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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충청유학의 전개양상과 정체성

        이영자 ( Lee Young-ja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1 儒學硏究 Vol.54 No.-

        본고에서는 17~19세기 충청유학의 학맥별 전개양상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충청유학의 정체성을 밝히었다. 충청유학은 17세기에 이르러 호서학파(湖西學派)라는 학파로서의 실체를 갖춘 이후, 20세기 초까지 면면히 이어진 충청지역에서 논의된 대표적 한국유학이다. 충청유학의 정체성 구명은 ‘시대별 변화에도 불구하고 충청지역의 유학자나 유학자들 전체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본질적 특성과 그 원인’을 찾는 데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정체성의 외적 요소로는 학맥별 성리학설을 통해 충청유학의 정체성을 밝히고, 내적 요소로는 충청유학자들이 추구한 가치와 신념인 유학 정신을 통해 구명하였다. 그 결과 외적 요소로는 이이의 ‘리’, ‘기’, ‘이발’, ‘기발’, ‘이통’, ‘기국’의 주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학맥이 존재하였음을 밝히었다. 또한 내적 요소로는 학맥별로 강조된 주자나 율곡의 유학 정신을 계승하여, ‘의리(절의), 도덕적 원칙, 예절(예학), 평등, 무실(실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를 포괄하여 충청유학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인간의 도리 즉, ‘윤리, 도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인도주의(人道主義)’ 유학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유학자들의 공통된 지향 정신이겠지만, 조선 후기 충청유학자들의 ‘인도주의’ 정신의 추구와 실천은 어느 지역, 누구보다도 더 널리,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주의 정신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인도정신이 인간과 인간의 공존에 필요한 가치였다면, 이젠 4차 산업시대의 이상적 사회인 신문명공동체 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정신이다. 이렇게 볼 때 충청유학의 정체성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와 미래사회에도 활용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한 면에서 충청유학은 오래된 과거가 아닌 오래된 미래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갖는다고 하겠다. This study has examined how Chungcheong Confucianism, or Confucian study, developed in the 17th through 19th centuries and verified its identity found in the process. Since its material establishment as a school called the Hoseo Confucian Academy in the 17th century, Chungcheong Confucianism had represented the Korean Confucian study in Chungcheong region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The key to verifying the identity of Chungcheong Confucianism lies in finding the ‘fundamental characteristics and causes of having Confucian scholars of Chungcheong region or all Confucian scholars in general organically combined despite changes over different periods’. Against this backdrop, this study has verified the identity of Chungcheong Confucianism through both internal and external aspects that are the fundamental characteristics of values and beliefs pursued by the academic genealogy and the Yuhak spirit as their cause, and the Neo-Confucian theories by academic genealogy, respectively. As it turns out, there existed various academic genealogies depending on where the key emphasis of Yi Yi's ‘Yibal, ‘Gibal’, ‘Yitong’ and ‘Giguk’ was placed. The study has also found that the internal aspects can come down to 'loyalty, morality, manners, equality, and practice' according to the importance of the Confucianism spirit, which were emphasized by different academic genealogies. To sum up, the identity of Chungcheong Confucianism is characterized by greater emphasis than any other studies on humanitarianism, or the ultimate purpose of humans to practice ‘ethics and morality.’ Humanitarianism has been an essential spirit to ensure the coexistence and co-prosperity of humans from different cultures and backgrounds and is also an indispensable spirit in our community and society seeking new civilization i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era. In this vein, the identity of Chungcheong Confucianism is something worth revisiting in the present and future society beyond the time and spatial boundaries. It is in that sense that Chungcheong Confucianism retains its significance as a timeless future, not an old past.

      • KCI등재

        연구논문 : 명재 윤증의 유학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이홍군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2 儒學硏究 Vol.26 No.-

        명재 윤증(1629-1714)선생이 처한 17-18세기 조선사회는 내우외환의 시달림에 국가발전과 민족부흥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시기였다. 병자·정묘호란으로 인한 민족적 자존심 상실과 주체성의 흔들림, 당쟁으로 인한 형평성의 상실, 부친 윤선거의 江都之事로 인한 심적 갈등 등은 충분히 명재로 하여금 덕성을 상실케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명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국가적 차원에서는 충신양민으로, 학문적으로는 실천유학자로, 가정적으로는 효자로 평생을 재야에서 깨끗하게 살아온 순유였다. 본 논문은 명재의 유학사상을 리기론, 심성론, 수양론 3개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 현대적 의미를 전개하였다. 리기론에서 명재는 자신의 특징적인 관점이나 이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理氣二元의 존재관을 기본으로 하면서 리와 기의 관계를 주자와 율곡의 입장을 견지하여 ‘理氣不相離不相雜’의 리와 기의 묘합을 주장한다. 리와 기의 발용에 있어서, 기의 발용만을 주장하여 율곡의 ‘氣發理乘’의 논리를 계승한다. 또한 사물의 변화 과정에 있어서, 리는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기는 천차만별하여 차별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국한된다고 하여, 율곡의 ‘理通氣局’의 논리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명재의 리기론은 율곡 리기론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성론에서는 명재는 인심도심에 대한 논의를 가장 심도 있게 전개한다. 이는 명재가 심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심을 중시한다고 하여 심학인 것은 아니다. 명재는 도심, 인심, 인욕은 모두 일심의 발현이며, 본연의 마음이 과불급으로 인해 가려져 인심이 된다고 하였다. 인심은 성인도 없을 수 없으며, 인심은 불선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땅히 욕구할 것을 욕구하는 것은 상지의 인심이고, 마땅히 욕구해서는 안 될 것을 욕구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인욕이라는 것이다. 본심이 과불급이 없이 바르게 작용한 것이 도심이고, 과불급하여 잘 못 작용한 것이 인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심을 도심, 인심, 인욕 삼층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명재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명재의 수양론은 內實과 內修에 힘써 實心을 함양하고 발휘하는 실천적 修養學이라 하겠다. 명재는 독서 궁리의 학문방법을 제시하고, 입지를 수기의 기반으로 한다. 입지가 서면 실심이 서고, 실심이 서면 실공에 힘쓸 수 있고, 실덕에 이를 수 있다는 무실적 수양론이다. 명재의 이와 같은 유학사상은 현대사회의 민족모순, 종교전쟁, 인성위기, 교육위기 등 현대적 병폐를 해결함에 지혜와 방법을 제시한다. 명재의 일심, 본심에 대한 강조는 본원에서 인간의 마음은 성인과 보통 사람에 차이가 없으며, 보통 사람도 후천적 수양을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명재의 인간 평등사상의 기초적인 논리라고 하겠다. 또한 학문함에 있어서 명재는 지행합일의 전인적 교육을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평등은 인류사회의 최종목표이며, 인간이 인간다워야 함은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다. 이에 명재의 유학사상은 현대사회 더욱이는 그 어느 시대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평등이념이며 교육이념이다. 明齋尹拯(1629-1714)所處的17-18世紀的朝鮮社會是在內憂外患的雙重壓力下苦思國家發展和民族複興的抉擇期。丙子·丁卯胡亂帶來的民族自尊心的喪失和主體性的動搖、黨派之爭帶來的社會公德的喪失、父親尹宣擧的江都之事帶來的心的矛盾,這三者任何一個都是讓明齋失去德性的契機。但是明齋一生在民間毫不動搖地度過了在國家層面上是忠臣良民、在學問上是實踐儒學家、在家庭中是當孝子的純儒生活。本論文從理氣論、心性論、修養論等三個方面考察了明齋的儒學思想幷展開了其現代意義。在理氣論上明齋沒有提出自己特定觀點和理論。在理氣的關系上明齋繼承朱子和栗穀的立場,主張理氣二元的本體論,堅持‘理氣不相離不相雜’的理氣之妙合。在理氣的‘動靜’上只承認氣的動靜,繼承栗穀的‘氣發理乘’的邏輯。明齋認爲在事物的變化過程中理具有普遍性的特點,所以不局限於時間和空間,但氣是千差萬別具有差別性,所以局限於時間和空間,堅持了栗穀的‘理通氣局’思想。如此,明齋的理氣論忠實地繼承著栗穀理氣論的立場。在心性論上明齋著重闡述‘人心道心論’,這是明齋重視‘心’的表現。但是重視心不一定是‘心學’。明齋認爲道心、人心、人欲都是一心之發,因本然之心被氣所蔽過不及而變成人心。聖人也不能沒有人心,人心有善有惡,不是本不善。欲當欲是上智的人心,欲當不欲是普通人的人欲。本然之心無過不及的是道心,有過不及的是人心。在這裏明齋以道心、人心、人欲三層說來解釋‘心’呈現了自己的特色。明齋修養論是致力於內實和內修的涵養和發揮實心作用的實踐修養學。他提出讀書窮理的學問方法,把立志作爲修己的基礎。認爲立志而後立實心,立實心才能勤於實踐達到實德的務實的修養論。現代社會面臨著民族矛盾、宗敎戰爭、人性危機和敎育危機等社會問題,對這些問題的解決明齋的上述儒學思想提供智慧和方法。明齋對一心、本心的特別重視,這是因爲他認爲在本原上人心沒有聖人和凡人的差異,凡人也通過後天的修養可以成爲聖人。這就給人類提供了平等的前提,是明齋人類平等思想的思維前提。在敎育上明齋主張‘知行合一’的全能敎育。他認爲單單掌握理論不可以,必須把理論付諸於實踐才能成爲眞正地知識,才能實德。人類的平等是人類社會的最終目標,人之爲人是最基本的學問。爲此,明齋的儒學思想是現代社會以至任何時代都要堅持的平等理念和敎育理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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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적 한국유학사 서술의 재조명 -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를 중심으로 -

        정성희 ( Jeong Seong-hee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 儒學硏究 Vol.37 No.-

        현상윤은 유학자의 집안에 나서 어린 시절에 유학을 습득하였지만 10대 후반기부터 식민지 근대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대학교육까지 마치면서 유교망국론적 식민사관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40대 이후에는 유학에 대한 시각에 변화가 오면서 유학의 긍정적 측면을 조명하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후 해방을 맞이하고 또 다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현상윤은 『조선유학사』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나온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는 조선 말기부터 있어온 민족주의적 유학사 서술의 마무리이자 이후 현대 유학계의 유학사 서술의 새 장을 여는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유학사』의 바탕을 흐르는 유학사관이 민족주의라면 그것을 서술하는 방편은 모화사상 비판과 춘추필법적 서술방식이었다. 모화사상은 현상윤이 조선유학의 `죄`로 들고 있는 여덟 가지 중에 가장 먼저 들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상윤은 모화사상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척사위정운동을 평가하고 있다. 즉 모화사상 비판이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를 천명하는 것이라면 척사위정운동을 국권 옹호와 인륜도덕을 지켜내는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은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현상윤은 또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따라 포폄을 가하고 있다. 그 기준은 `절의`와 `실천`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정도전이나 권근 등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들에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조선초기의 유학에서 절의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여 사육신과 생육신, 공신의 문제를 언급한다.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운동에 대해서도 춘추대의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현상윤은 `실천`을 또 다른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조선 초기의 지치주의를 유학사상의 정치적 실천으로 보고 있다. 실천성에 대한 중시는 조선 후기의 경제학파에 대한 서술에서도 두드러진다. 『조선유학사』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서술은 현상윤이 조선 유학의 독자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상윤의 민족주의적 유학사 서술은 격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정신적·문화적 주체성을 잃지 않고자 하는 지식인의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History of Confucianism of Chosun(『朝鮮儒學史』) of Hyeon Sang Yoon is the the most authentic version which describes Korean contemporary Confucianism based on national view of history. He was a historian rather than a Confucian schola even though he was born in the family of Confucian schola and studied Confucianism since childhood, He studied history in the university and was an intellectual who learned modern scien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days. Hyeon Sang Yoon revealed his view of history clearly in History of Confucianism of Chosun. I thought that his view of Confucianism was based on nationalism, and as the method for this he criticized china worship(慕華思想), and he emphasized the style of `chunchupilbeob`(春秋筆法- the method of describing Chunchu of Kong zi), the originality of Confucianism of Chosun. As Jang Ji Yeon accepted the theory of origin of Kija(箕子) in The origin of Confucianism of Chosun (『朝鮮儒敎淵源』) Korean scholars considered the Confucianism of Chosun was originated from Kija(箕子). But Hyeon Sang Yoon denied the theory of origin of Kija(箕子), he criticized that china worship(慕華思想) put our independent spirit to death. In History of Confucianism of Chosun he made a related chapter about china worship(慕華思想) and described it′s origin, representative persons, ideological influences. Such statements were based on national consciousness against China. In the same vein he described `wijong-cheoksa`(衛正斥邪) movement seriously, but he did not referred any scholars who insisted enlightenment movement at that times. Adopting the style of `chunchupilbeob`(春秋筆法) in History of Confucianism of Chosun he evaluated scholars and their thoughts. Standard of the evaluation was the guiding principle of Confucius and utility. It was an unexpected style of description in comparison with being influenced by historical positivism during his university years. His method of description was different from that of History of Confucianism of Korea of Lee Byeong Do who studied together in Waseda university at the same period. Lee Byeong Do was influenced by Ranke who asserted historical fact. In this aspect he obviously stood in contrast with the historical view of Hyeon Sang Yoon. Hyeon Sang Yoon described that Jeong Do Jeon(鄭道傳), Kweon Kun(權近) and the other Confucian scholars of Koryeo dynasty did not keep fidelity to their principle as the Confucian scholars of Koryeo dynasty. Moreover he described `sayuksin`(死六臣), `saengyuksin`(生六臣), `kongsin`(功臣) from the viewpoint of retainer`s fidelity. He emphasized utility of Confucianism of Chosun as the originality of Confucianism of Chosun. He mentioned `ultimate governing ideology(至治主義)` of Cho Kwang Cho(趙光祖) and practical science of Chosun which represent the utility of Confucianism of Chosun. History of Confucianism of Chosun of Hyeon Sang Yoon was a result of history of national Confucianism which continued to Paidongyeonwanrok(『浿東淵源錄』) of Song Byeong Seon, Joseonyukyoyeonwon(『朝鮮儒敎淵源』) of Jang Ji Yeon, Dongyuhakan(『東儒學案』) of Ha Kyeom Jin, and besides, it is a foundation describing the history of Confucianism for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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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유학의『대학』텍스트와 유종주의 대학관

        신현승 ( Hyun Seung Shin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3 儒學硏究 Vol.28 No.-

        이 논고에서는 「신유학의 대학 텍스트와 유종주劉宗周의 대학관」이라는 주제 하에 중국송명대(宋明代)에 신유학으로 등장하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핵심 문제를 사서(四書)와 『대학』해석의 차이에서 인식하고, 명대 말기 대표적 유학자인 劉宗周(1578-1645)의 대학관(大學觀)의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즉 송명대의 주요한 사상적 담론에 대해『大學』해석을 둘러싼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석의 중심에 놓인 것이 무엇이며 중국 명대(明代)말기주자학과 양명학의 양 진영을 사상적으로 넘나든 劉宗周의『大學』觀과 이념이 어떠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劉宗周의 경우『大學』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大學」이라는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는 주희와 왕수인의 견해를 모두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성의(誠意)``를 전면에 내세우고 신활(愼猾)이라는 키워드로『大學』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大學」은 劉宗周 만년의 ``誠意``와 ``愼猾``에 대한 최종적 정설(定說)이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그는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大學』개정에도 힘을 쏟아 대학고문삼의(『大學古文參疑』)라는 텍스트를 저술했는데, 전체의 구성은 일방(壹坊)의 『위석경대학』을 표준으로 삼았고 경(經)-팔조목의 전(傳)이라는 형식을 취하였다. 또 52세 때의 저작인 대학고기약의(大學古記約義)에서도 ``愼猾``의 개념은 변함없이 『大學』의 중심 요지가 되고 있다. This discussion, under the theme of「DaXue Text of Neo-Confucianism and Liu-Zhongzhou`s Viewof DaXue」, is aimed at looking into how was the aspect of the View of DaXue held by the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 in the late Ming Dyunasty-Liu-Zongzhou(1578-1645) with the perception of the key issue between Zhuzi-Studies emerging as Neo-Confucianism during the Song & Ming age and Yang-ming Studies as the difference in the interpretation of Sishu and DaXue. In other words, this study perceived the major ideological discourse during the Song & Ming age as the issue over the interpretation of DaXue, and intended to consider how were the view of DaXue and ideology held by Liu-Zongzhou whe ideologically haunted berween the both camps, i.e. Zhuzi-Studies and Yang-ming Studies. In case of Liu-Zongzhou, his critical mind about how to read the text of DaXue is well revealed in the writing of 「Du-DaXue」. In this writing, Liu-Zongzhou sets Cheng-Yi at the head while looking on both Zhu-Xi and Wang-Shouren`s view unfavorably, and he is suggesting his own unique thinking system while understanding the text of 『DaXue』eith the keyword of Shen-Du. Accorhingly, it may be safely said that this「Du-DaXue」was his final established theory on Dheng-Yi and Shen-Du in his later years In the same vein, Liu-Zongzhou also wrote text titled 『Daxueguwencanyi』 by doing his best for the revision of DaXue, which was spread like a growing trend at that time, and its overall composition made Feng-fang`s 『Weishijingdaxue』as a standard and took the form of Gyeong-Jeon of The-Three Main Principlcs, In addition, even in his 『Daxueguwencanyi』 written when he was 52, the concept of Shen-Du has become the central essentials of DaXue as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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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를 통해 본 유학의 창의성

        이시우 ( Lee See-woo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8 儒學硏究 Vol.44 No.-

        현 시대는 과학뿐만 아니라 경제, 기술, 예술, 정치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인재를 필요로 한다. 인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유학 교육ㆍ연구에서도 창의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며 창의와 인성을 결합시킨 교육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유학의 창의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회의적이다. 극단적으로는 유학, 유교사상, 유학교육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창의성 말살을 초래했다고 매도하는 발언도 쉽게 들을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유학과의 분리’를 진보로 보려는 경향은 다른 형태의 쇠퇴라는 입장에서 유학과 창의성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연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아울러 유학과 창의성 간의 긍정적 작용이 좀 더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행위를 낳아 사회 발전과 조화를 이끄는 진보의 계기임을 밝힌다. 필자는 유학의 경전이 마치 세상만사를 모두 설명, 해결할 수 있는 진리의 총화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또 유학의 전통적 지식 추구 방법인 ‘온고지신’은 태생적으로 창의성과 접점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어떤 상반된 입장이 서로가 고수하는 중요한 발언을 관철시키거나 타협하려고 하면 양측이 다 같이 인정하는 원칙적 명제와 포용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양측이 다 같이 인정해야 하는 것, 즉 ‘모든 창의성과 창의적인 것은 관계 속에서 발견ㆍ실현된다.’ 라는 명제와, 새로운 ‘관계맺음의 감각’을 제시함으로써 유학과 창의성의 만남 가능성을 밝힌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주로 『논어』의 용례를 기초로 삼고 그와 관련한 문헌을 참고하여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그 결과 유학은 동형반복의 역사가 아니라 도덕적 창의성 계발에서 탁월함이 발휘된 개성분투의 역사임을 밝힌다. We need creative talent not only in science but also in economics, technology, art, politics and so on. The humanities is no exception. Confucian education research also highlights the need to develop and utilize ways to cultivate creative talent, and emphasizes education that combines creativity and human nature. However, our society's perception of confucianism's creativity is skeptical. In the extreme sense, it is easy to hear the remarks that Confucianism, Confucian idea, and Confucian education have blocked progress of our society and led to the eradication of creativity. In this paper, the tendency to view 'separation from confucianism' as progress is a different form of decline. So I look for the possibility that Confucianism and creativity can be linked without interfering. It also reveals that the positive action between confucianism and creativity is an opportunity for progress that leads to more desirable human relationships and social behaviors, leading to social development and harmony. I don't want to say that the scriptures of Confucianism are the sum of truth that can explain and solve everything in life. And I don't want to say that Confucianism can not have creativity and contact in its native way due to the New Wisdom, a traditional way of seeking knowledge[wenguzhixin(溫故知新)]. However, in order to compromise or compromise an important statement held by one another, there must be a sense of principle proposition and engagement that both sides recognize. Therefore, in this paper, I propose the proposition that both sides must acknowledge together, that 'all creativity and creativity are discovered and realized in a relationship' and a new 'sensation of forming a relationship.' This reveals the possibility of a coexistence between Confucianism and Creativity. To carry out these studies, an interpretation will be attempted, mainly based on examples from The Analects and references related literature. As a result, the paper reveals that Confucianism is not a history of repetition but a history of struggle for individuality, which showed excellence in the development of moral creativity.

      • KCI등재

        고청 서기의 학문과 사상

        김창경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9 儒學硏究 Vol.46 No.-

        Gocheong Seogee is a Confucian scholar in the mid-Joseon period during which Confucian philosophy is not completely established as a national discipline. He was an authentic Seon-bi who helped boost Confusion philosophy in southern and northern parts of Chungcheong area including Daejeon, Nonsan, Gongjoo, Buyeo, Hongseong, Jochiwon as well as Boryeong and Dangjin. Following Seogee, Jangsaeng Kim, who had studied under Yulgok, strived to firm up Giho Confusion philosophy there. Influenced by his teacher Geeham Lee's pragmatical school whose main principle is loyal to their country and affectionate to their people, Seogee set his heart on living up to the same path as previous holy men had gone through rather than pursuing an overly speculative school only focused on Confucian scriptures. He seems to have put the virtues of pragmatic Confusion scholars into practice in accordance with the way Confucius and Mencius devoted themselves to their study and learning. He carried Hyangyak into effect, built the first Seowon in Chungnam area called Chunghyeon Seowon emulating Zhu Xi's Baeklokdong Seowon, and paid close attention to learning with Zhu Xi's portrait enshrined. Those things attest that he eagerly strive to put Confucianism into practice. Through these efforts, he gave a significant influence on establishing Confusion philosophy in southern and northern parts of Chungcheong area and trained lots of disciples like Leechang Song, Jaemoon Min - the teacher of Choryeo Yootae Lee - and so on. As a result, he laid a big foundation stone to develop Confusion culture in Naepo region. Therefore, his position should seem to be re-evaluated in Korean Confucian history. In a rigidly hierarchical social structure, he studied and interacted alongside with Geeham Lee, Heon Jo, Ikpeel Song, Sik Jo, and others with no thought of their lower social status and without any academic prejudices. These kinds of his mind-set and attitudes seem to be a precious example of embodying real Seon-bi spirit. So, I suggest Seogee's life has a substantial significance in strengthening personality education of the young today and composing media contents of local community. 고청 서기는 조선 중기 무렵 국학으로 정한 유학이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시기의유학자로서, 파주에서 주로 강학을 한 율곡의 가르침을 받은 김장생이 연산에 내려와 기호유학으로 성립되기 이전, 대전·논산·공주·부여·홍성·조치원 및 보령·당진의내포지역까지 포함하는 호중(湖中)의 유학을 진작시킨 선비이다. 서기는 스승인 이지함의 우국애민의 실천적 학풍을 영향 받아, 유교경전 중심의 사변적인 학풍보다는 성인(聖人)의 길을 학문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으며, 공·맹을 비롯한 정· 주의 학문방법을 따라서 실천적 유가의 도를 올바르게 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향약을 실시하고,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서 충남지역 최초의 서원인 충현서원을 세웠으며, 더불어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강학을 하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를 통하여 송이창과 초려 이유태의 스승인 민재문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서 당시 한미하였던 충남 호중의 유학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내포지역 유교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서기의 한국유학사에서의 위상이 새롭게 평가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더불어 서기와 더불어 이지함·조헌·송익필·조식 등이 신분을 넘고 학문적 편견을초월하면서, 함께 교유하여 절차탁마하고 투철하게 실천한 유학자로서의 삶의 모습에서참된 선비정신의 귀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청소년 인성교육 함양과 지역사회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가치와 현대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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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 충청유림의 유학정신과 위상 - 권중면, 권태훈을 중심으로 -

        이영자 ( Lee Youngja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7 儒學硏究 Vol.38 No.-

        본고에서는 근현대 충청유림의 유학정신과 위상을 취음 권중면(翠陰 權重冕, 1856-1936)과 그의 아들 봉우 권태훈(鳳宇 權泰勳, 1900-1994) 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권중면, 권태훈은 전통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유학자라기보다는 한학자, 단학가, 한의학자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저술과 활동에는 유학정신에 바탕한 유교 지식인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권중면은 정미칠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모든 국가권력이 강탈당하자 고종과의 군신간의 의리를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칩거를 시작하였다. 말년에는 계룡산 자락 상신리에 은거하면서 `용산구곡`을 만들어 인재 양성을 통한 구국의 염원을 담기도 하였다. 또한 권태훈도 영남지역의 거유(巨儒) 곽종석을 진정한 스승으로 삼고, 유학의 성인관(聖人觀), 성경(誠敬) 중심의 수양론, 16자(字) 심법(心法) 등을 강조하며 그의 민족사상의 핵심을 유학정신에서 찾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유학적 편린들을 바탕으로 이들이 전형적인 유학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수구거지(去之守舊)`나 `거의소청(擧義掃淸)`을 실천한 전형적 항일유림이다. 이들은 굴곡의 근현대 시기를 거치는 동안 한 순간도 군신의 의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의지를 지켜 나갔다. 이렇게 볼 때 꺼져가는 대한제국 한민족의 전통과 사상을 단절 없이 지켜내고 끝까지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진정한 선비이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도학정신을 실천한 유교 지식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discusses the spirit and status of Confucianism of Confucian scholars based in Chungcheong region in modern times, focusing on father and son, Kwon Jungmyeon (權重冕, 1856-1936) and Kwon Taehun (權泰勳, 1900-1994). Both Kwon Jungmyeon and Kwon Taehun were widely known as scholars of the Chinese classics, Danhak (the study of Dan or bioessence, 丹學) and oriental medicine, than of traditional NeoConfucianism. But, their published works and activities showed aspects of Confucian intellectuals based on the spirit of Confucianism. When all national authorities of the Korean Empire were seized due to the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of 1907 (丁未七條約), Kwon Jungmyeon abandoned his government post and lived in seclusion in order to remain as a loyal subject of King Gojong. During the retirement in Sangsinri near Mount Gyeryong in his late years, the senior Kwon made “Yongsangugok (Nine Poems of Dragon in the Mountain, 龍山九曲)” honoring Koreans` wishes to save the country and cultivating talents in the region. His son Kwon Taehun took Kwak Jongseok (郭鍾錫), a great Confucian scholar of Gyeongsang region, as his teacher and searched for the core of nationalism through Confucianism while emphasizing the view of sage as ideal (聖人觀) of Confucianism, sincerity and mindfulness (誠敬)oriented theory of selfcultivation (修養論), and the sixteenword message for cultivating the mind (十六字心法).” From such small parts of confucianism they displayed, the two men cannot be affirmed as Confucian scholars. But, they were typical antiJapanese Confucian scholars who practiced “Defend old values in hiding (去之守舊)” or “Raise the righteous army and defeat traitors (擧義掃淸)” based on antiJapanese spirit. Throughout modern times of ups and downs, they did not once desert their loyalty as the royal subject and love for the country and people, while steadfastly guarding their will. In this regard that they made an effort to maintain their loyalty and fidelity to the end without losing the tradition and idealism of Koreans in the Korean Empire, Kwon Jungmyeon and Kwon Taehun were authentic scholars and can be evaluated as Confucian intellectuals that practiced the spirit of Taoism, “the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 (知行合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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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선비문화가 가진 교육콘텐츠로서의 의미와 가능성

        김세정,양선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5 儒學硏究 Vol.33 No.-

        지금 21세기 사회는 인문학, 과학기술, 사회과학, 예술학 영역을 포함하는 ‘통섭적 융합 문화시대’라고 평가된다. 유학(儒學)에 대한 연구도 근대적인 분과학적 입장에서 벗어나 다른 학문․문화․사유 등과 통섭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는 연결지점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유학의 콘텐츠를 현재의 삶과 문화 등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이 요구되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유효한 유학의 사상을 발굴하여 이를 새롭게 조명하 여 ‘교육적 가치를 지닌 콘텐츠’로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 논문의 주제인 ‘호서 선비문화가 가진 교육콘텐츠로의 의미와 가능성’을 찾는 일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맞 닿아 있다. 콘텐츠는 산업적․경제적 측면의 상품뿐만 아니라 교육적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 내용물 (content)이다. 곧 교육콘텐츠는 ‘교육적 가치를 지닌 내용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 육콘텐츠로서 ‘선비정신’은 유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넘어서 이 시대에 유학의 가치를 새롭게 되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선비정신은 인성교육진흥법 시행과 관련하여 그 필요성이 더욱 요청되며, ‘세방화’하는 세계적 추세와 ‘교육과정 지역화’에 들어맞는 교육콘텐츠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에 충청지역의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호서선비문화의 정신’이 교육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논문은 다음의 세 과정을 거쳤다. 먼저 유학의 역사 와 사상을 통해 선비 정신에 대해 정리하였다. 더불어 그것이 현대적으로 어떠한 시사점 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호서 지역에서 형성된 선비정신 을 호서유학의 흐름과 사상적 특성을 통해 살펴보았다. 물론 이 두 과정을 거치면서, 선 비정신과 호서의 선비문화가 교육콘텐츠로서 어떠한 의미와 가능성을 지녔는지도 검토 하였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남은 문제를 짚어보지금 21세기 사회는 인문학, 과학기술, 사회과학, 예술학 영역을 포함하는 ‘통섭적 융합 문화시대’라고 평가된다. 유학(儒學)에 대한 연구도 근대적인 분과학적 입장에서 벗어나 다른 학문․문화․사유 등과 통섭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는 연결지점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유학의 콘텐츠를 현재의 삶과 문화 등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이 요구되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유효한 유학의 사상을 발굴하여 이를 새롭게 조명하 여 ‘교육적 가치를 지닌 콘텐츠’로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 논문의 주제인 ‘호서 선비문화가 가진 교육콘텐츠로의 의미와 가능성’을 찾는 일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맞 닿아 있다. 콘텐츠는 산업적․경제적 측면의 상품뿐만 아니라 교육적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 내용물 (content)이다. 곧 교육콘텐츠는 ‘교육적 가치를 지닌 내용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 육콘텐츠로서 ‘선비정신’은 유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넘어서 이 시대에 유학의 가치를 새롭게 되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선비정신은 인성교육진흥법 시행과 관련하여 그 필요성이 더욱 요청되며, ‘세방화’하는 세계적 추세와 ‘교육과정 지역화’에 들어맞는 교육콘텐츠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에 충청지역의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호서선비문화의 정신’이 교육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논문은 다음의 세 과정을 거쳤다. 먼저 유학의 역사 와 사상을 통해 선비 정신에 대해 정리하였다. 더불어 그것이 현대적으로 어떠한 시사점 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호서 지역에서 형성된 선비정신 을 호서유학의 흐름과 사상적 특성을 통해 살펴보았다. 물론 이 두 과정을 거치면서, 선 비정신과 호서의 선비문화가 교육콘텐츠로서 어떠한 의미와 가능성을 지녔는지도 검토 하였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남은 문제를 짚어보았다. The current 21st century society is considered ‘the era of convergence culture’ in which different fields such as the humanities, the technology, social sciences, and science of arts etc go on reciprocal exchanges. In this context, the research on Confucianism (儒學) must liberate itself from the modern standpoint of disciplinary division and seek for points of connection on which it can combine with other disciplines, cultures, and thoughts. Thus it is necessary to carry out the search for what can connect Confucian contents with the present-day life and culture. In this 21st century, the rediscovery and consideration of useful Confucian thoughts and the revival of them as ‘contents filled with educational values’ is regarded as very important. From this point of view, the authors think that the search for ‘the significance and possibilities of educational contents in Ho-seo’s Seon-bi culture’ as the subject of this paper can meet those demands of the era. The term ‘contents’ refers not only to the goods in economics and industry, but also to the valuable things contained in the education. From this aspect, it can be said that educational contents are ‘things filled with educational values’. The Seon-bi spirit (the intellectuals’ spirit) thus can start from the point of overcoming misunderstandings of the Confucianism and reviving Confucian values. Especially, the Seon-bi spirit becomes more important in the context of the enforcement of the Law for Stimulation of Humanity Education, and can be seen as valuable educational contents appropriate to ‘the curriculum localization’. It is regarded as reasonable to investigate the significance and possibilities of constructing the ‘spirit of the Seon-bi culture in the Ho-seo area’ as educational contents to cultivate students in the Chung-cheong area. Based on that standpoint, the paper is developed into three processes as follows. Firstly, the authors try to re-define the term ‘seon-bi spirit’ by considering the Confucian history and thoughts. Together with it, the authors discuss what suggestion this spirit can give from the modern aspect. Secondly, the authors examine the Seon-bi spirit rising in the Ho-seo area nowadays, based on the theoretical characteristics of the Ho-seo Confucianism. After those considerations, the authors try to find out the significance and possibilities of the Seon-bi spirit and the Seon-bi culture in Ho-seo as the educational contents. In the conclusion, the authors summarize the above contents and point out some outstanding ques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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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동유(東儒) 전통의 형성과 그 함의

        오세진 ( Oh Se-jin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1 儒學硏究 Vol.56 No.-

        본 연구는 조선에서 ‘동유’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그 말의 용례가 어떻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조사하고, 조선의 유학자들이 ‘동유’라는 말로 자신의 자의식을 어떻게 형성해왔는지 밝히고자 한다. 조선의 유학 전통에는 학설의 차이, 지역의 차이, 사승관계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유학의 분파들이 있었다. 그중 서로 배타적인 관계로 설명되는 두 학파는 성리학과 실학이고, 이 두 학파의 대립 구도는 조선의 유학사를 설명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을 ‘주자학자’, ‘성리학자’, ‘실학자’라고 지칭하지 않았고, 대개 자신들을 ‘유학자’라고 불렀다. 더 구체적으로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에서 유학에 헌신한다는 의미로 ‘동유’라는 말을 사용했다. ‘동유’는 ‘동방의 유학’, ‘동방의 유학자(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 연구는 근대 이후의 한국철학계와 사상사학계 학문에서 정리된 조선유학사의 설명 틀이 아닌, 조선의 유학자들이 스스로를 지칭하거나 자신들의 유학 전통의 계보를 지칭하면서 사용한 말인 ‘동유’라는 개념의 용례와 그 변천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성리학자나 실학자처럼 이질적 학풍으로 보이는 유학자들이 역사속에서 어떻게 중국의 유학 전통과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동방의 유학 전통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려낼 수 있었다. There was a Confucian sectarianism in the Joseon Confucian intellectual tradition, which results from differences in doctrines, regions, and master-disciple relationships. Among Joseon Confucian sects, Seonglihak(Neo-Confucianism 性理學) and Silhak(Practical Learning 實學) are mainly used to explain Confucian traditions during the Joseon Dynasty. However, most of the Confucians at that time in Joseon did not refer to themselves as ‘Zhu-Xi-ist’(朱子學者), ‘Seonglihak scholar’(性理學者), ‘Silhak scholar’(實學者). Rather, most of them often did refer to themselves as ‘Confucians in the Eastern region’(東儒). This study traces when the concept of Confucian in the Eastern region’(東儒) is used among Joseon confucian scholars, explores how the usages of this concept were deployed, and reveals how confucians in Joseon build the their identity by using this concept, ‘Confucian in the Eastern region’(東儒). Instead of using the previous frame of explanation in the research field of Korean Philosophy and Korean history of thought, this research focuses on their internal self-referring term, Dongyu(東儒) and changes of its implication in history. Taken in its entirety, the argument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Joseon’s Confucians, including ‘Seonglihak scholar’(性理學者), ‘Silhak scholar’(實學者) struggled both to maintain the link with Chinese orthodox confuciansim and to build a differentiated Confucianism in Eastern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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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기 조선 유학사 정리 작업에 대한 연구 -장지연(張志淵)과 하겸진(河謙鎭)의 저항적 조선유학사 정리 작업을 중심으로-

        정성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3 儒學硏究 Vol.29 No.-

        조선에서 통사적 유학사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저술은 1882년에 나온 송병선의 『패동연원록』이다. 조선말기에 시작된 유학사의 편찬은 식민지시기에 들어서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화되었다. 식민지시기에 편찬된 ‘유학사’는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과 하겸진의 『동유학안』이 대표적이다. 본 연구에서는 장지연과 하겸진의 사상을 조명하고 『조선유교연원』과 『동유학안』에 내포되어 있는 저항의식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은 그 서술방식에서부터 ‘근대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또 학파나 연원으로 분류하지 않고 유학사의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는 점, 시대별 주요 논변과 학문적 사건을 제시한다는 점, 학파적·지역적 입장을 가능한 한 탈피하여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실학자나 양명학자, 성리학에 비판적인 학자들까지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패동연원록』보다 적극성을 띠고 있다. 더구나 『조선유교연원』에서 제시하고 있는 학문적 사건과 논변들은 대부분 후일 유학 연구자들의 핵심 연구 주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하겸진의 『동유학안』은 위정척사의 입장에 있는 도학자의 관점에서 서술된 학안체의 유학사이다. 『동유학안』에서는 새로운 학파분류 방법과 아울러 그 학파별 특징을 잘 제시해 주고 있으며, 학문적·당파적 분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 사화와 당쟁 등 유학이 정치와 결합되어 나타난 부작용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하겸진은 장지연보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유학을 되살리고자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는 그가 유학적 예의를 국성(國性)으로 제시하고 국성을 보존함으로써 국체를 되살릴 수 있다고 보는 관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두 저작에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이들은 조선시대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학자들까지 포용하고 있지만, 둘 다 퇴계 영남학의 학통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자파 중심의 유학사 서술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또한 둘 다 조선왕조 개창의 이론적 바탕을 제시한 정도전을 ‘조선유학사’에서 완벽히 배제함으로서 그들의 내면은 여전히 조선왕조의 신민임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유교연원』과 『동유학안』은 서술방식도 다르고, 구체적인 방법은 달랐지만 이 두 사람 모두 우리민족의 정신적 바탕을 유학에 두고 민족정신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피식민 민족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어 저항을 무력화하고자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이 이 두 유학사 저술의 촉발점이었다고 하겠다. 朝鮮末, 宋秉璿著述『浿東淵源錄』(1882), 這是最初的‘朝鮮儒學通史’. 韓國儒學史之編纂於植民地時期, 更多積極的和明確的. 韓國植民地時期之代表的朝鮮儒學史, 是張志淵之『朝鮮儒敎淵源』(1917)和河謙鎭之『東儒學案』(1943). 筆者試圖照明張志淵和河謙鎭之思想, 與試圖揭示『朝鮮儒敎淵源』和『東儒學案』固有的抵抗意識. 『朝鮮儒敎淵源』, 徵求近代的敍述方法. 不分類學派和淵源, 試圖儒學史的時代區分, 而提示時代的主要論爭與學問的事件, 尋求逃生學派的色彩和地方色彩. 還這是書提示時代的主要論爭與學問的事件, 後來成爲了核心的硏究課題, 意義在這方面. 河謙鎭之『東儒學案』是學案體的儒學史. 河謙鎭一個是誰支持衛正斥邪的學者. 『東儒學案』提示新的學術分類和學派的特色. 他還揭示批判的觀點對於學術和黨派的分裂, 還必須表示憂傷對於士禍和黨爭. 河謙鎭提出儒敎的‘禮義’就是韓國人的‘國性’, 而他提出爲了復活‘國體’應該受到保護‘國性’『朝鮮儒敎淵源』與『東儒學案』都有一個缺少粘性. 張志淵與河謙鎭都屬於嶺南學脈, 不能完全逃脫自己的學術地位. 還他們都完全排除鄭道傳, 鄭道傳是朝鮮的一個開國功臣. 這一事實證明是他們不能完全逃脫朝鮮之正統道學者的位置. 可以確定的是『朝鮮儒敎淵源』和『東儒學案』, 這肯定是表示抵抗意志對於日本帝國主義的植民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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