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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다산의 퇴계관 -『여유당전서』 시문집에 한하여-

          김언종 ( Eon Jong Kim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1 다산학 Vol.- No.19

          퇴계에 대한 다산의 견해를 재검토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학술적 흐름의 계승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퇴계와 다산이 각각 성리학 중심의 조선 중기 학술계와 실학 중심의 조선 후기 학술계를 대표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퇴계에 대한 다산의 견해에 대하여 (1) 퇴계의 가학 연원, (2) 다산의 『도산사숙록』에 비친 퇴계의 모습, (3) 이자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4) 이기설에 있어서의 다산의 퇴계관으로 각각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성호 이익의 사상과 학문을 흠모하고 존경했던 다산은 성호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는 퇴계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퇴계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가학의 연원 역시 찾아 볼 수 있는데 다산의 9대조인 정응두가 퇴계와 조반朝班에 함께 했으며 그의 아들 정윤희가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다산이 유년기에 이미 『퇴계집』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다산은 퇴계의 사상을 깊이 고찰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가 금정에 있을 무렵 작성한 『도산사숙록』을 통해 나타난다. 『도산사숙록』에 담긴 33칙의 연의에는 퇴계라는 위대한 지성에 비친 다산 자신의 결점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드러나 있다 『도산사숙록』에서 다산이 퇴계에게 사숙하고자 한 것은 대부분 인격 함양에 관한 것이었다. 퇴계와 다산은 고려시대의 인물인 이자현에 대해 견해를 달리한다. 정인지를 비롯하여 서거정 및 정효항 등은 이자현에 대해 유학을 배웠으면서 유학자의 본문을 팽개치고 이단인 노불에 심취했다고 하면서 극력 비판한 반면 퇴계는 이러한 당시의 비난이 이자현의 높은 지조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자들이 지어낸 근거 없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이자현이 불교와 도교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이자현의 고결한 지조를 추존했던 퇴계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다산의 퇴계관은 이기설을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에는 퇴계와 율곡으로 대표되는 이기설을 둘러싼 논쟁들이 있었다. 다산은 이에 대해 퇴계와 율곡이 리와 기를 논하고 있지만 각자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다산의 견해에 의하면 퇴계 이기론의 지향점은 부분적專인 것에 있으므로 그 논의가 주밀하고 상세하고 율곡 이기론의 지향점은 전체적總인 것에 있으므로 그 논의가 소활하고 간결하다고 본 것이다. 이를 통해 두 학자의 이기설을 인정하면서 각 학파의 특징을 포착하고 그 이해의 합일점을 절충하고자 한 다산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다산은 50세 이후에 결국 성리학과 결별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인간의 심성에 내재한 측은·수요·사양·시비는 단지 마음일 뿐 인의예지는 그러한 마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이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에 있다고 보게 된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은 정주·퇴율 이래의 성리학설과 크게 다른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산 사상이 실학사상으로 귀결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정주 성리학의 절대 명제인 태극과 리에 대한 다산의 전면적인 부정은 퇴계학 뿐만 아니라 정주 성리학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퇴계에 대한 계승과 반동은 조선시대 학술계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항으로서 향후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 Reviewing Tasan`s opinion about Teogye is an important clue about the succession of academic stream during the Chosun Dynasty because both scholars are recognized as great men in Korean history. In this paper, I examined Tasan`s opinion about Teogye like following: 1 tracing the origin of academic correlation between Tasan and Teogye, 2 the feature of Teogye suggested in Tosansasukrok, 3 divergent views on Lee Ja-hyun, 4 opinion about the force理 and the function氣. As Tasan was an admirer of Seongho, he accepted Teogye`s theory naturally. And Jeong Hee-jo, who is a collateral family of Tasan, once studied under Teogye. Therefore Tasan had a chance to learn of Teogye-jip from early, and he wanted to organize Teogye`s theory soundly. While Tasan was demoted to an unimportant post, he wrote Tosansasukrok. In this writing, he mentioned noble character and behavior of Teogye to examine himself. However it does not mean that he totally agreed to Teogye`s theory. And we can get a sense of his stance from the estimation of Lee Ja-hyun. Teogye actively justified Lee Ja-hyun`s conduct of life against harsh criticism proposed by former people. Though Tasan recognized Teogye`s favorable comment on Lee Ja-hyun, he did not follow Teogye`s point of view. We also can see Tasan`s opinion about Teogye clearly from the view about the force and the function. There are a lot of argument in Chosun Dynasty about the theory of the force and the function established by Teogye and Yulgok. On closer examination, Tasan presented a compromise proposal. According to his analysis, Teogye and Yulgok had respective aim from the theory of the force and the function. He thought that Teogye focused on fragmentary parts while Yulgok focused on overall parts. In his thought, their theory can not be distinguished between right and wrong as each theory has its own goal. Furthermore, Tasan declared a seperation from Neo-Confucianism. This means a lot, because Tasan wanted to overcome the influence of Neo-Confucianism. Therefore, I think Tasan`s opinion about Teogye is an important clue about the academic history through Chosun Dynasty. In this paper, I examined his theory based on his own literary works as a first attem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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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정다산(丁茶山) 재발견의 의미 -신문,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하 ‘다산’ 혹은 ‘정다산’) 관련 기사 및 논고를 토대로 당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재발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정다산’의 연구와 ‘언론 매체’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는 바로 1930년대에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때문이다. 그 핵심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고 협조를 거부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들 즉 안재홍安在鴻(1891~1965)·백남운白南 雲(1895~1979)·최익한崔益輪(1897~?) 등이었다. 그들이 펼친 조선학은 ‘조선문화 부흥’의 일환이며, 그것은 문화제국주의의 한국학인 ‘청구학靑丘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 대립되는 양자는 ‘한국사회·한국문화 특수성론’으로 공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자가 후자의 전도형태 顧倒形態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다산에 대한 연구는 1934년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 서거 98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들은 조선학 부흥운동을 꾀하면서 그 일환으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비롯하여 여타의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역시 193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2면 기사에 「茶山與觸堂全書 完刑記念祝寶 來十六日 明月館에서」 라고 있는 것처럼, (1934년에 시작하여) 1938년 12월에 이뤄지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新朝雖社 출판)의 완간 작업이었다. 『여유당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인물로는 실학 관련 기사를 쓴 정인보, 최익한, 문일명文一平(1888~1936), 안재홍 등이다. 최익한은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힘」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 ‘정다산`은 분명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개념, 인물을 새롭게 영유領有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 싼 좌의 ‘세계’ 지향과 우의 ‘민족’ 지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근대적’ 학술의 논의가 진척되었고 ‘허虛의 학’을 넘어선 ‘실實의 학’을 추구해가는 절실한 논의의 지명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크게는 〈구(전통-구식)〉⇔〈신(현대-신식〉이 극명하게 대립되고, 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익’측에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 논리로 포괄적인 민족사상 및 학문의 전통 확립을 위해 정인보鄭寅普가 ‘얼’을, 안재홍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분일평이 ‘조선심朝鮮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주도해갔다. 이에 반해 ‘좌익’측에서는 이청원,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세계사의 보편성에서 한국사체계를 구성해 사회경제사학을 확립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세계’에 관심을 둔 좌, 민족에 관심을 둔 우의 ‘시점視點’은 정다산, 실학, 나아가서는 조선학을 서술해가는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정다산 논의는 ‘민족民族’과 ‘세계世界’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Tasan Cheong Yagyong in japanese imperialism era, especially, here focused the media and the journal in those days. In 1935,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Tasan Cheong Yag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eongwon and Seo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Tasan Cheong Yag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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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茶山)의 고거학(考據學)에 관한 시론(試論)

          펑린 ( Lin Peng ) 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다산학 Vol.- No.6

          고거학考據學은 중국학술사에서 매우 독특한 학문분야로서 명말·청초明末淸初에 발생하여 18세기 청나라 건가乾嘉 시기에 가장 왕성하였으며, 그 이후의 학술의 진행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과 인근隣近한 조선에서 고거학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이 글에서는 단지 조선시대 고거학의 대표적 인물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양국兩國 고거학의 동이同異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위작(僞作)이라고 본 『매씨서평梅氏書平』에 대하여 다산은 염약거의 뒤를 이어 전면적으로 매씨의 『고문상서』를 정밀하게 고증하여 종합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리고 다산은 『상서』학을 깊이 연구하여 『상서고훈 尙書古訓』 7권과 『상서고훈서례尙書古訓序例』를 저술하였으며 29편의 금문으로 된 『상서』에 대해서 일찍이 그 편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말해서 매본梅本에 대한 다산의 고거考據방법은 염약거와 완전히 일치하며, 이 점은 건가乾嘉시대 학자들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다산은 『상서』학을 깊이 연구하여 『상서고훈 尙書古訓』 7권과 『상서고훈서례尙書古訓序例』를 저술하였으며 29편의 금문으로 된 『상서』에 대해서 일찍이 그 편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다산은 정현鄭玄의 학문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정현은 건가乾嘉시대의 고거학考據學에서 최고권위의 지위를 지니며 건가시대의 학술은 정현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러나 정현의 주에 대한 다산의 공격은 문자의 訓?훈고에서부터 경문의 대의大意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의 『경세유표經世遺表』와 『흠흠신서欽欽新書』는 모두 정현에 대한 힐난하고 꾸짖는 것이다. 정현의 주에 대한 다산의 비평은 정확한 견해가 많지만, 정현에 대한 다산의 비평에 오독誤讀과 오판誤判의 현상도 적지 않다. 한편 다산은 문자의 고정考訂에도 힘썼다. 유가의 경전은 상고시대의 작품으로 언어환경은 청대淸代와는 매우 다르며, 경적經籍의 문자는 모두 고음古音·고의古義를 사용하였다. 이른바 고거학考據學이라는 것은 곧 고대문헌의 문자의 형태·소리·의법儀法과 전장제도를 고증하여 경전의 뜻을 발명하는 것이다. 다산은 분명히 금문과 고문의 문제를 의식하여 경중輕重을 충분히 비교하였으며, 경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깊이 있는 경학연구를 촉진하기 위하여 반드시 독자들로 하여금 한대漢代의 문건들의 동이同異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다산처럼 금문과 고문에 충실한 학자는 조선시대에 결코 많지 않았는데, 여기서 그의 경학에 대한 심후한 수양이 반영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고거학 연구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 조선정부와 지식인들은 청나라 사람을 호로胡虜(야만인)로 보아, 청나라의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원에서 학풍이 크게 변하여 고거학이 대대적으로 발흥하여 일어날 때 조선의 학술계는 성리학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어 조선성리학의 특색을 유지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산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은 고거학의 연구에 몰입하여 조선의 고거학考據學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나 동시에 그 한계도 있었다. The Evidential Learning of the Ching which appeared in the late Ming and early Ching is a unique field in the Chinese academic history. It was flourishing in the 18th Qian-Jia period, had an influence on the academic course after that. Then, how was the Evidential Learning in Chosun neighboring in China? Through analyzing on Tasan Cheong yagyong(1762~1836)`s Evidential Learning we can understand how different they were. First of all, Tasan made a thorough investigation of MaeSsi(梅색)`s KoMunSangSo(古文尙書) and presented in MaeSsiSoPyong(梅氏書平) that MaeSsi`s SangSo(尙書) was forged, which was same view with Yan ReQu(閻若거) argued that KoMunSangSo made up. Tasan deeply studied SangSo, wrote SangSoGoHun(尙書古訓) seven volumes and SangSoGoHunSoRye(尙書古訓序例). Though the method of evidential proof used by Tasan was totally the same with Yan`s, at this point Tasan was not superior to Qian-Jia scholars. Tasan criticized on Cheong Xuan(鄭玄)`s scholarship. In the Ching Evidential Learning Cheong Xuan was the best scholar. But on the commentary of Cheong Tasan thoroughly disclosed of truth from the commentary of letters to the gist of the classical text. KyongSeYuPyo(經世遺表) and HumHumShinSo(欽欽新書) wrote by Tasan aimed at Cheong Xuan. Tasan`s critique about Cheong`s commentaries relatively corrected, but there were not a few mistakes. In other hands Tasan took pains on the KoJung(考訂- deeply think and correct) of letters. The language of Confucian Classics written in the ancient times is very different with Ching`s. The letters of Classics used old sound and meaning. So Evidential Learning shows up the true meaning of Classics through studying historical evidences like as the form, sound, and style of ancient letters. Tasan clearly was aware of the problems between KumMun(今文) and KoMun(古文), sufficiently compared relative importance and made account of understanding the text. To accelerate the Classical learning he asked for understanding on the differences archives of Han period. Scholars like as Tasan are scarce in Chosun. Especially he was very devoted himself to study Classical Learning. To sum up the characteristics of the Evidential Learning of the Chosun, after the Ming perishes Chosun government and scholars made little account of the Ching`s learning regarding the Ching people as the savages. Consequently when the Evidential Learning made a rise in China, the academic tendency of Chosun still was the Neo Confucianism. Tasan, Chusa(秋史) Kim JungHee(金正喜), and others studied the Evidential Learning, having a contribution to the growth of the Chosun`s, and also they had lim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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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역의 천명관: 청명請命 품명稟命 그리고 순명順命

          방인 재단법인다산학술문화재단 2015 다산학 Vol.- No.26

          Tasan(茶山) Cheong Yagyong(丁若鏞)’s view on the Changes is a kind of the theological system which depends on the revelation of Shangdi(上帝). Tasan relates his motive of writing Zhouyisijian(周易四箋) to tianming(天命), i.e, Heaven’s Mandate. According to Tasan’s view, the divination is the means of receiving Heaven’s Mandate. In order to know the tianming, the first thing to do is to make the qingming(請命) which means to ask for Heaven’s Mandate. Afterwards, he must pro¬ceed to the act of bingming(稟命) which means to receive the Revela¬tion of Heaven. The act of bingming includes the act of tingming(聽命) which means listening to Heaven’s Mandate. Once the bingming and tingming are completed, one must put Heaven’s Mandate into practice. That is called as the shunming(順命) which means to follow Heaven’s Mandate. If one takes Tasan’s perspective, the interpreter of the Zhouyi signs does not possess the ability to foresee the future, He merely makes the most of the interpretive skills to explain the symbolic meanings of Zhouyi signs given by the transcendental Being. It is very difficult to find out the meanings of symbolic signs of Zhouyi because the symbol has the multiple meanings. If interpretation can be varied according to the judgement of the interpreter, it cannot be the determinism. Tasan’s view on the occult science shows the aspect of modern rationalist. But at the same time, he insists that divination is the means of receiving the Heaven’s Mandate given by the ancient sage. Frankly speaking, Tasan’s double standards in dealing with the divination makes us to be confused. On the one hand, Tasan thought that the Zhouyi must be distinguished from the occult science because Zhouyi comes from the religious rites that serve the Shangdi while oc¬cultism is merely the technique for predicting the future in the absence of religious faiths. However, if the standard to distinguish the religion from the xieshu(邪術, sorcery) depends on right faiths, the standard of distinction cannot but be arbitrary. Therefore, there should be the prem¬ise that the divination should be practised on the basis of morality lest that the divination should fall into the sorcery. 다산역학의 체계는 상제의 계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일종의 신학적 체계이다. 다산은 『주역사전』의 저술동기를 천명과 연관시킨다. 천명이란 상제천上帝天이 부여한 명命이다. 상제가 내려주는 천명을 요청하는 것을 청명請命이라고 하고 천명의 계시를 받는 것을 품명稟命이라고 하고 그 명命에 따르는 것을 순명順命이라고 한다다산의 관점에서 본다면 설령 『주역』의 해석자가 미래를 잘 맞춘다고 하더라도 『주역』의 해석자가 그러한 예지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예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온 것이다. 『주역』의 괘상卦象은 상징이며 상징은 다의적多義的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명백하게 밝혀지기 어렵다. 만약 해석자의 주관에 따라 점사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이 될 수 없다. 술수학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근대적 합리주의자로서 다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산은 한편으로 복서가 유가의 성인聖人이 천명을 품부稟賦받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복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산의 이중적 태도는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만약 다산의 관점을 적용해서 『주역』과 술수를 구분한다면 『주역』은 상제를 섬기던 종교의례에서 비롯된 것인데 반하여 술수는 종교적믿음이 결여된 상태에서 단지 미래예측을 위한 기술技術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점술이 사술邪術인가 혹은 종교인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올바른 신앙의 존재 여부에 달린 것이라면 그 판별기준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주역』의 점술이 사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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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과 연담 유일

          정민 재단법인다산학술문화재단 2021 다산학 Vol.- No.38

          This paper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Tasan Jeong Yakyong and Yeondam, a Buddhist monk of Daedunsa Temple. We would like to collect various materials left by Tasan in his own handwriting, restore the meeting between the two, which has not been confirmed before, and confirm the meaning thereof. Tasan continued his friendship with monks from Daedunsa Temple and Mandeoksa Temple during his exile in Gangjin. Through this work, he led the organization of the temple’s history, including Daedunsaji and Mandeoksaji, and left a number of Buddhist-related poems that were not left out in his collection. Tasan’s relationship with the Buddhist monks was ostensibly the starting point of his friendship with Aam Hyejang.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Tasan and Yeondam, who met when he was studying in his father’s post, who was down to Hwasun at the age of 16, became the medium of connecting Tasan with Buddhism. Yeondam was the teacher of Aham’s teacher, and Aham himself learned from him. Tasan first met Yeondam in 1777, when he was 16 years old. He was well-known as a famous lecturer and was good at poetry. There are many poems exchanged with Yeondam in the literary collection of his father, Jeong Jae-won, and there are still poems left in the literary collection of Yeondam. It also contains poems given to young Tasan during this period. Tasan also expressed his deep respect for his noble appearance in his literary collection. Yeondam provided a place for the Tasan brothers to study for their past exams, visited frequently, and encouraged them. 24 years later, in 1802, when Tasan, who came down to exile at Gangjin, asked about him, Yeondam had already passed away. In response, Tasan, who obtained and read his literary works, expressed disappointment with the editing, and insisted on correcting the errors and publishing them anew. As a result, the new edited version was prepared directly, and several letters and prose writing this process remained as handwritten letters. Most of these materials were omitted from Tasan’s collection, apparently because they were reluctant to engage with monks closely. Tasan’s counterpart in discussing the publication of Yeondam’s literary works was Wanho, a disciple of Yeondam, and Hoyi, a disciple of Wanho. However, the publishing a new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probably did not pay off due to financial problems. Tasan put Yeondam on the central stem of the Honam instructor’s genealogy, and saw that the central genealogy from the great Monk Seosan led to Yeondam. Considering that he had established the central genealogy and that Aam and Choyi had been established again, he wanted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the central genealogy. This is complicatedly intertwined with the complex compositional arrangement of the Daedunsa central genealogy. This Paper is a prerequisite discussion to collect and introduce various verses left by Tasan in one place and to deepen discussions related to the future. 이 논문은 다산 정약용과 대둔사 승려 연담과의 교유와 인연에 대해살핀 글이다. 다산이 친필로 남긴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그간 확인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만남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확인코자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 대둔사와 만덕사 승려들과 벗 또는 사제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를 통해 『대둔사지』와 『만덕사지』 등 사찰의 역사를 정리하는작업을 지휘했고, 문집에는 누락되고 없는 수많은 불교 관련 시문들을남겼다. 다산이 불승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아암 혜장과의교유가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다산이 16세 때 화순 현감으로 내려가 있던 아버지의 임소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만났던 연담과의 인연이 다산과 불교의 고리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연담은 아암의 스승의 스승이었고, 아암 자신이 연담에게 직접 배운 인연이 있다. 다산은 16세 때인 1777년에 연담과 처음 만났다. 그는 대강백으로 명성이 높았고, 시문에도 능했다. 부친 정재원의 문집에 연담과 주고받은시가 적지 않고, 연담의 문집에도 화답시가 남아 있다. 또 이 시기 어린다산에게 준 시도 실려 있다. 다산도 자신의 문집에 연담과 주고받은 시를 실어, 그의 고결한 모습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시했다. 연담은 다산형제의 과거 시험 공부를 위해 장소를 제공해주고, 자주 찾아보며 형제를 북돋워주었다. 이후 24년 뒤인 1802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내려온 다산이 연담을 찾았을 때, 연담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이에 그의 문집을 구해 읽은 다산은 그 체제와 편집에 실망을 표시했고, 오류를 바로 잡아 새로 간행할것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편집본의 작성을 직접 진행했고, 이과정을 적은 여러 통의 편지와 산문이 친필로 남아 전한다. 이들 자료의대부분은 다산의 문집에는 누락 되었는데, 승려들과 가깝게 교유했다는 혐의를 꺼렸던 이유로 보인다. 다산과 연담의 문집 간행을 상의한 상대는 연담의 제자인 완호와, 그의 제자인 호의였다. 하지만 연담 문집의재간행은 아마도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결실을 맺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산은 연담을 호남 강맥의 중심 줄기에다 놓고, 서산대사에서 내려온 도맥이 연담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렇게 嫡傳의 계보를 설정하여, 그를 다시 아암과 초의가 이었다고 보아, 도맥의 정통성을 분명하게세우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대둔사 도맥의 복잡한 구도 정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본고는 연담에 대해 다산이 남긴 각종 시문을 한 자리에 수집해서 소개하고, 향후 도맥과 관련된 논의를 심화하기 위한 전제적 논의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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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茶山의 세계世系와 지친至親들

          김언종 재단법인다산학술문화재단 2012 다산학 Vol.- No.21

          Tasan Cheong Yagyong decided to use Sa-am (俟菴) as his pen name in 1822 at the age of 60. As his study of Confucian Classics and statecraft still affects us, Tasan has been the object of much research, and those researches are important to us even though there are still a few loose ends to tie up. Despite that, however, we still do not have enough information about his family such as his descendants or relatives. And that is why I’ve made Tasan’s family the focus of this paper. In this paper, I investigate two main issues. First is Tasan’s sense of family, and second is the lives of Tasan’s family. Sense of family was key to family solidarity in the premodern world as well as a source of personal pride in society. And the latter is meaningful because Tasan recorded his family history with deliberation. I would like to shed new light on this record because it represents his values. For this purpose, I examined Tasan’s descendants, close relatives, and children. I think that this record on his family is significant in that it is an indication of a way of moral training and home management (修身齊家), which is also a part of studying the Six Classics (六經) and the Four Books (四書). According to the Great Learning (大學), moral training and home management is the basis of governing the world, and recording the family history is the basis of moral training and home management. Therefore, we can understand Tasan’s true colors by reviewing his records. 다산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과 공적 차원 이력은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고 또 심화 탐색이 요구되지만 그간 학계의 연구가 상당히 진척 집적되어 이제 새 전기를 이루기 위한 정리가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다산 삶의 사적 영역 즉 다산의 일상의식에서 비중이 컸을 가정의 상황인 가계의식家系意識과 가족관계에 대한 조명은 아직 상응한 진척이 이행되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이제 다산 삶의 한 실체이며 그에게 끊임없이 핍진한 영향을 주었을 가계의식과 가족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본고에서 다룰 다산의 가정 상황은 가계의식과 다산 당대 가족의 삶이다. 전자는 중세 사회에서 가족의 연대에 기여하고 정체성 공유에서 핵심이었으며 개인의 성취에도 관련되는 사회 차원 자긍自矜의 원천이었다. 다산의 조부 이래 다산의 가정은 상계 가계 문제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이 있었으며 마침내 오히려 오늘날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결단이 있었다. 후자에서 먼저 부각시켜야 할 것은 다산이 거의 모든 당대 가족의 삶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을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없고 또 그 유무로 인격을 평가할 수도 없지만 다산의 이러한 면모는 다산의 삶과 지향의 고찰에서 기록 자체 이상으로 한 번 음미해볼만한 문제일 것이다. 다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듯이 드러나지 않았고 평가할 수도 없는 일부 가족의 삶까지도 기록한 것은 가치관의 행위화로 여겨지며 다산의 생애 전체 파악을 위해 한 번 조명하여야 할 부분일 것이다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본고에서는 다산의 세계 다산의 지친들아버지 정재원 맏형 정약현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서제 정약횡 다산의 자식들장남 정학연 차남 정학유 딸 나주 정씨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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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학의 재조명을 위한 시론

          손흥철 ( Heung Chul Son ) 다산학술문화재단 2009 다산학 Vol.- No.15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학문적 성격을 탈성리학과 근대성이라고 본다. 그리고 다산의 철학을 실학實學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다산의 철학에서 탈성리학의 중요 내용과 사상의 근대성을 요약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다산학의 학문의 특성에 대한 명칭을 재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다산의 탈성리학적 성격으로 이기론理氣論의 부정, 천인관天人觀, 수사학洙泗學의 경학방법론 등을 중심으로 그 개요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다산의 철학에서 근대성의 특징을 그의 인간관, 격물론, 경세론經世論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산의 학문과 조선후기의 학문사조를 실학으로 지칭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음을 논증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새로운 학문 사조를 `한국근대사상`으로 통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다산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탈성리학`과 사상적 근대성이며, 탈성리학적 성격에 나타난 우주관이나 인성론이 `본래의 공자학`인 `수사학`을 표방하지만 그 자체로도 사상적 근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경세론에 나타난 근대성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산을 실학자로 분류하지 말고, 한국근대사상가로 분류하며, 그의 철학을 `주자학`이나 `양명학`과 같이 `다산학`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과거의 철학과 사상을 현대에서 연구하는 목적은 과거사상의 재현再現을 통하여 현대적 재발견과 재창조를 위함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관점도 시대상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 1950-80년대와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 실용과 경제발전이 최우선과제였던 시대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용학이 절실했다면, 새로운 도약과 경제적 발전의 대중화와 고급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기조 외에 또 다른 가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문사조와 다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그 정확한 재현과 아울러 보는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Tasan(茶山) Cheong Yagyong(丁若鏞, 1762-1836)`s academical character can be defined as Post-neoconfucianism and modernity. At the same time, we call his philosophy as Silhak(實學). This article aims to make clear the main contents and its modernity of Tasan`s philosophy, and to reconsider the title of scholaric character of Tasan studies(茶山學) on the bases of these process. In this review, I arranged the outline focusing the denial of the theory of Lichi(理氣論), the view of heaven and men(天人觀), the methodology of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in Susahak(洙泗學) as an Post-neoconfucianism(脫朱子學) of Tasan. And I studied the characteristic of his modernity on the viewpoint of men(人間觀), the study of things and nature(格物論), the theory of statecraft(經世論), Finally, I prooved it is not profit to call Tasan studies with the academical trend as Silhak. I thought it is appropriate to call the new tendency of the latter period of Chosun as Korean modern thought. Because the reason why commandate Tasan studies as Silhak is Post-neoconfucianism and ideological modernity, the universal viewpoints and treatise of human nature stands for Susahak, but it include ideological modernity in itself. Therefore, it accords with modernity in the theory of statecraft. I suggest that Tasan cannot be classified as Silhak scholar, it is desirable to be grouping as Korean modern philosopher. At the same time, his thougt should be called as Tasan studies as like as Neo-confucianism or the doctrines of Wang Yangming(陽明學). The aim for research past philosophy and thought is to recover and recreate by representing past thought. So the recent viewpoint also can be changed according to era circumstance. It is quite different 1950`s-1980`s with nowadays. New value will be required for vivid leap and popularization of economical development. Therefore, it also be needed change of view with punctual representation in the new academical trend in latter period of Chosun dynasty and the understanding view point of Tasan`s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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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최익한(崔益翰)의 다산(茶山) 연구

          박홍식 ( Hong Sik Park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여유당전서』 발간을 전후한 시기에 안재홍·정인보·최익한의 다산연구를 고찰해 본 것이다. 이 세 사람은 교유에 있어서도 상호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관계의 중심에는 정인보가 있었다. 1930년대 다산 연구의 핵심인물이었던 안재홍·정인보·최익한 가운데에서도 인적 학문적 교류의 중심인물은 정인보였다. 세 사람의 학문적 교류를 활발하게 맺어준 통로는 『여유당전서』였다. 1930년대 안재홍·정인보·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통하여 교류하며 다산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공유할 수 있었다. 초기 다산 연구에서는 이 세 사람의 공적을 잊을 수 없다. 안재홍과 최익한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에서 공부를 함으로써 서양학문의 세례를 충분히 받았으며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물결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에 정인보는 이건창의 제자로 들어가 조선 지식인의 전통-그 가운데에서도 양명학의 전통을 습득하였다. 이러한 세 사람의 학문적 배경의 상이점은 다산 이해와 해석에서도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반면에 안재홍·정인보·최익한은 다산과 마찬가지로 사상가로서 유사한 경험을 상당히 많이 공유하고 있다. 곧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체험, 오랜 기간의 강제된 유폐 생활, 고독한 사색과 독서, 국가 운명에 대한 위기감과 좌절,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사명, 민족사에 대한 책임의식, 민중들에 대한 애정 등은 안재홍·정인보·최익한이 시대를 뛰어넘어 다산과 온 몸으로 만나는 공유 의식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여유당전서』의 저술과 감수 그리고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This thesis focuses on the study on Tasan by An Jaihong, Cheong Inbo, and Choi Ikhan around the period of publishing Yeoyudangjeon-seo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The people mentioned above had a very intimate friendship. The center figure of this group was Cheong Inbo. He was the key man of social and academic inter-course in 1930s` Tasan study. Yeoyudangjeonseo played an role as a passage that made an active academic intercourse possible between the three people. In 1930s, they exchanged their understandings and thoughts on Tasan through Yeoyudangjeonseo. In the earlier studies of Tasan, the accomplishments of these three people are very valuable. Choi Ikhan and An Jaihong both studied at Waseda University in Japan and this enabled them to be exposed to the western studies and to be influenced by the tide of socialism that was popular at that time. On the other hand, Cheong Inbo became a disciple of Lee Geonchang and learned the tradition of Joseon intellectuals, especially the tradition of Yangmyunghak. Due to their different academic backgrounds, their 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on Tasan are unlike to each other. However, An Jaihong, Cheong Inboo, and Choi Ikhan all went through experiences that are similar to those of Cheong Yagyong. Going through contradictions and irrationalities of the society, forced confinement for a long time, solitary meditation and reading, sense of crisis and frustration toward the destiny of the nation, a role and mission as an intellectual, social responsibility toward the people, and affection for the public were what they shared with Tasan beyond the ages. Such consciousness made it possible for Yeoyudangjeonseo to be written, supervised, and stu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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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학방식

          정민 재단법인다산학술문화재단 2011 다산학 Vol.- No.18

          Tasan had trained many disciples from 1801 when he was exiled to Gangjin to 1818 when he returned to Dureung. Also he produced more than 500 books through training his pupils. Then, what programs did he use and how did he transfigure from disciples in Gangjin where was wasteland of the study to the best school?He had trained pupils with various methods and efficient programs. This paper divided his education methods to six categories which are type for each level, major, proper methods, practice, debate, and group. He presented effective road maps according to each pupil’s level and degree. He determined their majors into literature and scholarship considering personality of pupils. In addition, he offered proper programs to each disciple figuring their characters of status. He presented concrete working manuals for practicing,encouraged accomplishments and scolded negligence. He sharpened critical minds through common-or-garden arguments, and let his pupils seize core values of working. Then being equipped to organized system he efficiently completed several works which were made by teamworks all-at-once. As a result, pupils of Tasan had become famous scholars who didn’t suffer by comparison. He came into line discipline courses of pupils with his works. Which deserved to highly appreciate. He gained source of his works from his pupils, and they mastered working knowhow joining teacher’s methods and process of his works. They made shape of Win-Win one another. Tasan achieved creating synergy effect and maximizing work efficiency through ideal combination of these six education methods. His education methods appear very systemic and reasonable even in the view of today’s pedagogy. In further active debates on pedagogic undertone and appling to present are expected. 다산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와서 1818년 두릉으로 돌아갈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또한 이들을 훈련시켜 500권이 넘는 엄청난 저작들을 쏟아냈다. 다산은 어떤 프로그램으로 학문의 불모지였던 강진의 제자들을 최고의 학술집단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을까 다산은 다양한 방식과 효율적인 프로그램으로 제자들을 훈련시켰다. 본고에서는 다산의 제자 교학방식을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등 여섯 범주로 나누어 살폈다. 다산은 제자들의 단계와 수준에 따라 효과적인 학습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제자의 개성을 고려하여 문예와 학술로 구분하여 전공을 정해주었다. 또한 성격이나 신분을 따져 각자에게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이와 아울러 구체적인 작업 매뉴얼을 제시하여 실전을 연습하게 하고 성취는 고무시키고 태만은 매섭게 야단쳤다. 일상적인 토론을 통해 문제의식을 예각화하고 작업의 핵심가치를 장악하게 했다. 그리고는 조직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집체 작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작업들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완수해냈다. 그 결과 다산의 제자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큰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산이 제자들의 훈련과정을 자신의 작업과 일치시킨 점도 대단히 높이 평가할만 하다. 다산은 작업의 원동력을 제자를 통해 얻었고 제자들은 스승의 방법론과 작업 과정에 동참하면서 작업의 노하우를 익혔다. 서로 윈윈의 모양새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교학방식의 이상적인 조합을 통해 다산은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다산의 교학 방식은 오늘날 교육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그 교육학적 함의와 현재적 적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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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대(淸代)학자들의 『맹자』해석과 다산 정약용의 『맹자요의(孟子要義)』

          함영대 ( Young Dae Ham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6

          본고는 청조 학자들의 『맹자』 해석과 다산 정약용의 『맹자요의』를 비교분석하여 다산 『맹자』 해석의 특정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맹자』 해석의 쟁점적인 주제에 대해 청조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분석하여 다산의 견해가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 논점은 `의리지변義利之辦`, `지언양기知言養氣`, `정전井田`이고,『맹자』 해석에서 청조를 대표적인 저작으로 정평이 있는 황종희의 『맹자사설孟子師說』, 대진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초순의 『맹자정의孟子正義』를 비교대상으로 검토했다. 송명이학의 관념적인 이학에 반발하여 눈에 보이는 현실에 기초하여 경전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청조학자들과 다산이 공유한 문제의식이었다. 다산은 의리지변에서 인간의 현실에서부터 경전의 진실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호연지기에 대한 해석에서 앎과 실천을 연관시켜 해석했다. 구체적 인간현실에서부터 경전의 진실을 확보하여 실천의 맥락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였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여 인간현실부터 경전을 해석하려는 측면에서는 대진의 견해와 유사하고, 지식과 실천의 통합을 통한 수행의 측면을 강조한 것은 황종희의 견해와 흡사하다. 황종희는 둔전의 예를 들어 정전제가 실현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정전제의 현실적 실현을 멸망한 다산과 강한 친연성이 있다. 다만 다산의 희구는 황종희보다 열정적이고 구체적인 방략에 의해 뒷받침되고, 초순의 해석보다 당대 현실에 닿아 있다. 청조학자들의 『맹자』 해석과 비교 검토를 볼 때 다산의 『맹자요의』가 지닌 특징은 더욱 선명해진다. 다산은 초순이 경전해석에서 보여준 엄밀함과 경전의 본의에 기초한 박실樸實한 해석을 온전히 담보하지는 못했다. 이는 다산이 단순히 이론적 체계의 구축으로서의 학문, 즉 `경학을 위한 경학`이 아니라 `경세를 위한 경학`이라는 관점을 견지한 결과이다. 다산이 해석의 저변에 당대 현실을 상정하고 인간의지와 실천의 문제로 논의를 전개한 것은 그러한 인식의 틀 안에서는 이해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냉정한 학문의 입장에서 다산의 해석은 다시 세밀한 재독再讀을 기다리고 있다. This study aims to look into characteristics of Tasan`s interpretation of Mencius by comparing and analyzing Qing dynasty scholars` interpretation of Mencius and Tasan Cheong Yagyong`s MengziYaoyi. It attempts to grasp more clearly university and specialty of Tasan`s point of view by comparing and analyzing Qing dynasty scholars` representative opinions about key issues of interpretation of Mencius. The issue is `Yuilijibyeon(義利之辦)`, `Jieonyanggi(知言養氣)`, and `Jingtain(井田)`, and the comparative targets are Huang Zongxi`s Teacher`s View Mencius, DaiZhen`s Evidential Comentary on the Meanings of Term in Mencius and Jiaoxun`s Annotation on Mencius. Scholars of Qing dynasty and Tasan`s attempt to interpret Confucian scriptures based on the visual reality by opposing Neo-Confucianism`s ideal science is to share consciousness for problems. Tasan tried to acquire the truth of the scriptures from human reality and interpreted and put into practice by connecting knowledge of interpretation in Hoyeonjigi(vast spirit) to the practice. His point of view to interpret the scriptures from human reality by affirming human desires is similar to Dai Zhen`s while his focus on practice by integrating knowledge and practice is similar to Huang Zongxi`s. Huang zongxi thinks that Jingtain regime is practicable by giving an example of Tuntian(屯田), but it is more close to Tasan who desires realistic practice of Jingtain regime. However, Tasan`s aspiration is supported by a more passionate and specific plan than Huang zongxi and is more close to the reality of the day than Jiaoxun`s interpretation. Comparing to Qing dynasty scholars` interpretation, the characteristics Tasan`s MengziYaoyi has becomes clearer. Tasan failed to assure Jiao-xun`s precise scripture interpretation and original(樓實) interpretation based on the original meaning of the scriptures. This is not mere scholarship constructed by theoretical system, which is the result of perspective of `Confucianism for governing`, not `Confucianism for Confucianism`. What Tasan adopted reality of the day and discussed human will and an issue of practice is understandable within the frame of the consciousness. However, Tasan`s interpretation is required to have a detailed second reading from the perspective of cold schola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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