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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栗谷碑銘」의 찬술과 개찬 논란 검토

        서정문 조선시대사학회 2008 朝鮮時代史學報 Vol.47 No.-

        Sagye(沙溪) Kim Jangsaeng(金長生) who was the best pupil of Yulgok(栗谷) composed a history of Yulgok's life. He intended to succeed and diffuse the political ideas of his master through the records. Especially, Kim thought that it was very important the politic function of a history of the deceased or an epitaph. So he asked Lee Jeongkwi(李廷龜) who was one of an influential group at that time to write Yulgok's life history and Lee Hangbok(李恒福) who was an elder statesman to compile an epitaph. Both people, Kim Jangsaeng and Lee Jeongkwi, belonged to the Seoin(西人). Which means they had the same position politically. However, Lee was not a pupil of Yulgok. So there was reflected their different situation in the life history and the other records of Yulgok written by both. To examine the rocords by both, there was the biggest difference in the description that Yulgok's criticism of Donggo(東皐) Lee Jun-gyeong(李浚慶) and his endeavors to arbitrate between Dongin(東人) and Seoin. Kim had made many efforts to expatiate on the points in comparison with Lee. Because Kim was in position to succeed to Yulgok's political belief as his best pupil, Lee gave practical consideration to the records as a high-ranking official. Baeksa(白沙) Lee Hangbok composed the epitaph of Yulgok based on Kim's records in 1615. But this was responsible for a great controversy in people comprehended Yulgok's pupils. Most of them were in Seoin poltically. The contents of the controversy were very multifarious, but it could be summarized next main topics. Above all, people demanded to express the politic position of Yulgok showed his criticism of Lee Jun-gyeong and Gyemisamchan(癸未三竄) obviously. Secondly, it was discussed that Yulgok had the different a scholastic mantle with Toegye(退溪) Lee Hwang(李滉). Finally, it could be accepted the eulogy of Yulgok in Confucian way only. That is to say, they intended to establish their own politic identity and academic orthodoxy, besides, tried to make clear them in position of Yulgok's disciples through the writing of Yulgok's epitaph. Lee Jeongkwi took the lead on one side in this controversy, the initiative on the other side was in Yulgok's disciples. The organization of Yulgok's disciples. was very various. Namely, there were Yulgok's direct pupils like Kim Jangsaeng, people like Oh Yun-gyeom(吳允謙) learned Woogye(牛溪) Seong Hon(成渾) first and related to Yulgok next, people like Jeong Yeop(鄭曄) learned Yulgok and Woogye both etc. Although its organization was various like that, this controversy never had developed into the disruption, different scholastic mantles or groups within a political party, in themselves. Instead of the disruption, that is very important that there was the collecting process of public opinion through constant compromises and mediation. This could be possible that the controversy was constituted centering around the capital. It was able to gey unified the multiplicity of controversialists based local on openness. Also became a politic characteristic of Seoin, understood softness, centering around Yulgok's disciples. It could be a background that Yulgok's disciples got unification into Seoin without any disruption of scholastic mantle in comparison with Toegye's disciples and Nammyeong(南冥)'s. 율곡 문도의 首長인 사계 金長生은 율곡의 家狀을 찬술하였다. 가장의 찬술을 통해 율곡의 정치의식을 계승하고, 그것을 확산 시키려 하였다. 김장생은 전기자료인 행장이나 비명이 가지는 정치적 기능을 주목하였다. 당시 문장가이자 행정관료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높았던 李廷龜에게 행장의 찬술을 부탁하였고, 정치원로인 李恒福에게 비명을 부탁하였다. 김장생과 이정귀는 모두 서인이다. 따라서 정치적 입장을 동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장생은 율곡에게 직접 수학한 제자였으나, 이정귀는 율곡과 학문적 연결이 없었다. 당연히 그들이 찬술한 행장과 시장에는 서로 다른 관점이 내포되어있다. 행장과 시장의 찬술태도를 살펴보면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東皐 李俊慶의 비판문제와 동서분당의 책임을 밝히는 문제에 대하여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장생에 비하여 이정귀는 이 부분의 서술에 있어 분량은 물론이고 내용도 많이 약화시켰다. 이는 둘의 입장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김장생은 율곡의 문도로서 율곡의 정치이념을 충실하게 계승하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정귀는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행정관료로서의 입장을 고려된 것이다. 김장생의 행장을 가지고 白沙 李恒福은 1615년 비명을 찬술하였다. 그런데 이 비명을 둘러싸고 율곡문도를 포함한 범서인적인 논쟁이 발생했다. 논쟁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였지만 크게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이준경의 비판이나 癸未三竄에서 나타나는 율곡 이이의 정치적 입장이 명료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李珥의 학문적 연원이 退溪 李滉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이의 학문의 형용을 非儒家的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율곡문도들은 율곡의 비명의 찬술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과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공표하려 하였던 것이다. 율곡의 행장 및 비명과 관련하여 진행된 이 논쟁의 한편은 정치 관료인 이정귀가 담당하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율곡의 문도가 있었다. 특히 율곡의 문도는 김장생과 같이 율곡에게서 직접 수학한 제자들은 물론, 우계에게서 수학하고 율곡의 문하의 출입한 吳允謙이나, 양문에서 고루 배운 鄭曄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이 학문집단이나 政派의 分岐로 귀결되지 않고, 일정한 타협과 조정을 통해서 수렴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 이는 논쟁이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지역적 개방성이 논쟁 참여자의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구실을 하였고, 그것은 곧 율곡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의 유연성으로 특징되었다. 이 때문에 퇴계문도가 서애문파와 월천문파로 분기되고, 남명문도가 내암문파와 한강문파로 분기되는 것과는 달리 일정한 문도의 분기 없이 서인으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太古普愚의 禪風에 관한 硏究

        서정문 중앙승가대학교 1994 中央增伽大學論文集 Vol.3 No.-

        본 논문은 太古普愚의 禪風에 관해서 연구한 논문이다. 논자는 지금까지의 태고에 대한 연구가 주로 法統論과 宗祖論에 집중됨에 따른 다음의 문제점을 인식하였다. 그것은 태고에 대한 관심이 법통설·종조설로 논쟁이 계속된다면 태고에 관한 이해를 태고 자체속에서 하지않고 태고의 외적인데서만 찾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논문 앞부분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태고의 禪思想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生涯부분과 禪風부분으로 나누어서 진행하였다. 태고의 생애에는 1)求道期 2)外遊期 3)敎化期로 서술했는데, 태고는 외국에 가기전에 국내에서 悟道의 체험이 있었으며, 외유기에 더 많은 견문을 넓혔고, 石屋과의 만남에서 禪旨가 契合하여 印可를 받았다. 48세에 귀국한 태고는 82세까지 34년간 많은 교화를 했으니 여기서 태고의 선풍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태고의 선풍은 1)超佛越祖의 本分禪 2)惺惺歷歷의 看話禪 3)自性彌陀의 念佛禪 4)雜華三味의 華嚴禪 5)??法敎化의 願力禪 6)報恩祐世의 同事禪으로 파악하였다. 태고의 이같은 선풍은 臨濟·石屋의 선풍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임을 論旨로 개진하였다.

      • 朝鮮中期의 三和尙 禪風

        徐廷文 중앙승가대학교 1996 中央增伽大學論文集 Vol.5 No.-

        本稿는 碧松智嚴·芙蓉靈觀·慶聖一禪의 선풍에 대하여 고찰한 논문이다. 이 三師는 淸虛堂西山의 師翁이며 嚴師이며 叔師이다. 그래서 서산은 삼사의 行蹟文을 찬술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삼사를 '三和尙'이라 칭하였다. 삼화상은 모두 祖師禪風과 公安參究를 중시하면서도 大乘敎義를 선양하였다. 이러한 삼화상의 선풍은 '崇禪揚敎'의 선풍이다. 崇禪揚敎의 선풍은 新羅下代 및 高麗初期에 수립된 '弘禪揚敎'의 선풍을 嗣承한 것이다. 弘禪揚敎의 선풍이 牧牛子知訥에 의해서 '定慧雙修·頓悟漸修'로 宣揚되었고 高麗末부터는 '扶宗樹敎·禪敎兩宗·禪敎圓融' 등으로 일컬어졌다. 이처럼 삼화상은 新羅禪門의 선풍을 傳承하였다. 삼화상의 崇禪揚敎의 선풍은 西山에 의해서 더욱 中興되었다. 서산의 '兼判禪敎·禪敎都摠攝' 등은 삼화상의 선풍을 祖承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불교를 흔히 '扶宗樹敎·禪敎兩宗·通佛敎·綜合佛敎' 등이라 말하고 있는데 사실에 있어서는 '崇禪揚敎'의 의미이다. 그리고 그 淵源은 신라선문에서부터 傳承한 것이다. 외국에서 傳受한 것도 아니고 조선시대에 비로소 성립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朝鮮後期에 이르러서는 계속된 법난에 의해서 불문의 世俗化와 함께 臨濟法統設과 捨敎入禪論이 대두하였다. 이로 인하여 '弘禪揚敎·定慧雙修·扶宗樹敎·崇禪揚敎'의 법풍이 축소되고 굴절되었으며 신라의 선풍을 傳承한 法統이 역사의 풍진 속에 매몰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조선불교의 이 같은 事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적 眞實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바람직한 한국불교 법풍을 수립하기 위하여 조속히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 朝鮮後期의 念佛觀

        서정문 중앙승가대학교 1995 中央增伽大學論文集 Vol.4 No.-

        본 논문은 朝鮮後期의 念佛觀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이다. 조선후기 염불관을 고찰하게 된 것은 淨土學의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불교에 대하여 좀더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논문을 작성함에 있어 먼저 조선불교가 처한 문화적 배경과 불교 종파의 변천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에 찬술된 詩歌文·勸讚文·批評文을 통해서 염불관의 특성을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끝으로 조선 후기의 염불관에 의해서 조선불교의 특징을 개관하였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 보이는 염불관은 ‘自性彌陀·唯心淨土·禪念一心(禪淨一致)’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禪宗의 宗旨에 의해서 형성된 염불관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불교종파가 폐합되고 불교세력이 심히 위축되면서 교종은 각자의 종지를 상실하고 선종은 순수한 가풍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기 매문이었다. 그래서 禪을 기본이념으로 하면서도 念佛·看經·誦??등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종의 의례·의식을 儀行하면서도 정토종·화엄종·神印宗 등의 교종이념에 의하여 하지 못하고 선종의 禪旨에 의해서 儀行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불교는 교종과 선종이 모두 순수성을 지키기 어려웠다. 이는 ‘禪敎兩宗’의 불교가 갖는 한계점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불교의 이 같은 한계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인지되었다.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는 일이 바로 불교의 중흥을 이루는 기반이 된다는 점을 본 논문의 논지로서 피력하였다.

      • 朝鮮初期의 禪敎觀

        徐廷文 중앙승가대학교 1997 中央增伽大學論文集 Vol.6 No.-

        본 논문은 조선초기의 선교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涵虛堂得通ㆍ梅月堂雲岑ㆍ燈谷學祖의 현존하는 글을 통해서이다. 그렇게 한 까닭은, 함허는 도력ㆍ학식ㆍ덕화 등이 당시를 대표하는 고승이었고, 설잠의 불교 관련 저술도 고찰해야 할 당위성이 요구되었으며, 학조는 조선초기에 秀菴道人信眉擴ㆍ學悅과 함께 '三和尙’으로 일컬어졌으며, 오랜 기간 왕실 불사에 참여했고 학식과 문장의 품격이 높아서 그 시대의 文士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고승이었다. 그러므로 이 분들의 저술에 대하여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세 고승의 禪敎觀'은 ‘禪敎融攝ㆍ敎禪統攝ㆍ禪敎圓融ㆍ禪敎無二ㆍ依敎入禪’등의 선교관이었다. 이런 선교관은 고승들의 찬술문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佛事儀禮文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선교관은 조선초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역대 한국불교사의 전통적 특성이 '統合性'이었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원인으로는, 한국불교가 민족의 토착신앙인 巫敎를 수용하고, 외국의 불교를 지속적으로 수용하여 한국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임을 추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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