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朴廣成 仁川敎育大學畿甸文化硏究所 1973 기전문화연구 Vol.2 No.-
욕은지와 어재대는 인천시 계산동 부평국민학교 교정 일우에 자리하고 있다. 욕은지와 어재대가 원래 현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좀 더 동편에 있었던 것을 광서 정해년(1887, 고종 24)에 현위치에 옮겨 중수한 것이라고 전하는데, 욕은지는 사각형 석축 연못으로서 중앙에 축산이 있고 동편 석축중심부에 『욕은지 공서정해 중수』라고 각자한 녹석이 남아 있으며, 어사대는 『어사대』란 각자석이 지상에 놓여 있을 뿐, 대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 두 유적에 관하여 유희강편 「인천의 안내」(고적·명승·천연기염물 부 전설)에 욕은지는 인조가 선부의 능침인 김포 장릉에 행행할 때 목욕재계하였다고 전하나 문헌의 증빙은 없고, 어사대는 장릉행행시에 주연, 습사하던 곳으로 전한다고 하였다. 이 전설은 인천지방에 널리 알려진 전설로서 필자가 수차 답사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질문하여 본 결과도 일구여시함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두 유적이 과연 인조의 장릉행행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朴廣成 仁川敎育大學畿甸文化硏究所 1974 기전문화연구 Vol.4 No.-
인천시 남구 옥윤동 해안(송도 조갯골)에 「능호대터」라고 하는 표석이 서있는 소구릉이 있으니 이곳이 삼국정치시에 고구려에 의하여 조천로가 막힌 백제의 사신들이 범해하던 곳이라고 전하는 능허대인 것이다. 육지에서 서북 쪽 해면으로 하나의 구릉이 돌출하여 반도형을 이루고 있는 그 돌출부의 오뚝한 구릉이 능허대이니 인천부읍지에는 「임해변고기백여척」이라 하여 표고가 100여척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반도형 구릉은 자연적으로 육지 쪽인 동편에 작으나마 하나의 포구를 형성하고 있고 북 쪽 포구 입구를 「소둑」이라고 불리는 둑이 가로지르고 있어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하룻 밤 사이에 솟아오른 둑이라 하여 소둑이라고 부른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둑은 자연적인 둑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축조되었던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곳이 인천부읍지가 말하고 있는 「대진」(한나루라고 부름)으로서 소둑은 선착장 구실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李慶成 仁川敎育大學畿甸文化硏究所 1973 기전문화연구 Vol.3 No.-
결국 이 논문의 성격은 구인천지방의 석기문화에 관한 연구조사의 경위와 그의 중간보고 구실 밖에 못한다는 것을 거듭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이 방면의 연구가 지금까지의 결과를 대폭으로 전복할 만큼 획기적인 것이 나올 기대도 그리 크지 않다. 왜냐하면 인천의 선사유적지는 도시확장에 따르는 토목공사로 거의 원형이 변경 내지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자료는 무지와 무관심 속에 단순한 돌이나 토기편으로 되어 해안매립지나 택지조성의 밑바닥에 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욱 인천시사에서 은근히 언급된 바 있는 구석기문화는 치금의 형편으로는 전혀 바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연세대발파대에 의해 공주 석장리 구석기문화가 한참 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가 구석기문화의 인류의 서식지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물질적 유물이 후손들에 의해 대량 훼손되었기에 그 진상은 쉽사리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지금도 지하가 간직하고 우리들의 발굴과 조사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이 과제는 전혀 향토상연구의 으뜸가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