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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圓光大學校 鄕土文化硏究所 1989 鄕土文化硏究 Vol.5 No.-
일제에 나라를 빼앗김에 따라 잃었던 명절을 구왕이라 불렀고, 마음놓고 즐기지 못했던 민족의 명절, 서양 문화에 눌려 피우지 못했던 전통문화가 88올림픽을 계기로 빛을 보임과 아울러 잃었던 설날을 되찾게 됨은 감격에 찬 기쁨이며, 민족자존의 기상을 표현한 영단이요 쾌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단기 4321년이라는 일련된 성천수로 된 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4321년은 후천개벽의 해로 보는 선각자도 있는 것으로 동방의 횃불인 한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전기가 도래하는 천운을 표창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羅鍾宇 圓光大學校 鄕土文化硏究所 1989 鄕土文化硏究 Vol.5 No.-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확립되어 오랫동안 중앙집권 역사ㆍ사회 속에서 살아 왔다. 따라서 우리 역사도 「중앙사」위주였고 그 내용도 정치, 행정, 군사, 외교 등의 「유일사건」중심이었으며, 그 역사의 담당자들도 중앙의 권력자 중심으로 기술되는 성향이 짙었다. 조선시대 오백년동안 향토사나 향토문화에 대한 자료는 편찬되었고 각지의 「지」류도 적잖게 있어 왔으나 이것 역시 행정시책이나 통치를 위한 사정자료의 성격이 짙고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한 역사ㆍ사회적 현상을 밝혀 전체적 시야에서 기술, 분석한 것은 드물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고 서울의 중앙은 자기가 전체인 것처럼 착각한 데서 기인했으며, 지방향토에 대하여 중앙사대주의를 조성해 왔다.
柳在泳 圓光大學校 鄕土文化硏究所 1986 鄕土文化硏究 Vol.3 No.-
陽村 權近(1352!~1409)의 처음 이름은 晉 字는 可遠 또는 思叔 號는 陽村이라 했다. 高麗末葉 곧 恭愍王 元年 安東 權氏 名門에 태어났으니 그의 曾祖는 一家 九封君을 자랑하는 菊齋 權傳이고 檢校侍中 皐와 檢校政丞 僖는 祖와 考다. 牧隱 李穡의 門人으로 18歲때 文科에 及第하여 檢閱이 된 때로부터 뒤에 宰相이 되었다가 58歲로 세상을 떠날 때가지 늘 文翰을 맡은 部署에서 일했고 한 번도 外任을 맡은 적이 없었다. 天禀이 精粹 溫雅하며 性理學에 깊었고 平常時에 아무리 急한 일이나 生死에 관계되는 일이 생겨도 泰然히 얼굴 빛 하나 변치 안했다한다.
玄 谷 圓光大學校 鄕土文化硏究所 1987 鄕土文化硏究 Vol.4 No.-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리 명필이라도 그 사람의 사람됨에 흠이 있으면, 그 글씨까지도 천대를 받더라.'라고 한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연인즉 어떤 절에 이완용(1858~1926)의 글씨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이에 격분하여 절의 관리인에게 항의를 했더니, 이를 받아들이어 바로 떼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그 글씨를 쓴사람이 이완용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누가 감히 여기에 제비를 하겠는가? 그 글씨의 주인공이 바로 매국노란 낙인이 찍힌 이완용이기에 문제가 일어났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예술인 글씨에 있어서도 그 예술적 가치에 앞서 그 쓴사람의 사람 됨됨이, 곧 인격을 중시한다는 말이 된다. 그 말은 곧 하나의 인간으로서 흠이 있는 사람의 글씨는 그 글씨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사람의 작품만을 예술작품으로서 감상할 가치를 인정한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에서 추앙을 받는 것은 인간의 어느 측면을 평가한 것인지 이것도 그 기준이 문제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인까지도 그 기준을 전통적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논리적인 측면을 중시함이 대체적인 경향이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절의적인 면을 더욱 중시함이 우리 선인들의 가치관이었다. 단종절신이라 일컫는 성삼문등 이른바 사육신이나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주장한 오달제등 이른바 삼학사를 지금까지 존경함은 이렇게 절의를 중시한 하나의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