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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김수태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敎會史硏究 Vol.0 No.55

            Monsignor Choi Seok-woo(1922~2009) was a priest who thought about what Korean Catholic Church should do after liberation, and was a scholar who studied hard to find the answer. His appearance marks the birth of a well-trained professional researcher in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t the same time, it was to forsee the full-fledged study of church history by Koreans, not by foreigners such as French or Japanese. Monssignor continued to emphasize the introductory whole history writing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fter receiving Ph.D, he continuously expanded his study of the history of the times, covering almost all periods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In addition, considering that writing the taxonomy is very important for the writing of the whole history, he tried to fill the contents of the whole history through various Categorized History. Based on this research, he set up an independent period division based on ecclesiastical theory for the writing of the whole history. Through this, he tried to show the process of changing the contents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from history of missionary, to history of martyrdom, and cultural history, and then through national history to salvation approach. Monsignor also pondered what kind of view of history he should carry out regarding the study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t first he considered church history as a discipline under two areas; history and theology. He focused on study of the historical records for establishing a proper relationship between research of church history and history. And he understood that church history should be directed not only to national history but also to the theme of globalization, which seeks to relate to world history. This approach eventually led him to gradually emphasize church history as theology. This is because he saw the application of the church concept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study of church history. And at the same time, he believed that salvational interpretation should be applied to that direction of the study. In this way, Monsignor's study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clearly holds its historical posi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Catholic Church. Then, it might be enough to call his study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 as ‘Choi Seok-woo History'. 최석우 몬시뇰(1922~2009)은 해방 이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죽을 때까지 고민한 사제였으며,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열심히 공부한 학자였다. 그의 등장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연구자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외국인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인에 의하여 교회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주도되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통사 저술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시대사 연구를 계속해서 확대시켜 나가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거의 전 시기를 다루었다. 그리고 통사의 저술에 분류사 저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면서, 다양한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 통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가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통사의 저술을 위해서 교회론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시대구분을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들을 선교사에서 순교사 및 문화사로, 그리고 다시 민족사를 거쳐서 구세사적 접근으로 나아가는 변화과정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어떠한 사관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또한 깊이 고민하였다. 처음에 그는 교회사가 역사학과 신학이라는 두 개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그는 교회사 연구와 역사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사료론을 집중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회사가 민족사만이 아니라, 그리고 세계사와의 관련성을 추구하는 세계화라는 주제까지 지향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결국 그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교회사가 신학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교회 개념의 적용이 교회사 연구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방향은 구세사적 해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한국천주교회사 속에서 그 역사적 위치를 뚜렷하게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해서 ‘최석우 사학'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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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종 124위 선정 과정과 시복 자료 정리에 관한 연구

            차기진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5

            The selection work of 124 Korean martyrs was followed the decision of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in October 1997. Next the Joint Committee to Promote Beatification of Korean martyrs was composed on October 12, 1998, and five meetings were held until June 18, 2001. And June 30, 2001, the research staff was organized to select candidates for beatification under the responsibility of priest Peter Yoo Han-young who was postulator. As a result, 122 martyrs were selected as Servants of God by the primary research work of the staff. September 12, 2001, there was composed the Committee to Select Candidates for Promote Beatification(short CSC). Since then the staff's second research work was paralleled with the CSC's work. As a result, 124 martyrs and 2 Witnesses of Faith were determined as Servants of God until February 2002. March 7, 2002, the Special Episcopal Commission to Promote Beatification(short SEC) approved the beatification promotion of 124 martyrs, and the Congregation for the Causes of Saints of Roman Curia named the title of the beatification agenda “Servants of God Paul Yun Ji-chung(尹持忠) and 123 Companions” on the same year September 4. The arrangement work of materials for the beatification of 124 Servants of God was started in the writing biographical outline. This wok began with a shared form in the first place, but shortly afterwards was entrusted to the Yang-eop(良業) Research Institute for Church History(short YRI, Chief : Cha Ki-jin). And the YRI finished writing biographical outline and published Servants of God Paul Yun Ji-chung and 123 Companions in the name of SEC on september 19, 2003. At the same time, the first arrangement work of materials was finished. The May 21, 2004, the decree on the court constitution for the beatification of the 124 Servants of God was promulgated, and the second arrangement work of materials was entrusted to YRI. After that, YRI have published The Source Book for Beatification of Servants of God Paul Yun Ji-chung and 123 Companions up to five volumes in the name of SEC from November 15, 2005 to February 14, 2008. At the same time the second arrangement work of materials was finished. 124위의 선정 작업은 1997년 10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결정된 시복 통합 추진에 따른 것이었다. 이어 1998년 10월 12일에는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통합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2001년 6월 18일까지 다섯차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또 2001년 6월 30일에는 청원인 류한영 신부의 책임 아래 시복 추진 대상자 선정을 위한 실무진이 구성되었으며, 실무진의 1차 연구 작업 결과 모두 122명이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2001년 9월 12일에는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선정위원회'가 구성됨에 따라 실무진의 2차 연구 작업과 동 위원회의 활동이 병행되었고, 2002년 2월까지 시복 청원 순교자 124명, 증거자 2명의 ‘하느님의 종'이 확정되었다. 2002년 3월 7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124위의 시복 추진을 승인하였고, 시성성에서는 같은 해 9월 4일 시복 안건의 제목을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로 명명하였다. 시복 자료 정리 작업은 124위 약전 작성에서 시작되었다. 이 약전 작성은 처음에 분담 형식으로 추진되었으나, 곧이어 양업교회사연구소(소장 : 차기진)에 위임되었다. 이후 양업교회사연구소에서는 약전 작성을 완료하여 2003년 9월 19일 시주특위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종 윤지충바오로와 동료 123위》를 발간하였다. 동시에 1차 시복 자료 정리 작업이 완료되었다. 2004년 5월 21일에는 124위 시복 법정 구성에 대한 교령이 공포되었으며, 2차 시복 자료 정리 작업이 양업교회사연구소에 위임되었다. 이후 동 연구소에서는 2005년 11월 15일부터 2008년 2월 15일까지 전5권으로 된 124위 시복 자료집을 시주특위 이름으로 간행하였고, 이로써 2차 시복 자료 정리 작업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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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김수태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敎會史硏究 Vol.0 No.51

            This work attempts to shed a new light on the Korean Catholic history of social work through Fr. Louis Deslandes(1895~1972). He, who belonged to Paris Foreign Missions and was the founder of 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paid special attention to the social welfare at the Catholic Archdioese of Daegu from the 1920s through the 1960s. Keeping a close eye on the reality of Korean society, he took a profound interest in the direction of the social work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by which it could be a church in the world. Fr. Louis Deslandes separated a positive charitable work from a passive one. From this perspective, he regarded as passive his social work before the 1960s because he thought that it tried just to take care of a deadbeat. Such a social work would not be able to be a solution for the poor and the deserted. So, Fr. Louis Deslandes made a big change in the direction of social work program according to the The Second Vatican Council. Instead of dead social work in which social workers just waited for people at the facility, he pursued a new social work that kept looking for the poor and the deserted positively. Through this active social work, he anticipated that they would be able to stand on their feet in both social and economic sense. The 1960s when Fr. Louis Deslandes worked actively in the field of social work was instrumental in the Korean Catholic history of social work. 이 글에서는 루이 델랑드 신부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서, 예수성심시녀회의 창립자였던 루이 델랑드 신부(1895~1972)는 대구교구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사회복지사업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끊임없이 주목하면서 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세상 속의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자신의 사회복지사업을 수동적인 자선사업과 능동적인 자선사업으로 구별하였다. 그는 1960년대 이전까지 자신이 실천했던 사회복지사업을 수동적인 사회복지사업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낙오자와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회복지사업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복지사업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이 델랑드 신부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회복지사업의 방향을 크게 전환했다. 그는 복지 시설을 만들어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그의 표현처럼 사회 속으로, 사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사회복지를 새롭게 추구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립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루이 델랑드 신부가 활동한 1960년대는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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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의 배치와 건축 양식 추적

            김정신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敎會史硏究 Vol.0 No.46

            The Benedictine Abbey at Deokwon(Wonsan in Hamgyeongnam-do) was the second monastery of St. Ottilien Abbey in Korea. It has been being evaluated as successful model of Missions, Monastic life and Architecture in the Benedictine Missionary monasteries. But it was heavily damaged during the Korean war and the site has been changed by using as Wonsan Agricultural University. So we can not know how it keeps the original shape, and it is very difficult to find the accurate site planning, scale and architectural style of the monastery. Recently the accurate picture material and document was found, and new research on the abbey was studied. So I can get into close with the original site planning and architectural style. In this study, I tried to conjecture the original form of the old Deokwon abbey(the location, arrangement, size, architectural style). I have drawn those by CAD.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 First, The Deokwon Abbey which was built by the model of ‘Hirsau Abbey' was the center of pastoral ministry for the Apostolic Vicariate of Wonsan, and a small city which was equipped with church, seminary, accommodation, garden grove, barn, carpenter shop, ironworks, print shop, mill etc. Second, The buildings of the Deokwon Abbey were the typical Romanesque buildings comparing with the Gothic buildings which were built by the initiative of the French missionaries. And it was a functional layout and spatial configuration. Third, The Culture Factors that could leave a large footprint in the arts and culture were those the Benedictine missionaries which inherited the tradition of the Beuron Abbey have not experienced persecution, and researched Korean traditional culture. Also there were many scholars and experts among them. Fourth, The Deokwon Abbey building (including church) was 4-story building(total floor area : 4,854.45m2), and the seminary was 3-story building of the H-plane(total floor area : 2,720m2). 한국에 진출한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두 번째 한국 내 수도원인 덕원수도원은 성 베네딕도회의 선교 수도원 중에서도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되고, 건축적으로도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수도원이다. 그러나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일부 복구하고 여러 시설을 증축하여 원산농업대학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 연구는 사진과 문헌 자료의 분석을 통해 1930년대 함경남도 원산에 있었던 덕원 수도원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추적한 것으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세 독일의 히르사우 수도원을 모델로 하여 지어진 덕원 수도원은 수도원과 신학교뿐만 아니라 채소밭과 과수원, 축사 등을 갖춘 농장과 목공소, 철공소, 제화소, 인쇄소, 방앗간 등의 작업장을 두루 갖춘 하나의 작은 도시로 원산대목구의 사목과 수도 생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 덕원 수도원은 당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주도로 우리나라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당처럼 고딕 양식의 건물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면서 매우 기능적인 배치와 공간 구성을 하였다. 셋째, 문화 ․ 예술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요인은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가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는 이상을 표방하며 보이론의 전통을 계승한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였다는 점과 베네딕도회는 한국 전통문화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선교사 중에 학자와 전문가가 많았고, 또 한국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시간과 방법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넷째, 덕원 수도원(성당 포함)은 25m×22m의 중정을 ㅁ자 형태로 둘러싼 가로 53m, 세로 54.5m의 4층 건물로 연면적 4,854.45m2(1,468.5평) 이며, 신학교는 가로 45m, 세로 35.5m의 H자 평면의 3층 건물로 연면적 2,720m2(850평)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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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 관리를 통한 교회문화유산 활성화 방안

            정윤정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敎會史硏究 Vol.0 No.55

            The Korean Church has formed a diverse cultural heritage (the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including cathedral architecture, artifacts and so on, in the course of the faith of the church. It has ha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various cultures. However, various types of cultural heritage such as cathedral architecture, sacred arts, stained glass, icon, and sculpture, which constitute the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until now, have been fixed with architecture, art and so on of the Western technique and theme. The Western style architecture and design of the church cultural heritage showed a tendency to prefer it in terms of the church community and the individual believer in the name of the orthodox of the church faith. As a result, the ‘modernization' and ‘indigenization' give considerable difficulties to the way. The direction of ‘Modernization' and ‘Naturalization' of the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establishes a direct and developmental relationship with copyright management. Based on above that,, a new style of architecture, church art, materials and themes featuring Korean sensibilities can build the New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Korean churches will be able to find out how to manage cultural heritage in terms of conservation, protection, and utilization of cultural heritage through copyright management. Because copyright management has been involved since the birth of the church's cultural heritage, it can provide information to become a unique cultural heritage in building cathedral buildings and producing artworks. For copyrights management, above all, an efficient system of information is important because accurate information about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is needed. In this respect, a new classification system of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is suggested by comparing and analyzing the classification of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UNESCO based on the classification system of the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Conservation Management Guideline. And this study analyzes the features, copyrights, and copyrights management of major church cultural heritage of ‘Gongseri Shrine', reflecting the newly proposed classification system. Through this, it suggests the plans as well as the importance and role of copyrights management from the creation of the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We hope that this study will provide deeper and more meaningful discussions and researches on the copyrights management for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by suggesting another issue for activating Korean Church Cultural Heritage.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가 이 땅에서 첫 세례식을 거행한 1784년을 한국 교회 신앙의 첫 출발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230년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하여 왔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 신앙이 뿌리내리는 과정 속에서, 성당 건축물을 비롯한 유물, 미술품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하 ‘한국 교회문화유산'이라고 한다)을 형성하였고 이러한 한국 교회문화유산은 우리 사회 전반의 다채로운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문화유산을 구성하고 있는 성당 건축물, 성물, 성화, 유리화, 이콘, 조각물 등 여러 유형의 문화유산은 서양의 전래적인 건축 양식, 미술품 제작 기법, 테마 등으로 고착화되어 왔다. 교회문화유산에 대한 서양식 건축 양식, 디자인 등은 교회 신앙의 정통이라는 미명하에 교회 공동체와 개인 신자의 면에서 이를 선호 내지 당연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 한국 교회문화유산의 ‘현대화'와 ‘토착화'라는 행보에 상당한 난제를 부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문화유산의 ‘현대화'와 ‘토착화'라는 실천방향은 저작권 관리와는 직접적이고 발전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건축 양식과 교회미술 제작 기법, 소재, 테마 등을 통한 한국 정서를 담은 교회문화유산을 구축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저작권 관리를 통하여 문화유산을 보존과 보호, 보호와 활용이라는 측면에 있어 교회문화유산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 관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당 교회문화유산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만큼 정보에 대한 효율적인 체계가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천주교 문화유산 보존 관리 지침』 상의 분류체계를 기초로 하여 문화재청과 유네스코의 분류체계를 비교, 분석하여 새로운 교회문화유산 분류 체계를 제시한다. 새롭게 제시한 분류 체계를 반영하여 ‘공세리 성지'를 표본으로 주요 교회문화유산에 대한 특징, 저작물성, 저작권 관리를 분석하여 교회문화유산에 대한 생성부터 저작권 관리의 역할과 중요함을 제시함과 아울러 관리 방안을 도출한다. 본 논문이 한국 교회문화유산 활성화를 위한 또 하나의 화두를 제시함으로써 저작권 관리에 대한 좀 더 깊고 의미있는 논의와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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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1년 내포(內浦) : 박종악과 천주교 박해

            장유승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4

            Sugi(隨記) stored in Jangseokgak library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isa book of replies of Park Jongak(朴宗岳) on the royal letters of King Chongjo(正祖), which contains various new facts on the initial Catholic history of Korea. Thecontents of the book were direct report to the King by Park Jongak, the governorof Chungcheong province(忠淸道) who was responsible for the examination of theNaepo(內浦) Catholic Church in Chungcheong province at the Catholic Persecutionof 1791(辛亥迫害). Accordingly, Sugi is expected to be used importantly for thestudy of the initial Catholic history of Korea which has been largely dependent onDallet's 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New facts by the discovery of Sugi can be summarized into three. Firstly,the spread of Catholic in Naepo area of Chungcheong province was far earlier thanknown today, and its congregation was spread throughout Chongcheong province. Itis conjectured that Catholic Church in Naepo was formed in 1784~1785. In 1791when the examination by Park Jongak started, it was widely spread throughoutChongcheong province beyond Naepo. Secondly, it contains information of important figures of the initial Catholichistory of Korea. Sugi contains new information of Yi Jonchang(李存昌), who wasknown as the leading figure in the spread of Catholic Church in Naepo, and ofbrothers of Hong Nakmin(洪樂民) who had considerable influence on CatholicChurch in this area. Besides, the list of Catholics and Catholic books in Sugi seemto contribute to figure out the reality of the initial Catholic history of Korea. Thirdly, it contains the response of King Chongjo on Catholic Church. Whilehe understood the reality of Chungcheong province from the report of Park Jongak,he took moderate measures with unofficial actions. This seems because he consideredthe political impact by the persecution of Catholic Church, which needs furtherinvestigation.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수기》(隨記)는 정조 어찰에 대한 박종악(朴宗岳)의 답장을 옮겨적은 책으로, 초기 천주교회사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신해박해 당시의 기록으로, 충청도 내포(內浦) 천주교회의 조사를 책임진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국왕에게 직접 보고한 것이다. 따라서 《수기》는 그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지해 왔던 초기 교회사 연구에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수기》의 발굴로 드러난 새로운 사실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충청도 내포 지역의 천주교 전파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훨씬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으며, 그 교세는 충청도 전역에 미쳤다는사실이다. 박종악에 따르면 내포 지역의 천주교회는 1784~1785년경형성되었으며, 1791년 무렵에는 충청도 일대에 광범하게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초기 교회사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이다. 그간 내포 지역천주교 전파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존창에 관한 새로운 정보는 물론, 홍낙민 형제가 이 지역 천주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밖에 《수기》에 보이는 천주교도명단 및 천주교 서적 목록 또한 초기 교회사의 실상을 밝히는 데 일조할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대응 양상이다. 정조는 박종악을 통해 충청도 교회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으나, 비공식적인 조치로 비교적 온건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천주교 박해가 초래할 정치적 파장에 대한 고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 KCI등재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 역사에 관한 연구

            강석진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20 敎會史硏究 Vol.0 No.56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survey the chronological relation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references of Eucharistic processions in Korea. The study will provide a fruitful perspective for the future spirituality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As the Eucharistic processions originated from the Holy communion, the research, above all, tried to illuminate how the Korean Church developed the Eucharist devotions by the Church documents and the books of catechism. So this study divided the historical texts into two group. The one section is the series of traditional books of catechism that dealt with the Eucharist, and the other division is the collection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s official monthly that contributed it's devotion to the height of the aspiring procession of the Holy Eucharist. Therefore, this research clarified how the Church taught the doctrine of the devotion to the lay Catholic Christians, and what the laity learned by heart. This survey finally described, summarized, and evaluated the individual characteristics of the Eucharistic processions in detail. The future depends on the past. The future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also relies on both the past remembrance and the present performance of her devotional practices. This study is to pinpoint one of the noteworthy Korean traditions of the Catholic Church, which melted the faithful devotions down into the rigorous and holy parade, where she could survive the hard times of severe persecution and political chaos. So this thesis confirms that the Eucharistic procession as an invaluable heritage surely should be considered for the eternal motivation of the hopeful future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본고는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의미를 통사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이다. 본 연구는 이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미래를 조망하고자 한다. 성체거동은 성체신심의 표현이므로, 본 연구는 우선 성체신심을 한국천주교회가 언제 어떻게 수용하며 발전시켰는지를 교회 측 사료들에서 확인했다. 논고는 이 자료들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검증했다. 성체신심을 다루고 있는 전통 교리서들의 출판과 그 전개 및 보급을 점검하는 것이 그 하나고, 성체신심을 성체거동의 양식으로 어떻게 한국천주교회가 그 영성으로 현장화했는지가 그 둘이다. 하여 교회가 신자들에게 성체 신심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교리 속 성체신심이 어떻게 신자들에게 수용되며 이어졌는지 밝힌 후, 최종적으로 성체거동에 관한 교회의 대표적 성체거동 행사들을 사례별로 압축하며 그 특징들을 약술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미래는 전승되어 온 신앙 성장의 동력들을 어떻게 소진하지 않고 발전적으로 계승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본고는 성체거동과 그에 관련된 신심 활동은 한국천주교회가 이어받은 고귀한 영적 자산이며, 따라서 이는 미래 교회의 성장 동력임에 틀림없음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다.

          • KCI등재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다산 친필 서간첩 《매옥서궤》(梅屋書匭)에 대하여

            정민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敎會史硏究 Vol.0 No.33

            This paper introduces contents of the letter writings of Dasan, Maeokseogye which is from The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 Church History's Collections and also researches its material values. These writings includes 13 letters of Dasan's handwriting and 2 letters of his son Jeong Hakyeon. One of the letter's receivers was a buddhist priest, Wanho, and the other letters' receiver was a buddhist priest Houi. It is the first time to open the whole series of Dasan's letter which is sent to a certain person in a certain time to the public at the same time. These letter writings have a precious material value because they includes a plenty of untold informations related to Dasan. Due to the opening of these materials, the contents newly confirmed are the followings. First, we ensured an evidence that Dasan had directly managed the compilation of Daedunsaji around 1814. Problems related to Daedunsaji were some of the old unsettled questions in the buddhist history. Through 3 letters in Maeokseogye, the circumstances of the occasion could be grasped in the concrete. Second, the actual state of correspondence between Dasan and Houi was able to be understood. Dasan had an affection for Houi since his original first name was Jung, same with Dasan. Dasan granted love and affection to him such as teaching the Book of Changes, recommen- ding to study poetry, and giving tea and medicines, etc. Third, these materials showed the diverse situations of Daedunsa. Contents not shown in other documents were included in these letter writings: the fight against disease of buddhist priest Eunbong, the fact that 700 buddhist statues to install in Chunbuljeon at Daedunsa were moved to Japan and returned again, the stories about publication of Ahamsijib, and so on. Finally, the information of Dasan Chodang and the condition of Da- san's health were indicated in these letters. The letter writings showed the situations of Dasan Chodang after his disciples leaved him, and Dasan's trouble with moving himself because of the paralysis he suffered from 1813 to 1815. The Studies on Dasan are more active due to the continued excava- tion and the introduction of buried materials. It is very important to work in restoring the whole of Dasan studies through the excavation of source materials beside the writing collections. This paper introduces contents of the letter writings of Dasan, Maeokseogye which is from The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 Church History's Collections and also researches its material values. These writings includes 13 letters of Dasan's handwriting and 2 letters of his son Jeong Hakyeon. One of the letter's receivers was a buddhist priest, Wanho, and the other letters' receiver was a buddhist priest Houi. It is the first time to open the whole series of Dasan's letter which is sent to a certain person in a certain time to the public at the same time. These letter writings have a precious material value because they includes a plenty of untold informations related to Dasan. Due to the opening of these materials, the contents newly confirmed are the followings. First, we ensured an evidence that Dasan had directly managed the compilation of Daedunsaji around 1814. Problems related to Daedunsaji were some of the old unsettled questions in the buddhist history. Through 3 letters in Maeokseogye, the circumstances of the occasion could be grasped in the concrete. Second, the actual state of correspondence between Dasan and Houi was able to be understood. Dasan had an affection for Houi since his original first name was Jung, same with Dasan. Dasan granted love and affection to him such as teaching the Book of Changes, recommen- ding to study poetry, and giving tea and medicines, etc. Third, these materials showed the diverse situations of Daedunsa. Contents not shown in other documents were included in these letter writings: the fight against disease of buddhist priest Eunbong, the fact that 700 buddhist statues to install in Chunbuljeon at Daedunsa were moved to Japan and returned again, the stories about publication of Ahamsijib, and so on. Finally, the information of Dasan Chodang and the condition of Da- san's health were indicated in these letters. The letter writings showed the situations of Dasan Chodang after his disciples leaved him, and Dasan's trouble with moving himself because of the paralysis he suffered from 1813 to 1815. The Studies on Dasan are more active due to the continued excava- tion and the introduction of buried materials. It is very important to work in restoring the whole of Dasan studies through the excavation of source materials beside the writing collections.

          • KCI등재

            우라카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의 조선 순교사 연구

            이석원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敎會史硏究 Vol.0 No.43

            A History of Martyrdom in Korea(Chosen Junkyoshi), written in 1944 byBishop Michael Urakawa Wasaburo, is an important work that encompasses theachievements of the history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in Korea up to the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and introduces major historical materials eventhough the description stops at 1846 and there are many problems in its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and citation of materials. As a foreign religion, Catholicism was always subject to suspicion anddistrust as a spy for foreign powers in modern Japan. To dispel such doubts,members of the Japanese Catholic Church had to prove constantly that they wereloyal Japanese citizens and subjects of the emperor and aimed at a Japanese-styleCatholicism that conformed to Japanese statism. When suspicion and antipathy against Catholicism became strong during thePacific War(1941-1945), Urakawa, a bishop of the Japanese Catholic Church and achurch historian, sought to bring about unity of Catholic Churches of Japan andcolonial Korea while emphasizing that, from the perspective of apologetics,Japanese Catholics were loyal Japanese citizens. He stressed that the martyrdom faith of Japanese Catholics, who had beenobedient to the state instead of offering resistance despite the sacrifice of theirown lives for religious faith, could serve as the foundation of a loyal nationalspirit. Urakawa argued that Korean martyrs, too, had been loyal to the state andthat, in the future, Korean Catholics could become citizens as loyal as Japanese Catholics. He thought that Catholic version of ‘Japan and Korea as onebody'(Naisen ittai), could be realized based on the martyrdom faith jointly inheritedby devotees in both countries, and it was not to deviate from the framework ofJapanese citizenship. Based on church history and biographical sketches of martyrs penned bymissionaries in Korea, Urakawa's A History of Martyrdom in Korea integrated thefruits of research by both Korean and Japanese scholars. However, although itaddressed Korean history, the work could not sufficiently collect and integratematerials from Korea and therefore had no choice but to access them indirectly,through materials translated into French. In addition, it came to include a negativeand distorted perception of Korea by integrating Orientalism based on Eurocentrismand a Japanese colonial view of Korean history. 1944년 우라카와 와사부로 주교가 저술한 《조선순교사》는 서술 범위가1846년에 그치고 있고 교회사 서술과 자료 인용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과를 종합하고 주요 사료들을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다. 근대 일본에서 외국의 종교인 천주교는 항상 외세의 앞잡이라는 의심과불신을 받았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 일본 천주교회는 자신들이 충군애국에 충실한 일본의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임을 늘 증명해야 했고, 일본 국가주의에 순응하는 ‘일본적 천주교'를 지향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천주교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강화되자일본 천주교회의 지도자이자 교회사가인 우라카와는 천주교를 옹호하기 위한 호교론(護敎論)의 입장에서 일본 천주교가 충실한 일본 국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 천주교와 식민지 조선 천주교의 ‘일치'를 모색했다. 우라카와는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도 국가에는 저항하지 않고순종했던 천주교 신자의 순교 신앙이 곧 충성스런 국민정신의 바탕이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순교사》를 통해 조선의 순교자들역시 국가에 충성했으며 앞으로도 일본의 신자 못지않은 충실한 신민이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 천주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천주교적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양쪽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순교신심에 기반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며 일본 국민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조선 선교사들이 저술한 교회사와 순교자약전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접목했다. 그러나 조선 역사를 다루면서도 조선 측 자료를 충분히 수합하지 못하고프랑스어 번역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양 우월주의에 기반한 호교론[오리엔탈리즘]과 식민주의 사관이 결합되어 부정적이고 왜곡된 조선 인식을 내포하게 되었다.

          • KCI등재

            한국 천주교회 전교회장의 활동과 의의 : 1923~1950 −평양교구 유급(有給) 전교회장을 중심으로−

            최선혜 (재)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敎會史硏究 Vol.0 No.51

            This article examined the role and significance of a paid Catechists in Diocese of the Modern Korean Catholic Church. Through this study, I tried to reveal the development and maturity of Korean Catholic Church after freedom of religion. The paid Catechists were a profession dedicated to missionary work with a newly established salaried position since the early 1920s. The Diocesan Bishop and Provost had the authority to appoint and dismiss Catechists. The Paid Catechists had no fixed term but a lifelong commitment. They was selected through a test among Korean aspirants, and studied doctrine, wrote articles, were tested and were finally appointed under the guidance of a parish Priest. They taught doctrines, gave lectures, worked on general missionary activities and especially engaged in missionary work through publishing. The fact that the number of paid Catechists in Diocese of Pyongyang increased indicates that their activities have been successful. Their active and devoted activities involved literary missions, touring lectures, and doctrinal lectures. The Korean Catholic Church's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revealed through their activities was a more mature one. The values and perspectives of patients, who are marginalized in society, were greatly changed. The church has portrayed the patient as an active missionary. The perspective of looking at women has also changed so much that they looked upon women as apostles who preach the gospel. The church also paid much attention to the children. The children are the protagonists of evangelization movement and the church emphasized that they are like weapons to reform Korea into national evangelization. This is why the church has paid attention to catechetical education, especially for children, with paid Catechists. Under the guidance of the parish Father with professional and systematic training, a paid Catechists who worked in the field of mission through catechetical education, lecture, and publishing were the motive power of the mature change and qualitative growth of Korean Catholic church. 회장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부터 준(準)성직자라고 할 정도로 교회 발전의 토양이었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 회장을 추적하는 작업에 이 글은 각별히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회장에 주목하였다. 유급 전교회장은 근대 한국 천주교회에 들어와 새로이 설치 · 운영된 유급의 직분으로 전교사무에 집중한 전문적 인력이었다. 이들은 다른 회장과 달리 보수를 받는 직분이었다. 유급으로 본당 신부의 지휘에 따라 전교와 교리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대세를 줄 의무가 있었다. 정해진 임기가 있기 보다는 ‘평생' 헌신이 기본 원칙이었고, 한국인 지망생 가운데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선발자들은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 공부와 논문을 작성하고,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임명되었다. 유급 전교회장은 문서선교 · 순회강연 · 교리강습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한국 천주교회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한층 성숙한 것이었다. 사회 구성원이 지향하는 이념의 추구나 도덕의 실현에서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나 의미가 소외되었던 환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져, 환자 역시 주체적인 전교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대우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정 안에서 여성(딸, 누이, 아내 등)을 복음의 사도로 세워주었다. 교회는 어린이에 대해서도 매우 주목하였다. 어린이야말로 복음화의 주인공이며 한국을 복음으로 개혁할 무기와도 같은 존재로 강조하였다. 교회가 유급 전교회장에게 특히 어린이를 향한 교리교육에 주목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전문적 훈련을 거치고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교육과 강연, 출판 등을 통한 선교의 현장에서 헌신적 활동을 전개한 유급 전교회장은 근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한 변화와 질적 성장을 이끌어 낸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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