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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음악장(場)의 형성과 나운영의 자리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23 음악과 민족 Vol.- No.65

        이 논문은 냉전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작곡가 나운영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였다. 해방 후 초기 2년 동안 음악가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민족음악문화 건설의 꿈을 꾸었다. 나운영도 해방가요와 건국가요를 작곡하였고 첼리스트로, 해외에서 조국으로 돌아오는 동포를 위한 음악회와 각종 기념식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또 민족음악 문화연구를 계획하며 음악가 정추와 민족음악문화연구회를 결성(1946. 3.) 했다. 미소공위 실패 후 냉전이 한반도에 고착화되면서 남한의 음악장에서 좌파 음악가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었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이런 정치적 위기 속에서 나운영은 1947년 6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파 문화예술단체와의 제휴를 통해 남한 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무결함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전쟁 동안 나운영은 한국 최초로 '한국현대음악 학회'를 결성하고 현대음악 레코드감상회를 열면서 한국에 현대음악이 보급되기 위한 계몽 활동을 시작했다. 또 1952년 작곡집을 출판하고 작품발표회를 하는 등 작곡가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전쟁은 비정상적인 시간이었고 이 시기 음악은 군대에 의해 유지되는 구조였다. 나운영은 해군과 육군의 문관으로서 전시가요와 전시동요를 작곡했고 이 중< 통일행진곡>(1952) 과 <북진의 노래>(1953)는 반공국가주의를 전파하는 대표적 국민가요로 남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 온 나운영은 현대음악의 거장 메시앙으로부터 파리 유학을 허락받고 준비하던 중 여권발급 불가판정을 받게 된다. 전후 한국사회에서 납북자 가족과 과거 좌익활동의 이력은 음악가로서 중대한 결함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후 나운영의 음악 활동 중 한 부분은 국가주도 음악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을 위해 남겨두어야 했다. 나운영의 1945~1953년의 삶을 통해 냉전이 한 작곡가의 정치적 신념을 굴절시켜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었다. 때로 그의 삶은 정해진 세계가 아닌 경계에 위치해 있었고 그 결과 한국의 음악권력에서 배제되거나 고립되는 결과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음악인생은 민족음악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 온 수행적 삶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KCI등재

        나운영 음악에 나타난 ‘선 토착화 후 현대화’의 의미와 진로

        주대창 민족음악학회 2023 음악과 민족 Vol.- No.66

        La Un-Yung as a modern composer sought to realize universal Korean music, so that the traditional and the modern in his music have to join each other. To fulfill Korean national music, the korean folk music should be the fist source in terms of idea to retain Korean characteristics in music, and then the modern techniques could be developed with this kind of materials for the future music. This method of work was manifested in his moto: Indigenizing at first and modernizing the next. According to Herder who advocated the folk character collecting and interpreting fork songs at that time, the terms of folk and nation were naturally equivalent in meaning. However, La considered folk music to be old things in the past, and national music to be new things in the future. La fully applied himself to the job of connecting both sides and especially expected to make reasonable Korean harmony which is accomplished from melodies of old folk music. His efforts provides useful examples on which the coming generations can reflect on the one hand, leaving them a task how to have popular appeal for national music on the other hand. 현대 작곡가로서 나운영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한국음악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함께 녹아있어야 했다. 그는 이러한 음악을 진정한 민족음악으로 보았다. 이를 위하여 한국의 민속음악이 먼저 민족성을 드러내는 기본 소재를 제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적 기법들이 개발되기를 바랐다. 이것은 '선 토착화 후 현대화'라는 그의 모토가 되었다. 음악에서 민중 및 민족 개념은 민요의 가치를 드높였던 헤르더에게서 비로소 자리를 잡는데, 그는 당시의 관습대로 민중과 민족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나운영은 민중의 민속음악을 과거의 것으로 보고, 민족음악을 미래의 한국음악으로 설정하였다. 그는 음악적으로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고, 이를 통해 특별히 합리적인 한국화성을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의 한국적 화성은 민속음악의 선율로부터 형성시킨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한편으로 후세들이 참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예들을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음악이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남긴다.

      • KCI등재후보

        1950년대 양악작곡가들이 상상한 국민음악: ‘국민’과 ‘민족’ 사이에서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8

        이 글은 1950년대의 음악계에 대한 고찰이다. 해방 후 일제잔재의 청산과 민족국가 수립을 염원하며 제기된 민족음악론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냉전의 논리로 변화하고 있었다. 분단 후 남한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국민가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민가요의 내용은 국민국가의 건설과정에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9년 공보처는 박태현, 윤용하, 이흥렬 등 우익 입장의 작곡가들이 쓴 국민가요를 당선시키고 학교 및 군대에 보급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창된 국민음악은 일제강점기 국민개창운동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쟁은 과거 제국에 봉사하던 음악가들이 남한의 악단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시체제하 만주에서 제국의 후생음악에 봉사하던 이흥렬, 박태현, 김동진 등은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 문화반원으로 활약하며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문화선전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피난지 부산에서는 ‘전시작곡가협회’가 결성되어 전시(戰時)동요작곡과 가극 등을 창작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목표는 군당국과 긴밀히 결합하여 전선에서 일어난 일을 음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전시작곡가협회 작곡가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민개창운동추진회에서 활동하며 재즈와 왜색 유행가 대신 국민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선다. 국민가요 작곡가들은 멸공과 북진을 강조했던 정권의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남한 악단의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주요작곡가들에 의한 국민가요 창작은 이후 남한의 악단에서 전개될 이분법적 분단음악사의 시작이 된다. 특히, 우익진영 음악가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많아 정권의 구미에 맞았다. 이들에 의해 창작된 국민음악은 호전적 성격의 노래가 많았는데 이와 같은 편중된 정치성이 순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개창운동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이와 같은 이분법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운영, 윤이상의 이후의 삶은 1950년대 그들의 활동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민족음악을 위한 열망은 1980년대의 민족음악론으로 다시 제기되었고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해 ‘민족’과 ‘음악’을 연결하고 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당대의 시대정신에 민감했던 선배 음악가들의 고뇌와 실천이 과거의 역사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된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음악인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will be an attempt to examine the music scene of the 1950s in Korea, the era of anti-Communism and the Cold War. A discourse on national music that was raised during the period of liberation led to the music history of the Cold War in the course of division and the Korean war. The attempt to attain national Integration by achieving the national state was taking place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1948, when ‘Kukmingayo(songs for the nation)’ were created and disseminated. These songs called ‘Kukmingayo’ or ‘Aegukgayo(songs for patriotism)’ were produced by recycling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and national music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urthermore, a song of the national memorial day was made by the government and music was attempted to emphasize nation than ethnic over the people, such as anti-communism and patriotism. The Korean war, meanwhile, was a golden opportunity for musicians who served the Japanese empire to settle down reliably in the South Korean music scene. Lee Heung-ryul, Park Tae-hyun and Kim Dong-jin began to play a more active role in cultural propaganda for the North Korean regime. On the other hand, in Busa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was formed to create wartime children’s song and lyric plays. Besides, they were combined closely with the military authorities to produce music. their goal has been embodied in the formation of the ‘Military Composers Association.’ Composers of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have been active in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since the mid-1950s. Also, they have been taken the lead in distributing national songs that could achieve national unity instead of jazz and Japanese-style songs. However, such activities were the beginning of a dichotomous divided Korean music history based on the premise of anti-communism and division. These activities were led by right-wing composers who faithfully followed the positions of the then regime. In particular, the combination of anti-communism, northern unification and pro-Americanism under Rhee's government was reflected in the creation of musicians. Christian musicians, especially those who defect from North Korea, were perfectly matched by the regime and were hiding their militant and divided music history under the slogan of purism. Nevertheless, not all musicians who participated in this dichotomy agreed. The later lives of Na Un-young and Yun I-sang, who have acted i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and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could indicate the fact that their activities in the 1950s were reflected in refraction in the context of the times. Desires for national music was re-collected into the national music theory of the 1980s, and through this history, it would be a task given to all musicians living in this changed era. Moreover, it could be a new age spirit to ensure that the suffering and practice of senior musicians who were critical to the zeitgeist of the times did not remain the only history of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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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나운영의 1942년 - 나운영의 초기 기악곡

        홍정수 민족음악학회 2023 음악과 민족 Vol.- No.65

        나운영의 일본 유학 시절 작곡한 년의 세 기악곡은 나운영 음악 1942 이 다른 단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그가 소년 시절에 사용하던 단순 삼화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작곡을 전공하는 음악대학생 나운영의 모델이 된 작곡가들은 드뷔시와 바르톡이었다. 드뷔시는 기존의 작곡학이 금한 것들을 사용 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음악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다른 문화권들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서양음악과는 다른 색다른 음악의 창출도 있었다 바로, 이 이국적 요소들은 나운영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드뷔시에게 "이국적" 인 것은 나운영에게 "민족적"인 것이 되었다. 특히 드뷔시 음악이 보여주는 오음음계 관련성은 나운영에게 좋은 모델이 되었다. 나운영과 바르톡의 상관관계는 완벽하게 해명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이유는 바르톡의 <어린이를 위하여>가 드뷔시의기법을 받아들여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나운영의 <어린이를 위한 이국풍>은 바로 이 바르톡의 교육서를 작곡의 모델로 삼은것으로 보이기에 어느 것이 드뷔시의 영향이고, 어느 것이 바르톡의 영향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나운영의 음악에는 드뷔시적인 것, 바르톡적인 것, 한국전통음악적인 것, 이러한 요소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는 드뷔시와 바르톡 음악방식의 일부도 "민족적"으로 해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오음음계, 빛음과 그림자, 미끄러지는 음, 병행음정의 연속, 이런 작곡방식이 그의 민족적 음악 추구에 활용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시김새와 같은 한국 전통음악의 특징은 나운영 음악에 민족적 성향을 더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적 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법들도 "현대적"이라 일컬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예스러운 기법을 현대적 방식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현대성은 흔히 단순한 음계를 벗어나면서 표현된다. 비음계음을 더욱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짧은 음들은 더 쉽게 음계를 벗어난다. 비음계음들이 많이 사용되면, 그 음악이 조성적 기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나운영은 그것을 '무조적'이라 생각했다 그의 현대성 추구의 음악은 크게 보아 '조성적'이지만 세밀하게 보면 '무조적'이라 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음악은 조성을 양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고인 것이다. 조성적 양면성은 나운영 음악 중 빛음과 그림자음, 그리고 긴 음과 짧은 음의 구성에서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중요한 음들'이 있고 '그 음들을 반영하는 또 다른 음들'이 있는 것이다. '적은 것들'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운영의 "민족음악"과 "현대음악"이 동시에 자랄 수 있는 틈새를 보여준다. 나운영의 1942년 기악곡들은 그 틈새에서 나온 새로운 한국양악을 보여준다. 1942년 작곡된 나운영의 세 작품은 그동안 연주가 자주 되는 편이 아니라서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초기 양악들이 거의 성악 위주로 연주되고 관찰되는 관계로 기악 작품에 대한 주목은 현저하게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이후에 오는 나운영 작품들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해방 이후 작곡 된 그의 성악곡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고, 1955년 이후에 더 현대화된 서양음악과의 접촉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작곡적 기초로 남아있다. 또한 세 작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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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과 아시아

        이경분 ( Kyungboon Lee ) 민족음악학회 2017 음악과 민족 Vol.0 No.54

        윤이상은 1967년 서베를린에서 남한으로 강제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간첩혐의에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독일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자리를 잡았지만,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음악가로 일생을 마감했다. 유럽작곡계에 진입하여 성공한 아시아 최초의 작곡가로서 윤이상의 현대 음악사적 업적은 ‘동아시아적 전통을 서양 예술음악의 언어로 재용해’했다거나 ‘아시아음악문화와 서구 음악문화의 본질적 특수성을 연결’시킨 것으로 칭송된다. 그의 위대함과 중요성이 거론될 때 윤이상 음악의 원천인 한국음악은 항상 ‘아시아’라는 상위개념 속에 용해되는 경향을 가진다. 그의 음악세계에서 아시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이상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서 아시아적인 것을 ‘중국과 한국의 궁정음악 언어만이 아니라, 도교나 불교적 특성을 담은 신화적 소재나 조형예술 소재들 전체를 지칭’한다. 하지만 윤이상이 말하는 아시아에 일본은 들어있지 않다. 그의 음악세계에서 일본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는가? 본 논문에서는 윤이상의 창작세계에서 아시아의 의미를 살펴보고, 윤이상과 일본의 관계를 조명하여, 이것이 그의 디아스포라적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서술하고자 한다. The most important achievement of Isang Yun in the Western contemporary music history is regarded as “translator of the Asian music aesthetics into Western music language”. Yun himself has often defined the origin of his music world comes from Chinese and Korean traditional music aesthetic. However, Japanese music seems not to have any place in his music world. Also in the interviews and lectures of Isang Yun Japan has been seldom appeared in the context of Asian music. On the contrast to this fact, the musicians among the Asian countries which Yun had the most familiar relationship with were the Japanese. And Yun has had twelve Japanese music students in his Berlin period, while Korean students were only few. Which role has Japan played in the music world of Isang Yun? This study explores meanings of ‘Asia’ in Yun’s Music world and the his relationship to Japan. To conclude, this article examines the question whether and how his diaspora life could be connected with a meaning of ‘Asian master’ which Yun might prefer to ‘Korean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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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음악 20세기 (2) : 홍난파와 못갖춘마디 노래 한국어와 음악 1 김희조와 그의 음악 洪蘭坡的不完全小節音樂 Hong, Nan-pa and incomplete bar music Kim, Hee-Jo und seine Music

        홍정수,김택완 민족음악학회 2004 음악과 민족 Vol.27 No.-

        洪蘭坡的不完全小節音樂體系, 在當時, 對韓國人來講是一種陌生的節秦體系 不管如比, 這種音樂 廣傳干韓國 在這里, 討論韓國語與洪爛坡的不完全小節音樂是否協和 這里以洪蘭坡的特定的節拍爲中心論述 結論爲洪蘭坡的不完全小節音樂比較吻合與韓國語 Kim, hee-jo war sein lebenslang als Berufsmusiker bzw. Berufskomponist ta¨tig und komponierte nicht umsonst Unza¨hlig viele Werke in verschiedenen praktischen Gattungen wie Orchestermusik, Chor, Tanzmusik, Filmmusik, Musical usw. Wie ein roter Faden aber zieht sich eine wichtige Charakteristik sein gesamtes Werk hindurch: na¨imlich die Koexistenz der koreanischen und westlichen Muslkelemente in seiner Komposition. Er verwendete in westlichen Musikgattungen wie Milita¨musik und Musical die koreanischen Elemente wie traditionelle Rhythmik, Pentatoniktonleiter usw, und fuhrte in die Volklorebearbeitungen fu¨r den Chor die funktionelle Harmonik ein. U¨herdies probierte er eine neue musikalische Form fur das koreanische traditionelle Orchester. Die Musik von Kim, hee-jo ist gar nicht kompliziert, sondern schlicht und einfach. Er komponierte immer die den gesellschaftlichen Bedurfnissen entsprechende Musik und versuchte zugleich die Koreanisiemng der Musik, die ihm in seiner Zeit schon genug europtiisiert erschien. Was ihm daher als wichtig und neu gilt, ist die Modernisierung und Popularisierung der koreanischen traditionellen Musik, wobei seine beliebteste Methode in der Aufreicherung der korealinischen tradtionellen Musik duch die westlischen Musikelemente oder umgekehrt. zu finden ist. So eroffnete seine Musik ihm nachfolgenden koreanischen Komponisten eine neue Kompositionsmoglichkeit, die zwsichen koreanischer traditioneller Musik und westlicher Musik, zwischen Spezialita¨t und Popularita¨t, ihre musikalische Identita¨t zu finden versu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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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실용음악학과 커리큘럼 연구

        양우석 ( Yang Woo Seok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6

        한국의 실용음악교육의 역사는 1988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30년이 되었다. 실용음악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학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보컬 전공은 602:1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산업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 대학의 실용음악교육은 연주 중심적 교육의 한계에 와있다. 특히 이미 세계 10권에 진입한 한국 음악산업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커리큘럼을 전공으로 개설해야 한다. 본고는 연구의 결론으로 대학의 실용음악교육이 음악산업의 빠른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며 다양한 음악산업 인력을 배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5개 전공을 제안하였다. 한국의 대학 실용음악교육은 뮤직 프로덕션, 레코딩 엔지니어링, MIDI 및 사운드 디자인, APP, 뮤직 비즈니스를 기준으로 특성화된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음악산업 발전과 세계적 경쟁력 확보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History of applied music in Korea has turned 30 years now in 2017 beginning from 1988. Applied music has become one of the most popular subjects, and particularly, the competition for majoring vocal music reaches 602:1. However, the applied music education at universities of now that cannot interact with music industry has reached the limit of performance-focused education. A new curriculum should particularly be extended to a major that can positively respond to the progress of music industry of Korea which has now been within top 10 in the world. The result of above analysis was compared to those of Canada, USA. and Japan in order to develop more objective curriculum. The performer-centered practical education period has settled down as a leading characteristic of applied music education in Korea passing through until now. In this study as a conclusion of research, 5 majors were proposed as a detailed method to raise various man forces for music industry in order for applied music education of universities to quickly respond to rapid change of music industry. Much expectation is taken so that applied music education at universities of Korea will creatively contribute to development of music industry now here and to securing competition ability in the world while forming characterized curriculum of its own based on aforesaid 5 majors including Music production, Recording engineering, MIDI and sound design, APP, and Music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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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80년대 한국 현대음악에서 독일문화원의 역할

        이희경 민족음악학회 2022 음악과 민족 Vol.- No.64

        오늘날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독일의 영향은 막강하다. 그런데 반세기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를 거쳐 냉전체제의 한 축에 편입된 한국 사회는 미국 문화에 강하게경도되었고, 1950-60년대 한국 클래식 음악계 역시 미국의 강력한 영향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50년간 한국음악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논문은 그 변화의 과정을 독일문화원을 통한 문화외교의 관점에서 추적해보려는 시도다. 전후 서독의 문화외교는 정부가 직접 나서기보다 독립성과 자율성을보장받는 독립적인 중개단체들을 통해 이뤄졌다. 1970년 대외문화정책을 독일 외교정책의 제3의 기둥으로 강조하고, ‘확대된 문화 개념’을 토대로 일방적인 문화전파보다 상호이해와 문화교류에 초점을 둔 문화외교를 전개했다. 1968년 설립된 주한독일문화원의 문화교류 기조도 당시독일 대외문화정책의 변화에 따라 ‘콘서트에서 교육 및 양국 음악가들의 협력으로’, ‘고전 레퍼토리에서 현대음악으로’ 강조점이 이동했다. 독일음악가들의 내한 때 한국 파트너들과 협업하도록 주선하고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한국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것, 내한공연이나 강연 프로그램에현대음악을 강조하고 ‘범음악제’의 공동 주최자로 나선 것 등이 이런 정책변화에 따른 결과다. 최근 몇 년간 한국 근현대예술사를 문화외교나 문화냉전의 시각에서 해석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50-60년대 미국중앙정보부(CIA)의 지원을 받은 수많은 민간 재단들을 통한 활동들이 주요 연구대상이다. 전후 미국의 냉전 문화정책의 최전선이기도 했던 서독은 같은분단국가였던 한국과 어떤 관계 맺기를 시도했을까? 1970-80년대 독일문화원이 한국에서 수행한 역할은 이전 시기 미국의 문화외교와는 어떻게 달랐을까? 오늘날 한국음악계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위상은 이 시기독일문화원의 적극적인 활동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이 논문은1970-80년대 한국음악계에 미친 독일문화원의 역할에 집중하여 위의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실증적 근거들을 마련해보려 했다. 이에 적극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작업은 좀 더 많은 연구가 축적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 KCI등재후보

        록음악의 편곡에 관한 연구 그룹사운드 TOTO의 「Georgy porgy」 분석을 중심으로

        고덕주 ( Go Duck Ju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6

        많은 사람들이 록음악이 화성의 법칙에 무지하다는 편견을 가진다. 게다가 전형적인 록음악의 형식이 시끄럽고 공격적이라고 여긴다. 그러한 음향적 성격이 록음악에 쓰인 화성의 재구성과 독자적인 리듬의 기교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으로 음악의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 왔다. 전통화성의 방식에서 파생된 기법으로 실용적인 화성의 기법을 활용함은 물론 리듬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록음악의 연주자들은 반복되는 화음의 다양함을 위해 기본화음에 부가할 수 있는 또는 선법적인 가능성에 입각한 음들을 합성하거나 5음 음계적 방식을 활용한 기법을 통해 화성을 이루었다. 리듬에 있어서는 연주할 음을 음악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지점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음악적인 왜곡과 함께 그 흥겨움을 더하게 하였다. 그룹사운드 TOTO가 작곡 및 편곡한 「Georgy Porgy」를 통하여 이러한 방식을 자세히 연구해 볼 수 있다. 1978년 처음 발표된 이래 이 곡에 쓰인 이러한 기법은 많은 록음악의 연주자들이 원곡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한 이 두 방식의 활용은 원곡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채롭게 변할 수 있는 음악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요소이며, 이것이 록음악에서의 음악적 가능성을 확대하는 기법이 되게 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록음악의 음악적 선입관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음을 기대해 본다. Many people have a preconception about Rock music. They think it is ignorant about harmonic rules. In addition, the original style of Rock music is loud and aggressive. So, the sound makes it harder to comprehend re-harmonization methods and its own rhythmic skills. However, it has been improving its techniques in two ways. It is improving not only practical harmony which is graft onto classical theory, but also a physical approach to rhythm. It has become one of the essential pieces of Rock music. For variety’s sake on sequencing chords, they harmonized tension notes, modal options, and pentatonic systems. For rhythm, playing a note placed at different point changes the music. It becomes distorted musically and adds ‘Groove’. To study those reasons in detail, I selected the song 「Georgy Porgy」 composed and arranged by TOTO. After that song was exposed in 1978, many Rock musicians have tried to utilize those methods for refreshing their composed tune. It represents how those two ways should be the key to transfigure music keeping originality. Finally, these methods amplify musical possibilities in Rock music. I hope to change the biased view against Rock music to a positive angle with this research.

      • KCI등재

        문화냉전 시기 남북한 민족예술의 경합: 1950-70년대 해외공연을 중심으로

        김희선 ( Kim Hee-sun ) 민족음악학회 2021 음악과 민족 Vol.- No.61

        이 글은 문화냉전의 차원에서 전개된 남북한 국제적 경합의 전개를, 냉전이 가장 극심하게 대립되던 1950년-1970년대 진행된 남북 민족예술 해외공연의 양상을, 남한에서는 정권과 민족예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북한은 사회주의 민족예술의 전개 단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면서, 민족예술이 냉전 정치학에 호명되어 냉전 민족주의(허은 2011)와 냉전 세계주의(클라인 2017)를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았던 북한은 민족예술의 국제경쟁에서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하는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주도 체제는 문화냉전의 국제경합에서 유리했다. 반면 초기 남한의 문화예술보다 아시아의 반공의 보루로서만 관심을 두었던 미군정과 민족적인 것의 발굴하고자 했지만 경제·정치적 입지가 약했던 초기 정권에서 민족예술을 통한 국제경합은 열세에 놓인 상황이었다. 남북 민족예술의 해외공연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시기는 1960년대이다. 세계적 냉전의 심화, 아시아 역내 정치학의 변화, 남북관계 등이 역동적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 북한은 인민을 위한 균질화된 민족예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공연양식으로 해외공연을 확대하였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이 시기 남한의 해외공연은, 정권의 조국 근대화와 반공 민족주의의 역군으로 호명되며 미국 문화냉전 전략과 틀 안에서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 호명된 민족예술과 반공과 근대화의 역군으로 호명된 남한의 민족예술은 각각 체제유지와 국제경합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주체사상에 기반한 <피바다>식 혁명가극의 양식을 확립하여 1970년대부터는 해외공연의 주요 종목으로 채택하게 된다. 유신헌법과 함께 더욱 강력한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부흥을 내세우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작동시켰던 박정희 정권의 1970년대는 국립단체를 중심으로, 남북 민족예술 국제경합에 적극적 대응에 나서며 대규모 공연단을 해외에 파견하면서 민족예술의 국가봉사를 더욱 강조하였다. 당대 글로벌 문화냉전은 한반도의 민족예술의 수립에 근간으로 역할 했고 특히 해외공연의 레퍼토리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국가적 유용성과 민족주의적 경합은 국내적으로도 민족예술의 위상에 영향을 주었다. 미-소 군정기에 보여주었던 서구식 문명화를 향한 동경, 타자를 통해 민족예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자 한 점, 민족예술에 대한 근원적 고민보다 국민통합과 국제경합의 도구로 민족예술을 위치시킨 점은, 그 과정에서 구축된 민족예술 결과물의 벌어진 간극을 초월하여, 남북이 거울처럼 서로 비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문화냉전의 차원에서 전개된 해외공연을 통한 남북 민족예술의 경합은 ‘이념성’, ‘민족성’, ‘문명화’의 과시이자 경쟁이었고 이후 한반도 민족예술의 향방을 결정짓고 있음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This paper explores the international competition between two Koreas under the context of Cultural Cold War, through overseas performances of traditional performing arts of both Korea from the 1950 to 70s. The occup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by the U.S. and the U.S.S.R after World War II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wo Koreas in 1948 and the peninsula’s positioning as the battlefield in a Cold War. “National” discourses as well as ideology have been emphasized to demonstrate ideological superiority. In this situation, the two Koreas have competed in terms of their respective Koreanness, by preserving and reinventing “traditions.” Domestic and international propaganda on systemic, ideological, state, national authenticity has fed on “Cold War Nationalism” (Heo, 2011) and “Cold War Cosmopolitanism” (Klein 2017), and traditional performing arts became very effective means of propaganda for international competition between the two Koreas. In the post-war period, South Korea was not able to organize its cultural infrastructure at a state level. The first international performance tour was organized by the nation, but funded by the USIS. Other performing troupes were also sent to Free Asia Alliance nations. In the 1960s, several traditional performing arts troupes made performance tours of the US, supported and invited by Cold War-related institutions including the Asia Foundation. During the 1970s, more strong nationalistic yusin rhetoric forced national performing arts troupes to serve the nation through traditional performing arts and performed frequently throughout the world than before and it was based on cold war competition. North Korea led the way in systemizing national art troupes for international tours. It re-organized the cultural infrastructure and artist groups beginning in the 1950s to prove the superiority of its system and competing “Korean-ness”. The North frequently dispatched folk performing arts troupes, including Choe Seung-hui, to socialist alliance states on tour. North Korea expanded its diplomatic relations beyond USSR, China and Socialist alliance nations during the 1960s. Along with its establishment of socialist revolutionary opera during the 1970s, North Korea expanded its overseas performances to other part of the world. This paper examines the competition between the two Koreas’ national discourses in the Cold War period, focusing on international performances of traditional performing arts between 1950s and 1970s. At the same time, it reveals that the internal politics of the peninsula intertwined with the global Cold War have defined the direction of modernization of traditional performing arts in both Koreas, in completely opposite 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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