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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식 연구사

            최열(Choi Youl) 인물미술사학회 2016 인물미술사학 Vol.- No.12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20세기 예원의 종장(宗匠)이다. 숱한 제자를 길러낸 20세기 화단의 스승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눈부신 성취를 거둔 당대 거장이었으며 사회활동 분야에서는 개화당에 가담하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려는 혁명가로 활약하였고 화단활동에 뛰어들어 당대 미술가를 집결시켜 20세기 미술계를 형성해 나갔으며 창작활동 분야에서는 스승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후)의 고전형식주의(古典形式主義) 예술세계를 계승하여 20세기초 신고전(新古典) 세계를 개창함으로써 미술사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올리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성을 서구성과 동일시하여 원근법, 명암법 및 사실성과 같은 서구 근대미술의 방법론을 근대미술의 척도로 설정하는 연구자들의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 사료로 저 기라성같은 제자들 가운데 미술 정치가의 길을 걸어간 고희동의 증언을 채택한 연구자들의 관점이 관철됨에 따라 안중식은 봉건성, 보수성에 찌든 수구파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 폄훼당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71년 장신영의 석사학위논문으로부터 시작한 생애와 예술에 대한 연구 이래 성과가 점차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장신영이 안중식에게 부여한 ‘봉건성'은 물론 ‘근대의 가교' 및 ‘미술교육자', ‘미술운동가'라는 표현은 이후 안중식의 미술사상 위치와 안중식의 정체를 설명하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959년 이경성이 "일대 분수령"이라고 했던 표현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은 1972년 이경성이었다. 이경성은 안중식의 미술사상 위치를 ‘근대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했다. 특히 이경성은 1974년의 논문에서 ‘근대미술의 순교자'인 안중식의 예술세계를 ‘민족운명의 전형'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예술이 시대양식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이를 바탕삼아 1974년 《한국근대미술사전 편찬을 위한 조사연구》에서는 ‘한국 근대화가의 선각자'이며 ‘당시 동양화의 주류'라는 표현으로 안중식의 미술사상 위치를 표현했다. 특히 1977년 이경성은 근대 수묵채색화 작가를 시대별로 분류하는 이른바 세대 구분법을 제출하고 제 1 세대로 안중식과 조석진, 정학수, 김응원을 설정했다. 이들이 조선조와 교량으로써 ‘근대 동양화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구열의 연구는 복합성을 지니는 것으로 ‘창조적 개성이 미흡한 보수적 수구파'라고 하면서도 ‘직업적 명가, 당대 제1급 화가'라고도 했다. 이러한 평가와 더불어 이단아, 조정육의 석사학위논문 그리고 허영환의 연구가 뒤를 이었다. 끝으로 최열은 ‘세기말 세기초 형식화 경향의 거장이며 그 형식주의 양식은 시대양식'이라고 했다. 지금껏 연구자들이 보수적 수구파라고 규정해 오던 것을 두고 오히려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한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이란 곧 ‘자기 정체성을 보수하는 고전성'이라고 보는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실경을 근대의 표상으로 보는 관점같은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뒤 박동수는 또 다시 기존의 관점으로 회귀하여 과거의 평가를 반복하였다. 안중식 연구사를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도 그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문제가 그 작가를 평가하는 데 지극히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중식의 시대와 그 시대가 나아가야 할 시대의 목표를 서구 근대미술에 두는 관점이라면 안중식은 보수적 수구파로 규정 당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자기 정체성 보수를 목표로 삼아 고유성을 새로이 발현해야 한다는 관점이라면 안중식은 시대정신에 가장 충실한 고전, 신고전파 화가로 규정하는 게 당연스러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주경의 해방 이전 민족미술론 연구

            신수경(Shin, Soo Kyung) 인물미술사학회 2013 인물미술사학 Vol.- No.9

            김주경(金周經, 1902-1981)은 월북미술가중 가장 이른 시기인, 1946년 10월 북쪽으로 넘어간 화가이자 미술교육자다. 한국근대미술사에서 김주경은 오지호와 함께 인상주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인상주의'라는 말과 함께 김주경을 수식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민족주의'이다. 1930년대부터 김주경은 꾸준히 ‘민족미술'을 언급했다. 이 글은 그동안 월북화가라는 이유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주경의 해방 이전 행적과 그가 쓴 미술평문, 작품을 분석하여 김주경의 민족미술론 형성과정과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1902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1920년 경성제일고보에 들어간 김주경은 재학중 고려미술원에서 미술의 기초과정을 배우며 오지호와 김용준, 길진섭 등을 만나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 동맹휴학으로 김주경을 포함해 전교생이 유급을 당했지만 민족의식이 팽배했던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예술관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28년 동경미술학교 도화사범과를 졸업한 후 김주경은 송도고보와 경성제일고보의 도화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맡는 등 미술교육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0, 30년대 김주경의 작품과 비평 활동은 크게 두 전람회를 통해서 펼쳐졌다. 하나는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젊은 미술학도들끼리 결성한 ‘녹향회(綠鄕會)'를 통한 활동이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만든 조선미전에서 그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회 연속 특선을 수상하며 화단의 신예로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자 더 이상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 대신 조선미전의 심사방법과 제도적 문제점을 비판한 글을 발표하며 미술비평가로서 목소리를 높였다. 또 조선미전에 맞선 민전을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1929년 녹향회를 조직하여 녹향전을 열었으나, 창립멤버였던 심영섭, 장석표 등이 탈퇴를 하자 오지호를 새 회원으로 입회시키는 등 녹향회를 재정립하였다. 그는 《제2회 녹향전》에서 ‘계급주의'적인 시각이 엿보이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조선일보』에 「綠鄕展을 앞두고-그림을 어떠케볼까」를 연재하면서 미술의 계몽화, 민중화(대중화)를 중시한 미술론을 피력하였다. 그가 주장한 ‘미술을 통한 대중의 계몽'은 1929년 녹향회의 창립과 1938년 천연색의 『二人畵集』 출간, 그리고 1939년 교육기관에 60여점의 작품 기증으로 이어졌다. 녹향회의 창립부터 작품 기증까지 일련의 행보를 보면 『二人畵集』은 김주경이 그동안 제작한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는 ‘이동미술관'인 동시에, 기증 후 다시는 소장할 수 없게 될 작품을 저장해놓은 ‘기록 보관소'와 같은 기능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전 작품을 교육기관에 기증함으로써 미술의 대중화를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김주경의 생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1929년부터 해방 전까지 교사로 활동했으며, 월북한 이후에도 1947년 9월 창설된 평양미술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북한 미술교육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미술의 계몽화, 대중화를 강조한 김주경의 민족미술론은 교육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그는 일본과 다른 자연과 전통에서 비롯된 조선의 명랑한 색채와 형태를 지닌 민족미술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다. 맑고 푸른 하늘을 유난히 강조했던 김주경의 작품은 양식상 인상주의에 가깝지만, 예술의 주관과 개성을 강조한 조선색의 추구와 하나의 작품이 한 사람의 완상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교화시키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 계몽적 성격은 김주경 민족미술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월북 이후 정현웅의 출판미술 궤적 분석

            한상정(Han, Sang-Jung) 인물미술사학회 2014 인물미술사학 Vol.- No.10

            이 연구는 정현웅과 북한 만화개념 형성의 상관성을 밝혀내기 위한 기초연구이다. 이를 위해 월북 이후 정현웅이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으면서 만화에 대한 글쓰기와 작품 활동을 진행했는지 여부, 그리고 그 당시의 만화에 대한 담론분석에 집중하려고 한다. 연구영역을 만화만이 아니라 출판미술 전체로 확장한 것은, 출판미술의 범주 안에 포함되는 포스터, 삽화, 판화, 만화, 수채화 등과 상관적으로 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관련 북한자료들을 탐색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관련 잡지들, 1957년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한『조선미술』과 그 전신인『미술』을 중심으로, 『아동문학』, 『조선문학』, 『천리마』잡지를 참조했다. 특히 『조선미술』은 미술 분야의 공식적 담론의 장이기에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이 잡지들에 접근하며 우리는 세 가지 과제에 집중했다. 우선, 정현웅의 출판화 작품들, 또는 그의 출판화 작품들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선행연구에서는 부재했던 표지장정 작품들, 몇몇 목판화 작품들을 찾아내고, 선행연구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그러나 만화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미술』과 『조선미술』에서의 정현웅의 출판미술 담론들을 탐색했다. 그는 출판화분과 위원장으로서의 현황 분석이나 방향성 제시를 거의 하지 않았던 반면 아동미술, 삽화, 장정, 포스터, 력사화 같은 세부 장르들에 대해 발언했다. 반면 출판화 전체에 대한 언급 중 잠깐 만화를 언급하긴 하지만, 만화를 다루는 별도의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이 시기 북한에서의 만화에 대한 담론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조선미술』에서 만화만 다룬 논설들이 7회가 있었으며, 출판화 영역 전체를 다룰 때 언제나 만화를 다루었다는 것을 보면, 만화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당시 만화에 대한 담론이나 창작활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현웅은 그에 대한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북한의 만화개념 형성에 출판화분과 위원장으로서의 정현웅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는 당시 만화에 대한 개념과 창작조건이 정현웅이 남한에서 활동할 때와 달랐던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에 대한 논증은 다음의 과제로 남기려고 한다.

          • 노동하고 창조하는 우주여자

            김종길(Gim, Jong-Gil) 인물미술사학회 2016 인물미술사학 Vol.- No.12

            김인순은 1985년 ‘시월모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개최한 〈半에서 하나로〉전은 한국현대미술사의 첫 여성주의미술전이었다. 이후 그는 민족미술협의회의 여성미술분과에 참여하면서 여성미술운동을 시작했고, 노동미술과 민중미술 전반으로 그 활동을 확장했다. 여성미술운동으로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노동미술운동으로 ‘노동해방'을 소리쳤다. 그것은 미술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위해 변혁의 미술이 되어야 했던 민중미술의 자장을 크게 울리는 실천적 행동이었다. 논문은 작가의 삶에 초점을 맞춘 ‘작가론'을 본문의 서두에 배치하였고, ‘작품론'을 그 뒤에 배치하여 세밀하게 살폈다. 그의 작가적 활동은 크게 ‘싸우는 여성', ‘노동하는 어머니', ‘창조하는 우주여자'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의 삶과 작품이 그런 궤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창조하는 우주여자'는 그의 가장 최근 작품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창조하는 우주여자'에서 ‘여자'는 아시아의 독특한 신화적 상징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형식의 민중미학을 탄생시킨다. 〈태몽(胎夢)〉 연작이 보여주는 그 세계는 김인순의 여성주의 미학과 민중의식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싸움의 대상이 해체된 곳의 세계, 노동의 행위가 신명의 춤으로 전환된 세계, 우주와 합일된 여성의 신성이 생산하는 삼라만상의 세계, 바로 그곳이 여성해방의 세계요,노동해방의 세계라는 것. 참된 민중의 세계는 그런 완전한 해방이 이뤄진 세계라는 것을. Kim In-soon began her full fledged career as an artist with the participation into ‘Siwol Moim' in 1985. The exhibition entitled "From a Half to One" held the next year was the first Feminism art exhibition in Korean contemporary art. Having worked at Women's Art Subcommittee in Minjok* Art Association ever since, Kim began women's art movement and expanded her activity into labor arts and Minjung arts. She cried out for the liberation of women and laborers through art movements for them. It was an act that practically helped expand impacts of Minjung arts which inevitably played a revolutionary role for liberating and democratizing art. This study places ‘artist theory' with its focus on Kim's life at the beginning and ‘artwork theory' at the later part for an in-depth examination. Her artistic journey can largely be divided into ‘Fighting Woman', ‘Working Woman', and ‘Creating Space Woman', which reveal relevant trajectories in her life and artwork. In particular, ‘Creating Space Woman' is closely engaged with Kim's recent work. The woman from ‘Creating Space Woman' brought about a new type of Minjung aesthetics through the encounter with Asian typical, mythic symbol. The world featured through Taemong* series illuminates the direction Kim's Feminism aesthetics and Minjung consciousness are turning. It suggests a world where opponents for fighting against are disintegrated, labor turns into a joyful dance, and female divinity in harmony with the space creates Samramansang*, and thus achieving the liberation of women and laborers. And it also implies that the truthful world for Minjung secures an achievement of such a total liberation.

          • 심전 안중식 인물 표현-실존으로의 이행

            조은정(Cho, Eun-Jung) 인물미술사학회 2017 인물미술사학 Vol.- No.13

            전통에 대한 평가와 근대에 대한 인식은 분명 변화하고 있고 그러한 평가의 중심에서 안중식의 작품이 재평가되고 있다. 시대를 온몸으로 산 안중식의 인물화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도 그러한 전통의 세계에서 나아가 지금 우리의 눈을 확인하는 일이다. 본 구에서는 ‘안중식이 표현한 인간'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 형상에서의 전통과 새로움, 인물 표현의 이유 등을 안중식이 활동한 사회, 정치적 상황과 연계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오래된 산수화의 기능처럼, 그림 속 인물은 거울 속 타자이자 자기 존재성을 확인시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장인(匠人)인 환쟁이에서 화가로의 승격이라 할 운동은 안중식의 업적 중 하나였다. 안중식은 일찍이 청나라와 일본과 같은 다른 세상을 직접 경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배웠을 터인데, 그의 인물화에 대한 연구는 도석인물화에 치중되어 있어서 근대라기보다는 전통의 영역에서 활동한 화가로 보이게 한다. 안중식에게 있어 근대란 시간 개념으로 가까운 시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근대란 단지 시간만이 아니라 ‘조선독립파'로 연계된다. ‘고화파'는 전통을 존숭하는 이들이지만 ‘조선독립파'는 조선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이들이다. 안중식의 삽화에 나타나는 조선 복장의 인물들이 바로 거기에 외형적으로 부합한다. 나아가 그림자와 사실적인 시선에 조응하는 인물들은 근대의 주체적 시선에 다가간다. 그림 속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들어 관람자에게 말을 거는 주체적인 존재로 화면에 위치하는 것이다. 설화와 신화 속 존재에서부터 일상의 존재로의 이행 그것은 바로 실존을 향한 것이다. 가을 바람소리를 들으며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던 중국의 문인은 독서를 하는 선비로, 무신도 안의 장군은 이름을 지니고 우리 옆에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안중식이 전통의 반복적인 도상을 고수하는 화가로 보이는 이유는 적어도 인물에 있어서는 고사인물도와 도석인물화 등을 많이 그렸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물 그림들 속에서 전통적 요소를 발견하려는 노력보다 근대라는 새로움, 그의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화면을 접근하여 갈 때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림을 원하는 이들의 맘이 향하는 곳은 어쩔 수 없이 고사인물도와 같은 세상일지라도 <추성부>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그는 중국적인 화보에서 한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충무공초상과 단군초상 등을 그리며 안중식은 그렇게 그가 살던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역사적 존재들을 소환하고 인간의 자의식을 인식하는 근대성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Ahn Joongshik was a person who experienced a different world like Qing Dynasty and Japan earlier. He would have seen, heard, and learned new things, and his study of figure painting is focused on the taoism and Buddhism figure, making it appear as a painter in the realm of tradition rather than modernity. One of the accomplishments of the Ahn Joongshik is the promotion from a artisan to a artist. Ahn Joongshik concernd the modern time means a close age with the concept of time. However, it is not just time, but modern Korea is connected to the "Chosun independentist." The "Kohwa" is a tradition - loving person, but the "Chosun independentist" is a characteristic of Chosun. The characters of the Korean costume appearing in the illustrations of magazine are exactly there. Furthermore, the characters who correspond to the shadow and the realistic gaze approach the subjective gaze of modernity. It is not the object in the picture but the object on the screen as a subjective being who lifts his eyes and talks to the spectator. Transition from fables and myths to everyday beings is toward existence. The Chinese literary person who listened to the voice of the autumn wind and told the absurdity of life is a scholarship to read, and the general in the silence shows the presence by our side with the name. The reason why Ahn Joongshik appears to be a painter who adheres to the traditional repetition of the traditional paintings is that he at least painted a lot of figures and figures in his paintings. However, when we approach the screen based on his novel, modernity, and historical awareness, rather than trying to find traditional elements in his figures, we see something else. Even though the world where the minds of those who want to paint in a dizzy world is inevitably in the same world as his father, he did not neglect his effort to make a step in the Chinese pictorial. In his paintings of Chungmugong and Tangun, he was able to meet the demands of his time and to summon historical beings and move toward the modernity of recognizing human self-consciousness. In this study, focusing on the "human being expressed by Ahn Joongshik", we studied the tradition and newness in the form, and the reason of character expression in connection with social and political situations in which Ahn Joongshik - Like the function of the old landscape painting, the person in the painting is an object in the mirror and an object that confirms its existence.

          • 정현웅의 후기 미술비평

            홍지석(Hong, Ji Suk) 인물미술사학회 2013 인물미술사학 Vol.- No.9

            이 글은 정현웅이 1950년대 후반~1960년대 북한에서 『조선미술』에 발표한 미술 비평텍스트를 중심으로 그의 후기 미술비평의 전개양상과 역사적 의의를 헤아려보는 데 목적이 있다. 이 텍스트들에 나타난 정현웅 후기 비평의 주요 관점으로는 1)인쇄미술(그라휘크 미술, 출판 미술)로부터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보는 시각, 2)미술의 가능성이 새로운 기술(인쇄, 복제)과 결합하면 보다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 3)예술의 역사적 전개를 사회적(물적)토대의 변화에 기초해 이해하려는 시각 정도가 될 것이고 여기에 미약하기는 하지만 4)새로운 매체에 부합하는 내용, 형식의 모색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대의 한국미술에서(사실 오늘날까지 소급해서 생각해보아도) 대단히 예외적인 매우 진보적인 미술관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회 각 분야에서 ‘소비에트'의 학습과 체화에 몰두하던 초기 북한은 과거 “쏘련에서는 이미 우수한 작품들에 대하여 수만 매, 수십만 매의 프린트를 만들어 방방곡곡에 전파시키고 있다 한다”(1948)고 말했던 이 진보적인 논자가 자신의 미술관을 현실에서 구체화하기 위한 무대로 삼을만한 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속한 체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체제의 진보를 구체적인 현실이 아닌 가공의 현실(이른바 주체사실주의)에서만 구현하는 체제로 퇴보해갔고 그가 ‘사회적 지반에 기초한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며 구축한 이론과 실천의 모색은 지금 북한에서 단지 매우 기이하게 화석화된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초기 북한에서 개진한 ‘예술과 사회의 관계'모델은 기존의 틀을 넘어서고 있으며 그만큼 그 ‘틀'을 넘어서 사고하고자 하는 이에게 유의미한 틀이 될 수 있다. After the end of Korean War, Jeong Hyeonung(鄭玄雄, 1911-1976) who defected to North Korea wrote some art critics in ‘Joseon Art(朝鮮美術)', official organ of the Joseon Artist Alliance(朝鮮美術家東盟) from 1957 to 1966. The main issues of these texts are as follows; 1) the new possibilities of the printed and graphic art in modern society, 2) the development of art depends on the cooperation between art and new technologies, 3)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art corresponds to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material base, 4) (although somewhat weak) seeking new form and content of art proper to new media. As a chairman of Graphic Art Committee of Joseon Artist Alliance, Jeong Hyeonung (of 1950's~60's) wants to upgrade the position of graphic art as a new art form appropriate to a Socialist country. Early period of North Korea promoting the socialistic modernization provide for him to a good foundation to realize his thinking. But after late 1960's, Art World of North Korea became conservative increasingly. They adopted the Joseonhwa(朝鮮畵) as a model for their own socialistic art form and relegated the graphic art as a sub-genre. Nevertheless, the progressive viewpoint of Jeong Hyeonung in 1950's~1960's are significant model to understand relation between art and modern society.

          • 이동훈 회화의 조형성에 대한 연구

            조은정(Cho, Eun-Jung) 인물미술사학회 2015 인물미술사학 Vol.- No.11

            이동훈의 회화에는 작가의 경험적 공간과 관찰을 통한 시간이 내재되어 있다.〈조선미전〉에 출품하였던 성실한 풍경화에서부터,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그 장소에 위치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풍경에 자신이 투사되는, 경험의 공간을 드러내고 있다. 같은 장소를 인식하는 방식에 의해 다르게 표현해낸 〈서대문 밖 풍경〉에서 조형적 언어의 모색의 시간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동훈 회화가 갖는 특성은 대상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북한산을 담은 작품 앞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인수봉을 알아보고, 불암산의 바윗골이 지금도 여전함을 그의 화면에서 확인한다. 화면에서 자연의 진실을 보는 일은 그가 하늘, 산, 집, 나무, 인물이 개개의 생명성을 지닌 채로 존재하게 한 때문이다. 언뜻 근대기 인상주의화풍으로 보이는 그의 화면은 개개의 형태가 작가의 시각에서만 조합된 양상인 것이다. 한마디로 보이는 장소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경험을 투사하는 현대성 깊은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특유의 집념으로 자신만의 풍경을 이루어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풍경이나 기법이 매우 마음을 움직이는 인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시감이 높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기〈국전〉에서 말해진 이후 여타의 전시에서 이렇다 할 특성으로 논의의 중심에 선 적이 없다. 이는 어쩌면 이동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현대 구상회화의 문제점에서 시작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화단에서 오늘날 구상회화라 불리우는 양식이 주류였다는 것은〈조선미전〉,〈국전〉을 중심으로 맥을 형성한 아카데미즘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의 모습은 프랑스 인상주의를 기반으로 하거나 살롱을 모태로 한 미술이었으며, 동경미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방식이 유학생들에게도 적용되었고, 관전을 통하여 강화되었던 때문이다. 독학에서 시작한 이동훈은 민족적 미술양식 혹은 독자양식의 구축을 위하여 이러한 학연이나 지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일본인 화가에게 아카데미즘을 사사하였고, 박영선의 회화적 방식에 동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미술 수립이나 한국적 혹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치밀함이 아니라, 시각에 기반한 미학적인 추구가 결국 그만의 독특한 화면을 생산했음에도 작가적 양식으로 보이기보다는 한국의 근현대기 구상회화라는 틀 안의 전형성으로 인지된다는 말이다. 현재 이동훈 개인적 양식과 〈국전〉에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구상회화의 화풍이 크게 구분되어 생각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동훈의 회화적 세계가 한국 구상회화의 중심부에 이르러 있음을 의미한다. 시대적 미감을 선택하여 화단의 중심부에 접근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러한 이유로 〈국전〉이후의 화단에서 존재감을 상실해갔던 것은 아이러니다. 그럼에도 추상의 위력 속에서 구상회화의 저력은 자연에 대한 존중, 일상에의 충실에 있었음을 이동훈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일견 범주화할 수 있는 구상회화도 내면적 진화를 통해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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