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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의 예학정신과 한국가정의 문화전통

          김문준 ( Kim Moon Joon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7 韓國思想과 文化 Vol.90 No.-

          17세기 한국의 예학 성과는 영호남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예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며 형성하였던 돈독한 학술 교류가 바탕이 되었다. 그 중심 인물이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예학자 김장생은 예제를 고증하고 정리하여 한국 예학의 학문적 수준을 크게 높였다. 김장생 예학의 특징은 첫째, 열린 예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우ㆍ문인들과 함께 예설을 논하였고, 이황(李滉, 1501~1570)ㆍ이황의 문인인 정구(鄭逑, 1543~1620)ㆍ장현광(張顯光, 1554∼1637),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문인인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 영남 지역 예학자의 예설을 참작하고, 정구ㆍ장현광ㆍ정경세 그리고 그들의 문인과도 예문답을 적극적으로 주고받았다. 둘째, 김장생은 인정(人情)과 합리성에 의거하여 예 형식이나 선배 학자들의 학설에 구애되지 않고 후한 인정으로 예를 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예를 행함에 인정을 중시하면서도 가정의 경제 형편에 따라 합리적으로 예행을 절제하도록 하여 인정이 과불급하게 됨을 경계했다. 한편 김장생은 예학자로서 부친 김계휘(金繼輝, 1526∼1582)와 자식 김집(金集, 1574∼1656)과의 모범적인 인격적 관계를 보여주었다. 조선 선비의 삶과 가정생활에 모범적인 가정상의 핵심은 부자자효(父慈子孝)의 모습인데, 김장생-김집 부자가 보여준 지고의 정성과 인격 관계는 ‘부자자효'의 일반인의 위계적 관계를 넘어 동반적인 ‘상장지익'(相長之益)의 관계로 표현되었다. 김장생-김집 부자는 평생 진실한 학문 태도와 수신하는 인생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부자동행(父子同行)의 관계는 문인들에게 부자가 서로 도우며 성장하는 ‘지기(知己)' 관계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김장생의 부자상은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상이 될 만하다. 이처럼 김장생의 예학은 인간의 어진 인정과 인격을 공유하는 상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고, 그러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정의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The results of ritual studies in the 17th century Joseon are based on the friendly academic exchange between the scholars in Yeongnam and Hoseo, who continuously exchanged ideas on rituals. At the center of the exchange was Kim Jangsaeng(1548-1631). He is known as the foremost figure in the study of rituals for his studies and historical research on rituals, which expanded the horizon of the study of Korean rituals. There were a few aspects of his study that set him apart from the others. The first was his openness to the ideas of others. He discussed rituals with his teachers. colleagues, and pupils, and drew ideas from the studies of other scholars in Yeongnam in this subject such as those of Yi Hwang(1501-1570) and his pupils Jeong Gu(1543-1620) and Jang Hyeongwang (1554-1637) as well as Ryu Seongryong(1542-1607) and his pupil Jeong Kyungse(1563-1633). He also frequently exchanged letters with Jeong Gu, Jang Hyeongwang, and Jeong Kyungse whenever he came up with new questions and answers regarding rituals. The second thing that set him apart from the others was his assertion that rituals must be practiced based on compassion and rationality rather than formalities or theories of his seniors. However, he also stressed that there must not be excess or deficiency of compassion in practicing rituals, as they should be carried out in a rational manner in accordance with the financial condition of the family. As a scholar of ritual, he set a great example in building a respectful relationship with his father Kim Gyehwi(1526-1582) and his son Kim Jib(1574-1656). A model family for any Joseon seonbi is one that has a benevolent father and filial son. The father and son relationship between Kim Jangsaeng and Kim Jib was something beyond that, as they their character and devotion to each other were such that they took theirs to a new level that can be defined as a human relationship of reciprocity, which is quite extraordinary especially when considering the fact that hierarchical relationship between father and son was the social norm at the time. Throughout their lives, Kim Jangsaeng his son Kim Jib kept an attitude of devotion to their studies and family, and their pursuit of mutual understanding and goal-setting was viewed as a relationship between two confidants rather than a father and son in the eyes of their peers. Kim Jangsaeng and Kim Jib can be said to have set a role model for all the fathers and sons in Korea as a benevolent father and filial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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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서원의 강학 활동

          김문준 ( Kim Moon Joon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8 한국 철학논집 Vol.0 No.58

          한국 서원의 교육 내용과 방식은 주자가 제시한 교육 내용 및 방식과 대부분 유사하지만, 학파에 따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돈암서원의 초기 원장으로 재임한 이들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김집·송준길·송시열 등이다. 돈암서원은 같은 노론계 서원이었던 화양서원·석실서원이 기호 지역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면서 서원의 위상과 강학 활동도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돈암서원 설립 초기의 학규는 전하지 않는다. 돈암서원의 운영 방식은 돈암서원 운영 전반에 관하여 17세기 후반 원장으로 재임하던 송준길에게 문의한 윤증의 서신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서신을 통해 볼 때, 돈암서원의 학규는 이이의 <은병정사학규>와 유사하였다고 추정된다. 18세기 이후 돈암서원의 역대 원장은 노론의 낙론계 학자들로서 권상하 계열보다 김창협 계열의 원장이 많았다. 돈암서원 원장은 화양서원, 석실서원의 원장이 겸임하거나 전후로 재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돈암서원에서 행한 강학 활동은 서원 설립 초기에는 김장생-송시열의 교학체계에 따라 소학→가례→심경→근사록 등 성리서를 우선하고 다음에 사서·오경을 가르쳤다. 점차 노론계 낙론 서원인 석실서원 출신의 학자들이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소학→사서→오경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성리서를 가르치는 이이의 교학체계를 시행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강학 순서는 김창협 계열의 학자들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석실서원의 강학 내용과 순서이다. 돈암서원의 입학 자격은 신분은 중시하지 않았으며, 학문과 인품을 중시했다. 서원에서 과거 공부는 허용되지 않았다. 원생들은 서원에서 거재(居齋)하면서 강학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점차 서원의 재정이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자기 집에 거가(居家)하면서 삭망에 행하는 강회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The contents and method of education of all Korean scholars are similar to the contents and method of education provided by Zhu Xi(朱熹), but they operated in a somewhat different way according to schools. Those who served as the first directors of Donam Seowon were Kim Gip(金集, 1574~1656), Song Joon-gil(宋浚吉, 1606~1672) and Song Si-yeol(宋時烈, 1607~1689), who were the writers of Kim Jang-saeng(金長生, 1548∼1631). Donam Seowon is supposed to have weakened the status of scholarship and the activities of lectures as HwaYang Seowon and Seoksil Seowon, which principals were all the Noron(老論) scholars, grew to be the center of education institution of the Noron. Donam Seowon have not preserved the school regulations. But the way of operating system of Donam Seowon can be guessed through the letter of Song Joon-gil, who was the headmaster of the late 17th century on the whole operation of Donam Seowon. From this letter, it is assumed that the school of Donam Seowon is similar to the ‘Unbyoung-Jungsa regulations' written by Lee Yi(李珥). The headmasters of Donam Seowon was the Noron scholars. And scholars of the Kim Chang-hyeop(金昌協, 1651~1708) school became headmasters more than the scholars of Kwon Sang-ha(權尙夏, 1641~1721) school. Headmasters of the Donam Seowon had served as the headmasters of HwaYang Seowon and Seoksil Seowon also. In the early days of the establishment of the Donam Seowon, the lecture activities conducted in Donam Seowon were preceded by the textbooks of Kim Jang-saeng/Song Si-yeol's teaching curriculum and neo-confucian books[i.e Sohak(小學)→Family Ritual(家禮)→Simkyong(心經)→Keunsarok(近思錄). It is assumed that the scholars of Seoksil Seowon, who was a Noron Nak-ron(洛論) scholars, gradually adopted Lee Yi's teaching curriculum[i.e, Sohak(小學)→Sasoe(四書)→Okyoung(五經)]. This lecture contents and procedure was contents and procedure of the Seoksil Seowon, established and operated by the scholars of the Kim Chang-hyeop school. Entrance qualification of Donam Seowon's did not place importance on the social status, but on scholarship and personality. The examination for a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 was not allowed. Although the principle, students had to participate in the lecture and study(講學), they were living in Seowon, while the financial and operating of the Seowon became increasingly difficult, the students were changed to participate in the conference(講會) held twice a month while studying at their h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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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학파 경세론의 도학적 경세정신

          김문준 ( Kim¸ Moon Joon )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2020 율곡학연구 Vol.43 No.-

          율곡 이이는 조선 최고의 경세가라고 할 수 있으며, 율곡학파 경세론의 특징은 도학적 경세론이다. 그런데 율곡은 중국 최고의 변법 경장가 왕안석 신법에 대해 평하기를, ‘인의(仁義)를 뒤로 하고 공리(功利)를 앞세웠다', ‘중화를 저버리고 이적으로 나아갔다'고 혹평했다. 신법 정책이 안민(安民)에 앞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우선하며, 백성들이 인심(仁心)을 양성하는 정책이 아니라 백성들이 이심(利心)을 추구하게 만드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율곡은 지속적인 변법(變法) 경장(更張)을 주장하면서 민본(民本)ㆍ안민(安民)ㆍ이민(利民)ㆍ위민(爲民) 정신에 입각하여 국정을 개혁하고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고자 했다. 율곡의 도학적 경세론의 특징은, 첫째, 왕도(王道)를 시행하여 '대동(大同)' 세상을 실현한다는 것이 최종목표이고 그 방법은 안민(安民)과 교민(敎民)을 추진하여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 주자의 경세론을 모범으로 삼아서 임금과 정치 담당자들에게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학을 바탕으로 한 덕치와 안민의 실제 성과를 도출하는 경세 태도를 요구했다. 셋째, 우국애민(憂國愛民)에 기초한 우환(憂患)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환의식은 시의(時宜)에 따른 시폐(時弊) 경장론으로 나타났다. 율곡의 경세정신은 후학들에게 전수되었다. 율곡의 도학적 경세론은 조헌과 김장생, 송시열과 송준길, 윤선거와 이유태와 유계 등 학파를 이어 도학적 경세론을 계승해 갔다. 율곡학파는 만언소 전통을 이어가면서, 임금에게 시정에 대한 장문의 건의를 올려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부역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걷기', 인정(仁政)과 덕치에 기반한 안민 정책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고 부국강병 정책을 정치의 말단의 일로 삼았다. Yulgok Lee Yi(李珥, 1536-1584) was Joseon's best Kyungjangist. The feature of the Yulgok school theory can be summarized as the theory of Neo-Confucian governance. Lee Yi commented on the new laws of Wang Anshi(王安石, 1021~1086), China's top Kyungjangist. Lee Yi harshly criticized Wang Anshi for "Leaving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behind utilitarianism(Effectiveness and consequentialism)" and "Leaving moral civilization to move on barbarism." His new law policy put priority on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富國强兵) before ‘providing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安民). Yulgok criticized, Wang Anshi's policy did not make the people cultivate humanity, just maked the people pursue selfishness. Lee Yi insisted on a continuous perversion, to reform state affairs based on the spirit of the people, tried to reform social absurdities. The characteristic of Lee Yi's theory of the theory of Neo-Confucian governance is that; First, the ultimate goal is to implement the benevolent policy to realize a "daedong" world. The method can be achieved by promoting ‘providing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and ‘teaching the people'. Second, it called on king and political officials to take a attitude that elicits the actual achievements of virtuous politics leadership(德治) and Providing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安民). Third, he had a sense of patriotism and love of the people(憂國愛民) based on the consciousness of anxiety for the people. Yhe consciousness of anxiety for the people emerged as the theory of reform according to negative effects of the times(時弊). The Yulgok' spirit of reform had been passed down to the juniors. They are Jo Hoen(趙憲; 1544-1592), Kim Jang saeng(金長生, 1548-1631), Song Si-yeol(宋時烈, 1607-1689), Song Joon Kil(宋浚吉, 1606-1672), Yoon Seon-geo(尹宣擧, 1610-1669), Lee Yu-tae(李惟泰, 1607~1684), Yu gye(俞棨, 1607-1664). Yulk school continued the tradition of Maneonso(萬言疏, an address of ten thousand letters to the king), claimed saving government expenses and loving the people, reducing forced labor service and imposing less taxes. They left the Policy for a rich country and strong army behind Providing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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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 유학과 기호 유학의 소통 사례와 지역갈등 융화 방안

          김문준 ( Kim Moon Joon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7 한국 철학논집 Vol.0 No.54

          한국사회의 동서 지역 갈등을 극복하는 지속적인 소통 노력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과거 한국 역사에 내재한 왜곡과 갈등의 역사를 수정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이러한 가운데 한국철학사상사 인식에서도 일반인들의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조선시대 한국 성리학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는 학파와 지역을 연계하여 영남학파ㆍ기호학파로 양분하고, 다시 학파와 정파를 연계하여 영남학파-남인, 기호학파-서인으로 양분하여, 이 양자를 지속적인 갈등 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왜곡된 이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동서(東西) 개념과 이와 연관한 학문 분화, 정치 갈등에 내재한 오해와 과장된 갈등 구조는 수정되어야 한다. 선조때 정치권이 동서(東西) 분당(分黨)이 되었는데, 이 때의 동서는 서울 내에서의 동서 지역을 의미하며, 영남(동)과 기호(서)가 아니다. 당시의 동서 분당과 영호남 지역인의 지역 분열은 관계없는 일이다. 사실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많은 유학자들이 학파-정파-지역을 넘어 친밀하게 교류한 사례가 많다. 조선 중기의 조식과 성운, 이황과 기대승, 이황과 이이, 노수신과 이이, 조선 후기의 정경세와 김장생, 정경세와 송준길, 조선말의 곽종석과 김복한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선비들은 서로 인격 존숭과 학문 교류에 기초한 친교가 깊었다. 이들 기호ㆍ영남 인사들의 친교 사례는 조선 선비들의 인격과 학문과 정신세계의 높은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한국 전통의 정신적 문화적 무형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앞으로 영남(경상)-경기-호남(전라)-호서(충청) 지역의 선비들의 교류와 소통 사례를 더욱 발굴 홍보하여 영호남 화합의 정신문화적 토대로 활용해야 한다. 그 구체적 활용 방안으로는 동서 유학자들의 친교와 관계된 양 지역 지자체의 기관 교류, 공동 기념행사, 양 지역 유학자들의 명가(名家) 교류, 양 지역 박물관의 동서 화합 특별전 개최, 지역 축제 공동 개최, 공동 문화 프로그램 운영, 양 지역의 서원교류 등 선현들의 교류를 홍보하고 공동 사업으로 활용해야 한다. It is as necessary as ever to make constant efforts to overcome the regional strife between the eastern and western parts of Korea and come to a mutual understanding. To achieve this, we must endeavor to correct Korean people`s distorted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of Korean philosophical thoughts. Ordinary Koreans commonly and mistakenly associate the academic circles of Korean Neo-Confucianism with certain regions by which to divide them into Giho School and Yongnam School and then go as far as associating the schools and parties and pegging them `Namin`(南人) to refer to as the followers of Yongnam School and `Seoin`(西人) as the followers of Giho School. Such false notions must be correct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political factions of Joseon were split into Yongnam and Giho, or East and West. At the time, the two cardinal directions East and West were only used to refer to the eastern and western parts of Seoul, and not Yeongnam(East) and Giho(West) of the Korean Peninsula. Therefore, the factional split at the time has nothing to do with regional cleavages. In fact, a majority of scholars representing Korean Neo-Confucianism maintained a friendly relationship regardless of the school, party, and region. Many leading scholars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namely Jo Sik(曺植)/Seong Woon(成運), Lee Hwang(李滉)/Ki DeaSeung(奇大升), Lee Hwang(李滉)/Lee Yi(李珥), Noh Susin (盧守愼)/Lee Yi, the on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Jeong Gyeong Se(鄭經世)/Kim Jang-Saeng(金長生), Jeong Gyeong Se(鄭經世)/Song Joon Gil(宋浚吉), and also those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such as Kwak JongSeok(郭鍾錫) and Kim BokHan(金福漢) deeply respected each other and had a close friendship rooted in their academic commitment. The friendship between the leaders of Giho and Yongnam is a testimony to the high level of their character, academic achievement, and intellect. More than ever, such intangible intellectual and cultural resources drawn from Korean tradition must be utilized to the fullest. From this point on, we need to further promote the friendship and mutual understanding the scholars of Yongnam(Gyeongsang-do), Gyeonggi, Honam (Jeolla-do), and Hoseo(Chungcheong-do) enjoyed, and use them as a cognitive basis for harmony between the eastern and western parts of the country . These invaluable assets can be specifically used in the promotion of exchange between the local autonomous governments of the regions where above-mentioned scholars built an amicable relationship, joint commemorative events, exchange between families of the scholars of both regions, opening of special exhibitions dedicated to the harmony between Yongnam and Giho at museums in the two regions, co-organization of local festivals, joint operation of culture programs, and relationship and exchange between the `seowons` in both regions, through which to promote the long history of exchange between the scholars of the past and utilize it in joint proj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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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의 춘추사상과 정몽주 추숭의 의의

          김문준(Kim Moon Joon) 포은학회 2016 포은학연구 Vol.1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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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의 포은 추숭은 남다른 것이었다. 송시열 이전에도 이후에도 조선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정몽주를 높이 추숭했다. 이에 조선 전기의 조정과선비들이 정몽주를 추숭해 간 과정을 살펴보고, 송시열이 정몽주를 추숭한의의를 대비하여 송시열의 남다른 정몽주 추숭의 의의를 고찰했다. 조선 초기에는 정몽주의 고려 왕실에 대한 충절(忠節)을 강조하여 추숭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조광조를 기점으로 절의(節義)보다는 이학(理學)의 측면을 더욱 강조하였다. 송시열의 정몽주 추숭은 이러한 이학에의 공을 추숭하는 단계를 한 차원 끌어 올렸다. 송시열은 정몽주의 위대함은 개인적인 절의와 충효의 측면을 넘어서 정몽주가 우리나라 습속을 중화의 습속으로 변화시켜 우리나라 문화 수준을 높인 공이 더 크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송시열은 정몽주가 주자학을 학문의 조종으로 삼아 우리나라 학문이 주자학 중심으로 형성하게 한 점이 정몽주의 독특한 공이라고 보았다. 송시열의 정몽주추숭은 충효의 절의(節義) 측면을 넘어서 정몽주가 이학(理學)을 밝혀 우리나라가 중화문화를 추구하고 양명학을 억제하며 주자학을 강화했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이이와 김장생의 학통을 이으면서도 그들의 평 가를 넘어서 춘추정신에 입각하여 정몽주가 우리나라에 ‘존주자(尊朱子)양이적(攘夷狄)'을 행한 공로가 그의 가장 중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처럼 송시열이 정몽주를 기리고 칭송하는 핵심 내용은 중화문화 지향,정학(正學: 주자학) 전수 등 우리나라 문화의 고양이라는 측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The meaning was very special for Song Si-Yeol to respect Jeong Mong-Ju. The time before and after Song Si-Yeol, Chosun dynasty had highly respected Jeong Mong-ju after the foundation of the country. However the meaning of respecting Jeong Mong-Ju was different, from the Court of Chosun in the early Chosun dynasty, lots of Sunbi(Chosun noble man) in the middle Chosun dynasty, and Song Si-Yeol in the late Chosun dynasty. In this paper, we looked into the difference of respecting Jeong Mong-Ju and studied meanings Song Si-Yeol's respectation to Jeong Mong-Ju.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e Court of Chosun respected Jeong Mong-Ju's loyalty and fidelity to Korea Royal family. In the middle Chosun dynasty, there was a turning point that Cho Kwang-jo emphasized Jeong Mong-Ju who contributed to advance of the study of Li(理) rather than his high loyalty toward Korea royal family. Song Si-Yeol raised the level of respectation to Jeong Mong-Ju. He highly evaluated Jeong Mong-Ju's contribution to the advancement of study of Li. Song, Si-Yeol evaluated Jeong Mong-Ju's greatness of enhancing Korean cultural level by changing Korean cultural into Chinese beyond his fidelity and loyalty. Especially, Song, Si-Yeol considered Jeong, Mong-Ju's exclusive contribution as the teachings of Zhu-Xi core science that Korean science developed on the basis of the teachings of Zhu-Xi. Song Si-Yeol's respectation to Jeong, Mong-Ju exposed that the aspect of strengthening the teachings of Zhu-Xi. He had developed the study of Li that Korea followed after Great civilization while repressing the teachings of Wang Yang-Ming. Song Si-Yeol evaluated contribution of conducting “to the follwoing after teachings of Zhu-xi” and “To pursuit of the great civilization & to reject the barbarianism” which based on Chun-chu spirit. The core substance of Song, Si-Yeol's praise to Jeong Mong-Ju is giving more meanings with the aspect of enhance of Korean cultural through the pursuit of the great civilization' and advancement of the teachings of Zhu-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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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지역 향교ㆍ서원 배향 명현의 선비정신과 유교문화콘텐츠

          김문준 ( Kim Moon-joon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 儒學硏究 Vol.37 No.-

          대전 유교문화자원을 콘텐츠화하고 활용하자면 유교 가치의 선양과 활용이라는 두 가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향교ㆍ서원을 활용한 유교문화콘텐츠 개발은 대전지역 향교ㆍ서원의 배향인물과 인문학적 가치를 선양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향교를 문화콘텐츠화 한다면 공자와 맹자의 정신과 이상을 현대적으로 공유하는 장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한국유학, 특히 충청ㆍ대전 지역의 유학자들은 공자의 인본정신과 맹자의 왕도정신을 학문으로 삼고 실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유교문화 콘텐츠 개발은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행복과 평화라는 인류문화의 가치를 실현하고, 현대인의 생활 증진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창출해야 한다. 대전지역 서원의 배향인물의 인문학적 가치는 우리나라 도학 발전에 업적이 크거나 애국충절로 이름난 인물들이다. 이들 대전 유학자의 생애와 학문은 한국전통 유학의 특성을 전반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한국유학은 성리학, 예학, 의리학과 체계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이후 도학의 정통주의 강화, 춘추 대의정신의 강화가 진행되었고 대전유학자들은 이러한 일을 주도했다. 서원ㆍ향교의 문화콘텐츠 개발은 인간의 삶을 향상하는 문화 본연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시민의 문화적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개발되어야 한다. 따라서 향교ㆍ서원 활용 유교문화콘텐츠 개발은 첫째, 디지털화된 정보를 넘어 아날로그 콘텐츠로의 활용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문화콘텐츠 개발은 산업화와 재화 창출을 넘어 우리들의 전반적인 삶의 질 향상이라는 공공성에 기여해야 한다. 셋째 인력풀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원ㆍ향교의 문화콘텐츠 개발은 현대적 활용성과 공공성을 우선하며, 유교의 핵심 가치를 현대인의 사고와 생활 방식으로 활용하기 위한 개발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예로서 마음수양, 인간관계개선, 리더십 등의 측면을 고려하여 콘텐츠를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 There is the necessity to consider two elements; enhancements and utilization of Confucian values to develope content(and availability) of Confucian culture resource in Daejeon. The Content of Confucian Culture developed with using Hangyo and Seowon must be designed for the direction to heighten enhancements and utilization of the humanities value of Hangyo and Seowon in Daejeon. Making the Content of Confucian Culture means to make modern programs(to create a field) to share the spirit and ideals of the Confucian and Mencius. The Confucianists in Korea, especially Chungcheong and Daejeon area, regarded the humanistic spirit of Confucian and spirit of the rule of right of Mencius as a field of study, and they were trying to realize an ideal socity of the above. Therefore, the Confucian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must be created to realize the value of human happiness and culture of peace based on human dignity, and must be contributed the needs to improve contemporary life. The noted Confucian Scholars holding sacrificial rite in Sewon in Daejeon are the Humanities big value. In other words, They leaved remarkable achievements in the development of the Confucian Philosophy(Dohak), or they were the noble men to patriotic loyalty Confucian`s life and study in Daejeon. Korean confucianism was devoted an overall study about Neo-Confucianism, Ritual(禮)-thought and theory, and Righteousness thought and theory Philosophy. Content development of Confucian Culture with Seowon and Hangyo must have a original value of culture to improve the lives of human beings and should be developed to meet citizens`s cultural needs. In conclusion, for the development of Content of Confucian Culture. Firstly, the use of an analog content should expand over the digital information and content. Secondly, the cultural content must be contributed to the publicity to improve the quality of general life over industrialization and the goods created. Thirdly, there is the emphasized necessity of efforts to organize and manage the manpower pool. The cultural content of Seowon and Hangyo should be developed to take advantage of the core value of Confucianism for making contemporary thinking and way of life better and better. such as mind-cultivating, improvement of human relationship, and leadership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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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인물성론의 인간학적 가치 -한원진과 이간을 중심으로-

          김문준 ( Kim Moon-joon ) 한국동서철학회 2017 동서철학연구 Vol.0 No.85

          첫째, 인물성동이론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성리학자는 모두 인물성 이론자들이다. 인물성 논의에 참여한 학자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며, 이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인성(사람의 본성)과 물성(사물의 본성)은 다르다는 전제에서 논의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고 우수한 존재이며 동물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보고, 인간성이 동물성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며 인간성 실현을 학문과 정치의 최종 목적으로 여겼다. 둘째, 인물성론의 양측 모두 학문 근거가 동일하다. 양측 모두이이의 `기발일도`(氣發一途) `이통기국`(理通氣局) 설을 계승했으며, 송시열의 `존중화양이적`(尊中華 攘夷賊)의 가치관과 `존주자 벽이단`(尊朱子 闢異端)의 학문관과 춘추정신을 계승했다. 인물의 본연지성은 동일하나 기질지성이 다르다고 한 이간이나, 기에 내재한 이상 본연지성부터 다르다고 한 한원진 역시 인간의 본성과 도리를 밝히고 도덕가치를 지향하려는 논의를 전개했다. 셋째, 조선 후기 인물성론의 가치는 인성과 물성에 자체에 관한 논의가 아니다. 그 가치는 인간성 내면 탐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인물성 동론이라고 칭해지는 학자도 동물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인천물`(尊人賤物)의 가치관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넷째, 18세기 인물성론의 주요 내용은 인간 마음의 미발심체, 허령지각, 이발중절 등을 논의하면서 성정을 통괄하는 마음의 주재성을 확립하는 논의로 전개되었으므로 인물성동이론이라고 칭하기 보다는 인물성론, 또는 미발심체론(未發心體論)이나 중화심론(中和心論)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Firstly, the term `Disputation about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Nature and Animal Nature` should not be used. All the scholars who participated in the `Disputation about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Nature and Animal Nature` were neo-Confucians, and they dealt with this topic based on the premise that the nature of man and the nature of things are fundamentally different. They viewed man as the most perfect and superior being in the world, and animals as imperfect and inferior beings, and worried about the degradation of human nature into animal nature. For this very reason, their ultimate goal was the realization of human nature in the realms of both academia and politics. Secondly, both sides of the dispute shared the same studies. They have all studied Yi I`s theory that `one way that ki is generating and then li is on it` and the theory that `principle is penetrating and material force is limited`. They all also shared Song Si-yeol`s values such as `Protecting the Civilization & Rejecting the Barbarianism`, and studied his views on `Respecting for Chu Tzu & rejecting the Heterodoxy` as well as his `Thought of Chuchu`. Both Lee Gan (李柬; 1677~1727), who stated that all men have the same inner nature but different emotional nature, and Han Wonjin (韓元震; 1682~1751), who argued that even the inner nature can vary by person because of the workings of ki, agreed on the importance of revealing the human nature and duty, what is right, and achieving moral values as they carried on the dispute. Thirdly, the value of the `Theory of the Sameness and Difference about the Nature of Man and Things` is not involved in the discussion about the nature of man and animals. Its value actually lies in that it showed the acme of research into the inner nature of man. Even the scholars who believed in the `Theory of the Sameness and Difference about the Nature of Man and Things` did not approve of animal nature nor did they shed their belief that `men are noble and animals are lowly`. Fourthly, the main discussions on the `Theory of the Sameness and Difference about the Nature of Man and Things` in the 18th Century Joseon Dynasty were: the unaroused mind itself (Substance of Heart-Mind), perception of emptiness (empty spiritualty and apprehensiveness), and the aim to substantiate the heart which can generalize the nature of man. For this reason, it is in my opinion that `Theory of the Sameness and Difference about the Nature of Man and Things`, `Theory of the Unaroused Mind Itself (Substance of Heart-Mind) or `Theory of Mind of Mean and Harmony` are more appropriate terms than `Disputation about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Nature and Animal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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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의 도학적 사회사상

          김문준 ( Kim Moon Joon )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2021 율곡학연구 Vol.44 No.-

          송시열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보수사상가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의 정치경제사회 정책을 살펴보면 상대적으로 전반적인 개혁을 추진한 개혁사상가였다. 송시열은 한국 정통 도학사상에 의거하여 정명사상과 왕도사상과 민본사상을 현실사회에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이론에 따른 차등적인 사회 구성과 운영, 국정과 사회 책임자들의 위민(爲民) 책무를 강조하여, 각종 악습과 폐단을 개혁하고 국가와 민생을 도모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사회의 기본 조직은 가정과 향촌사회였으며, 송시열은 혈연공동체, 지역공동체를 중시하여 가례[종법]에 입각한 가정 운영, 도덕 권장과 상호부조에 입각한 향약 시행에 노력하였고, 이이의 경장(更張) 정책을 계승하여 일반 백성의 생활을 해치는 각종 폐법을 일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송시열은 경제적으로 토지와 노비의 사유제 인정, 정치사회적으로 군-신(君-臣)ㆍ양반-노비(兩班-奴婢), 지주-전호(地主-佃戶) 등 신분차별과 상하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전답(田畓; 지주)에 세금 부과, 대동법 확대, 양반호포 부과 등 세제개혁, 노비 종모법과 서얼 출사 등 억울한 백성 감소, 실제적인 백성 구휼 시행 등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현실 방법을 추구했다. 송시열은 중세의 농업사회라는 제약안에서 사회구성원 각자의 사회적 역할과 어진 관계를 바탕으로 인정사회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애로운 부모와 화목한 일가, 효성스런 자식과 온순한 자손들이 백세를 이어가는 가정, 예의와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그리고 어질고 바른이가 정치와 교화를 담당하는 나라, 송시열은 이러한 인정사회를 지향한 조선 사림의 대표자로 평가할 수 있다. Song Si-yeol is recognized as a representative conservative thinker of the late Joseon Period. Looking at his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policies, he was a reformer who pushed for overall reform. Song Si-yeol tried to realize ‘Idea of coinciding Social title and social position'(正名), ‘Idea of the king's duty'(王道) and ‘idea of People first'(民本) in the real world in accordance with Joseon's neo-Confucian idea. As a result, he emphasized the differential social composition and operation according to Neo-Confucianism's ‘the theory of one Principle and its manifestations'(理一分殊), and emphasized the responsibilities of state and social leaders for Responsibility of Serving the people of director of State affair, reforming various bad law and bad Custom and promoting stability in the nation and people's livelihoods. Song Si-yeol focused on blood-related communities and local communities, and made efforts to operate families based on the Garye(家禮), and to implement Hyangyak(鄕約) based on moral recommendations and mutual assistance. Song Si-yeol focused on blood-related communities and local communities, and made efforts to operate families based on the family rites(宗法), and to implement Hyangyak(鄕約) based on moral recommendations and mutual assistance. In succession to Yi Yi(李珥)'s reform policy, he tried to wipe out various bad law and bad Custom. Song Si-yeol admitting discrimination and social class relationships, approved economically the private land system and the slave law, politically and socially, aristocrat(Yangban)-slave(noby), landowner-tenant, pursued the tax reform including taxing farmland, expanding ‘the Uniform Land Tax Law'(大同法), and imposing the act of Yangban paying taxes(兩班戶布), the Novi Act(act of Slave inherited one's mother), being in a government post of concubines sons. Political and economic theory of Song Si-yeol is significant in that it promoted the social role and the society of compassion within the constraints of medieval agricultural society. Song Si-yeol can be regarded as representatives of Joseon's leader toward this world, a family of a benevolent parent, a harmonious family, a family with filial son and daughter and gentle descendants, a village where polite people live, and a country where a good and upright person is in charge of politics and ed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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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실천사상

          김문준(Kim Moon-Joon) 한국인물사연구소 2007 한국인물사연구 Vol.7 No.-

          Lee Duck-Hyoung(李德馨, 1571~1639) was a senior government official of the Chosun Dynasty. He devoted himself to his homeland throughout a period characterized by the aggressive occupation of Japan. He devoted his life to rejecting Japan's unjust invasion of Korea, so-called, Imjin Hideyoshi Invasion(l592~1597) at the end of sixteenth century. Due to the invasion, the time was a perilous period to the Chosoen Dynasty. While in the service of the government during the aggressive occupation, Lee Duck-Hyoung made an diplomatic efforts and important action in Chosun government to overcome the country's crisis. He wanted to realize the peace of people in his homeland. His beliefs can be summarized as “thought for the people” and “prevention of politic party”. He suggested that the King, and the leadership, take responsibility to end the systemic incompetence to attend to the citizenry's well being. Lee Duck-Hyoung provided the 8 action plans of State to king for the political, economic, and national defence reform to help people's life and prepare war to reject external aggression. These proposals were to love the people, to increase military power. Chosun government expressed the spirit to strengthen the governance of the country through leadership reformation and a people-first policy. Understanding his suggestions leads to a fuller knowledge of political and economic tendencies of Chosun government. His thought and way of act were representative of the confucian governer of the age. At that time, Korean neo-confucians had devoted themselves to the development of the studies and spirit of Confucianism. Nevertheless, He didn't concern about that. Just he insisted on a far-reaching reformation of the nation. But these proposals were not practiced enough, and he couldn't met a glorious death because of the turbulence of this period. he was a victim of party str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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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진 대상 웰 다잉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모델링에 관한 연구

          김광환(Kim, Kwang-Hwan), 김용하(Kim, Yong-Ha), 안상윤(Ahn, Sang-Yoon), 이종형(Lee, Jong-Hyeong), 황혜정(Hwang, Hye-Jeong), 이무식(Lee, Moo-Sik), 김문준(Kim, Moon-Joon), 박아르마(Park, Arma), 심문숙(Shim, Moon-Sook), 송현동(Song, Hyeon-Dong) 한국산학기술학회 2014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Vol.15 No.10

          이 연구의 목적은 의료진의 죽음에 대한 스트레스 정도와 수용 방식을 병원 중심으로 조사하여 의료인 대상 죽음교육 프로그램 개발의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연구기간은 2014년 4월부터 동년 4월30일까지이며, 대전지역 K 대학병원 의 료진 35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분석방법은 빈도분석과 카이스퀘어 검정이며, 연속변수는 독립표본 t-검정을 실시하였다. 분석결과 죽음교육의 내용 중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것은 시간의 소중함 및 의미 있는 미래 삶 준비였으며(p<0.05), 죽음교육 필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꿔보기 위해서였다(p<0.05). 죽음교육 방법은 사례연구 문제 기반학습이었으며 (p<0.05), 죽음 목격 후 가장 큰 스트레스는 보호자의 의료진에 대한 부정적 반응(p<0.05)으로 나타났다. 이상과 같은 결과를 볼 때 의료진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죽음교육 필요성 제고는 의료진 자신은 물론 환자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 향상에도 기여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죽음에 대한 의료·인문적 시각을 동시에 포함한 본 조사는 병원 공간과 의료진 대상의 특성화된 ‘죽음 교육프로그램 개발'에 기여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status of medical staff stress and accommodating manners on the death of patients in a hospital setting for serving the basic information to develop a death education program of medical personnel from April 1 to April 30, 2014. A survey was performed on 353 medical personnel at K university hospital, located in Daejeon metropolitan city. Frequency analysis, chi-square test, and independent t-test were used to analyze the data. The results showed that ‘to understand the value of the time and preparedness of a meaningful future' were the most important perspectives on the contents of death education (p<0.05), ‘in order to change perceptions and attitudes toward death positively' was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they required death education'(p<0.05), ‘case-based teaching and problem-based learning' was the most effective way of death education (p<0.05), ‘negative or hostile response of a patient's guardian to medical personnel' was the largest stress that medical personnel confront upon witnessing a death'(p<0.05). An understanding of the death of patients by medical personnel and an awareness of the need for death education will help improve the understanding of the patient, their guardian, and medical personnel themselves. The main findings will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a specific death education program on the medical personnel in a hospital set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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