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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기획논문 : 남명학 연구성과의 회고와 전망(4)-교육연구

        송준식 ( Jun Sik Song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2 남명학연구 Vol.35 No.-

        록 체계가 시대 순이 아니고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남명의 삶은 크게 네 번의 전환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뚜렷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왔다. 적어도 이러한 4시기로의 분류만이라도 가능하다면, 현재 소강상태에 있는 남명문학의 연구는 한층 발전된 단 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is written for making clear the trend and deciding on the direction of Nammyong Studies as far as cleaning up the research achievement of Nammyong Studies in educational parts to the present day. In this article, Nammyong Studies includes Cho Sik(1501-1572), his pen name "Nammyong", and the researches for the School of Nammyong, the group of his followers. The research of Nammyong Studies in educational parts was started from 1947, but the authentic research started from since 1990. The researches until 2,000 have concentrated on almost all the general educational thought, and that was slanted in favor of Cho Sik. Since 2000, the research on the educational part of the Nammyong Studies has showed the diversified trends. After that time, the existing researchers expanded the area of research with a new method. The researchers of various majors involved in the research on the educational part of the Nammyong Studies. And the direction of research on Cho Sik was changed from the research on some famous men to the focus of the School of Nammyong. This change seems to be positively reflected in the research methods or research works. The future researches are as follows. First, researches to find out the identity the School of Nammyong in history through the multidirectional research about the education Cho Sik and the School of Nammyong as well as the research about the succession of the School of Nammyong are needed. Second, a research to find out how the effects of Cho Sik and the School of Nammyong are applied to the countryside community and in consequence, how they have devoted to the change and development of the countryside community is needed. Third, a research to formulate the phases of Cho Sik and the School of Nammyong in educational history through the comparative research about a scholar to be compared with Cho Sik is needed. Fourth, through the introduction of theory and research method of modern western education to the research of Cho Sik and the School of Nammyong continuously, we can find out the theoretical problems and its limitations in the research of Nammyong Studies and should go forward to overcome them. In fields of education, the research of Cho Sik and the School of Nammyong will be meaningful when it provided clues to solve the current educational problems and the future direction of educational development on the basis of the study about the historical facts of the past.

      • KCI등재

        종교와 사회발전

        정태식(Jung Tai-Sik)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1

        본 연구는 조만식의 사회사상에 대한 추적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주로 조만식이 남긴 저술, 예컨대 신문, 잡지 등에 쓴 투고문과 그가 취한 사회정치적 행보를 추적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그가 일정강점기라는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펼친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대하여 논한다. 논의를 전개하면서 먼저 그의 사상체계가 지닌 인식론적 지향을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만식이 사실이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것과 그의 삶의 의미체계 또한 고정적이지 않고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만식은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비관적이지도 않고 낙관적이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면서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상이 개방적인 만큼 공리적인 결과를 추구하고 지향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며, 그의 사회참여가 객관적인 성찰과 주관적 참여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조만식의 사회운동을 다루었다. 비록 조직적이거나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운동에 대한 조만식의 사상은 상당부분 오늘날의 시민사회운동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자율적인 결사체로서의 중심기관의 결성은 일제강점기의 지배적 정치체제와 일본인 중심의 경제체제 하에 있는 조선인들의 사회운동 동력을 모으도록 격려함으로써 오늘날의 시민운동이 시장논리와 정치논리의 영역을 벗어나 제3섹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예견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조만식은 당시에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였다. 이들 사상은 내적으로 또는 서로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 세계 안에서 해소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조만식은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안주 하지 않았다. 사상의 역사성을 인정하기에 고착화된 특정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상이 지니는 특수하고 개별주의적인 한계를 그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사상의 기본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넘어서 보편성을 지향하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This study traces the social thought of Cho Man-Sik. For this, I paid attention to his writings left on newspapers, magazines, etc., and discussed his socio-political walking as well as his social thought and social movement especially under the severe political situation of Japanese imperial occupation of Choson peninsula. For more specific discussion, first, I tried to figure out what kind of epistemological orientation he had kept. As a result, we came to know that he had a reality based attitude in which any truth is being searched from facts or reality. At the same time, his own meaning system of life was not static but open and inclusive. Second, we found out that, even under the severe situation of Japanese occupation, Cho Man-Sik never showed any pessimistic or optimistic attitude toward socio-political situation, but maintained very realistic attitude. This fact is enough to tell us that his social thought is so open that he was seeking for very utilitarian results. In a word, his social participation was accompanying objective reflection and subjective participation. Third, I tried to analyze his social movement. I got the idea that though it is not so systematic and refined, his thought on social movement was very advanced one. Especially, his encouragement and emphasis on the formation of ‘central organizations" as voluntary associations were nothing but mobilizing Korean people's dynamic force of social movement under Japanese dominating political and economic systems. It shows Cho Man-Sik's foresight that is similar to today's civil society movement that as a third sector stands against the political and economic logics of modern society. Finally, in this study I tried to show that Cho Man-Sik, within himself, solved the contradictions among different social thoughts. In a word, he never showd satisfaction to, and was content on any specific thought and ideology. This is from his epistemological orientation that recognized the historicity of thought. So he could not accepted any solidified idea or thought. Also he was aware of the particularistic limitations of any thought. Of course, the foundation of his social thought was on the Christian faith that transcends the ideological level and seeks for the universality of God.

      • KCI등재

        기혹논문 2 : 정구의 한강학과 퇴,남학

        홍원식 ( Won Sik Hong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4 嶺南學 Vol.0 No.26

        이제까지 정구의 한강학에 대한 연구는 그가 이황과 조식 양 문하에 나아갔기 때문에 주로 이황의 퇴계학이나 조식의 남명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 져왔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정구의 한강학을 중심에 두고 퇴계학이나 남명학과의 관계, 나아가 한강학이 가지는 독창적 부분을 밝히고자 하였다. 여헌 장현광은 한강학에 대해 ‘明體適用의 학'이라고 말하였는데, 그의 道學과 心學이 ‘명체(근본을 밝힘)의 학'에 해당한다면, 5學과 經世學은 ‘적용(현실에 적용함)의 학'에 해당한다. 정구는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으로서, 그를 ‘大東儒宗'으로 추존하면서 그의 도학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젊은 날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이황과 조식의 양 문하에 나아감으로써 그들의 도학과 심학을 계승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예학과 경세학 방면의 저술도 많이 남겼다. 이것은 이황이나 조식에게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정구의 한강학이가지는 독창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구는 김굉필과 이황 및 조식으로부터 물려받은 도학과 심학의 바탕 위에서 예학과 경세학을 펼쳐감으로써 자신의 한강학을 구축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영남 유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Jeong Gu`s Hanganghak has been mainly studied in relationshipToegyehak or Nammyeonghak, for he was disciple of them all. However, This paper is to determine relationship with Toegyehak orNammyeonghak, furthermore originality of Hanganghak based onJeong Gu`s Hanganghak. Yeoheon, Jang Hyeongwang regardsHanganghak as ‘Enlightenment of reality and Proper revelation ofvirtue'. If his Dohak and Simhak correspond to ‘Enlightenment ofreality', Yehak and Gyeongsehak do to ‘Proper revelation of virtue'. Jeong Gu is maternal great-grandchild of Hanhweondang KimGoengpil, has over him as DaeDongYuJong and succeeds to his Dohak, henceforward, to Dohak and Simhak of Yi Hwang and Jo Sik. Besides, He left out writings of Yehak and Gyeongsehak. This point is not foundin Yi Hwang or Jo Sik, and can be originality that Jeong Gu'sHanganghak has. Jeong Gu built own his Hanganghak by studyingYehak and Gyeongsehak on the base of Dohak and Simhak whichinherit from Kim Goengpil, Yi Hwang and Jo Sik. He led the Yeongnamconfucianism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 a new direction.

      •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치국론(治國論)과 의미 -상소문(上疏文)을 중심으로-

        김강식 ( Kim Kang-sik ) 南冥學硏究院 2018 南冥學 Vol.23 No.-

        조선중기의 성리학 체계화 과정에서 사상에서는 의리와 실천을 강조하고, 정치에서는 현실의 모순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며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南冥 曺植은 비판적 지식인이자 전형적인 處士였다. 이에 16세기의 현실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현실정치에 대한 개혁책이 적극적으로 담겨 있는 남명의 4차례의 上疏를 토대로 남명의 정치 현실에 대한 治國論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남명의 치국론을 정치의 영역을 크게 지방정치와 중앙정치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남명의 치국론의 중요성은 지방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남명은 현실 정치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16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사회의 안정이 필요하였다. 이에 재지사족이 향촌통제책을 행사할 수 있는 향촌자치론이 남명에게도 필요하였다. 남명의 문인들에 의해서 일어났던 毁家黜鄕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재지 지주였던 양반의 입장에서 농경지의 경작을 위한 농민 계층의 안정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은 조세제도의 공정성을 유지하고 부정을 방지하여 향민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향민보호론으로 나타났다. 한편 남명은 조선중기의 절대군주제를 인정하고 君臣共治를 통해서 중앙의 정치가 안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남명은 먼저 군주의 수신과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성학군주론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군주의 정치가 원활하게 집행되기 위해서 수령과 향리의 엄정한 선택과 부정·비리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행정체계론을 지지하였는데, 특히 인재의 등용을 중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남명의 치국론은 지방과 중앙 정치의 영역에 맞게 주장되었다. 먼저 중앙정치에서는 위정자의 올바른 처신과 역할, 위정자의 수신과 솔선수범, 위정자와 신료들과의 소통의 중요성, 제도 시행의 엄정성, 국방의 자위성 확보와 주체적인 외교 문제였다. 지방정치에서는 향촌자치, 목민관의 솔선수범, 백성의 민생 안정, 관료의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 상하의 소통문제였다. 남명은 시대정신에 따라 만들어진 정치형태를 부정과 편법을 통해 왜곡시키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시행해 나가는 것이 현실 개혁의 방향이라고 보았다. Confusion scholar culture emerged in the 16th century during the early Chosun period, which was at ransition period for this new social system. The political and social mainstream considered rule by Neo-Confucianism to be ideal and suggested measures for its practice. Nammyeong Jo Sik(1501~1572) lived in a time of faction politics and purge of scholars during which Neo-Confucian political order was being established. Although Nammyeong Jo Sik did not enter political reality, he did not turn away from realistic politics (realpolitik). He was an active reality reformer, which was evident by his four public appeals for the reform of realistic politics. Nammyeong claimed through his appeals that fundamental adaptations to circumstances, rather than temporary stopgap measures were necessary for the reform of reality. Nammyeong's principle of governing in central politics emphasized political initiatives, communication and decision making, exactness in implementation of policies, securing autonomy in self-defense, and independent diplomacy. In regional politics, he emphasized regional autonomy, the leading by example of governors, security of the livelihood of commoners, eradication of corruption of bureaucrats, and communication among the ranks. Nammyeong's principle of governing transcends time as it still carries importance today. Nammyeong's principle of governing can be divided into the local politics and central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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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이후 숭실의 시인들

        우대식(Woo, Dae Sik), 엄경희(토론자)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09 한국문학과 예술 Vol.3 No.-

        숭실의 문학적 흔적은 초기 한국 현대문학사의 근간과 맞먹는 화려한 것이었다. 지난날 숭실의 문학은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당대로서는 최전방의 문학 행위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이 글은 80년 이후 숭실 출신 시인들의 시문학을 살펴보았다. 강형철, 이은봉, 박남희, 정우영, 신종호, 박남희, 원구식, 우대식, 김선아 등의 시인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작의 현장에서 생각해 볼 다른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너무 왜소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앞에 언급한 시인들 이후에는 그 맥락이 거의 끊어졌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나마 문창과의 김선아 시인이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실같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음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더 많은 후배들이 시의 현장으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외적인 문제로는 김현승 문학상 제정이 현안의 과제라고 본다. 빨리 이루어져 창작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본교는 국문과와 문창과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대학이다. 우수한 입지적 조건이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늘날 대학 현장에 계신 선생님들과 숭실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문인들에 공통으로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숭실의 인문과 문학의 전통에 르네상스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The fruits the Soongsil literary circle bore were as good as those of the early stage of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literature. Needless to add, the Soongsil literary circle, whose works count among the classics now, was at the forefront in those days. Not only has this writing dealt with the literary pieces of the poets the Soongsil circle has produced since the 1980's, but it has also found the poets actively wielding the pen: Kang Heong Cheol, Yi Eun Bong, Pak Nam Hui, Won Ku-sik, Jeong Woo Yeong, Shin Jong Ho, Woo Dae Sik, Kim Seon A, etc. In the field of creative literature, nevertheless, it is difficult to say that will suffice. The problem is that the successive literary mother lode still has not been found since such poets. Fortunately Kim Seon A, who was chosen as prizewinner by Contemporary Literature, is mining her way for a vein of literature. Many successors are required to join in the mining, shouldering their pens. Another challenge to settle is to establish a literary award in honor of Kim Heon Seung without delay and revitalize creative literature. Soongsil University is one of the few universities in Seoul with a course of Korean literature and creative writing alike. For such a favorable geographical situation to lead to creating a natural atmosphere, the staff of Sungsil unversity should collaborate, the writers from Sungsil university included. It is hoped that the period will soon come when the literary tradition of Sungsil University is resurr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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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담 정시한의 「사칠변증(四七辨證)」에 관한 연구

        서근식 ( Seo Geun-sik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8 한국 철학논집 Vol.0 No.59

        정시한은 72세에 「사칠변증」을 완성하고 이후에 제자 이식과 인물성동이논변을 벌인다. 정시한의 입장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었고 이식은 인물 성동론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인물성동이논변은 잊혀지고 「사칠변증」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대립점에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칠변증」을 완성하게 되는 데에는 이현일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이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생각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라는 ‘혼륜(渾淪)의 입장'이었고, 이황은 사단과 칠정은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분개(分開)의 입장'이었다. 정시한은 분개의 입장에서 혼륜의 입장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다. 「사칠변증」을 통해 정시한은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였는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정시한이 제자 이식과 벌였던 인물성동이논변을 잊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재 정시한의 「사칠변증」에서 이이를 비판한 사실은 알지만 정시한이 인물성동이논변을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논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칠변증」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시한이 희망했던 희망하지 않았던 것과 상관없이 정시한 이후에 사단칠정논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익과 신후담, 정약용에게까지 「사칠변증」이 영향을 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Jeong Si-Han(丁時翰) completed “Siqibianzheng”(「四七辨證」) at the age of 72, and later had the argument over Runwuxingtongyilunzheng(人物性同異論爭) with his disciple, Lee Sik(李栻). Jeong Si-Han(丁時翰) had the position of Runwuxingyilun(人物性異論) and Lee Sik(李栻) Runwuxingtonglun(人物性同論). Yet, the argument over Runwuxingtongyilunzheng(人物性同異論爭) had been forgotten and “Siqibianzheng”(「四七辨證」) could be acknowledged because Toegye school(退溪學派) and Yulgok school(栗谷學派) were conflicting and criticizing each other's stance at that time. It seems like Lee Hyeon-Il(李玄逸)'s “Liqulishilunsiduanqiqingshubian”(「栗谷李 氏論四端七情書辨」)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completion of “Siqibianzheng” (「四七辨證」). Lee Yi(李珥)'s thought of Siduan(四端) and Qiqing(七情) was ‘the position of Hunlun(渾淪)' that ‘Qiqing(七情) includes Siduan(四端)', and Lee Hwang(李滉) had the ‘position of Fenkai(分開)' that Siduan(四端) and Qiqing(七 情) should be interpreted differently. Jeong Si-Han(丁時翰) criticized the stance of Hunlun(渾淪) from the position of Fenkai(分開). What did Jeong Si-Han(丁時翰) try to pursue through “Siqibianzheng”(「四七 辨證」)? This fact tends to make us forget the controversy over Runwuxingtongyilunzheng(人物性同異論爭) between Jeong Si-Han(丁時翰) and disciple Lee Sik(李栻). Now we know the fact that Jeong Si-Han(丁時翰) criticized Lee Yi(李珥) in “Siqibianzheng”(「四七辨證」), but don't care much about the fact that Jeong Si-Han(丁時翰) caused the controversy over Runwuxingtongyilun(人物性同異論). Why “Siqibianzheng”(「四七辨證」) has remained in our memory even though it was an important one? It might be because “Siqibianzheng”(「四七辨證」) had an impact on Lee Sik(李栻), Shin Hu-Dam(愼後聃), and even Jeong Yak-Yong(丁若鏞) in the process of summarizing the arguments over Siduanqiqinglunzheng(四端七情論爭) since Jeong Si-Han(丁時翰) regardless of whether Jeong Si-Han(丁時翰) had hoped it or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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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공화국 스포츠-체육 정책 연구사의 비판적 검토

        임식 ( Sik Lim ), 허진석 ( Jin Seok Huh ) 한국스포츠엔터테인먼트법학회 2009 스포츠와 법 Vol.12 No.1

        한국 스포츠-체육 정책사에서 제3공화국 시기는 근대 스포츠-체육의 역사적 기원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드높인 한국 스포츠-체육의 위상은 제3공화국 스포츠-체육의 인적 물적 인프라의 구축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스포츠-체육 정책의 기원을 확인하고, 체육의 역할과 이를 주도한 국가의 스포츠-체육 정책이 어떤 점에 주력하고자 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제3공화국 스포츠-체육 정책사에 대한 단편적인 논의는 적지 않지만 그 수준은 대단히 미흡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권력구조 내지 지배 방식에 유의하면서 권력의 메커니즘 안에서 스포츠-체육 정책이 어떻게 수립되고 시행되는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본격적이고 심층적인 논의는 매우 빈곤하며 또한 기존에 논의된 내용도 매우 불충분하다. `제3공화국의 스포츠-체육 정책`에 관한 기존의 논의는 단편적이거나, 아니면 시대별 스포츠-체육 정책에 대한 연구의 개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또한 체육교육 정책과 관련한 기존의 논의는 학교체육이라는 특정의 작은 부분이나 남북 체육교류라는 정치적 프레임, 또는 각개 종목의 활동이라는 한정된 논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제3공화국이 지향한 스포츠-체육 정책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적인 현실과 관련지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스포츠가 국가에 의해 동원되는 국위선양의 수단이라는 측면과 국민 통합에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근대국가의 스포츠-체육 정책의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에서는 스포츠-체육의 국내외적 기능, 스포츠-체육 정책의 특징과 방향, 스포츠-체육 담당자의 역할에 대한 세 가지의 접근방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은 정부의 직, 간접적인 주도하에 엘리트 위주의 스포츠-체육 정책을 통해 국위 선양 및 국가 이미지 제고, 체제의 우월성 증명이라는 정권적ㆍ전략적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스포츠 인프라의 확장과 스포츠 과학화에 일정 부분 성공하면서 한국 스포츠의 국제대회 입상이라는 결과를 얻기에 이른다. 또한 제3공화국 시기는 민간체육-참여스포츠 분야에서 학교체육과 직장체육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제3공화국 스포츠-체육 정책은 정치 의존적 스포츠의 부정적 유산을 낳았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제3공화국 시대에는 국민의 신체능력 향상을 위한 정책이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신체능력 향상 행위가 `애국`논리로 흐르면서 국민이 국제적인 경기대회에 출전하는 대표선수와 자신들을 동일시하고, 그 형식과 내용에 몰입해 버리는 현상을 낳았다. 제3공화국 시대에 시행된 스포츠-체육 정책과 함께 구축된 스포츠-체육 제도는 동서 냉전 구도 하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는 목적에 그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는 국가 주도 엘리트 체육의 존립 근거이자 기반이 되었고 국위 선양과 국력의 확인이라는 긍정적인 전통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 역할은 대한체육회장으로 재임했고 훗날 문교장관을 역임한 소강 민관식에게 부여되었다. 그의 역할은 박정희의 전권을 위임받는 방식이었고 열악한 조건에서 스포츠 인프라의 인적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주요 성과를 가시화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제3공화국의 스포츠-체육 정책은 국내외적인 조건, 정책의 특성과 방향, 개인의 역할에 주목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In the annals of Korean sports policies, the Third Republic of Korea is an epochal period for the modern sport. The 1988 Seoul Summer Olympics and the 2002 FIFA World Cup helped raise Korea`s profile in the international sporting community. And it was largely thanks to human and material sport infrastructure established during the Third Republic that Korea was able to host those major events. It behooves us, then, that we trace the roots of Korean sports policies, the role of sports, and what the national sports policies focused on during this period. While there have been several studies on the history of sports policies during the Third Republic, their quality has left much to be desired. In particular, in-depth analysis on how sports policies were set up and carried out within the framework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and his authoritarian rule has been extremely scarce. And discussions that do exist on this issue are quite insufficient. Reports on the sports policy in the Third Republic have either been one-dimensional or have been a generic part of a broader study on sports policies in different eras. In addition, studies on physical education policies have been confined to phys-ed classes at school, to inter-Korean sporting exchanges and to activities in individual sports. Studies on the sports policies that the Third Republic pursued must take into account both domestic and international factors. Sports have been the source of national pride and have been an effective tool in galvanizing the people. In investigating the history of sports policies in a modern nation, we have to consider three approaches: sports` functions in domestic and international settings; sports policies` characteristics and direction; and the role of individuals in charge of sports policies. The Third Republic under President Park`s leadership attempted to realize its governmental and strategical goals--raising the national profile and image and proving the superiority of the current system-through elitist sports policies. In this process, the government succeeded, at least partially, in expanding sports infrastructure and in applying science to sports, all of which led to Korea`s triumphs at international competitions. The Third Republic also laid foundation for development of sports at school and at work. On the other hand, the Third Republic`s sports policies may be held responsible for giving way to the politically-dependent sport. During this regime, policies designed to improve physical conditions of the people were considered the duty of the state, and getting into better shape an act of patriotism on the people`s part. As a result, the people equated themselves with athletes representing the nation at global competitions, and grew obsessed with improving their physical conditioning, and with the idea that better physical shape and better performance at international events meant patriotism. The sports system, established along with the sports policies in the Third Republic, was mainly focused on promoting the national image amid the Cold War and the sense of unity and camaraderie among the people. This became the basis of the nation-led elitist sport and contributed to the positive traditions-improving the national profile and confirming the national strength. And the role of leading these efforts fell to Min Gwan-sik, the chairman of the Korea Sports Council who would later serve as the Minister of Education. With the full blessing of President Park, Min was successful in setting up human and material bases for sports infrastructure despite unfavorable circumstances. As such, discussions on sports polices during the Third Republic must take into account internal and external factors, policies` nature and directions and roles of individuals.

      • VoD streaming synchronization mechanism with multiple users for service continuity

        Yoon-Sik,Yoo,Jung-Sik,Sung,Young-Sik,Chung,Eui-Hyun,Paik IEEE 2011 IEEE TRANSACTIONS ON CONSUMER ELECTRONICS - Vol.57 No.1

        <P>In this paper, we propose multiple users-based streaming service synchronization mechanism for streaming delivery and synchronization in wire-wireless service environment and analyze the available network performance. Current structure of streaming service for multiple users is not designed to be suitable for the purpose of service continuity. So, multiple users cannot be provided with seamless media experience in wire-wireless service environment. Extending the concept from one user to multiple users, we identify the possibility of service continuity. We introduce the concept of streaming service synchronization, and implement VoD streaming service using proposed synchronized mechanism, and then analyze the available network performance. Finally we discuss the feasibility and practicality in aspect of service deployme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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