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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저 조익의 경학사상에 나타난 수양관 -논어천설을 중심으로-

        조정은(Jo, Jungeun)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8 泰東古典硏究 Vol.40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조익의 수양론에서 두드러지는 관점은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익의 수양은 크게 경(敬) 과 경술(經術)로 나뉘는데, 둘 모두에서 이러한 관점이 드러난다. 우선 존양과 성찰로 구성되는 경은 표면적으로는 존양이 중시되지만 내 외면을 아우르는 성찰을 통해 존양을 이룬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성찰이 중시된다. 이때 성찰은 사욕으로 인한 잘못을 경계하는 성격이 짙어서 실천적 맥락이 강하다. 경술이 앎과 행위를 아우르며 그 최종 목표가 행위에 놓인다는 점에서도 실천적 맥락을 지적할 수 있다. 행위에 관한 수양이 경술의 연장선상에서 다뤄지므로 행위 규범으로서 예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대신 사욕 제거를 통해 다다르게 될 최종 상태인 만물의 마땅한 위치를 예로 제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천을 강조하는 조익의 수양관은 논어에서 경을 내적 태도에 국한시켜 해석하는 주희와 달리 외적 태도로까지 확장시키는 차이로 이어진다. 인간으로서 할 바를 다 한 후 학문을 익힐 것을 말하는 논어 1.6을 해석하면서도 조익은 실천만으로는 안 되고 학문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에 무게를 두는 주희를 따르는 한편, 학문보다 실천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실천 지향성을 보여 준다.이 외 사욕 경계와 만물이 지닌 마땅한 법칙으로서 예를 보는 관점을 부각시킨다. 실천을 강조 하는 수양론인 만큼 양명학에 경도된 듯한 해석도 있지만 주자학을 벗어났다고 평가하기보다는 주자학의 틀 안에서 실천이라는 자신의 주안점을 살리는 수양론을 구축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조익은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은 가운데 양명학이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한 16세기 말 17세기 초 조선의 사상적 토양을 바탕으로 주자학 체계 내에서 실천을 강조한 수양관을 경학사상에 투영해 나간 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Jo Ik's prominent view on self-cultivation is to emphasize practice. Jo Ik's theory of self-cultivation is divided into two main areas: the execution of jing 敬 and the study of the classics (jingshu 經術), both of which emphasize practice. In executing jing which consists of cunyang 存養 and xingca 省察, what gets first priority is cunyang; however, in fact it is xingca that assumes real significance in that cunyang is achieved through xingca which encompasses inner and outer cultivation. In Jo Ik's theory, xingcha has strong practical connotations in that its meaning is closer to being alert to wrongful behaviors caused by selfish desire. This practical connotation can also be pointed out in the study of the classics: although this study pursues improvement both in knowledge and behavior, its ultimate goal is placed on behavior. Since the improvement of behavior is promoted in the study of the classics, the role of li 禮 as a norm of conduct is paid less attention. Instead, Jo Ik tends to present li as the proper positions of all things, which is the final state that will be achieved by eliminating selfish desire. Jo Ik's emphasis on practice in self-cultivation renders a differentiated interpretation of jing in the Lunyu from Zhu Xi's: Zhu Xi mostly interprets jing as an internal attitude whereas Jo Ik shows a stronger tendency to expand its meaning to an outer attitude. When interpreting Lunyu 1.6, which says study comes after fulfilling one's everyday duties as a human being, Jo Ik, on the one hand, follows Zhi Xi's interpretation that puts emphasis on study: everyday duties are not properly carried out if not supported by study. On the other hand, Jo Ik stresses practice by indicating that there is a case in which practice is more urgent than study. Besides, Jo Ik emphasizes being wary of selfish desire and sees li as the proper principles of all things. Since Jo Ik emphasizes practice, some of his interpretations are similar to Wang Yangming's idea. However, we may reasonably place Jo Ik's theory within Zhu Xi's philosophical framework; Jo Ik explored Confucian classics reflecting his viewpoint on moral cultivation which puts special emphasis on practice, utilizing the academic soil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lat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when Wang Yangming's doctrine began to exert influence under a mature understanding of Zhu Xi's doctrine.

      • KCI등재

        가투(歌鬪)의 시조 수용 양상과 그 의미

        조유영(Jo Yu-Young) 한국시조학회 2009 時調學論叢 Vol.31 No.-

        가투(歌鬪)는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져 널리 성행했던 놀이도구이다. 가투가 만들어진 1920년대는 근대화를 위한 선진 문물의 수용이 가속화된 시기이며, 3.1운동에 의해 새로운 민족 담론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또한 문단에서는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문학 장르로서 시조가 자리 매김하던 시기였다. 우리의 전통시가인 시조는 이러한 다양한 배경 속에서 가투에 수용되었다. 1922년 불선사본 〈가투〉, 1927년 신민사본 〈정선 화가투〉, 1935년 한성도서본 〈시조노리〉의 동일 시조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 신민시본 〈정선 화가투〉와 한성도서본 〈시조노리〉는 시조 수용에 있어 어느 정도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투의 시조 수용에 있어 시조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국민문학파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또한 각 가투의 시조 수용에 있어 각 제작사들은 대중의 기호를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 각 가투에 수용된 시조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후대에 만들어진 가투일수록 애정을 주제로 한 시조가 강호를 주제로 한 시조보다 더욱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1920년대 이후 가투놀이의 연행 주체가 부녀자층으로 변화하면서 그들의 기호가 반영된 결과이다. 또한 가투에는 망국에 대한 회고나 나라에 대한 근심, 왕에 대한 충성심을 주제로 한 일군의 시조 작품들이 일정한 비율로 수용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당대인들의 고민이 반영된 것이다. 시조를 단지 시조창의 사설로만 인식하고 있던 대중들에게 가투는 시조를 문학의 한 장르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이러한 가투의 역할은 우리의 시가사 속에서 정당하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The Ga-Too was created and became well-known as a game in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The 1920's was the period that advanced cultures, and things from many other countries were accepted rapidly for modernization. There also was the 3.1 movement which contributed to making lots of discussions about people. In addition, there was the Movement for the Resurrection of Si-Jo that contributed to Si-Jo becoming a typical genre of literature. Therefore one of our traditional forms of poetry, Si-Jo, had been accepted into the Ga-Too with these many backgrounds. Looking into the aspects of this acceptance by Bool-Sun-Sa-Bon 〈The Ga-Too〉 in 1922, Shin-Min-Sa-Bon 〈Jeong-Sun-Hwa-Ga-Too〉 in 1927, Han-Seong-Do-Seo-Bon 〈Si-Jo-No-Ri〉 in 1935, Shin-Min-Sa-Bon 〈Jeong-Sun-Hwa-Ga-Too〉 and Han-Seong-Do-Seo-Bon 〈Si-Jo-No-Ri〉, they all have such similar opinions as they accepted the same Si-Jo. Reasons being that the school of people which contributed to the movement for the Resurrection of Si-Jo influenced the acceptance of Si-Jo in the Ga-Too. And publishers reflected people's tastes when they chose selections of Si-Jo. Classifying all Si-Jos in the Ga-Too according to titles, there are more Si-Jos about love than those about nature, especially among the recent Ga-Too as the Ga-Too players had been changed to women and their tastes were reflected when the Ga-Too accepted Si-Jo. There are numerous Si-Jos about the recollection of colonialization, worries about the country and loyalty to kings in Ga-Too. These are results of reflection of the people's agony about colonialization. Originally, people considered Si-Jo as an explanation of the Si-Jo-Chang, but the Ga-Too had made Si-Jo into one of the most important genres. Consequently, the Ga-Too should be evaluated correctly throughout the History of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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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의 외국어 번역에 관한 시론

        조태성(Jo Tae-Seong) 한국시조학회 2009 時調學論叢 Vol.31 No.-

        본고에서는 시조의 번역에 있어 의미화의 직접적 매개라고 할 수 있는 시적 감성의 정확한 전달에 필요한 번역 방식을 논구하고자 하였다. 이에는 시조의 형식적 특성과 그것 안에 함의된 감성 구조를 이해하였다는 전제 아래, 전체 율격을 고려한 시어의 배치, 套語의 활용, 장 배치의 환원 동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율격을 고려한 시어의 배치는 시조가 가진 3ㆍ4조 내지 4ㆍ4조의 4음보라는 율격적 격식을 반영하고자 함을 말한다. 그리고 투어의 활용은 종장 첫 음보의 번역에 있어서의 활용을 의미하며, 장 배치의 환원은 의미 전달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장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시조를 번역하는 데 있어 그 형식적 요소를 규제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한 듯 보인다. 이러한 규제가 특히 현대시조를 창작하고 비평하는 한 가지 기준이 된다면 번역은 장차 더욱 쉬운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조의 번역을 제안하면서 몇 가지 전제와 요건을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다. 첫째, 시조의 종장 첫 음보에는 그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의미상의 구조까지도 염두에 둔 용어가 활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투어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시조의 내적 구조를 의미의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1개의 시조는 많게는 6개, 적어도 3개의 의미 단락을 구성해야 시조의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셋째, 시조를 시조답게 번역하기 위해서 -번역된 작품이 시조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가곡창의 노랫말 배열 방식이었던 5행의 방식을 차용해야 할 것이다. 5행의 배열 방식은 시조의 형식적, 의미적 가치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형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I attempted to translate Si-jo into a foreign language on this essay. In this process, it is seemed to clear that we regulate the formal element in translating of Si-jo. If this regulation is to be a standard criticism on the modern Si-jo, the translation will be an easy work. According to this point, I propose this translation as follows : First, we must use a term that is considered the construction of meaning besides to its type in the first tribrach on the last of the 3 verses of a Si-jo. For this work, it is desirable for our to develope and practical use the regulated words[套語]. Second, we have to watch the intrinsic construction of Si-jo. We must compose six meaning frame or at least three meaning when we write Si-jo works. So that, Si-jo must to be recognized its aesthetic values. Third, we must arrange the verse of Si-jo as the form of 5 lines for translating, like a traditional Si-io. The form of 5 arranged lines was the form of Gagok-chang[歌曲唱].

      • KCI등재후보SCOPUS

        밤나무 교잡종 과실의 질적 특성

        이욱(Uk Lee), 김만조(Mahn-Jo Kim), 김선창(Sun-Chang Kim), 이문호(Moon-Ho Lee), 장용석(Yong-Seok Jang) 한국원예학회 2005 원예과학기술지 Vol.23 No.1

        본 연구는 밤나무 교잡종 과실의 조합별 및 개체별 질적특성을 조사함으로써 신품종 육성의 기초 자료뿐만 아니라 품종검정 기준설정의 기초자료로 활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과실모양은 11 조합의 많은 개체에서 타원형(85.30%)을 나타냈으며 K×R 등 5조합에서 삼각형(3.78%), R×K 등 8조합에서 원형(5.46%), R×O 등 3조합에서 장타원형(5.46%)으로 각각 관찰되었다. 과피색은 모든 조합에서 암갈색과 적갈색이 각각 49.16%와 38.24%로 관찰되었으며 과피털은 K×R과 R×K만이 과피 전체에서 각각 1개체씩 관찰되었다. 과피털의 밀도는 대부분의 조합에서 92.86%가 중 이상이었으며 좌면의 크기는 E×O, E×R, K×O에서만 중 이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과실의 광택은 K×O조합에서만 약인 개체가 출현하였으며 열과형태는 모든 조합에서 3가지 형태중 2가지 이상의 형태가 각각 혼재되어 있었다. 양적형질이 우수한 8개체 중 RO-22, RO-25 등 2개체만이 과실모양과 과피색이 각각 장타원형과 암갈색을 나타내었으며 OK-2 제외한 나머지 5개체는 각각 타원형과 적갈색으로 관찰되었다. 과피털의 위치는 OK-2 제외한 모든 개체는 과정부였으며 과피털의 밀도는 IO-15 제외한 모든 개체에서 밀하게 분포하였다. 좌면의 크기는 JO-7과 RO-25 개체가 가장 작았으며 광택은 K×O의 1개체를 제외한 모든 개체에서 중 이상으로 우수하였다. 열과형태는 JO-7과 JO-12, IO-15, OK-15 개체에서 각각 과정부 열과와 주두부 열과 등 각각 단일 형태를 나타낸 반면, OK-2 등 4개체는 과정부 열과와 측면부 열과가 혼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피박피성을 조사한 결과, OK-2, OK- 4, OK-15 등 3개체는 내피박피율이 20% 내외로 불량한 반면 RO-25, JO-12 등 2개체의 내피박 피율이 각각 78.6%, 72.4%로 매우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This study was aimed to applicate as the basic data for the presentation of International Union for the Protection of New Varieties of Plants (UPOV) guideline and for breeding new cultivars through qualitative characteristics of nut in chestnut hybrids. In nut shape, oval type, 85.30%, could be observed in all combinations, and triangle type, 3.78%, in K×R, K×O, E×R, I×R, J×O, and oblong type, 5.46%, in R×O, I×O, E×O, I×R, respectively. Both dark and reddish brown, 49.16% and 38.24%, in nut color were observed in all combinations, and nut pericarp hairs in only K×R, R×K could be observed in whole part. The density of its hair showed above middle rank (92.86%) in most of combinations, and the size of hilum area showed above middle rank in only E×O, K×O and E×R. Ten combinations except K×O showed a good condition in nut luster, and two or three types of three split type could be observed in all combinations, simultaneously. Superior individuals, RO-22 and RO-25, showed oblong and dark brown, but others except OK-2 showed oval and reddish brown in nut shape and nut color, respectively. In position of nut pericarp hair, only OK-2 showed stigma part, but all of superior individuals except IO-15 showed thickness in its density. Only JO-7 and RO-25 were smaller than others in size of hilum area, and JO-7, OK-4, OK-15, RO-22 and RO-25 had nuts with excellent luster. Most of individuals had nuts with two or three types in type of nut split, and JO-7, JO-12, IO-15 and OK-15 showed only single type. In peeling rate, OK-2, OK-4 and OK-15 showed around 20% while RO-25 and JO-12 showed 78.6% and 72.4% being considered as superior individuals for roasted chestnuts.

      • KCI등재후보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조희룡(趙熙龍) 화론(畵論)에 나타난 도가철학적(道家哲學的) 요소(要素)

        조민환 ( Min Hwan Jo )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조선조 많은 문인화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사상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다양하게 그리고 자신에 찬 자신의 예술창작에 임한 조희룡의 예술정신을 통해 변화된 조선조 후기 회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유가적 사유를 예술정신에 담아내면서도 특히 장자철학의 많은 영향을 받은 조희룡은 비록 中人이었지만 주자학 진리일변도에서 벗어난 이단관과 진리인식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어 중인들의 시대인식은 물론 학적 수준과 내용을 보여준다. 이에 본고는 장자철학이 조희룡의 회화론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었는지를 『장자』 이해 의 기본틀로서의 『장자』 郭象本 숭상 태도, 博物學적 사유와 異端에 대한 긍정적 인식, 예술창작에서의 天倪와 性靈 강조, 無法과 나를 강조하는 예술정신 전개, 奇 숭상의 예술정신을 드러냄 등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조희룡은 물론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론에 대한 이론 즉 기존의 인품을 강조하는 畵如其人이나 혹은 比德의 사유와 관련된 전통 문인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이한 격을 담아낼 것을 주장하는 조희룡은 회화창작에서는 대담하게 거칠 것 없이 누구보다도 집단에 매몰되지 않는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나, 창신적인 나, 자신만의 진실한 성령(性靈)을 담아낼 것을 강조한다. 이런 사유의 바탕에는 유가사상 아닌 집단에 매몰되지 않는 개인을 강조하는, 그리고 변화를 강조하는 노장사상이 담겨 있다. 특히 조희룡이 기이한 격을 담아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나의 법일 따름이다"라든지 "이 법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사유에는 그 사유의 바탕에는 노장의 무위자연적 예술창작과 道法自然의 예술정신이 깔려 있다. 이런 대담한 예술정신은 불가도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나타난다. 조희룡의 이상과 같은 사유에는 이것은 미의식이 기존의 雅를 숭상하는 것에서부터 俗을 아울러 존중하는 예술로, 절제된 溫柔敦厚한 中和美를 숭상하던 것에서부터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음이 담겨 있다. 이것은 공자가 부정적으로 말한 怪力亂神을 조희룡은 과감하게 자신의 예술이론과 창작에 적용함을 의미한다. 이 논문을 통해 조선조에 노장철학이 철학 이외의 다른 방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고, 이런 점은 19세기를 살아갔던 지식인들이 변화된 시대에 어떤 사유와 그 사유에 바탕한 예술정신이 어떤 모습으로 대처하고 표현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手藝를 강조하고 전통적인 문인화론인 胸有成竹론을 과감하게 부정하는 식의 발언에서는 기존의 중국문인화론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담아내고자 한 한국문인화의 독창적 사유틀의 한 측면도 확인할 수도 있다. Jo Hee-ryong (1789~1866) is representative Literary Painter who came from the Middle class at the end of Joseon Dynasty. At the time, epigraphy and biblographical study of Chinese classics under the influence of the Qing Dynasty culture, and cultual participation of those in the middle class and pratical science began activated. Also on the painting history Namjonghwa, Chinese painting of Southern school that had been gradually accepted was being settled. In particular, the times present difference from other times in view of that Muninhwa, the literary painting. The current study aims to find out artistic ideology and aesthetic view from works of Jo Hee-ryong who focused on popular common beauty at the end of the Jeoseon Dynasty. For the study purposes, the study was conducted into two categories. One is analyzing his works aesthetically. And other is to examine how his aesthetic view was realized the theory of literary painting in Jo Hee-ryong and taoistic element. He try to express taoistic element in his painting work and painting artistic thories especilly aeshhetic oddity and creativity. Jo Hee-ryong`s those attempts means that he broke from the frame of tradition that had lasted several hundred years, and became a motive to have our unique painting theory. Therefore, it is considered that reevaluation of Jo Hee-ryong who enjoyed various artistic worlds with his unique creativity should be condu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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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6년의 해로 사행과 이만영(李晩榮)의 『숭정병자조천록(崇禎丙子朝天錄)』

        조창록 ( Chang Roc Jo )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人文科學 Vol.0 No.47

        1636년은 조선이 淸의 침공을 받아 항복한, 이른바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해이다. 또 중국에서는 산해관 인근에서 明ㆍ淸 간의 交戰이 있었다. 李晩映은 1636년에서 1637년 사이 이 역사적 사건들을 사행길에서 경험하였다. 그때의 기록이 『숭정병자조천록』이다. 이 사행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청이 요동 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해로를 통해 북경을 다녀온 것이며, 둘째 조선이 청에게 항복함으로써 명나라에 보낸 마지막 사행이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이 사행의 기록으로 金堉이 쓴 『朝京日錄』과 『朝天錄』이 있다. 본고는 이 점을 감안하면서 『숭정병자조천록』에 보이는 몇 가지 의미있는 기록들을 고찰해본 것이다. 그 내용은 첫째, 해로 사행에 대한 당대인의 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이 해로에는 사행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고 대다수의 관리들이 사행에 선발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 반면 해로 무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인 자본을 밑천으로 사신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사행에 참여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조경일록』을 비롯한 다른 자료와는 별도로 각종 정보와 역사적 사건들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明·淸 간의 교전 상황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외교활동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인데, 본고는 특히 이러한 점들에 주목하였다. 1636 was the year of Byeongㆍjaㆍhoㆍran(丙子胡亂) by which Qing invaded Joseon and Joseon surrendered to Qing. Battle between Ming and Qing occurred near Shanㆍhaiㆍguan(山海關) also in 1636. Lee Man Yeong(李晩榮) had experienced these historical events during his envoy trip from 1636 to 1637. The record of that envoy trip is 『Sungㆍjeongㆍbyeongㆍjaㆍjoㆍcheonㆍrok(崇禎丙子朝天錄)』. Two important characteristics of the envoy trip are as follows: first, it was a seaway envoy trip to Beijing under Qing`s control of East Liao(遼東) region. Second, it became the last envoy trip to Ming due to Joseon`s surrender to Qing. Now, there are two records of this envoy trip; 『Joㆍgyeongㆍilㆍrok(朝京日錄)』 and 『Joㆍcheonㆍrok(朝天錄)』 written by Kim Yuk(金堉). Considering these, this article examined some significant contents contained in 『Sungㆍjeongㆍbyeongㆍjaㆍjoㆍcheonㆍrok』. First, this article examined the selection of delegation and its trip route. It was found that envoy ships had often sunk in the route and most officials evaded being selected for the envoy while some people tried to participate in the envoy, even giving some bribe, to get profit from the seaway trade. Second, 『Sungㆍjeongㆍbyeongㆍjaㆍjoㆍcheonㆍrok』 contains rare information and historic facts that cannot be found in other materials, such as the situations of Ming vs. Qing battle and diplomatic activities around Byeongㆍjaㆍhoㆍran. This article paid attention especially to these points. chief researcher of Daedong Institude in Sungkyunkwa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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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 조선불교유학생들의 활동

        조아담(A Dam Jo)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8 佛敎學報 Vol.0 No.48

        1910년대부터 시작된 불교계의 일본유학은 1920년대 이르러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신지식을 수용하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불교계의 의식과 더불어 도성 출입 금지 해제 이후 확산된 일본불교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인의 자주성을 말살하고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흡수시키려는 일제의 교육정책의 영향도 있었다.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는 이회광에 의한 한국불교의 임제종 연합기도를 저지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1년 후 명칭개정을 통해 해체되었다. 이후 1921년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가 결성되어 국내 불교청년운동과 연계하고 국내불교계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들은 순회강연을 통해 신지식의 보급과 계몽에 앞장섰으며, 기관지인 금강저를 발간하고 `원효대성찬앙회` 및 `삼장학회` 등을 통한 불교신앙의 대중화를 도모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그러한 열정을 표면화했다. 1931년 국내 단체인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한데 이어 전국에 산재된 각 불교청년회가 스스로 그 조직을 해체하고 총동맹의 일원인 동맹체로 전환하였다. 그러한 대세에 합류하여 재일본조선불교청년회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지부동맹인 `동경동맹`으로 변경되었다. 동경동맹은 정기대회, 신입회원 환영 및 졸업회원 송별회를 개최하고, 연구모임 `동맹연구회` 활동, 기관지 금강저 발간을 지속하는 등 자체적 활동과 더불어 국내 불교계와의 긴밀한 유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1930년 초반부터 등장한 종헌실행문제, 사법개정운동, 중앙불전 폐지 문제 등 중요 현안에 대해 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 총동맹 내분 등 불교청년운동 부진의 영향으로 1934년 동경동맹은 해체되었다. 한편, 1930년에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 역시 동경에 그 지부를 두고 있었다. 만당의 동경지부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불교청년운동을 하던 김법린에 의해 1932년경에 조직되었다. 그 당원은 김법린, 허영호, 장도환, 최범술 등으로 당시 국내외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유학 이전부터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결성된 `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는 이전의 불교유학생 단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국내 불교계의 후원으로 회관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부분 승려의 신분이었던 일본 유학생들은 귀국 후 환속하거나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결혼을 하는 등, 이른 바 승려의 대처식육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유학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앙교무원의 간부직이나 주지를 맡으면서 일제의 정책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학중 불교를 전공하고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드러낸 이들은 강원이나 혜화전문·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여 해방 후까지도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쳤다. The first Korean Buddhist students studying abroad are known to be Kim Beop-ryong and Kim Seung-beop, who started their studies in 1910s. The number of Korean Buddhist students in Japan increased in 1920s and it seems to be caused by an awakening to the need of learning `new knowledge` in stimulating the Korean Buddhism and a growing favor to the Japanese Buddhism after the lifting of entrance ban to the monks. The Japanese intriguing policy, to abolish independent spirit of Korean people and to merge Korean Buddhism into Japanese Buddhism, also contributed to the increase of the Korean Buddhist students in Japan. The association of Jo-seon Buddhist Students in Japan, founded in 1920, took part in activities like the prevention of trying to unite the order Korean order to Rinzai, the Korean Buddhists led by Yi Hwoi-guang. However, it was dissolved as it changed its name. The Jo-seo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n Japan was founded in 1921 and showed a strong will to join with the Buddhist youth movement in Korean in order to reform the Korean Buddhism. Its passion came to take shape through various activities so it took the initiative in spreading new knowledge and in enlightening people, published its own journal, the Geumgangjeo(which means Diamond Mace) and worked for spreading Buddhism by establishing organizations like the Association in Commemoration of Great Master Wonhyo and the Association for Tipitaka Studies. In 1931, the Jo-seo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n Korea changed its name to General Association of the Jo-seon Buddhist Youth. Accordingly, each of the Buddhist youth associations, scattered over the country, dissolved its organization and became an affiliate of the General Association. Following the general trend, the Jo-seon Buddhist Youth Association in Japan became a member of the General Association, as Tokyo affiliate. The Tokyo affiliate carried its own undertakings, so it held meetings like regular assembly, welcoming and farewell parties, organized the Research Group to study Buddhist teachings and continued to publish its journal, the Geumgangjeo. It also worked for maintaining close relation with the Buddhist movements in Korea, so it actively conveyed their words when important matters became issues since the early 1930s, matters like the execution of the Constitution of the Jo-gye Order, the amendment of Temple Laws, an oppressive measure by Japanese and the abolition of the Jung-ang Buddhist College. However, the Tokyo affiliate was dissolved in 1934 due to the inactivity of the Buddhist youth movement, caused by problems like internal conflicts in the General Association. The Man-dang, a secret anti-Japanese Buddhist organization founded in 1930, had also an affiliate in Tokyo. The Tokyo affiliate of the Man-dang was organized in 1932 by Kim Beop-lin, a student who was actively taking part in the Buddhist youth movement. They played an essential role in the Buddhist youth movement and was known to be dedicated to various activities from the years before studying in Japan to the troubled times after the Liberation. The Association of the Jo-seon Buddhist Students Studying in Tokyo upheld the traditions of the early Buddhist students associations in Japan and built its own hall, supported by the Buddhists organizations in Korea. However, it showed sympathy with Japanese policy of aggression in 1940s. Most of the students, who studied in Japan, were monks and some returned to the laity after their returning to Korea, or married according to the Japanese Buddhist tradition. They were also involved in the vehement discussion on the matter of having a wife and eating meats. Many of them became the leading members of the Business Affairs of the Order or a chief monk of a temple and showed compromising attitudes with the Japanese policy. However, those monks, who distinguished themselves in Buddhist studies with outstanding academic abilities, dedicated themselves to teaching and research at monast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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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소완정유문(素玩亭遺文)』에 보이는 이서구(李書九)와 조연귀(趙衍龜)의 관계에 대한 검토

        김윤조 ( Yun Jo Kim ) 한국실학학회 2013 한국실학연구 Vol.0 No.25

        薑山李書九의 저작은 『薑山全書』로 묶였지만, 이후에도 『綠天?爲』, 『?齋詩拾遺』, 그리고 특별히 강산의 간찰이 많이 수록된 『해동명가척독』 등의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본고는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된 강산의 또 하나의 새로운 저작인 『素玩亭遺文』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물이다. 특이하게도 이 책은 강산이 敬菴趙衍龜에게 보낸 편지와 시문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경암은 병계 윤봉구의 제자로, 이서구와 그 아우들을 가르쳤다. 강산이 趙衍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젊은 시기 그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古文을 대하는 입장에서 두 사람은 대립적이었고, 字學에 대한이서구의 발언을 보다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자료였다. 두 가지는 이서구가 이덕무와 박지원 등 북학파 지식인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갖게 된 입장을 잘보여주는 것이었다. 趙衍龜는 조정에 선 관료 학자가 아니고 경제적으로 나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편도 못되었다. 그러나 지금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학자였다. 충청도에서 주로 거주한호론 계열의 학자인 그가 이덕무와 이서구 등 북학파 학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The writings of Lee Seo-gu(1754~1825) were published in 『Gangsan Jeonseo(薑山全書)』. However, several kinds of writing was discovered more in afterward. This report examined contents of 『Sowanjeong youmun 』 which was one new writing of Lee Seo-gu possessed at Japanese Oriental library[Toyo Bunko]. Unusually, there are poetry prose and letters that Lee Seo-gu sent to Jo Yeon-gyu(趙衍龜, 1726~?) mainly. Jo Yeon-gyu who was a puple of Yun Bong-gu(尹鳳九, 1683∼1768) taught Lee Seo-gu and his younger brothers. I can confirm a viewpoint for his study and literature in the letter which Lee Seo-gu sent to Jo Yeon-gyu at his young time. Two people were confrontational at the point of view for ancient writings. It is a document to know clearly about remarks of Lee Seo-gu for graphonomy at the same time. Jo Yeon-gyu did not become high in social and economical position and not a bureaucratic scholar either. However, he was a known scholar having many writings in Chungcheong province. It is interesting that even if he lived in Chungcheong province he made a close links with Seoul scholars such as Lee Seo-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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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又峰 趙熙龍의 梅花 理解에 관한 연구

        조민환(Jo, Min-hwan) 한국서예학회 2010 서예학연구 Vol.0 No.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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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회화사를 볼 때 신사적 차원이나 형사적 차원 등 그리는 기법에 따라 다른모습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많은 문인화가들이 매화를 하나의 화목으로 설정하고그것을 그린 수없이 뛰어난 화가들이 많다. 한국회화사에서 본다면 조희룡도 그 중에 하나를 차지한다. 하지만 조희룡은 이전의 매화를 그린 문인화가들과는 달랐다.조선조는 추사 김정희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 이전과 다른 회화 경향이 나타난다. 일종의 雅에서 俗으로 변천하는 것이 그것이다. 회화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중심에 조희룡이 있다. 흔히 19세기 신감각파를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는 조희룡은매화를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梅花百詠'을 짓고자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으로 대했다. 조희룡은 漢瓦軒題畵雜存이란 화제집을 통해 자신의 매화사랑과 그 인식을보여주고 있다. 매화는 바로 조희룡의 삶의 표상이었고 또 분신이었다. 조희룡에게서 매화는 단순한 자연에 존재하는 식물이 아니고 交情의 대상이었다. 집안에 같이먹고 자면서 함께 생을 같이 하는 권속과 같은 존재였다. 조희룡은 한시도 매화를멀리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癖으로서의 매화사랑으로 나타났고, 자신과 매화를 하나로 하는 物我一體적 사유를 보여주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문인화가들이 古雅하고 淡泊한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白梅를 그렸다면 조희룡은 감각적이면서 산뜻한 맛을 담아내는, 때로는 기이하면서도 어지러운 亂의 맛을 담고 있는 紅梅를 그렸다. 神似적 차원도 무시하지 않지만 形似적 차원의 手藝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점에서 조희룡은 이전의 매화를 그린 화가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Jo Hee-ryong is a representative literati painter and calligrapher who came from middle class at the end of the Jeseon Dynasty. The current study aims to find out artistic ideology and aesthetic view from works of Jo Hee-ryong. For the study purposes, the study was to examine how his aesthetic view was realized in apricot tree, the outcome of his aesthetic ideology. He was famous for his paintings of apricot tree. Prior to creating any of his works, he understood the physiological aspect of apricot tree starting from the speculation regarding what he was about to paint in his mind. Once he realized the physiology of apricot tree, he reached the level where he was integrated with apricot tree. From the viewpoint that painting creation is made of two sides; grace and personality, he claimed that such two sides should be unified. He understood natural objects from he standpoint of ‘comparing objects of the nature with human morality' and of personification. He understood apricot tree at ecological level and personified them which he called true gentlemen. The apricot tree painted by him showed his personality, his attitude towards life and critical thought of his days as there were. Therefore, the apricot tree painted by him were not just the objects existing in the nature. Particularly Jo Hee-ryong expressed his artistic philosophy through an artistic subject in his work. In other words, he created a high standard of literati painting art by upgrading the subject of art to formative beauty on screen. He was the person who carried out the true spirit of literati paintings with his respectable personality in his painting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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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지학(爲己之學)'에의 침잠(沈潛)과 조황(趙榥)의 <인도행(人道行)>

        조은별 ( Jo Eun-byeol )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8 어문연구(語文硏究) Vol.46 No.3

        본 논문은 19세기를 유교적 가치관이 붕괴 혹은 해체되어가는 시기로 전제한 채 작품의 진의를 억압 혹은 은폐하여 해석한 경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 19세기 사족 조황의 시조 작품 중 <인도행>의 의미를 재고해보고자 하였다. 하여 조선조 성리학이 조황과 같은 재지의 한미한 사족에게 ‘위기지학'으로서 역할 하였음을 확인하고, 이에 더해 <인도행> 서를 분석하여 <인도행> 해석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 결과 조황의 <인도행>은 치인하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위기지학에 좀 더 침잠할 것을 표명하는 작품으로, 조황이 <인도행>을 통해 자식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살 것을 전하고자 하였다고 보았다. This study started from a critical mind about premise that confucian value was collapsed or dissolved in 19th century, and aims to reveal the real intention of literary work suppressed until now. So this paper attempted to reconsider Jo Hwang's < Indohaeng >, notable example of korean poetry in 19th century. Therefore this study confirmed that Neo-Confucianism in the Joseon Dynasty performed a function as a 'Learning to become a sage' to Jo Hwang who was petty Jaejisajok in the country and analyzed epilogue of < Indohaeng >, so based on this, interpreted meaning of < Indohaeng >. And as a result, this study conformed that Sajok Jo Hwang's < Indohaeng > expressed withdrawal into 'learning to become a sage' rather than inconvenience about going into government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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