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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대학생 직업진로교육의 필요성과 실천 방안

        곽형식 慶山大學校 1997 論文集 Vol.15 No.1

        현대 산업사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은 현실적으로 보아 직업을 갖지 않고는 생활해가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만큼 현대 생활에서의 직업이란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며 삶의 기본이 되는 매우 소중한 내용인 것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대학을 선호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대학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는 목적도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수준 높은 전문적 직업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즘 대학생들은 "결혼은 선택이고, 직업은 필수"라는 사고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대학 교육이 대중화 보편화를 맞아 대학교육을 받고 졸업하는 학생은 해마다 증가하는데 취업난과 구직난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대학 졸업생들에게 취업난과 구직난을 들어줄까 하는 문제는 대학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다소라도 해소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이 대학교육 4년동안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직업진로교육을 수행한다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사료된다. 한국대학생 직업진로 교육을 논하면서 그 필요성을 전체적인 학교교육의 진로지도의 필요성과 대학생 직업진로교육의 필요성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학교교육 진로지도의 필요성에서는 다시 개인적 측면과 국가 사회적 측면으로 검토하였으며, 대학생 직업진로지도의 필요성에서는 김충기(1995)의 주장을 토대로 5가지의 내용으로 간추려 보았다. 이러한 직업진로교육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진로교육의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므로 진로발달 이론의 주안점을 논하면서 진로발달 이론과 직업발달 이론을 비교 검토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한국대학생 직업진로교육의 실천방안을 도출하면서 ①교양교과 과정을 통한 실천방안, ②전공교과 과정을 통한 실천방안, ③산학협동 과정을 통한 실천방안, ④심리검사 상담 과정을 통한 실천방안. ⑤현장실습 과정을 통한 실천방안을 제안하였다. 미래의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살아갈 우리 대학생들이 대학교육을 받는 동안 전문적 직업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의 심도 있고 폭넓은 수강과 자기 자신의 혼신적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바탕 위에 변화하는 시대와 세계사적인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며 변동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력과 응용력 그리고 종합력과 평가력을 다양한 교과목을 통하여 함양함으로 장차 훌륭한 전문적 직업인으로서 손색이 없고 전인적 인간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학생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과업은 졸업 후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직업을 성취하여 경제적 곤란을 받지 않고 자기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 대학 졸업자로서의 긍지를 갖고 이 사회에 자기의 역할을 잘 담당하면서 봉사적 생활을 하므로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일의 가장 기본적인 과업이 적합한 직업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다. 대학졸업자는 해마다 증가하고 취업난과 구직난은 더욱 심각해지며 정치·경제 정책의 실책으로 I M F 의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대학교육에서라도 올바른 진로지도교육이 실행되어 직업과 일의 숭고한 내용을 깨닫고 자기분수에 맞는 직업개발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함양과 직업윤리를 확고히 확립할 수 있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공동체적인 풍요한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를 소망하여 본다.

      • 자인단오의 종합적 성격

        조춘호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 2001 경산문화연구 Vol.5 No.1

        자인단오의 연행방법과 그 개선방안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자인단오의 제 절차는 한 장군을 추모하고 위령하면서 수호신인 한 장군과 지역민이 하나가 되는 놀이마당을 연출하는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1999년 6월 17일, 18일(단오절) 양일 간에 걸쳐 시연된 자인단오의 제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 17 (단오전야 행사) 원효성사 다례봉행 (10:00 제석사) 도립국악단 초청공연 (17:00 계정숲) 6, 18 (단오-한장군 놀이) 한묘대제 (08:00 진충묘) 경축식 (10:00 경산여자전산고) 여원무·계정들소리 (11:00 경산여자전산고) 한장군 출정행사:호장굿(가장행렬) (12:00 경산여전산고-계정숲) 팔광대 놀이, 자인큰굿(13:00 ~ 17:00 계정숲) 시민화합 한마당 (17:00 계정숲) 연예인 초청 경축공연 (18:45 인기가수출연 TBC 생방송) 씨름대회 (10:00 전수회관 앞) 경축사진 공모전, 대추실 레기, 민속놀이 등 개최 이러한 절차는 자인단오 행사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지만 행사의 편의만을 고려한 것으로 여겨지며 자인단오의 정체성(正體性)을 살려내는 데에는 미흡하기 그지없다. 앞서 논의한 소견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유교의식으로 거행되는 한묘대제를 올리기 위하여 호장굿(가장행렬)에 참가하는 자들이 면사무소나 자인여전산고 앞에 모여 행진을 시작하여 계정 숲 한묘에 나아가 참가한 제관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무당들은 성황당에서 청신을 하여 강신된 신목을 마련한 뒤 이를 굿당인 시중당(使重堂)에 안치(安置)하고 제사상을 마련하는 동안 다른 참가자들은 한묘대제와 청신의례를 참관하면서 한 장군 묘소를 한바퀴 돌아 다시 여원무를 시연할 장소인 여전산고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한묘에서 제사를 지낸 제관과 신목을 안치한 문당이 경축식장에 도착하면 식을 거행하고 이어 여원무를 시연한다. 여원무 시연을 마치고 이어 큰 굿을 진행한다. 이튿날은 전날의 여원무 시연 시간과 같은 시간에 계정 들소리를 시연하고 팔광대놀이를 연희하는 순서로 구성하면 단오굿으로서의 특성을 살리며 긴 시간을 갖고 많은 행사에 흥미를 갖고 참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전에 현청 앞을 출발하여 계정숲 한묘까지 나아가는 가장행렬인 호장굿을 하고 돌아오면서 버들 못가에서 여원무를 추고 다시 현청 앞에서 사또에게 보이기 위해 여원무를 추었다는 기록을 고려하여 자인단오의 하이라이트인 여원무를 이튿날도 다시 시연하는 것도 고려함직하며, 진장터에서 말달리기 활쏘기를 겨루었다는 기록을 고려하고 또한 자인단오의 신체(神體)가 한 장군이므로 장군을 기리는 전국궁술대회 또는 씨름대회를 유치하는 것도 고려함직 하다. 여원무를 전수 보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나 11개 대학이 자리하고 있고 5개 종합대학에는 체육(무용)학과가 설치되어 있으니 이들의 협조와 참여방안을 도모함과 동시에 여원무 시연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즉 소규모 여원무와 중규모 여원무, 대규모 여원무로 시연 규모를 구분하고 각 규모에 필요한 최소인원과 최대인원을 산출하고 그에 따른 무보(舞譜)와 안무(安舞) 등을 정리하여 여원무 전수와 시연에 편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재 시연하고 있는 팔광대놀이의 연희자 대부분이 지역 거주민이 아닌 안타까움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 대학 탈춤 동아리의 협조를 구하는 방안을 도모함과 아울러 팔광대놀이 경연대회 등을 마련하여 지역 중·고등학교 여가특별활동 프로그램으로 적극 활용될 수 있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면 한다. 또한 계정들 소리가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을 기리고 1969년 광복 후 처음으로 자인단오를 재현하면서 개최했던 전국 민요대회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 전국민요대회를 고려해 봄직도 하다. 한편 우리 경산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하는 삼성현(원효 설총 일연)과 연계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전국 불교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기도처인 팔공산 갓바위와 연계한 프로그램의 개발도 적극 검토되어야 한다. 원효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추었다는 무애무(無碍舞)와 한 장군이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추었다는 여원무가 호국(護國)과 애민(愛民)이라는 공통의 의미를 갖기에 그 관련지은 행사의 개발이 필요하리라 여긴다. 또한 지역에 많은 봉사를 하거나 지역의 명예를 크게 떨친 청년들 중에서 한 장군 남매를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원하거나 지역 홍보사절로 활용하면 한 장군 추모에 큰 효과가 기대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자인단오 행사마당의 이동이 절실하다. 지역의 연고와 전통의 보존이라는 면을 인정하더라도 이제 자인단오는 경산시민 전체의 축제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자인 지역과 연계한 행사프로그램을 구상하면서 전 시민이 함께 하면서 전국적인 축제로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교통의 편리함과 행사공간이 확장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의 제공뿐만 아니라 참여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통방식으로 떡을 만드는 떡메치기, 여원무 화관쓰기, 한 장군 복장 입기 등등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여 더욱 풍성한 자인단오 축제마당을 가꾸고 자인단오를 수익성 높은 문화산업으로 키워 갈 수 있을 것이다.

      • 경산지역의 옛 지명 연구

        김종택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 2000 경산문화연구 Vol.4 No.1

        지금까지 경산 지역에 있었던 옛 땅이름을 찾아 그 어원을 밝혀 보았다. 비록 한자로 적혀 있지만 그것은 자연 지형 지물의 특성을 드러내는 고유어인데 안타깝게도 모두 잊혀진 이름이 되고, 전혀 형태적으로 다른 한자음이 새로운 지명이 되어 통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에 와서 굳이 옛 지명을 찾아 되살려 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옛 땅에서 역사를 계승하여 살고 있는 후손으로서 지역의 옛 이름과 그 어원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미에서도 더 없이 소중하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밝힌 경산 지역의 옛 땅이름은 다음과 같다. 오늘 '경산'이라는 지명의 연원이 된 '押梁', '押督'은 '누르들'(黃野) 혹은 '누르터'이며 이것이 경덕왕 때에 한자어식으로 차자 표기되어 '獐山'이 되었는데, 곧 '노?뫼'이다. 이것이 고려의 건국과 함께 가자(嘉字)를 취하여 '章山'이 됨으로써 비로소 한자어식 명명이 된 것인데 고려말 忠宣王의 이름이 '璋'이기 때문에 글자를 바꾸어 '慶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慈仁'의 옛 이름은 '奴斯火' 혹은 '奴叱火'인데 그것은 '儒城'의 옛 이름 '奴斯只'와 어원이 같다. 여기서 '斯'와 '叱'이 통용되는 것은 여기서 그것이 사잇소리 't'로 실현되었음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음성적으로 'nuttel'을 표기한 것으로 해독된다. 이것은 오늘날 '늪벌'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추출되는 어근 'nu' 혹은 'nup'은 일본어 'numa'(沼)의 어근 'nu'와도 일치한다. 유성은 물론, 자인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제언(堤堰), 호소(湖沼)가 가장 많은 것도 이 곳이 '늪벌'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할 것이다. 慈仁의 또 다른 옛 이름 '其火'는 'kipэl'로서 '큰 들'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珍良'의 옛 이름은 '麻珍良' 혹은 '麻彌良'인데 이것은 '마드르'(맏들) 혹은 '마미르'(맏물)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마'는 '앞' 혹은 '남쪽'을 가리키므로 '앞들' 혹은 '앞물'로 해독된다. 이것이 고려시대에 와서 '仇史' 부곡이 되는데, 이것은 '仇史珍良' 부곡의 준말로 곧 구릉 사이에 우묵 들어간 '구싯들'을 뜻하는 것이다. 끝으로 '河陽'의 고려초 지명은 '河州'인데 신라 이전에는 독립된 행정 구역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유어로 된 옛 지명을 기록에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 이후 한자어식 이름이 시종 물(河)과 관련되어 있고 그 지역이 금호강 북쪽 강 언덕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남아 있는 '물띠미'가 '물뜸'으로 河陽땅의 옛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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