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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uth-North Korean Conflict Dynamics

        郭台煥 慶北大學校 平和問題硏究所 1977 평화연구 Vol.2 No.-

        韓半島는 二次大戰後에 美蘇兩超强大國間의 冷戰國際政治의 犧牲物이 되었다. 즉, 美蘇는 38度線을 그어 韓半島를 두 동강이로 갈라 놓았고 美蘇共同委員會에서 美國의 끈덕진 對蘇協相勞力에도 불구하고, 韓半島에는 韓國과 北韓이 1948年에 設立되어 兩極體系 속에서 冷戰의 부산물로써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大韓民國政府와 北韓은 1970年代 初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意義있는 關係를 맺지 못하였고 더우기 北韓은 韓國戰爭을 유발시키는 등 韓半島에는 武力統一을 시도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그 野慾을 포기하지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朴正熙 大統領은 1970年 8·.15 기념사에서 南北韓의 平和的 競爭을 提議하였고, 1971年 8月 12日에는 大韓赤十字社에 離散家族찾기運動을 위한 直接協商을 벌릴것을 提議, 1971年에 南北韓赤十字會談이 시작되었으나 이내 雙方의 意見對立相이 노정되었다. 그러나 두 赤十字社 豫備會談이 進行되고 있는 동안, 1971년 11월경 韓國政府는 판문점에서 회합을 갖고 있던 적십자사 代表를 통하여 이후락-김영주 會議를 비밀리에 제안하였고 북한측이 1972년 初에 이 제안을 수락함으로서 南北韓 關係의 新時代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후락 부장은 평양을 다녀왔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은 서울을 다녀갔으며 이와 같은 李. 朴의 상호비밀방문은 1972년 7월 4일 南北韓共同코뮤니케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하는 결과를 낳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分斷以後 얼어 붙었던 南北關係가 차츰 녹아내리는 듯 하였으니, 실제로 이 시기는 南北韓相互作用關係에 있어서 가장 協調的인 新時代를 장식하는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1972년 11월에는 南北調節委員會가 設立되었으며 南北對話도 그 後 두 채널 즉 赤十字社와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하여 계속되었으나 1973년 8월 북한측의 일방적 선언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이 論文에서는 南北對話가 난항에 빠진 原因을 Table 1 과 Table 2에 상세히 分析檢討하였는데, 各 Table 에서 보는 바와 같이 韓國과 北韓은 平和統一 이슈에 대하여 相 징되는 接近을 채택하여 쌍방이 反對되는 視覺에서 統一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어프로우치에 있어서 쌍방이 합의점에 대한 모색을 강조하고 있다. 즉 Table 1 과 그를 통해 알수 있는 바와 같이, 북한은 통일문제에 대하여 "政治的. 軍事的. 革命的 "接近을 채택하므로서 駐韓美軍 완전철수요구, 주한미군철수 이후에 平和조약체결을 요구하면서 남조선 혁명을 기도해 왔고, 韓國은 韓半島統一을 위한 단계적. 점진적. 기능적 접근을 시도하여 혁명을 시도하여 합리적인 통일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韓國軍의 現代化 및 自主國防을 完成할 때까지 駐韓美軍의 유지와 UNC의 유지를 주장해 왔으므로, 現在에는 확실히 쌍방의 통일접근 上의 상충점 때문에 남북한의 政治的對話가 곤경에 빠져있다. 한반도의 平和정착에 대한 기본적 문제는 통일 이슈에 대한 상충되는 접근을 조정하므로써 남북한이 서로 상충되는 가치관. 이념. 목표 및 社會體制를 어떻게하면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면 언제 어떤 조건하에서 북한이 남북해화에 다시 한번 응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특히 예상되는 주한 미군철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북한은 南北對話의 계속적인 進展의 조건으로써 駐韓美軍(40,000名)의 완전철수를 주장해 왔다. 말할것도 없이, 현재의 시점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四强의 복잡한 利害關係와 南北韓의 相互敵對行爲를 고려할때, 한반도로부터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란 非現實的이고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스러운 정책으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美國도 이미 4-5年內로 단계적 미군철수란 대원칙하에서 新對韓 政策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에 단계적 미군철수와 남북대화의 再開와를 關聯시켜 정책을 구상 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韓國의 安保와 韓半島에서의 戰爭再發防止는 駐韓美軍의 단계적철수 以前에 先行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南北韓의 關係改善에도 必要할 것이다. 南北對話의 再開는 한반도의 긴장환화에 첫단계가 될 것이며 駐韓美軍의 完全철수는 한반도에 있어서의 긴장완화가 先行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1980年代까지 條件없는 駐韓美軍철수는 自滅行爲戰略(self-defeating strategy) 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美軍과 韓國政府는 北韓. 蘇聯 및 中共으로부터 양보를 얻기에 勞力하여야 할 것인데 그 예를 든다면, 첫째, 四强의 南北韓交叉承認, 둘째 남북한 相互不可侵條約채결, 셋째 유-엔에 南北韓 同時加入 等인것이다. 그리고 韓. 美 兩政附는 北韓을 南北對話에 유도할 수 있도록 駐韓美軍의 감축(reduction)에 좀더 유연서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 例를 든다면 約 5千名의 駐韓美軍을 日本 및 韓國政府와의 긴밀한 협의 下에 一方的인 철수(unilateraal withdrawal)를 감행함으로써 北韓으로 하여금 양보를 유발케하는 一方法이 될수도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北韓이 韓美政府의 駐韓美軍철수 問題에 관한한 유연성을 보여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美國. 韓國. 北韓의 三者會談을 提議하는것도 바람직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만약 北韓이 上記 提案을 拒否하고 南北對話再開를 거절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한 駐韓美軍의 단계적 철수가 移行되는 기간 동안에 南北韓間에 긴장이 고조 될 경우 어떻게해야 할 것인가? 만약 北韓이 三者會談의 개최를 수락치 않고, 아무 조건없이 駐韓美軍의 一方的 徹收(上記提案대로)를 移行한 後에 南北對話의 再開를 거절할 경우는 北韓이 아직도 韓半島問題를 진지하게 討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意味하는 일일 것이므로, 그런 경우 美國은 韓國의 安保에 대한 公約을 再確認할 수 밖에 없으며 韓半島에 美空軍 및 小規模의 美地上軍을 韓美相互防衛條約이 存續하는 限 韓國防衛 및 東北아시아安定化를 爲하여 駐屯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韓國安保에 대한 美國의 强力한 公約移行의 신빙성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强力한 公約과 韓國의 自主國防力만이 韓半島에서의 새로운 戰爭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The Birth of North Korean Regime A Historical Recollection

        Min, Byung-Hui 慶北大學校 平和問題硏究所 1976 평화연구 Vol.1 No.1

        19世紀末 西洋에 開放된 韓半島는 卽時 인방의 强大國틈 사이에서 權力政治의 對象이 되어 버린다. 한便으로는 日本의 亞細亞大陸 進出의 첫 段階基地가 되어 버리고 反面 亞細亞大陸으로부터의 東方進出의 基點이기도 했다. 1868年 明治維新後의 强力한 軍事力을 保有한 近代化한 日本은 亞細亞東北方의 敵들을 次例로 擊退시키다. 1895年에는 淸國을, 그리고 10年後인 1905年에는 露西亞를 敗北시키고 그後 5年뒤인 1910年에 韓半島를 正式으로 合倂하여 1945年까지 35年間 日本의 政治, 經濟, 軍事 文化圈에 넣게 되었다. 韓國獨立회복에 關한 國際的認識이 처음 論議되었던 것은 1941年 8月에 美大統領 루-스벨트와 英國相 처-칠間에 맺어진 ATLANTIC CHARTER에서였나. 루-스벨트는 日의敗戰後 韓國의 卽刻的인 獨立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中國의 蔣介石政府下의 信託統治란 構想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3年 3月 英國外相 이-든이 와싱톤을 訪問했을 때 루스벨트는 戰後處理問題의 하나로서 韓國을 당분간 美國과 "其他 몇國"의 共同信託統治管理下에 두자는 뜻을 表明했었다. 이 루스벨트의 構想은 1943年 11月에 열렸던 카이로 會談에서 正式으로 發表되어든바 카이로 宣言文에는 蔣介石總統의 영향으로 韓國이 "적당한 時期에" 獨立될것임을 確言케 되었다. 當時 쏘련은 카이로會談에 參席치 않았기 때문에 이 三大國首班(美루스벨트大統領, 英처-칠 首相, 中蔣總統)은 스탈린首相에게 이뜻을 알렸다. 그後 스탈린은 1945年 7月에 열렸던 포츠담會談에 參席時 上記 4個國의 韓國信託統治管理案에 同意했으며 그는 同時에 쏘련의 對韓攻擊을 시사했다. 當時 쏘련은 對日宣戰을 안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意圖는 秘密에 부쳐있었고 1945年 8月 8日 쏘軍이 濟州에있는 日本軍에 宣戰攻擊을 함과同時에 쏘련의 對韓政策一卽 連合國의 對韓託治案과 그後의 獨立認定을 公表하게 된다. 1945年 8月 15日 日天皇이 連合國에 無條件항복함으로서 所謂 大東亞戰爭은 끝나며 韓國은 日本으로부터의 36年間의 統治에 終止簿를 찍게 된다. 政治的 軍事的 動機가 무엇이었던間에 美·쏘兩軍은 韓國에 駐둔했던 日軍의 무장해제를 爲해 38度線을 基準으로 以北은 쏘軍이 以南은 美軍이 그 責任을 맡기로 合議를 하였다. 그러나 38度線은 얼마 안가서 美쏘間의 冷戰의 戰線이 되어버리고 만다. 韓半島分斷의 永久化를 防止하고 韓國의 將來를 具體的으로 解決코져 美英쏘 三國外相은 1945年 12月에 모스크바에서 會議를 갖고 10日間의 論議 끝에 美쏘英共同委員會創設, 韓半島全體의 臨時政府設立, 그리고 午年間의 四大國共同信託統治案等에 合議를 보았다. 이 消息이 서울에 傳해지자 共産黨을 包含한 모든 政黨들이 信託統治案에 反對意思를 表明했다. 그러나 몇日後 갑자기 南北韓의 共産主義者들은 態度를 바꾸어 모스크바協商案을 支持한다고 나섰다. 韓國民의 大多數가 信託統治案에 反對하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모스크바 協商案의 內容대로 美쏘共同委員會는 1946年 3月에 서울에서 開催되었다. 會議는 첫모임부터 美쏘兩側間에 모스크바協商案의 해석差異로 難境에 빠지게된다. 美國의 立場에 反對하여 쏘련側은 모스크바 三相協定의 모든 事項에 同意하는 韓國의 政治團體들만 하고 將來의 임시정부에 關한 協議를 해야한다고 고집하였다. 이것은 결국 信託統治를 支持하는 共産主義者들 만이 相議의 對象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당시 信託統治를 反對하는 사람들은 李承晩傳士나 金九先生같은 右翼團體들뿐이 아니고 立法議員議長이었든 金奎植氏 같은 中道派들도 包含되어 있었다. 따라서 美國側은 韓國民의 大多數를 代表하는 이사람들을 協議의 對象에서 除外한다는 것은 非現實的이라하여 쏘련側提案을 拒否하였다. 따라서 美쏘共同委員會는 결열상태에 빠져버린다. 美國側은 모스크바協定의 다른事項 一例들면 南北間의 경제 行政統合에 對한 討議를 먼저 다루자고 提案하나 쏘련側은 拒否한다. 그리하여 1947年 9月에 美國은 韓國問題를 美쏘共同委員會 테두리 밖에서 解決코저 이 問題를 U.N.에 提出하여 同年 11月에 U.N.은 43對 0(기권 0)으로서 U.N. 임시委員團을 창설하자는 美側提案을 可決하였다. 勿論 쏘련과 그 衛星國家들은 投票에도 參觀치 않으면서 이 U.N.委員團의 承認을 拒否한다고 宣言하였다. 72名으로 構成된 U.N. 임시委員團이 1948年 1月에 韓國에 倒着하자 쏘련은 이들의 入北을 拒切한다. 그리하여 U.N.은 또다시 U.N.감시團이 參席할 수 있는 地域만에서의 선거를 施行하도록 다시 指示를 하게된다. 이것은 結局 南韓만의 선거를 말하게 된다. 1948年 5月 10日, U.N. 감시委員團의 參觀下에 南韓一帶에 걸쳐 선거가 實施되었다. 共産主義者들은 勿論 선거를 拒否했으나 韓國서의 첫選擧로서는 72%라는 많은 投票率을 올려 成功的으로 끝을 맺었다. 1948年 8月 15日, 解放 三週年을 맞이하여 大韓民國이 樹立되고 U.N.은 卽時 이 政府가 法的效力을 가진 韓半島의 唯一한 政府임을 承認하였다. 北韓側은 大韓民國樹立을 嚴重히 抗議하면서 그들 自身의 政權을 同年 9月에 創立하였다. 그러면서 北韓은 U.N.의 ?能을 認定치 않는다 宣言하였다. 世界의 壓倒的多數의 非共産國家들이 大韓民國을 承認하는 反面 北韓은 오로지 少數의 共産國家들만에 依해 承認이 된다. 北韓의 政權樹立의 過程을 理解하기 爲해서는 日帝敗戰後의 北韓의 政治史를 간단히 더듬어 必要가 있다. 北韓에 진주한 쏘軍은 卽時로 日帝行政機構를 파괴하고 勞動者, 農民, 政治團體로 구성된 「人民委員會」를 創設한다. 그리하여 마치도 北韓의 行政은 北韓住民들에 依해서 施行되가고 있다는 印象을 주려고하나 實際的인 權限은 쏘軍에 附屬된 政治담당 將校에 依해 行使되었던 것이다. 反面 1945年 9月 쏘軍과함께 入北한 金日成은 北朝鮮共産黨을 이끌며 쏘軍의 支援을 받고 있었다. 그밖에도 金斗奉이 이끄는 新民黨 그리고 조만식先生이 이끄는 朝鮮民主黨이 있었으며 天道敎들로 構成된 靑友黨도 活躍을 하였다. 그中에서 기독교지도者 조만식先生이 領導하던 朝鮮民主黨이 비단 기독敎人들뿐 아니라 多數의 民族主義者들의 支持를 받았기 때문에 조만식氏가 一九四六年 信託統治를 反對하다가 쏘軍에 체포되지만 않았던들 北韓에서 가장支持를 많이받고 人氣를 끊었을 것이다. 北朝鮮共産黨을 조직한 金日成은 將次의 北韓의 政治權 영도權을 장악코져 共産黨과 左翼系知識人들로 構成된 新民黨을 合쳐서 더 幅넓은 기반을 닦고져 두黨을 合黨하여 北朝鮮勞動黨을 一九四六年八月에 創設한다. 合當大會에서 金日成은 自己自身이 黨首가 되려고 企圖하였으나 新民黨員들의 反對를 눈치낸 그는 大會에 參席한 쏘軍의 권고로 副委員長이 되고 新民黨首였던 金斗奉이 委員長이 된다. 勿論 쏘軍의 後援과 支持를 받고있고 北韓의 共産主義者들과 쏘軍의 긴밀한 連絡을 取하고 있었던 것은 金日成이었다. 金日成의 北韓의 政治權 장악은 一九四九年 六月 北韓의 勞動黨과 南韓의 勞動黨이 合쳐 朝鮮勞動黨으로 合黨時 그 自身이 黨首가 됨으로써 完結을 맺는다. 金日成은 美·쏘共同委員會가 進行되고 있는 中에도 北韓의 政權樹立을 爲한 모든 過程을 進行시키고 있었으며 南韓에서 UN監視下 總選擧가 實施되자 바로 그들도 南北韓을 通한 총선거를 實施한다고 發表를 했다. 그리하여 南韓에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지 十日後인 八月二五日 소위 南北韓총선거를 實施했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五月에 施行된 南韓서 施行된 선거가 UN監視下에 거행됐고 또 自由公開的이었던 反面 北韓의 선거는 共産主義者들에 依해 추천된 立候補者들만이 出馬하고 投票者들은 그져 그 候補者들에 對한 可否만을 表하는 선거였으며 투표율도 北韓住民의 99.7%의 有權者와 南韓人口의 77.5%가 參加했다고 허위主張을 함으로써 그 거짓상을 나타냈다. 實은 南韓人口를 代表한다는 千餘名이 38度線 바로위에 位置한 海州에 모여 南韓을 代表하는 代議員 360名을 選出한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48年 9月 所謂 北朝鮮最高人民會議는 人民憲法을 採擇하고 所謂 人民共和國을 創設한다. 首相에 就任한 金日成은 韓半島의 共産化統一을 至上의 目標라 宣言한다. 背後에서 金日成의 正權樹立을 꾸준히 支援했던 쏘련은 期待한대로 北韓을 承認하고 쏘련의 衛星國家들도 뒤따라 外交關係를 樹立한다. 스탈린은 祝電을 보내 北韓政權 수립을 환영하여 韓半島에 單一된 共産政權이 머지않아 설 것을 격려한다. 평양의 노동신문도 北韓政權 수립에 對한 쏘련의 공로를 찬양하고 쏘련과의 유대를 강조한다. 이리하여 日帝의 敗戰으로 解放된 韓半島는 三年만에 分斷되어 또 다시 權力政治의 對象物이 되어 버렸다. UN監視下에 合法的으로 樹立된 南韓의 大韓民國이나 쏘련의 支援으로 세워진 北韓政權 모두다 憲法에는 韓半島의 分斷을 認定치않고 제各己 全半島의 統合權을 宣言 하였으나 實際上 北韓에는 쏘련 衛星國이 창설 되었으며 南韓에는 自由陣營의 支援으로 大韓民國이 樹立 되었던 것이다. 北韓政府樹立 過程을 간단히 分析해 봄으로써 二次大戰後의 쏘련은 衛星國家 創設의 유형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 韓國의 傳統的 平和思想에 關한 硏究

        琴種友 慶北大學校 平和問題硏究所 1976 평화연구 Vol.1 No.1

        On the base of Today's Korean consciousness and life, are harmonized and operated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Christianism and European idea. The author believes in that such an harmony remains ostensibly in civilian life-customs and so tries to excavate and study Korean peace-loving idea in view of above propositions. Traditional state-idea of Korea is "The Universal Interest of Human beings" stemed from the Dahn Goon (legendary founder of Korea) Mythology. "The Universal Interest of Human beings" has been created and developed today's Korean Idea with fusing our people's peculiar faith and above four foreign ideas, precipitated into the village-community and formed a sort of peace idea. Korean people has almost never invaded first foreign countries, loving their homeland, enjoining reality. The pacific idea originally and essentially was we can say, sprouted, from "The Universal Interest" of founding idea of nation and our people's peculiar peace-loving ideal. Those two ideas has succeed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lossomed out into peaceful independence movement of 1910 and become the base of our present foreign-policy pursuing peace. Thus, the Republic of Korea really preserves and maintains national orthodoxy in view of succeeding above two ideas. The author studied Taboo idea as one character in civilian faith of life The Koreans have been living in net of Taboo whose core is the avoiding killing wounding. During the Taboo such as before and after mourning rite, religious rites or even in daily life, the Koreans have never killed or wounded any living creatures, even avoided looking such scenes. This pacifistic Tabooism flows into the bottom of the Koreans. For the Koreans "good" means non-violence, non-attack and non-warlike in view of good-and-evil. We may see above peace-loving examples in the Koreans' view of quarrel and scuffle. They are reluctant to choose weaker as a match and have idea of "being defeated is defeating" in many cases. This says that the Koreans love concession and avoid fighting, and winning in appearance is actually defeated in some cases.

      • 李朝後期實學派와 平和主義

        李乙浩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 1978 평화연구 Vol.4 No.-

        이조후기실학파들 중에서도 특히 북학파라 불리우던 일련의 학자들은 그들의 대청관계에 있어서 숭명배청을 주장하던 보수세력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조선조 오백년을 통하여 그들의 대외정책은 한말의 개화기를 제외하고는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로 집약되며 중국은 명 청이라는 두 왕조와의 관계에서 구현된다. 조선조는 그러한 국제적 환경에 처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국난을 치루었던 것이다. 잠시 일본과의 관계는 뒤로 미루고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저 멀리 이왕조건국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태조원년은 영태조홍무24년이니 그간에 명나라는 고려와의 사이에 일진일퇴하는 외교적 난제를 안고 있었으나 이성계 위화도회군(홍무 21년)이래 외교정책을 일신하여 명나라의홍무년호를 다시 사용하는 한편 명나라의 의복을 입고 원나라의 고복을 금하는 등 선린평화정책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이씨왕조의 명과 나라에 대한 선린우호관계는 그의 형식은 여하간에 국시로서 확립되자 이에 숭명화로 발전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도 이에 동조했다는 점에서는 숭명모화론자다. 이는 중화사상에 근거한 화이관계의 이데오로기에 의하여 화이관계의 이데오로기에 의하여 양국의 선린평화는 겨우 그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니 이성계가 정명파병을 반대한 이유로서 열거한 사개항복중 이서역대의 불가함을 그 이유의 하나로 삼은 것은 이미 그의 심중에는 「이소사대」의 뜻이 굳어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자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사명」을 의미한다. 이소사대의 관계는 존대와 외복의 관계로서 그들의 화이론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위장된 선린평화인 것이다. 한민족에게는 삼국시대 이래 고구려에 의하여 대중국적 주체의식이 정립되었고 그들의 강성 또한 광활한 지역을 점유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강계의 남하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한 한민족의 북에 대한 향수는 가실길이 없다. 고려 자체가 이미 고구려의 계승으로 자부하였고 원구를 맞아 설욕의 의지는 더욱 굳어질 따름이었다. 고려말기의 그 어려운 처지에서도 위왕과 최영에 의하여 조민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각각 좌우군사통사로 삼게 하여 요동정벌의 대거를 모사한 것도 면면히 흘러나오는 한민족 중원도모 및 고구려강토에 대한 북진의욕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한 혁맥이 이왕조의 이소사대론에 의하여 단절되고 게다가 존숭과주의 학풍은 더욱 더 이러한 풍조에 가세하여 일로 자아상실을 가속화시키었다. 1936년 인조 14년 병자년은 한 중양국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해가 되었다. 만주를 근거로 하여 건국한 여진족후금의 세력이 확대되어 드디어 병자 4월에 칭제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치었으니 이로부터 중원의 대세도 기울게 되지 청과 우리나라와의 외교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명 청 중 택-을 요하는 상황과 아울러 명의 은조일국초보다도 임진왜란 때 내원했던 명군에 대한 의리-에 대한 문제의 처리인 것이다. 광해문 8년 (1616)에 후금이 자립하고 명의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명은 우리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처음에는 쉽사리 응하지 않다가 임란의 은조때문에 동10년 (1618)에 일만삼천의 원병을 보냈으나 결과는 명군과 더불어 대패이었다. 이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화전양양의 결단이 요청되는 상황하에서 명을 저버리지도 않고 후금의 노여움도 사지않는 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조반정 후 후금은 심양(봉천)에 천도하고 명의 요서지방을 침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태조는 전상으로 죽자 태종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정세는 또다시 일변하여 태종은 먼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왕자아민에게 병삼만을 주어 장현침입하게 하니 이들은 안주 평양을 거쳐 평산에 육박하였다. 인조 이하 조신들은 세불리하므로 란을 강화도로 피한 후 최명길등 주화론자들에 의하여 화의가 성립되지 대체로 그들과는 「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병 후 서로 침략하지 않을 것과 세공및 국경호시(무역)을 허한다」는 조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해는 인조 5년 정범이므로 정묘호란이라 이르지만 후금을 계속하여 우리나라를 괴롭히다가 다시금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만다. 그것은 병자(인조14년 1636) 1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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