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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眞德王代 金春秋의 對唐外交와 官制整備

          金德原(Kim Deok-won)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7 新羅文化 Vol.29 No.-

          金春秋는 眞德王代 對唐外交를 전개하여 唐 太宗과 羅唐同盟을 체결하였다. 그의 외교활동은 군사적인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請兵外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당동맹을 기반으로 당과의 외교활동을 독점하며 정국을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이것은 이후 그가 즉위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춘추는 대당외교를 통해서 服章을 비롯한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당의 문물을 바탕으로 執事部를 설치하고 侍衛府를 개편하는 등의 官制整備를 실시하였다. 김춘추는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家祖尊崇과 律令制에 의한 漢化政策을 추진하여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의한 왕권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中代 武烈系를 형성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Kim, Chun Chu developed diplomacy toward Tang, and concluded an alliance of Silla and Tang with Taejong at the reign of King Jindeok. His diplomatic activity can be said to be a diplomacy for demanding military force as it was mainly targeted for military purpose. He monopolized diplomatic activity with Tang based on the alliance of Silla and Tang, and held the initiative of political situation, which played a decisive role of his acceding to the throne. Kim, Chun Chu actively accepted Tang's civilization through diplomacy toward Tang. He carried out improvement of a government system including Jipsaboo, and unified bureaucrats' uniform. After enthronement as King, Mooyeol, Kim, Chun Chu enforced a reform policy based on the Chinese assimilation policy by respect for family ancestor and statutory system. This was for constructing a ruling system focusing on royal power by new confucian political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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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國學의 설립과 그 주도세력

          金德原(Kim, Deok-won) 진단학회 2011 진단학보 Vol.- No.112

          신라의 國學은 648년에 김춘추가 對唐外交의 일환으로 唐의 국학을 참관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651년에 그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일련의 官制整備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설립되었다. 김춘추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당의 국학 체제를 모방하여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수용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신라는 국학이 설립되기 이전인 628년(진평왕 50)과 639년(선덕왕 8) 및 640년부터 당으로 자제들을 파견하여 당의 국학에 입학시켰다. 이들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眞骨貴族의 자제들이었고, 이들을 추종하였던 6두품을 비롯한 5두품과 4두품 등 약간의 頭品세력들도 포함되었다. 당의 국학에서 수학하였던 자제들은 귀국한 이후에 신라에 정계에 진출하였고, 金春秋가 對唐外交를 추진할 때에는 羅唐同盟의 체결과 宿衛의 설치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651년(진덕왕 5)에 실시한 관제정비뿐만 아니라 특히 국학을 설립할 때에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삼국통일 과정에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신라의 국학은 그 체제와 수학 과목, 그리고 입학 자격 등을 통해서 골품제와 관련하여 유기적으로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국학은 골품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Silla's Gukhak(國學) was established in a process that influential people centering around Kim, Chun-chu was implementing the improvement of official regulations in 651. with that as a moment Kim, Chun-chu(金春秋) visited Tang(唐)'s Gukhak as a part of diplomacy for Tang in 648. It was formed for the purpose of securing their supporting power by the influential people around Kim, Chun-chu imitating Tang's Classical Literature, accepting Confucian political ideology, training new talents based on that. Silla had dispatched young people to Tang had them enter Tang's Gukhak before Gukhak was established. They were sons of Jingol nobles(眞骨貴族), and dupum power such as Yukdupum(六頭品) following them was included to them. They returned home, and went into Silla's political circles, and when Kim, Chun-chu carred forward diplomacy for Tagn, and played a key role in concluding an alliance with Silla and Tang(羅唐同盟) and establishment of Sukwi(宿衛). Also in improving official regulations, and expecially, establishing Gukhak carried out in 651, they took charge of a key play, and performed important activities politically in the process of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Silla's Gukhak was organically related to Golpum System(骨品制) through its own system, teaching courses, and admission qualifications etc. Also It was a means of maintaining Golpum System, but was also operated as a way of getting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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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지역의 변천과 역사적 위상

          김덕원(Kim, Deok-won) 신라사학회 2015 新羅史學報 Vol.0 No.34

          In Pyeongtaek Region, men have resided since the Old Stone Age and currently there have been about 50 various pre-historical remains with different times. After that, the age of the Three-Han Era was established, when Pyeongtaek belonged to Mahan(馬韓). In the Three Kingdom period, the dominating powers changed in the order of Baekje→Koguryo→Silla chronically. And after Silla dominated the Han River basin, as Silla's border and Baekje's border met focusing on Anseong and Pyeongtaek, so many war broke out. At the age of the Unified Silla, it belongs to two states of Hanju(漢州) and Woongju(熊州) of nine states, from when the name of the administrative unit of Pyeongtaek, the place names, Jinwi(振威) and Paengsung(彭城) came into being. And at this time, developed Buddhism and Confucianism were introduced to Silla from China's Tang(唐) focusing on Danghangsung(黨項城). Pyeongtaek region was also influenced ideologically and culturally based on personal and material exchanges through the Asan Bay(牙山灣). Family names from Pyeongtaek grew as scholar families at the late Koryeo, since that, many family names started to emerge. Until now, family names originated from Pyeongtaek are confirmed to be about 20 including Pyeongtaek Im family(平澤林氏). Especially, Pyeongtaek Im family is a representative family having formulating a power based on the local base of Pyeongtaek region since the late Koryeo. 평택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하여 현재 선사시대 유적이 약 50여 곳에 이르며, 시기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후 발달한 철기문화를 소유한 古朝鮮系의 주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유입되면서 三韓이라는 새로운 정체세력을 형성하였는데, 당시 평택지역은 馬韓에 속하였다. 삼국시대에 평택지역은 시기적으로 백제→고구려→신라 순으로 지배세력이 변화되었다. 그리고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대체로 安城과 평택지역을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7세기 중엽에는 치열한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평택지역은 9州 중에서 漢州와 熊州 2개 주에 속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黨項城을 중심으로 唐으로부터 발달한 불교와 유교 등이 신라에 전래되었다. 평택지역 역시 아산만을 통한 인적?물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하여 사상적·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唐恩'郡이라는 지명이 주목된다. 신라말의 평택지역은 竹州의 箕萱과 原州의 梁吉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가 泰封의 弓裔의 세력권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후 高麗 太祖 王建이 923년(태조 6)에 州와 府를 설치한 이후 고려초기에는 몇 차례에 걸쳐서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이러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평택지역의 유력한 세력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말여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65호) 과 만기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을 통해서 나름의 유력한 세력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평택지역 출신의 성씨는 대체로 고려후기 또는 고려말에 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이후 여러 개의 성씨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평택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平澤林氏 등을 포함하여 약 20개 정도가 확인된다. 특히 평택임씨는 고려후기부터 평택지역의 지역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던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 호남고속철도 시설물의 3차원 정보모델의 연동성

          김덕원(Kim Deok-Won), 심창수(Shim Chang-Su), 이광명(Lee Kwang-Myong), 한석희(Han Shocky), 김용한(Kim Yong-Han) 한국철도학회 2009 한국철도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Vol.2009 No.5월

          3차원 정보모델에 기반한 건설프로세서의 혁신이 새로운 추세가 되고 있고 고속철도와 같이 시스템 엔지니어링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가장 좋은 활용 사례가 될 수 있다. 정보모델은 3차원 형상에 기반하고 다양한 구성요소가 가진 기본정보와 설계와 유지관리에 이르는 생애주기 정보를 저장하고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논문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한 구간을 대상으로 이미 제안된 철도시설물정보모델의 개념에 근거하여 3차원 정보모델을 구성하였다. 구성된 정보모델에 기반하여 2차원도면, 해석, 견적, 시뮬레이션 등의 각 솔류션으로의 연동성 확보를 위한 시범사업의 결과를 정리하였다. 콘크리트 박스 교량을 대상으로 하는 시범사업을 통해서 생산성 향상 및 3차원 모델의 재활용성을 확보하였다.

        • KCI등재

          신라 중대 초 당제의 수용과 정비

          김덕원(Kim, Deok-won)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49

          신라는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는데 17관등과 백관의 공복, 골품제도 등 상고기부터 시행되어 오던 관습과 제도, 법제 등 고유하고 전통적인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새로운 법령과 법률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는데, 특히 진흥왕대와 진평왕대에 중앙의 행정관부와 새롭게 복속한 지방민들에 대한 규정이 대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520년에 반포된 율령의 관련 조목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조문들이 증가하였다. 642년 대야성이 함락된 이후 김춘추는 왕권 강화와 지배체제의 개편을 구상하고,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추진하여 당제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당제를 수용한 시기는 648년 김춘추가 당에 파견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651년부터 정국운영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것은 당 의관과 연호를 사용하는 한화정책의 추진과 집사부의 설치를 중심으로 하는 관제정비의 실시로 나타났다. 당제의 수용은 이후 골품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는 등 신라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제의 정비는 신문왕대부터 새롭게 변화하여 성덕왕대의 활발한 대당외교와 경덕왕대의 지명과 관부 명칭의 변경으로 이어졌는데, 특히 중대의 전제왕권과 한화정책은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신라가 당제를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관부는 당 중앙 관부의 핵심인 3성6부제를 실시하지 않고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라가 당제를 수용하여 관료제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골귀족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라 중대에 당제의 정비과정은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29년 집사부가 집사성으로 바뀌고 여러 관부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던 하대에는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이후 태봉과 고려의 관제정비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Silla proclaimed Yulryeong(율령) in 520, which included its inherent and traditional contents such as 17 official ranks and official uniforms of all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Bone rank system etc. it had enforced before. Even thereafter, new laws and regulations were enacted continuously, among which regulations on central administrative departments and newly subjugated local people were drastically increased. After Daeya Castle(대야성) was fell in 642, Kim Chun-chu(김춘추) planned the strengthening of royal authority and the reorganization of ruling system and actively promoted diplomacy policy toward Tang(대당외교) and accepted Tang"s system(당제). It can be said that Silla accepted Tang system since Kim Chun-chu was dispatched to Tang in 648. He pushed the Chinese assimilation policy(한화정책) using Tang"s dress and era name starting from 651 and carried out the modification of government systems(관제정비) such as establishment of Jipsabu(집사부) etc. The acceptance of Tang system took a chance to bring about the change of Bone rank system(골품제도)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Silla society. The maintenance of Tang system was newly changed from the time of King Sinmun and connected to active diplomacy to Tang at the time of King Seongdeok and the change of names of place and official departments at the time of King Gyeongdeok, especially, the authoritarian royal power and the Chinese assimilation policy in the Middle period(중대) have a close relation each other. It is noted that though Silla accepted Tang"s system, it did not establish the key of Tang"s central official departments, the Three Ministries-Six Departments System(3성6부제), but it was operated centering on Jipsabu which had existed before. However, in the Late period(하대) when Jipsabu was changed to Jipsasung(집사성) and many official departments were newly established, it changed and had a certain effect on the modification of Taebong(태봉) and Goryeo dynasty(고려)"s government sys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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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습법과 분습법이 접영 수행 학습에 미치는 영향

          김덕원 ( Deok Won Kim ), 김용현 ( Yong Hyun Kim ), 김혜경 ( Hye Kyung Kim ), 박진훈 ( Jin Hoon Park ) 고려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2010 스포츠科學論叢 Vol.16 No.-

          본 연구의 목적은 운동학습에 있어서 연습구조의 분절화에 따라 접영 동작의 학습효과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규명하는데 두었다 피험자는 순수분습법, 점진적 분습법, 그리고 전습법 집단으로 각 10명씩 할당하여 호홉동작과 다리동작, 그리고 팔 동작을 총 6주 동안 연습하였다. 각 집단별 운동프로그램을 통해 6주간 총 12회의 강습 후, 25m 접영완주 기록과 접영 기능 평가 도구로 점수를 측정하였다. 분석 결과를 보면 순수분습법이 점진적분습법보다 접영 영법에서 수영지도의 효율성이 더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고, 전습법은 순수분습법보다 더 접영 수영지도의 효율성이 더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궁극적으로는 수영 기능에서도 상대적으로 난이도와 조직화가 낮은 경우에는 분습법이 난이도와 조직화가 높은 경우에는 전습법이 더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하면, 운동기술의 교수 현장에서 운동지도를 위한 계획의 수립은 과제의 난이도와 대상을 고려한 효과적인 연습방법에 의하여 수립되어야 하며, 운동기술의 형태와 특성에 따른 학습 효과의 차이에 대한 현장에서의 실험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how part-whore practice structure influences the learning of the butterfly stroke skill in swimming. Participants were instructed to practice a breath skill, a leg-kicking skill, and a arm-stroke skill for six weeks according to the assigned practice schedules (e.g., pure part-practice progressive part-practice, & whore-practice groups). The dependent measures include total lab time for 25 m and subjective evaluation of coordination patterns of the butterfly stroke performance. The results indicated that all groups showed improvement in the movement pattern after practice sessions. There were a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groups in the form evaluation. The pure part-practice group demonstrated superior performance to the other two groups. This finding indicates that the part practice is a more effective skill acquisition method when the difficulty and organizational relations between the parts of motor skill are relatively low. Overall, the results of current study suggest that movement practitioners need to consider the characteristics of the learners and the skills when they provide instructional assistance for skill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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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貊國의 實體와 新羅의 交涉

          김덕원(Kim, Deok-Won) 한국역사민속학회 2007 역사민속학 Vol.- No.24

          貊國의 國名은 ‘貊+國' 즉 ‘종족+정치발전 단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맥국은 ‘맥의 나라'라는 의미의 汎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맥국은 三韓의 臣智 즉 邑君과 같은 渠帥가 존재하였고, 또 邑借 즉 邑長과 같은 酋長이 존재한 정치발전 단계의 사회였다. ??三國史記??에 靺鞨로도 기록된 맥국은 강원도 春川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맥국 즉 좁은 의미의 맥국과 임진강유역의 경기도 漣川을 비롯하여 북한강유역의 경기도 楊平과 남한강유역의 충청북도 堤川 등에 존재하였던 ‘맥의 나라'라는 범칭으로서의 맥국 즉 넓은 의미의 맥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맥국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춘천은 牛首州나 首次若 또는 烏根乃라는 地名이 사용되고,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는 牛首州→首若州→朔州의 순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우수주는 牛頭州로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우두머리나 지배자가 있는 지역' 또는 ‘뿌리나 근원이 되는 지역'의 뜻이며, 맥국의 國名은 ‘牛頭城'을 治所로 존재하였던 ‘牛頭國'이었을 것이다. 맥국과 신라의 교섭관계는 비교적 일찍부터 이루어졌고, 또 백제와는 달리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신라와 교섭관계를 형성한 맥국은 ‘맥의 나라'라는 범칭으로서의 맥국 즉 넓은 의미의 맥국으로 신라와 비교적 가까운 소백산맥 인근 지역에 있었던 맥국의 정치세력이 신라와 교섭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The state name of Maekguk(貊國) was constituted with ‘Maek(貊)+Country(國)', in other words, ‘the stage of tribe+political progress', so Maekguk might have been commonly used as a term of ‘Maek's Country', which is the society in a political development step having a commander like Sinji(臣智) of Samhan(三韓), namely Eupgun(邑君) and Eupcha(邑借), Eupjang(邑長) like chief(酋長) political development step. Maekguk recorded in ??Samguksagi(三國史記)?? as Malgal(靺鞨) can be divided as that in a narrow sense of meaning, namely, that existing focusing on Chuncheon(春川) region, Gangwondo(江原道), and that in a wide sense of meaning, namely, that existing Yeoncheon(漣川), Gyeonggido(京畿道) around the Imjin River(臨津江), Yangpyeong(楊平), Gyeonggido around the Bukhan River(北漢江), and Jecheon(堤川), Chungcheongbukdo(忠淸北道) around the Namhan River(南漢江). At the time of Maekguk ruled by Goguryo(高句麗), Chuncheon was named as Usuju(牛首州), or Suchayark(首次若) or Ogeunnae(烏根乃), after incorporated into Silla(新羅), it was used in the order of Usuju(牛首州) →Suyarkju(首若州) →Sakju(朔州). Also Usuju was used as Uduju(牛頭州), which means the place with ‘a head or a ruler' or ‘to be a root or origin', the palce name of Maekguk might have been Uduguk(牛頭國) making Uduseong(牛頭城) as a governing place. Intercourse relation between Maekguk and Silla was relatively early created, which was friendly differently from Paekche(百濟). Maekguk forming an intercourse with Silla, as commonly named term ‘Maek's Country', in other words, Maekguk in a wide sense, might formulated a negotiation relation with Silla mainly centering on the political force of Maekguk located close to Silla.

        • 佛敎經典의 사상이 한국 傳統信仰에 끼친 영향

          金德原(Kim, Deok-wo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2 한국고대사탐구 Vol.12 No.-

          천신(태양)사상, 산신사상, 수신(용)사상은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숭배되어 오던 것과 불교가 발생한 이후에는 불교에 수용되면서 변화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인도 고대사회의 전통신앙과 불교와의 習合過程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원시종교인 전통신앙이 불교라는 고등종교에 의해서 수용되었지만, 불교경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전부터 신앙되었던 전통신앙의 遺俗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한국 고대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 고대사회에서도 천신(태양)사상, 산신사상, 수신(용)사상이 존재하였으며, 이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신앙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습합과정을 거치면서 상호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천신은 불교의 帝釋天으로, 산신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 안의 山神閣 등으로 나타나고, 수신 즉 農業神의 성격을 갖고 있는 용은 護法龍·護國龍으로 변화하였다. Thoughts of Heavenly God(Sun), Mountain God, Water God(Dragon) have been changed as they were accepted to what had been worshiped since pre-historic age before the rise of Buddhism and Buddhism when Buddhism came into existence. This can be said to be the combination of India's ancient traditional faith and Buddhism, and ancient religion, traditional faith was accepted to a high class religion called Buddhism, but that the traces are left at the Buddhist scripture can be said to the result of hereditary customs which have been faith before. In Korea's ancient society before Buddhism was introduced, Thoughts of Heavenly God(Sun), Mountain God, Water God(Dragon) existed, which were closely connected and become faith. However, it changed through a combination process as Buddhism was handed down. In other words, Heavenly God(Sun) changed to Sakra dev?n?m Indra(Sans). in Buddhism, Mountain God changed to mountain god tower in a temple with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and Water God(Dragon), that is a dragon as a farming god changed as that for the defense of a nation and a religion. But what matters was that traditional faith was not unilaterally accepted the process of traditional faith was combined with shaman and Buddhism, but naturalized forming a close relation in the process of compromise and co-existence. This fact can be properly said to be a universal phase common in other regions and other religions as well as Korea's ancient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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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중성의 영유권 변천과 전략적 역할

          김덕원(Kim, Deok-wo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한국고대사탐구 Vol.33 No.-

          칠중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있는 중성산 정상부에 위치하며, 삼국시대에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지역은 임진강 중류의 남쪽 강안에 위치하여 황해도 지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곳으로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칠중성의 축성 문제와 관련하여 성의 형태는 테뫼식 산성이고, 성의 구조는 복곽성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처음 축조된 것은 4세기 초기에 백제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과 임진강유역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면서 칠중성을 번갈아 차지하였으며, 나당전쟁 때에는 당군이 침공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698년 발해가 건국할 때와 신라 중대 패강진을 설치할 때에도 전략적인 요충지로써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1세기 중기 이후에 그 역할이 축소되면서 늦어도 조선 초기 이전에는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중성의 전략적인 역할은 지리적인 측면과 군사적인 측면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써 배가 없어도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도강의 최적지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교통로는 장단에서 개성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금천으로 갈 수 있는 ‘黃卵嶺路'를 새롭게 제시하였으며, 이 노선은 적성에서 평산으로 가는 최단거리의 용이한 노선이다. 적성지역은 삼국시대에 임진강유역을 방어하는 핵심지역이었다. 칠중성은 임진강을 건너 남하하는 고구려세력을 방어할 수 있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주변의 성들을 매개하는 신라의 거점성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7세기 전기에 임진강유역과 한탄강유역의 관방체계를 완성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또한 칠중성을 교두보로 삼아 예성강 이북의 서북지방을 거쳐 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Chiljung Castle(七重城) is a mountain fortress built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Jeokseong Region(積城地域) is major traffic point and strategic point located in the south riverside of the midstream of Imjin River. Chiljung Castle is presumed to have a Temoe type mountain fortress, and structure of multiple folds castle. And it was first constructed by Baekje in the early of the 4th century. Chiljung Castle was occupied by Baekje·Koguryo·Silla alternately after the 4th century and at war between Silla and Tang(唐), it was invaded by Tang's soldiers. In 698, when Balhae(渤海) was founded and Paegangjin(浿江鎭) was established in the Middle Silla, it played an important role of traffic route as strategic point. However, since the middle of the 11th century, as it role was reduced, so it is assumed to have been destroyed at lease before the early of Joseon Dynasty. The strategic role of Chiljung Castle can be divided into a geographical field and a military field. Jeokseong Region where Chiljung Castle is located, is most significantly evaluated as the best location of crossing Imjon River without a vessel as it is a traffic point. As a traffic route, ‘Hwangnanryeongro(黃卵嶺路)' was newly presented, which is an easy route. the shortest distance going to Pyeongsan(平山) where Paegangjin was set up. Chiljung Castle was the strategic point of Silla to defend Koguryo which crosses Imjin River and moves south and played a key base castle of Silla which mediates surrounding fortresses. It is most importantly assessed that Silla completed the military defense system of basin of Imjin River and that of Hantan River in the early of the 7th century. Also making Chiljung Castle as a bridgehead, it was a strategic point entering into Pyeongyang(平壤) through the north of Yeseong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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