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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硏究

        김언정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63

        우리는 21세기라는 새로운 선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복음주의 와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신학이라는 양극화의 분위기 속에서 선교가 진행되어왔다. 현대 선교현장의 사상과 종교와 문화적 흐름들은 복음주의를 뛰어넘어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을 지향하게 한다. 분명히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실패한 부분들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회복한 것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완전한 선교신학이라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해결해야할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두 가지를 정리한다면 복음화에 있어서 인간화에 강조점을 두어 구원에 있어 개인의 회심이 약화 되었고,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편협한 해석으로 교회론에 있어 심각한 문제점 이다. 그러나 이제는 양극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선교 신학을 만들어 가야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최근 등장하고 있는 통전의 선교신학을 정리하였다. 그러면 과연 통전의 선교신학이 가능할 것인가? 통전의 선교신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통전성에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복음화와 사회 참여를 동시에 중요하게 여기되, 어디에 강조를 두어야 하는지는 상황이 명시해 준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방법으로 증거를 해야 하는지를 지시해 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9장에서 유대인은 유대인 같이 된 것으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으로,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코자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두 요소를 불가분리적인 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하나의 삼위일체적 선교사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보쉬는 교회의 세계를 향한 선교 사명에 대해 "교회가 세계에 믿음의 빚과 소망의 빚, 사랑의 빚을 졌다"고 지적하며 그 회복을 요청한다. 기독교는 선교해야 한다. 선교는 기독교가 자신을 존속시키는 형식이다. 옛 교회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교회의 시선은 역사의 종말, 지리적 의미에서 땅의 끝, 세계의 시간적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현대는 옛 교회의 사도적 전승을 이어받아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주어진 교회의 시간동안 선교해야할 책임이 있다. 앞에서 새로운 길로서의 통전의 선교신학은 성서의 표준과 근거를 문제 해결의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성서에서 벗어난 우선순위와 재해석을 감행 할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지 못하였다. 우리는 단지 증거 해야 할 뿐이다. 따라서 선교신학에 있어서 우선순위와 재해석의 문제를 화해시켜줄 방안으로서 통전의 선교신학은 연구, 발전되어 져야할 것이다. 21세기의 선교신학은 더 이상 양극화에 머물려서는 안 된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공동체 사상에 비추어 본 공적신학의 특징

        최은택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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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of public theology appearing in the community thought that appeared in Karl Barth.The Christian community, says Barth, is sent into the world not by chance, by chance, but on a mission, and it does not exist prior to that mission, but exists only to receive it. In other words, a community does not exist without a mission, and therefore the question of whether a community has a mission and whether it carries out its mission is not unanswerable. Community exists for the world. Its mission has constituted and shaped the community from the outset. The mission forms the center and horizon of the community. If the community had not been given the mission, the community would not have come into existence. If the community loses its mission, it will no longer exist. Therefore, it is argued that the task does not equal the dignity that is only endowed on the community, and that the community only exists when the community has the task, rather, the task has the community. The task is not like a burden first imposed on the community. It is said that the mission is the foundation that cannot be transferred to the community, the foundation that bears the community, and insists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mmunity theory, and then shows the public theological characteristics. In other words, theology came to be proclaimed to help ordinary believers become the subject, profess their faith in the public realm, and live according to “public faith.”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the elements of 'community theory' among various characteristics of Karl Barth's theology. There are many studies on ecclesiology and community theory about Barth. Therefore, the purpose of the following is to examine the public theological elements in the light of Barth's community thought.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studies on Barth's ecclesiology and community theory by many scholars, there has been no paper yet linking community thought with public theology in the 21st century. Therefore, in this thesis, I would like to get an answer through the characteristic study of public theology on how to overcome the global crisis of Christianity through Barth's theology. 본 연구는 칼 바르트에게서 나타나는 공동체 사상에서 나타나는 공적신학의 특징을 연구하였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우연히, 닥치는 대로가 아니라, 일정한 임무를 가지고 세상 속으로 보내어졌으며, 이 공동체는 그 임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비로소 받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즉 공동체는 임무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공동체가 임무를 가지는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문제는 답변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임무가 공동체를 처음부터 구성하고 형성했다. 임무가 공동체의 중심과 지평을 이룬다. 만일 공동체가 임무를 받지 못했다면, 공동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공동체가 임무를 상실한다면, 공동체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임무는 공동체에 비로소 부여된 품위와 같은 것이 아니며 공동체가 임무를 가짐으로써, 차라리 임무가 공동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공동체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임무를 공동체에 비로소 부과된 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임무를 공동체에 양도될 수 없는 기초, 공동체를 짊어진 기초인 것이라 하며 공동체론의 특징을 주장하며 이어 공적 신학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즉 일반 신자들이 주체가 되어 공적 영역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공적 신앙’에 따라 살도록 돕는 신학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본 논문은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특성 중에서 ‘공동체론’의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바르트에 대한 교회론 및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바르트의 공동체 사상으로 비추어 공적 신학적인 요소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바르트의 교회론,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어 왔으나 공동체 사상과 21세기 공적신학을 연결하는 논문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 논문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공적신학의 특징연구를 통해 답을 얻고자 한다.

      • 칼빈신학과 웨슬레 신학의 구원론 비교이해 : 구원단계를 중심으로

        오흥은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63

        지금까지 연구의 초점은 칼빈과 웨슬레 신학에서 구원론의 체계인 구원순서를 고찰하는데 있었다. 칼빈은 돌연한 회심을 통하여 즉, 자신은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위도 없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힘에 의해 인생의 진로가 바뀌고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였으므로 그의 체험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표현인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 어떤 인간의 응답적 행위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강력한 예정사상을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예정사상은 발전하여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으로 확립되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칼빈의 구원론은 이해될 수 있다.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그가 이전에 개념적으로 깨달은 기독자완전 사상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고, 칭의에 있어서 선행과 지적동의를 포함하는 믿음을 가르치는 영국교회의 신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신칭의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는 오랜 고투 끝에 하나님 의 은혜로 구원 얻은 신앙경험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무력하고 부패하였음으로 선행이 아니라 오직 은총에 의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그의 신학에서 구원단계의 순서를 체계화시켜 놓았다. 웨슬레의 구원론의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에 의한 구원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웨슬레 자신이 의지적 헌신의 결단과 자기포기 및 절망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얻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그에게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구원단계가 순간적인 선택에 의한 구원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인데 비해 웨슬레의 구원은 점진적이며 순간적으로 진행되므로 구원순서가 시간적인 순서인 것이 큰 차이점이다. 칼빈의 구원순서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과 선택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응답을 웨슬레가 나타내므로 칼빈주의에서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는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오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웨슬레는 알미니우스가 아니라 웨슬레주의라 해야 한다. 웨냐하면 그가 말하는 신인협동의 사실은 알미니우스와 달리 인간의 부분적 타락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 처럼 완전타락과 전적 부패함을 주장하면서, 원죄사상을 그의 죄관에서 강조하고 있으며,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 아래 회복된 자유의지로 순종과 헌신의 의미로서의 응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선행은총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원단계에서 시종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의한 구원역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칼빈과 웨슬레의 구원순서에서 사실상 문제점은 웨슬레의 성결, 기독자완전사상과 칼빈의 현세에서는 불완전한 성화개념의 차이다. 웨슬레는 성결을 현세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믿음으로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이 성서가 강조하는 핵심적 사상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반면 칼빈은 성화의 개념은 동일하게 언급하면서도 그것은 사후에야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기독자의 완전은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로마교회의 선행에 의한 구원의 타락된 신학사상으로부터 성서적이고 본질적 구원의 도리인 이신칭의 사상을 적극 긍정하고 체계화하여 개혁을 완성하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성서의 핵심교리이다. 즉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사상의 진보된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신학을 비교한 의도가 어떤 것의 우열을 가늠하고자 함이 아니며, 신학은 반드시 교회와 성도의 신앙생활에 봉사하고 섬겨야 하며 또 두 신학이 그동안,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신앙을 인도해야 하므로 비교를 통하여 동질점과 차이점을 살펴 상호 보완이 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신앙의 목적은 궁극적 구원의 완성에 있고, 당연히 신학은 그 과정을 확실히 계시해야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구원론이 신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칼빈신학과 웨슬레신학의 궁극적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단계순서상의 차이는 있지만 목표하는 바는 같으므로 이를 신앙인의 목표로 삼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관심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 헌신을 두 신학으로부터 발췌하여 오늘의 여러 신앙적 불일치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실 웨슬레는 칼빈의 이중선택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는 예정사상을 제외하고는 사상적인 일치를 이루고 그것을 토대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칼빈과 웨슬레 둘 다 성서를 적극적으로 긍정한 성서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장로교의 대부분이 신학적 기반으로 인식하고 있는 칼빈신학의 예정론의 실생활적 한계점을 웨슬레 신학에서의 성결에의 목표를 삼는 신앙의 모습들을 긍정하고 또한 웨슬레 신학의 인본주의적으로 흐를 경향성을 조심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의신앙을 강조 보완할 때 한국교회는 신앙적으로 한걸음 더 성숙한 교회로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개혁주의적 교리를 완성해 가는 길이며 현대교회의 문제점들과 신자의 나태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 불트만의 基督論과 說敎에서의 神學的 一貫性 硏究

        박정호 嶺南神學大學校 大學院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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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목적인 신학과 신앙 혹은 신학과 선포의 일치를 조망으로 살피는 본 논문은 문헌 연구방법을 사용하였으며 가능한 한 일차자료들에 근거하여 전개하려했으나 불트만의 신학적 배경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하는 불트만에 관한 이차자료에 의존했으며 기독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주로 불트만의 논문집인 「학문과 실존 Ⅰ-Ⅳ」을 주로 다루었고 설교를 다루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국내에 소개된 불트만의 설교집인 「차안과 피안」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본 연구는 설교를 실천신학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한국의 신학적 입장보다는 조직신학적인 입장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설교 방법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설교를 위한 논문임을 밝혀둔다. 제1장에서는 서론으로 신학과 설교의 괴리에서 오는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점과 본 연구의 목적과 의의 그리고 범위를 소개 했다. 제2장에서는 불트만의 신학적인 배경을 연구했다. 여기서 불트만 사상의 전반적인 것을 다 다루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 아니기에 그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배경만을 다루었다. 먼저 자유주의 신학과 역사비평학을 다루면서 불트만의 학문적 진지성과 객관성확보를 위한 철저한 비평 정신의 발로가 여기서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루터교와 신정통주의부분에서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불트만의 신학적 배경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아래에서 '오직 은총'을 강조하는 루터의 '의인론'에 입각하여 그의 신학을 펼쳐 나감을 볼 수 있으며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불트만의 모습은 이 배경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실존철학과 실존신학에서는 철학에서의 개념정의를 신학에 원용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다. 주로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불트만의 성서 해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밝혔다. 제3장에서는 불트만의 신학 가운데 쟁점이 되었고 오늘날도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다루면서 불트만의 기독론의 핵심인 '현재적 그리스도'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이 둘의 연속성을 주안점으로 논의 할 것이다. 먼저 단일 주제로서는 가장 신학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가를 다루기 위해 1)기독론 주제로서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으로 살피고 2)역사적 예수에 대한 불트만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한 예수 생애의 전기적 구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를 한다. 그러나 결코 부정적인 입장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입장으로 볼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3)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선포나 신앙의 그리스도도 선포되어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우리가 이 선포에 응답할 수 있을 때만이 케리그마가 됨을 살필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연속성부분에서는 설교 속에 현재하는 그리스도, 즉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론적 사건도 말씀의 '현재적' 선포 속에서만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연속성이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론적 입장에서 설교를 볼 때는 이미 그것은 계시이며 그 계시에 근거해서 세워진 교회는 이 근거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부름말로서의 계시인 한에서만 설교이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지는 계시의 말은 현재하는 그리스도로서 선포의 중요성을 다루며 불트만이 설교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제4장에서는 불트만의 신학과 설교의 일관성의 증거로 「차안과 피안」을 중심으로 설교를 분석했다. 여기서는 설교자로서 불트만이 설교에 얼마나 심사숙고 하는지 그 내용을 살피면서 그의 신학적인 통찰을 보고자 한다. 제5장에서는 본 논문의 결론으로서 전체적인 흐름을 요약하면서 앞으로 신학과 설교의 일관성이 왜 필요한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일이 한국교회에 가시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제안하는 글로 쓰여 질 것이다.

      • J. 몰트만의 기독론 특징 : 현존하는 그리스도

        강상수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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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현존하는 그리스도 몰트만의 기독론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우리의 신앙으로 발견된 것도 아니요, 우리의 지식으로 알게 된 것도 아니다.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은 삼위일체로 현존하는 그분에 의해, 한 인간의 실존과 공동체의 역사와 온 우주를 새 창조하심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창조의 도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또한 그분을 향하여 경험하며, 기대하고, 희망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를 서게 하시고 경주하게 하신다. 이러한 새 생명의 경험을 가지고 몰트만의 기독론을 정리해 보자. 몰트만의 기독론을 살피기 전에, 그의 삶과 신학 사상의 경험을 살펴보았다. 몰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과 오늘날 인류의 절망과 생태계의 파괴를 통한 희망이 없음을 경험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누구 신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생애를 통해 경험함으로써, 전 세계에 그분의 현존을 통한 구원의 희망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몰트만의 신학의 경험과 사상의 경험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삼위일체적 하나님 중심의 개혁전통에 서 있으며, 부활한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독교 윤리의 삶을 제시한다. 또한 에큐메니칼 신학사상을 추구하면서 인류와 전 우주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화해로 말미암아 정의와 평화의 나라로 하나되게 하고 일치되게 하는 운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희망의 신학을 화해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전개하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모순된 관계를 삼위일체적으로 상호 관련되게 설명함으로서, 영원한 나라가 영광 중에 오심을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함으로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몰트만의 신학사상에 전이해를 가지고, 그의 기독론의 질문과 근거와 방법을 살펴보면,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종말론적 역사 가운데 온 인류와, 온 우주를 구원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몰트만의 기독론의 질문을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이 메시야 신앙임을 전제하면서 기독론 또한 메시야적 희망에서 출발해야 함을 말한다. 또 기독론에서 구원론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초대교회와 근대의 기독론의 대한 문제에 있어서 종말론적 역사와 우주적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 다음에 기독론의 방법에 있어 근거와 함께 '이야기체 기독론', '삼위일체적 기독론', '종말론적 기독론'으로 설명하면서 기독론의 삶의 자리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몰트만의 기독론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성서를 중심으로, 역사적 단계별로 이야기하면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기독론의 근거를 삼고 시작하여, 내용상으로는 종말론적 역사와 우주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완성의 길에 서게 한다. 이러한 길은 바로 기독론의 삶의 자리이며,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이 선포되는 곳이고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기독론의 방법을 변증법적 방법으로 논리 있게 전개한다. 이 모든 방법에서 몰트만의 기독론의 특징을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가지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있지만,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사회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활동, 현존하는 그분의 인격적 회상과 경험됨, 그의 고난의 삶에 있어서 희망, 부활을 통한 새 창조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사회적 삼위일체로 현존한다는 것은 몰트만의 기독론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인격적 회상에서 경험될 때 종말론적 인격, 신학적 인격, 사회적 인격으로 회상됨과 동시에 현재 경험된다. 그리고 사회적 삼위일체로 현존하는 그 분은, 자신의 고난의 삶을 통한 묵시사상적 희망을 보여주는데, 이 고난의 삶에 있어서 희망은 고난의 삶을 교제 가운데 사귐으로 나타났으며, 이 고난은 묵시사상적 희망으로서 새 창조의 시작의 빛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펴 본 특징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종말론적으로 새 창조의 완성을 그 분을 통해 미리 보여 주셨다. 여기서 나타나는 종말론적으로 현존하는 그분은 복음을 통해 전해지고, 경험되어진다.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종말론적 역사와 우주로 이해되어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권세의 통치 아래 있으며, 이 통치는 곧 새 창조의 완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희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과 경험은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새 창조를 완성하는 길에서 현재화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길은 사도직 안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길이며,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 형제의 친교를 통해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 분의 약속 가운데 가난한 자들 속에서 현존하심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존하심은 신앙공동체의 형제들이 사랑의 교제 안에 있음 같이, 이들과 가난한 자들과의 진정한 형제 사랑을 책임 있는 길에 서게 하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존하심이 궁극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바로 그 분의 파루시아에 있다.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새 창조를 완성하는 우주적 구원의 길을 유지하고 기대하게 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현존이 새 창조의 완성과 하나님의 온전한 나라로 신자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초대하여, 부활한 주님을 기억하는 성례전의 잔치 가운데 우주적 구원의 길에 서서 경주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희망하게 한다. 이렇게 몰트만의 기독론의 특징을 "현존하는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현실의 역사에 밀착된 기독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생동감 있게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통의 몸부림의 현존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발견하게 되었고, 현존하시는 분의 인격적 회상을 통해 오늘날에도 경험되어지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따뜻한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현존하는 그분을 뵈올 때, 우리의 실존과 대한민국 교회의 앞날에 새로운 희망이 밝아졌으며, 그 희망은 우리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길"에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경주하게 하는 삶의 능력이 되었다. B. 대한민국 교회의 현존하는 그리스도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이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며,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대한민국 교회가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신앙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인류를 구원하시고 온 우주를 새 창조의 완성의 길에 서게 하시는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신앙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새 창조의 길에 서서 경주하게 하신다. 그 경주의 경험은 창조 이전부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로 계시되었다. 그래서 계시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대한민국 교회에 경험되어졌으며, 역사의 현재 가운데,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서 현존하신다. 이러한 "사회적 삼위일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대한민국 교회에 경험되어져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우시고, 우리 민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시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세계를 향해 선교하는 대한민국으로 세워, 온 인류를 주님의 품에 안기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몰트만의 기독론에서 그 특징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몰트만의 기독론의 특징 가운데 먼저 "사회적 삼위일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교회에 제안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로 현존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주체가 삼위일체 되신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교회의 본질이 삼위일체 되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 역사에 있음을 교회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교회는 "삼위일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구원 행위를 경험하고 그 길에 서서 경주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부활한 주님을 경험하는 이들은 모두 그 인격성을 회상하는 가운데 현재 경험하게 된다. 대한민국 교회는 부활한 예수를 회상의 경험 가운데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종말론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험하여 구체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동참해야 한다. 회상되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의 삶에서 나타났듯이,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성이 경험되어지는 구원의 삶의 자리를 찾아 대한민국 교회는 파송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과 사귐의 교제를 대한민국 교회는 "현존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고난은 부활로 통해 새 창조의 희망을 주는 묵시사상적 경험이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교회가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고난의 사귐을 통해 이웃의 고난과 자연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사귐으로써 새 창조의 시작의 희망을 종말론적 부활의 신앙으로 제시해 주어야 하고, 그 현실의 삶 가운데 구체적인 희망을 제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네 번째는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새 창조를 완성하는 길"에 경험되어 진다. 이 말은 대한민국 교회가 그 도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도상의 장소와, 그 도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중요함이 내포되어 있다. '새 창조를 완성하는 길'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인 사도직과, 가난한 자들과, 그의 파루시아에 근거할 수 있다. 새 창조를 완성하는 길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곳에 임하기를 소망하는 길이며, 또한 이 길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경험되어지는 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직과 현존을 경험하는 성례전, 형제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경험해야 한다. 이 경험의 길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현존의 약속인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다리며, 이 모든것에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경험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하겠다. 그렇게 될 때 "현존하는 그리스도"께서 대한민국과 온 세계와 전 우주를 하나님의 나라로 새 창조하는 완성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대한민국 교회도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원의 길에 서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길을 인식한 대한민국 교회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길에 겸손한 자세로 서서 힘차게 경주하는 소명을 언제나 삼위일체로 현존하는 그 분을 통해 경험해야 한다. 현존하는 그 분을 통한 경험이 있을 때, 대한민국 교회는 그 분의 권세와 능력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삶의 자리에서 선포할 수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기다림과 희망 가운데서, 그분의 파루시아로 오는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을 종말론적으로 경험하는 은혜를 받게 된다.

      • 영성에 관한 기독교 교육 연구

        이상호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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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영성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와 사람의 관계성을 이루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통한 화목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은 급변하는 사회의 변천과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참된 영적인 삶을 잃었고, 영적인 빈곤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장에만 치중했던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에서 성숙을 위한 몸부림이 있었고 거기에 따라 점점 영성훈련에 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 사이의 영적현상은 혼돈되어 왔으며, 이러한 혼돈 속에서 영적으로 갈급한 교인들의 요구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영성개발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만 급급하여 영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문제를 통하여 본 고는 영성신학 문제를 기독교 교육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도해 본 것이다. 본 고에서는 바른 영성신학의 정립을 위해 먼저 영성의 일반적 이해, 성서적 이해, 역사적 이해, 영성신학을 고찰하였다. 다음으로 영성교육과 기독교 교육의 공유점을 모색하면서 교육내용과 방법 을 모색하고자 시도하였다. 영성이란 그 의미가 매우 넓고 다양하여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영성의 일반적 의미는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으로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생명을 거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하나의 영성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이해는 그 출발점을 달리한다. 일반 영성이 인간 내적 정신이나 종교성에 근거한다고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되고 그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영성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이전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구약성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필요한 존재였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내재해 있을 때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존속되는 것이지 어떤 인간의 한 구성요소로서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성서에서의 영성은 관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지혜와 신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회당교육을 통하여 이루어 졌으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영성은 수도원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동방교회가 apophatic영성임에 비하여, 서방교회는 kataphatic영성을 형성하여 보다 활동적이고 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영성은 루터의 오직 은총으로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강 운동을 주장함으로서 중세기적 영성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룬다. 그의 경험은 성서로부터 왔으므로 그 후의 개신교 영성의 특징은 말씀 중심이 되었다. 현대의 영성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라는 상이한 두 형태의 영성으로 대표된다. 지나친 사회참여에 의한 복음 변질의 우려가 복음주의의 성향을 보수적으로 규정하게 하였으며,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탈 역사적인 경향에 대한 반성이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양 진영이 서로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영성의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성이 내면적 수련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통하여 그 의미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 교육에 관한 연구는 개인의 내적인 하나님 체험과 아울러, 그 사람의 삶과 그 사회에 대한 연대성 및 책임성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본 고의 목적은 이러한 영성 이해를 기초로 하여 그것을 기독교 교육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있다. 영성 교육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혹은 완덕에 둔다.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달성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영성훈련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피해야 할 위험한 요소로는 훈련 자체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 자만심, 율법주의, 내면주의 등이 있다. 영성 교육을 위한 장(場)으로는 인간의 삶의 전체 영역으로서 교회와 사회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훈련으로서의 영성교육은 교회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전통과 성서에서 벗어난 잘못된 영성 형성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있다. 삶으로서의 영성 교육은 그 장이 사회이다. 교회를 통하여 훈련된 영성은 사회로 확산되어야 하며, 사회를 통하여 형성된 영성은 교회의 영성을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교 육의 장으로 바탕으로 한 영성교육의 방법은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인을 위한 영성교육으로 기도, 묵상, 단순화 훈련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혹은 하나님 사랑의 측면에서의 접근이다. 두 번째는 공동체를 위한 영성 교육으로 예배, 말씀, 봉사 훈련이다 이는 횡적인 그리스도인됨의 교육이다. 이 단계의 교육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축적된 사랑이 외적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영성생활을 위한 영성교육으로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분명히 깨닫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성교육으로 다차원적인 삶의 목표를 향해 영성을 조화시키면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삶을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교육은 예배나 수련회 혹은 기도회 등의 신앙 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 이상의 본 연구의 결론을 통하여 앞으로 바람직한 영성 교육을 위한 제안을 몇 가지 해보고자 한다. 먼저 올바른 영성교육을 위하여 기독교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은 어떤 완전한 모델로 제시된 덕목이나 성품을 소유하고서 행동함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의 본질은 일차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및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다. 이 관계성을 통하여 영성은 개발된다. 기독교 영성은 그 관계성의 본질을 사랑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영성교육의 목적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한 완덕 혹은 완성에 둔다. 이러한 완성에의 과정이 영성적 삶이며, 이 삶 자체가 영성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이렇듯 기독교 영성을 사랑의 관계와 실천적 삶으로 이해할 때, 신앙과 삶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영성 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방향은 수도원 신학이 아니어야 하며, 금욕주의가 아니어야 하며, 고행주의도 아니어야 한다. 또한 영성신학은 샤머니즘적인 것도 아니며, 명상적이고, 모든 존재를 수직적 체계로 보며 영성을 단지 수양만으로 생각하는 불교화도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영성 신학은 세상과 교회, 영과 혹은 속을 구별하는 이원론적 체계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그리고 철저히 성령에의 의지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지향성, 신서지향성, 사랑을 소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랑을 소유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영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교육은 전체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없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며, 현재의 일이 죽음의 장벽을 넘어 미래 세계와 내세에까지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며,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총의 경험이 삶의 현장 속에서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생활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을 통해서도 영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영성 안에서 성과 속의 일치를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기독교 영성교육의 방법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개개인의 삶의 정황이나 개인적 특성에 따라 더 구체적인 교육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전통에서 일은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의 수단이며, 무엇보다도 그 자체가 소명으로 인식되어 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은 그 자체가 영성교육의 수단이요 과정이다. 각자의 직업을 통한 독자적 영성개발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각 업종별 영성교육도 필요할 것이며, 직위나 직책간의 영성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회사 단위나 학교 단위의 영성교육도 필요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가정을 위한 영성 교육이나 세대별 영성교육도 필요 할 것이다. 이러한 영성교육은 사회와 자연을 폭 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시도되어야 한다. 영성은 내면 수련으로부터 삶으로, 개인적 삶으로부터 사회적 구현으로 확산되어 왔다. 영성이 삶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다면 역사성과 사회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역시 개인적, 탈 역사적 신앙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를 향해 책임적인 청지기로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 영성과 윤리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성을 지향하는 기독교 교육자라면 반드시 윤리적인 모습으로 이 땅에서 그의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생명 평화의 신학을 위한 기독교윤리적 연구

        김명환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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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살펴본 생명의 신학과 평화의 신학에 바탕을 둔 기독교윤리적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은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라고 할 수 있는 교회도 현대인들에게 삶의 문제와 사회적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세속화의 과정을 격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학은 이러한 사회적 과제들과 인간적 고민들에 대한 대답할 책임이 있으며 그 대답은 성서에 바탕을 둔 신학적, 윤리적 대답이 되어야 한다. 본 글을 통해 생명의 신학, 평화의 신학이 어떻게 기독교윤리와 관련을 맺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생명의 신학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질문들 중 생명의 먹거리의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밀접한 문제인 동시에 항상 고민하게 되는 문제이다. 결국 하나님 없는 기술이나 발전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깨뜨리고 파멸하게 만드는 악한 도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니어링 부부의 예에서처럼 현대사회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통해 먹거리에서부터 출발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생태환경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알게 된다. 인간은 환경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이다. 환경은 정복과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서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생태적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어떻게 대답해야 되는지가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시작되게 된다.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교는 자연에 대해 정복자로 인류문명에 있어 침략자의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아울러 서구 신학 또한 이러한 전철을 답습해 왔다. 하지만 이제 서구를 제외한 제3세계 남반구의 신학은 이러한 요구에 대해 자연친화적 전통으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신학적 사고의 틀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교회에서의 여성의 문제는 시급히 21세기에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시대의 변화와 아울러 남녀평등의 문제는 많은 개선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아직도 여성은 교회 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한 책임이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기독교윤리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더 이상 성적 차이에 의한 차별의 구조가 아니라 인간 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로 접근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여성의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실천적인 면에서 여성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아울러 위치와 권력구조를 증대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의 신학과 기독교윤리적 주제들을 다루는데 있어,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풍토상 이러한 문제들이 소홀히 취급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 특별히 분배의 경제에 있어 소홀히 해 왔던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하여 정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특히, 정치, 경제영역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교회가 정의로워져야 한다. 교회는 나눔 을 실천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교회는 그동안 세상의 필요를 외면한 채 가난한 자와의 나눔에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더 갖고, 더 부하게 하려고 신경을 썼고, 성장하고 기적을 일으키는데 모든 힘을 쏟아 왔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교회는 병든 세상을 고치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실천해야 한다. 작은 것부터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또한 자유는 생명체에게 있어서 기본 조건이다. 자연환경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서의 자유가 있다. 우리는 그 근거를 마태복음 6:25-29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중의 나는 새도 푸른 창공을 날며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주어졌고 들의 백합화 역시 생명을 지니고서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겠다. 평화는 자유를 가진 자가 생명을 정의롭게 보전하는 가운데 나타내는 존재양태이다. 평화 역시 쟁취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이다. 평화는 근원적인 평화로서 통일이 필요없으며 통일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평화의 본이요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평화의 본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평화를 누리도록 하여 생명이 평화를 얻도록 해야 한다. 생존을 위한 윤리에서 평화는 동참이라는 존재양태를 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며 인간과 인간의 평화를 되찾게 되고 자연과 역시 과거의 지배와 착취로부터 돌이켜 평화로운 동참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윤리는 생명을 사랑한다. 생명은 육체적 생명인 목숨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누어 생각하지만 두 생명이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두 가지 생명은 다같이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이다.(직설법) 그리고 이 두 생명은 보존되어야 한다.(명령법)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생명의 보존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통합적 의미를 갖는다. 맹용길, 『생존을 위한 윤리』(서울: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1), p. 69.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선하게, 완전하게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이 만물을 지배하라 하셨으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낙원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전 인류의 타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창조 세계와 생태계에 고통을 초래하였다. 이제는 윤리적으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할 피조물인 우리가 깨닫고, 결단하고, 회개하여 돌아서야 할 순간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지난날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지하며 창조 세계를 사랑의 섬김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성으로 변화되어야 할 때이다. 끝으로 한반도는 이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분단국가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성장시켜 오셨다. 이제 교회는 분단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야 할 사명을 짊어져 나가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남북 간의 대화도, 6자회담도, 주변의 강대국도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만이 평화의 주인이요 바로 평화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화평의 기초를 찾을 수 없다. 개인의 이기적 욕망과 동기에서 화해와 일치를 찾기 어렵다. 국가적 이해관계를 기초로 해서 통일을 모색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우리를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남북의 전쟁을 겪어 불신과 증오심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에게서 통일의 기초를 민족에게서 찾는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력에 기초해서 통일과 평화를 찾고자 하는 노력도 허사이다. 오직 평화와 통일의 희망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가 그 기초가 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에베소서 2:14-18에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평화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몸을 화해의 희생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원수들이 서로의 적대감을 해소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원수 된 것을 폐기하시고 하나로 하실 때 비로소 성령안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다. 우리 시대에 평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전쟁은 이제 몇 몇의 희생이 아닌 온 민족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 시대 이 역사 위에서 남북의 교회위에 주신 하나님의 위임은 자명하다. 평화의 씨를 뿌리고 평화의 열매를 거두면서 평화의 소망을 이루어 가는 일이다. 이제 교회는 평화의 사도로 분단의 상황에서 고통 받는 이 민족의 희망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분단된 조국의 하나됨을 위해 한국교회는 먼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된 모습으로 남북 통일에 주체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인간론에 대한 칼빈의 인간론적 비판

        노상식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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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경제, 환경, 핵, 정치, 교육, 문화, 역사, 인류, 과학, 세계화, 등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과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대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시대적 정신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특징 자체가 너무 다양하고 복합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흐르고 있는 정신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미완성 단계이거나, 계속 진행되고 발전되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매우 위험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독교에는 더욱 그러하다.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는 계몽주의라는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확한 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결과, 속수무책으로 계몽주의에 완패하고 말았다. 기독교와 싸우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대안도 나올 수가 없었다. 뒤 늦게나마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대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임시방편마저도 계몽주의가 낳은 하나의 종교 신학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속으로 질주하던 모더니즘은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와 세계 제1,2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면서 그 속력이 급격하게 줄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그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 의해 새롭게 수리되고 단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이라는 거대한 규모로 탈바꿈하였다.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가장 먼저 기독교의 진리를 위협하고, 세상의 모든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며, 계속 나아가고 있다. 2004년을 한달 여일 남겨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규모가 얼마나 더 커졌는지 또한 속도가 얼마나 더 빨라졌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큰 충격과 타격을 입은 기독교는 아무런 대안이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자행한 횡포를 거저 보고만 있는 듯 하다. 현재 거대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많은 타격을 입은 기독교의 모습은 대단히 우스꽝스런 꼴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 겠다. 중국의 사자성어 가운데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운다 할지라도 아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위태한 상황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적군과 나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상황적인 전략을 다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시대에 흐르는 정신(세계관)을 파악 하고 교회가 안고 있는 신학적 과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동시에 기독교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보인다. 더구나 기독교의 진리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인 모더니즘 인간 론을 능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대응은 좀더 체계적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론은 모더니즘의 인간론(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모든 판단의 주체)을 넘어서서, 인간을 하나의 개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사회, 문화, 자연과 상호영향을 받은 복합적인 공동체적 산물로 보고 있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 오면서 인간의 개념은 개체성에서 공동체성 혹은 집단적인 인간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론은 인간 진화(進化)에 근거하여, 환경(자연, 문화, 사회, 언어 등)의 변화와 역사의 진행(시간)으로 만들어진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 집단적인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성된 "공동체(집단적)적 인간"(우리)은, 또 다른 역사의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국제적 정치관계에 있어서도 대화와 협력관계를 통해(북한핵문제와 같은 경우), 인간 스스로가 가진 문제들을 스스로 풀고, 해소시킬 수 있으며, 또한 인간들 스스로가 이 세상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결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1, 2차 세계대전이후 역사의 진보와 인간의 낙관론이 심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러한 주장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세상은 상대주의로 인한 혼란과 인간의 삶의 형식들이 파괴 되고, 또한 인간이 낳은 수많은 환경파괴와 살인, 빈부의 극심한 격차, 소외 등의 심각한 병폐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중심에는 오히려 세계대전 그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인간낙관론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인간 DNA 정보해독으로 얼마든지, 병들지 않고, 최고의 질을 가진 인간을 탄생시킬 수 있고, 또한 인간은 민주주의와 과학 기술력, 그리고 복지정책, 시장경제체제, 분배 정책 등으로 더욱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비판과 신중함을 가진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세계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비관론과 낙관론, 또는 중간노선의 흐름들이 서로 그물망처럼 얽혀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성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 가운데 놓여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가? 이것은 기독교가 안고 있는 심각한 고민거리라고 생각한다. 더욱 큰 과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갖고 있던 정신들을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고,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있다는 데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공동체, 나아가 나라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 안에서 갇혀 살고 있다. 그 범주 안에는 기독교도 상당히 영향을 받고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시 대의 기독교가 시대적 도전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충분히 이해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퇴색되어 성경의 진리(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와는 거리가 먼 하나의 역사, 사회, 문화, 자연, 언어의 복합물이 만들어낸 산물로 전락하거나, 또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 버리거나, 전혀 세계에 무관심해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서 이러한 도전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던 것을 연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본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시도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인간론(인간 이해)을 파악하고, 그 위협적인 인간론에 대해서 칼빈적인 대안(성경적이 고 신학적인)을 제시해보려고 했다. "성경의 진리로 시대를 진단하고, 진리를 재해석하는 문제를 통해 기독교적 대안을 찾아 보려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본 논문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의 목적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먼저 이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는 인간론을 파악해서, 칼빈의 인간론을 근거로 비판해 보는 것이다. 본 논문은 무엇보다도 칼빈의 인간론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인간론을 "인식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소(小)대안을 제시해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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