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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과 영광의 창학과 전통

        오국근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6 佛敎學報 Vol.- No.45

        The birth of Dongguk University in 1906 was a miracle. The miracle in that Korean Buddhists gave birth to a new kind of school system, a high of school system at that, in only 11years, after they were released from the yoke of oppression in 1895 after more than 500years of the status of outcasts branded by Korean government. It should be noted that two Japanese monks, Ven. Sano and Ven. Inoue gave valuable assistance to the birth of the new school. Around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there was a rush of establishment of school in Korea. Whereas many schools including colleges enjoyed the protection and encouragement of the Royal Household and government, financial assistance of foreign missionaries, and public donation. Dongguk had no such privilege, bearing all the burdens of finance and budget by themselves. (and their temples) Dongguk underwent undescribable hardships and trials in its slow and arduous course of development. It had to change its name and status 7times in only 20 odd years. The origin of Dongguk can be traced to the Kwanghak-bo in 946, Koryo Dinasty. Overcoming all those difficulties, Dongguk maintained its glorious Status of Main Center of Korean Buddhism Education pursued relentlessly its course for its educational goal of Three Protectionism (Protection of Dharma, People, and Academicism) Dongguk's brilliant achievement in and contribution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culture was core and base for the korean national (independent) movement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Japanese did everything to suppress and harrasse Dongguk, and, they took to the last resort.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closed Dongguk in 1944 perpetually, among many Korean schools Dongguk was the only one dealt with such a barbaric measure. 동국대학교는 1906년 5월 8일 기적적으로 탄생하였다. 이조 500년 동안 내내 특히 말기 200년 동안 천민으로 취급받아 도성출입마저 금지되었다. 불교승려들이 1895년 출입금지가 해제된지 꼭 11년만에 근대적인 교육기관, 그것도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했다는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日人(左野前勵, 丼上玄眞 두 스님)의 협조와 기여가 있었다는 것은 特已 할 일이다. 1900년 전후해서 梨大, 延大, 高大를 비롯한 많은 私學 들이 앞다투어 설립 되었으나 이 학교들은 거의가 황실과 정부의 비호, 서양교회의 지원, 일반인들의 기부를 바탕으로 비교적 순탄하게 개교, 발전해 간데 비해서 동국대학교는 순전히 불교(사찰)의 힘만으로 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전체학생의 교육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어려움을 감당하는 한편으로는 내외의 간섭과 방해를 해서 그 발전과정을 지지부진하여 개교후 불과 20여년 사이에 학교의 이름과 격이 무려 7번이나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동국대학교의 역사적 연원을 따지면 고려 3대왕 정종2년(946)에 세워진 최초의 전국적인 불교의 교육 장학기관인 廣學堂을 들 수 있다. 이런 험난하고 고된 과정에서도 동국대학교는 韓國佛敎中央敎堂 으로서의 위상을 굳혀 나갔으며 교육이념인 三護主義,(護法, 護國民, 護文)의 전통을 끝까지 지켜나가면서 한국민족문화 발전에 찬연한 업적을 쌓아갔다. 동국대학교의 이와 같은 빛나는 업적을 그대로 일제에 대한 한국민족운동의 핵심과 근간이 되었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그를 막고 없애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해오다가 드디어 1944년 한국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중 유일하게 동국대학교를 영구 강제 폐교하였다.

      • 동국대학교 의과대학생들의 스트레스 요인과 대처방식

        이광현,한미라 동국대학교 경주대학 1996 東國論集 Vol.15 No.-

        본 연구는 동국대학교 의과대학생들이 경험하는 스트레스 요인을 분석하고 대처유형을 알아보고자 실시되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생의 스트레스 영역을 알아보기 위해 의과대학 의학과 학생 191명을 대상으로 대학생용 생활스트레스 척도를 실시하여 이를 주성분분석(Principal Component Analysis)하였다. 또한 동국대학교 의과대학생의 대처방식을 알아보기위해서는 대학생용 다차원적 대처척도를 실시하여 이를 주성분(Principal Component Analysis)분석 하였다. 실시한 결과, 학생들은 가치관 및 종교관 영역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로는 사회적 대처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 결과의 의의와 시사점, 추후 연구의 필요성과 방향을 논의하였다. We found out and analyzed stress factors and coping strategies of DongGuk University medical students. To find out stress factors, Life_Stress Scale for Undergraduate was performed by 191 DongGuk University medical students. We analzed these data into factors by Principal Factor Solution. Likewise, To find out coping factors, Multidemensicnal Coping Scale for Undergraduate was performed by 191 DongGuk University medical students. We analzed these data by Principal Component Analysis. As a result, DongGuk University medical students are suffering from identity or religious problems, economic problems, relationship problems with other sex , relationship problems with other family members and so on, as stress factors. And DongGuk University medical students are coping stresses with seeking for social resource, religious resource, preservation, emotional outburst. We discussed results and meanings of this study

      • 최근 5년간(1998~2002년) 동국대학교 경주병원에서 분리된 각종 병원성 세균의 항균제 내성양상

        하경임,김문연,이영현 東國大學校醫學硏究所 2003 東國醫學 Vol.10 No.2

        목적 : 감염성 질환의 원인균이나 항균제 감수성 양상은 시대, 지역, 병원의 특성 그리고 대상 환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저자들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최근 5년간 동국대학교 경주병원에서 분리된 주요 병원성 세균의 양상과 항균제 내성율 변화를 분석하여 감염성 질환 환자에게 경험적 항균제 치료시 적절한 항균제를 선택하고, 또 향후 항균제 사용관리의 기본적인 자료로 이용하고자 본 연구를 시작하였다. 대상 및 방법 : 1998년 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동국대학교 경주병원을 내원한 환자들 중에서 세균배양 검사가 의뢰되어 진단검사의학과에서 병원성 세균으로 분리 동정되었던 주요 그람음성 간균 및 그람양성 구균에 대하여 항균제 감수성 검사를 시행하였다. 세균배양검사가 의뢰된 검체에서 균의 분리 및 동정은 통상적인 방법을 따랐으며, 분리된 균주에 대한 항균제 감수성 검사는 Kirby-Bauer 변법에 의한 표준 디스크확산법으로 시행하였다. 결과 :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동국대학교 경주병원에서 분리된 주요 세균별 항균제 내성율은 다음과 같았다. E. coli는 cephalothin 33~51%, ceftazidime과 aztreonam 및 amilkacin에 2~10%, gentamicin 27~34%, ciprofloxacin 18~34%로 전국 다른 병원과 유사하였다. K. pneumoniae는 cephalothin 29~55%, ceftazidime과 aztreonam에 14~46%, amikacin 18~27%, gentamicin 5~38%, ciprofloxacin 1~13%의 내성율을 보였다. E cloacae는 gentamcin에 15~29%, ciprofloxci에 2~13%로 내성율이 낮았다. 그러나 E. cloacae는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 ceftazidime 과 aztreonam에 61~84%, amikacin에 21~77%로 아주 높았지만 2001년 이후 39~42%와 9~10%로 전국 평균과 비슷하게 내성율이 급격히 낮아졌다. S. marcescens는 amikacin에 49-60%, aztreonam에 35~60%, ciprofloxacin에 34~46%의 내성률을 보여 전국 다른 병원의 평균보다 높았으며 특히 Ceftazidime에 대한 내성율은 98년과 99년에 56%와 51%로 아주 높았지만 2000년 이후 7~l4%로 크게 감소하였다. P. aeruginosa의 항균제 내성율은 gentamicin 37~59%, ciprofloxacin 30~42%, imipenem과 amikacin 및 aztreonam에 대해서는 10~40%, 9~30%, 4~l7%, ceftazidime에 10~14%였으며 특히 imipenem과 amikacin에 대한 내성율은 2001년 이후 10-20%와 9-15%로 오히려 감소되었다. 또한 본원에서는 imipenem내성 장내 세균은 분리되지 않았으며 2001년과 2002년에 분리된 ESBL생성 E. coli와 K. pneumoniae 그리고 E. cloacae의 분리율도 1.8~2.2%, 6.8~8.6% 그리고 5.4~11.4%로 전국 12개 병원간의 평균 분리율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주요 그람양성 구균의 균주별 항균제 내성율은 S. aureus가 ciprofloxacin에 52~66%로, oxacillin에 56~69%로 연도별 내성율이 점차 증가되어 2001년 이후 MRSA의 분리율이 전국 다른 대학병원의 평균분리율과 비슷해졌으며, vancomycin이나 teicoplanin에 내성인 S. aureus나 CNS균주는 분리되지 않았다. E. faecalis은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 vancomycin과 teicoplanin에 대한 내성율이 38~45%로 아주 높았지만 2001년 이후에는 vancomycin에 14~16% teicoplanin에 9~18%로 전국 평균과 유사한 내성율을 보였다. S. pneumoniae는 2001년 이전에 51 ~60%이던 oxacillin 내성율이 2002년에 70%로 높아졌다. 결론 : 최근 5년간 동국대학교 경주병원에서 분리된 주요 병원성 세균이 항균제 내성율이 1998년~2000년에 비해 2001년과 2002년에 전국 평균과 유사한 내성율로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일부 균주에서는 항균제 내성율이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다. Background: Since the causal bacteria of infectious diseases or the antimicrobial sensitivity aspects can be varied by the times, regions, hospital characteristics, subjective patients, and the periodical analysis. Therefore, we analyzed the changes of the main pathogenic bacterial aspects, isolated in Dongguk Univ. Kyeongju Hospital for the latest 5 years from 1998 to 2002, and the antimicrobial resistance rates, to select the proper antimicrobial agents for the infectious disease patients during the empirical treatment. Moreover, this study was initiated to usuage the results as the fundamental data for the pertinent use and control of the antimicrobial agents in the future. Methods: We performed the antimicrobial sensitivity tests for the bacteria isolated from the department of Laboratory medicine through the bacterial culture tests requested for the patients who were admitted to Dongguk Utiv. Kyeongju Hospital from January 1998 to December 2002. The isolation and identification of the bacteria were followed by the general methods, and the antimicrobial sensitivity test was conducted according to the standard disk diffusion test by the modified Kirby-Bauer method. Results: The antimicrobial resistance rates of the pathogenic organisms isolated from Dongguk Univ. Kyeongju Hospital for 5 years from 1998 to 2002 were as follows. E. coli showed the resistance rate 33-5l% to cephalothin, 2-10% to ceftazidime and aztreonam, and amikacin, 27-34% to gentamicin, and 18-34% to ciprofloxacin, which were similar to the rates of other hospitals in Korea. K. pneumoniae exhibited the rate 29-55% to cephalothin, 14-46% to ceftazidime and aztreonam, 18-27% to amikacin, 5-38% to gentamicin, and 1-13% to ciprofloxacin, and especially, the resistance rate to aztreonam was highly shown to be 39% in 1999 and 37% in 2000, but was remarkably decreased to 23% since 2001. The resistance rates of E. cloacae were relatively low as 15-29% to gentamcin and 2-13% to ciprofloxacin, however, the rates of antimicrobial resistance to ceftazidime and aztreonam and to amikacin were respectively quite high as 61-84% and 21-77% from 1998 to 2000 but were rapidly decreased to be 39-42% and 9-l0% each as similar to the national averages since 2001. S. marcescen showed the higher resistance rates as 49-60% to amikacin 35-60% to aztreonam, and 34-46% to ciprofloxacin in our hospital than other hospitals, and particularly, its resistance rate to ceftazidime was very high as 56% in 1998 and 51% in 1999 but was considerably decreased to 7-14% since 2000. The anitimicrobial resistance rates of P. aeruginosa were 37-59% to gentamicin, 30-42% to ciprofloxacin, 10-40% to imipenem, 9-30% to amikacin, 4-l7% to aztreonam, and 10-14% to ceftazidime, and expressly, the resistance rates to imipenem and amikacin were rather decreased each to 10-20% and 9-15% since 2001. Moreover, our hospital did not isolate an imipenem resistant enterobacteriaceae and the ESBL-producing E. coli, K. pneumoniae and E. cloacae isolated in 2001 and 2002 were notably lower as 1.8-2.2%, 6.8-8.6%, and 5.4-11.4% for each isolate. S. aureus gradually showed the annually increased resistance rates as 52-66% to ciprofloxacin and as 56-69% to oxacillin, and the isolation rate of MRSA since 2001 was almost equal to other university hospitals of this country. S. aureus or CNS strain tolerant to vancomycin or teicoplanin was not isolated. However, E. faecalis had significantly high resietanre to vancomycin and teicoplanin as 38-45% between 1998 and 2000 but showed the demrased resistance rates as 14-16% to vancomycin and as 9-18% to teicoplanin since 2001, which were similar to the national averages. S. pneumoniae showed the incrased rate of antimicrobial resistance to oxacillin from 51-60% in before 2001 to 70% in 2002. Conclusions: The rates of antimicrobial resistance of the pathogenic bacteria isolated from Dongguk Univ. Kyeongju Hospital for the latest 5 years were regularly maintained to be similar to the national averages in 2001 and 2002, compared with the rates in 1998-2000, or even some bacterial strains showed rather decreased rates of antimicrobial resistance.

      • KCI등재

        허영호의 1930·40년대 불교교육 활동과 동국대

        황인규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5 동국사학 Vol.59 No.-

        This dissertation is to trace back Heo Youngho’s buddhist educational activity in 1930~40, especially for Jung’ang Buddhist Special College and Hyehwa Special College, the previous models of Dongguk University, I looked over the story that he led this school and its significance. He led Dongguk University after his study in the department of Buddhism, Daejeong University, in the following year, 1934, Heo Youngho was designated as the dean of Jung’ang Buddhist special college, and then right after the Korea’s liberation, he was inaugurated as the first president of Dongguk University. He was an educational doer who carried out his thought in the real educational field by developing Buddhist activities with modern Buddhist recognition as a modern Buddhist educator. While re-serving a dean and a professor of Jung’ang Buddhist special college, he actively worked for Buddhist youth movements, Mandang and the 2nd director in the Confederation of Joseon Buddhism, General affairs in the alumni of Jung’ang Buddhist college etc. And also Heo Youngho worked for a director and a member of secretaries in Joseon Buddhism, inaugurated as the chief director of Hyehwa special college working for the librarian of Supreme Patriarch, Bang Han’am, he reinstated as the principal of Hyehwa special college after Korea’s emancipation, and he arbitrated the conflict between the religious body and the Confederation of Buddhist Innovation leading Dongguk University as the first president. He resisted against oppression of Japan, in the latter part of his life, he cooperated in the area of Japanese Buddhism, but he also was a scholar and a doer of innovation of modern Buddhism and Modern Buddhist Education. Heo Youngho shared an intention with Kim Beoprin, he insisted that the key factor of modern Buddhist innovation was Buddhist education recognizing the reality of Buddhism precisely participating into the Buddhist youth movement. His educational methodology and its content was not much different from the classes of the current college course, especially by leading the foundation as the first president of Dongguk University, he tried to establish the symbol of school which had an intention to expand the range from the Buddhist study including ordinary people to the field of humanities after the claim as Jung’ang Buddhist special college. 본 연구는 허영호의 1930·40년대 불교교육 활동을 추적하고, 특히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와 혜화전문학교, 동국대학을 이끌었던 내용과 그 의의를 살펴본 연구이다. 허영호는 대정대학 불교학과 유학 후 이듬해인 19334년 중앙불교전문학교의 학감에 보임되면서 해방직후 초대 동국대학 학장에 이르기 까지 동국대를 주도하였다. 근대 불교 교육가로서 근대 불교인식으로 불교계 활동을 전개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활동한 교육 실천가였다. 중앙불교전문학교의 학감겸 교수에 재임하면서 만당과 조선불교총동맹 제 2대 집행위원장, 중앙불전 교우회 총무 등 불교청년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허영호는 조선불교 교무원 평위원과 이사로, 종정 방한암의 사서로 활동하면서 혜화전문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해방후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으로 복교하였으며, 동국대 초대의 학장으로 동국대를 이끌면서 교단과 불교혁신총연맹의 알륵을 중재하기도 하였다. 허영호는 일제의 강압에 저항을 하였으며, 생애 후반부에 일제 불교라는 영역에서 협력하였지만 근대불교의 개혁과 근대 불교교육의 학자이자 실천자 였다. 허영호는 김법린과 뜻을 같이하며 불교청년운동에 참여하면서 불교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근대 불교개혁의 요체가 불교교육이라고 주창하였다. 그의 교육 방법 및 내용은 현대 대학과정 수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특히 동국대 초대 학장으로서 재단을 이끌면서 중앙불교전문학교 이래 표방해왔던 재가자를 포함한 불교학은 물론이고 인문학 분야 까지 확대하는 학교의 표상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 동국대의 한용운 기억 · 계승

        김광식 ( Kim Kwang-sik )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2020 전자불전 Vol.22 No.-

        본 고찰은 만해 한용운 정신의 기억, 추모, 계승 등에서 중요한 대상인 동국대의 문제를 다른 글이다. 동국대에서는 만해를 제1회 졸업생, 동창회장, 동국정신의 연원, 동국문학의 근원 등으로 인식하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를 다룬 학술적인 글은 빈약하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측면을 주목하여 그를 정리하였다. 첫째, 한용운의 삶과 동국대 역사와의 관련성을 다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제1회 졸업생, 초대 동창회장, 1930년대 중반 교장 추대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기록, 증언을 종합하여 비판적인 서술을 시도하였다. 둘째, 동국대에서의 한용운 인식에 대한 것을 다루었다. 즉 만해 정신의 인식 및 계승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만해 비석 건립의 추진위원회(1965)에 대한 대응, 동국문학의 연원으로서의 만해, 『동대칠십년사』에 나온 만해, 만해 탄신 100주년 사업, 만해 시비 건립(1987), 만해광장 조성(1988) 등이다. 셋째, 추후에 만해 연구의 주제를 피력하였다. 그는 동국대에서 만해연구의 부진성, 동국대의 만해 자료, 동국대에서 만해사업을 촉구한 동국사상연구회의 연구 등이다. 이 글이 만해 한용운의 사업, 동국대 정체성, 동국대의 만해정신 계승 등을 탐구함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길 바란다. efficiencies of preservation, access, and searchability engendered by digitalization.This review is another article on the issue of Dongguk University, which is an important object in the memory, memorial, and succession of the spirit of Han Yong-un in Manhae. Dongguk University recognized and insisted that Manhae was the first graduate, alumni chairman, the origin of Dongguk spirit, and the origin of Dongguk literature. However, the academic writing on this was poor. So, in this article, I summarized him by paying attention to the following aspects. First, it dealt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ife of Han Yong-un and the history of Dongguk University. Specifically, it is a matter of the first graduate, the first alumni president, and the election of the principal in the mid-1930s. I tried to make a critical statement by synthesizing the records and testimonies about this. Second, it dealt with the perception of Yongwoon Han at Dongguk University. That is, it is about the recognition and succession of the spirit of Manhae. Specifically, in response to the Committee for Construction of Manhae Monument(1965), Manhae as the origin of Dongguk Literature, Manhae, Manhae 100th Anniversary Project, Manhae City Monument Construction(1987), Manhae Square(1988) ), etc. Third, the subject of the study was presented later. He is the sluggishness of the Manhae Research at Dongguk University, data on Manhae at Dongguk University, and the research of the Dongguk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which urged Dongguk University for Manhae Project. I hope this article will be helpful in exploring the business of Han Yong-un, Dongguk University's identity, and the succession of Dongguk University's Manhae spirit.

      • 영어권 문화연구소 2012 봄 정기 학술대회

        동국대학교 영어권문화연구소 동국대학교 영어권문화연구소 2012 동국대학교 영어권문화연구소 학술대회 발표집 Vol.1 No.1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일시: 2012년 4월 14일(토) 장소: 동국대학교 다향관 세미나실 주제: 연극과 정치성

      • KCI등재
      •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은제사리합ㆍ팔엽연화형 받침 고찰

        김순아(Soon-Ah Kim) 동국대학교 박물관 2009 佛敎美術 Vol.20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Silver Sarira bowl and lotus-shaped pedestal with eight leaves of Dongguk university museum are important relics but have been ignored despite their unique form, composition, various patterns sculptured in line, and the importance of icon. For the meantime, Buddhist applied arts of Korean art history has variously studied Sarira vessel. However, it is safe to say that the interest in Sarira vessel or Huryeongtong inserted in Textile of Buddhist Statue Enshrinements, which has a different concept from general Sarira vessel enshrined in a Buddhist tower or a stupa of a Buddhist monk, appeared only in a few studies in recent days and did not make much progress. Sarira bowl, which is put into in compliance with ceremonial of 『Building Statue Sutra』, a kind of text on ceremony, after manufacturing a Buddhist statue, have some characteristics according to existing block books of Chosun: the lid of a brass bowl was rubricated with Buddhist Scriptures; the words of Buddha, Darani, both-faced mirror, or crystal beads are enshrined. However, the existing 『Building Statue Sutra』 is the block book of Chosun and so it was not revealed what ceremony was conducted for Buddhist Statue Enshrinements. Against the background, this study tries to categorize Silver Sarira bowl and lotus- shaped pedestal of eight leaves into Textile of Buddhist Statue Enshrinements by comparing them with the textile of Goryo which is known of its birth. There are several reasons in categorizing Silver Sarira bowl and lotus-shaped pedestal with eight leaves not into simple Sarira vessel but into Textile of Statue Enshrinements. Comparing Silver Sarira bowl of 阿彌陀佛腹藏 which was manufactured in 1302 and possessed by Onyang Folklore Museum with 1346 Changgok長谷 temple of made by steel of 佛腹藏 white bronze bowl, 1346 Munsu文殊 temple gold bronze Amitabha image of wooden bowl, the end of Koryo of Haein海印 temple 大寂光殿 wooden Vairocana Images 佛腹藏, they have similarity in the form and are rubricated or carved with the five letters of Jinsimjongja on the lid. The tendency unseen in general Sarira vessel serves as an evidence that Silver Sarira bowl and lotus-shaped pedestal of eight leaves of Dongguk University Museum are not simply Sarira vessel but Textile of Statue Enshrinements as above. Besides the fact, several patterns carved in line in bowl and stand are worth attention. In particular, three Buddas carved in body of bowl are Vairocana Trikaya Buddhas. These are of more importance in that they are unique examples of Vairocana Trikaya Buddhas not found other than in descended documentary records. Additionally, the combination of flower pattern decorated in lotus shaped pedestal with eight leaves and arabesque design is much connected to the composition of woodne statue pedestal possessed by Sudeoksa. Furthermore, it is the same as lotus pedestal described in Buddhist painting of Goryo and the flower patterns of neckless decoration in Budda, which provided a clue for its nationality and manufactured time. In the study based on similarity of the form of bowl in Goryo Textile of Buddhist Statue Enshrinements and the style of inscribing the words of Buddha, the expression and composition of lotus pedestal and stand, Silver bowl and other relics including pedestal were estimated to be manufactured around 14th century and segmented into Silver bowl and pedestal used as Buddhist Statue Enshrinements not a general Sarira vessel. Sanskrit characters of pedestal of eight leaves and its symbolism and meaning need more study through deeper consideration. It is expected that the nature of objects of applied arts manufactured for Buddhist Statue Enshrinements is closely examined through more excavation and investigation.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은제사리합과 팔엽연화형 받침은 그 이례적인 형태와 구성, 그리고 선각된 다양한 문양과 도상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간과 되어온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미술사의 불교공예분야에서 사리기에 관한 다양한 연구 활동이 있었지만 불탑이나 승탑 등에 봉안되는 일반 사리기와 다소 개념을 달리하는, 즉 불상복장물에 납입되는 사리기나 후령통에 관한 관심은 최근의 몇 몇 연구에 그칠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고 해도 괴언이 아니다. 불상을 조상하고 일종의 의례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상경』의 다양한 의식절차에 따라 납입되는 사리합은 현전하는 조선시대 판본의 내용에 의거하면 몇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합의 뚜껑부분에 범서를 주서한다든지 다양한 진언이나 다라니, 양면거울, 수정주 등을 봉안하는 절차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조상경』은 모두 조선시대의 판본으로, 고려시대에는 어떤한 의례에 따라 불복장을 갖추었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년명을 가진 고려시대의 불상복장물과의 비교ㆍ고찰을 통해 이 은제사리합과 팔엽연화형 받침을 불복장물의 일부로 규정하고자 하였다. 은제사리합과 팔엽연화형 받침의 사례를 단순한 사리기가 아닌, 복장물에 납입되는 사리기로 구분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온양민속박물관소장 1302년 아미타불복장의 은제사리합의 예와, 1346년 장곡사 칠불 복장물의 백동합, 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상의 목재합, 고려말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상 복장물과의 비교ㆍ고찰을 통해 살펴보면 그 형태의 유사성 뿐만 이니라, 뚜껑에 진 심종자 다섯 글자를 주서하거나 새겨 넣은 것 등이 동일하다. 일반 사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러한 경향은 거꾸로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은제사리합과 팔엽연화형 받침이 단순한 사리기가 아니라 위의 몇 가지 사례와 흐름을 같이히는 복장물의 사리기 일괄 유물임을 반증해주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한편 위의 사실 이외에도 합과 받침에 축조기법으로 선각된 다양한 문양들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합의 동체에 선각된 세 구의 여래도상은 비로자나삼신불 도상으로, 전해지는 문헌 기록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비로자나삼신불 도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작례라는 점에서 더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팔엽연화형 받침에 장엄된 화문과 당초문의 결합은 수덕사 소장목재불상대좌의 문양 구성과 강한 친연성을 가질뿐만 아니라, 나아가 14세기 고려불화에 묘사된 연화대좌, 그리고 14세기로 추정되는 몇 몇 불상의 영락장식의 화문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국적과 제작시기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현전하는 고려시대 불복장물의 합의 형태와 진언을 표기하는 방식, 그리고 고려시대 불상부조의 표현 형식, 연화대좌와 받침의 표현 및 구성방식 등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본 고찰에서는 은제합과 받침 일괄 유물을 고려시대, 특히 후기인 14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일반 사리기가 아닌 불상복장 납입용 사리합과 받침으로 보다 세분화하였다.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팔엽받침의 범자 및 그 상징성과 의미는 이후 더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 밝혀나가고자 하며, 앞으로 보다 많은 사례 발굴과 조사를 통해 불상복장을 위해 제직된 일련의 공예품에 대한 성격 문제가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高麗 小鍾〉 考察

        이광배(李光培) 동국대학교 박물관 2010 佛敎美術 Vol.2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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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대박물관 소장 고려소종(No.629)〉은 높이 약 35㎝의 소형(小形)종이지만 고려후기 범종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작품성 또한 우수하여 고려후기 소종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 범종 연구가 중대형의 범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시각에서 폭을 넓혀 소형범종에 대한 양식규명은 고려시대 범종의 정확한 이해를 위한 중요한 시도라 판단된다. 그것은 고려후기 범종의 제작양상에서 개인적인 발원 성격이 강한 소종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러한 상황에서 소형 범종의 제작에 있어 당시 중대형의 범종 양식이 어떠한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범종의 현황을 통해 보면 이 시기 범종의 양식규명에 있어 소형 범종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것으로, 본고에서 다루는 〈동국대박물관 소장 고려소종(13세기중반)〉이 고려후기 소종을 대표할만한 작품성을 간직하고 있기에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후기라는 시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 외래양식의 전래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대외교섭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범종의 제작에서는 기존의 왕실발원의 대형범종이 줄어들고 개인적인 발원성격이 강한 중소형의 범종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한 양상에서 범종의 양식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그 대표적인 특징들이 입상화문대의 장식과, 용뉴의 형태변화, 범자문과 새로운 장식문양의 등장이다. 〈동국대박물관소장 고려소종〉 역시 이러한 고려후기 범종의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작품의 분석을 통해 밝혔다. 〈동국대박물관소장 고려소종〉은 고려후기 범종의 전형인 입상화문대로 대표되는 상부장식과 용뉴 및 종신의 표현에서 고려후기 범종이 형식화되기 이전인 13세기 중반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더불어 다양한 문양을 표현함에 있어 적당한 크기 조절로 넓지 않은 종신에서 여백을 강조할 수 있었던 점과 딩좌내에 새 문양을 표현한 독창성 등을 통해 〈동국대박물관소장 고려소종〉의 작품의 격이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본 고찰에서는 모든 수의 고려후기 범종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양식비교는 지면과 시간관계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기존의 중대형범종에 집중된 고려 범종 연구의 범위를 넓혀 고려시대 소종에 대한 연구 가치와 자료의 중요성을 제시함으로서 앞으로 고려범종의 명확한 양식규명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사료된다. 〈東國大博物館所藏高麗小鍾(No.629)〉は高さ約35㎝の小型鍾だが高麗後期の梵鐘の樣式をよくおさめているし、その作品性も優秀で高麗後期の小鍾を代表する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特に韓國の梵鐘硏究が中大型の梵鐘を中心に成り立った旣存の視覺から間口を廣めて小型梵鐘に對する樣式糾明は高麗時代の梵鐘の正確な理解のための重要な試みだと判斷される。それは高麗後期の梵鍾の製作樣相で個人的な發源性格が强い小鍾たちの數が壓倒的に多くて、そういう狀況で小型梵鍾の製作において当時中大型の梵鍾樣式がどんな方式で反映されているのかに對する考察と言える。高麗時代の梵鍾の現況を通じて見ればこの時期の梵鍾の樣式糾明において小型梵鍾に對する理解は必須なことで、本考察で扱う〈東國大博物館所藏高麗小鍾(13世紀中盤)〉が高麗後期の小鍾を代表するに値する作品性をおさめているから硏究資料として価値が高いと言えるのだ。 高麗後期という時期はどんな時期より外來樣式の伝來が活發に成り立った時期だ。それは持績的な對外交涉の結果だと言える。梵鍾の製作では旣存の王室設源の大型梵鍾が減って個人的な發源性格が强い中小型の梵鍾がたくさん製作された。そういう樣相で梵鍾の樣式にも変化が生じたがその代表的な特徴たちが立狀花紋帶の飾りと、龍紐の形態変化、梵字文と新しい飾り文樣の登場だ。 〈東國大博物館所藏高麗小鍾〉やはりこのような高麗後期の梵鍾の樣式を充實に反映していることを作品の分析を通じて明らかにした。〈東園大博物館所藏高麗小鍾〉は高麗後期の梵鍾の典型である立狀花紋帶で代表される上部飾りと龍紐および終身の表現で高麗後期の梵鍾が形式化される以前である13世紀中盤に製作されたことで所存される。いっしょに多樣な文樣を表現するにおいて適当な大きさ調節で廣くない終身で余白を强調することができた点と撞座內に新しい文樣を表現した獨創性などを通じて〈東國大博物館所藏高麗小鍾〉の作品の柄が高きを分かった。 本考察ではすべての數の高麗後期の梵鍾に對する綿密な分析と樣式比較は紙面と時間關係の上成り立つ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かし旣存の中大型梵鍾に集中された高麗梵鍾硏究の範囲を廣げて高麗時代の小型鍾に對する硏究価値と資料の大切さを提示することでこれから高麗梵鍾の明確な樣式糾明に一歩進むことができるきっかけを用意した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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