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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장동(壯洞) 김문(金門)의 부자간 수창시(酬唱詩) 연구

        강혜선 돈암어문학회 2019 돈암어문학 Vol.35 No.-

        This paper examined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poetry exchanged between father and sons of Jangdong Kim's family. The father and sons of Jangdong Kim's family enjoyed writing poems together. Kim Suhang wrote poems while traveling or living with his sons in Yeongam, Cheolwon, and Jindo, the exile sites. He also wrote poems while traveling or living with his sons in Baegunsan Mountain and Sambuyeon, where his sons stayed. Kim Suhang’s six sons also inherited his father's poetic tendencies. Kim Changjip exchanged poems with his son Kim Jekyum at exile Geoje Island, Kim Changhyeop exchanged poems with his son Kim Sungkyum at Baekunsan Mountain, and Kim Changhyup exchanged poems with his son Kim Yangkyum at Baekdam and other places. In these poems, the fathers and sons sometimes became comfortable and pleasant companions, sometimes consoling each other. First of all, they became friends who wrote poems together. They naturally embodied Jin shi(眞詩) in the process of writing poems in earnest about the emotions and the scenes they felt while traveling through the mountains and about the feelings they felt when they spent their daily lives with their family. 본고는 부자(父子) 사이의 한시 수창(酬唱)이 매우 활발하였던 조선 후기 장동(壯洞) 김문(金門)을 대상으로 부자간 수창시의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김수항(金壽恒)은 유배지 영암, 철원, 진도에서, 또 둘째 아들 김창협과 셋째 아들 김창흡의 은거지인 백운산, 삼부연 등에서 함께 생활하거나 여행하면서 여러 아들과 활발하게 한시를 수창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첫째 아들 김창집(金昌集)은 유배지 거제도에서 김제겸(金濟謙)과, 김창협은 백운산, 미호 등에서 김숭겸(金崇謙)과, 김창흡은 백담 등에서 김양겸(金養謙)과 한시를 수창 하였다. 부자가 산수를 여행하며 주고받은 대량의 산수기행시들을 통해, 장동 김문의 아버지와 아들은 때로는 편안하고 즐거운, 때로는 위로가 되는 삶의 동반자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부자는 좋은 시우(詩友)가 되었다. 이들 문인은 가족과 함께 일상을 나누는 정감과 산수를 직접 밟으며 보고 느낀 정경을 진솔하게 한시로 써나가는 과정에서 진시를 자연스럽게 구현해 나갔다.

      • KCI등재후보

        만화『토지』가 보여주는 매체 전환의 한계

        김예니(Kim, Ye-Nie) 돈암어문학회 2017 돈암어문학 Vol.31 No.-

        본고는 소설 『토지』기 One Source가 되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현 상황을 검토하면서 가장 최근 각색된 만화 『토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만화 『토지』는 작가 오세영에 의해 1부가 제작되고 2부부터 5부까지는 박문영작가가 뒤를 이었다. 소설20권의 분량을 만화17권으로 옮기겠다고 기획한 만화 『토지』는 원작에 대한 훼손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만화 『토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만화가 가진 서사양식의 특징을 먼저 살펴야 한다. 만화는 그림기호, 언어기호, 복합기호로 구성되어 있고 칸에 의해 서사가 진행된다. 여러 칸이 모여 하나의 장면이 완성된다. 그래서 칸과 칸 사이 비어 있는 여백, 홈통에 대한 이해를 전재하고 칸과 칸 사이 그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워내면서 만화는 적극적인 독자의 개입을 유도한다. 그리고 말풍선과 그림, 그림문자 등이 상호보완적으로 독자에게 의미를 제공하고 이를 기본으로 만화의 스토리는 보여줌(showing)으로써 진행된다. 만화 『토지』는 만화적 서사양식에 비추었을 때, 과도하게 문자가 많은 것이 한계라 하겠다. 부족한 지면위에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훼손 없이 모두 해내려다보니 그림보단 말풍선과 나래이션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가독성이 떨어지고 그림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이 반감되기에 언어기화와 함께 상호보완적인 의미체계가 기울어지면서 온전한 즐거움을 전해주기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만화 『토지』는 원작에 대한 훼손 없이 줄거리를 전하고는 있지만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인물의 내면이나 심리상태, 그리고 인물에 대한 서사 등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특히, 악인에게 더욱 많이 나타나는데, 조군구나 임이네가 그 예에 해단한다. 수많은 인물들을 회화적으로 구별하여 표현하는 것도 어려운 조건에서 인물에 대한 입체적 표현을 위해 더 많은 회화적 노력을 기울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화 『토지』는 1부와 2부 이후의 이야기가 각각 다른 작가에 의해 창작되면서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가장 큰 것은 지면의 제약인데 1부가 8권에 걸쳐 이야기 된 것에 반해, 이후의 이야기는 9권에 이야기를 압축해야 했기에 지면상 회화적인 실험과 모색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래이션은 소설의 몇 부분이 발췌되어 옮겨지고 수많은 나래이션과 말풍선으로 서사는 진행되며 인물들의 표정이나 분위기, 인물의 심리를 암시하는 추상적인 회화적 표현은 상당히 줄어들어 줄거리 전개에 급급한 모습을 띠었다. 만화 『토지』가 보여주는 한계를 통해 소설이 만화로 옮겨질 때는 만화가 가진 특징을 고려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애초 17권의 기획이 만화적 실험을 모색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제한된 지면이 문제였다면 아예 전형화와 단순화,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중심서사 위주의 스토리로 각색하는 것도 만화라는 장르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아니면 아예 소설과 다른 편과 장으로 나눠 사건 중심으로 장을 나누고 매 장마다의 중심인물을 분류하고 영화나 드라마로 치면 옴니버스나 시트콤과 같은 형식으로 스토리를 각색하는 것도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기획 단계부터 회화적 실험의 모색까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만화 『토지』였다.

      • KCI등재

        『월촌두시』 언해문 연구

        김성주(Kim, Seong Ju) 돈암어문학회 2020 돈암어문학 Vol.38 No.-

        이 글은 의성김씨 삼대종택에서 한국학진흥원에 기증한 『월촌두시』에 필사된 ‘두시언해’ 언해문의 특징을 살펴본 글이다. 이 책의 언해문은 『두시언해』 〈초간본〉 중 ‘유포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며, 초간본 언해문을 충실하게 필사하려 태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언해문 필사의 특징으로는 먼저 언해문의 필사에 구결자를 사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사용한 구결자는 ‘(가)’ 등 총54개이다. 필사본이기 때문에 필사할 때의 잘못도 보이지만 『두시언해』 〈초간본〉의 언해문을 비교적 충실하게 필사하였기 때문에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초간본〉의 언해문대로 필사하지 않고 당시의 음운 현상 예를 들어 음절 말 ‘ㅅ’과 ‘ㄷ’의 혼기와 같은 17세기의 음운현상도 나타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두시언해』 〈초간본〉의 언해문을 충실하게 필사하였기 때문에 현재 전하지 않는 〈초간본〉 권1, 2, 4의 언해문을 재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transcribed Eonhaemun in the Wolchondusi(月村杜詩), which was donated to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by the Samdaejongtaek(三臺宗宅) of the Uiseong Kim Clan. This book is based on “Yupobon(流布本), a circulated version” not on “Kyojeongbon(校訂本), a revised version”, which was one of the first published version of the Tusieonhae(杜詩諺解). As a feature of the translation of Wolchondusi, I point out the fact that a total of 54 Kugyol characters, including ‘ka()’, were used in the translation. Although it was relatively faithfully transcribed the translation in the first published version of Tusieonhae, it still has some mistakes in transcription. In some cases, we can see the phonological phenomena of the 16th century through some confused orthography for instance, words containing ‘ㅅ’ and ‘ㄷ’ as their final of syllables. However, as a relatively faithful transcription of the first published version of Tusieonhae, this book will help to reconstruct the first published version of Tusieonhae vol. 1․2.4th which do not circulate currently.

      • KCI등재
      • KCI등재

        『燕轅日錄』에 나타난 기녀의 생활과 애환

        김남기(Kim Nam-ki) 돈암어문학회 2007 돈암어문학 Vol.- No.20

        『燕轅日錄』은 1888년과 1889년에 冬至使行을 배종한 저자미상의 연행록으로 白話文으로 썼는데, 기녀들의 歌舞樂과 연희 등의 공연 상황, 그리고 그녀들의 일상생활의 모습과 애환을 집중적으로 기록하였다. 본고에서는 『연원일록』을 통하여 19세기 후반 서도 출신 기녀의 삶의 양태, 즉 그들의 다양한 기예의 공연 상황, 의식주와 관련된 기본적인 생활 부분, 삶의 애환과 그에 대한 인식 등을 고찰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기녀는 十二歌詞, 十二雜歌, 西道雜歌, 民謠, 時調 및 歌曲唱, 歌辭, 辭賦 등을 가창하였고, 〈瑤池獻蟠桃舞〉, 〈彩鳳悅親舞〉, 〈得勝奏凱舞〉, 〈項莊舞〉, 〈馳馬術[馬上劍舞]〉 등 여러 춤과 연희를 공연하였다. 19세기 후반 서도에서 공연되던 歌舞樂과 연희의 연행 양상은 물론이고 기녀들의 이력, 공연의 형태와 상황, 기예의 습득과정, 저자의 감상평, 나아가 관람자들의 반응 등을 적어 예술사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 또한 저자는 기녀들의 복식과 치장, 먹는 음식, 주거의 상황 등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적었다. 각종 공연에 비하여 의식주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게 기술되었지만 당시 기생들의 삶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유하원의 아내인 退妓 난혜의 경우 馳馬術을 할 때의 차림새, 그녀가 사는 집안의 건물과 조경, 실내의 집기 등을 상세하게 적어 주목된다. 아울러 기녀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녀들이 겪는 삶의 애환, 즉 생계의 곤란함과 미래의 암담함, 만남과 헤어짐에서 오는 숙명적인 아픔 등을 절실하게 표현하여 기녀들의 생활상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Yonwonilrok recorded the public performances and daily lives of the official dancing girls, and sorrow-joy of the official dancing girls intensively. This dissertation investigated the public performance, the food, clothing and shelter and life of the official dancing girl in Pyongan and Whanghae-do in 19century latter half. The official dancing girl various was performed the song, the dance and the play. The writer in addition wrote career of official dancing girls, Form and situation of public performance, process of accomplishments, appreciation criticism of writer, reaction of spectators etc. It gives a help to art-history research consequently. Also the writer wrote the dress and embellishment and the food, the house situation of the official dancing girls. It is paid attention specially the dress and embellishment, building and landscape architecture, Things in household of Nanhae. The writer earnestly was wrote life difficulty and Future gloominess, pain of meeting and separating. Consequently becomes the place help which observes the life of the official dancing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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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신화』의 『전등신화』 수용 의미와 금기의 문학적 형상화

        엄태식(Eom, Taesik) 돈암어문학회 2014 돈암어문학 Vol.27 No.-

        『금오신화』의 『전등신화』 수용 양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금오신화』의 주요 서사 단락이나 화소 가운데 『전등신화』와 전혀 무관한 것은 없으며, 『금오신화』의 개별 작품들은 『전등신화』에 실려 있는 여러 작품들을 조합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시습은 독자로 하여금 『전등신화』와의 비교를 통해 『금오신화』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금오신화』의 독법은 이와 같은 조합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과 배제 및 변주의 의미를 읽어내는 데 있다. 『금오신화』 다섯 작품의 배열순서는 작자 김시습이 겪었던 일들의 시간적 순서에 따른 것이며, 그것은 모두 당대에 금기로 여겨졌던 일들의 우의이다. 우의에서는 작자의 의도가 너무 쉽게 드러나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난해에서도 안 된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전등신화』의 범위 안에 두고자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 그는 결국 독자들이 『전등신화』를 통해 『금오신화』를 읽음으로써 우의의 의미를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What’s notable in the aspect of Geumosinhwa’s acceptance of Jeondeungsinhwa is that there is no major narrative paragraph or motif in Geumosinhwa that is irrelevant to the story of Jeondeungsinhwa. The individual literary work of Geumosinhwa rather appears to be a combination of literary works of Jeondeungsinhwa. Gim Siseup leads the readers to read Geumosinhwa through the comparison with Jeondeungsinhwa, and this reading method focuses on understanding the implication of selection, exclusion, and variation that took place between the combinations of literary works of Jeondeungsinhwa. The five literary pieces of Geumosinhwa are arranged in chronological order of what the writer Gim Siseup experienced, and they are all allegories of what had been considered as taboos at the time. In the case of allegory stories, the author’s intention should not appear on the surface too easily, and at the same time, it should not be too difficult for the readers to grasp. This is why Gim Siseup tried to keep Geumosinhwa within the boundary of Jeondeungsinhwa; that is to say, he hoped that readers would understand the implication of allegory by reading Geumosinhwa through the frame of Jeondeungsinhwa.

      • KCI등재후보

        ‘48체제’와 38선 이남의 내적 난민들

        김준현(Kim, Jun-hyun) 돈암어문학회 2017 돈암어문학 Vol.32 No.-

        이 글은 기존의 역사학적/정치학적 연구 성과들에 의해 축적되었던 논의들과 1948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몇몇 소설 작품의 독서를 통해 ‘48년 체제’ 하의 38선 이남에서 발생하였던 ‘내적 난민’에 대해 논의하였다. ‘내적난민’이라는 기호를 통해 상상된 국가와 실재한 국가 사이에서 지식인들이 내적으로 방황했던 내러티브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시기의 ‘월경’이나 ‘전향’의 문제와 관련된 논의는 상당히 축적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월경’과 ‘전향’은 분명한 행위의 지표를 갖고 있는 개념들로서, 이 기호로 당대의 인물군을 분류하거나 호명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유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월경이나 전향과 같은 ‘주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행위를 했던 주체들만이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겪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국민 정체성의 경계를 넘거나,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포기/변경하는 일은 재외동포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민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음이 간과되어 왔다는 것이 이 글이 ‘내적 난민’이라는 기호를 내세우는 배경이 된 문제의식이다. ‘내적 난민’은 월경하지 않았으나, 내적인 난민상태를 겪었고, 그것이 48년 체제 특유의 ‘선언된 국가와 실재한 국가 사이의 괴리’를 겪어야 했던 38선 이남 한반도의 시민들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이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루어진 48체제 하에서,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상정된 국가, 헌법을 통해 선언된 국가,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고 작동했던 국가 사이의 거리는 은밀하게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를 ‘나라 잃은 상태’, 즉 ‘난민 상태’로 만드는 결과를 빚었다. 해방과 국가 수립 사이의 정식으로 국가가 출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이 느꼈던 이역감, 즉 소외감은 48체제 수립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48체제 38선 이남의 ‘내적 난민’들에 얽혀 있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그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성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정식으로 국가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구호’나 ‘감시’의 대상이 된 난민들은 실제로 국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은밀하게, 혹은 선언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대한민국 국민이 ‘난민’의 정동을 완전히 탈피하고 주체적 국민의 위치에 서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거나, 아직 그 과정이 진행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argues about the "inner refugees" in "48 system" below the 38th parallel in the Korean peninsular by reading novels and stories published in 1948~1950. The "48 system" refers to the situation or condition of the Korean peninsular after the foundations of the single governments of North Korea and South Korea, which made a huge number of converts by declaring the others "dummy" governments. And also, there are a great deal of ideological alterations which can not be defined as "exile", or "covert" in the Korean peninsular in the period. The people in the period had to suffer their ideological alteration without crossing the border, or announcement of convert. "inner refugees"(instead of the Constitution, national security Law operated Korean government at the time) is the word created to define the people who suffered that kind of alteration in "48 system". The gap between the "introduced nation" and the "operated nation" made Korean people "inner refugees", because it derived them from the right to create and change the nation by their own will. The people in ‘48 system’ failed to gain the full identity of "citizen", and were treated as the objects of aid and surveillance, which make them look like "refugees" who didn"t cross the border. Because of the problem of the identity, Many citizens of the republic of Korea had to hesitate to express their political opinion, and to practice their political acts. This status had been made clandestinely and silently thanks to the gap between the two (introduced and operated) nation, which blocked a way of the Korean people gaining the identical and practical position of the "citizen". As several dictator ships were attempted and practiced continuously for more than 30 years from the foundations of the single governments in 1948, the status "inner refuges" endured for many years and played a part of political obstacle for Korean citiz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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