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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더 피어선의 찬송가 연구

          문성모 평택대학교 피어선기념성경연구원 2016 피어선 신학 논단 Vol.5 No.1

          Pierson(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 was known as a minister, educator, evangelical missionary and christian writer. However, nobody had studied about him as an hymn writer and we also didn't know about his hymn in Korea. Even though his mission period(1910. 12. - 1911. 1.) in Korea was very short, Pierson Memorial Union Bible Institute, which is the predecessor of the Pyeongtaek University, was founded in Seoul according to his last wishes. Pyeongtaek University has opened the Pierson Hall to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and exhibited materials. In this place Pierson's hymn, 『Gospel Hymns and Sacred Songs』(1875) was revealed and in this book, 44 songs, <The New Song> was included. This hymn had five verses and Bliss(Philip Paul Bliss, 18381876) composed it. The number of Pierson's hymn lyrics are 24 and in these hymns <The New Song> is the most famous one. Pierson had worked during the Great Awakening Period of the United States, from the mid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and co-worked with Dwight Moody, James Hudson Taylor, Adoniram Judson Gordon, George Williams and George Muller, the revivalists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Kingdom at that time. His hymn lyrics were based on Revelation 14:3 of and showed impressive apocalyptic ideas with revival trend of that time.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목회자요 교육자요 복음주의 선교운동가요 기독교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찬송가작가였다는 사실은 아직 연구되지 않았고, 그의 찬송가에 대하여 한국에 알려진바도 없다. 그가 한국에 와서 선교한 기간(1910. 12. - 1911. 1.)은 매우 짧지만, 그의유언에 따라 오늘날 평택대학교의 전신인 피어선 기념학원이 서울에 설립되었다. 평택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하여 피어선기념관을 개설하고 자료를 전시하였는데, 여기에 피어선 소장본 찬송가 『Gospel Hymns and Sacred Songs』 (1875)가 소개되었고, 이 찬송가 44장에는 피어선이 작사한 <The New Song> 이 들어있다. 이 찬송가 가사는 총 5절로 되어있고, 작곡자는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 1876)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피어선의 찬송가 가사는 모두 24개 정도이며, 이중에서 위의 찬송가가 가장 유명하다. 피어선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대각성운동 기간에 활동한 인물이며, 당대의 미국과 영국의 부흥운동가인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A. J. Gordon), 조지 윌리엄스(Sir George Williams) 및 조지 뮐러(George Muller) 등과 함께 동역하며 활동하였다. 그의 찬송 가사는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 기초하고 있고, 당대의 부흥의 물결에 편승하여 강한 종말론적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 韓國 大學敎育의 危機와 小規模 大學의 特性化에 관한 硏究

          림영철 평택대학교 2002 論文集 Vol.- No.-

          본 논문의 서술은 먼저 한국 대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그 문제로 인하여 야기된 위기상황을 논술하고 그 문제해결의 한 방법으로서 대학 특성화를 논술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대학의 역사가 길지 않고 서울이나 대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교적 규모가 적은 대학을 염두에 두고 이 논문을 작성하려고 했다. 대개 이런 대학일 경우 대학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고 입학 지원학생의 수가 적거나 미달하며 그래서 재정 역시 넉넉하지 못하여 대학의 장래가 불투명한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평택대학교의 특성화에 대하여 간단하게 제의하였다. 평택대학교의 경우는 서울과의 거리와 입학생 경쟁률 및 재정 등에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전교생 4,000명 미만의 소규모 대학이라는 한계점이 있다.

        • 배경지식이 독해력에 끼치는 영향과 평택대학교 교양영어 교육에 관한 소고(小考)

          김남균 평택대학교 1999 論文集 Vol.12 No.-

          본 연구는 본교 재학생들의 교양영어 교육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방안에 과한 것이다. 연구의 핵심적인 내용은 영어학습이 단순히 영어자체에 대한 강의만 가지고는 효과적이지 못하고, 좀 더 나은 학습효과를 위하여서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강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영어의 배경지식인 미국에 관련된 내용이 강의에 많이 포함될 때 수강자의 영어에 대한 이해력과 기억력이 향상되어 바람직한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요지다. 따라서 본 대학 교과과정에 교양영어학습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미국학 관련 과목의 설치가 필요하며, 아울러 영어학습에 효과적이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특강실시, 1학년 이상 학생들을 위한 영어강좌의 지속적인 설치, 능력별 반편성, 그리고 튜터제의 실시 등을 개선 방안으로 제시했다.

        • 통계학의 기초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점 고찰 : A Christian View of the Foundations of Statistics

          정형철 평택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 2001 자연과학연구 Vol.- No.1

          자연과학연구 창간호 발행에 따라 평택대학교의 교육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통계학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점을 고찰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통계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의 입장이나, 혹은 비전공자 입장에서 통계학에서도 기독교적 고찰이 가능한가 하는 것은 흥미있는 문제라 생각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 통계학에 있어 기독교인의 관점이 가능한가에 대한 Geertsema(1987)의 논문을 번역 및 요약하였고, 본문 사이에 주석을 통하여 본 연구자의 의견이나 설명을 첨부하였다. According to the first establishment of Journal of Natural Science in Pyongtaek University, it is a meaningful study for the foundations of statistics in a Christian view. In order to develop a Christian approach to an "exact" science such as Statistics, it is connected. Therefore, the context of Geertsema(1987) is reviewed and the explanatory notes of the original text are used to explain the contextual views of an author.

        • 박용희(朴容羲)의 신앙과 사역에 대한 연구

          이선호 평택대학교 피어선기념성경연구원 2014 피어선 신학 논단 Vol.3 No.2

          이 논문에서는 구한말, 일제시기, 해방 후 한국교계와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그동안 거의 연구되지 못한 박용희의 사역에 대해 조망하는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박용희의 사역을 구한말과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이후 등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박용희의 사역은 기본적으로 연합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한 연합정신은 그가 연동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의 기본을 가르쳐 준 언더우드로부터 영향을받은 것이며, 일본 유학 당시 나까다 쥬지가 운영하는 성결교 계통의 성서학원을다니면서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이후 그의 사역은 승동교회를 비롯하여 호남 일대의 교회, 영등포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장로교 경기노회장, 1927년부터는 신간회 안성지부장, 1929년부터 1930년 사이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공의회”의 후신인 “예수교 연합공의회” 회장 등의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박용희는 YMCA에서도 신흥우 등과 함께 교계연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적극신앙단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박용희는 연합적인 사역을 전개하면서도 보수적인 신앙관을 바탕으로 신사참배 강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그 결과 그는 순천노회장을 역임하면서, 해방 전 4 년에 달하는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한편 박용희는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에서 재정을 맡았으며, 한성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등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에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해방 이후에도현실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 안재홍과 국민당을 결성하기도 하였고 김구의 한국독립당 창당에도 기여하였다. 나아가 박용희는 장로교 내부에서는 개혁성을 바탕으로 해방 이후 이른바기장 측의 핵심적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원로목사로서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및 대한기독교 장로회 총회장을 1954년부터 1956년 사이 역임하였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박용희는 오늘날 평택대학교(平澤大學校)의 전신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제2의 도약을 하는데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수행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지만,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실천하였으며, 나아가 교계의 정화운동에도 헌신한 인물이었다 . 박용희의 이러한 특징은 당시 한국교계를 이끈 여타 인물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신앙에 깊이 침잠하여 사회 현실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거나,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나머지 신앙및 신사참배 등의 문제에서 문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용희가일생을 통해 보여준 이러한 모습은 비록 그의 사역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었지만, 향후 한국 교계 목회자들을 향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는 것으로평가된다. This research is to find out the works and the belief of pastor Park Yong Hee(朴容羲, 1884-1959), who had done important role during the periods of late Joseon, Japanese colonial Joseon, and First Republic of Korea. However, only few study had been done about him so far. This article try to reveal his works both in two parts, from late Joseon to Japanese colonial Joseon, and after Liberation of Korea. Basically the works of Park Yong Hee had been strongly influenced by the spirit of ecumenism and union. That kind of spirit could be learned from Horace Grant Underwood(元杜尤, 1859-1916) who taught him the essence of belief, and could be strengthened when he attended at the bible study institute established by the founder of Holiness Church of Japan, Nakada Jujii(中田重治, 1870-1939). Park Yong Hee had leaded several churches including Seungdong Church, some churches in Jeolla Providence, and Youngdeungpo Church. Through this process, Park Yong Hee could be selected important position such as the chairman of the Synod of Kyungkido(1927-1928), the chairman of Ansung Branch of Shinganhoe(新幹會, 1927-1932), and the chairman of the Union Council of Christian Church(耶蘇敎聯合公議會, 1929-1930), which was established after the Union Council of Presbyterian Church and Methodist Church. And Park Yong Hee promoted church union movements in YMCA with Shin Heung Woo(申興雨, 1883-1959), was one of the core person in Positive Faith Group(積極信仰團). Yet he took part in the church union movements, with the conservative faith in Christian religion, he strongly denied accepting the Shintoism of Japan. So he should go to prison for four years before Liberation when he was chairman of Shoonchun Synod. Besides, Park Yong Hee promoted independent movements vividly with national emotion. He took part in the Movement Compensation in National Bonds of 1907, took in charge of finance during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did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the Hansung Government, and exiled to China to avoid being arrested by Japanese police. Specially, he had been interested in the politics after Liberation of 1945, established the Nationalist Party(國民黨) with An Jae Hong(安在鴻, 1891-1965), and aided Kim Koo(金九, 1876-1949) in making the Korea Independence Party(韓國獨立黨) of 1946. Further, Park Yong Hee became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in the Kijang Presbyterian Church, with the powerful reform spirit. So he could be not only a president of Hankook Theological College, but also a chairman of he Kijang Presbyterian Church from 1954 to 1956. Also he had done important role for Arthur T. Pierson Memorial Bible School, the former institute of Peongtaek University, to maintain the courses and rebuild the School during the Korean War period(1950-1953). In conclusion, Park Yong Hee had the conservative faith concerned with the purity of Christian belief, took part in the movements concerned with social reform, and was the person who devoted himself to the church reform. These specialities of him would be distinguished among other figures. Because majority of pasters could be separated in two groups, one usually had conservative faith in belief but not having so much interested in the social problems, the other had enthusiastic spirit in social movement but not having so much interested in the belief, even having taken part in Shintoism in Japanese colonial Joseon. And these specialities of him, in spite of some negative evaluation about him, would be regarded as important to the pastors of present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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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거덕(崔巨德) 목사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연구

          이선호 평택대학교 피어선기념성경연구원 2016 피어선 신학 논단 Vol.5 No.1

          This article is to do research about the life and works of pasotr Choi Geo-Deok(1907-1990). He, who had lived from Japanese colonial period to 1990, leaded Korean christian society's revival. Specially he had took part in progressive social activities with conservative belief. Choi Geo-Deok could have take in charge of Meodong Church tha t was one of the famous churches in Korea when he was thirties. aLter he leaded Andong Church, and established Deoksu Church. He couldn't strongly resist against Japanese rule to maintain his church, but he tried to support independent movements silently. The theology of Choi Geo-Deok was established by his variety li fe which experienced buddhism, taoism, and confucianism. He showed wonderful leadership with supporting younger christian pastors. That kind of features could be found in selecting successor of his church(Deoksu Church). Also Choi Geo-Deok influenced many people including Yoon Bo Sun(1987-1990), who was the former president of Korea and one of the presbyteries in his church. Choi Geo-Deok also helped Arthur T. Pierson Memorial Bible School and Arthur T. Pierson Memorial Bible Seminary to be developed into Pyeongtaek University. He selected Cho Ki Hung(1932-Now) as the responsible person of the schools. With this efforts of Choi Geo-Deok and Cho Ki Hung, Pyeongtaek University could be one of the influential christian universities in Korea. 본 논문은 최거덕 목사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분석하고자 시도하였다. 최거덕 목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1990년 그가 소천 할 때까지 한국 교계의 주요한 인물로 활동하면서 기독교계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보수적인 신앙관을 견지하면서도 사회 개혁의 움직임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최거덕 목사는 1930년대 한국 교회의 혁신을 요구하였던 적극신앙단의 구성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해방 이후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인물들이 가담한 것으로 평가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주요한 인물들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그의 적극적인 사회 활동은 제3공화국 당시 진보적인 단체로 평가 받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교계를 이끈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거덕 목사는 30대의 나이에 이미 국내의 대표적인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는데, 이는 그가 지닌 목회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널리 인정받은 결과였다. 최거덕 목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 폭압적인 신사참배에 대한 요구와 친일적인행동의 요구에 대해 담임 목사로 목회의 현장을 지켜야 하였기 때문에 큰 저항을할 수는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최거덕 목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동영 선생의 장례예배를 주도하는 등 일제 강점기당시 독립 운동가들을 드러나지 않도록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해방 이후일제 강점기 동안 겪었던 고초에 대해 회개를 선포하였으며, 안동교회라는 저명한 교회의 담임 목사 자리를 마다하고 새로 덕수교회를 개척하는 역할을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최거덕 목사는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화합과 연합을 강조하는목회 관을 초지일관 견지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구성될 당시 이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통합과 합동 측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분열될 때에도 한국교회에 적극 참여하였던 선교사들이 지지하였던 통합 측에 남는 결정을내렸던 것이다. 최거덕 목사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갈등과 문제가 있더라도 기존의 체제 안에서 개혁을 추진해야 하며 절대 분열은 있을 수 없다는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최거덕 목사의 신학은 유교, 불교, 도교를 두루 섭렵한 삶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이 확립된 것이었다. 그는 유교적인 가정 배경과 불교대학에서 공부한 불교철학과 기독교 진리의 영행을 받아 유교적인 도덕과 불교적인 포용력과 기독교적인 사랑이 하나가 되는 특별한 신학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한국적 신학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보다 깊이 연구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판단된다. 한편 그는 화합을 강조하면서 후배 교역자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리더십을발휘하였다. 일례는 그의 목회관은 덕수교회의 후임 목사를 결정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잘 드러났다. 즉 그는 전도사 시절부터 교회에 헌신하여 온 손인웅 목사를후임 목사로 추천하였는데, 이러한 부분은 현재 후임 목회자 선정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최거덕 목사는 오늘날 평택대학교의 근간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및 피어선기념성서신학교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였다. 뿐만 아니라그는 조기흥 총장(당시 전도사)을 발탁하여 피어선신학교의 운영을 책임질 수있도록 이끌었는데, 이러한 최거덕 목사의 노 ...

        • 미국에 대한 한국 대학생의 성향 분석 : 평택대 재학생을 중심으로

          황영순 평택대학교 2003 論文集 Vol.17 No.-

          본 연구에서는 오늘날 첨예한 이슈로 떠오른 한·미관계와 9·11사태라는 역사적인 사건 그리고 반미 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미국의 모습과 한·미관계에 대해한국 대학생들(평택대학교 재학생을 중심으로)은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실제적인 분석사례가 부족한 점에 주목해 대학생들의 미국에 대한 관심과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설문조사와 통계처리 분석과정을 통해 실증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설문조사 결과에 나타난 대학생들의 태도에서 한·미관계에 대한이중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I have noticed that there are many vague opinions but relatively few analyses on the recently negative attitude of Korean youth against the United States. In this study the main point is the interest and attitude of Korean University students toward the US. I have used questionnaire as the tool for research. Here is the result of analysis of 402 samples. 1) They feel negative against the US in general. 2) They feel positive toward American culture. 3) Despite their negative attitude they think Korea needs the US for its development. 4) In general they the US policy against North Korea. 5) Compared to before, they have grown more negative toward the US after 9·11. 6) There are some questions to which American studies major students and the others have shown different opinions. I have been able to draw several conclusions from the result of questionnaire; Korean University students are ambivalent about Korea-America relationship. They feel negative toward the US itself but positive toward its culture. They also feel the US is necessary for economic development and security of Korea. I have interpreted this as dependence yet independence. They are also against the US policy against North Korea; they think that restarting the North Korea-US talk will eventually lead to dissolution of the long-standing conflicts between the two, of course only if they both keep their pro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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