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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시무라 신지의 역사주의 인류학과 문화인류학적 일본학 : 러일전쟁에서 ‘대동아전쟁’까지

        전경수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0 일본비평 Vol.- No.2

        시대는 사람을 만든다. 어느 특정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그 시대를 만들었던 문화담당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니시무라 신지가 살았던 시기는 메이지-다이쇼-쇼와를 이어 가는 일본의 근 대화와 제국일본의 위상이 전쟁으로 이어졌던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친 것으로 생각되는 러일전쟁 참전으로부터 대동아전쟁이 격해지던 시기에 그는 전쟁선 동의 데마고그로 변신하는 면모도 보였다. 그가 전쟁인류학이란 분야를 언급한 적도 없지만, 그의 인류학은 사실상 제국일본의 전쟁이라는 구도와 별개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쟁 기를 살았던 한 인류학자의 행로로서 니시무라 신지의 학문적 역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 시무라에 대한 나의 평가 작업은 사실상 일본인류학사라는 틀에서 시작된 일부분이다. 전체적 인 틀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작업이기 때문에, 앞으로 진행되는 다른 학자들의 작업들 과 비교선상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부분들이 남아 있다. 말리노브스키와 레드클리프-브라운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사회인류학이 기능주의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을 즈음, 역사적 문헌의 축적이 오래된 일본에서 시도했던 인류학의 토착화는 역 사주의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싶다. 진화론의 인류학을 학습했던 쓰보이(坪井)가 일본인류학을 언급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고문헌들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고문헌의 자료들을 토속학적 자료의 해석에 원용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인 도리이(鳥居龍藏)와 이노(伊 能嘉矩) 등도 의심의 여지없이 고문헌들을 중요한 자료로서 구사함으로서 일본인류학의 새로 운 방법론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을 가장 과감하게 심도있게 구사한 사람이 니시무라 신지라고 생각한다. 전파론을 습득하면서 인류학을 전개했던 니시무라는 산적한 고 문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문화의 전파를 설명하기 위한 자료들을 발굴하였다. 기능 주의가 횡행하던 1920년대 세계인류학계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니시무라의 입장은 역사 주의 방법론이라고 명명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다만 그가 역사적 자료의 채택과 분석에 대해서 명시적인 방법상의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그는 행동으로서 역사주의를 실천하였던 인류학자였다. 그러한 노력을 우리는 토착화의 시도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간판교수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학으로 시작하여, 신문과 잡지의 편집, 그리고 인류학, 일본사, 일본학으로 귀결된 메이지-다이쇼-쇼와의 학계를 잇는 대표적인 인류 학자였다. 니시무라 신지는 쓰보이(坪井正五郞)의 총합인류학의 내용을 승계하려고 노력한 사 례이기도 하며, 도리이 류조의 스타일과 지극히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도리 이는 동아시아인류학으로 자리를 잡았고, 니시무라 신지는 일본학으로 귀결되었다. 고대선박 과 고대경제에 대한 그의 문화인류학적 업적은 앞으로도 재조명되어야 할 여지를 충분히 남기 고 있고, 그러한 재조명이 일본인류학의 학문사와 학설사를 구축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학문이 ‘국가학’으로 종속될 때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사례가 니시무라의 경우다. 쇼와 말기 대 동아전쟁의 대표적인 옹호론자였던 그의 입장은 “공존공영”, “사해동포”, “광역문화권” 등의 레토릭으로 포장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데마고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해 온 문화인류학자 니 시무라 신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의 심도있는 분석을 기다리고 있다. 말기 니시무라의 전쟁 인류학이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던 문화인류학적 업적을 매몰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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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을 찾아가는 여정 - 일본의 중국 인식과 중국학

        양일모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2 일본비평 Vol.- No.6

        21세기에 들어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 중 국을 바라보면서, 일본은 중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때로는 여전히 일본보다 뒤처진 혼 돈의 세계로 보기도 한다. 일본의 중국 인식이란 일본의 독자적 사유과정이라기보다 는 일본과 중국 상호간의 조건에 의해 변화하는 상관적 함수이다. 그 조건이란 근대 민 족국가 건설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가속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야기된 동아시아질서의 패권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일본에서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관찰과 연구에서는 실체를 파악하는 것보다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념의 문제가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중국을 바라 보는 시선과 인식, 그리고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론이나 민간에서 나타 나는 반중과 친중, 혐오감와 친밀감 등과 같은 평가는 인식상의 표면적인 속성에 불과 할 뿐이다. 인식이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에서 야기되는 복잡한 관계이며, 표피 적 속성으로 인식의 문제를 다루게 되면 그러한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뿐이다. 따 라서 인식의 문제는 표면적인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인식 주체의 시선과 인식 대상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인식 주체의 시선을 검토하는 일은 중국을 바라보는 시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따 져보는 작업이며, 반성적 사유 속에서 전개되는 학적인 탐구에 속한다. 고대 일본의 한 학(漢學)에서 시작하여, 메이지 시대의 지나학, 전후의 중국학 혹은 중국 연구는 중국 이라는 대상의 실상을 알려는 노력이면서, 한편으로는 ‘왜 중국을 말하는가’라는 인식 주체의 자기반성을 요청하는 고뇌에 찬 작업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글은 전후 일본 중 국학의 성립과 전개 과정 속에서 일본이라는 인식 주체의 시선상의 변화를 보여 주는 텍스트를 거시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나아가 일본의 중국학이 중국을 대상으로서, 한 편으로는 방법으로서, 혹은 사상과제로서 설정하는 과정을 밟아 가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일본 특히 지식인들의 반성적 사유와 사상과제의 기획이 역사와 현실의 역학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From economic and military perspectives, China is now emerging as leading power on the international political stage, but some of the Japanese critics still consider it as a mere military threat or even a country of chaos. This Japanese view of China can not be regarded as belonging to the independent thought process on its own. Rather, it is kind of a correlated function which is changing with the two countries’s mutual conditions. And the nature of the mutual conditions has close connection with the issues over the hegemony in the East Asian international world order, which appeared amid the building of modern nation-state and the rising of capitalistic world system. More prominent in the Japanese observation and research on China are the elements of its viewpoint and idea than the grasping of the actual conditions of China; it is actually a problem concerning Japanese perspective on China and its awareness and imagination. Accordingly, some descriptions like anti- or pro-China(dislike or intimacy) is only superficial aspects of Japanese perception of China. Perception is a complex relation between the perceiver and the perceived, and depending on superficial aspects is apt to simplify the relation. It is necessary for perception to take into consideration the perceiver’s viewpoint and the change of the perceived beyond superficiality. Examining the perceiver’s viewpoint should include inquiring into where the viewpoint on China stands in time, and it should belong to scientific interrogation in a reflective vein. Researches concerning the study of the Chinese Classics in ancient Japan, Sinology in the Meiji period and the China study before and after the war were only attempts to grasp the actual conditions of China and endeavor full of agony to demand the selfreflection of the perceiver; ‘Why we the Japanese talk of China?’. The present essay analyzes in broad perspective those texts which show the changing viewpoint of the perceiver, Japan, in the midst of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China study in Japan before and after the war. Furthermore, it suggests that China study confronts China as object and method of study on the one hand and task of thought on the other, and that Japanese intellectuals’ reflective thought and their setting-up of task of thought are changing amid the dynamic relation of history and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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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토코모리, 일본 밖을 떠도는 젊은이들 : 시대의 폐색으로부터 탈출, 혹은 신자유주의의 희생양?

        권숙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1 일본비평 Vol.- No.5

        이 글에서는 현재 일본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토코모리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고찰한다. 소토코모리는 일본 밖, 특히 ‘아시아’로 나가 은둔(“진성 소토코모리”)하거나 장기간 아시아 각지를 떠도는 일본의 젊은이들(“침몰형 배낭여행 자”)을 지칭한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일본의 주류 사회, 혹은 규범화된 삶의 방식에 적 응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거부한 젊은이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본의 주류 사회란 학 력사회, 기업사회, 노동자 윤리로 짜인 전후 일본의 사회시스템을 지칭한다. 좀더 구체 적으로 살펴보면 소토코모리가 되는 배경에는 청년기 이행에 실패하거나 경쟁에서 낙 오한 사람들의 자폐적 도피, 방황하는 청춘의 자아 찾기, 일본적 모더니티가 초래한 폐 색, 신자유주의적 고용 구조의 확산, 일본사회의 관계적 특수성 등 스펙트럼이 다양하 다. 물론 이들은 서로 겹치며 일부 일본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아시아를 찾게 했을 것이 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젊은이들이 향하는 곳이 ‘아시아’란 점이다. 이때 말하는 ‘아시 아’는 근대화가 덜 되었고 분위기가 느슨한 동남아시아의 도시들이며, ‘아시아’에 일본 이 포함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일본적 모더니티의 안티테제로 설정된 ‘아시아’에서 치 유와 구원을 구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태도에서는 분명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읽히지 만, 소토코모리의 아시아 지향이 내포하고 있는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의 가능성 또한 명백하다. 요컨대 90년대 이후 침몰형 배낭여행자의 등장과 최근 소토코모리의 출현은 한편으로는 불황과 구조조정 속에 일본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안과 좌절에 덧붙여 전지 구화가 일상이 되어 버린 고도 현대가 개인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성찰적 자아기획의 압력, 나아가 동아시아의 압축적 모더니티가 초래한 혼돈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reviews and explores the group of young Japanese people who are referred to as ‘sotokomori’. Sotokomori are the young Japanese who migrate out of Japan into ‘Asian’ cities in oder to lead an idle and secluded life (“genuine sotokomori”), or those who wander about Asian countries for an extended period of time (“sunken backpackers”). Whether they are ‘genuine sotokomori’ or ‘sunken backpackers’, sotokomori are the people who either rejected or could not adjust to the way of life that has been established as ‘normal’ in the post-war Japanese society. There are several social and personal backgrounds for them to become sotokomori; failure to bridge oneself from school to work environments, falling behind in competition, the quest for self-identity, suffocation from Japanese modernity, expanding neoliberal employment structure, and stress from personal relationships. What is interesting about sotokomori movement is the fact that their destinations are within ‘Asia’, especially the towns and cities of Southeast Asian countries that are less modernized and more ‘relaxed’ in the atmosphere than Japan. Asia does not include Japan by definition of this context. There is a sense of orientalism among those young Japanese people who head out to the Asian cities in search of emotional healing and psychological salvations from the Japanese society, for these ‘Asian cities’ supposedly symbolize the antithesis of Japan’s modernity. At the same time, the emergence of ‘sunken backpackers’ since the 1990s and the recent rise in the number of sotokomori can be best understood as the epitome of their anxiety and frustrations toward Japan’s prolonged economic recession and industrial restructuring, which evidently have created highly-elevated pressure for reflexive project of self-making as well as the chaos caused by the compressed Japanese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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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의 ‘전후’와 재일조선인관 - 미군 점령당국에 보낸 편지들에 나타난 일본 사회의 여론

        정용욱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0 일본비평 Vol.- No.3

        일본인들은 미군 점령기에 점령당국과 맥아더 장군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점령 당국은 이 편지들을 분석하거나, 일본인들 사이에 교환된 편지를 검열했고, 그것들을 일본 사회의 여론 동향을 파악하는 자료원으로 활용하거나 점령정책에 대한 일본인들 의 반응을 고찰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대체로 일본인들의 편지는 식량난, 귀환 등 개 인들의 일신상의 이해관계를 반영했지만 천황제 폐지, 전후개혁, 전범재판 등 당시의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제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패전 직후 일본인들이 맥아더 장군과 점령당국에 보낸 편지들은 그 시기 일본인들의 생활세계와 생활감정을 잘 드러낸다. 이 글의 목표는 일본인의 보통사람들이 보고 겪 은 전후 일본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고, 또 일본인들은 그것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 펴보는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의 편지에 나타난 전후개혁, 전쟁책임, 재일조선인에 대 한 인식과 태도를 분석하였다. 점령당국의 주도로 수행된 이른바 전후개혁은 상징천황제의 확립, 대의민주주의 제도 의 수립 등 전후 일본 정치구조의 골격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를 환영하거나 수용했다. 하지만 편지에 의하면 보통의 일본인들이 일상 생 활에서 접하는 개혁과 민주화의 실상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매우 높았고, 그에 대한 비 판도 신랄했다. 특히 통치기구의 말단과 지방 사회에서 개혁과 민주화에 대한 반응은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의견이 많았고, ‘특권계급’의 온존을 강하게 비판했다. 개혁과 민주화가 제도의 수립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운영주체의 변화를 포함하여 운영 의 실상이 보다 중요한 평가기준이라고 할 때 편지에 나타난 이러한 반응은 전후개혁 자체에 대한 재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쟁책임 문제를 언급한 편지들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점령 직후만 해도 전범 고발 편지가 많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범 혐의를 부인하거나 무죄를 주장하는 편 지들이 많아지고 심지어 전범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편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미국의 주도로 천황이 면책되는 등 전범재판이 일본과 미국의 합작에 의한 정치재판 의 성격을 띠게 됨으로써 전쟁책임이 희석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고, 전범 재판이 A급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재판으로 옮아가면서 전쟁책임이 부정될 수 있 는 사회적 여건이 확대되었다. 전쟁책임과 관련해 국민 사이에 지배자는 가해자, 국민 은 피해자라는 ‘피해자론’이 확산되었고, 전쟁책임의 방기는 지배층의 타민족 침략과 식민지화의 가담자로서 국민의 책임에 대한 자각도 봉쇄했다. 일본인들의 편지에서 재일조선인은 식량난의 원인,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골치 덩어리, 정치적 불안을 일으키는 빨갱이로 인식되었다. 또 그러한 인식의 밑바닥에서 전전부터 존재하던 인종적·민족적 편견이 여전히 작동했으며, 한반도 분단, 냉전의 도 래와 같은 전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가 그러한 편견에다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당 시 일본 사회의 재일조선인관을 그것이 형성되는 정치·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배경까 지 시야에 넣고 보면 재일조선인은 전후 일본 사회가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식민지 배의 상징이었다기보다 일본 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은폐하거나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기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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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칼을 동시에 사랑하는 민족 ― 윤치호가 본 일본

        박지향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0 일본비평 Vol.- No.3

        친일파로 분류되는 윤치호(1865~1945)가 일본에 대하여 가졌던 정서는 흠모와 증오 가 교차하는 복잡한 것이었다. 이 글은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일기를 토대로 그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일본인의 성정과 식민정책 에 대한 평가를 분석한 후, 태평양전쟁기 협력행위의 근거를 추적함으로써 그의 대일 관을 정리해 본다. 윤치호는 한마디로 일본인을 대단히 편협하고 왜소하며 힘에만 의지하려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감탄할 만한 일본인의 장점은 상무정신, 즉 전사적 정신이다. 윤치 호가 볼 때 “천황으로부터 오두막의 가장 가난한 노무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 사 람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상이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싸우는 정신이다. 반면, 조선왕 조는 500년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전사적 정신을 뿌리째 뽑아버림으로 써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 따 전사적 정신을 되 찾기를 바랐고 그것이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 지원병제에 찬성한 하나의 이유였다. 윤치호에게 일본은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동시에 보여 준 반면교사였다. 일본인들 은 칼과 꽃을 동시에 사랑한, 이해하기 힘든 민족이었다. 일본의 전사적 정신은 일본을 식민지로 전락시키지 않고 강력한 근대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지 만 동시에 일본을 나락에 떨어뜨렸다. 윤치호는 이 모순적인 일본이라는 실체에 직면 하여 그것을 헤쳐 나가려 노력했지만 좌절하고 만, 식민지사회의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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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의 일본 모방과 추월에 관한 시론

        김영욱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0 일본비평 Vol.- No.3

        이 글은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의 용일(用日)에 관한 것이다. 이병철은 삼성의 성장 과 정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을 통해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 등 배움의 터 전으로 활용했다. 더불어 일본은 모방의 대상이었다. 부족한 자본과 기술, 경영방식 을 일본과의 제휴를 통해 보완하면서 일본처럼 되려고 노력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의 의존도가 매우 컸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병철은 일본을 극복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을 모방하면서 자본과 기술력이 어느 정도 축적된 1970년대 후반부터 이병철은 기술 및 자본 제휴선을 미국과 유럽 쪽으로 돌렸다. 더 불어 이병철은 일본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은 생 전에 극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건희에 와서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이병철의 일본인식은 식민지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이중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남긴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피해의식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설령 이병철의 일본인식 이 매우 부정적이었다고 해도 이것이 이병철의 용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 으로 짐작된다. 기업경영은 인식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경제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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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개화’ 선망과 대일 적대심 사이에서 : 신채호의 일본관

        박노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0 일본비평 Vol.- No.3

        본 논문은 신채호의 일본관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신채호는 통념적으로 ‘항일운 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본관은 꼭 일본에 대한 적대심만을 내포한 것은 아니 었다. 개화기의 신채호는 ‘개화선배’로서의 일본의 ‘주체적 외부 문명 수용’ 등을 적지 않게 흠모하는 동시에 한국인들의 ‘외부 문명 모방 지향’, 그리고 전근대적 한국 사회 의 “노예성” 등을 부정시했다. 이 부분에 대한 신채호의 시각은, 그 의도는 비록 신속 한 ‘근대화’에 대한 열망에 기반했지만 그 형태는 사실상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정체성론”, “타율성론”과 일맥상통했다. 양쪽의 정치적 지향은 정반대였지만 사 회, 문화 측면에서 양쪽은 근대지상주의 영향권에 속했다. 1920년대의 무정부주의자 신채호는 대체로 더 이상 일본을 ‘모델’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비하 인식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와 동시에 고대사학자 로서의 신채호는 일본을 “백제의 제자”, 백제문화의 일종의 “연장”으로 생각하면서 이 를 한국인의 ‘민족적 자랑’으로 인식했는데, 이와 같은 시각은 남북한 사학에서 그대로 계승, 발전됐다. 고대 일본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과 관련된 그의 평가는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백제와 일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 자체는 당시 일본 사학의 영향이 라고도 볼 수 있다. 다소 균형을 잃은 신채호 식의 일본관은 이제 남한 사학에서 상당 부분 극복됐지만, 일본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최근 일각의 평가에서도 신채호와 같은 근대지상주의의 잔영(殘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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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잔류 일본인’을 둘러싼 포섭과 저항 : ‘본국 귀국자’라는 다중적 아이덴티티의 가능성

        현무암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3 일본비평 Vol.- No.8

        1972년의 중일국교 정상화 이후, 특히 1980년에 들어서 전후에 중국으로부터 귀환하지 못했던 많 은 ‘잔류 일본인’이 귀국하게 되었다. 이들이 일본 패전 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국인의 가정에 들어가게 된 이른바 ‘잔류부인’ 및 ‘잔류고아’다. 하지만 간신히 조국의 품에 안 기게 되었어도 ‘중국잔류 일본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냉대와 사회적인 차별 속에서 이들은 사회 적인 마이너리티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지원과 존재의 정당성을 위 해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싸워나가야 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여느 전쟁 피해에 대 한 소송에서처럼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쟁피해 수인론(受忍論)’을 가지고 부정하면서도 실 질적으로는 ‘특별한 조치’를 통해 구원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수인론’과 전쟁 책임론 사이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중국잔류 일본인’을 통해 기민과 이산이라는 역사성이 투영되는 이들에 대한 일본의 정책과 제도, 그리고 일본 사회 속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 및 전후 역사인식 속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본다 Following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Japan in 1972, many of Japanese who remained in China after WWII because they could not be repatriated during the postwar period returned to their homeland, especially in the 1980s. These people, known as “Japanese orphans” or “Japanese women remaining in China,” are people that lived on along with the Chinese people in order to survive the aftermaths of Japan’s defeat. They were able to return to their motherland with difficulty, however, they were treated not as Japanese but as a foreigner. Therefore, as a minority, they had to struggle to receive reparation from the nation, which required having to prove their residency in Japan. In the end, the Japanese government denied the responsibilities of the state based on the ‘war damage endurance theory.’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government implemented the ‘special policy’ to support them. This paper examines Japan’s policies toward the Japanese who remained in China after WWII, which stand on the border between the ‘war damage endurance theory’ and the ideology of war responsibility. This paper considers the position of these people as well as the meaning that they hold in the context of ‘historical consciousness’ during postwar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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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의 일본 이주에 관한 시론 : 외국인 수용을 둘러싼 국가와 기업

        권향숙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3 일본비평 Vol.- No.8

        이 글은 조선족의 일본행을 일본의 유학생 및 외국인 노동자 수입정책과 결부시켜 살펴봄으로써 그 과정에 담긴 다양한 함의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하여 첫째, 일본에 있는 조선족의 현황을 간략하게 소개하였으며, 조선족을 ‘보이지 않는 소수자’라는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둘째, 1980년대 전반부터 진행된 일본으로의 이주를 일본의 유학생 및 외국인 노동자 수입정책과 관련 시켜 고찰하며 셋째, 그 배경에 담긴 함의를 좇는다. 결론적으로 조선족의 도일과정은 일본의 유학 생 및 외국인 노동자 수입과 관련된 법제도와 정책, 다시 말해 ‘유학생10 만 명 계획’의 실시, ‘개정 입국관리법’의 시행, 신원보증인제도의 폐지 등 일련의 정책과 그에 따른 취학생 및 비합법적 외 국인 노동자들의 유입과 전문직, 기술 분야의 외국인 노동자 수입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여 기에는 지금까지의 이민 연구 이론들이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국가와 기업의 역할이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This paper locates the problem of the Joseon-jok (the so-called Korean-Chinese)’s immigration to Japan in the context of Japan’s acceptance of international students and foreign workers, and considers the implications thereof. Firstly, it roughly describes the current state of the Joseon-jok living in Japan, defining them as the ‘Invisible Minorities.’ Secondly, it considers the Joseon-jok’s immigration to Japan, which started in the early 1980s in association with Japan’s acceptance of international students and foreign workers. Lastly, it looks into the policies that worked in the background. In conclusion, this paper argues that the Joseonjok’s immigration to Japan is deeply tied to the Japanese legal system and its policies involving Japan’s acceptance of international students and foreign workers. This means that the Joseonjok ’s immigration to Japan must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new set of policies of the time, including the execution of ‘the 100,000 international student’ plan, the enforcement of the ‘Revision Immigration Control Law,’ the abolition of the personal reference system, and other policies related to the inflow of international students and illegal foreign workers, including the acceptance of foreign workers in either professional or technical fields. For now, this paper points out that the roles of the nation-state and corporate enterprises, which have not yet been thought of as a factor in the theories of immigrant studies, were important in the Joseon-jok’s immigration to Japan.

      • KCI등재

        일본 재난영화의 내셔널리즘적 변용 : 「고지라」와 「일본침몰」을 중심으로

        김려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2 일본비평 Vol.- No.7

        이 글에서는 일본영화가 재해를 어떻게 포착/표상해 왔는가에 주목하여 재난영화의 내셔널리즘적 변용을 「고지라」 시리즈와 「일본 침몰」(1973, 2006), 「일본 이외 모두 침몰」(2006)을 중심으로 논한다. 특히 이 영화들은 현실에서 발생한 재해를 반영하면서 일본인의 근원적이며 일상적인 공포를 표상한다. 전후 일본의 괴수영화에는 표면화되 지 않은 경우라 해도 핵전쟁이라는 잠재적인 재앙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예를 들면 1954년 제5후쿠류호 사건을 반영한 「고지라」(1954)는 일본인에게 “생태학적 관점의 반핵영화”로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괴수가 퇴치시켜도 또 돌아온다는 것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일본인의 잠재적 공포가 그만큼 뿌리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인 플레이션과 오일쇼크로 일본경제가 위기에 처한 70년대는 일본영화계의 스튜디오 시 스템이 몰락한 시기와 겹친다. 「일본 침몰」(1973)은 ‘침몰’이라는 비유를 통해 전후 체 제 아래 성립된 기존의 일본사회가 붕괴할 것으로 예견한 고마쓰 사쿄의 전설적인 베 스트셀러 SF를 원작으로 한다. 그러나 원작의 비판 의식은 영토와 민족을 본질적인 것 으로 상정함으로써 내셔널리즘의 회로에 갇히게 되고 뒤에 발표된 영화, 만화 버전 등 에서 원작은 위기 극복의 민족서사로 변형되고 만다. 「일본 침몰」은 일본인은 다른 민 족과 결정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로 서구화된 신세 대를 내셔널리즘의 회로 속에 포섭한다. 2006년에 리메이크된 「일본 침몰」과 패러디 「일본 이외 전부 침몰」(2006)은 일본의 우경화 현상과 맞물려 더 자폐적이며 적대적인 내셔널리즘을 보여 준다. 이들 영화에는 주변국가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에 대한 ‘불신’과 양극화 사회에 대한 ‘불안’이 뒤얽혀 있다. 3・11 동일본대지진의 1주기가 지난 시점에서 그것을 재현한 영화가 생산되는 가운데 이 국가적 위기가 일본영화를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지 주목된다. In this paper, I examine nationalistic changes of Japanese disaster movies, Godzilla(1954), Japan Sinks(1973, 2006), and The World Sinks Except Japan(2006) focusing on how Japanese cinema has captured and represented disasters. These movies especially represent Japanese fundamental and ordinary fear reflecting actual disasters. Japanese monster film is involved with fear for the potential catastrophe, a nuclear war even if it does not come to surface. For example, Godzilla reflecting the Fifth Hukuryumaru incident of 1954, an incident of radiation exposure, is accepted as “anti-nuclear movie in the ecologic point of view.” However, the impossible eradication of Godzilla and its return mean that Japanese potential fear is deep-rooted under American nuclear umbrella. On the other hand, inflation and the first oil shock caused the economic crisis in 1970’s and it led to the crash of studio system. Japan Sinks is based on the bestselling science fiction written by Sakyo Komatsu, who predicted existing Japanese society established under the postwar system would be collapsed, by using “sinking” as a metaphor. However, by positing that the land and the people have the intrinsic value, the critical consciousness of the original is stuck in the nationalistic circuit. In the film version and comic version, the original is changed into an ethnic narrative of how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Japan Sinks turns westernized young people over to the nationalistic circuit through the logic that the Japanese can overcome whatever the crisis is because the Japanese is crucially different from other people. Remake version of Japan Sinks and The World Sinks Except Japan based on a parody of the original fiction, made in 2006, show more autistic and hostile nationalism. In the movies, ‘fear’ for being isolated from its neighbouring states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 deep ‘distrust’ of the government, and ‘anxiety’ over the polarized society are interwoven. Since the first year anniversary of 3.11 the great east Japanese earthquake has passed by, we already have several films which reflect it. Now it is time to think over how this national crisis has changed and will change Japanese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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