랜스내셔널 이주의 측면에서 볼 때 국제입양은 노동이주나 결혼이주 같은 일반이주와 달리 입양인이 스스로의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국경을 넘는, 관계자들 사이의 ‘계약에 의한 비자발적 이민' 형태로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이주 양태를 보여준다. 한국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 이어 프랑스에 많은 한인입양인을 보낸 세계 최대 입양송출국가였다. 그럼에도 한인국제입양의 역사는 오랫동안 ‘아기수출 국가'라는 국가적 수치와 오명 아래 잊히고, 때로 은폐되면서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연구의 목적은 프랑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인국제입양의 역사적 배경과 실상을 밝힘으로써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의 틀 안에서 국제입양의 위치와 의미를 조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60-1990년대 프랑스의 입양정책과 국제입양, 이어 프랑스의 한인여성입양 양상 및 정체성 문제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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