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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립학회의 생명연장 논의: 수혈을 중심으로, 1665-1669

          주의돈 영국사학회 2020 영국연구 Vol.0 No.43

          The purpose of this paper was to examine the Royal Society's debate about blood transfusion in 1660s.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in England tended to think that blood transfusion could transfer physical and mental characteristics from one animal to another. This approach included the idea that a young animal's blood could rejuvenate an old animal or person. In an experiment, they transfused a lamb's blood into a man with a mild mental disability, with the expectation that the gentle lamb's blood would calm the man's spirit. On the other hand, a French physician Denis, who actively contributed to Philosophical Transactions published by the Royal Society, took a more medical approach to blood transfusion. He hoped that transfusion would prolong human life by curing many diseases, which were considered at the time to be caused by unhealthy blood. Denis, too, tried to cure a mad man but with a different but with a different assumption. He thought that madness was caused by the excessive heat of blood, so he meant to cool down the heat in order to cure him. It shows that Denis looked upon transfusion as a physiological treatment. 본 논문은 1660년대 왕립학회에서 수혈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논의를 살펴본다. 당시 수혈은 인간생명의 연장을 가져다줄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기술이었다. 잉글랜드에서 활동한 왕립학회 회원들은 동물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이 피에 흐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수혈이 심신의 변화를 낳을 수 있을것인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젊고 건강한 동물의 피를 나이 든 동물이나 사람에게 수혈하여 기력을 회복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기도 했다. 한 실험에서 왕립학회 회원들은 유순한 양의 피가 사람의 정신병을 완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양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했다. 한편 왕립학회가 출간하는 과학회보에 수혈과 관련하여 활발하게 투고했던 프랑스의 의사 드니는 수혈에 대해 잉글랜드의 회원들과는 다른 접근을 취했다. 그는 수혈을 통해 주입하는 피를 혈관에 주사하는 약의 일종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수혈이 오염된 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인간생명의 연장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드니는 잉글랜드인들과 마찬가지로 수혈이 정신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인이 피와 정신상태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반면, 드니는 정신이상이 피의 과도한 열기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며 수혈을 생리학적 치료의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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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기억과 영연방, 그리고 `상상의 잉글랜드`

          이영석 ( Lee Young-Suk ) 영국사학회 2016 영국연구 Vol.36 No.-

          1968년 8월 보수당 의원 이녹 파월은 한 보수당 집회에서 노동당 정부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몇 개월간 영국사회는 파월의 연설을 둘러싸고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노동당의원과 보수당의 상당수의원들이 파월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비난한 반면, 많은 백인들이 그의 연설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파월 사건은 영국사와 현대 영국사회에서 제국이란 어떤 의미를 지녔으며, 제국과 인종주의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되묻는 계기가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영국 지식인들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해왔으며, 제국이 영국사의 지배적 동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제국 경험이 영국인들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백인성`에 대한 집착은 제국의 확장과 함께 형성된 것이며, 20세기 이민 추세가 백인자치령국가로 바뀐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치령에 대한 영국인들의 긍정적인 변화는 이들 국가가 `백인성`을 중시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한 점과 관련된다. 그러나 19세기말 20세기 초 자치령에 대한 인식변화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대영국` 이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었음에 비해, 1960년대 본토에서 해외로 이주한 영국인들의 집착은 변질된 영국사회를 대신해 해외 자치령에서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으려는 퇴행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In 1968, Enoch Powell, an MP of the Conservative Party delivered a speech which criticized the immigration policy of the Labour Government. Over the following few months, Powell`s speech caused uneasiness within the British society. Opinions were sharply divided between the majority of politicians who criticized Powell`s racist view and a large number of the white citizens who supported Powell`s view and sent him letters of encouragement. This Rivers of Blood Speech laid the cornerstone of asking modern English society and English history a question, What does Empire mean to them and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an empire and racism? Post World War II, English intellectuals felt the moral obligation to criticize imperialism. They also denied that imperialism served as the main contributor to the England`s development. However, the intellectuals could not deny the heavy influence that imperialism had brought to the British people. The obsession to white supremacy was established along with the Empire`s expansion, and it triggered the British immigration policy of the 20th century to be replaced with the Dominions of the whites. British people`s positive approach to the dominion is consistent with how they valued white supremacy and excluded other races from the mainstream. Naturally, during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the Dominions of the British Commonwealth were associated with the Empire`s increased national power. This perspective started to fade, and the British people migrated to the Dominions from Britain in the 1960s. Ironically at that time, British people were tired of the degenerated British society and they were migrating to find the imagined England in the Domin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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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해리엇 마티노의 역사 쓰기와 읽기 -아일랜드 합방폐지를 둘러싼 논쟁-

          배인성 ( In Sung Bae ) 영국사학회 2013 영국연구 Vol.29 No.-

          본고는 1800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합방 이후 아일랜드의 합방폐지를 둘러싼 해리엇 마티노의 역사서술을 고찰한 것이다. 마티노는 『30년 평화기의 영국사, 1816-1846』에서 아일랜드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마티노는 ‘합방주의자'로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연합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티노가 합방폐지운동을 이끌었던 다니엘 오코넬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는 점이다. 오코넬은 아일랜드 국민의 모든 염원을 합방폐지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설파하면서도 스스로는 아일랜드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마티노는 오코넬을 ‘선동가'로서 평가했다. 마티노가 그리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이상적인 관계는 ‘진정한 통합'을 함의한다. 즉,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통해 ‘아일랜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티노가 아일랜드의 경제적 번영, 산업화, 그리고 근대화의 가능성을 영국과의 통합을 통해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요컨대 그녀는 “아일랜드인을 위한 아일랜드”를 장려하면서도 제국의 구조는 철저히 유지하면서 실행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d Harriet Martineau`s writing about the Repeal of Ireland, focusing on her perspective of Daniel O`Connell who led the Repeal Movement in 1830-40s. Martineau`s History of England encompassed the whole social and political world. She wanted to teach her readers how to understand her nation and its empire. Martineau devoted considerable space to Ireland. She was a committed unionist. So she envisioned the perfect unity of England and Ireland. She criticized sharply O`Connell in History of England for his false attitude of Repeal Movement. To the Irish, Repeal meant every man`s ownership of his bit of land, release from standing debts, and the abolition of taxes. He exploited these ideas to drag the Irish. His attitude revealed the ambiguity as a hero in the Repeal. While expressing clearly that the Irish could achieve all of their heart`s desires through the repeal, he thought himself the independence of Ireland was impossible. That`s why she appraised him ``agitator``. Martineau believed that Ireland`s miseries could be remedied only by British intimate connection with country of superior industrial condition and habits. The ideal relationship between England and Ireland was ``real unification``. In short, While encouraging ``Ireland for the Irish``, she insisted that the structure of Empire be held and practiced thorough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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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사 속의 통합과 갈등: 개념적 개관

          김기순 영국사학회 2019 영국연구 Vol.0 No.42

          This essay surveys the evolution of modern British history in terms of integration and conflict. The structural condition of British history was the regional/national integration and the formation of a single polity that took place in 1707 and 1800 respectively. While this structure persisted, various and complex phases of integration and conflict accompanied in the fields of constitution, politics, economy, class, gender, religion, culture, identity, empire, immigration and the relation with Continental Europe. Compared to other European states, Britain generally and relatively succeeded in achieving national integration. The state was a key agent in this integration. Especially, nineteenth-century Britain was a leading or exemplary state in the spheres of parliamentary politics, industrialization and empire, which was simultaneously a result and a cause of this successful integration. Unlike other European countries where revolutions and rebellions were frequent, Britain could strengthen integration and regulate conflict due to the flexibility of its system. However, this integration was not complete, as the partition and independence of Ireland, among other things, demonstrated in the twentieth century. Further, aspects of conflict appeared more remarkable than that of integr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The current chaotic Brexit phenomenon can be regarded not only as a reflection of domestic conflicts but a case that Britain plays a main conflicting role on the level of European integration. 이 글은 통합과 갈등 개념을 중심으로 영국 근대사의 전개 과정을 개관하였다. 1707년과 1800년의 두 차례 지리적·민족적 통합과 단일 정치체의 형성은 영국사의 구조적 조건이었다. 이 구조가 지속하면서 헌정, 정치, 경제, 계급, 젠더, 종교, 문화, 정체성, 제국, 이민, 유럽과의 관계 차원에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통합과 갈등이 수반되었다. 18세기 이래 300년 동안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성공적인 국민 통합을 이루었다. 국가는 이 통합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세기에 영국이 의회정치, 산업화, 제국 경영 분야에서 선도적이거나 모범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은 이 성공적인 통합의 결과이면서 또한 원인이기도 했다. 혁명과 반란이 빈번했던 대륙의 나라들과는 달리, 영국은 체제의 유연성 덕분에 통합을 강화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인 아일랜드의 분할과 독립이 보여주듯이 이 통합은 비완결적이었고, 제국이 해체된 20세기 말 이후 갈등의 양상은 통합보다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재 영국 정치의 현안인 브렉시트 문제는 국내 차원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자 유럽 차원의 통합에서 영국이 갈등의 주체가 된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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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20세기 말, 21세기 초 영국 보수당의 역사교육정책과 역사전쟁

          김중락 ( Joonglak Kim ) 영국사학회 2015 영국연구 Vol.34 No.-

          지난 25년 동안 영국은 두 번의 역사전쟁을 경험하였다. 둘 다 영국 보수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일어났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이 두 번의 역사 전쟁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마가렛 대처가 이끈 보수당은 세계사보다는 영국사, 그리고 개념과 이해보다는 사실위주의 지식을 중시하는 역사교육과정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유행한 학교역사 프로젝트(SHP)에서 역사교육의 미래를 발견한 이들은 정부의 계획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란가운데 정부가 임명한 역사교육과정 초안그룹은 1990년 4월에 발표된 최종안에서 놀랍게도 타협안을 제시해지만 사실보다는 이해를 중시하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정부와 대처 수상은 압력을 동원하여 최종안에 대해 수정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만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역사학자들과 HA 중심의 역사교사들은 정부의 압력에 대해 비판을 퍼부었다. 결국 1991년 3월에 인쇄된 1991년 역사교육과정은 초안그룹의 입장을 다른 것이었다. 보수당은 전쟁에서 진 것이다. 2차 역사전쟁은 2013년 데이비드 캐머런 수상이 지도하는 보수당이 역사교육과정을 개정하고자 하면서 일어났다. 교육부 장관 마이클 고브는 새로운 역사교육과정을 통해 영국문화를 백인의 단일 문화라고 규정짓고 역사는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의중이 담긴 초안이 2013년 2월에 발표되자 대부분의 역사전문직은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초안은 연대기 순으로 정치사 위주의 많은 영국사를 사실위주로 배워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사이먼 샤머, 리차드 에반스와 같은 영국 역사학자들뿐 아니라 HA가 행한 여론조사에서 대부분의 역사교사들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정부는 초안을 포기하였고 7월에 나타난 최종안은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사들이 요구하는 것을 크게 수용한 것이었다. 보수당이 일으킨 두 번의 역사전쟁은 모두 보수당의 실패로 끝이 났다. Britain experienced two history wars in the last 25 years. Both wars broke out when the Conservative Party took the power.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the history wars. The Conservative Party under the leadership of Margaret Thatcher attempted to introduce an obligatory history curriculum, which focused on the British history rather than world history, and on the fact-based knowledge rather than concept and understanding. The government`s plan was strongly opposed by those who preferred the School History Project (SHP) which was designed to make students engage in historical research in the same way as historians do. The first history war broke out. The draft curriculum, published by History Working Group(HWG) in the midst of the war, surprisingly took a side with the government critics by emphasizing on understanding rather than fact. The government strongly pressed the HWG to revise the final plan but without success. In March 1991 the official history national curriculum was published without any serious revision from the final report. The Conservative Party lost the war. The second history war broke out in 2013 when the ruling conservative party under the leadership of David Cameron attempted to revise the existing history curriculum. They wanted more British history taught in schools. The British history they asked was a story of white mono-culture. When the education minister Michael Gove`s draft was published in February 2013, most of the historical profession were shocked to discover a long and chronological list of political facts in English history. Many famous historians like Simon Schama and Richard Evans vehemently criticised Gove`s draft. In a opinion poll of the HA, most history teachers found against the draft. Eventually the government had to give up a draft. The final draft, published in July, was welcomed by most historians and history teachers as it accommodated almost every demand of them. The two history wars is over with defeats of the Conservative Party. One lesson they learned is that they cannot win a history war without support from the history prof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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