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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후반 부산지역 학생운동과 부마항쟁

        김선미(Kim, Sun-Mi)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8 한국민족문화 Vol.67 No.-

        1970년대 후반 부산에서는 진보적 종교계를 필두로, 민주세력의 결집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와 연동하여 1978년 부산대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시위 기도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학생운동의 기반을 확충하는 데 기여했다. 1979년 부산대에서는 조직적 학생운동이 등장했고, 비판적 사회인식이 확산되었으며, 노동야학을 통해 학생운동의 외연이 확장되었다. 그 결과 소위 ‘학생운동권’이 형성되었던 바, 이는 부산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1979년 부산대의 시위는 전개되었다. 부마항쟁을 촉발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시위의 발단은 최초의 부산대 운동권 정책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2학기 개학을 전후한 시기에 개최된 이 회의에서 이진걸 그룹의 계획이 최초로 부산대 ‘학생운동권’에 공론화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부산대 학생운동권은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시위를 준비했지만, 경험부족으로 인한 실책으로 시위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 실패로 인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이미 학내에 만연한 비판적 정서와 맞물려 가눌 수 없는 분노를 촉발했고, 이를 발판으로 예상에 없던 정광민이 등장하면서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학생운동권은 정광민과 결합했고, 마침내 5천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유신 반대 시위가 폭발한 것이다. In the late 1970s, Busan showed a prominent democratic coalition with the leading religious circles. In this connection, two attempts at the Pusan National University (PNU) in 1978 had contributed to the expansion of the foundation of the student movement, although unsuccessful. In 1979, at PNU, a systematic student movement emerged, a critical social awareness spread, as well as labor field studies expanded the scope of student movement. As a result, the so-called "student activist groups" formed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PNU. Based on this, the university staged a protest in 1979. The origin of the PNU protest started on October 16, 1979, when it started at the first the meeting of leaders in the PNU student movement. This is because Lee Jin-Geol group"s plan was first publicized to the BNU student activist groups at this meeting, which took place before and after the opening of the second semester. Since then, the BNU student activist groups had mobilized all their activists and fellows to stage protests, but due to mistakes caused by his inexperience, the protest had failed. However, the regrets and disappointment caused by the failure of the protests triggered anger that could not be tied together with critical emotions already in the PNU, and the protest came to a new stage with the emergence of the unexpected Jeong Gwang-Min. Now that the student movement has joined Chung Kwang-Min, it has finally exploded a massive protest against Yushin that involved more than 5,000 students.

      • 國立大學 敎職員의 報酬體系에 관한 硏究 : 釜山大學校 敎授 및 敎職員의 相對的 給與水準을 中心으로

        최종서 釜山大學校 經營 經濟 硏究所 1998 經營 經濟 硏究 Vol.17 No.1

        본 연구는 국립대학교 교직원들의 보수수준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내의 7개 국립대학에 재직중인 교수, 일반직 직원, 기능직 직원들의 1997년도 1년간의 보수지급액에 대한 자료를 설문조사의 방법으로 수집하여 비교분석하였다. 분석결과 대학간에는 보수수준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나타났고, 특히 부산대학교 교수의 평균보수수준은 비교대상이 된 7개 국립대학 중에서 최저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나라 교육공무원의 보수체계가 단일호봉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국공립대학의 교육공무원에 적용되는 보수규정은 일부 기성회계규정의 임의적 적용의 여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대동소이함을 감안할 때 본 연구의 결과는 부산대의 보수지급기준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부산대 교직원의 보수지급체계에 현저한 개선의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지방정부에 있어서 여성참여 실태와 확대방안 :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김인,류춘호 釜山大學校行政大學院地方行政硏究所 2002 地方과行政硏究 Vol.14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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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복원과 개발로 만들어지는 부산의 문화지형

        조정민(Cho, jung min),양흥숙(Yang, heung sook)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2 코기토 Vol.- No.72

        본 논문은 현재 부산 원도심에서 진행 중인 영도대교 복원과 롯데타운 조성에 주목하여, 복원과 개발의 배후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 이데올로기의 취사선택이 부산의 로컬리티 형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논한 것이다. 먼저, 영도대교 및 롯데타운(구 부산시청, 구 부산부청)의 역사적 사실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를 다시 재현하고 복원하고자 하는 ‘지금/ 여기’의 움직임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영도대교는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그 장소성과 서사가 국가사의 중심에 산입되지만, 시각적 표상에 있어서는 식민지시기의 ‘근대(도개교)’를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었다. 즉, 영도대교는 식민지의 기억을 절취한 채 한국전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장소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롯데타운은 이미지와 스펙터클의 소비 도시, 혹은 장소상실의 대표적인 예로 보이지만, 실상은 식민화된 장소성(부산부청, 부산 미나카이 백화점 등, 식민지 근대가 집합된 장소)을 계승하고 재현하고 있었다. 이처럼 양자에 내재된 일본, 혹은 식민지의 경험은 현재의 기억과 문화지형 변화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식민 이후의 부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도대교의 복원과 롯데타운의 개발이 부산의 새로운 문화지형 창조에 얼마나 의미 있게 작용할지 가늠하기란 쉽지않다. 그러나 타자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부산성’이 지금의 ‘부산성’에 녹아 있듯이, 오늘날에 진행 중인 지형변화 역시 훗날의 ‘부산성’을 만드는데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이 지역의 역사에서 추찰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산성’ 구성은 지금의 원도심 복원 과정에서 생긴 균열과 단절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느냐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In regard to Yeongdo Bridge being restored and Lotte Town being developed at present in the old downtown of Busan, this thesis aims to analyze the ideology working behind the restoration and development in a critical way, further discussing how the way of adopting the ideology is associated the formation of locality of Busan. To begin with, this study inquired into historical facts about Yeongdo Bridge and Lotte Town(the sites of old Busan City Hall), and based on the findings, this study attempted to make a critical approach to Movement of "Now and Here", inclined to reproduce and restore things in the past. Having been buil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Yeongdo Bridge became the center of Korean national history with its placeness and narrative while going through the Korean War, but in the visual representation, it ceaselessly reproduced "modernity (bascule bridge)" from the colonial period. In other words, the existence of Yeongdo Bridge is to secure its place identity while constantly arousing the memory about the Korean War with the memory of colonization excluded. On the other hand, Lotte Town seems to be one of the typical examples of a consuming city of images and spectacles or placelessness, but it actually reproduces and succeeds to the colonized placeness (a site where building of colonial modernity were concentrated, such as Busan Prefectorial Office and Minakai Department Store). In this way, experiences about Japan or colonization immanent in both the sites have constantly interfered in the change of the present memory and cultural topography, while dominating Busan after colonization. It is not easy to predict how meaningfully both the in-process restoration of Yeongdo Bridge and development of Lotte Town will work on the creation of a new cultural topography for Busan. However, as the previous "locality of Busan" is merged into the present "locality of Busan", the topographical change being made nowadays is more likely to contribute to creating the future "locality of Busan" as well, which will be another prediction for the history of this area. Consequently, it is within bounds to say that the composition of "locality of Busan" depends on how seriously we consider historical and cultural cracks and severances caused in the process of restoring the old downtown of Busan.

      • KCI등재

        식민자와 조선 - 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한국민족문화 Vol.49 No.-

        ‘식민자’ 또는 ‘풀뿌리 식민자’로 평가되는 재조일본인 오이케 츄스케는 1856년 쓰시마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대일무역에 종사하면서 친형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역 및 고리대업은 물론이고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며 조선의 출입구인 부산과 오이케여관을 통해 일본군부와 관계를 맺고 토지구매, 군수물자조달을 통해 자본을 확장했다. 개인사업과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오이케는 강고한 인적네트워크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기반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가 맺은 인적네트워크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적인 인사인 관료와 군인은 물론, 일본 본국의 재벌 및 경제인, 그리고 조선 또는 부산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등이었다. 부산에서 쌓은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오이케는 경제활동과 공직활동을 통해 ‘부산의 오이케’에서 ‘조선의 오이케’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개인경영의 11개 부문을 토대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동시에 부산 및 조선의 각종 회사와 조합의 설립과 경영에 뛰어들어 1929년 사망 때까지 부산 및 조선재계의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공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의소, 부협의회(도평의회), 학교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면서 향리인 쓰시마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이케는 ‘부산의 오이케’를 넘어 ‘조선의 오이케’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위치 지워졌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성장과 제국주의 내의 위상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공간, 특히 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기서 본국 일본인과 식민지 일본인 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독특한 위치도 드러난다. Considered as a "colonizer" or "Grassroots colonizer," Oike Chusuke, a Japanese colonial settler, was born in Tsushima in 1856 and moved to Busan in 1875 when he became 20. In Busan, he started to build his foundation by the assistance of his elder brother, engaging in trade with Japan. Like most Japanese people that made growth in Chosun, he conformed to the situations of the times including Japan"s invasion of Chosun as well as smuggling and loan sharking and accumulated capital by forming relations with the Japanese military through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and Oike Ryokan, purchasing land, and delivering war supplies. He established a solid human network based on his personal business and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further solidifying and expanding his foundation and position. His human network encompassed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soldiers, who were the core figures of imperial Japan, the financial cliques and businessmen of Japan, and Japanese and Chosun people residing in Chosun or Busan. Based on his human and material foundation, he evolved from "Oike of Busan" to "Oike of Chosun" through economic activities and public duties. He first managed his economic activities based on his 11 personal establishments and then got involved in the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all kinds of companies and associations in Busan and Chosun around the 1900s. He served the financial community of Busan and Chosun as an elder until 1929 when he passed away. He was also an active, central figure in the chamber of commerce(商業會議所), Pu-council(府協議會), and school corporation(學校組合), which were part of "public duties" during the Japanese rule. His activities of "public duties," in fact, expanded to Japan beyond Busan. In 1914, the Japanese colonial settlers lost their autonomous body after the abolition of the Georyumindanje(居留民團制). Once feeling a need for political activities in Japan in order to promote their stability and expand their foundation in colonized Chosun, they started to advance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Joining the flow, Oike was elected in his hometown Tsushima and finally advanced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which is why he was represented as "Oike of Chosun" beyond "Oike of Busan" and position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successful colonizers in Chosun. However, his growth in the colonized country and his status within imperial Japan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space of Chosun or more particularly Busan. Here, the differences between Japanese people from Japan and those from a colonized country become obvious along with their unique position. They faced their contradictory position between "colonizers" and "residents of colonized land" in reality through the Japanese rule, which is why the contradictions of imperialism also took place within the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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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로케이션 영화와 탈식민성의 로컬문화윤리

        최용성(Choi, Yong-Seong)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한국민족문화 Vol.47 No.-

        본 연구의 목적은 부산 로케이션 영화에 나타난 식민성을 비판하고 로컬문화윤리학적 성찰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부산 로케이션 영화들의 시대적 변화를 해방 이후의 1950?60?70년대 부산 로케이션 영화, 1980~90년대 부산 로케이션 영화, 2000년대 이후 부산 로케이션 영화로 구분하여 시대적 변화를 살펴보았다. 또한 2000년대 이후 부산 로케이션 영화들에 나타나는 식민성의 특징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고 탈식민화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영화의 지역성은 우선 관객과의 교감을 위해 필요하지만, 식민화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선 타자의 윤리와도 조우하는 로컬문화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를 찍는 주체의 위치성과 부산에서 촬영된 영화의 장소성을 진지하게 추궁하면서 부산이라는 장소에서 촬영된 영화가 어떻게 부산을 재현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런 질문을 통해 부산이 어떤 방식으로 식민화되고 있는지, 부재하는지, 제대로 표현되는지, 부재하지 않는지를 물음으로써, 탈식민주의의 문제와 함께 로컬문화윤리적 입장에서 부산 로케이션 영화를 성찰하고자 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tudy the cultural aspects of narrative and image of Busan movie in the context of locality. I especially wish to look this part through?hermenutical approach from 2000’th transitional aspects. So, this paper reviews the pictures of Busan in Korean movie and explains the relations, Pusan and Korean movie. I divide period, and study the picture and the influence of Pusan. And comment on the counterplan. Pusan is important in Korean movie as yet. But I think the move is not appear yet that reflects cultural aspects of Busan. After all, community narratives and images from the life histories that define us form local community shouldn’t be seperated from the aspect of locality. So, I will examine whether the local community narratives reveals meaningfully from the standpoint of locality through Busan Locatio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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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부산 시네리터러시 교육의 과제와 전망

        이아람찬 ( Lee Aramchan )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2012 아시아영화연구 Vol.5 No.2

        본 연구는 한국영화교육의 다양한 패러다임을 살펴보고, 세부적으로 부산 지역 영화교육의 현황과 전망을 다루고 있다. 초기 한국영화사에 서 부산은 여러 부분에서 언급되어 있다. 특히 1903년 부산 최초의 극 장인 행좌, 그리고 송정좌 등이 연이어서 세워졌고, 1904년 이 두 극장 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것과 1924년 국내 최초의 영화사 인조선 키네마 주식회사가 부산에 설립되어 영화제작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서, 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 부산국제단편영화제, 메이드인 부산독립영화제 등의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영화도시 부산의 진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부산의 영화·영상도시라는 특성화에 걸맞게 영화관련 각종 정부기관들이 부산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체계적인 영화·영상관련 산업이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를 주도적으로 진행 할 인적자원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영화·영상산업 관련 인적자원 은 기본적으로 시네리터러시(Cineliteracy)를 폭넓게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기술과 문화가 융합되어 창의력 및 기획력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영화·영상산업은 근본적으로 관련 인적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즉, 영화·영상산업에서는 인적자원의 확보가 영상관련 산업 발 전의 원동력이며, 경쟁력 제고의 시작이며, 그리고 지역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의 확보는 체계적인 영화교육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This study explores a various aspects of film education in South Korea, especially in Busan metropolitan city area. In Korean film history, Busan was mentioned many times regarding film industry. For instance, Haengjwa, the first theatre in Busan was opened in 1903 and subsequently Songjeongjwa was founded there in 1904. In addition, Joseon Kinema Corporation which was responsible for the many roles in Korean film industry as the first film company was established in 1924 in Busan. Recently, there are several international events such as Busan International Children`s Film Festival, Busan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Made in Busan Independent Film Festival, including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held successfully. Despite the remarkable growth in Busan film industry, it is said that Busan is needed to develop human resources for its industry. For this, Cineliteracy education is very important to educate many students who want to learn film. In other words, through a systematic filmeducation in Busan, the city can have the competitiveness of human resources in the film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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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정치의 위기와 지역민주주의

        나종만(Na, Jong-Ma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5 한국민족문화 Vol.56 No.-

        이 연구의 목적은 부산의 정치 현실을 분석해 그 문제점들을 밝혀내고, 그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통한 지역민주주의의 발전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방정치 및 관련 개념들(지방자치, 분권, 지방화 등)과 그 관계를 분명히 규정하고, 그에 근거해서 부산의 정치를 평가할 수 있는 분석틀을 제시해서, 그것으로 부산 지방정치의 현실과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그 분석 결과에 의하면 첫째, 부산의 정치는 지역주의에 의한 일당독점의 정당체제로 해서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태에 있으며, 이로 해서 정치적 대표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둘째, 부산의 정치는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분권의 지체, 수도권 집중에 의한 불균형발전 및 민주적 지방화의 한계로 해서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치적 선택과 지역민주주의 발전에 구조적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부산 지방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정당정치의 활성화임을 강조했다.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행위자인 각 정당들의, 중앙당 차원의 전면적 혁신과 당내민주화가 필요하다. 이 전면적 혁신과 당내민주화에 입각해서 민주적 분권정당, 민주적 경선 등과 같은 정당 혁신이 추진되고, 중선거구제 도입, 비례대표 비율의 확대 등과 같은 제도적 개혁이 병행될 때, 부산에서도 상이한 이념과 정책을 가진 정당 간의 경쟁적 정당체제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이러한 정당정치의 활성화는 정당의 지역시민사회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더 나아가 부산 시민의 참여를 촉발시킬 것이다. 둘째, 정당정치와 시민참여의 활성화에 근거한 지역민주주의 동력을 통해 분권, 균형발전 및 민주적 지방화를 실현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부산의 지역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화해가야 할 것이다. This research is designed to analyze the reality of Busan politics, to identify the problems and to find the way of solution by the vitalization of party politics and the development of regional democracy. For this study, this research definds the local politics, the related concepts(local autonomy, decentralization, localization and so on) and the relations and as suggesting the framework for analysis being based on it, tries to analyze the reality of Busan politics and the problems. As a result of analysis, firstly, politics disappeared on account of party system of one-party monopoly by regionalism in local politics of Busan. Secondly, political choice for the improvement of the quality of life is structurally restricted by delayed decentralization on the part of centralism, unbalanced development on the part of centralization of the capital region and the limitation of democratic localization. This research first of all emphasizes the vitalization of party politics for overcoming the crisis of Busan politics. For the vitalization of party politics innovation, overall innovation and the intraparty democracy of level of each central party as the primary actor has been needed. The vitalization of competitive party system among parties that have the different ideologies and policies, can be worked in Busan when by overall innovation and the intraparty democracy, innovations such as democratic decentralization party, democratic election and so on is driven and institutional innovations such as introduction of the medium electorate system, expansion of ratio of proportional representation etc. are paired with them. The vitalization of party politics is able to communicate with local civil society, and furthermore spark the participation of Busan citizen. Secondly by the local democratic power grounding on party politics and the vitalization of the participation of citizen, decentralization, balanced development, democratic localization should be realized, and furthermore local democracy should be more consoli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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