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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미술관과 도시개발: 인천 시립미술관 입지선정에 관한 연구

          김천권(Kim Cheon Kwuan),김성규(Kim Sung Kyu)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7 인천학연구 Vol.1 No.26

          본 논문은 인천시가 건립을 추진 중인 시립미술관 입지 후보지에 대한 적정성을 분석하였다. 공공미술관 입지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는 접근성, 근린성, 클러스터 효과, 경제성, 형평성 등 5가지 요인을 제시하였다. 인천 시립미술관 후보지로는 송도 경제자유구역의 투모로우시티, 부평 캠프마켓 공여지, 주안 구 시민회관 부지, 구월동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근 공원부지 등 4곳을 제시하여 입지 적정성을 평가하였다. 연구결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근 공원부지가 인천 시립미술관 입지로 가장 적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This paper investigated the locational validity on the four candidate spaces for Incheon Metropolitan Art Museum(IMAM), currently being promoted by Incheon Metropolitan Government. As the main factors influencing location of public art gallery, this paper suggested five factors - accessibility, proximity, cluster effect, economic factor and equity. Survey method was used to examine the locational validity on the four candidate spaces for IMAM and research result showed that the immediate vicinity around Incheon Culture & Art Center is the most desirable location for IM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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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세대 인천 진보정당의 지속성과 변화

          박명호,박경수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21 인천학연구 Vol.1 No.34

          To observe the levels of institutionalization and stabilization in the Progressive Party of Incheon, this study conducted analysis on how its continuity has been maintained and how it has changed. First, the Progressive Party of Incheon maintained its continuity with the Democratic Labor Party and the New Progressive Party, Unified Progressive Party, Justice Party, and People’s Party, which are successor parties. Analysis was conducted on leadership from dimensions of ‘parties within organizations’ and on the continuity and changes of dominating factions to look into the internal stabilization of the Progressive Party of Incheon, and this showed that in the early stages of the second-generation Progressive Party, the Progressive Politics Union of the Egalitarian Party was the leading and dominating faction but around the time that the 4th local elections were held in 2006, the Incheon union of the Independence Party rose to that position and has been maintaining it stably until now. Also, the number of party members, which is the basis of support for party organizations, was not greatly affected by the split of the Democratic Labor Party and showed increasing trends and then it decreased after the ‘Unified Progressive Party’ and has now become stabilized with continuously increasing trends until this present time in 2019. Analysis conducted on the number of votes in previous elections to look into the stabilization of external support bases of the Progressive Party of Incheon from dimensions of ‘parties within voters’ showed that the numbers of general election votes fluctuated greatly in a W-shape and that the numbers of local election votes showed to be relatively stable compared to general elections with trends forming an N-shape. General observations of the numbers of votes in previous elections recently showed continuous upward trends and the largest number of votes was acquired in the 21st general election in 2020. The Progressive Party of Incheon has stabilized internally and externally, showing high levels of party institutionalization. For the Progressive Party of Incheon to continuously evolve and develop, first, interest must be granted to continuous shifts of generations while maintaining the stability of leadership and dominating factions. Second, as there is now stability in election vote numbers, central areas for local political activities must be determined through long-term discernment and not election results. Third, methods must be searched for to receive the choice of voters while an identity as a progressive people’s party is made clear. 본 연구는 인천지역 진보정당의 제도화, 안정화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어떻게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변화해 왔는지를 분석하였다. 먼저, 인천지역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과 그 계승정당인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민중당 등으로 지속성을 유지하였다. 이들 계승정당은 ‘정파 속의 정파연합 정당’인 민주노동당 정파들의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되면서 진보정당으로써 지속성을 유지함으로써 정당제도화의 필수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인천지역 진보정당의 내부적인 안정화를 파악하기 위해 ‘조직 속의 정당’차원에서 리더십과 지배정파의 지속성과 변화를 분석한 결과 2세대 진보정당 초기에는 평등파의 진보정치연합이 리더십과 지배정파였으나 2006년 4회 지방선거를 전후로 하여 자주파의 인천연합이 그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정당조직의 지지기반인 당원 수는 ‘민주노동당 분당사태’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증가 추세였는데, ‘통합진보당 사태’이후에 감소 추세였다가 2019년 현재까지 계속 증가 추세로 다시 안정화 되었다. 전국 진보정당의 당원 수는 통합진보당 해체 이후 크게 감소하였지만 인천 진보정당의 당원 수는 이보다 전인 정의당 창당 당시 급감했다. 이는 인천 진보정당의 지배정파인 인천연합이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자주파와 결별하여 정의당에 합류하면서 생긴 공백으로 분석되었다. 인천지역 진보정당의 외부적인 지지기반의 안정화를 파악하기 위해 ‘유권자 속의 정당’차원에서 역대 선거 득표수를 분석한 결과 총선 득표수 추이는 W자형으로 등락이 켰으며, 지방선거의 득표수 추이는 N자형으로 총선보다 안정적인 형태를 띠었다. 역대 선거 득표수를 전체적으로 파악해 보면 최근에 계속 상승세 이며 2020년 21대 총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수를 획득했다. 본 연구는 ‘인천’을 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깊이 있게 탐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도시’ 인천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되는데 밑거름이 되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천지역 진보정당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유신정권의 지방지 강제통폐합과 인천 지역신문

          이희환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8 인천학연구 Vol.1 No.28

          This paper is written for the purpose of review history of ‘local compulsion merge’ by Yushin Government in 1973. Progress of local press merge by Yushin Government in 1973 has remained unilluminated properly even in Korea modern history of the press. So far, three company of Kyenggi press was known to people that made a autonomous procedure. That is called ‘Kyenggi province three newspaper reunion held tn Incheon Olympos hotel at 7. 31 in 1973. But integrated events was result that Pak Jeong-hee Government let journalist agree with declaring a state of emergency violently. Kyeonggi Daily Paper is the follow-up of Daejungilbo published at 9. 1 in 1973. Incheon local press including the upper is discontinued forcibly and it is reunited in a new paper Kyenggi Paper. Those historical background has been located in such a local influence. From after modern times there was a political motion to drag down Incheon and place upper Suwon because of attracting events of Kyeonggi-Do Provincial. Competition of Incheon and Suwon was made in a irrational way by group of 5.16 military government. After making a decision to move Kyeonggi-Do Provincial th 녀Suwon, press compulsion merge by Yushin government at 9. 1 in 1973 was a plan to do away with local identity of Incheon. Caused by these two action, the biggest Incheon city in Kyeonggi province didn’t have a local autonomy any more and fell down. After all kinds of local newspaper disappeared, Incheon area passed their time without local newspaper for 15 years. 이 논문은 1973년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지방지 강제통폐합의 역사를 재조명해보려는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1973년 유신정권에 의한 지역언론 통폐합 과정은 한국현대언론사 연구에서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제까지 경기언론 3사 통합은 1973년 7월 31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서 열린 ‘경기도 3개신문사 통합대회’의 결의로 통해 자율적으로 통폐합 절차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통합대회는 이미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맞추어 언론인들이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적으로 강제되었던 결과였다. 1973년 9월 1일 대중일보의 후신인 ≪경기매일신문≫ 등 인천지역 언론이 강제로 폐간되고 수원에서 새로 창간된 ≪경기신문≫으로 통폐합된 역사적 배경에는 경기도의 오랜 지역적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부터 경인지역의 중심이었던 인천을 밀어내고 남북 분단 이후 수원을 경기도의 중심지로 부상시키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경기도청 유치를 둘러싸고 작동했던 것이다. ‘인천 대 수원’의 지역주의 대결 논리는 그러나 합리적 방법으로 귀결되지 않고 5·16군사정권과 밀착한 집단에 의해 정치적으로 강제적으로 결정됐다. 경기도청 수원 이전 결정 이후 유신정권에 의한 1973년 9월 1일의 언론통폐합은 인천의 지역적 독자성을 또 한 번 인위적으로 없애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 두 조치로 인해 경기도에서 가장 큰 시세를 자랑하던 인천시는 이후 지역적 자치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경기도 인천시’라는 틀에 갇히는 역사적 계기였다. 1973년 경기지역 지방지 통폐합 과정을 통해 지역신문이 일거에 사라진 후 인천지역은 15년간을 지역신문 없이 보냈다.

        • KCI등재후보

          일제하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폐지반대운동 연구

          전병무(Jeon, Byung moo)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2 인천학연구 Vol.1 No.16

          이 논문은 1930년대 인천부민의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폐지반대 및 복설운동을, 폐지배경, 폐지반대 및 복설운동의 전개과정, 주도세력 등을 찰하여, 이 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성격을 분석한 것이다.1931년 겨울 조선총독부의 행정정리 방침에 따라 인천지청이 폐지될 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만약 인천지청이 폐지되면 인천부민은 물론 인천지청의 관할 하에 있던 김포, 강화, 부천군민도 재판행정 관련된 모든 업무를 서울에서 처리해야하기 때문에 시간과 재정상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이에 인천부민 등은 거세게 반발하며, 인천지청의 폐지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천부윤을 필두로 인천부회, 인천상공회의소, 인천부세진흥회 등 인천지역의 공직자와 유지들이 앞장섰다. 특히 이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인천의 일본인과 조선인 유지들이 조직한 인천부세진흥회였다. 이 단체의 구성원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인천상공회의소와 인천부회에 참여하여 지역유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와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이른바 ‘합리적 운동방법’인 관계당국에 대한 진정과 로비를 주요 운동수단으로 선택하였다. 이러한 폐지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1932년 2월 15일 인천지청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인천 지역민은 인천지청의 복설을 줄기차게 주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인천유지 간에 복설의 조건으로 인천지청의 신청사를 건립할 것을 합의하였다. 신청사 건립비용은 대략 4만원이 예상되었다. 이에 인천유지들은 인천지청부활협의회를 개최하여 인천, 부천, 강화, 김포 등 1부 3군에 기부금액을 할당하고 기부금모집위원을 선발하여 각지에 파견하였다. 신청사 건립기부금 모집은 지역 간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예컨대 김포군의 경우 거리로 볼 때 경성지방법원이 더 근접했기 때문에 굳이 인천지청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아, 기부에 반대하는 자가 많았다. 결국 김포군의 경우 기부금 할당액 5천원을 채우지 못했다. 이처럼 신청사 건립은 지역 간의 갈등을 거치면서 추진되었고, 마침내 1935년 5월경에 완공되었다. 이런 와중에 인천지청은 1934년 9월 복설되었다. 인천 지역민이 전개한 이 운동은 결과적으로 인천지청을 부활시킴으로써 성공한 ‘민원운동’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운동주체의 제한성과 지역 간의 소통재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This study analyzed the historical meaning and characteristics of the movements against the abolition and for the restorative establishment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of the Gyeongseong District Court by Incheon citizen in the 1930s by examining the background of the abolition and the development and leading groups of the movements. In the winter of 1931, the rumor began to spread that the Incheon Regional Office would be abolished according to the administrative adjustment policy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was abolished, not only Incheon citizens but also all the residents in Gimpo, Ganghwa, and Bucheon Counties within the jurisdiction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had to go to Seoul for administrative services related to court trials, suffering a great loss of time and money. Therefore, opposing the policy resolutely, Incheon citizens and others waged a movement against the abolition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Under the leadership of the Mayor of Incheon, public officials and interested organizations such as Incheon City Congress,??Incheo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and Incheon Taxation Promotion Association took the lead of the movement. In particular, the Incheon Taxation Promotion Association, which was organized by Japanese and Korean influential persons in Incheon, was deeply involved in the campaign. The members of this organization had formed a network of local influential persons by participating in the Incheo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and the Incheon City Congress representing their interests. In order to avoid head?on collision with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hey chose so?called ‘rational methods of movement,’ namely, petition and lobby to relevant authorities. Despite the movement against abolition, however, the Incheon Regional Office was officially closed on February 15, 1932. From that time on, Incheon residents persistently demanded the restorative establishment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and in the course an agreement was reached between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e leaders of Incheon to construct a new building for the Incheon Regional Office as a condition for restorative establishment. The estimated cost of new office building construction was 40,000 won. Thus, the leaders of Incheon held the meeting of the Commission on the Restoration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allocated amounts to be raised to a city and three counties (Incheon City, and Bucheon, Ganghwa and Gimpo Counties), appointed fundraisers, and sent them to each area. The fundraising for new office building construction was not successful due to conflict of interests among the areas. For example, Kimpo County, which was closest to the Gyeongseong District Court, was not so active for the restoration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and many of its residents opposed fundraising. After all, Kimpo County failed to raise 5,000 won allocated to the area. The construction of the new office building was promoted through these con-flicts among the involved??areas, and was finally completed in May 1935. In the middle of the construction, the Incheon Regional Office was reestablished in September 1934. These movements waged by Incheon residents are considered successful ‘civil petitions’ that brought about the restoration of the Incheon Regional Office. On the other hand, they showed limitations such as the leaders’ limitedness and lack of communication among involved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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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 서사문학에 나타나는 인천

          오양호(Oh, Yang-Ho),양승모(Yang, Seung-Mo)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6 인천학연구 Vol.1 No.25

          『황해』의 주인공 및 주요 인물 역시 인천의 인근도서 ·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라고 인천에서 학교를 다녔다. 해방 전후기 인천 지역에서 일어난 사상적 대립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천의 정체성 탐색’을 위한 텍스트로 선정될 수 있었다. 이 소설에 나타난 인물을 인천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주인공 서준혁은 그 인간상이 사회주의 이념의 화신으로 나타났다. 덕적도 아랫개 마을 사공촌에서 태어난 이 빈민 출신은 중학시절부터 선주와 사공의 이익분배가 잘못된 것을 지적했고, 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다. 그 후 이승엽, 조봉암, 김원봉 등과 만나면서 철저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인천지역 노동자를 선동하여 파업을 주도하고,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를 선동한다. 사공들을 규합하여 사공들 짓잽이를 늘이는 운동을 벌려 좌익 세력을 키우면서 사회를 전복시킬 기회를 만들기 위해 줄기차게 활동한다. 그러나 6·25 전쟁에서 인천이 함락되자 국군에 붙잡혀 처형된다. 주인공의 이런 일생은 선재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멤버까지 된 인천 출신의 신화적 맑시스트의 이승엽을 연상시킨다. 『황해』에는 두 사람의 전형적 계몽주의자가 창조되어 있다. 첫째 인물은 한관호이다. 이 인물은 원래 지주 출신 지식인으로 인천상업중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동경 유학까지 했지만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서준혁의 사회주의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중도적 위치에서 교육하고 계몽한다. 둘째 인물은 유두희이다. 이 인물은 인천의 무산청년동맹을 이끄는 좌파민족주의자이다. 동경유학시절부터 맑시스트가 되어 지하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런 형태는 일제 강점기 무산대중을 등에 업고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신명을 바치던 전형적 좌파 지식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황해』에는 해방기 인천에 실재했던 우파자본가, 친일파 · 변신 · 권력과 결탁하는 기회주의자, 이데올로기의 틈새에 희생되는 인간상들이 다양하게 창조되어 있다. 선주 유치규, 사장 강용만이 우파자본가의 전형이라 한다면, 김무길은 친일주구, 민족 반역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이고, 서달호와 그의 처는 무지한 탓에 이데올로기로 불행해지는 인물들이다. 강문구와 서준혁을 사랑한 한정임, 유동식 등은 본질적으로는 극히 양질의 인간인데 시대와 사상 탓에 희생당하고 고난을 겪은 현대 한국인의 비극적 초상이다. This thesis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literary study and literary geography described on the basis of the studying of Incheon appearing in Korean modern novel the 『HwangHae』. The conclusion are as belows. Firstly, The Hero Su Jun-Heouk is an incarnation of an ideology. He is born poor. After graduation to participate in the socialist movement. Secondary, the 『HwangHae』 create two enlightenmentist of ideolgy. One is nationalist Han Gwan-Ho who is the ethos in education and enlightenment centrist position. The other one is Left-Wing nationalist Yu Du-Hee. As a Marxist, is typical of Left-Wing intellectuals. Thirdly, 『HwangHae』create diversity character who are capitalist, pro-Japanese, opportunist, ideologist. They are all being sacrificed suffering due to age and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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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지역 대외무역 연구

          이용식(Lee, Yong-Zhi)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7 인천학연구 Vol.1 No.27

          간도지역은 20세기 초 대외무역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중국 및 러시아와의 무역에서 일본으로 무역중심이 바뀌었으며 일본의 대륙 점령의 야욕이 그 원인이었다. 인천도 이와 마찬가지로 초기 개항부터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위한 과정으로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이들은 각종 조약과 경제정책을 통해 무역이 확대되었으며 일본에 의지하는 형태로 가속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무역활동의 확대는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나 그 목적은 식민지수탈과 대륙침공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번영은 정치적 목적이 충족됨에 따라 크게 부침을 반복하게 되었다. 1920년대 간도지역은 연길, 훈춘 2관을 통하여 조선, 러시아 양국과 무역을 진행하였으며 간도지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간도지역의 대외무역발전은 당시의 상품생산을 촉진시켰다. 주로 농업생산의 상품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간도지역의 근대 신식공업이 발전을 가져 왔다지만 기술함량이 적은 제분업, 기름짜는 가공업에 불과하였다. 둘째, 대외무역의 발전은 세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 중외무역구조의 차별은 간도지역으로 하여금 줄곧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는 상태에 처하게 하였다. 이는 간도지역 자본의 대량 유출을 초래하여 종래에는 간도지역의 화폐가치하락을 조성하여 금융시장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또한 일제와의 저관세는 본국의 민족자본을 보호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상품을 덤핑판매 하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로, 비록 간도지역 국제무역에 있어 여러 가지 폐단이 존재하였지만 객관적으로 간도지역의 근대화 발전을 추동하였다. 1920년대 간도지역의 신식공업, 교통, 통신, 금융 등 근대항업의 발전, 그리고 문교, 위생사업의 발전성과는 대외무역이 발달한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화의 교통시설은 일본이 간도지역의 자원을 약탈하는 기초작업으로 건립되었고 공안국, 감옥, 심판청 및 경찰국 등은 일제가 간도지역 반일세력을 탄압하는 기구로서 이용되었다. 일제는 근대화한 학교를 이용하여 노예화 사상을 선전하였으며 대형금융기관을 이용하여 조선이민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였다. 위생사업의 예를 보면 병원을 통하여 민심을 농락하고 간도지역에서의 세력침투를 강화하였다. 간도지역의 근대통신업 발전도 일제가 반일역량을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도구로서 시작되었다. 넷째로 비슷한 국제정세와 사회문화적 시기인 1920년대 간도와 20세기 초 인천을 비교하면 국제정세에 따라 무역 흐름이 달라진 것은 동일하였으며 그 위상 또한 비슷하게 흘러갔으나 일본으로 주 무역원이 고정됨에 따라 종속적인 형태로 흘러갔으며 결국에는 주 무역대상인 일본의 움직임에 따라 발전이 변화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Foreign trade in the Gando area began to develop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Traditionally, trade with China and Russia has changed to Japan. This is caused by the desire of Japan’s continental impetus. Incheon has also developed a great deal of trade from the opening of the port to the process of Japanese colonial rule. They expanded trade through various treaties and economic policies. In the end, it changed into a form of dependence on Japan. Of course, the expansion of such trade activities contributed to regional development. Its purpose, however, was to have a clear political purpose of colonial suicide and continental invasion. Therefore, this prosperity has been repeatedly repeated as the political purpose is satisfied. In the 1920s, Gando had traded with North Korea and Russia in Yanji and Hunchun,and it had an important influence of economic development.First of all, foreign trade development in Gando promoted commodity production at that time, mainly had developed the commercialization of agricultural production. Although it had promoted Gando’s modern new industry0, just amount to low-tech manufacturing industry and oil milling industry. Secondly,the development of foreign trade had brought an increase in tax revenues. But gap between China and foreign countries in terms of trade structure caused situation of more revenues than exports. It had resulted in Gando’s massive outflows of capital and brought about a decline in the value of money and distorted financial markets finally. Low tariffs with Japanese imperialism had not protected national capital also had resulted in dumping sales of Japanese goods. Thirdly, although there was some malpractice, promoted the modernization development in Gando objectively. In the 1920s, development of modern industry such as the modern industry, traffic, communication, Finance and development achievements of mulgyo and sanitary work in Gando, all of the above developments were result of the developed foreign trade. Modern traffic facilities had established for spadework of plundering Gando’s resource by Japan and bureau of public security, prison, hall of Judgement, police office were used by Japanese imperialism for oppressing anti-Japanese forces in Gando. Japanese imperialism had used modern schools to drumbeating a slave image and used large financial institution to encroach upon the economic base of immigrants from North Korea. In the national health service, Japanese won people over by building hospitals and strengthen the penetration of Gando’s power. Development of modern communication industry in Gando were also used for the begin of the instruments to put down the anti-Jamanese forces. Fourth, Gando in the 1920s and Incheon in the early 20th century has the similar international situation and period of social cultural, the comparison of Gando in the 1920s and Incheon in the early 20th century indicates that development changed with the change of main trading partners—Japan.

        • KCI등재

          仁川鄕校 硏究

          남달우(Nam, Dal-Woo)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5 인천학연구 Vol.4 No.-

          The first educational institution is dated from the era of the Three Kingdoms. This institution is one which is founded by government. After that, Gugjagam in its center and Confucian temples in its region were established in the Koryo dynasty through the Unified Silla The Confucian temple along with Gun-hyun system is a kind of the national educational institution for confucianism, which is located in the country, but not in the center, which is called as Gyo-kwan or Je-kwan. It plays a role in admiring and honoring the traditional Confucian scholars in Koryo and Chosun dynasty and old China as well as Confucius Incheon has its units at its districts called as Incheon, Bupeong, Ganghwa, and Kyodong Confucian temple. This is to investigate the time of establishment and construction of Confucial temple and its system though the data such as Incheonhyangyojungsugi by Cheoi-hang, Jungsusangryangmun by Jeong-jong-bin, Incheonhyangyojungsugi by Seong-gyun and Incheonhyangyoji As a result, Incheon Confucian temple is established on the right to east of the current Munhak Elementary School (the old location of the Incheon Dohoboo) Incheon Confucian temple is supposed to be established in the era of King Injong in view of the time of establishment of the Confucian temples in Bupeong and Ganghwa in its similar or lower levels compared with Incheon The System of Incheon Confucian temple is founded through the remodeling processes by several times. Especially, Jungsugi is one of the important data which the system of the Confucian system at that time can be found. Incheon Confucian temple in Chosun Dynasty was remodeled by Shin-gae in 1406, by Min-hyoyeol in 1466, Lee-seongwon in 1501 or 1502. This remodeling of Incheon Confucian temple is caused by the fact that the head of the village should develop the institution and can be promoted by the government for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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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의 남북교류협력 사업에 대한 법제도적 이해

          이준한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21 인천학연구 Vol.1 No.34

          It has passed more than 15 years since the City of Incheon directly launched inter-Korean exchange and cooperation. The City of Incheon has worked on economic cooperation, sport exchanges, civic activities, humanitarian cooperation, and others between the two Koreas. This piece aims to expand the understandings of the legal and institutional aspects of inter-Korean exchange and cooperation in the City of Incheon ever since 2004. The legal basis of the city’s inter-Korean exchange and cooperation has been provided by the related acts of the National Assembly. This regulates what the city must and can do for the cross-border cooperation, and how. As a matter of fact, the passages, amendments, and abolitions of the related acts of the National Assembly have important impacts on the city’s roles and scopes in the inter-Korean business. Surely, the changes in the legal frameworks related to inter-Korean exchange and cooperation have been greatly affected by the political and even military environments posed on the Korean peninsula at that moment. Thus, this essay traces the major characteristics and implications of the related acts across the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s. In addition, this study reviews the related Incheon City’s ordinances. The passages, amendments, and abolitions of the related Incheon City’s ordinances tend to follow the passages, amendments and abolitions of the related acts of National Assembly. Surely, enacting Incheon City’s ordinances is usually influenced by the political dynamics of the mayor, city councilors, and civic activists. These law making processes are well captured by the new institutionalism in the discipline of political science. Thus, this article attempts to explain the major characteristics and implications of the related City ordinances and organizations from a socio-historical perspective. The City of Incheon is expected to maximize inter-Korean exchange and cooperation in the future. To this end, the City of Incheon will have to prepare for a better legal institutional framework. Furthermore, the City of Incheon is also expected to raise the inter-Korean cooperation fund to promote the various inter-Korean peaceful activities. 인천시가 직접 남북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한 지 벌써 15년이 넘어간다. 인천시는 2004년부터 직간접적으로 경제적 협력, 스포츠 교류, 시민사회단체 활동, 인도적 지원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남북교류협력을 추진했다. 이 논문은 2004년 이래 인천시가 남북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하도록 가능하게 했던 법적, 제도적 장치에 대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인천시가 남북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법적인 근거와 인천시의 책임이나 사업의 범위는 바로 국회를 통과한 법률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국회에서 제정된 남북교류협력 관련 법률이 만들어지고 고쳐지며 또 없어지고 새로 제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때마다 인천시의 남북교류협력 관련 사업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이나 범위가 영향을 받아왔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남북 사이에 새롭게 조성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환경이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은 국회를 통과한 남북교류협력 관련 법령의 특징과 의의는 물론, 그 시대적 맥락을 함께 짚어나간다. 그리고 이 논문은 인천시가 추진하고 인천시의회를 통과한 남북교류협력 관련 조례도 살펴본다. 인천에서 관련 조례가 만들어지고 바뀌며 또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국회의 관련 입법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입는다. 물론 인천의 관련 조례는 인천시장과 시조직의 책임과 사업의 범위를 규정하는 한편, 인천시장과 관련조직은 정치적 환경과 인천시민 또는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반영하여 관련 조례를 고치거나 새롭게 만들며 조직의 위상을 재조정하기도 해왔다. 따라서 이 논문은 인천시의 남북교류협력 관련 조례와 조직에 대한 특징과 의의에 더불어 시대적 맥락도 고려할 것이다. 인천은 앞으로도 남북교류협력 관련 법제도를 더욱 합리적으로 준비하기 위하여 정비할 것은 정비하고 필요한 것은 더욱 적극적으로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천시는 남북교류협력이 국내외적인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어려워질 때에는 더욱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동시에 남북협력기금을 확충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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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공인명록을 통해 본 1930년대 초 인천지역 기업 활동

          최재성(Choe, Jae-seong)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9 인천학연구 Vol.1 No.30

          이 글에서는 1931년 인천상공회의소에서 발행한 〈인천상공인명록〉을 대상으로 하여 업종별 외형적 파악과 기업 활동의 내면적 분석을 시도했다. 먼저 외형적 파악의 첫 단계로 인명록 정보 가운데 납부 영업세액을 살펴보았다. 고액 납세업종에 속하는 것은 금융업, 양조업, 정미업, 운수업, 무역업, 거래원업 등이었고, 50원 미만 납세 기업이 압도적 다수인데, 그만큼 규모면에서 소규모 기업이 많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업 소재지별로 보면, ‘리’ 단위 지역에서는 조선인 업체수가 일본인 업체수에 비해 5배 정도로 월등히 많다. 특히 외리와 내리가 조선인 기업의 밀집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지역에는 ‘리’보다 업체수가 월등히 많고, 또 일본인 업체가 조선인 업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세 번째로 겸업자를 민족별, 영업 종목수별로 나눠보면, 모두 일본인이 조선인 보다 많다. 그만큼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기업 활동에 적극적이었음을 인지할 수 있다. 다음은 인천의 대표적 기업인 무역업·정미업·양조업·성냥제조업을 대상으로 심층 분석하였다. 무역업 가운데는 미곡과 면제품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먼저 수이출 부문을 보면, 인천에서 이출된 조선 쌀은 일본 각지로 이송되었다. 다음으로 일본으로부터 이입 중요품 가운데 ‘수입품의 백미’인 면직물을 보면, ‘면사포·마직물류 무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는 이 무역을 통해 858원의 영업세를 납부했다. 이제 제조업을 보자. 먼저 정미업을 보면, 1930년대 초 인천의 공업별 생산액 중 정미와 현미 등 정미공업의 생산액은 다른 공업에 비해 압도적 위치에 있다. 영업세액 1천원 이상을 납부한 정미 기업 3곳의 영업세액 3천 9백 원이다. 두 번째는 양조업이다. 청주·소주·약주·탁주 등 술 종류 4개의 생산액은 190여만 원이다. 여기에 장유와 미소의 백여만 원을 더하면 양조업 생산액은 약 3백만 원이다. 조일양조주식회사와 野田장유주식회사 인천공장의 영업세액은 각각 1427.95원과 398.5원이다. 세번째는 성냥 제조업인데, 그 생산액은 약 33만원이다. 성냥은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독점 생산한 것으로 이 회사의 1931년 영업세액은 537.14원이다. 이들 제조업(정미업·성냥제조업)의 기업 활동 이면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고, 희생을 강요당한 노동자들은 저항하면서 일부는 뜻(요구조건 관철)을 이루고, 또 일부는 해고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일제식민지기 인천지역 기업 활동의 이면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과 저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article was written for the purpose of identifying the appearance of each information and analysing corporates’ activities in relation to the list of names published in 1931 by the Incheo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First of all, I looked at the amount of operating tax paid out of the personal information as a first step in identifying the appearance. It was the financial industry, the brewing industry, the rice industry, the transportation industry, the trade industry, the trading business, etc. Next, in terms of location, the number of Korean companies is five times higher than that of Japanese companies in the area of "Ri(리, 里)". In particular, it can be confirmed that “Oe-Ri(외리)” and “Nae-Ri(내리)” are concentrated areas of Korean companies. There are far more Japanese companies outnumber Korean companies in the "Jeong(정, 町)" area than "Ri". Third, there are all more Japanese than Koreans in double job. It is understandable that the Japanese were more active in corporate activities than Koreans. The following was an in-depth analysis of the trade business, rice-cleaning business, the brewery business, and match manufacturing business, which are major companies in Incheon. Among the trade, rice and cotton goods were considered. First of all, the rice from the colonial Joseon, which was removed from Incheon, was transferred to various parts of Japan. Cotton fabric is the "the best of imports" that comes from Japan. Now let"s look at the manufacturing industry. First of all, the output of rice-cleaning business of the manufacturing industry is overwhelmingly higher than that of other industries in Incheon in the early 1930s. The second is brewing. It is produced by four types of alcohol, namely Cheongju, Soju, Yakju, and Takju, and Soy Sauce and Soybean paste. The third is the manufacturing of matches, which were produced exclusively by the Chosen Match Corporation. The increase in profits of these manufacturing industries was made at the expense of Korean workers, and the workers forced to sacrifice tried to defend their rights and inter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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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 서해안 구석기유적 예보

          유용욱(Yongwook Yoo)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4 인천학연구 Vol.1 No.21

          본고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 구석기 유적을 파악함으로서, 현재까지 뚜렷한 양상이 확인되지 않은 이 지역의 홍적세 시기 동안의 고인류 점거 양상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다. 서해안 일대는 홍적세 최말기까지 해수면의 후퇴로 인하여 현재의 서해 수역은 육지로 남아 있었고 중국 대륙과 연결된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구석기 유적은 바닷물에 침수된 상태라서 구석기 유적이 양적, 질적으로 빈약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한 이 지역은 한강 하류의 김포 및 인천광역시 내의 불로동·원당동·가정동 유적의 조사와 더불어 구석기 유물상이 본격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김포 지역의 경우 인접한 한강 및 임진강 유역의 구석기와 비슷한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인천 및 도서 지역의 경우 자료 자체는 산발적이지만 소형 석기 위주의 공작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가정동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주먹도끼의 경우 주목할 만한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고학 자료로 볼 때 이 지역의 구석기 문화상은 한반도 내륙의 구석기와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석영계 석재의 우세함 및 대형 석기 형식은 한강 및 임진강 유역의 유물상과 흡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차후 본격적인 조사 및 인근 도서 지역의 홍적세 층위가 확인된다면 더 많은 구석기 유물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되며 한반도 내의 고인류 점거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This article intends to survey the palaeolithic features of the western maritime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The western maritime region, including Gimpo and Incheon area, has been a region of land bridges between??China and Korea as a result of sea level regression until terminal Pleistocene/initial Holocene period; most??potential palaeolithic occupations are currently submerged and relevant archaeological data are not easily??attained. As of 2000s, archaeological research has been vigorously conducted in this region and several??palaeolithic localities been identified in Gimpo and Incheon area such as Bullo-dong, Weondang-dong, and??Gajeong-dong sites. It is noteworthy that, although general characteristics of these palaeolithic industries are??identical to the rest of the Korean Peninsula, their raw-materials and tool-type composition are quite different??from those of contemporary Chinese palaeolithic assemblages. It is expected that future research will furnish??more implicative data on the issue of hominid's occup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via the connected route??from the continental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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