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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라이벌 정치운동단체의 연합에 의한 정당건설: 민주노동당의 사례

          정영태 ( Young Tae Jung )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11 韓國 政治 硏究 Vol.20 No.2

          본 논문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사례분석을 통해서 대립과 경쟁 관계에 있던 두 개 이상의 정치사회운동단체가 하나의 정당에 합류하게 되는 배경과 요인을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 이후 서로 다른 이념, 노선,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진보적 정치·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던 민족해방계열과 민중민주계열의 양대 세력은 1997년 대선 무렵 민주노총과 함께 국민승리21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민족해방계열에 속하는 조직들이 대부분 이탈하여 경쟁 대립관계에 있는 정치운동단체의 연합으로 정당을 건설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좌절되는 듯했다. 그러나 민중민주계열의 진보정치연합과 민주노총 그리고 민족해방계열의 일부 지역조직의 인사들은 1999년 초부터 다시 진보정당건설 사업을 재개하여 2000년 1월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였다. 그 후 2001년 하반기부터 민주노동당이 재창당사업을 추진하면서 국민승리21로부터 이탈했던 민족해방계열의 조직들이 다시 합류하기 시작하여 2003년 11월 임시당대회가 열리는 무렵까지 민족해방 계열의 거의 모든 조직이 민주노동당에 들어왔다. 민주노동당의 회의자료, 인터넷 자료, 주요 활동가 대상 면접자료를 활용하여 라이벌 정치운동단체가 하나의 정당으로 합류하게 한 요인을 탐색한 결과, 사회주의권과 붕괴와 한국정치의 민주화 등과 같은 정치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이에 따른 양 계열의 이념과 노선의 차이 축소, 조직의 생존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의 일치, 양대 계열 조직 지도부의 전락적 선택과 성공적 협상 등이 주요 요인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조직해체의 위협에 대응하고 나아가 조직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건설에 합류하거나 유인하였으나, 여전히 남아 있던 대북관계 내지 북한에 대한 입장과 조직문화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거나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당 이후 파벌로 전환한 양대 계열 조직 간에 끊임없는 논란과 갈등의 소지를 남겨놓게 되었다. This article aims to find some factors which contributed to the merger of two rival political movement organizations-National Liberation faction and People`s Democracy faction. These two rival organizations, which had distinctive ideologies and platforms, and organizational cultures, had competed to take a hegemonic control over radical political-social movements since the late 1980s. In the late 1990s, however, they joined a new leftist party People`s Victory 21. And, then, those organizations of National Liberation faction, which left People`s Victory 21 in the middle of 1997 Presidential election, decided to return to a newly-formed left party-Democratic Labor Party-in September 2001 and continued to remain within the party. Using party documents, internet sources, and interviews with leading party activists, this paper found several factors contributing to the merger of rival organizations, for example, reduction in an ideological distance between them accompanying the collapse of communism, fear of organizations` dissolution, congruence in interest of the two factions-need for its own party from the part of National Liberation faction and need for grass-root organizations and sub-national leaders from the party of People`s Democracy faction, and successful negotiation for merger. Although successful in merging two rival organizations, both factions were constantly in conflict because they ignored or underestimated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such as attitude toward North Korea and organizational culture. They did not work together to solve or harmonize these differences seriously, and finally split into two different parties i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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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집단주의에 대한 연구동향: 일본, 대만, 서구의 연구를 중심으로

          정영태(Jung Young-Tae)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3 한국학연구 Vol.0 No.31

          호프스테드가 <문화의 영향>을 출간한 이래 집단주의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비서구사회의 문화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우리 학계에서도 인문학, 사회학, 심리학 등 학문분야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우리 사회를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일본과 대만, 심지어는 서구 내부에서도 ‘서구-개인주의 대 비서구-집단주의'의 이분법 모델이 비서구의 문화는 물론 서구의 문화조차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동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 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는 집단의 목표를 우선시하고 집단과 일체시하는 집단주의가 아니라 관계중심 집단주의 또는 관계주의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일본과 대만의 토착적인 학문을 지향하는 학자들과 서구의 집단정체성 이론가들은 방법론의 측면에서나 경험적으로나 기존의 이분법 모델에서 말하는 동아시아의 집단주의는 관계주의로 보아야 하고, 서구사회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적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종래의 이분법 모델은 개인주의-관계주의-집단주의의 삼분법 모델로 대체하는 것이 방법론에서나 경험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집단주의에 대한 재해석은 한국학의 심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Since the publication of Geert Hofstede's Consequences of Cultures (1980), collectivism has been taken as a major cultural trait of non-Western societies including East Asia. In South Korea, most researchers in many academic fields such as humanities, sociology, psychology, anthropology, business management, and so on, have taken it for granted that collectivism is one of Korea's distinctive cultural traits. This is surprising in that some researchers in Japan and Taiwan and some Western scholars, especially on social idetntification and/or social categoriazation, have for long time criticized a dichotomy of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and instead, proposed to adopt a trichotomy of individualism-relationalism-collectivism. These researchers identified East Asian culture as relationalism and relationalism is well justified methodologically and empirically. Future research will enrich Korean Study by employing the concept of rel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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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駬山廟의 건립과 변천에 대한 연구

          정영태(Jung Young Tae) 역사문화학회 2013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6 No.2

          ?山廟는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120호로 마이산에 있는데 신라 때 서다산 고려때 용출산 조선 태조때 속금산, 태종때마이산이라 명명했다. 마이산은 조선조 이전에는 국태민안과 시화년풍을 기원하는 소사(작은 제사터)로 공인될 만큼 호남의 명산이며 불교에서는구산팔해中 칠금산의 명산으로 자연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내려왔던 명산이었다. 고려말 李成桂가 전라도 남원 운봉 荒山大捷 후 귀로에 마이산 이산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 이산의 주필대이며, 순국지사 淵齋 宋秉璿과 애국지사 勉菴 崔益鉉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또한 靜齋 李錫庸이 1907년에 호남의병을 거병한 곳도 이산의 龍岩이었다. 하여 조선 태조의 유덕과 송병선 최익현의 구국정신을 길이기 위한 기념사당건립을 발의하여 이산정사와 회덕전의 창건이 결의되었다. 연제의 제자인 厚山 李道復은 1925년에 ?山精舍와 懷德殿을 건립하였고, 예성임원을 선임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와 관련하여 1929년 ??朝鮮?輿勝覽?? 진안군편의 <院祠>?山祠에는 14 名賢이 등재되어 있고, <宮殿>懷德殿에는 태조 이성계가 마이산을 두고 지은 시가 실려 있다. 이는 1929년 이전부터 ?山祠와 懷德殿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사적기록이라 할 수 있으며, 필자는 이를 근거로 1925년 이산정사와 회덕전의 낙성 때부터 향사를 지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日帝强占期에도 음성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祠宇管理도 힘들었으나 해방전까지 진안 유림들의 비폭력적 저항운동으로 회덕전이 유지 보존되었다. 해방이 되어서 1946년에 ?山靜舍를 ?山祠로 개칭되었다고 하였으나 필자는 일제강점기에도 회덕전의 개선 임원이 계속 선임된 점과 ??朝鮮?輿勝覽??의 史料에 등재된 기록으로 보아 ?山祠가 1925년에 懷德殿과 高景閣의 祠堂이 있었으니 이때부터 ?山祠라 호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1946년 이산사 중건 사업으로 永慕祠, 永光祠가 건립되어 확장되었고, 懷德殿에 檀君과 世宗大王을 추가로 배향했을 뿐만 아니라 永慕祠에 朝鮮名賢 40位를, 永光祠에는 韓末殉國先烈 34위를 배향하였다. 이후 1948년에 高宗皇帝를 懷德殿으로 추가 배향함으로써 모두 4위를 모셨다. 同年에 ?山祠는 현재 ?山廟로 개칭되었다. 이산묘는 非禮勿動과 大韓乾坤靑丘日月, 大韓光復紀念碑와 같은 역사적 현장이라 할 수 있으며, 李始榮 부통령 친필의 ?山廟 현판, 申翼熙 친필의 永慕祠 현판, 金九 친필의 永光祠 현판, 大韓光 復紀念碑, 獨立遺功者追慕塔, 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城址碑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념사적 의이와 가치가 있다.

        • KCI등재후보

          초,중등학교 교원의 정치적 자유권 제한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논거와 문제점

          정영태 ( Young Tae Jung ) 인하대학교 교육연구소 2010 교육문화연구 Vol.16 No.2

          리나라 초중등 교원은 단지 신분상의 이유만으로 정치적 기본권이 이중 삼중으로 제한받고 있다. 현행법에서는 초중등학교 교원은 같은 교육자이면서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교육한다는 이유로 대학교원과 다르게 정치적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고, 같은 공무원이면서 교육자라는 이유로 일반 공무원보다 더 엄격한 제한이 가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논거로 제시하고 있는 네 가지 이유, 즉 ``교육의 이상적이고 비권력적 속성``, ``청소년의 감수성, 모방성, 수용성이라는 특성``, ``대학교원과 초중등학교 교원의 직무 상 차이``,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과의 충돌`` 등을 경험적 논리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Korean teachers in primary and high schools suffer from the lack of political liberty just because of their status and roles. Current laws in various places stipulate that primary and high school teachers should not engage in any form of political activity - including political comments - while college teachers are allowed to do so. They also confront other restrictions in addition to those imposed on public servants. Constitutional Court has ruled those restrictive laws as constitutional up to now for a variety of reasons. The article critically reviews the reasonings of Constitutional Court.

        • KCI등재

          Antioxidant Effects of Picrasma quassioides and Chamaecyparis obtusa (S. et Z.) ENDL Extracts

          Young Tae Jung(정영태), In Seon Lee(이인선), Key Whang(황기), Mi Hee Yu(유미희) 한국생명과학회 2012 생명과학회지 Vol.22 No.3

          본 실험에서는 소태나무, 편백의 유용자원으로의 이용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소태나무 잎과 편백 목질부를 분쇄한 후 추출물을 제조하여 이들 각각의 총 폴리페놀 및 플라보노이드의 함량을 측정 후 항산화제로 널리 알려진 BHA와의 비교측정으로 항산화 활성을 검색해 보았다. 먼저 소태나무 잎, 편백나무의 메탄올 추출물에 존재하는 총 폴리페놀 및 플라보노이드 함량을 측정한 결과, 소태나무 잎 추출물의 총 폴리페놀 함량은 367.52 μg/mg, 편백나무 추출물의 총 폴리페놀 함량은 138.3 μg/mg으로 편백나무 보다는 소태나무 잎에서 높은 폴리페놀 함량을 보였다. 총 플라보노이드 함량 역시 소태나무 잎과 편백나무에서 각각 46.41 및 8.12 μg/mg으로 소태나무 잎에서 플라보노이드 함량이 높게 나타났다. 각 시료의 DPPH 소거 활성을 농도별로 측정한 결과, 10 μg/ml의 농도에서 소태나무 잎이 97%, 200 μg/ml의 농도에서 편백나무가 90%의 소거능을 보였고, BHA (5 g/ml)에서 81% 정도의 항산화능을 보였다. 또한 ABTS+?소거활성을 Trolox와 비교한 결과, ABTS+?소거활성법에서 표준물질로 사용되는 Trolox는 60 μM에서 94% 정도의 소거활성을 보였고, 소태나무 잎 추출물은 10 μg/ml에서 68%, 편백나무는 100 μg/ml에서 89% 정도의 소거활성을 보였다. FRAP 활성 측정결과 소태나무 잎에서 8.52 μmol/μg, 편백나무에서 1.77 μmol/μg 나타났으며 특히 소태나무 잎에서 높은 Fe2+ 함량을 나타내어 total polyphenol contents과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본 연구 결과들로부터 소태나무 잎은 높은 폴리페놀 함량에 기인한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In our study, we investigated the antioxidant effect of methanol extract from the leaves of Picrasma quassioides (PQ) and Chamaecyparis obtuse (S. et Z.) ENDL (CO). Total polyphenol contents of methanol extracts from PQ and CO varied from 138.3 to 367.52 μg/mg and total flavonoid contents varied from 8.12 to 46.41 μg/mg. Contents of polyphenol and flavonoid in PQ were found to be extremely high. In addition, the methanol extract of PQ had a higher antioxidant activity in both DPPH (4.79 μg/ml) and ABTS (7.21 μg/ml) compared to other plants (CO). Based on the results of the FRAP assay, PQ showed a value of 8.52 μmol/μg and CO exhibited a value of 1.77 μmol/μg. The methanol extracts from the leaves of PQ showed the highest radical-scavenging activity in various antioxidant systems.

        • KCI등재

          연구논문 : 정유재란시(丁酉再亂時)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와 만인의총(萬人義塚)

          정영태 ( Young Tae Jung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4 역사학연구 Vol.56 No.-

          남원 전투(南原戰鬪) 또는 남원성 전투(南原城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북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복남,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만 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 등은 성을 탈출하였다. 남원성 내부 간략도 당시 일본군은 정유재란을 일으켜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와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육군도 9월 17일(음력 8월 7일) 구례를 함락시키고 전북 남원성으로 총진격했다. 왜 육군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 소 요시토시, 왜 육군4군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왜 육군3군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구례에서 합류하여 일부는 수군 대장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과 연락하기 위해 남원 동북과 서남으로 진격했다. 한편 조선과 명나라는 남원성에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000명의 군대가 들어오고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부사 임현 등이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 등이 후원하러 오고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부윤 박경신은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에 주둔했다. 뒤이어 명나라 장수 모국기는 성주, 오유충은 충주, 조선군은 장수 제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지휘 아래 이덕형, 김수 등이 흥복군을 조직해 8도에서 모병하고 명군의 계획에 따라 분파했다. 경상좌수사 성윤문, 방어사 권응수는 경주에 주둔해 조령을 막기로 했다. 전투 과정 성 외곽 전투(음력 8월 12일~8월 13일)[1597년 9월 22일(음력 8월 12일) 일본군은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정찰대를 파견해 남원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했다. 9월 23일(음력 8월 13일) 일본군이 성 외곽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을 동원해 조총 사격을 가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해 이를 격퇴했다. 양호는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 설치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본격적인 전투 준비(음력 8월 14일) 9월 24일(음력 8월 14일)부터 일본군은 공성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일본군의 총공세가 임박해지자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은 전주성의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우충은 전주성 방어를 핑계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일본군의 총공세와 남원성 함락9월 25일(음력 8월 15일)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대공세를 펼쳐왔다. 남원성 동남쪽에는 높은 누각을 만들고 그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해 방어군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이, 또 다른 일대에서는 성 밖의 해자를 매꾸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조명 연합군은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밤에 일본군은 명나라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 동문을 점령하고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을 포위했다. 결국 북문을 지키던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여 자결했고 명나라군 역시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생승선 등이 전사했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만이 50기의 부하만 데리고 탈출했고, 접반사 정기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그리고 조명 연합군 4,000명과 7,000명의 남원성의 군민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전주성 무혈입성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전주성으로 진격했고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라부윤 박경신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도망갔고 결국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을 하게 된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성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임진왜란(1592)때 호남을 범하지 못하여 승전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적은 1597년 14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의 마수를 뻗쳐 조정에서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원군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민 6천여를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분투 하다가 장열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정성을 드려 제향을 모시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To 1597(the Seon dynasty 30 years) at the time Jeongyujaeran Japanese military attacked the Jeonbuk Namwonseong. The allied Forces of Joseon-Ming dynasty as well as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and country residents fought Jpanese military. But they were defeated and killed. Yiboknam commander killed himself in despair over defeat. Yiboknam, Limhyeon, Chongkiwon, Sinho who fought 58,000 Japanese navy died on the battlefield. At this time, Yang won(Ming navy) escaped from the fortress. Japanese navy also raise Jeongyujaeran. Japanese invaded and defeated the Korean Joseon navy led by Won Kyun on August 28, 1597 (lunar July 16). Japanese army fell the Gurye and advanced Namwonseong. Japanese Army Group 1 Konishi yukinaga and son-in-law at So Yoshito, Japanese Army four groups Yoshihiro Shimazu, Ukita were joined in Gurye. Some of them marched to the northeast and southwest of Namwon to contact the general of the naval forces. The Joseon and Ming 3000 soldiers led by Yang Won general came to Namwonseong. Yi chunwon, Jobangjang, Kimkyengro came to suffort. 2000 soldiers led by Jinwochoong and Park kyengsin were stationed in Namwonseong Fortress. And then, Joseon-Ming general organized Huengbok-army. According to the planning of Ming-army, they were divided. Japanese sent to a camp in the suburb of namwonseong and confirmed the defense posture. September 23 (Lunar August 13), the Japanese surrounded the castle, and spurred a musket shot. Joseon-Ming army repulsed them by Seungja Chongtong Gun and Bomb Shell. Installing bulk caltrop around castle and removing the other 4 Main stone bridge made the difficult to approach the Japanese to the castle. From Lunar August 14, Japanese started combat readiness whole heartedly by making balloon weapon and filling trench. Became imminent full-scale attack, the Ming Yang Won requested the salvation army to Jinwoocung twice, but he did not send the salvation army to defend the jeonjuseong excuse is Jinwoo charge. Ming chongbyeong-Yang Won was surrounded by the Japanese army. Japanese military launched an all-out attack on Lunar August 15. Namwonseong southeast of the tower was to create a high attention of the muskets firing their defensive military imposed from above. Another one came up the ladder. The Japanese troops broke through the west door and the south door and surrounding Joseon-army at night. Eventually a soldier guarding the north gate YiboknamㆍOheungjeongㆍJobangjangㆍKimgyeong self-determination across the fire to self-destruct by firing the explosive warehouse. Four thousand people of allied army and Seven thousand people of Namwon residents died on the battlefield. Namwonseong was captured by the advancing Japanese on Lunar August 19. They advanced on the Jinjoo Fortress and Ming-Jinwoochung and Parkkyengsin who took the reins to the Jinjoo Fortress ran away. After all, Japanese army entered in to the castle bloodlessly. Manin Cemetry is a sacred place where civil, resion, 10,000 military martyr died for one´s chastity in Namwonseong battle is buried. Every on September 26, ceremony is offered to them as a way of thanking them for a loyalty.

        •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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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담보소액대출 제도 도입을 통한 제주여성창업 활성화 방안모색

          정영태(Young-Tae Jung)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2010 젠더와 문화 Vol.3 No.2

          본 연구는 다른 지역과 달리 여성경제활동이 활발한 제주에서 산업기반이 약한 제조업 등의 기반 강화의 일환으로 여성 창업을 모색 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히 최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 도입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지역 여성창업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조사 결과 여성 경제활동 활성화를 위하여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를 도입 운영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는 여성 빈곤층, 여성 예비창업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제주지역은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여성경제활동참가율과 여성자영업자 비율을 자랑하고 있지만 현실여건은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기존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를 그대로 적용 할 경우 역시 어려움에 직면할 위험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여 제주형 마이크로크레디트 모델 개발 역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존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 도입에 있어 대상자를 제주지역 여성창업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제도 도입 및 활성화를 통한 여성의 취 · 창업 현실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This study examines the women entrepreneurs aims for strengthening strategy about weak manufacturing industry base in Jeju, Especially, based on a survey of a micro-credit institutions. The vast respondents are willing to use that when introduction micro-credit in Jeju. Moreover, household income from one family member response 69.7% and women respondents are 78.6% in there. For those reason, we expect that micro-credit institution has positive impact for the poor or pre-founder women. Jeju area has highest ratio of female labor force participation and owner-operator, but weak industrial base, low establishment success, and the real situation are very fragile. Eventually, accept the existing system of micro-credit as well if you encounter difficulties at high risk given that micro-credit model, so we have to develop the micro-credit model or find a new model for Jeju area. Finally, before adoption to the micro-credit system in Jeju, we need strengthen the strength and make up for the weakness of exsiting system and focus on women's foundation in Jeju. That bring changing reality that women's foundation or owner-operator probl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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