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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나타난 유학의 검토

        이종우(Yi JongWoo)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08 교육연구 Vol.44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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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나타난 유학에서 그 용어를 엄밀하게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유학의 인, 성리학 등이 그러하다. 유학이란 공자, 맹자, 순자 그리고 후대의 주희까지도 포함한다. 성리학도 마찬가지로 주희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정호와 정이 그리고 후대의 학자인 이황과 이이의 이론까지도 포함한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정확한 표현에서 적절하지 않은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인을 ‘어짐',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을 비롯하여 ‘天命之謂性'을 ‘천성은 인성과 같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이황의 理發而氣隨之와 氣發而理乘之, 이이의 氣發而理乘之는 사단칠정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현행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서 과거의 유학을 현대의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것이 정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High school ethics textbook not strict on Confucianism conception. It is example humanity〔仁〕and New Confucianism. Confucianism include Confucius and Mencius and Xunzi and Zhuxi. New Confucianism include not only theory of Zhuxi but also Cheng Hao and Cheng Yi and Yi Hwang and Yi Yi. High school ethics textbook not strict on Confucianism contents. It was write that humanity〔仁〕translate benevolence or love. It was write that god an order equal human nature translate nature of god equal nature of human. It is not strict that mutual revelation of Yi Hwang and one side revelation Yi Yi of theory principle〔理〕and vigor〔氣〕. It is theory of four virtue and seven emotion of Yi Hwang and Yi Yi. High school ethic textbook not write on theory of four virtue and seven emotion of Yi Hwang and Yi Yi. High school ethics textbook not strict on Confucianism conception and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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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이해

        이선경(Yi Suhn-gyohng) 한국양명학회 2011 陽明學 Vol.0 No.28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은 조선의 상수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문헌이다. 이 논문은 조선의 『역학계몽』 관련 연구들 가운데,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이해를 살펴본 것이다. 이황(李滉)의 『계몽전의(啓蒙傳疑)』는 조선의 『역학계몽』 관련 저작 가운데 최초의 본격적 연구서라 할 수 있으며, 이 저작은 특히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본고에서는 이황이 『계몽전의』를 저술한 문제의식이 무엇이며, 『계몽전의』에서 다룬 주요 쟁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것이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연구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밝힌다. 그리하여 퇴계학파 『역학계몽』 이해의 종합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역학계몽』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도모하였던 이황의 태도는 후세의 연구자들에게도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나며, 주석들 간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하는 연구방식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계몽전의』를 묵수하거나 옹호하는데 있지 않으며, 『계몽전의』를 통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다시 쟁점화하고, 그에 대한 조선의 선배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하며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이렇게 『계몽전의』를 중심으로 연구사의 축적을 통해 『역학계몽』 이해의 완전성을 추구해가는 모습은 다른 학파와 구별되는 퇴계학파 『역학계몽』 연구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계몽전의』에 나타난 태극논의는 이황이 상수학(象數學)을 통하여서도 리(理)의 필연성과 주재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주며, 이는 『계몽전의』 가상수학 저술이지만 그 안에 이학적(理學的) 관심이 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다만 후대 퇴계학파의 『역학계몽』 연구에서는 이학적 관심이 뚜렷한 경우와, 이학적 관심과는 별도로 도수적(度數的) 연구에 치중한 경우로 나뉨을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19세기 저작들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이는 퇴계학파 안에 내재하던 하나의 흐름이 19세기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으로 생각된다. Zhu Xi's Yi Xue Qi Meng(『易學啓蒙』) is the core text in understanding the Image-Number(象數) Theory of Chosun Dynasty. Among the literature on Yi Xue Qi Meng during Chosun period, this article focuses on the work of the school of Toegye (退溪). Yi Hwang's Qi Meng Zhuan Yi (『啓蒙傳疑』) is known as the first full-scale research work of Yi Xue Qi Meng written in Chosun period. It also had tremendous influence upon the subsequent research of Yi Xue Qi Meng in Chosun. This article has three aims: it (ⅰ) examines Yi Hwang's motivation of writing Qi Meng Zhuan Yi, (ⅱ) spells out the main issues appearing in Qi Meng Zhuan Yi, and (ⅲ) investigates how it affects the subsequent study of Yi Xue Qi Meng performed by the followers of Toegye. As a result, this article will reveal principal characteristics of Yi Xue Qi Meng research performed by the school of Toegye. Just as Yi Hwang, his followers sought perfect understanding of Yi Xue Qi Meng while resolving the inconsistencies among the annotations of the text. In doing so, they did not merely keep to Qi Meng Zhuan Yi. Rather, they raised questions on the unresolved issues in the text, examined the predecessors' views on them, and developed their own solutions. Their work is distinct in that they pursued the perfection in understanding Yi Xue Qi Meng by means of accumulating research on Qi Meng Zhuan Yi. The discussion of Tai-Ji (太極) in Qi Meng Zhuan Yi reveals that Yi Hwang intended to establish the necessity and predominance of Li (理) even in his theory of Image and Number (象數學), which suggests that Qi Meng Zhuan Yi embraces the subjects of Neo-Confucianism, though it is primarily a work of image-number theory. Later the analyses of Yi Xue Qi Meng diverged among the followers of Toegye: some took an interest in the theory of Li while others concentrated on the study of nature. In particular, the theoretical traits of the latter are conspicuous in their work in the 19th century, which suggests that one stream of Toegye School bore fruit in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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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곡 정제두의 인적네트워크

        이남옥(Yi, Nam-ok) 한국양명학회 2018 陽明學 Vol.0 No.49

        霞谷鄭齊斗(1649~1736)는 주자학이 주도하고 있던 조선후기 사회에 양명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그 결과 그의 가계를 비롯한 교유관계 조차도 양명학과 관련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성을 띄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정제두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해서 살펴보고 양명학적 계보가 형성되는지 검증해보고자 한다. 정제두 이전 가문은 정유성의 현달과 함께 서인 핵심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정제현이 효종의 부마가 된 것은 상징적인 모습이다. 정유성의 장인은 이구함이며, 정창징의 장인은 홍익한이며, 정상징의 장인은 이기조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가문은 서인·남인과 혼맥으로 모두 연결된다. 한편 정창징과 정상징의 사위는 대체로 서인-노론으로 분류할 수 있고, 사위들 가운데 이세백과 민진주가 정치적·학문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때는 노소분당 이전이기 때문에 이 가문은 서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묘도문자 찬자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정유성의 묘도문자는 송시열·정제두·이의현이 찬하였고, 정창징의 묘도 문자는 송시열·김수항이 찬하였으며, 정제현의 묘도문자는 서명응·정제두·이경석·김수항이 찬하였다. 이는 정유성 가문이 노론과 소론을 모두 아우르는 서인 핵심 가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제두 가계는 정제두의 학문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소론 핵심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정제두의 장인은 윤홍거·서한주이며, 정후일의 장인은 이단상·유춘양이며, 정지윤의 장인은 이징성이다. 윤홍거·서한주는 서인이며, 이단상은 서인-노론으로 볼 수 있고, 이징성은 소론이다. 이를 통해 보면 정후일이 혼인할 때까지만 해도 정제두 가계는 노론과 소론을 모두 아우르는 서인 가계였고, 이후 소론화 경향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가계에서 받아들인 사위를 보면 소론화 경향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제두의 사위는 이징성이며, 정후일의 사위는 이광명·이경호·임달호·신대우·이영익이다. 이들은 모두 소론이다. 다만, 이광명·이영익은 이진유 가문의 인물로 준소계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경호는 완소계로 분류할 수 있다. 정제두가 소론의 산림학자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후 정제두 가계가 준소계와 완소계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소론 핵심 가문이 된 것이다. 묘도문자 찬자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상징의 묘도문자는 윤증·정제두가 찬하였고, 정제두의 신도비명은 신대우가 찬하였으며, 정후일의 묘도문자는 윤동도·이충익이 찬하였다. 이 가계의 묘도문자 찬자 역시 모두 소론이며, 윤동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인척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정제두의 인적네트워크는 “서인+남인→서인(노론+소론)→소론(완소+준소)”의 경향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Hagok Jeong Jedu had been noted for his study of Yangm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a result, his marriage relationship and communion relationship also tend to be explained in relation to the Joseon Yangming school. In this study, I will examine the Jeong Jedu's human network and verify whether it is related to the Joseon Yangming school. The Jeong Jedu family grew into a Seoin(西人) core family with his grandfather, Jeong Yuseong, becoming the main bureaucrat. And his cousin, Jeong Jehyeon, is the son-in-law of Hyojong(孝宗) a symbolic figure representing the political growth of the family. Jeong Jedu's big father, Jeong Changjing, was Hong Ikhan's son in law and Jeong Jedu's father, Jeong Sangjing, was Yi Gijo's son in law. Therefore, untill this time, this family was connected to both Seoin and Namin(南人). Sons in law of Jeong Changjing and Jeong Sangjing were generally classified as Seoin-Noron(老論). Among them, Yi Sebaek and Min Jinju were highly reputed politically and acdemically. So, this time, this family can be classified as Seoin. Looking at cemetery writers, this tendecy is evident. Jeong Yuseong's cemetery was written by Song Siyeol, Jeong Jedu and Yi Uihyeon. And Jeong Changjing's cemetery was written by Song Siyeol and Kim Suhang. Furthermore Jeong Jehyeon's cemetery was written by Seo Myeongung, Jeong Jedu, Yi Gryeonseok and Kim Suhang. This was possible because the family grew into a Seoin core family, including Noron and Soron(小論). On the other hand, as the academic status of Jeong Jedu increased, his family had grown up as a Soron core family. Jeong Jedu was a son-in-law of Yun Honggeo and Seo Hanju. And Jeong Huil, Jeong Jedu's son, was a son-in-law of Yi Dansang and Yu Chunyang. Futhermore Jeong Jiyun, Jeong Jedu's grandson, was a son-in-law of Yi Jingseong. Yun Honggeo and Seo Hanju were Seoin and Yi Dansang was Seoin-Noron and Yi Jingseon was Soron. Through this, it can be said that Jeong Jedu's family was a Seoin family to include both Noron and Soron until Jeong Huil was married, but since then this family had become a Soron. This tendency can be seen from the son-in-law of this family. Jeong Jedu's son-in-law is Yi Jingseong and Jeong Huil's son-in-law is Yi Gwangmyeong, Yi Gyeongho, Im Dalho, Sin Daeu and Yi Yeongik. They were all Sorons. But Yi Gwangmyeong and Yi Yeongik were a Junso(峻少) and Yi Gyeongho was a Wanso(緩少). Since Jeong Jedu was highly reputed as a scholar of Soron, his family became the Soron core family that could include both Junso and Wanso. Looking at cemetery writers, this tendecy is evident. Jeong Sangjing's cemetery was written by Yun Jueng, Jeong Jedu. And Jeong Jedu's cemetery was written by Sin Daeu. Furthermore Jeong Huil's cemetery was written by Yun Dongdo and Yi Chungik. This family's cemetery was written by Soron. Except Yoon Dong-do, they were all relatives. To summarize, Jeong Jedu's human network shows the tendency of “Seoin+Namin→Seoin(Noron+Soron)→Soron(Junso+Wan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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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한집』 간행과 칠탄서원 건립의 역사적 의미

        이남옥(Yi, Nam-ok) 한국사학사학회 2021 韓國史學史學報 Vol.- 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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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기양은 1588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주의 주학교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주에 살고 있던 정구를 찾아갔고 이후 빈번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 을 강마했다. 손기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고 지방관으로 왜군을 막는데 힘썼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도의 퇴계학파 인물인 정경세·조호익·이윤우·이전·이준·성안의·신지제·여대로·조정·서사원·이후 경·손처눌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손기양은 조정의 당쟁이 심화되자 1609년 창원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 고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해 점필서원을 중수하고 밀양향교를 재건하였으며, 밀 양사림을 대표해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촉구하는 등 향촌사회 질서를 안정시키 고자 노력했다. 손기양 사후 그의 후손들은 유고를 정리하고 유허를 정비하였는데, 이 과정 에서 손기양의 퇴계학파 내 위상을 정립하고 학문적 권위를 형성하기 위해 노 력했다. ‘이황-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근기 남인 계보의 핵심 인물인 이익에 게 손기양의 행장을, ‘이황-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로 이어지는 영남 남 인의 핵심 인물인 이상정·이광정 형제에게 『오한집』 교정과 서문을 부탁했다. 한편, 칠탄서원을 건립하고 손기양을 향사하는 과정에서 이상정 이후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학자인 류치명은 「칠탄서원봉안문」과 「상향축문」을 지었으며, 이황의 10세 종손인 이휘녕은 「칠탄서원청절사상량문」을 지었는데, 이들은 퇴 계학파 내에서 칠탄서원 건립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기양은 퇴계학파 그중에서도 한강 정구 문인이자 밀양 을 대표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Son Gi-yang(孫起陽) passed the examination in 1588, and was appointed state school professor in Seongju the following year. At this time, he visited Jeong Gu, who was living in Seongju, and since then, he frequently exchanged letters and discussed scholarships. Whe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Son Gi-yang organized an army and fought, and became a regional officer and worked hard to defend the Japanese army. In this process, Son Gi-yang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Jeong Gyeong- se, Jo Ho-ik, Yi Yun-u, Yi Jeon, Yi Jun, Seong An-eui, Sin Ji-je, Yeo Dae-ro, Jo Jeong, Seo Sa-won, Yi Hu-geong, and Son Che-nul, the Toegye schools of Gyeongsang Jwado. As the political party of the court intensified, Son Gi-yang left his office in 1609 at the end of Changwon governor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Milyang(密陽). Afterwards, he rebuilt the Jeompil Seowon and Milyang Hyanggyo, and tried to stabilize the local order on behalf of Milyang scholors. After Son Gi-yang s death, his descendants organized his writings and rearranged the ruins. In this process, they tried to establish the status of Son Gi- yang within the Toegye School and to form academic authority. Son Sa-ik(孫思翼) asked Yi Ik, who was a key person in the genealogy of Nam-in in metropolitan area, which lead to ‘Yi Hwang→Jeong gu→Heo Mok', to write Son Gi-yang s biography. Also he asked brothers Yi Sang-jeong and Yi Gwang-jeong, who are the key persons of Nam-in in Yeongnam, who lead ‘Yi Hwang→Kim Seong-il→Jang Heung-hyo→Yi Hyeon-il→Yi Jae', to correct Son Gi-yang s writing and write the preface. Afterwards, his descendants built Chiltan Seowon and performed a ritual of Son Gi-yang. At this time, Ryu Chi-myeong, the scholar representing Nam-in in Yeongnam, wrote “Chiltan Seowon Bonganmun” and “Sanghyangchukmun”, while Yi Hwi-nyeong, tht descendant of Yi Hwang, wrote “Chiltan Seowon Cheongjeolsa Sangryangmun”. These were the figures who could give the legitimacy of the construction of Chiltan Seowon within the Toegye School. Through this process Son Gi-yang became a member of the Toegye school and a scholar representing Milyang by his descend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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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학』 이념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 이덕무의 『사소절』을 중심으로

        이승연 ( Seung Yeon Yi ) 東洋哲學硏究會 2008 東洋哲學硏究 Vol.55 No.-

        이 글은 이덕무의 『사소절』과 주자의 『소학』을 비교 검토하여 『사소절』의 위치 및 의의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덕무는 흔히 북학파 실학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일반 실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사회개혁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탈주자학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주자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주자학과 18세기 조선의 실학은 과연 양립 가능한 것일까? 주자는 당시 사상계를 풍미하였던 불교와 도교를 `허학(虛學)`이라 비판하며,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다. 그가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던 이유는 자신의 학문=유학만이 최고의 인간상=성인(聖人)에 도달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구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예(禮)였다. 주자가 아동교육을 위해 저술한 『소학』은 `세세한 예절`을 그 내용으로 한 것으로, 그는 실제로 이 `소절(小節)`의 실천이 성인이 되기 위한 기반이라고 생각하였다. 선비, 여성, 아동을 대상으로 그들의 일상적인 행위규범을 규정한 이덕무의 『사소절』은 흔히 `한국판 소학`이라 평가된다. 그런데 `한국판 소학`이라는 평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사소절』이 일정부분 『소학』을 계승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단순한 계승이 아니라 `한국화`를 수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학』의 무엇을 계승한 것일까? 그리고 또 그가 수행한 한국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덕무는 『예기』 「곡례편」의 `곡례`를 주공(周公)의 저작으로 간주하는 한편, 『소학』의 내용을 `소절`, 즉 곡례라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소절`도 "불유한(不踰閑)"이라 주장한 주자의 `소절`관을 더욱 강화한 것이며, 아울러 양명 좌파의 사상이 수용, 확대되는 등, 주자학적 이념이 와해되기 시작한 조선 18세기, 당시의 현실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소절`이야말로 현실에 기반을 둔, 가장 실천가능한 수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덕무의 지적처럼, 주자와 이덕무 사이에는 6,7백년의 시차가 존재하였다. 이덕무는 문지기, 고용인, 농부, 상인, 공인과 같은 생산직종사자나 여성도 사(士), 즉 선비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그들에게 선비로서의 자각을 요구하였다. 실제로 『사소절』의 주된 내용은 바로 그들이 지켜야 행위 규범들이다. 급속히 부상하기 시작한 평민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이덕무가 주자와 자신을 구분하며 『사소절』을 집필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덕무가 주자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 『사소절』을 집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소절』의 사상적 의의를 밝히는 한편, 『사소절』을 통해 『소학』의 한국적 전개 양상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인 것이다. This article seeks to illumine the location and the significance of Yi Duk Mu`s "Sasozul" by comparing and examining it with Juja`s "Sohak." Yi Duk Mu is often categorized as a scholar of the Authentic School, who belonged to the Northern School tradition. Apart from the general scholars of the Authentic School, however, he neither insisted social reform nor attempted the abandonment of the Juja School. In a certain way, he was Juja`s loyal successor. Is it possible indeed for the Juja School and the Authentic School of 18th Century Josun to Silhak? Juja criticized Buddhism and Taoism that swept the contemporary thought, and called them "Hollow School." The reason why he named his studies "Authentic School" was because he thought only his studies=Confucianism was equipped with the concrete methodology that would help arrive at the supreme human portrait=holy one. That concrete methodology was, of course,禮. "Sohak" which Juja authored for the purpose of educating children, contains "Minute Etiquette," and he actually believed that the practice of this "Sohak" was the foundation towards becoming a holy one Yi Duk Mu`s "Sasozul" had Scholars, Women, and Children as its subjects, and established the regulation for their daily conduct. It is often appraised as "the Korean version of Sohak." There would be implied, however, two meanings to the appraisal, "the Korean version of Sohak" One would be that "Sasozul" inherited certain parts of "Sohak," and the other would be in fact that it was not just a simple succession but the succession with Koreanization. What part of "Sohak," then, did Yi inherit? What was the content of the Koreanization that he carried out? Yi Duk Mu assumed, on one hand, that Gok Ryeh of "Gok Ryeh Section" in "Ye Ghi" was authored by周公, and viewed the content of "Sohak" as `Minor Etiquette," i.e., Gok Ryeh, on the other hand. Yi further strengthened Juja`s perspective on the "Sohak" that "Minor Etiquette" was also `不踰閑`. It is believed that this was an attempt to break up the self-contradicting reality of the contemporary 18th century Josun when the social order that was based on Juja School`s teachings begun to crumble for example, through the acceptance and expansion of Yang Myung leftists` thoughts. For Yi, "Minor Etiquette" was indeed the most practical method of self-preservation, founded on reality. As Yi Duk Mu pointed out, however, there existed 6, 7 hundred years of time difference between Juja and Yi himself. Yi Duk Mu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the scholars (士) women and those workers in production industries, such as guardsmen, employees, farmers, merchants, and laborers, and insisted from them the self-awareness as scholars. In fact, the regulation for their conduct makes up the main theme in "Sasozul." It reflected the demand of the middle class that begun the rapid rise. It is believed that this is the reason why Yi Duk Mu distinguished himself from Juja, when he authored "Sasozul." It i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to investigate the process in which Yi Duk Mu had no choice but to profess himself as the successor of Juja and author "Sasozul," and to illumine Etiquette`s ideological significance, on one hand, and to clarify the Korean aspect of development of "Sohak" via "Sasozul" on the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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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상하와 이현익 인물성 논쟁 : 한원진과 관련하여

        이종우 ( Yi Jongwoo ) 온지학회 2020 溫知論叢 Vol.0 No.63

        낙학의 이현익과 어유봉은 인물성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 당시 낙학의 종장 김창흡은 어유봉을 지지하면서 이현익을 인물성이론이라고 단정하여 호학의 종장 권상하로부터 나왔다고 비판하였다. 즉 이현익과 권상하를 같은 인물성이론이라고 간주하여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현익은 어유봉과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권상하와 인물성 논쟁을 벌였고, 그 후 권상하의 문인 한원진도 이현익을 비판하였다. 이현익은 인간과 동물의 성의 본체 즉 본연지성은 같지만 그 작용으로서 기질지성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을 본체와 작용으로 구분하였다. 반면에 권상하는 성이란 리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기 속의 리를 가리키기도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전자는 인물의 본성이 같지만 후자는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성을 이현익 처럼 본체와 작용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한원진의 이현익 비판도 그의 스승 권상하와 같다. 한원진의 인물성론이 이간과의 논쟁에서 이미 정립되었고, 권상하도 그를 지지하였으므로 그 관점은 같았다. 권상하와 한원진은 리와 기 속의 리 모두 본연지성이라고 여긴 것이 이현익과 다르다. 이 때문에 권상하와 한원진의 관점에서 이현익은 이간과 비슷한 인물성동론자였다. 권상하·한원진과 이현익의 공통점은 리만을 가리켰을 때 그 본연지성은 인간과 동물이 같다고 여긴 점이다. 이처럼 이현익의 본연지성에 대한 관점이 권상하·한원진과 다르기 때문에 김창흡이 생각한 것처럼 이현익의 인물성론이 권상하로부터 나온것이 아니었다. In the Rak group, Yi Hyeonik and Eo Yubong, also had a debate like Ho group. Their representative Kim Changheup, argument that the natures of humans and animals are the same, was supporting Eo Yubong, criticizing Yi Hyeonik because he regarded Yi Hyeonik's argument was from Gwon Sangha. However, Yi Hyeonik had a debate with Gwon Sangha about it before that and Han Wonjin criticized Yi Hyeonik's agument after the debate. Yi Hyeonik argued that the original natures of humans and animals are the same but the physical natures are different. However, Gwonsangha argued that the nature means not only li(理) but also li inside gi(氣). This is like Han Wonjin's criticism of Yi Hyeonik. Han Wonjin also argued that the original nature means not only li but also li inside gi. The former means that the natures are the same but the latter means that the natures are the different. Gwon Sangha and Han Wonjin's view on Yi Hyeonik is similar to their view on Yi Gan. Judging from that, Yi Hyeonik's argument did not create from Gwon Sangha and was not similar to him. Therefore, Kim Changheup's view on Yi Hyeonik was in the wrong.

      • KCI등재후보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16세기 호남사림의 학문 교류 및 논변 고찰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노수신(盧守愼)과 교류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을 중심으로-

        이형찬 ( Hyung Sung Yi )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48 No.-

        16세기 전후로 조선은 사화가 일어나 정치적으로 불안하였다. 사화로 인하여 향촌사회로 귀향한 호남의 사림은 도학을 실천하고 성리사상을 이론적으로 탐구하여 학문을 발전시켰다. 특히 전라도관찰사들의 부임, 또는 덕망있는 학자들의 유배는 유학의 정신을 더 고양시켰다. 기대승은 과거를 준비하면서 주자학을 탐구하였다. 그의 주자학에 대한 열정은 『朱子文錄』을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초로 李恒·金麟厚·李滉·盧守愼 등과 학문적으로 교류하고 논변하면서 자신의 理氣心性論에 대한 체계를 확립하였다. 본 글은 기대승이 김인후·이항·노수신 등과 교류하고 논변한 것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기대승은 김인후·이항과 찾아간 적이 있었으나 태극논쟁을 시작으로 학문 교류 및 논변이 본격화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이항과 `태극·음양의 관계`를 논쟁하면서도 김인후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그 논변이 심화되었다. 더욱이 기대승은 이 논쟁을 당시 四端七情에 대해 논변하던 이황에게도 알려 그 논지를 명확하게 밝혀내고자 하였다. 그후 기대승은 노수신과 人心道心에 대해 논쟁하였는데 이 논쟁은 일찍이 김인후·이항이 노수신과 논쟁하던 것을 계속한 것이다. 기대승의 이러한 일련의 학문교류와 논쟁은 성리학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반성이자 조선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기대승의 이론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었다. 그의 문인들은 국난을 당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輔國安民하고자 하였고, 조선말기 그의 후손들도 그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국가가 위기를 당하자 이를 극복하고자 위청척사운동을 일으키고 義烈精神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의 학문과 정신은 호남이라는 지역성을 벗어나 畿湖學이라는 학맥으로 계승되고 나아가 후학들이 주자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도록 하였다. Before and after the 16th century, the Sahrim in Honam opened to the practical moral philosophy and the theoretical human nature and natural laws and welcomed the heyday of their scholarship. Especially the newly appointed Jeolla-province governors or the exile of scholars who had a moral influence even boosted the spirit of Confucianism. Daeseung Ki succeeded to the family-run scholarship, studied Neo-Confucianism and prepared for the state examination. His passion for Neo-Confucianism later became the beginning of completing 『Jujamunrok』(朱子文錄: a series of books he compiled by excerpting from 『Jujadaejeon』, a collection of works of Zhu Xi, a Song Dynasty Confucian scholar). Based on this, he academically interchanged and debated with Hang Yi, Inhu Kim, Hwang Yi, Sushin Noh, etc. and established his own system of Yikishimsungron(理氣心性論: a theory that philosophically explains about the mind of people linked with the basic principles and the atmospheric force of nature). This study focused on the interchanges and arguments that Daeseung Ki had with Inhu Kim, Hang Yi, Sushin Noh, etc. He made a few visits with Inhu Kim and Hang Yi, yet, with Taegeuk Argument, his academic exchange and argument began. Though he was arguing about the `relation between taegeuk and yin and yang` with Hang Yi for the first time, the debate became intensified through the academic exchange with Inhu Kim. Moreover, Daeseung Ki informed Hwang Yi who was discussing over Sahdanchiljung(四端七情: four Confucian human nature and seven human emotions) of this argument and tried to clarify the point of it. Later, he, with Sushin Noh, argued about Inshimdohshim(人心道心: a theory about the ambilaterality of the mind) which had been continued since the Hang Yi and Sushin Noh`s debate earlier. Daeseung Ki`s such successive academic exchanges and arguments were a profound philosophical reflection toward Confucianism and became an opportunity to enhance it in the Joseon Dynasty. Daeseung Ki`s theories were handed down to the younger scholars. His literary men, facing the national crisis, strived to overcome the situation and promote the national interests and provide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by raising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his descendants, as well, succeeded to his scholarship and started `Wijungchuksa Movement` and showed such heroic spirit as they were facing their nation in crisis. His scholarship and spirit, in particular, went beyond the regional boundary but were succeeded as an academic range called Kihohak(畿湖學) and helped the younger scholars to move toward the world view of Neo-Confucianism.

      • 투고논문 : 광해군 초기의 정인홍

        오이환 ( Yi Hwan Oh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7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1 No.-

        본고는 대북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인홍의 생애와 사상을 광해군 시기에 한정하여 조명해 보고자 하는 연구의 첫 단계로서, 대북정권이 성립하기 전인 광해군 즉위년의 임해군 역모 사건으로부터 그 3년의 晦退辨斥 시기까지 4년간을 다룬다. 간행된 ??來庵集??의 저본을 비롯한 근년에 발견된 고문서들을 주된 자료로 삼아 편년 형식으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광해군 시기 전체에 걸쳐 왕실 내부의 인물이 관련된 역모사건에 대해 남인과 서인은 천륜의 명분을 중시하는 全恩論을 주장한 반면, 북인은 군신의 명분을 우선시하는 討逆論으로 기울었다.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의 문제로서 예학논쟁의 성격을 지닌 당쟁이었다. 전은과 토역의 논쟁은 마침내 明에 대한 事大 의리와 함께 인조반정의 양대 명분 중 하나로 되었다. 임해군의 逆獄에서 전은론자들의 주장은 억울하게 형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며 임해군은 선조의 여러 왕자 중에서도 광해군과 어머니를 같이 한 유일한 형제이므로 義와 恩을 아울러 극진히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임해군에 대해 전은론을 주장한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옥사가 성립된 후에 전은을 입에 담는 자는 역적을 비호하는 사심이 있는 것이 아니면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하의 公義요, 은혜를 펴는 것은 임금의 私情이기 때문이다. 광해군 3년 3월에 우찬성 정인홍은 사직차를 올려, 자신의 스승인 조식?성운의 학문과 인격이 이황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 폄하된 점을 해명하면서, 지난해 문묘에 종사된 조선조의 5현 중 이언적과 이황, 그 중에서도 주로 이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이 첫 상소를 하고, 뒤이어 조정의 전?현직 관료와 지방 유생들이 계속 의견을 개진하며 정인홍을 성토하였다. 광해군은 계속적인 성토의 움직임을 이와 같은 기회를 틈타 정인홍을 숙청하기 위한 정쟁으로 간주하였다. 8월 성균관에 걸려 있었던 정인홍의 유적 삭제에 대한 방이 왕명에 의해 철거됨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晦?退 비판으로 말미암은 소란은 수습되었다. This is the first step of a study, which set limits to the Guanghae-gun period, to elucidate the life and thought of Jeong In-hong who was the spiritual prop of the Daebuk regime. It covers the period from the conspiracy of Imhae-gun which occurred in 1608, the year of Guanghae-gun's enthronement to the critique on Yi Eun-jeog and Yi Hwang in 1611. Through the whole Guanghae-gun period, Seoin and Namin parties asserted benevolence stressing on the moral obligations of man's natural relations, whereas Bugin party asserted punishment which put priority on the moral obligations between sovereign and subject. It was the matter of Neo-Confucian moral obligations and a party strife with the character of dispute on decorum. At last, the dispute on benevolence and punishment became one of the two main causes of Injo coup and could be considered as a former step of the dispute on decorum in latter Yi dynasty. In the case of Imhae-gun's conspiracy, the persons who asserted benevolence emphasized to protect the innocent and apply full grace and justice to Imhae-gun who was the only maternal brother of Guanghae-gun among the many princes of King Seonjo. Jeong In-hong criticized severely the ministers who asserted benevolence on Imhae-gun. According to him, when the treason case was materialized, the persons who talked about benevolence were going to protect the criminal with selfish motives or took no notice of king. Because it is common duty of the subjects to liquidate the traitor and it is the personal sympathy of the sovereign to give grace to him. In March of the third year of Guanghae-gun's rule, Jeong In-hong submitted his resignation to the king, explicating the fact that his teacher Jo Shik's and Seong Oon's learning and personality had been unjustly distorted and devalued by Yi Hwang, he sharply criticized Yi Eon-Jeog and Yi Hwang, mainly Yi Hwang, among the five sages who were decided last year to be co-worshipped with Confucius in Munmyo service. Soon after his resignation was submitted, the students of Seonggyunguan presented the first memorial to the king and the court officials of past and present chairs and the Confucians of provinces continued to censure Jeong In-hong. Guanghae-gun considered these movements of continual denounce as a political strife to purge Jeong In-hong and took advantage of this opportunity. When the expurgation notice of Jeong's name from the roster of Seonggyunguan was removed by king's order on August 12, the turmoil due to the critique on Yi Eun-jeog and Yi Hwang was settled at last.

      • KCI등재

        The Religious Belief of Chinese Yi People Embodied in Bimo Culture

        웨이이 ( Wei Yi ) 한국동양예술학회 2020 동양예술 Vol.49 No.-

        이 논문은 중국 이족 집단에 대한 종교 신앙 체계의 변천과 재구성의 단초인 原初性과 再生性을 연구한다. 이족의 문화는 비교적 안정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대와 지역, 장르별로 차이가 있다. 이 논문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변화는 정상적인 역사와 문화의 법칙 속에서 발전한 것으로, 예를 들어 물과 같은 재생적인 성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생리변화의 이치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한 지역의 문화도 전승에서 재구성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이족문화의 종교 신앙 체계 역시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이족의 종교는 지역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 역사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집단적 형태를 지녔지만, 이러한 안정된 집단 형태도 끊임없이 자기변화와 외래 문화 흡수를 통해 이족 고유의 색채를 보완해 왔다. 따라서 이 논문은 중국 이족의 전통인 畢摩文化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족의 종교문화를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소수민족 문화의 가치를 이해하게 해준다. Through exploration of the memory of Chinese Yi ethnic group, this paper expounds the change and reconstruction of Yi religious belief system from the historical dimension, and studies its "primitive" and "regenerative" natures. Yi culture has its stable tradition, and shows different changes in different times, geographies and scenarios. The author believes that the above changes occur and develop in a normal historical and cultural frame. A "regenerative" evolution also exists, which is similar to the source of water. If no fresh water pours in, it cannot form a river, and may even dry up. All cultures regenerate and reconstruct themselves according to natural law, and the religious belief system in Yi culture is of no exception, and such changes and reconstruction are consistent with the living practice of ethnic groups. Due to geographical and traffic reasons, Yi religious belief remains steady in its form in history, but it is also gradually improved during continuous self-transformation and absorption of foreign culture. Through study of traditional Bimo culture of Yi people in China, this paper can help readers to understand Yi religious culture and its values from a theoretical perspective.

      • KCI등재

        정암 이현익의 사단칠정론

        이선열 ( Sun Yuhl Yi )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2016 율곡학연구 Vol.32 No.-

        본 연구는 18세기 낙학계열의 학자인 정암 이현익의 사단칠정설을 중점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김창협의 제자였던 이현익은 초기 낙학파 사유에서 두드러졌던 퇴율절충적 사칠론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즉 율곡학파의 전제를 바탕으로 퇴계설을 최대한 율곡설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는 것이 이현익의 기본입장이었다. 그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인의예지에서 발원한 것이라 하여 양자의 발생경로를 일원화하는 ‘기발리승일도'의 관점을 취하되, 퇴계가 말한 ‘리발'과 ‘기발' 역시 ‘주리'와 ‘주기'의 맥락에서 용인하는 입장에 선다. 이현익에 따르면 사단과 중절한 칠정은 모두 선한 정(情)으로 가치상 동일하며, 존재상으로도 어느 쪽이 더 리에 가깝다거나 기에 가깝다는 식으로 차별화할 수 없다. 하지만 개념의 층위에서 각자가 함축하는 취지에 주안점을 둘 때 양자의 차이가 불거진다. 즉 사단은 리의 순선한 측면만을 단적으로 지시하고 기의 측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인 반면, 중절한 칠정은 기가 리를 순조롭게 따른 경우를 지칭하기 때문에 기의 역할에 강조점이 놓인다. 이처럼 가치론적ㆍ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대상이더라도 무엇을 의도하고 강조하는지에 따라 개념상의 차이는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현익의 기본생각이다. 그는 기에 따라 좌우되는 우연적ㆍ가변적인 선악의 한 측면과 동일시하기에는 사단의 도덕적 함의가 크다는 퇴계의 문제의식에 공명한다. 즉 사단이 칠정의 일부로만 간주될 때 단순히 ‘중절한 일반감정'과 차별화되는 ‘천부적인 도덕감정'의 가치가 희석된다고 본 것이다. 그 같은 취지하에 이현익은 논리구조상 율곡의 학설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 퇴계의 문제의식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는 퇴계와 율곡의 관점이 각각 빠질 수 있는 편향을 지적하면서 사단칠정에 관한 종합적인 인식을 꾀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낙학파의 논리로 사단칠정 문제를 명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현익의 학설은 일정한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performed by Yi Hyun-Ik. Yi belonged to Rakhak(洛學) in Yulgok school in the Joseon Dynasty in the 18th century. Yi``s view on this issue can be recapitulated as two claims: (i) Yulgok was entirely right as regards to the relations betwee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llings, and (ii) nevertheless, Toegye``s view on this issue, if examined closely to understand what it was originally meant, is not incompatible with Yulgok``s theory. This reveals the basic attitudes of Yi``s philosophy, which compromises the two great philosophers`` views. At the same time, Yi provides criticisms on their views. He attempted to reach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while pointing out the problems one may face taking Toegye or Yulgok``s view tendentiously. In sum, Yi``s view on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is the result of accommodating both Toegye``s and Yulgok``s philosophies, and, at the same time, of critically examining their view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Yi``s view lies in the fact that it clarifies the complex issues raised by the theory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within his own line of thinking, as opposed to merely following previous discou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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