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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각자 나혜석의 도전과 인문정신

        서정자(Seo Jeong-ja) 나혜석학회 2013 나혜석연구 Vol.3 No.-

        인문학과 모든 예술은 고유명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논리나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하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의 세계는 “솔직함과 정직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맞서는 인문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본고는 솔직함과 정직함이라는 덕목은 곧 나혜석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나혜석의 여성비평이 성립되기까지 그 도전과 응전을 살펴 나혜석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문정신을 규명해보고자 쓰였다. 나혜석의 인문정신이 형성되기까지는 수원 나주나씨와 나혜석의 부모형제들의 사상과 실천, 즉 가문의 전통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동시에 신사상을 수용하되 자기화 하려는 나혜석의 뚜렷한 주체의식이 낳은 결과였음도 고려해야 한다. 나혜석이 신교육을 위해 서울과 도쿄를 거쳐 세계 일주에까지 나서는 것은 수원에 면면히 흐르는 실학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나혜석은 실사구시 정신으로 체험을 통해 진실을 확인하고자 하였고, 여성해방비평사상을 수용하고 자기화하여 공동체가 지키려는 부당한 중심을 향하여 도전하고 응전하는 실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솔직함과 정직함이라는 인문정신의 핵심을 실천한 나혜석의 인문정신은 그로부터 1백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인문정신의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한 우리는 그를 선각자라 부른다. 일본유학체험으로 근대사상과 만나고 결혼으로 여성을 발견하며 구미여행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타자와 만나 나혜석의 여성비평사상은 한 단계씩 새롭게 생성된다. ‘사람 되기’에서 ‘차별의 발견’으로, 또한 ‘차이의 발견’으로 전개된 나혜석의 여성비평사상의 형성과 실천은 그로 하여금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하였으나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에 대한 그의 도전은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나혜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한 ‘사건’들은 나혜석의 인문정신으로라야 설명이 가능하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나혜석은 정직함과 솔직함의 인문정신으로 한 번 뿐인 자신의 삶을 타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으로 살아냈다. 이글은 그러한 나혜석의 위대함과 고유명사를 위하여 쓰였다. The humanities and all arts are a proper noun. It is because they establish their own world instead of imitating logic or the world of others. The world of the proper noun becomes possible due to the existence of a humanistic spirit that presents to oneself and the world with ‘frankness and honesty’. Based on the viewpoint that Rha Hyeseok had the virtue of frankness and honesty, the study sought to identify her humanistic spirit - what makes her is now - by examining her challenge and response until she established her own feministic criticism. The process until her own establishment of humanistic spirit is not easy to be revealed unless it is linked with thoughts and practice of the Suwon Rha family and her parents, brothers and sisters, that is, her family’s traditions. At the same time, we must consider that it was the outcome of her distinctive sense to interpret new thoughts by herself while accommodating them. Her setting off on a journey around the world via Seoul and Tokyo for new education might be related with practicalism prevailing in her hometown of Suwon. She sought to identify truth through experience based on empirical tradition and wholly demonstrated her acceptance of challenge and response to absurdities of the prevailing mainstream society by accommodating and reinterpreting criticism of women"s liberation. Though it has been a century since her humanistic spirit implemented principally through frankness and honesty began, we call her a pioneer because we are not able to come even close to her humanistic spirit. Her feministic criticism was generated step by step: She encountered modern thoughts during her study in Japan; she found feminity through a marriage; She met new and diverse people during her trip to Europe. She became entirely isolated from the society’s establishment by formation and practice of her thoughts of feministic criticism, which evolved from ‘becoming a human being’to ‘finding of discrimination’ and further to ‘finding of differences’. She never ceased to challenge the male-dominated Joseon society, though. Only her humanistic spirit may explain the ‘incidents’ which made it difficult for people to understand her and at the same time get rid of any misunderstanding arising from there. She lived her own and only life without imitating others based on her humanistic spirit of frankness and honesty. This article is written in honor of Rha Hyeseok’s greatness and proper noun as such.

      • 한국 근대화단과 나혜석

        김취정(Chwi-jeong Kim) 나혜석학회 2016 나혜석연구 Vol.9 No.-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여성 작가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 문예계에서 도드라진 존재이다. 나혜석은 화가이자 평론가였으며, 소설가였고, 시인이었다. 아무리 그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해도 그의 본령은 미술이었다. 화가 나혜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혜석 예술관의 형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구축된 예술 세계의 실상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나혜석의 생애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약 21개월간의 세계일주 여행이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라는 말이 있다. 가슴 속에 독만권서(讀萬卷書)의 학식과 행만리로(行萬里路)의 기상을 담고서야 인생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혜석은 ‘독(讀)’과 ‘행(行)’을 두루 실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는 세상의 온갖 틀을 벗어나 ‘완전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여행은 일상에 갇혀 있던 눈과 귀와 가슴을 활짝 열고 옹색한 생각을 넓혀준다. 따라서 예술의 향상을 위해 여행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나혜석의 예술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가 바로 세계일주 여행이다. 나혜석에게 여행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긴 시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나혜석이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여행의 경험이 나혜석의 예술관 형성과 예술 세계 구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본 연구는 이러한 의문점에서 시작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나혜석의 삶과 예술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 세계일주 여행을 살펴봄으로써 나혜석의 예술관과 예술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혜석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이다. 나혜석의 삶과 예술 세계는 근대 여성의 자아 형성과 실현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나혜석이 여행을 꿈꾸고 실천에 옮기는 여정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Hye-Seok Rha (羅蕙錫, 1896~1948) was a prominent presence in the male-dominated literary and artistic world of early modern Korea. She was a painter, critic, novelist, and poet. No matter how she had been versatile in various fields, her prime interest was surely to pursue an artistic career. To shed light on the painter, it is essential to analyze her artistic views and the reality of her artistic world built on them. One of the notable milestones in her life was the 21-month-long trip she made across the world from June 1927 to March 1929. There is a saying: “It is better to travel ten thousand miles than to read ten thousand books” (dú wàn juàn shū, xíng wàn lǐ lù, 讀萬卷書 行萬里路). It means that you can realize the true meaning of life through reading and travelling. In this sense, Rha was a person who had practiced both reading and travelling. An artist may attain the highest artistic level when she can achieve "total freedom" from the mundane world. Travelling helps you to open the eyes, ears and chest wider. Therefore, travelling is essential component in heightening the artistic level. Rha"s artistic formation also derives from her around-the-world trip. What impact does the trip have on her artistic views? What did Rha witness and feel while traveling around the world for a long time? And how did the experience of the trip affect Rha"s artistic formation and art world? This study looks at Rha"s artistic world through the prism of the around-the-world trip and its impact on Rha" s life and art. Rha was a person who had devoted herself to finding a true self. Rha"s life and art world can be seen as a process of a modern woman’s self-formation and realization.

      • 나혜석과 최린, 파리의 ‘자유인’

        이용창(Lee Yongchang) 나혜석학회 2013 나혜석연구 Vol.2 No.-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긴 인물들의 경우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부분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무엇인가를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남녀의 구별, 신분의 차별, 삶의 방향이나 의지 등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의외의 것에서 ‘다름’이 어울려 ‘공감’을 형성하는 관계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나혜석과 최린의 ‘스캔들’도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후반부터 1928년 초까지 ‘자유의 도시’ 파리를 중심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나혜석의 ‘불륜’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정작 ‘스캔들’의 당사자였던 최린의 구체적인 대응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글에도 나혜석을 언급하지 않았다. 남편이었던 김우영도 나혜석의 이름조차 거론한 적이 없었다. 위자료 청구소송을 통해 최린의 ‘정조유린’ 및 ‘책임회피’가 나혜석이 이혼한 직접적인 이유로 드러났지만, 이 문제는 더 이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단순한 남녀 간의 일시적인 ‘스캔들’의 하나이며, 이미 나혜석의 이혼으로 해결된 문제라고 보았을 수도 있다. 나혜석은 위자료 청구소송 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이후 발표한 글에서 최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묘사했다. 다만 최린도 같은 감정이었는지, 있었다면 파리에서 만 일시적이었는지, 귀국 후에도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이었지만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사회적 ‘비난’과 ‘책임’을 떠안았고, 이혼과 소송사건을 겪으면서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이와 달리 최린은 이후에도 종교·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명망을 유지하다가 중추원 참의를 맡으면서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나갔다. 정도는 다르지만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큰오빠 나홍석도 마찬가지였다. 나혜석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름대로 지조를 지키면서 글을 통해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분노, 저항을 표현하였다. ‘인간’으로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이를 동등하게 나눌 수 있는 남성과의 ‘사랑’을 인정하는 사회가 나혜석이 추구한 삶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두 사람을 매개로 관련된 인물의 행적, 특히 ‘스캔들’의 실제 공간인 유럽 현지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의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보다 풍부한 연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신자료 「김마리아방문기」을 통해 본 나혜석의 삶

        전병무(Jeon, Byungmoo) 나혜석학회 2015 나혜석연구 Vol.7 No.-

        본 연구는 유자명의 회고록에 언급된 「김마리아방문기」을 발굴하여 이를 중심으로 나혜석의 삶과 사상의 일단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먼저 이 자료의 발굴경위는 다음과 같다. 필자는 몇 년 전 독립기념관의 지원 아래 김마리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이때 2개의 김마리아 방문기사를 『동아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동아일보 기자가 쓴 것을 확인했는데, 다른 하나는 누가 썼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 나혜석학회에서 ‘나혜석과 김마리아’라는 주제로 발표할 기회를 얻어 나혜석에 대한 연구와 자료를 검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에는 몰랐던 방문기사 중 하나가 나혜석이 썼음을 확인하였다. 「김마리아방문기」에 따르면, 정신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나혜석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 중이던 김마리아 등을 후원하기 위해 대구를 방문하였다. 즉 남편 김우영의 도움을 받아 1920년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대구 동산의 블레어 목사 집에서 요양 중이던 김마리아와 백신영을 면회하고, 다음날 31일 대구감옥으로 가서 황에스터 등을 면회하였다. 그리고 상경하여 그 감상을『동아일보』에 「대구에 갓든 일을 金瑪利亞兄에게」라는 제목으로 1920년 6월 12일부터 6월 22일 사이 총 8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전체 주요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나혜석이 김마리아를 면회하기 전 자신의 상황, 면회의 계획과 과정, 면회 후 심정, 대구감옥에서의 황에스터 등 면회 등을 日程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둘째는 면회하는 과정에서 느낀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 및 비판이다. 셋째는 자신의 심문과정과 수감생활을 통해 깨달은 심리의 변화를 담고 있다. 넷째는 새시대의 여성상이다. 제1차대전 이후 구세계는 무너지고 신세계가 도래하고 있으므로, 여성교육의 중요성과 신조선의 건설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 신자료는 나혜석의 일생과 사상을 이해하고 추적하는데 많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나혜석 연구자들에게 유용하게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This paper is a study of the newly excavated Kim maria(金瑪利亞) visiting record by Na Hye-seok. It is as follows to introduce excavation inspector and the main contents. I have been to the Kim maria research with the support of the Independence Hall a few years ago. At that time, I found an article of two Kim maria visiting record in the Dong-A Ilbo(東亞日報). One of the Dong-A Ilbo reporter wrote it, but the other one who wrote could not be confirmed. I get the opportunity to announce the theme of "Na Hye-seok and Kim Maria in Na Hye-sok Association, and examined the Na Hye-sok-related research papers and materials. I was supposed to know the fact that the article of another visiting record wrote Na Hye-seok. This visiting record was the article title of that What went on in Daegu, to Maria Kim June 12 to June 22, 1920, was serialized in a total of eight times in the Dong-A Ilbo. Key information can be divided into four parts. First, Na Hye-seok has been portrayed by his situation before he met Kim maria, visitation plans and procedures, after visiting the date of such feelings. Second, she recorded the critical content and recognition of foreign missionaries felt in the process of visitation. Third, she recorded a psychological change that has been achieved through the prison life and the course of their interrogation. Fourth, it is her female figures in a new era. Because after the first World War, the world of the old era collapsed, new world had arrived, she emphasized the role of importance and women of women’s education in order to build a new Chosun. This new material has provided a lot of clues in order to understand Na Hye-seok’s the Life and Thoughts. I hope this data is useful to utilize Na Hye-sok researchers.

      • 나혜석 미술세계의 연구쟁점과 과제

        윤범모(Youn Bummo) 나혜석학회 2012 나혜석연구 Vol.1 No.1

        화가 나혜석의 연구사를 일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나혜석의 언술처럼 미술작품에서도 페미니즘 요소가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와 그의 작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칭 작품의 진위문제이다. 나혜석 미술과 페미니즘 관련 논고에서 김홍희는 부정적으로 살펴보았다. 반면에 박계리는 작품 <정원>(1931)을, 또 김화영은 <나부>(1931)의 예를 들면서 나혜석 미술 속에서 페미니즘의 존재를 주장했다. 필자는 매일신보 연재(1919)의 세시풍속을 발굴 소개하면서, 더불어 1920년대 전반부의 조선미전 출품작에서 나혜석의 페미니즘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가 나혜석 연구를 가장 어렵게 하는 부분은 유존작의 별무이다. 조선미전출품작 같은 출처가 확실한 작품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시중에서 나혜석 작품이라고 주장되어지고 있는 전칭 작품 50점가량의 진위문제가 현안으로 부상되어 있다. 근래 감정위원의 종합적 검토를 실시한 바, 불과 8점 정도만 진품 판정을 했고, 과반수 정도는 자료의 미비라는 이유로 판단을 유보하게 했다. 더불어 몇몇 작품은 위작으로 판단되어 나혜석 연구의 방해물로 꼽게 했다. 나혜석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나부>가 일본의 구메 게이치로의 <습작> 모사화라는 점, 하여 나혜석의 진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그동안 <습작>의 제작년대가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본 연구에서 1889년작임을 밝혔고, 또 소장자가 도쿄미술학교 교수를 지낸 고바야시 만고였음을 확인했다. 때문에 <습작> 모사화의 화가가 어쩌면 도쿄미술학교 재학생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하게 한다. 향후 나혜석 연구의 과제는 보다 입체적으로 그의 미술세계를 조명하는 시각교정이 요구된다. 더불어 가장 기초적인 작품의 진위문제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 나혜석 전문 감정위원의 출현과 보다 본격적이고도 종합적인 작품감정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 가짜그림 가지고 거창한 논문을 발표하는 사례가 없지 않아 안타깝게 하기 때문이다. 화가 나혜석 연구,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믿는다.

      • ‘조선적 특수’의 제 방법과 아나카 페미니즘의 신여성 계보

        김복순(Kim Boksoon) 나혜석학회 2012 나혜석연구 Vol.1 No.1

        젠더 범주에 착목한 결과, 나혜석은 아나카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보편담론의 창시자로, 사상가로, 근대여성지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을 ‘보편성’ 및 ‘특수성’과 연관하여 인지하지 못했던 근대 초기의 인식과 매우 다른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으며, 당대의 남성들이 제시한 보편담론들과도 다른 것이었다. 나혜석이 새로운 보편담론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라는, 즉 ‘조선적 특수성’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사람되기’를, 식민지 조선에서의 억압-해방 문제의 하나로 인식한 결과로서, 구미, 일본, 조선 여성들의 ‘동등성’ 및 ‘차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동등성 및 차이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은 조선, 여성, 남성, 민족,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개안을 마련해 주었다. 나혜석은 근대 초기 및 당대의 이론가들과 달리 서양 사상 및 문명, 문화를 일방적으로 ‘좋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참정권 등 제도 개혁을 통해 기존의 권력 관계를 수정보완함으로써 남녀평등 및 여성해방을 성취하고자 하지만, 나혜석은 제도 개혁을 거부하였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실력양성 및 개조·개혁이 진화의 요인이자 동력이지만, 나혜석의 개인주의적 아나카 페미니즘에서는 사랑(세계애)및 상호부조가 진화의 요인이자 새로운 이상사회 건설의 동력이었다. 세계를 뒤흔든 ‘제3의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에, 근대의 여성지성인 나혜석도 ‘개인주의적 아나카 페미니즘’ 계보를 창출하며 동참하고 있었다. 나혜석의 ‘아나카 페미니즘’이라는 방법은 아나카 페미니즘의 서구, 일본의 방식과도 다른 ‘조선적 특수성’을 보였다. 서구의 엠마 골드만이 무장투쟁으로 나아갔고, 일본의 아끼코는 나혜석이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이동한 것과 반대로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 군국주의로 통합되었다. 나혜석의 소설 6편은 아나카 페미니즘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었다. 「경희」「회생한 손녀에게」 「현숙」이 긍정의 방법을 보여 준다면,「규원」「원한」 「어머니와 딸」은 부정의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신여성이 등장하는 「경희」「회생한 손녀에게」「어머니와 딸」「 현숙」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바로 개조, 상호부조의 사상이었다. 여기서 드러난 ‘연대’의 정신은 ‘파트너십’ 정신이라 규정되었다. ‘아나카 페미니즘적 파트너십’의 양상은 ‘초대의 수사학’이라는 독특한 수사학을 구사하고 있었다. In the following essay, focusing on the "Gender" as epistemological device, tries to consider Rha Hyeseok(나혜석) as woman philosopher or modern woman intellect anew, and to research on characteristics and genealogies and relations to her novels of her theories. Rha Hyeseok discovered "human, humankind" category to overcome "colonized" Chosun, it was due to the point that she started from "Chosun particularity". Such an interest led Rha Hyeseok to devise new universal discourse, "Anarcha Feminism". Liberalist Feminism focuses on systemic reforms like suffrage for sexual equality or emancipation of woman, but Rha Hyeseok denied it. In "Anarcha Feminism", Love(Cosmopolitanized) and mutual aid is the key to evolution . Rha Hyeseok"s six novels are the results of "Anarcha Feminism". Kyunghee(「경희」), To recovered granddaughter(「회생한 손녀에게」) Hyunsook(「현숙」) showed affirmative ways, while Kyuwon (「규원」), Grudge(「원한」), Mother and Daughter(「어머니와 딸」) showed negative ways. The point is that the idea of rebuilding and mutual aid is confirmed in novels casting "New-Woman". "Solidarity" on the novels referred above was defined as "partnership".

      • 나혜석과 근대일본서양화가의 작품에 대한 비교연구

        이나진(Lee Najin) 나혜석학회 2014 나혜석연구 Vol.5 No.-

        본 논문은 근대 최초의 여성화가인 정월 나혜석(晶月 羅惠錫, 1896-1948)의 작품을 일본의 근대서양미술의 대가인 구로다 세이키(黑田靑輝), 구메 케이이치로(久米桂一郞), 아사이 츄(淺井忠)의 작품과 비교 분석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선행연구에서는 나혜석의 소설이나 작품 등을 중심으로 그녀의 삶, 사상, 활동 등에 대한 분석이 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본고에서는 미술적 관점에서 나혜석의 대표적 작품 중 몇 개를 구로다, 구메, 아사이의 작품들과 비교분석한다. 나혜석의 작품 중 <봄의 오후>, <가을의 뜰>, <녹동 풍경>, <작약>, <화녕전 작약>, <봄이 오다>, <개척자>, <농촌풍경>, <농가>는 밀레, 구로다, 구메, 아사이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였고, 농업에 필요한 도구 사용방법을 잘 나타내었다. 둘째, 작품 속 등장인물은 얼굴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농민의 모습으로 익명성을 표현하였다. 셋째, 신분이 낮았던 농민들의 일에 대한 존엄이나 충실함을 높이 평가했다. 넷째, 화면의 인물들은 서로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하나의 움직임과 같이 표현하였다. 다섯째, 농업에 관한 일련의 작업을 시간의 경과에 따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여섯째, 어두운 색채와 거친 붓 터치, 색의 반점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네 화가의 저변에는 당시 프랑스 미술을 풍미했던 바르비종파에의 공감이 일정 부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혜석은 그녀가 지각한 결과를 선택적으로 재생하거나 재구성하여 조직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본고가 다룬 그녀의 작품에서는 대상들의 의미와 표현이 형태·비례·방향·색채 등이 치밀하게 계획되어 표현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1910년대 나혜석이 바라본 ‘일본’

        김화영(Kim Hwayoung) 나혜석학회 2014 나혜석연구 Vol.4 No.-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의 인물 가운데 여성문학사나 여성운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가 남긴 여성론, 소설, 시, 그림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녀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1910년대라는 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일본으로 교육을 받으러 떠난 지식인에게 ‘일본’은 조선을 억압하는 ‘지배국’이면서 한편으로는 보고 배워야 할 ‘문명국’이라는 점에서, 그 심정은 매우 착잡했을 것이다. 나혜석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1910-1930년대 중에서 1910년대는 새로운 문명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에게 문화적 충격도 주었지만 특히 시대적 고뇌가 표출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은 그녀의 글 가운데 ‘일본’보다 ‘조선’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사용되었던 점, 그리고 ‘실력’을 쌓아서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대사업’을 이룰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혜석은 「이상적 부인」에서 일본의 ‘히라쓰카 라이초’, ‘요사노 아키코’ 등을 이상적인 여성의 예로 들고 그녀들이 주장하는 ‘천재’와 ‘원만한 가정’을 이상으로 삼았다. 나혜석은 조선인들이 그러한 이상을 키우고 그것을 ‘조선화’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나혜석의 이러한 생각은 1920~30년대에 이르면 조선이 일본보다 오히려 우수하다는 인식으로 전환되는데, 구미여행 이후에 그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 일본은 더 이상 이상적인 국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는 자신을 자극하고 새로운 자아를 형성시킨다. 식민지 민족으로 지배국의 문화 속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지식인으로서, 나혜석에게 ‘일본’은 매우 복잡하고 무거운 존재였음을 그녀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Amo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ha Hyeseok is an important person that is indispensable in the history of the women"s movement and women’s literature. Essays on women, novels, poems, paintings she left behind are the works that represents the historical facts of the time very well. Era of the 1910s she began work activities, is also the beginning of the darkest period in the history of our country. Rha Hyeseok had left educated in Japan during this period. However, while a country that dominates the Korea, Japan was a civilized country. She would have been very complicated mind because of this. In the 1910s, it was time to gave her the culture s hock a nd historical worries. These can be identified by the word ‘Korea’ is used more often than the ‘Japan’ in her article. And may be confirmed also from the point that claim to improve the ‘ability’ to achieve ‘large business’, namely, liberation of Korea. In the “ The Ideal Wives", Rha Hyeseok m entioned ‘ Hiratsuka Raicho’ and ‘Yosano Akiko’ as an example of female ideal. And She thought the ideal would the ‘genius’ and the ‘good family’ that they have asserted. Rha Hyeseok claimed Koreans must bring up such ideal, and fix for the situation in Korea. However, when it became 1920-30"s, such a thinking was changed that Korea is superior rather than Japan. After the European tour, those belief became more firm in Japan is not recognized as an ideal country anymore. The new culture stimulate self and shape new self. As the colonial people, and as intellectual forming a new self in the culture of the governing country, Rha Hyeseok has recognized Japan as complicated and heavy nation. We can confirm that in the her articles.

      • 나혜석論 : 몸의 회화로서의 풍경화

        홍지석(Hong Jisuk) 나혜석학회 2016 나혜석연구 Vol.8 No.-

        191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에 나혜석이 발표한 소설, 수필 및 비평 텍스트들에 대한 독해를 통해 우리는 이 화가의 회화관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나혜석에게 과거의 관습에 따른 감각, 또는 전통적 규약에 따른 지각은 부정의 대상이었다. 당시의 나혜석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를 내 몸으로 사는 일이었다. 나혜석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앞에 비추는 현재의 환희로 살지 못했는데” 그것은 “가까운 과거를 현재로 만들어…현재는 없어지고 만 까닭”이다. 이렇게 현재의 환희로 살기를 염원하는 화가에게 회화의 존재 이유는 먼저 감각의 쾌(快), 만족에 있다. 게다가 이 작가는 감각의 만족을 전통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해했다. 물론 나혜석에게 회화는 감각의 만족 그 이상이었다. 경험의 현실, 사물의 리얼리티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양자 가운데 어느 하나로 치우쳐 다른 한쪽을 방기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나혜석이 가장 경계하는 바였다. 그런 까닭에 이 화가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관화(내면화)하면서 외부의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과 외부에서 주체를 바라보는 대상의 응시가 공존, 교차하는 회화를 추구했다. 이 화가는 ”사물과 사물사이에 神이 왕래하는 一念이 되었을 때“ 비로소 행복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나혜석은 대상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작업하기보다는 대상 속에서 작업하면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감각들을 종합하고 시선과 응시를 동시에 아우른 화가였다. Rha Hyeseok(1896~1948) wrote many critical texts on her painting between 1920"s and 1930"s. These texts are the clues for our understanding of Rha"s Painting. First of all, She refused the sensation following traditional convention as well as the perception relying on the codes of past. She wanted to live in the present by her body. According to her, “We have made the past present” As a result, “We could not have lived in the Jouissance of present” Therefore, for her, the pleasure of sense was a raison d"être of painting. She regarded the pleasure of body as a index denoting the liberation from the suppression of past. Of course, for her, painting was more than the pleasure of body. She could not abandoned the reality of experience or the reality of objects. Therefore she wanted to synthesize the reality of body and the reality of object in her landscape painting. She called these painting “moderate painting”. In this way, She could have embraced body and the life-world at the same time in her painting.

      • 수원 나주나씨와 나혜석의 부모 형제들

        한동민(Han Dongmin) 나혜석학회 2012 나혜석연구 Vol.1 No.1

        이 글은 나혜석과 수원이라는 연구 주제의 일부분이다. 나혜석은 근대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유화가이다. 그는 수원의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학교를 거쳐 일본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여성으로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특히 나혜석을 비롯한 오빠(나홍석, 나경석)와 동생(나지석) 등 4남매가 일본유학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과 집안의 경제력에 힘입은 것이다. 나혜석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집안 내력과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이에 수원의 나주나씨 가문과 그 집안의 경제적 위상과 부모 형제들의 삶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현달을 통해 수원의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한 나주나씨와 남양지역의 유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 외조부 최성대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개명 관료인 아버지 나기정과 어머니 최시의의 진취적 교육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기정은 일제시대 군수를 역임한 사실에 따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지만 재평가할 인물이다. 나혜석의 언니 나계석과 여동생 나지석도 주목해 볼만한 인물이다. 수원지역의 유력한 가문인 수원최씨의 최기환과 결혼한 나계석은 나주나씨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배다른 서녀로 잘못 알려진 언니 나계석을 복원하였다. 또한 평안도 곽산의 재산가인 김창곤과 혼인하여 그곳에서 활동한 나지석을 살펴보고, 오빠 나홍석과 나경석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지역 및 한국 근대사에서 그들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나혜석을 비롯한 이들 수원출신의 영민한 준재들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일제 식민통치 체제에 대하여 각자의 방식대로 대응하였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의 방황과 좌절, 그리고 개인적 생존을 위한 노력 등 다양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적 변화의 와중에서 각기 처한 조건에서 또 다른 전형을 만든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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