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인기 검색어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후보

      1950년대 양악작곡가들이 상상한 국민음악: ‘국민’과 ‘민족’ 사이에서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8

      이 글은 1950년대의 음악계에 대한 고찰이다. 해방 후 일제잔재의 청산과 민족국가 수립을 염원하며 제기된 민족음악론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냉전의 논리로 변화하고 있었다. 분단 후 남한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국민가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민가요의 내용은 국민국가의 건설과정에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9년 공보처는 박태현, 윤용하, 이흥렬 등 우익 입장의 작곡가들이 쓴 국민가요를 당선시키고 학교 및 군대에 보급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창된 국민음악은 일제강점기 국민개창운동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쟁은 과거 제국에 봉사하던 음악가들이 남한의 악단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시체제하 만주에서 제국의 후생음악에 봉사하던 이흥렬, 박태현, 김동진 등은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 문화반원으로 활약하며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문화선전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피난지 부산에서는 ‘전시작곡가협회’가 결성되어 전시(戰時)동요작곡과 가극 등을 창작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목표는 군당국과 긴밀히 결합하여 전선에서 일어난 일을 음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전시작곡가협회 작곡가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민개창운동추진회에서 활동하며 재즈와 왜색 유행가 대신 국민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선다. 국민가요 작곡가들은 멸공과 북진을 강조했던 정권의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남한 악단의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주요작곡가들에 의한 국민가요 창작은 이후 남한의 악단에서 전개될 이분법적 분단음악사의 시작이 된다. 특히, 우익진영 음악가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많아 정권의 구미에 맞았다. 이들에 의해 창작된 국민음악은 호전적 성격의 노래가 많았는데 이와 같은 편중된 정치성이 순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개창운동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이와 같은 이분법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운영, 윤이상의 이후의 삶은 1950년대 그들의 활동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민족음악을 위한 열망은 1980년대의 민족음악론으로 다시 제기되었고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해 ‘민족’과 ‘음악’을 연결하고 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당대의 시대정신에 민감했던 선배 음악가들의 고뇌와 실천이 과거의 역사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된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음악인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will be an attempt to examine the music scene of the 1950s in Korea, the era of anti-Communism and the Cold War. A discourse on national music that was raised during the period of liberation led to the music history of the Cold War in the course of division and the Korean war. The attempt to attain national Integration by achieving the national state was taking place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1948, when ‘Kukmingayo(songs for the nation)’ were created and disseminated. These songs called ‘Kukmingayo’ or ‘Aegukgayo(songs for patriotism)’ were produced by recycling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and national music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urthermore, a song of the national memorial day was made by the government and music was attempted to emphasize nation than ethnic over the people, such as anti-communism and patriotism. The Korean war, meanwhile, was a golden opportunity for musicians who served the Japanese empire to settle down reliably in the South Korean music scene. Lee Heung-ryul, Park Tae-hyun and Kim Dong-jin began to play a more active role in cultural propaganda for the North Korean regime. On the other hand, in Busa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was formed to create wartime children’s song and lyric plays. Besides, they were combined closely with the military authorities to produce music. their goal has been embodied in the formation of the ‘Military Composers Association.’ Composers of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have been active in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since the mid-1950s. Also, they have been taken the lead in distributing national songs that could achieve national unity instead of jazz and Japanese-style songs. However, such activities were the beginning of a dichotomous divided Korean music history based on the premise of anti-communism and division. These activities were led by right-wing composers who faithfully followed the positions of the then regime. In particular, the combination of anti-communism, northern unification and pro-Americanism under Rhee's government was reflected in the creation of musicians. Christian musicians, especially those who defect from North Korea, were perfectly matched by the regime and were hiding their militant and divided music history under the slogan of purism. Nevertheless, not all musicians who participated in this dichotomy agreed. The later lives of Na Un-young and Yun I-sang, who have acted i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and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could indicate the fact that their activities in the 1950s were reflected in refraction in the context of the times. Desires for national music was re-collected into the national music theory of the 1980s, and through this history, it would be a task given to all musicians living in this changed era. Moreover, it could be a new age spirit to ensure that the suffering and practice of senior musicians who were critical to the zeitgeist of the times did not remain the only history of the past.

    • KCI등재

      나운영 음악에 나타난 ‘선 토착화 후 현대화’의 의미와 진로

      주대창 민족음악학회 2023 음악과 민족 Vol.- No.66

      La Un-Yung as a modern composer sought to realize universal Korean music, so that the traditional and the modern in his music have to join each other. To fulfill Korean national music, the korean folk music should be the fist source in terms of idea to retain Korean characteristics in music, and then the modern techniques could be developed with this kind of materials for the future music. This method of work was manifested in his moto: Indigenizing at first and modernizing the next. According to Herder who advocated the folk character collecting and interpreting fork songs at that time, the terms of folk and nation were naturally equivalent in meaning. However, La considered folk music to be old things in the past, and national music to be new things in the future. La fully applied himself to the job of connecting both sides and especially expected to make reasonable Korean harmony which is accomplished from melodies of old folk music. His efforts provides useful examples on which the coming generations can reflect on the one hand, leaving them a task how to have popular appeal for national music on the other hand. 현대 작곡가로서 나운영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한국음악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함께 녹아있어야 했다. 그는 이러한 음악을 진정한 민족음악으로 보았다. 이를 위하여 한국의 민속음악이 먼저 민족성을 드러내는 기본 소재를 제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적 기법들이 개발되기를 바랐다. 이것은 '선 토착화 후 현대화'라는 그의 모토가 되었다. 음악에서 민중 및 민족 개념은 민요의 가치를 드높였던 헤르더에게서 비로소 자리를 잡는데, 그는 당시의 관습대로 민중과 민족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나운영은 민중의 민속음악을 과거의 것으로 보고, 민족음악을 미래의 한국음악으로 설정하였다. 그는 음악적으로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고, 이를 통해 특별히 합리적인 한국화성을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의 한국적 화성은 민속음악의 선율로부터 형성시킨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한편으로 후세들이 참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예들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음악이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남긴다.

    • KCI등재

      해방 후 음악장(場)의 형성과 나운영의 자리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23 음악과 민족 Vol.- No.65

      이 논문은 냉전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작곡가 나운영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였다. 해방 후 초기 2년 동안 음악가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민족음악문화 건설의 꿈을 꾸었다. 나운영도 해방가요와 건국가요를 작곡하였고 첼리스트로, 해외에서 조국으로 돌아오는 동포를 위한 음악회와 각종 기념식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또 민족음악 문화연구를 계획하며 음악가 정추와 민족음악문화연구회를 결성(1946. 3.) 했다. 미소공위 실패 후 냉전이 한반도에 고착화되면서 남한의 음악장에서 좌파 음악가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었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이런 정치적 위기 속에서 나운영은 1947년 6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파 문화예술단체와의 제휴를 통해 남한 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무결함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전쟁 동안 나운영은 한국 최초로 '한국현대음악 학회'를 결성하고 현대음악 레코드감상회를 열면서 한국에 현대음악이 보급되기 위한 계몽 활동을 시작했다. 또 1952년 작곡집을 출판하고 작품발표회를 하는 등 작곡가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전쟁은 비정상적인 시간이었고 이 시기 음악은 군대에 의해 유지되는 구조였다. 나운영은 해군과 육군의 문관으로서 전시가요와 전시동요를 작곡했고 이 중< 통일행진곡>(1952) 과 <북진의 노래>(1953)는 반공국가주의를 전파하는 대표적 국민가요로 남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 온 나운영은 현대음악의 거장 메시앙으로부터 파리 유학을 허락받고 준비하던 중 여권발급 불가판정을 받게 된다. 전후 한국사회에서 납북자 가족과 과거 좌익활동의 이력은 음악가로서 중대한 결함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후 나운영의 음악 활동 중 한 부분은 국가주도 음악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을 위해 남겨두어야 했다. 나운영의 1945~1953년의 삶을 통해 냉전이 한 작곡가의 정치적 신념을 굴절시켜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었다. 때로 그의 삶은 정해진 세계가 아닌 경계에 위치해 있었고 그 결과 한국의 음악권력에서 배제되거나 고립되는 결과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음악인생은 민족음악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 온 수행적 삶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KCI등재

      청년 나운영의 1942년 - 나운영의 초기 기악곡

      홍정수 민족음악학회 2023 음악과 민족 Vol.- No.65

      나운영의 일본 유학 시절 작곡한 년의 세 기악곡은 나운영 음악 1942 이 다른 단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그가 소년 시절에 사용하던 단순 삼화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작곡을 전공하는 음악대학생 나운영의 모델이 된 작곡가들은 드뷔시와 바르톡이었다. 드뷔시는 기존의 작곡학이 금한 것들을 사용 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음악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다른 문화권들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서양음악과는 다른 색다른 음악의 창출도 있었다 바로, 이 이국적 요소들은 나운영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드뷔시에게 "이국적" 인 것은 나운영에게 "민족적"인 것이 되었다. 특히 드뷔시 음악이 보여주는 오음음계 관련성은 나운영에게 좋은 모델이 되었다. 나운영과 바르톡의 상관관계는 완벽하게 해명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이유는 바르톡의 <어린이를 위하여>가 드뷔시의기법을 받아들여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나운영의 <어린이를 위한 이국풍>은 바로 이 바르톡의 교육서를 작곡의 모델로 삼은것으로 보이기에 어느 것이 드뷔시의 영향이고, 어느 것이 바르톡의 영향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나운영의 음악에는 드뷔시적인 것, 바르톡적인 것, 한국전통음악적인 것, 이러한 요소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는 드뷔시와 바르톡 음악방식의 일부도 "민족적"으로 해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오음음계, 빛음과 그림자, 미끄러지는 음, 병행음정의 연속, 이런 작곡방식이 그의 민족적 음악 추구에 활용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시김새와 같은 한국 전통음악의 특징은 나운영 음악에 민족적 성향을 더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적 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법들도 "현대적"이라 일컬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예스러운 기법을 현대적 방식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현대성은 흔히 단순한 음계를 벗어나면서 표현된다. 비음계음을 더욱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짧은 음들은 더 쉽게 음계를 벗어난다. 비음계음들이 많이 사용되면, 그 음악이 조성적 기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나운영은 그것을 '무조적'이라 생각했다 그의 현대성 추구의 음악은 크게 보아 '조성적'이지만 세밀하게 보면 '무조적'이라 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음악은 조성을 양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고인 것이다. 조성적 양면성은 나운영 음악 중 빛음과 그림자음, 그리고 긴 음과 짧은 음의 구성에서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중요한 음들'이 있고 '그 음들을 반영하는 또 다른 음들'이 있는 것이다. '적은 것들'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운영의 "민족음악"과 "현대음악"이 동시에 자랄 수 있는 틈새를 보여준다. 나운영의 1942년 기악곡들은 그 틈새에서 나온 새로운 한국양악을 보여준다. 1942년 작곡된 나운영의 세 작품은 그동안 연주가 자주 되는 편이 아니라서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초기 양악들이 거의 성악 위주로 연주되고 관찰되는 관계로 기악 작품에 대한 주목은 현저하게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이후에 오는 나운영 작품들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해방 이후 작곡 된 그의 성악곡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고, 1955년 이후에 더 현대화된 서양음악과의 접촉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작곡적 기초로 남아있다. 또한 세 작품이 ...

    • KCI등재

      슈베르트 종교음악 창작과 작품 고찰

      차호성 ( Cha Hosung ) 민족음악학회 2020 음악과 민족 Vol.0 No.59

      슈베르트는 1812년 이후부터 꾸준히 종교적 성격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생애 말년까지 꾸준하게 작곡하였다. 비록 그 가운데 많은 수의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남았거나, 초연조차 되지 못했지만, 종교음악은 그의 음악적 발전과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영역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가 종교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비중을 두었던 것은 미사로 여겨진다. 그가 남긴 9곡의 미사음악은 작곡자의 음악적 발전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간주할 수 있다. 초기의 습작 2곡을 제외한 7곡 가운데 6곡은 전통적인 미사음악의 유형을 가지며, 다른 한 곡은 독일어 가사를 가지면서 전례용 음악의 범주를 벗어난 모습을 가진다. 전통적인 미사음악에 속하는 6곡의 경우 1814년부터 2년간에 걸쳐 작곡된 초기의 4곡과 1822년과 1828년에 각각 한 곡씩 작곡된 2곡이 어법적인 면에서 나뉠 수 있다. 초기의 미사음악작품들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비엔나 고전주의음악의 영향뿐만 아니라, 슈베르트의 스승이었던 살리에리의 영향까지도 보여주면서 아직 작곡자의 독자적인 작곡기법이나 어법을 충분히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후기의 전통적인 미사음악 2곡과 독일어 가사에 의한 미사음악은 슈베르트 자신만의 종교음악적 경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종교음악은 미사음악뿐만 아니라 규모가 작은 종교적 성격의 작품들도 다수 작곡했다. 그 가운데에는 성경이나 시편을 가사로 하여 리트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나, 살베 레지나나 탄툼 에르고와 같이 찬미가의 일부 구절을 가사로한 종교적 성격의 합창곡이나 성악앙상블 작품 그리고 오라토리오 등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작품들 거의 대부분이 관현악 반주를 가지고 있는 점이며, 이는 슈베르트가 미사음악에서의 음악적 사고를 다른 종교음악 작곡 과정에서 항상 고려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의 후기 미사음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적 성격의 작품들은 전례용이 아닌 예술적 차원에서 접근해야할 작품들로 여겨진다. Schubert has been interested in works of religious nature since 1812 and continuously composed them until the end of his life. Although many of them remained unfinished or were not even premiered, his religious music could be acknowledged as an area to examine Schubert’s musical development and changes. The most important genre of religious music for Schubert was the Mass. The nine pieces of Mass music he left behind can be regarded as an important material to look into the composer's musical development. Excluding the first two practice pieces, six of the seven works are in the traditional form of Mass music while the other one has German lyrics and is out of the range of liturgical music. For six songs belonging to traditional Mass music, the initial four pieces composed over two years from 1814, and two works composed in 1822 and 1828, respectively, can be divided in terms of musical language. Early mass works have yet to fully reveal the composer’s independent style of composition or musical language, showing not only the influence of Viennese classical music such as Haydn, Mozart and Beethoven, but also the influence of Salieri, who was the teacher of Schubert. However, the latter two pieces of traditional Mass music and the other one with German lyrics have slowly begun to reveal Schubert’s own religious musical inclinations. Schubert composed a number small scale works of religious nature besides Masses. Among them there are works with a lyrical character using Bible or Psalm as text, and other choral or vocal ensemble pieces of religious character, such as < Salve regina > or < Tantum ergo >, which have text passages from the Hymn. Noteworthy is that most of these pieces have orchestral accompaniment, and it is assumed that Schubert may have always considered musical thinking in Mass music in the course of writing other religious music. Also, most of works in religious character, as well as his later Mass music, are considered as works that need to be approached at an artistic level, not as works for liturgical purpose only.

    • KCI등재
    • KCI등재

      이종태의 해방전후 음악활동 고찰

      이수정 ( Lee Su Joung ) 민족음악학회 2021 음악과 민족 Vol.- No.61

      이종태는 음악교육자·작곡가·지휘자·아악 전문가이자, 군인이다. 1930년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로서 해방 이전에는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모든 음악 경력을 접고 군대에 들어가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해방을 기점으로 격변한 인생사를 반영하듯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반되게 나타나 있다. 음악인 이종태는 친일 및 전쟁협력 단체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물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 군인 이종태는 1958년 국방부장관 공로표창, 1966년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현재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음악인 이종태는 서양음악, 궁중음악, 음악교육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수십개의 음악 단체에 소속되었으며, 식민지 관변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중동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이화여자전문학교, 이왕직아악부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경성관현악단, 영미합창단 등에서 지휘를 하였다. 1930년 <소년>이라는 작품을 작곡한 이래, <내일>·<그리운 소년>·<우리들은소년>·<김소좌를 생각함>·<총 후> 등의 친일 작품을 양산하였다. 『보통학교조선어독본』을 토대로 음악 레코드를 제작하거나, 경성방송 ‘군가공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전시 시국 가요를 교육 보급시켰고 강연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왕직아악부에 10여년을 재직하면서 서양음악 교육과 오선보 채보사업에 관여하며 아악 전문가로 행세하고, <기미가요>와 <우미유카바>를 아악기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는 등 이왕직아악부의 친일활동을 지원하였다. 일제강점기 음악계에서 보여준 활동 내용과 양상은 놀라운 정도이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이종태는 해방이 되자, 초창기 대한민국 군대와 군악대가 만들어질 당시 42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예대 창설에 관여하였고, <상이군인의 노래>·교향시<조국찬가>·교성시<광복10년> 등을 군대 내의 음악 행사를 맡기도 하였다. 군인이라는 신분 제약이 있어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하였다. 태세 전환에 성공하면서 친일 행적은 감추어져 국가유공자로 대접받았으며 사후에 부인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와 나란히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던 과오를 이종태라는 인물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Lee Jong-tae was a music educator, composer, conductor, and soldier. Lee, an intellectual and a graduate of Japanese Music School(日本音樂學敎) in 1930, worked actively as a musician before liberation. After liberation, he gave up his career in music and joined the army and was appointed as a brigadier general. As if reflecting the dramatic convulsion of his life after the liberation, historical evaluations on Lee have conflicting arguments. Lee as a musician was listed in the pro-Japanese Biographical Dictionary as a result of activities as a pro-Japanese and working with war cooperation organizations. On the other hand, Lee as a soldier had a successful career, being commended for his service by the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in 1958, and receiving an 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 Cheonsu Medal in 1966. As this research is the first to study Lee, we examine Lee's musical activities, and take a brief contemplation on projects he put parts in as a commissioned consultant of Iwangjikyangyakbu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Lee as a musician worked in all areas including Western music, court music, and music education. He was a member of dozens of music organizations, and worked in a colonial government organization. Under a war footing, he distinguished himself in pro-Japanese groups and thereby entered major musical circles. Furthermore, after joining the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he participated in the project of the Staff(stave) transcription as an expert of court music during ten years of his incumbency as an editor of omnifying court music (‘A-akumbopyeonchansamuimsichoktak’ 雅樂音譜編纂事務臨時囑託). He also actively supported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the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by rearranging Kimigayo and Umiukaba to be playable for court instruments. His decision to change his stance after liberation was surprisingly quick. In the early 1947, when the Korean military and military band were formed, he joined the army at the age of 42. He became a military band master in the eighth regiment and after the recapture of Seoul in 1950, he participated in establishing the KAS (Korean Army Arts Service 陸軍軍藝隊). Since then, he was unable to actively engage in music due to his status as a soldier. However, he did not stop interacting with musicians until 1970, revealing his presence at international music festivals. Since 1961, when he was serving as the head of the National Cemetery, he cooperated with the National Gugak Center to hold Confucian ceremonies in the National Cemetery on Memorial Day. It is desperately necessary to criticize Lee's pro-Japanese activit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reflectively view the fact that Lee has never been discovered until now and is still presently being treated as a man of national merit.

    • KCI등재

      한국 대중음악 수용자 연구 - 일제강점기부터 제5공화국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조장원 ( Jang Won Jo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6

      한국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대중음악이 발생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미국 문화와의 접촉이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서양문화의 분위기와 특성을 모방하는 대중음악들이 양산되었다. 1960년대 이후 매스미디어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며 점차 대중사회의 특성을 갖추지만, 정치적으로 검열제도가 매우 엄격하여 대중가요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부터 부가 축적되며 1990년대에는 대중음악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1990년대 말부터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쇠퇴하고 온라인 음원시장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대중음악의 생산과 소비형태는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대중음악 수용자들도 대중음악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다양한 욕구를 갖게 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한국 대중음악사를 사회·정치적 배경과 매체 보급 상황 및 수용자의 태도와 특성을 고려하여 일제강점기부터 제5공화국까지의 시기를 구분하고 수용자들의 변화과정을 정리해보았다. 대중음악 수용자에 대한 이해는 대중음악 산업의 발전을 위한 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로 앞으로 더욱 적극적인 학문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Korean pop music has occurred based on the periodical background, Japanese occupation. However, after the independence, direct and extensive contact with the American culture influenced to produce pop music culture that was emulating the Western world’s mood and characteristics. After 1960s, South Korea was gradually forming the characteristic of public society since mass media was taking a place. On the other hand, political censorship has been very strict, so it became an hindrance to the development of pop music. From 1980s, wealth accumulated and 1990s, pop music grew quickly both in quantity and quality. Since the late 1990s, declination of the offline music market and rise of online music market rapidly changed the way of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pop music. Advances in media technology have completely changed the paradigm of the music industry and pop music adopters have a very personal and diverse need for pop music. In the historical background, this study distinguished the Korean pop music history’s time period from the Japanese colonical period to the fifth Republic Governments by its social/political background condition and consumer’s characteristic and attitude. On top of that, also it organized consumer’s process of changing. Comprehension of pop music consumer is a study to prepare for development of pop music culture industry, so it will require a active academic approach.

    • KCI등재후보

      이왕직양악대의 활동이 근대음악사회에 끼친 영향

      이수정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7

      It is about 118 years since western music band started playing music in Korea. During the Korean Empire, which took up the early phase of the western music band introduced to the country, it was installed in the name of the Military Band in 1900 and in the name of Imperial Music Band in 1907. 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t was maintained under the name of Yiwangjikyangyakda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Korean modernization, the Military Band of the Korean Empire and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operated as official music bands of the court. In this respect, they carried major significance for the courtly music, but they have yet to be properly studied. Their activities played a tremendous role in distributing and nurturing the western music in the Korean court music and popular music. The musicians, who were trained in the Military Band and the Western Music Band, engaged in the music activities with the bands of schools of different academic levels and private bands, thus playing a major part in distributing and nurturing the western music bands including brass band and propagating the western music. And the studies so far have focused on the western music bands between 1890 and 1910 when the western music was introduced to the country, and light has been shed on the creation of the western music band, the composition of musical instruments, and the repertory and its importance. However, they just touched on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n a cursory manner and never mentioned its activities. This study has examined the historical development, the operation, the performance, and the significance of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Following the Korea-Japan Annexation, its role was reduced, and the band could not perform its functions related to the military band and the national band. However, the western music band was responsible for officially receiving the western music into the country and was in charge of the events of the country and the royalty as part of the courtly band. The activities of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suffered further distortion than the Military Band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It has been pointed out that the band had to perform Kimigayo, the Japanese national anthem, the Japanese military music, and Japanese musical works at Pagoda Park, Changgyeonggung, and Gongjinhoe during the colonial period. 우리나라에서 양악대가 음악 연주를 시작한 지 올해로 약 118년이 되었다. 서양 악대 도입 초창기인 대한제국에서는 1900년 군악대, 1907년 제실음악대(帝室音樂隊)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양악대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제국 군악대, 제실음악대와 이왕직양악대가 궁중의 공식적인 악대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궁중음악 변천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의 활동이 궁중음악계와 대중음악계에 서양음악의 보급과 육성에 기여한 역할은 지대하였으며, 군악대와 양악대를 통해 배출된 음악인들이 각급 학교 밴드부와 사립 악단에서 음악활동을 하여 브라스 밴드를 비롯한 서양식 악대의 보급과 육성, 서양음악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간의 연구는 양악 도입기에 해당하는 1890년-1910년의 양악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집중되었고, 양악대의 창설, 악기편성, 연주곡목 및 중요성 등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왕직양악대에 대해서는 부수적으로 간단히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있으며, 활동 내용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 본 연구는 이왕직양악대의 역사적 전개과정 및 조직체계, 운영 방식, 공연 활동 등을 살펴보았다. 이왕직양악대는 1911년 활동을 시작하여 1919년 해산되기까지 활동 기간이 매우 짧지만, 양악사장, 양악사, 양악수장, 양악수의 체제를 갖추고, 40-50명 내외의 악대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서양식 악대는 대한제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정식으로 서양음악을 수용하면서 궁중악대의 일부로서 국가와 왕실의 행사를 담당하였다. 이왕직양악대는 대한제국 군악대의 전통을 이어 이왕직 장시사에 소속되어 의식에서의 음악을 담당했다. 하지만 국가 음악으로의 기능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부터 국권이 침탈되면서 역할이 축소되어 군대 음악 또는 국가 음악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궁내성과 조선총독부의 감시하에 이루어졌던 이왕직양악대의 활동은 대한제국기 군악대보다 더 왜곡되었고, 친일적인 행적을 보여주었다. 식민지하 탑골공원, 창경궁 및 공진회 등에서 일본국가인 「기미가요」와 일본 군대음악 및 일본음악을 연주해야 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대중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음악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서양음악적 이미지를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서양음악의 유입과 확산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악대의 활동이 당시 한국음악계에 서양음악의 표상이 될 수는 없다. 군악대와 양악대를 통해 배출된 음악인들이 서양식 악대의 보급과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왕직양악대와 같은 관속(官屬) 음악인의 활동은 서양음악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식민지적 근대의 비주체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조직적 한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 KCI등재

      해방 10년, 음악계의 구성과 존재 방식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22 음악과 민족 Vol.- No.63

      본 연구는 한국현대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해방, 분단, 한국전쟁, 정전(전후)을 아우르는 총체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기간은 민족국가수립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좌절된 후 전쟁과 분단이라는 남북한의 역사적 갈등이 응축된 시기이며 국제적으로는 세계냉전으로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시기이다. 해방 후 좌우익의 이념대결이 치열했지만 음악가들은 음악계의 단결을 촉구하며 1946년 삼일절 기념음악회를 공동으로 주최했고『 임시중등음악교본』과 해방기념음악회, 전국음악경연대회 등을 통해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을분기점으로 세계냉전 국면으로의 전환과 그 해, 8월부터 미군정에 의해좌익활동이 전면금지되면서 좌익예술가들은 지하로 숨게 된다. 1948년은 단정을 둘러싼 내부냉전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제주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냉전의 논리를 남한사회 안으로 내면화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문화예술인 사이의 공모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은 90일간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 기간동안‘문련’ 산하의 예술단체가 조직되어 예술가들이 북한군에 부역하였다. 서울 수복 후 ‘문총’은 부역자 처벌과 종군문화반을 파견해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유지하였다. 한편, 월남음악가들도 자신의 반공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군가보급단에서 활동하면서 체제에 길들여진다. 전쟁 후 한국음악계는 미국과의 우호를 증진하는 한편, 미국무부 및민간재단의 원조로 음악가들의 미국 연수와 미국음악가의 내한공연, 한국음악계의 재원지원 등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교섭력이악단의 권력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자격조건이 되었다. 정부는 반공의 문화적 냉전을 수행한 음악가들을 여러 제도를 통해 포상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대일협력 과오는 무마되었고 제도권 음악권력이 유지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