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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천주교 인식과 대응 양상

        趙志衡 ( Cho Ji-hyoung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0 No.110

        본고는 燕巖 朴趾源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이 그의 손자 瓛齋 朴珪壽에게 계승·확장되는 양상을 탐색하였다. 연암이 지닌 천주교 인식과 대응의 양상을 살피는 것은 18세기 노론 인사들의 서학-서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살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연암은 노론 핵심인 반남박씨 가문 출신으로 北學派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북학파 문인들은 일찍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燕行을 통해서 자신들의 학문적 논의를 진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북학파 문인들은 종교적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북학파 문인들과는 달리,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서 허황된 학설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암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친서학-반서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양상은 沔川郡守 재임 시기의 행적에서 잘드러난다. 이 시기 연암에게 천주교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내어 비루한 습성들을 지니게 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는,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형벌을 가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신에 수령이 지극한 정성과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어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연암은 이러한 방식을 직접실행에 옮겨, 천주교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고 배교시키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은 가문 내 후손들에게 계승·확장되었으며, 연암의 손자였던 박규수가 남긴 「闢衛新編評語」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규수는 몇 차례 진행된 국가적인 천주교 박해가 실효성이 없었음을 강변하는 한편,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 천주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연구하여 그 모순점을 비판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주력하며 천주교도를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았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은 조부 연암이 보여준 모습과 상호 참조가 된다. This paper examined the perception of the Catholic and the aspect of correspondence of Park Ji-won. In addition, it has been looked into how Park Ji-won's perception and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ere inherited and extended to his grandson Park Kyu-su. This study has its significance in examining one aspect of the Catholic and Western learning perceptions that the Noron scholars had in the 18th century. Park Ji-won was from a core family of Noron and a representative literary person of Northern Studies. The scholars of Northern studies were very interested in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and natural science, and they advanced their academic discussions through history travels to Chinese. Park Ji-won had a negative perception of the Catholic and thought it's an absurd theory. In other words, Park Ji-won was taking the position of ‘pro-Western learning, anti-the Catholic' that was positive about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but negative about Catholicism During his tenure as a Myeoncheon governor, Catholicism to Park Ji-won was recognized as a very dangerous idea that enticed foolish people to have poor habits. However, when it comes to the way of corresponding Catholicism, he raised the problems of a strong response to arrest and penalize Catholics, and instead insisted that Suryeong should be moved and taught the people with sincerity and trust. In fact, he put this in practice by himseld and made good results. Park Ji-won's perception of and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ere inherited by his grandson, Park Gyu-su. Park Gyu-su argued that the several Catholic persecutions at 『Byeokwuisinpyeongeo』 were ineffective, while he insisted that actively accepting and studying Catholic books and criticizing its inconsistency to prevent the spread of Catholicism. Also, at the time of the Byeongin Catholic Perceptions in 1866, he focused on educating the people as a Pyeongan-do governor and did not execute even a single Catholic. Such correspondence to Catholicism was similar to his grandfather, Park Ji-won.

      • 전통지승공예 ‘드레스를 입다'

        신지은(Shin Ji Eun) 아시아민족조형학회 2016 아시아민족조형학보 Vol.17 No.-

        Ji-Seung crafts(Paper string crafts) is traditional handicraft of Korea, which is to strip and twist Hanji(Korean traditional paper) to make goods such as straw mat, box of wedding gifts(Ham), bottle, basket, bag, etc. Ji-Seung crafts requires considerable time and concentration due to process in addition to weaving, which is to prepare for certain amount of raw materials by twisting Hanji string with hand. Because of the arduous process, it has been difficult to popularize Ji-Seung crafts even though it is an outstanding traditional handicrafts. On the other hand, the elaboration could also be a strength to aim for high value added products by recognizing Ji-Seung crafts as high-quality handicrafts. Dress made by Ji-Seung crafts, ‘The Life & Foam of an Indigo blue Sea' is a piece of work created by traditional Ji-Seung crafts, which was tailored by three-dimensional structure to be actually wearable. In an attempt to find proper exhibition place to maximize the visual effect when the model walks in the dress, it was decided to submit for WOW(World of WearableArt Award) Show in New Zealand. It is an international art fashion show held annually in New Zealand and it is known for lively and brilliant imagination by exhibiting wearable work piece without being limited in raw materials. In was first started in 1987 at Nelson, New Zealand and since 2005, it has been convened in Wellington, the capital of New Zealand. In WOW Show in 2006, 380 pieces were submitted from 90 nations and among them, 154 pieces were selected for the main stage. Dress made by Ji-Seung crafts, ‘The Life & Foam of an Indigo blue Sea' was awarded with the 1st prize in international competit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hare my experience to propose the possibility for young craftsmen to appear on the international stage and find the future of new traditional handicrafts.

      • KCI등재후보

        이지함(李之菡)의 걸인청(乞人廳)을 활용한 ICT 융합콘텐츠 제안

        배지혜 ( Bae Ji-hye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8 韓國思想과 文化 Vol.93 No.-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문화콘텐츠의 기획은 대중이 원하는 방향의 문화적 요구사항을 고려하고 문화콘텐츠의 지속적인 브랜드를 확보함을 전제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문화콘텐츠는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를 활용하여 다중 감각적인 융합콘텐츠로의 기획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역의 특수성 등을 고려하여 다양한 공간에서의 콘텐츠 활용과 파급효과에 대한 극대화를 위해 제작되어진다. 이지함(李之菡)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펼친 경제개혁론 및 그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걸인청의 존재로도 주로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본 논문에서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수많은 업적 중 ‘걸인청(乞人廳)'이라는 소재를 선정하였고 이를 역사적 고증과 해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대중의 문화적 요구와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의 역사문화콘텐츠로 구축하는 과정을 목표로 하여 ICT 기반의 융합콘텐츠로 기획을 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이는 비록 대중적 관심은 낮지만 충남 아산 내에서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닌 역사인물인 ‘이지함'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고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걸인청을 소재로 한 ICT 융합콘텐츠의 다양한 활용방안제안 중 ‘토정 이지함'과 관련된 유적 및 자료를 실현가능한 문화적 차원에서 활용해보고자 할 때 ‘토정이지함 기념관'이라는 공간형 콘텐츠기획을 대표적으로 제안해보았다. 공간형 콘텐츠와 ICT를 적용한 기술에 대해서는 사실감과 실제감을 부여하고 대중들에게 몰입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증강현실 콘텐츠를 구현해보는 것을 제안하였다. 관람객들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을 통해 걸인청 재현 공간을 비추면, 화면을 통해 실제 걸인청을 배경으로 하여 여러 영상 및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비콘(beacon) 기술적용과 뉴미디어 활용방안으로 미디어파사드(Media façade) 기술을 적용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구현을 제안 하였다. 디지털콘텐츠 활용방안으로는 ‘토정 이지함'의 업적과 ‘걸인청'에 대한 역사자원을 디지털 미디어로 재생하기 위한 사이버 기념관 구축과 다양한 포맷의 에듀테인먼트 콘텐츠 제작 및 디지털 교육콘텐츠 제작 등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안해보았다. The planning of cultural contents for local historical and cultural resources needs to be based on the cultural consumption direction of the public and the continuous brand acquisition of cultural contents. In this regard, multi-sensory convergence contents planning is being done using 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and it has been produced from the viewpoint of maximizing the utilization and ripple effects in various spaces in consideration of the specificity of the area. Lee Ji-Ham(李之菡) was the author of Tojeongbigyeol(土亭秘訣) and was mainly dealing with the economic reform theory and the Geolincheong, which was known to have been established by him,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 of the welfare. In this paper, the historical person named 'Tojeong(土亭) Lee Ji-Ham(李之菡)' and 'Geolincheong(乞人廳)', Which is one of his many accomplishments, is focused on building a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nt for the public's cultural consumption and awareness, without focusing on historical confirmation and interpretation and we propose a convergence content using ICT technology. It is aimed at create cultural contents to understand and attract the public to the 'Lee Ji-Ham', a historical person with social and cultural values, in Asan, Chungnam, although the public interest is low. For this reason, one of the various proposals of ICT convergence contents using Geolincheong, we tried to utilize the relics and data related to Lee Ji-Ham in a feasible cultural dimension. Therefore, we proposed a space type contents called 'Tojeong Lee Ji-Ham's Memorial Hall'. In this regard, ICT application technology is suggested to realize realistic feeling by using augmented reality contents and maximize immersion effect to the public. Visitors will be able to see the space reproduced by Geolincheong through a smart phone or a tablet PC, and receive various images and information on the screen in the background of the actual Geolincheong. We also proposed to implement contents using beacon technology and media façade. In addition, Lee Ji-Ham's achievements and the historical resources of Geolincheong were implemented through digital technology and suggested ways of utilizing digital contents to play with digital media. To this end, we have proposed the construction of cyber memorial hall and the production of edutainment contents in various formats as practical ways.

      • KCI등재

        학교라는 장치와 웃음의 역학

        황지영(Hwang, Ji-Young) 한국현대소설학회 2017 현대소설연구 Vol.0 No.66

        본고는 염상섭이 1930년에 발표한 「지선생(池先生)」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식민지 조선의 학교 안에서 규율에 대한 복종과 저항을 동시에 실현하는 지선생의 모습을 살필 것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학생들이 만세 운동을 벌이고, 학교에서 조선인 교사들이 점차 퇴출되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지선생은 교실 바닥에 침을 뱉고, 수업 시간에 술을 마신 후 졸기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학교에 마지막 남은 조선인 선생인 그를 애정과 연민을 갖고 대한다. 매일 학교에 가장 먼저 출근할 만큼 성실하지만 학교 안에서는 규율에 벗어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지선생은 독자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학교의 규율에 균열을 내는 기능도 담당한다. 무기력해 보이는 지선생의 기이한 행동들이 근대식 학교, 더 나아가 식민지 제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촉매제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그 행동들에서 파생되는 웃음 때문이다. 그 웃음은 소설 속의 학생들에게뿐 아니라 이 소설의 독자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저항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This paper analyzes 「Ji Seonsaeng」 by Yeom Sang-Seop published in 1930 and examines regulations for Joseon students by school and Ji Seonsaeng who observes the rules and at the same time escapes from them. This work is against a background of the period when students were conducting the independence movements and Joseon teachers were gradually being kicked out from school. In such a period, Ji Seonsaeng spits on the floor of the classroom, dozing during class habitually after drinking. Nonetheless, students express affection for and sympathy with Ji Seonsaeng, a last Joseon teacher who was left at school. Ji Seonsaeng, sincere enough to go to work before anyone else but deviant from regulations at school, also functions both evoking a laugh and destroying regulations. The reason why Ji Seonsaeng, seemingly inactive may have significance is that laughter derived from such an image has a possibility of resistance and solidarity.

      • KCI등재

        聽蟬 李志定(1588-1650)의 書藝

        柳志福(Yu, Ji-bok) 한국서예학회 2007 서예학연구 Vol.10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이 논문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聽蟬 李志定(1588-1650)의 생애와 그의 서풍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지정은 자가 靜吾, 호가 聽蟬이다. 아버지 李尙毅와 어머니 尹晛의 딸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616년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義禁府都事를 초임으로 여러 內職을 거쳤으나, 仁祖反正(1623) 이후로 대북세력이 정권에서 축출됨에 따라 주로 외직을 전전하며 安山․永興 등 7곳의 수령을 지냈다. 그는 어려서는 형제들, 그리고 眉叟 許穆(1595-1682)과 함께 蔥山 鄭彦訥(1545-1612)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大東書法≫을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는 만년에 사위 李烓(1603-1642)의 죄에 연좌되어 1642년(인조 20) 成川府使직에서 파직당한 뒤 知己 李敏求(1589-1670)의 유배지인 충남 牙山에 인접한 鷄頭里라는 곳에 거처하며 이민구와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또한 西湖 가운데 조그만 정자를 짓고 그 편액을 ‘聽蟬'이라 하였으며, 이를 자호로 삼아 翰墨으로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이지정은 17세기 전반에 글씨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그는 여러 서체 가운데 유독 초서를 좋아했으며, 현전하는 필적도 대부분 초서이다. 그는 明 張弼(1425-1487)을 수용한 孤山 黃耆老(1521-1725이후)의 초서풍을 사숙하여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황기로의 서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황기로의 글씨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극대화시킨 서예가이다. 그의 글씨는 황기로에 비해 필획의 肥瘦의 변화가 두드러지며, 減筆法으로 쓴 간결하고 굳센 필획이 큰 특징을 이룬다. 그의 서풍은 종질인 梅山 李夏鎭(1628-1682), 이하진의 아들 李漵․李瀷 형제, 손녀사위 李命殷(1620-1685) 등에게 이어졌다. 이지정의 글씨는 이들 후손들에 의해 가전되며 새로운 양상을 띠며 변모해갔으며, 李漵에게 서법을 전수받은 南夏行(1697-1781)에 이르러서는 이지정의 서풍뿐만 아니라 전대 초서 명가들의 서풍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지정은 16세기에 형성되었던 황기로의 초서풍을 조선 후기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개성적인 필치가 강한 조선 중기의 초서풍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보다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지정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그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어렵고, 필적 역시 적은 수가 남아있어 그의 글씨를 폭넓게 조망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 life and calligraphic style of Cheongseon Yi Ji-jeong (李志定, 1588-1650), who was active in the early 17C. Yi Ji-jeong's second name is Jeongo (靜吾) and pen name is Cheongseon (聽蟬). He was born as the fourth son of his father (Yi Sang-eui) and mother (daughter of Yun Hyeon). He passed special state examination in 1616 and has consecutively filled many central government office stating with Uigeumbu Dosa, his first appointment. However, he was expelled from central power along with the northward regime after Injo Revolution then had changed several local posts, including Ansan and Yeongheung, as governor. It is said that he had studied under Jeong Eonnul (1545-1612)'s instruction along with his brothers and Heo Mok (1595-1682) in his childhood. He was known to have written Daedongseobeop, but with no written record for that fact. After he was involved in the crime of son-in-law Yi Gye (1603-1642) and dismissed from the post of Seongcheon district governor in 1642(Injo 20), he had changed close incherchange with his appreciative friend Yi Min-gu (李敏求, 1589-1670) at Gyedu-ri near Asan, Chungnam Province, or his place of exile. Also, he set a small pavilion at the middle of Seoho (西湖) and named it Cheongseon, then enjoyed his remaining years with the same pen name and Calligraphy. Yi Ji-jeong is a prominent calligrapher in the early 17th Century. He showed favoritism for cursive script, as most of his calligraphic specimen are cursive script. He had emulated Hwang Gi-ro (黃耆老, 1521-after 1575)'s cursive script who admired Zhang Bi (1425-1487) of Ming dynasty, establishing his own fame. He had maximized the characteristics of Hwang's calligraphic style after the most earnest study of his works. His calligraphy has more versatile changes in storke width, also has a unique characteristic of concise and strong stroke written by omission stroke. His calligraphic style was handed down to his nephew Yi Ha-jin (1628-1682), his sons Yi Seo․Yi Ik, grandson-in-law Yi Myeong-eun (1620-1685) and so on. His calligraphic style had changed with new aspects, at his descendants' hands. Nam Ha-haeng (1697-1781), who was inherited from Yi Seo, showed at last a combined aspect having not only Yi Ji-jeong's style but also the earlier masters in cursive script. In this respect, Yi Ji-jeong did a bridge role to deliver 16C's Hwang Gi-ro's cursive script to the late Joseon and had a significant effect on that the subjective cursive script of the mid-Joseon could be diversified in the late Joseon. Because his collection of works do not exist currently, his life cannot be examined with comprehensive manner. The number of his calligraphic specimen is unsatisfactory for extensive study. More materials are being expected for further in-depth study.

      • KCI등재

        가감청영탕(加減淸營湯)에 효과를 보인 열성 아토피 피부염 환자 6례 증례 보고

        서지혜,정창환,박선정,임소영,한수련,Seo,,Ji-Hye,Jung,,Chang?Hwan,Park,,Seon-Jeong,Lim,,So-Young,Han,,Su-Ryun 대한한방안이비인후피부과학회 2014 한방안이비인후피부과학회지 Vol.27 No.3

        Objective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Gagamchengyoung-tang($Ji\bar{a}ji\check{a}nq\bar{i}ngy\acute{i}ng-t\bar{a}ng$) for atopic dermatitis patients diagnosed as the febrile tendency. Method : This case study was done on 6 atopic patients with febrile tendency who have visited Korean Medicine Clinic from 2013.08.01. to 2014.04.30.. Gagamchengyoung-tang($Ji\bar{a}ji\check{a}nq\bar{i}ngy\acute{i}ng-t\bar{a}ng$) was prescribed to all 6 patients and evaluated the symptom change through photographs and questionnaire. Objective SCORAD Index(OSI) was used to evaluate the objective symptom and VAS was used to evaluate the subjective change. Results & Conclusion : The Objective SCORAD index and VAS were decreased in all patients. The average OSI reduction score was 26.3. Most symptoms of 6 patients were improved. Gagamchengyoung-tang ($Ji\bar{a}ji\check{a}nq\bar{i}ngy\acute{i}ng-t\bar{a}ng$) can be effective in patients who were diagnosed as febrile tendency.

      • KCI등재

        1964년의 조지훈과 민족문화 프로젝트

        고지혜 ( Ko Ji-hye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1 民族文化硏究 Vol.90 No.-

        이 논문은 1960년대 조지훈의 학술 활동을 조감하고 당대의 담론 지형 안에서 그 위치를 가늠해 보면서 ‘학인 조지훈'을 역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1964년에 조지훈은 단독저서 1권과 공동저서 2권을 출간하고 잡지 및 학술지에 3편의 논고를 발표 했으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학술지 『민족문화연구』를 창간하고,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 및 출간했다. 이러한 조지훈의 학술 활동은 민족이라는 주체의 삶을 이루는 ‘거의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는 작업, 이른바 ‘학(學)으로서의 민족문화'를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즉, 조지훈은 ‘민족지 구축'과 ‘민족문화사 다시 쓰기'라는 방법론을 통해 민족문화학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러한 작업의 배면에는 면면히 이어 왔어야 할 단일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1920년대생 조지훈의 학술 활동은 언제나 ‘일본' 혹은 ‘식민의 경험'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기에, 결국 조지훈이 몰두했던 것은 식민사학이 그토록 부정했던 ‘단일한 실체로서의 국가/민족'이 상정되고 작용될 수 있는 지식체계를 만드는 일이었으며, 이러한 ‘탈식민을 위한 욕망'이야말로 학인 조지훈을 추동하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지훈의 탈식민 민족문화학에 대한 구상은 식민지 조선학운동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특히 최남선의 학술적 작업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는 조지훈의 작업은 우리 민족문화(사)에 내재해 있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현시키는 학술 활동이야 말로 민족의 독자성과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는 19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인식이기도 했다. 즉, 조지훈은 민족을 주체로 하는 ‘계보의 서사'를 상상하고 창출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작업에는 보편에의 충동, 달리 말하면 한국문화사/문학사에도 형이상(사상)이 있음을 증명해내고픈 욕망이 잠재해 있다. 이는 식민과 탈식민이 교차하고, 분단과 냉전체제 안에서 치열한 담론 투쟁이 일어나던 1960년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며,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고 찾아내야 했던 (한)국학 연구자로서의 자기정립을 향한 의지이기도 했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scholar Cho Ji-hoon in terms of historical context by seeing the entire view of his academic activities in the 1960s and estimating the position within the discourse arena of that time. In 1964, Cho Ji-hoon published one single-authored book, two co-authored books, and three research papers in periodical and academic journal, issued the academic journal Korean Culture Studies as the Research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rea University, and planned and published An Outline of the Korean Civilization. His academic activities are converged into establishing the project of systemizing ‘almost all knowledge' that comprise the life of ethnic group, so-called ‘national culture as academic studies'. In other words, he tried to establish national culture studies by ‘establishing ethnography' and ‘rewriting national culture studies'. There underlain the problem consciousness that tradition and culture of a single race, which should have been passed on continuously, were not properly succeeded. Since the academic activities of Cho Ji-hoon who was born in the 1920s had no other choice but to rely on either ‘Japan' or ‘colonial experience', he focused on making a knowledge system that can introduce and apply ‘country and race as a single substance', which was totally denied by the colonial academia. Such a desire for decolonization was an impetus for him. When it came to study contents and methodology, he substantially succeeded the academic projects of the 1920s colonial era Joseonhak movement, especially Choi Nam-seon. Here underlain the thinking that academic activities succeeding and manifesting mankind's universal value inherent in the Korean ethnic culture history is the project of identifying race's identity and existence value. This was the historical awareness of the intrinsic development which began to be discussed from the late 1960s. In other words, Cho Ji-hoon aimed to conduct the work of imagining and creating ‘description of genealogy' which became the root of nation. Here underlain universality orientation―desire to prove that metaphysics exist in Korean culture and literature history. This is the spirit of the 1960s when colonization and decolonization combined and fierce discourse struggle took place in division and the Cold War and the will toward establishing oneself by researchers of Korean Studies who had to explore and discover ‘Korean things'.

      • KCI등재

        〈法隆寺釋迦佛光背銘〉와 〈法隆寺三尊佛光背銘〉에 관한 一考

        이지수(Lee Ji-Soo)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8 동북아 문화연구 Vol.1 No.17

        Chookojoyumoon including 〈Horyu-ji Main Hall Seokgabulkwangbaemyung〉 and 〈Horyu-ji Samjonbulkwangbaemyeong〉 shows a trial to approach to the sentences of its native language successively even though its basic form is the sentences of pure Chinese. It can be seen from a proper noun such as a person's name, the name of a place, the name of occupation, and so on which are the first stage of borrowing Chinese letters to transcribe into Japanese. After the stage, there are several stages from temporarily marking an expletive like prepositions and auxiliaries with Chinese to marking the part of Jeong Hun which means reading the Chinese original usage correctly. As the stated above, marking the part of a particle in classical Chinese has been assimilated and integrated into inscribing borrowed Chinese letters in order of precedence and it has had the position of a representative in temporary sound names. The names of temporary sound appearing in Chookojoyumoon are the first period of Manyupkamyeong and they were used as the representatives of variations of Manyupkamyeong in second and third period, so it could be found the traces in later generations, Hirakana and Katakana. Horyu-ji Main Hall Seokjabulkwangbaemyeong and Horyu-ji Samjonbulkwangbaemyeong, which are debated in this article, are not greatly contrary to the structure of pure Chinese sentences compared to other Chookojoyumoon. Chinese consonants such as 「?」「於」「于」「以」「者」 been developed from the function as a particle in classical Chinese, assimilated and integrated in to the second period of Manyupkamyeong, and then settled in the language. Also, it is notably considered that Chinese consonants like 「於」「于」「以」 are sound-borrowed letters used frequently in contemporary old folk s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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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원리』의 이중 기획과 고안된 논리 ― 조지훈의 베르그손 철학 전유 양상을 중심으로

        송현지 ( Song Hyun-ji ) 현대문학이론학회 2021 現代文學理論硏究 Vol.- No.84

        이 글은 조지훈의 『시의 원리』가 해방기 시단에서 보편 시론의 역할뿐만 아니라 대항 담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기획되었음에 주목하고, 이 이중의 기획을 수행하기 위해 조지훈이 사용한 방법론을 고찰하였다. 등단 초기부터 시와 시인을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았던 조지훈은 『시의 원리』에 이르러 새로운 논리 전개 방식과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기존 사유체계를 보강한다. 먼저, 그는 시와 시인을 생명으로 설정하되 자연과학을 근거로 삼아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시론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 이는 해방기 이후 집중적으로 발간되던 문학 개론서의 글쓰기 방식을 따른 것이자 과학에 기반을 두지 않은 형이상학 시론을 신비한 것으로 치부한 비판들에 대응하기 위한 그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시 창조의 제반 조건들을 실증적으로 이론화하면서도 그는 정신이 작용하는 시의 창조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념적인 서술로 일관하며 과학의 일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의 고유한 영역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물질과 정신, 지성과 직관, 과학과 시를 구분한 후 생명의 표현이자 생명 그 자체인 시는 물질의 질서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성이 아닌 ‘직관'이라는 의식 작용을 통해 창조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구분하지 않는 유물론적 예술사관과 모더니즘 시관을 시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판한다. 조지훈이 『시의 원리』에서 보여준 이러한 서술 방식과 대항의 논리는 실증적 형이상학을 통해 새로운 생명 창조론을 주장함으로써 유물론과 기계론을 비판한 베르그손의 철학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다. 이는 조지훈이 1941년, 베르그손의 저서를 읽고 베르그손의 사상에서 주요 논리와 개념들을 가져와 시론의 보편성을 확보함은 물론, 해방기 시단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를 강화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글은 이를 논증함으로써 동·서양의 유기체 시론의 영향 관계에서 『시의 원리』를 살펴보는 통상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그의 유기체 시론의 고유성이 그가 베르그손의 논리와 사상을 전유하여 이 이중의 기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the point that The Principles of Poetry by Cho Ji-hoon was written to perform not only the role of universality discourse in the post-liberation poetry circle but also the role of opposition discourse and looked into his corresponding methodology. Cho Ji-hoon, who looked at poetry and poet as living organisms ever since the beginning of his literary career, strengthened his own existing poetic thinking system by using new logic development method and concept from The Principles of Poetry. First and foremost, he expressed his opinions based on biology in the process of putting life into poetry and poet. It was his strategy of responding to criticisms in the post-liberation situation of regarding metaphysical poetics not based on science in materialistic poetics and modernism poetics as something mysterious. In addition, he divided order of materials and order of life based on the facts derived from scientific phenomena and emphasized the point that poetry is situated within order of life once its spirit becomes foundation of life. This is how he stood up against materialistic poetics which asserted that poetry is reflection of materialistic life. Lastly, he planned and argued poetics confronting modernism poetics which put emphasis on intelligence by insisting that order of life in which poetry belongs form a connection with not intelligence but intuition. Such narration method and logic in The Principles of Poetry established metaphysics based on science and share a number of resonating aspects with the philosophy by Henri Bergson who criticized materialism and mechanism by arguing new life creation theory. This implies the possibility that Cho Ji-hoon strengthened the logic of confronting the post-liberation poetry circle by adopting major logic and concepts after reading the works by Bergson in the early 1940s. This study aimed to deviate from the conventional discussion arguing that the inherent features of Cho Ji-hoon's organism poetics resulted from the influencing relationship of the organism poetics of East and West and identify that his poetics was formed in the process of exclusively possessing Bergson's logic and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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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대(遼代) 선연(鮮演)에 수용된 법장(法藏)의 화엄사상

        박은영(지현),(Park, Eun-Young (Ven. Ji-Hyun)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8 佛敎學報 Vol.0 No.85

        중세 동아시아의 화엄사상은 법장에 의해 대성되고, 징관에 의해 혁신을 거듭한다. 당대(唐代)에 확립된 화엄교학은 이후 북송(北宋)에서는 법장의 화엄학이 중시되었던 반면에, 같은 시기에 요대(遼代)에서는 특히 징관의 화엄학이 중점적으로 연구된다. 따라서 요대에는 법장이 큰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요대 화엄학 저술인 선연의 『담현결택기』6권속에서 법장의 사상은 충실히 수용되고 있다. 징관의 『대소』와 『연의초』가 법장을 종지로 받들어 지어진 것이고, 『결택기』가 그것의 주석서인 점에서 볼 때, 『결택기』에는 그 자체로 법장의 사상이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결택기』에 인용된 문헌 중에는 법장의 저술인 『교의분제장』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고, 또 다른 저술인 『지귀』, 『탐현기』, 『기신론의기』도 직접 · 간접적으로 인용되었으며, 선연은 매우 빈번하게 ‘현수의 뜻'을 회통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현담』 본문의 제1장 「교장소섭(藏敎所攝)」과 제2장 「의리분제(義理分齊)」부분에서 많이 인용되었는데, 특히 일승과 삼승의 불일불이(不一不異), 동교일승 ․ 별교일승, 5교교판과 십현문 등 화엄일승원교의 의리를 밝히는 데 있어 주요쟁점들을 선연이 법장의 사상을 통해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본 논고에서는 『결택기』에 인용된 법장의 저술과 그 구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선연이 법장의 사상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고, 석성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서 선연에게 수용된 법장의 화엄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요대 화엄사상속에서 법장 화엄사상의 위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Chinese Buddhism and especially Huayan thought flourished in the Liao dynasty 遼(916-1125) and was based on Chinese translations of Buddhist literature made during the Tang dynasty 唐 (618-907). Huayan Jing Tǎnxuan Juezĕ Ji, written by Xianyǎn 鮮演(1040-1118), was one of the later annotations to the Xuant-1 玄談 from the 20 volumes of Dafang'guangfo Huayan Jing Shu 大方廣佛華嚴經疏 and the 40 volumes of Suishuyanyi Chao 隨疏演義鈔, which was widely known as a distinctive commentary on the 80 volumes of the Avataṃsaka sutra written by Qingliang Chengguan 淸涼 澄觀 (738-839). Juezĕ Ji was annotated for Xuantan 玄談 in a very clear and accurate tone, as the way in which Xianyǎn's opinions were absorbed in the writing of Chengguan did not include notes or as water permeating into any objects. We are able to see that Juezĕ Ji was annotated in Xianyǎn's own unique way, which made Chengguan's writings clear and obvious. Additionally, Juezĕ Ji frequently quoted classic literature, Fa-Tsang 法藏 (643-712) wrote and the number of quotes ranged from twos to score every fascicle. Thus, it can be said that the same way as Xianyǎn was absorbed in Chengguan's writing, the essence of the Huayan thought of Fa-Tsang was accepted by Xianyǎn from the Liao period in Juezĕ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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