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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亞洲音惡文化的多元性 : 印度, 中國, 菲律賓音惡現狀的比較硏究 중국·인도·필리핀 음악현상의 비교연구

          陳自明 민족음악학회 2002 음악과 민족 Vol.24 No.-

          아시아대륙은 동아시아·남아시아·동남아시아·서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등 다섯 개의 큰 음악문화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환경·인종·민족·언어·문자·종교, 역사와 문화의 다름으로 인하여 음악도 백화가 만발하듯 다양하다. 아시아의 모든 음악문화를 비교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3개 음악문화지역중의 3개 나라를 선택하였다. 중국(동아) ·인도(남아)와 필리핀(동남아)의 음악현상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겠다. 중국과 인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명고국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낙후하였고 서양 강국의 괴롭힘과 압박을 받았다. 인도는 약 2백년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정치에서 압박을 당하고 경제에서는 착취를 받았으며 문화와 종교에서까지도 억압당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문화·종교·음악·춤은 기적과 같이 보존되었다. 나라가 독립한 후 더욱더 활기차게 번영하여 새로운 발전을 가져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풍금·바이올린·기타·만돌린·클라리넷·색소폰 등과 같은 서양의 악기들은 인도인들이 채용한 후 점차적으로 자기들의 심미관념에 맞게 개변한다. 연주의 테크닉, 표현의 수법, 그리고 얻은 효과까지 예전의 면목을 찾아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인도의 전통음악·전통악기와 잘 융합되어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 사람들도 하여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악기의 외형은 변함이 없으나 악기의 영혼은 이미 완전히 인도의 것이 되었다. 당연히 인도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들은 영화음악에 나타나는데 음악과 춤은 인도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음악의 기조는 인도적인 것이다. 이는 멜로디·창법 그리고 악기 모두가 인도(印度)화된 것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서양악기를 사용한 것도 있다. 화성은 서양의 것을 따온 것이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오늘의 인도에서 전통적인 음악과 춤은 전 사회의 중시와 존중을 받고 있다. 이 전통음악과 춤은 계속 이어져 갈 뿐만 아니라 아직도 활기차게 발전하고 있다. 인도의 대통령은 매년마다 친히 10명도 넘는 걸출한 음악가·무용가·극작가·문학가에게 큰 상을 수여한다. 근년에 인도도 서양 유행음악의 충격을 받기 시작하였지만, 인도전통음악의 앞날은 여전히 낙관적이다. 중국도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열강들의 유린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이 아픔을 기억하여 서양의 장점을 따라 배워 나라를 진흥시키려 했다. 20세기 초에 점차적으로 학교에 음악학과를 설립하였는데 이를 "학당악가"(學堂樂歌)라고 한다. 학당악가의 가사는 대부분이 애국주의의 내용이었고 멜로디는 구미, 혹은 일본의 유행가곡의 곡조를 사용하였다. 학당악가의 발전에 따라 서양음악과 서양악기·오선보·수자보·음악이론·화성 등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20세기 20년대에 중국은 전문음악학원을 설립하였다. 몇십 년의 발전을 걸쳐 중국은 서양음악을 배우는 면에서 아주 큰 성과를 얻어 교향악단·오페라단·발레단 등을 설립하였다. 또 서양음악을 기초로 하고 여기에 중국민족음악의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중국 근·현대의 새로운 음악을 형성하였다. 다른 한 면으로 종류 많은 중국전통음악의 역사는 유구하다. 희곡·설창·기악·민요·가무(歌舞) 등 종류가 매우 풍부하다. 이 중 곤곡(崑曲)은 UN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하였다. 중국소수민족의 음악과 춤은 그들의 신앙,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까지 활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전통음악은 서양음악과 달라서 자기만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주·객관적인 원인으로 중국의 전통음악은 중국 현대사회에서 약세에 처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전통음악을 살리려고 전통음악을 정리·연구하는 일을 많이 해 왔다. 그러나 다수의 청소년관객들은 유행음악과 서양음악에 더 열중하는 판에 큰 도시에서의 전통음악의 지위는 작은 도시나 시골에서보다 낮다. 필리핀은 동남아의 섬나라이다. 근대 필리핀은 선후로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였었다. 194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스페인의 음악문화는 필리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넓은 중부지역은 더욱 그렇다. 필리핀의 합창이 발달되어 있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서양악기, 예를 들어 파이프오르간·피아노·바이올린·기타 같은 악기들은 일찍 유입되었다. 필리핀의 민족음악학자 마싸이다는 전국소수민족지역을 다니면서 필리핀의 민족음악을 발굴·정리하였다. 부활한 필리핀의 민족가무는 필리핀민간예술제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필리핀의 음악주류(主流)는 서양음악과 서양음악의 영향 아래에 있는 근·현대 필리핀의 새로운 음악이다. 인도·중국·필리핀 이 3나라의 음악현상에서 볼 때 이들의 음악은 서로 다르다. 아시아 나라 중 3가지 상이한 유형이다. 서로 다른 유형을 형성한 기초와 원인을 무엇인가. 이는 그 나라의 국정(國情)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근거로 탐구하여야 한다. According the nature environment and cultural background, the whole Asia continent can be divided to five musical culture area; East Asia, South Asia, Southeast Asia, West Asia and Central Asia The music of these areas are different and like all flowers vying for beauty In full bloom. In this paper I selected three countries to make a comparative study about their present situation. India has a old civilization, it was a colony nearly 200 years, but their tradition music have preserved and become prosperous today China also has a aid civilization but was absorbed in the western music, so Chinese people especially younger generation like westernized music and popular music than Chinese traditional music. Philippines music were westernized, but the minority people preserved their traditional music. These different phenomenon are very interesting for us and attract ethnomusicologists to do research work. 亞洲大陸可分爲東亞、南亞、東南亞、西亞和中亞五大音樂文化區, 由於自然環境、人種、民族、語言、文宇、宗敎、曆史和文化的不同, 在音樂上也呈現出百花齊放、千姿百態的景象。如東亞包括中國、朝鮮、韓國、日本、蒙古五國, 南亞由印度、巴基斯坦、孟加拉、尼泊爾、斯里蘭잡等國組成、東南亞則由印度尼西亞、 馬來西亞、菲律賓、新加坡、文莢、泰國、緬甸、越南、老과、柬포??十國組成, 西亞則由諸多的阿拉伯國家伊拉克、敍利亞、黎巴??、旦約、沙特阿拉伯及海灣國家組成, 中亞由阿富汗、哈薩克斯坦、烏玆別克、土庫曼斯坦、達吉克斯坦、吉爾吉斯斯型組成, 伊朗、土耳其雖較고西, 但從民族、語言、曆史來考慮, 타們的文化與中亞關采更密切。 對整箇亞洲的音樂文化進行比較硏究, 是箇宏大的工程, 在此文中我選取三箇音樂文化區中的三箇國家 ; 卽中國 (東亞)、印度 (南亞) 和菲律賓 (東南亞) 的音樂現狀, 進行些客觀的比較, 爲進一步進行硏究、探討這些問題提供些線索和思路。

        • KCI등재후보

          1950년대 양악작곡가들이 상상한 국민음악: ‘국민’과 ‘민족’ 사이에서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8

          이 글은 1950년대의 음악계에 대한 고찰이다. 해방 후 일제잔재의 청산과 민족국가 수립을 염원하며 제기된 민족음악론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냉전의 논리로 변화하고 있었다. 분단 후 남한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국민가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민가요의 내용은 국민국가의 건설과정에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9년 공보처는 박태현, 윤용하, 이흥렬 등 우익 입장의 작곡가들이 쓴 국민가요를 당선시키고 학교 및 군대에 보급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창된 국민음악은 일제강점기 국민개창운동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쟁은 과거 제국에 봉사하던 음악가들이 남한의 악단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시체제하 만주에서 제국의 후생음악에 봉사하던 이흥렬, 박태현, 김동진 등은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 문화반원으로 활약하며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문화선전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피난지 부산에서는 ‘전시작곡가협회’가 결성되어 전시(戰時)동요작곡과 가극 등을 창작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목표는 군당국과 긴밀히 결합하여 전선에서 일어난 일을 음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전시작곡가협회 작곡가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민개창운동추진회에서 활동하며 재즈와 왜색 유행가 대신 국민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선다. 국민가요 작곡가들은 멸공과 북진을 강조했던 정권의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남한 악단의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주요작곡가들에 의한 국민가요 창작은 이후 남한의 악단에서 전개될 이분법적 분단음악사의 시작이 된다. 특히, 우익진영 음악가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많아 정권의 구미에 맞았다. 이들에 의해 창작된 국민음악은 호전적 성격의 노래가 많았는데 이와 같은 편중된 정치성이 순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개창운동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이와 같은 이분법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운영, 윤이상의 이후의 삶은 1950년대 그들의 활동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민족음악을 위한 열망은 1980년대의 민족음악론으로 다시 제기되었고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해 ‘민족’과 ‘음악’을 연결하고 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당대의 시대정신에 민감했던 선배 음악가들의 고뇌와 실천이 과거의 역사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된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음악인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will be an attempt to examine the music scene of the 1950s in Korea, the era of anti-Communism and the Cold War. A discourse on national music that was raised during the period of liberation led to the music history of the Cold War in the course of division and the Korean war. The attempt to attain national Integration by achieving the national state was taking place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1948, when ‘Kukmingayo(songs for the nation)’ were created and disseminated. These songs called ‘Kukmingayo’ or ‘Aegukgayo(songs for patriotism)’ were produced by recycling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and national music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urthermore, a song of the national memorial day was made by the government and music was attempted to emphasize nation than ethnic over the people, such as anti-communism and patriotism. The Korean war, meanwhile, was a golden opportunity for musicians who served the Japanese empire to settle down reliably in the South Korean music scene. Lee Heung-ryul, Park Tae-hyun and Kim Dong-jin began to play a more active role in cultural propaganda for the North Korean regime. On the other hand, in Busa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was formed to create wartime children’s song and lyric plays. Besides, they were combined closely with the military authorities to produce music. their goal has been embodied in the formation of the ‘Military Composers Association.’ Composers of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have been active in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since the mid-1950s. Also, they have been taken the lead in distributing national songs that could achieve national unity instead of jazz and Japanese-style songs. However, such activities were the beginning of a dichotomous divided Korean music history based on the premise of anti-communism and division. These activities were led by right-wing composers who faithfully followed the positions of the then regime. In particular, the combination of anti-communism, northern unification and pro-Americanism under Rhee's government was reflected in the creation of musicians. Christian musicians, especially those who defect from North Korea, were perfectly matched by the regime and were hiding their militant and divided music history under the slogan of purism. Nevertheless, not all musicians who participated in this dichotomy agreed. The later lives of Na Un-young and Yun I-sang, who have acted i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and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could indicate the fact that their activities in the 1950s were reflected in refraction in the context of the times. Desires for national music was re-collected into the national music theory of the 1980s, and through this history, it would be a task given to all musicians living in this changed era. Moreover, it could be a new age spirit to ensure that the suffering and practice of senior musicians who were critical to the zeitgeist of the times did not remain the only history of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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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2: 윤이상과 아시아

          이경분 민족음악학회 2017 음악과 민족 Vol.0 No.54

          The most important achievement of Isang Yun in the Western contemporary music history is regarded as “translator of the Asian music aesthetics into Western music language”. Yun himself has often defined the origin of his music world comes from Chinese and Korean traditional music aesthetic. However, Japanese music seems not to have any place in his music world. Also in the interviews and lectures of Isang Yun Japan has been seldom appeared in the context of Asian music. On the contrast to this fact, the musicians among the Asian countries which Yun had the most familiar relationship with were the Japanese. And Yun has had twelve Japanese music students in his Berlin period, while Korean students were only few. Which role has Japan played in the music world of Isang Yun? This study explores meanings of ‘Asia’ in Yun’s Music world and the his relationship to Japan. To conclude, this article examines the question whether and how his diaspora life could be connected with a meaning of ‘Asian master’ which Yun might prefer to ‘Korean master’. 윤이상은 1967년 서베를린에서 남한으로 강제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간첩혐의에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독일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자리를 잡았지만,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음악가로 일생을 마감했다. 유럽작곡계에 진입하여 성공한 아시아 최초의 작곡가로서 윤이상의 현대음악사적 업적은 ‘동아시아적 전통을 서양 예술음악의 언어로 재용해’했다거나 ‘아시아음악문화와 서구 음악문화의 본질적 특수성을 연결’시킨 것으로 칭송된다. 그의 위대함과 중요성이 거론될 때 윤이상 음악의 원천인 한국음악은 항상 ‘아시아’라는 상위개념 속에 용해되는 경향을 가진다. 그의 음악세계에서 아시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이상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서 아시아적인 것을 ‘중국과 한국의 궁정음악 언어만이 아니라, 도교나 불교적 특성을 담은 신화적 소재나 조형예술 소재들 전체를 지칭’한다. 하지만 윤이상이 말하는 아시아에 일본은 들어있지 않다. 그의 음악세계에서 일본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는가? 본 논문에서는 윤이상의 창작세계에서 아시아의 의미를 살펴보고, 윤이상과 일본의 관계를 조명하여, 이것이 그의 디아스포라적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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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udy of Current Status and Problems of Traditional Music in Japan

          小島美子 민족음악학회 2002 음악과 민족 Vol.24 No.-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은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한 시도로 유럽문화를 도입하여 그들을 따라잡는데 전념했다. 그 결과로 전통 일본 문화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무시되었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양음악만이 학교에서 교육되었으며 음악이라는 용어가 서양음악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1세기 동안 일본전통음악은 전체적으로 사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전통일본음악의 일부 장르는 그 이전보다 더 번성하고 있다 이것들은 가가쿠 궁정음악(Gagaku Court Music), 노(Noh)와 교겐(Kyogen) 그리고 불교음악 등을 포함한다. 새로운 음악 장르도 또한 생성되었다. 그 하나의 예가 츠가루-야미센(Tsugaru-Jamisen)인데, 이것은 대개 일본 북동부의 츠가루지역의 민요를 반주하는 샤미센류의 악기이다. 또 하나의 예는 타이코 북이다. 타이코 북은 민속 공연에 쓰이는 북에서 성장하여, 현재는 현대적인 편성으로 연주회에서 공연된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전통 문화의 쇠퇴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1950년에 정부는 문화적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에 의하면 음악, 민속 공연과 민속 풍습들은 무형문화재로 이해되었지만 그들의 보호는 예술작품과 건축물 같은 유형문화재의 보존과 같은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게다가, 현재 보호되는 일본의 유산인 일본의 전통 공연예술은 고정되어 있으며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되고 있다. 여전히 큰 문제는 어디에서 일본문화의 미래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가이다. 일본에서 이것에 관련된 논의는 거의 없다. 대신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현대의 서양문화가 일본 문화의 근본이라는 대담한 생각을 상식으로 갖고 있다. 필자는 각 민족의 전통문화가 그 문화의 발전을 위한 근본임을 믿는다. 이것은 각 민족이 다른 문화를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Since the Meiji Restoration in 1868. Japan has been Intent on catching up with Europe by introducing its culture In a keen attempt to modernize the nation. Consequently In the last one century, the traditional Japanese music has declined on the whole. The Japanese government became warned of the decline of the traditional Japanese culture, in 1950 the government started an effort by establishing a law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assets. Thus the traditional Japanese performing arts which are now protected properties have become fixed, making the young generations to shy away from them A still bigger question is where to base the future development of Japanese culture.

        • KCI등재후보

          이왕직양악대의 활동이 근대음악사회에 끼친 영향

          이수정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7

          It is about 118 years since western music band started playing music in Korea. During the Korean Empire, which took up the early phase of the western music band introduced to the country, it was installed in the name of the Military Band in 1900 and in the name of Imperial Music Band in 1907. 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t was maintained under the name of Yiwangjikyangyakda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Korean modernization, the Military Band of the Korean Empire and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operated as official music bands of the court. In this respect, they carried major significance for the courtly music, but they have yet to be properly studied. Their activities played a tremendous role in distributing and nurturing the western music in the Korean court music and popular music. The musicians, who were trained in the Military Band and the Western Music Band, engaged in the music activities with the bands of schools of different academic levels and private bands, thus playing a major part in distributing and nurturing the western music bands including brass band and propagating the western music. And the studies so far have focused on the western music bands between 1890 and 1910 when the western music was introduced to the country, and light has been shed on the creation of the western music band, the composition of musical instruments, and the repertory and its importance. However, they just touched on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n a cursory manner and never mentioned its activities. This study has examined the historical development, the operation, the performance, and the significance of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Following the Korea-Japan Annexation, its role was reduced, and the band could not perform its functions related to the military band and the national band. However, the western music band was responsible for officially receiving the western music into the country and was in charge of the events of the country and the royalty as part of the courtly band. The activities of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suffered further distortion than the Military Band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It has been pointed out that the band had to perform Kimigayo, the Japanese national anthem, the Japanese military music, and Japanese musical works at Pagoda Park, Changgyeonggung, and Gongjinhoe during the colonial period. 우리나라에서 양악대가 음악 연주를 시작한 지 올해로 약 118년이 되었다. 서양 악대 도입 초창기인 대한제국에서는 1900년 군악대, 1907년 제실음악대(帝室音樂隊)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양악대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제국 군악대, 제실음악대와 이왕직양악대가 궁중의 공식적인 악대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궁중음악 변천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의 활동이 궁중음악계와 대중음악계에 서양음악의 보급과 육성에 기여한 역할은 지대하였으며, 군악대와 양악대를 통해 배출된 음악인들이 각급 학교 밴드부와 사립 악단에서 음악활동을 하여 브라스 밴드를 비롯한 서양식 악대의 보급과 육성, 서양음악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간의 연구는 양악 도입기에 해당하는 1890년-1910년의 양악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집중되었고, 양악대의 창설, 악기편성, 연주곡목 및 중요성 등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왕직양악대에 대해서는 부수적으로 간단히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있으며, 활동 내용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 본 연구는 이왕직양악대의 역사적 전개과정 및 조직체계, 운영 방식, 공연 활동 등을 살펴보았다. 이왕직양악대는 1911년 활동을 시작하여 1919년 해산되기까지 활동 기간이 매우 짧지만, 양악사장, 양악사, 양악수장, 양악수의 체제를 갖추고, 40-50명 내외의 악대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서양식 악대는 대한제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정식으로 서양음악을 수용하면서 궁중악대의 일부로서 국가와 왕실의 행사를 담당하였다. 이왕직양악대는 대한제국 군악대의 전통을 이어 이왕직 장시사에 소속되어 의식에서의 음악을 담당했다. 하지만 국가 음악으로의 기능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부터 국권이 침탈되면서 역할이 축소되어 군대 음악 또는 국가 음악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궁내성과 조선총독부의 감시하에 이루어졌던 이왕직양악대의 활동은 대한제국기 군악대보다 더 왜곡되었고, 친일적인 행적을 보여주었다. 식민지하 탑골공원, 창경궁 및 공진회 등에서 일본국가인 「기미가요」와 일본 군대음악 및 일본음악을 연주해야 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대중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음악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서양음악적 이미지를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서양음악의 유입과 확산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악대의 활동이 당시 한국음악계에 서양음악의 표상이 될 수는 없다. 군악대와 양악대를 통해 배출된 음악인들이 서양식 악대의 보급과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왕직양악대와 같은 관속(官屬) 음악인의 활동은 서양음악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식민지적 근대의 비주체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조직적 한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 KCI등재

          교회음악 작곡가 박재훈

          홍정수 민족음악학회 2003 음악과 민족 Vol.26 No.-

          朴在勳最初開墾了韓國敎會音樂的荒地幷有了果實. 韓國敎會從他開始創作自己的音樂. 他的音樂方法幷不是複雜的. 他爲自己화了一個比較淸楚的音樂界限幷留在了這個界限里. 他對音樂的關心和表現力是西洋18-19世紀的. 但不只是單純的西洋音樂. 他的音樂是不可能與西洋音樂相同的. 1964年以後的音樂更如此. 他想與韓國傳統音樂接近. 他展示給人們的傳統音樂不是和韓國傳統音樂家直接學習的, 而是以韓國洋樂作曲家對傳統音樂的理解方式學習幷受他人影響. 在朴在勳的音樂里흔容易發現羅運容的影響, 這一点就能證明這一点. 但是朴在勳在這一方面的追求沒有象羅運榮那樣遠離聽衆而發展. 他盡可能與音樂使用者接近. 雖是這樣他的韓國式音樂幷沒有停留在 '三拍子', 和 '五音音階'配以一般和聲的, 單純的程度. 他穩健的音樂試驗是不是因爲使用和演唱他音樂的是"會衆"的原因니? 我這마推測. "會衆"可能是不愿意現存的 禮拜音樂有흔大變化的人們. 在朴在勳的作品中新鮮的不是20世紀的西洋式新音樂, 而是韓國式音樂的形成. 在這些部分可以說他是小心的.

        • KCI등재후보

          록음악의 편곡에 관한 연구 그룹사운드 TOTO의 「Georgy porgy」 분석을 중심으로

          고덕주 ( Go Duck Ju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56 No.-

          많은 사람들이 록음악이 화성의 법칙에 무지하다는 편견을 가진다. 게다가 전형적인 록음악의 형식이 시끄럽고 공격적이라고 여긴다. 그러한 음향적 성격이 록음악에 쓰인 화성의 재구성과 독자적인 리듬의 기교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으로 음악의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 왔다. 전통화성의 방식에서 파생된 기법으로 실용적인 화성의 기법을 활용함은 물론 리듬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록음악의 연주자들은 반복되는 화음의 다양함을 위해 기본화음에 부가할 수 있는 또는 선법적인 가능성에 입각한 음들을 합성하거나 5음 음계적 방식을 활용한 기법을 통해 화성을 이루었다. 리듬에 있어서는 연주할 음을 음악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지점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음악적인 왜곡과 함께 그 흥겨움을 더하게 하였다. 그룹사운드 TOTO가 작곡 및 편곡한 「Georgy Porgy」를 통하여 이러한 방식을 자세히 연구해 볼 수 있다. 1978년 처음 발표된 이래 이 곡에 쓰인 이러한 기법은 많은 록음악의 연주자들이 원곡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한 이 두 방식의 활용은 원곡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채롭게 변할 수 있는 음악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요소이며, 이것이 록음악에서의 음악적 가능성을 확대하는 기법이 되게 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록음악의 음악적 선입관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음을 기대해 본다. Many people have a preconception about Rock music. They think it is ignorant about harmonic rules. In addition, the original style of Rock music is loud and aggressive. So, the sound makes it harder to comprehend re-harmonization methods and its own rhythmic skills. However, it has been improving its techniques in two ways. It is improving not only practical harmony which is graft onto classical theory, but also a physical approach to rhythm. It has become one of the essential pieces of Rock music. For variety’s sake on sequencing chords, they harmonized tension notes, modal options, and pentatonic systems. For rhythm, playing a note placed at different point changes the music. It becomes distorted musically and adds ‘Groove’. To study those reasons in detail, I selected the song 「Georgy Porgy」 composed and arranged by TOTO. After that song was exposed in 1978, many Rock musicians have tried to utilize those methods for refreshing their composed tune. It represents how those two ways should be the key to transfigure music keeping originality. Finally, these methods amplify musical possibilities in Rock music. I hope to change the biased view against Rock music to a positive angle with this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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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다문화와 한국음악

          송방송 민족음악학회 2002 음악과 민족 Vol.24 No.-

          아시아음악의 다양성(多樣性)은 여러 나라의 민족적 특수성을 반영시킨 문화양상의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아시아음악의 다양성이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서구 중심의 근대화 논리에 의한 잘못된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전통음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따라서 서구중심의 근대화를 극복하는 일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음악학자들이 당면한 과제이다. It is my pleasure to present a paper; "Asian Multiculture and Korean music" at this conference (Music, Asia and Multiculture), which is held at Pusan for the first Asian Game in the 21st century. This paper aims at introducing the historical interrelationship with neighboring China and Japan, and at considering the main issue of universality and particularity in Asian music. This paper deals with such topics as 1) Introduction, 2) Current States of Korean Music in the 20th Century, 3) Music History of Korea and East Aisa, 4) Particularity and Universality of Asian Music, 5) Conclusion. The past centuries in Asian history have been a turbulent period marred by foreign interventions and colonizations. Korea was not exceptional in this trend of modern Asian history, because the first half of 20th century was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Since literation in 1945 Korea has been engrossed in a drive toward 'modernization.' Because modernization has often meant Westernization and the rejection of Korean traditions, Koreans now realize the limits of Westernization and are searching for a new global cultural paradigm, and approach that also affects Korean music. The globalization of Korean music should be the goal for the scholars from both South and North Korea. In order to achieve such an aim, we must all turn a fresh look back to our own musical past. This is the reason why it must be remembered, on the threshold of the 21st century, that the future does not mean severance from the past. It means learning from the past, planning health, solid roots in the present for development in the future. Only with firm roots can a strong Korean musicology grow in the years ahead. With Asian musicologists attended at this conference, I would like to suggest a consideration of the following question: "How do we present our unique musical tradition of Asia to the vastness of the world music?" The multi-colored diversity of the world music arises from the characteristics of each Asian music t5radition, i.e. particularity of Asian music, which consistitutes a part, i.e. universality, of the world music. Asian musicologists from various countries, therefore, must search for the uinique characteristics (or particularlity) of their won past tradition. Such can only be achieved through a more collaborative interchange and scholarly exchanges between Asian musicologists from now on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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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 있어서 전통음악의 현황

          小島美子 민족음악학회 2002 음악과 민족 Vol.24 No.24

          일본 전통음악의 현황과 문제점 연구 小島美子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은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한 시도로 유럽문화를 도입하여 그들을 따라잡는데 전념했다. 그 결과로 전통 일본 문화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무시되었다.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양음악만이 학교에서 교육되었으며 음악이라는 용어가 서양음악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1세기 동안 일본전통음악은 전체적으로 사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전통일본음악의 일부 장르는 그 이전보다 더 번성하고 있다 이것들은 가가쿠 궁정음악(Gagaku Court Music), 노(Noh)와 교겐(Kyogen) 그리고 불교음악 등을 포함한다. 새로운 음악 장르도 또한 생성되었다. 그 하나의 예가 츠가루‐야미센(Tsugaru‐Jamisen)인데, 이것은 대개 일본 북동부의 츠가루지역의 민요를 반주하는 샤미센류의 악기이다. 또 하나의 예는 타이코 북이다. 타이코 북은 민속 공연에 쓰이는 북에서 성장하여, 현재는 현대적인 편성으로 연주회에서 공연된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전통 문화의 쇠퇴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1950년에 정부는 문화적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에 의하면 음악, 민속 공연과 민속 풍습들은 무형문화재로 이해되었지만 그들의 보호는 예술작품과 건축물 같은 유형 문화재의 보존과 같은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게다가, 현재 보호되는 일본의 유산인 일본의 전통 공연예술은 고정되어 있으며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되고 있다. 여전히 큰 문제는 어디에서 일본문화의 미래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가이다. 일본에서 이것에 관련된 논의는 거의 없다. 대신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현대의 서양문화가 일본 문화의 근본이라는 대담한 생각을 상식으로 갖고 있다. 필자는 각 민족의 전통문화가 그 문화의 발전을 위한 근본임을 믿는다. 이것은 각 민족이 다른 문화를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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